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은경 시인의 탐미적인 시들
김영찬
꽃의 무게
- 윤은경
가는 비여,
내 마음은 너무 자주 갇힌다
진창 지나 가파른 바윗길 더듬어
여기까지 따라온 터진 얼굴,
터진
손끝도 버릴 것
그러나 무릇 무엇인가를 버리려는 자는
꼭 그만한 무게를 가슴에 쌓는 것이다
너무 이른 봄, 마른 나뭇가지에서
지난 해의 잎사귀가 팔랑 떨어진다
악착같이 희망을 움켜쥐던 약한 손아귀여
차라리, 무릎 꺾고 목 드리우니
아직 칼날 같은 날씨를 탓하며
못가의 배롱나무 천천히 늙어가고
하아 조것이!
발돋움하며 반짝 불 켜드는 동백 한 송이
누구 혹 이 꽃의 무게를 아시는지.
만남
-윤은경
오늘은 한가히 카페에 와서
웃옷 단추 풀고 신발도 벗어 놓고
정원 한구석에 이름 없이 피어난
꽃 한 송이를 만난다
어제, 바람 거센 길에서 만난
목 꺾인 쥐똥나무
풋내 독하게
아직 살 속에 남아 있는데,
오고 가는 이들
기척 없이도
가슴으로 와 박힌다
손으로 입을 가리며 수줍게 웃는
땅에 발 디뎌 아픈 것들
내일은
적막한 슬픔의 산비탈
아무렇지도 않게
숲그늘에서 늙어갈
꿩의 바람꽃을 만나리
2월
-윤 은 경
새벽 하늘을 보았다
안개인지 구름인지 박명인지 모를 희뿌연 시야 안으로
밀가루처럼 부서져 내리는
두터운 저 창문은 열려져야 한다
희미하게 보이는 잿빛 능선이 등압선 같다
휴지기 없는 인공숲을 둘러 싼, 나는 저 시간의 능선을 알았었나
거기서 한 때 빛나던 나의 나뭇잎들은 즐거웠었나
어허차 녹슨 시계를 떠메고 가는 바람소리
아직도
나무는 나무대로 풀잎은 풀잎대로
온 몸 기울여 태양 쪽으로 발돋움 하지만
너무 오래 나는 이 향일성의 배반을
기다림의 양식을 견디지 못한다
두터운 저 창문은 열려져야 한다
흙의 어둠에 맞설수록 메마르던
내 몸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윤은경 시인의 시를 대하면 늘 즐겁다. 그의 시를 읽을 때는 늘 가벼운 마음이 된다. 그의 시나 시상이 가볍다는 의미가 아니라 시가 중압감을 주지 않으므로 독자를 편하게 한다는 뜻이다. 제작년 겨울이었던가 나는 윤은경 시인을 단 한번 만난 적이 있다. 원로 시인들과 유명 시인들 틈새에서 나는 운 좋게도 윤기나는 시인, 윤 시인을 만날 수 있었다. 시인과의 처음 만남에서부터 나는 편안함을 느꼈고 그 이후 그의 시를 만날 때마다 나는 가벼운 마음이 되어 만날 수 있었다. 시인과 시는 결코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는 아직 젊은 시인이다. 사물을 새롭게 해석할 줄 아는 시인이다. 가벼운 언어로 말하고 있으나 의미의 내면은 오히려 무게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꽃의 무게>라는 제목에서 부터 시인은 이미 언어를 다룰 줄 아는 노련미를 보여주고 있으나 정작 첫행,
'가는 비여, 내 마음은 너무 자주 갇힌다' 에서 보듯이 천연덕스럽게 한 템포 늦춰서 말하는 여유를 가질 줄도 안다.
'그러나 무릇 무엇인가를 버리려는 자는/꼭 그만한 무게를 가슴에 쌓는>법. 나는 윤시인의 시가 지향하는 세계에서 향기를 느낀다. 그 향기는 서두르지 않는 겸허함 속에서 꽃을 피우는 꽃향기와도 흡사한 것이다.
아직 칼날 같은 날씨를 탓하며
못가의 배롱나무 천천히 늙어가고
하아 조것이!
발돋움하며 반짝 불 켜드는 동백 한 송이
누구 혹 이 꽃의 무게를 아시는지.
나는 윤은경 시인의 시를 여기 소개하면서 <윤은경 시인의 탐미적인 시들>이라는, 다소 이례적인 제목을 달았다. 그래도 되는 것인가. 탐미적이 아닌 시가 어디 있더란 말인가. 그러나 이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 연유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내일은
적막한 슬픔의 산비탈
아무렇지도 않게
숲그늘에서 늙어갈
꿩의 바람꽃을 만나리
*<만남> 중에서
나무는 나무대로 풀잎은 풀잎대로
온 몸 기울여 태양 쪽으로 발돋움 하지만
너무 오래 나는 이 향일성의 배반을
기다림의 양식을 견디지 못한다
두터운 저 창문은 열려져야 한다
흙의 어둠에 맞설수록 메마르던
내 몸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 <2월> 중에서
벌써 2월이 왔는가? <두터운 저 창문은 열려져야 한다>는 말에 나는 나의 창을 열어제킨다. 다시 몰아닥친 겨울 한파가 뺨을 매섭게 때린다. 그러나 오늘 아침 공원길에서 나는 칼날바람 속에 묻어나는 봄을 예감하며 싱긋 웃을 수 있었다. 추위가 제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흙의 어둠에 맞설수록 메마르던/내 몸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듯이 봄은 오고야 마는 것이다.
-풀꽃세상에서 퍼온 글입니다.
첫댓글 이 '꽃의 무게' 아시는 분, 손들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