원주민 선교의 문제들, 그리고 그 해법 (자문화 우월주의 Ethnocentrism)
한인들이 원주민들을 위하여 활동함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또 다른 문제를 생각해 보자.
사실, 위의 문장 자체에 첫 번째 문제점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을 위한다"는 자세다.
이 자세에서 발생되는 문제점은 무엇일까?
자문화 우월주의 (Ethnocentrism)...
자문화를 중심으로 타문화를 저울질하는 자세, 혹은 자신의 삶과 신앙 형태가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자세...
이거 정말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효과적이고 장기적인 사역을 위해서는 모든 사역이 쌍무적, 상호적, 협조적이어야 한다.
아무리 그들에게 없는 것을 공급할지라도 일방적인 우월감이나 교만이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그들에게서 배워야 할 것, 얻을 수 있는 것도 주는 것만큼, 혹은 그 이상 많기 때문이다.
하긴 좋은 마음을 가지고 오는 선교팀들이 어찌 감히 이런 생각을 갖겠는가.
그러나 자문화 우월주의는 깃발을 높이 들고 나타나지 않는다.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 속에 자신도 모르게 숨어있기 때문이다.
선교팀들이 선교지에서 예배-특히 찬송-를 인도하는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그들의 찬송가를 미리 학습했는가?
그들의 찬송 선호 경향성을 알고 있는가?
원주민들은 우리들의 전통(오래된) 찬송가와 비슷한 수준의 찬송들을 부르고 있다.
영어 찬송을 주로 부르지만 교회에 따라서는 나바호, 혹은 호피 등 자신의 언어로도 찬송을 부른다.
대개는 영어 찬송의 번역곡이므로 곡조는 물론 같다.
기껏 멋을 부려봐야 아주 점잖은 미국 Country Song 분위기다.
이런 사람들을 상대로 현대교회음악을 떠들어대거나 율동을 곁들인다면 그거야 말로 자문화 우월주의의 시작인 셈이다.
옛찬송, 새찬송은 좋고 나쁨의 척도는 아니다.
오히려 개인의 감성에 호소하는 새찬송들 보다는 성경말씀에 근거한 옛찬송들이 더 신학적으로, 그리고 신앙적으로 튼튼하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가수들이 혼자서나 부를 법한 찬송을 선택하여 회중이 따라오거나 말거나 인도자 자신만 멋을 부리는 행태가 한인교회 안에서도 빈번히 자행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식의 자문화 우월주의를 선교지에서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언젠가 원주민 연합집회에서 13세 가량의 소년이 특별찬송을 부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아주 온건한 칸츄리 풍이라고 볼 수 있었는데 단순한 피아노 반주에 맞춘 아주 조용하고 경건한 그 소년의 찬송은 모든 회중들을 감동시키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선교는 선교를 베푸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따로 정해진 게 아니다.
주는 자는 주면서 받는 것이며 받는 자는 받으면서 주기 때문이다.
무엇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추후 논하기로 하고...
우선은 주는 자의 겸손할 뿐 아니라 지혜로운 자세에 대한 자성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