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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의곡면 상청계동과 하청계동이었다가 1914년 부령 제111호에 따라 수원군 의왕면 청계리로 되었다. 그후 1949년 8월 15일 화성군 일왕면 청계리로, 다시 1963년 1월 1일 시흥군 의왕면 청계리로, 이어 1980년 12월 1일 의왕읍 청계리로 되었다가, 1989년 1월 1일 의왕시 청계동으로 불렀다. 청계동은 독정·상적막·옥박골·원터·장자터·점말·청계골·토골·한직골 등의 자연취락이 있다.
독정(獨亭)
토골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인동 장씨의 오랜 세거지이다. 독정의 유래는 조선시대에 이곳은 민가라고는 없고 오직 정자만이 있어 인근의 사람들이 '독정'이라 부른데서 연유하고 있다고 한다.
상직막(上直幕)
청계동 마을회관 주변에 있는 마을이다. 1972년 마을회관이 건립되면서 민가가 늘기 시작하였다. 전주 이씨 덕흥대원군과 후손중에 진산군(晋山君)이 이곳에 막을 짓고 살았으므로 '상직막(上直幕)'이라 부르고 있다.
옥박골
한직골에서 청계사 가는 초입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에 이곳에는 죄인을 가두는 옥(獄)이 있었으므로 '옥박골'이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후 옥이 철거되면서 그 주변일대를 '옥터밭'이라 부르고 있다.
원터(院址)
하우고개 밑에 있는 마을로, 성남시 운중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곳은 광주·인덕원·과천을 잇는 동양원(東陽院)이란 역이 청계동 188번지에 있었다 하여 처음에는 '역원터(驛院址)'라 했다가 일제 초부터 '원터(院址)'라 부르고 있다. 이 마을은 1880년대에 하우현 성당이 생기면서 민가가 늘기 시작하였는데, 현재의 주민 대다수가 천주교인이다. 경주김씨와 밀양박씨등이 오래전부터 세거해 왔다.
장자터
원터와 토골사이에 위치해 있다. 조선시대에 큰 부자가 살았던 곳이라 하여 '장자터'라 부르고 있다고 한다. 전주 이씨의 오랜 세거지로 이곳에 명륜보육원이 있다.
점말(店村)
상청계 동쪽 끝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 말엽에 이곳에서 그릇을 구웠다고 한다.
청계골(淸溪동)
이 마을은 조선 태조 이성계와 친분이 두터웠던 박순의 큰 아들 박소의 묘를 이곳에 쓴후 그의 후손들이 묘하에 거주하면서부터 취락이 형성된 곳이다. 그 후 전주 이씨 익양군의 넷째 아들인 단천군의 묘를 상청계능마루에 쓴후 그의 후손들이 세거하면서 마을이 더욱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청계골은 마을회관을 중심으로 마을회관에서 청계사입구에 이르는 지역을 '상청계', 마을회관에서 철도청 자매교에 이르는 지역을 '중청계', 청계 시내버스 부근(한직골)은 '하청계'라 부르고 있다.
토골(土谷)
장자터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1800년대 중엽 정부의 천주교 박해로 인해 천주교도들이 이곳에 토굴을 파고 숨어 살아 취락이 형성된 곳이다. 그후 교인들은 천주교가 공인되자 원터에다 하우현 성당을 세워 예배를 보기 시작하였다.
한직골
청계농협 맞으편 마을을 지칭하며,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의곡면 하청계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곳은 지대가 높고 사질토(沙質土)여서 '녹두밭머리'라 할 만큼 아무 곡식도 되질 않아 가물면 재앙이 온다고 하여 '한재골'이라 했는데, 지금은 '한직골'로 통칭되고 있다. 일설에는 이 마을 동쪽에 있는 산 줄기가 풍수로 보아 여인이 베를 짜는 형국이어서 마을 이름을 '환직골'이라 했다는 것이며, 또 '한직골'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일제 때 일인들이 부르던 지명이라고 한다. 음성박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다.
포일동의 유래
조선시대에는 광주군 의곡면의 포일동·포이동 및 갈산동이었다가 1914년 부령 제111호에 따라 수원군 의왕면 포일리로 되었다. 그 후 1936년 10월 1일 일왕면 포일리로 되었다가 다시 1963년 1월 1일 시흥군 의왕면 포일리로 되었다. 그후 1980년 12월 1일 의왕읍 포일리로 되었다가, 1989년 1월 1일 의왕시 포일동으로 개칭되었다. 이 마을은 청계산 및 학의리에서 흘러 내리는 하천을 끼고 취락이 형성된 곳이므로 '포일동'이라 칭하였다. 이 포일동에는 구렁골·덕장골·벌모루·샛터·성고개·세거리·양지편·임이·진터 등의 자연취락이 있다.
구렁골
양지편 동쪽에 있다. 구릉지에 자리잡은 마을이라 하여 '구렁골'이라 칭한다.
덕장골
현 서울구치소가 있는 곳으로, 조선시대 중엽 좌참찬을 역임한 채세영(蔡世英, 1490∼1563)의 큰 별장이 있었으므로 '덕장골(德莊谷)'이라 불렀다고 하며, 1986년 서울구치소 건설로 인해 폐동되었다. 폐강채씨와 동래정씨의 오랜 세거지이다.
벌모루
서울구치소 주변에 있는 마을로, 넓은 벌판 모퉁이에 있다. 학의천을 앞에 두고 취락이 형성되었다.
샛터
구렁골과 양지편 마을이 생긴 후 조선 말엽에 인근의 주민들이 새로 터를 잡고 형성된 취락이다. 덕장초등학교 뒤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성고개
벌모루와 임이 사이에 있는 마을로, 조선시대에 전란이 일어나자 군인들이 이 마을 주위에 진(陣)을 쳤는데 흡사 성(城)을 쌓은 것 같으므로 '성고개(城峴洞)'라 부르고 있다.
세거리
의왕시 포일동과 과천시 문원동 및 안양시 관양동의 3개시의 교차지점에 위치한 마을이므로 '세거리(三巨里)'라 부른다. 조선조 중엽 순흥 안씨가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곳이다.
양지편
조선조 중엽 김해 김씨가 처음으로 자리를 잡아 취락이 형성된 곳으로 마을의 지세가 남향받이로 볕이 잘 드는 땅(向陽之地)이라 하여 '양지편(陽地便)'이라 칭하고 있는데 조선 말엽에는 '양촌(陽村)'이라 불렀다. 벌모루와 청계동 한직골사이에 있는 양지편은 우리나라 국어학의 태두(泰斗)인 이희승박사가 1896년 6월 9일(음력 4월 28일)에 태어난 유서깊은 곳이기도 하다. 이 박사는 5세 때까지 이곳에서 살다가 선친(李鍾植)이 살고 있는 서울로 이사하였다.
임이
진터동쪽에 자리잡은 마을로 순흥 안씨와 나중 정씨의 오랜 세거지이다. 마을에 큰 나무(느티나무)가 두 그루있어 마치 숲을 이룬 것과 같다하여 '임이(林二)'라 칭했다. 또는 '이미'라고 부른다.
진터
조선시대에 전란이 일어나자 군인들이 진을 쳤던 곳이다. 의왕시 포일동과 안양시 관양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학의동의 유래
조선시대 영조 때(영조 35년 1759. 여지도서에 의거)에는 광주부 의곡면 이리이었으나 그후 정조13년(1789)에는 광주군 의곡면 학현동과 의일외동의 지역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 1914년 부령 제111호에 따라 병합되어 수원군 의왕면 학의리라 했다가 1936년 10월 1일 일왕면 학의리로 되었다. 그후 1949년 8월 15일 화성군 일왕면 학의리라 했다가, 1980년 12월 1일 의왕읍 학의리로 1989년 1월 1일 의왕시 학의동으로 개칭되었다.
이 마을은 학현동의 ‘학(鶴)’자와 의일외동의 ‘의(義→儀)’자를 ‘儀’자를 따서 학의리 라 했다가 의왕시 승격으로 학의동이 되었다.
학의동에는 학의1동(옛 학현동)과 학의2동(옛 의일외동)으로 나누어지는데, 학의1동은 점말·새터말·웃말·아랫말이 있으며(학현으로 통칭) 학의2동은 오린계, 속말, 북골을 ‘의일’로 부르고 있다.
북골
속말 북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북골’이라 부르고 있으며 동래 정씨가 대성을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에서는 오린계·양지편·속말 주민들과 함께 오린계 초입에 있는 산 등성이에서 해마다 음력 10월에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새텃말
이 마을은 미나리가 많이 자생하고 있어 ‘미나리골’이라 불렀다가 조선 말엽에 학현 응단말에 살던 주민들이 새로 터를 잡고 이룩한 마을이라 하여 ‘새텃말’이라 부르고 있다.
학현 북쪽에 위치해 있는 새텃말에는 전 색동회장 정인섭선생의 묘가 있고, 또 묘앞에 현제명 작곡의 「산들바람」동요비가 있다.
마을에서는 학현·점말 주민들과 함께 해마다 음력 10월 2일에 학현 웃말 서쪽 산등성이에서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속말
오린계 동쪽에 자리잡은 마을로 이곳 방앗간 일대가 예전에 숲으로 우거져 있어 ‘수풀동’이라 했는데, 일제 때 한자표기를 ‘수필동’으로 하였다. 광복후부터는 숲속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속말’이라 부르고 있으며 동쪽지역은 ‘고분재밑’이라 칭한다.
마을에서는 북골·오린계·양지편 주민들과 함께 오린계 초입에 있는 산등성이에서 해마다 음력 10월 1일에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양지편
백운호수 초입에서 내손동 능안말 입구에 걸쳐 있는 마을이다. 이곳은 남향받이라 햇볕이 잘 드는 지역이라 해서 ‘양지편’이라 칭하고 있는데, 예전에는 백운호수 제방밑에 소나무·오리나무등이 우거져 있어 이 마을을 숲 밖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숲밖에’라 했다. 1953년 백운호수가 설치되면서 이일대가 수몰되자 이곳 일대 주민들이 현재의 위치에서 살고 있다.
마을에서는 북골·오린계·양지편 주민들과 함께 오린계 초입에 있는 산등성이에서 해마다 음력 10월 1일에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오린계(오링계, 오링개
백운호수 남쪽에 있는 마을로 청송심씨가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이래 반남 박씨·광주이씨·동래 정씨등이 세거해 왔다.
이 마을은 풍수로 보아 삼좌청룡(三左靑龍)으로 둘러쌓인 마을이라 하여 오린계라 칭하고 있다.
이곳에는 조선중엽에 도승지를 역임한 박응남의 묘가 있으며 마을에서는 북골·양지편·속말 주민들과 함께 이 마을 초입에 있는 산등성이에서 해마다 음력 10월 1일에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영조 35년(1759)경 간행《여지도서》나 기타《대동지지》《남한지》등에는 현 오린계는 모두 의왕면에 소속되어 있다. 마을명은 문헌에 의하면 조선시대 말경에는 ‘의일외동’으로 확인되는데, 최근 오링계에있는 남일 박공응남 묘비(1733년에 세움)에 ‘光州治 의곡리 유원좌서면향묘자’(아! 여기 광주읍치 의곡리에 유좌묘향으로 된 동산이 있으니‘)를 새롭게 알게 되었는데 ’의곡리는 그대로 ‘의일’을 뜻하며 오린계는 ‘의’자의 고어 ‘올’이 ‘오른’〉으로 음운변화하여 결국 계곡을 의미하는 ‘계’와 합하여 ‘오린계’가 되고 발음은 ‘오링계’또는 오링개가 되며, 한편 의일은 마을 형성이 옛 숲밖에 여서, 올라오다 보면 오른쪽엔 ‘오린계’, 북쪽에 ‘북골’, 잘 보이지 않는 고분재밑속에 있는 ‘속말’로 이루어지고 옛부터 가장 잘 알려진 ‘오린계’가 ‘의곡’으로 지칭되었음은 자연스런 지명유래로 생각된다. 오린계가 오린동에서 유래됐다는 근거는 희박하고 오룡동은 거의 일반사람들이 모르는 지명이다.
점말
학현과 백운호수 사이에 위치한 마을로 말엽 이성근·김영신·장치운씨등 세사람이 마을 중앙인 박영환씨 댁 옆에서 오지그릇을 만들었다 하여 ‘점말’이라 부르고 있다.
학현
점말 동쪽에 있다. 이 마을의 유래는 이곳 응단말 동쪽에 있는 김해 김씨의 종산이 풍수로 보아 학(鶴)이 거둥하는 형국이고, 웃말 북쪽에 있는 안동김씨의 묘 역시 학의 혈이며, 웃말과새텃말 사이에 있는 고개를 ‘학고개(鶴峴)’라 칭한데 연유하고 있다. 학현은 임(林)씨가 처음으로 터를 잡은 이래 김해김씨·광산김씨·경주김씨·문화류씨등이 세거해 왔으며, 마을 남쪽지역은 ‘응단말’, 북쪽지역은 ‘웃말’, 중앙은 ‘아랫말’이라 각각 부르고 있다. 이곳에는 김정균과 김병익의 묘가 있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10월 2일에 웃말 서뽁 산등성이에서 새텃말, 점말 주민들과 함께 산신제를 지내오고 있다.
● 가는장등
학현 긴장등 동쪽에 있다. 등성이가 좁으므로 ‘가는장등’이라 부르고 있다.
● 가래골
학현 웃말 동쪽에서 약 500m 에 있다. 이 골짜기에 가래나무가 많았다 하여 ‘가래골’이라 부르고 있는데, 현재는 가래나무가 없다.
● 가마터
점말 중앙인 학의동 425번지 일대로 이곳에서 조선 말엽에 이성근씨등이 오지그릇을 구웠다고 한다.
● 가장골
오린계 굿타리골 북쪽으로 박응남(朴應男 1527~1572 동승지역임)의 묘 가장자리에 있는 골짜기이다.
● 감투바위
감투처럼 생긴 바위로 학현 호랑이골 서쪽 산 정상에 있다.
● 고분재
속말과 용인군 수지면 고기리 곡현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꼬불꼬불한 고개로 마루턱에 서낭이 있다.
● 굿타리골
박응남의 묘 밑에 있으며 오린계에 속한 골짜기이다.
● 긴장등
학현 웃말 동쪽으로 호랑이골 못 미처에 긴 산등성이가 있는데 이를 ‘긴장등’이라 부른다.
● 긴주리논
점말 제청들 안에 있는 논으로, 논이 길며 두 마지기 가량이다.
● 넓적치논
점말 제청들 안에 있는 논이다. 수답으로 두마지기 가량된다.
● 당재고개
새텃말 동쪽에 있는 고개이다. 이곳에서 학현·점말·새텃말 주민들이 당제를 지냈으므로 ‘당재고개’라 부른다.
● 동자골
점말과 새텃말 사이에 있는 골짜기로 조선시대 말엽에 어떤이가 이곳에서 동자삼을 캤다고 한다.
● 두구리고개
점말과 미나리골 사이에 있는 고개로 비포장 도로이며 일명 ‘동자골고개’라 부르기도 한다.
● 모답자리논
오린계 초입에 있다. 수답으로 토질이 좋은 논이다.
● 모선바위
학현 웃말에서 동쪽으로 약 500m지점에 있는 바위로 조선조 중엽 전란이 일어나자 학현주민들이 이 바위에 모여 있다가 적군에게 몰살당했다 하여 ‘몰살바위’라 했는데, 시대가 변함에 따라 ‘모선바위’라 불리우고 있다.
● 목내미들
목을 내민 형상을 하고 있는 들로 오린계 모답자리논 위에 있다.
● 미논
북골과 속말사이로 백운호수 끝에 있는 논이다.
● 바라산
북골과 용인군 수지면 고기리 및 성남시 운중동에 걸쳐있다. 의일주민들이 정월대보름날 달을 바라보던 산이다.
● 바라산고개
바라산에 있는 고개로 북골과 성남시 운중사이에 있다. 비포장 소로이나 조선시대에는 충청·영남·전라지방사람들이 한양을 갈 때 다니던 교통로였다.
● 방죽배미
북골가운데 있다. 문전옥답으로 300여평에 이른다.
● 배바위
오린계 양시미골 중턱에 있다. 아주 오랜 옛날 바닷물이 이곳에까지 들어왔을 때 배의 닻줄을 바위에다 매었다고 한다.
● 벌택이논
학의2동 마을회관 아래에 있다. 수답으로 2000여평 된다.
● 범박골
정말과 학현 사이로 모 도서관 뒤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곳에 범이 많았다 하여 ‘범박골’이라 부르고 있다.
● 불당골
오린계 양시미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이곳에 절이 있으므로 ‘불당골(불당골)’이라 부르고 있다.
● 사기전골
조선 말엽에 사기를 구웠던 곳으로 오링게 불당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 삼형제바위
세 개의 바위가 나란히 있어 ‘삼형제바위’라 칭하고 있는데, 학의동 주민들이 소원성취해 달라고 정성을 드리던 바위이다. 학현 모선바위에서 동쪽으로 약600m지점에 있다.
● 상산바위
점말 절골터 위에 있는 바위로 일명 ‘마귀요강할머니바위’라 부르기도 한다.
● 수장들
새텃말 서쪽에 있는 들로 물이 넘쳐흘러 들이 수장되었다 하여 ‘수장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 쉰터논
속말 동남쪽에 있으며 속말에서 토질이 제일 좋은 논이다.
● 실걸논
실 같이 작고 긴 논으로 한 마지기 가량되며 점말 제청들 안에 있다.
● 안골집터
큰 부자가 살던 터로 오린계 서쪽 약100m 지점에 있다.
● 안터논
오링계 이양논 서쪽에 있다. 천수답으로 700여평 된다.
● 양시미골
오린계 응골 옆에 있는 골짜기로 배바위가 있다.
● 양주바위
학현 장가바위에서 동쪽으로 20m쯤에 있는 바위로 두 개의 바위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 여우방골
여우의 집이 있던 골짜기로 바라산 밑에 있다.
● 오매기고개
오린계와 오전동 오매기 사이에 있는 고개로 오매기에서는 ‘의일고개’라 부른다.
● 왜미논
오린계 벌텍이논 도랑 건너에 있다. 본래 천수답이었는데 백운저수지로 옥토가 되었다.
● 응골
오린계에서 동남쪽으로 약 1㎞ 지점에 있는 산골이다. 이곳은 큰 나무가 많아 햇볕이 들지않는 골짜기이다.
● 이승골논
이슬골 안에 있는 논으로 토질이 좋으며 샘물로 농사를 짓는다.
● 이양논
오린계 왜미논 서쪽에 있다. 수답으로 토질이 좋은 논이다.
● 장가바위
학현 모선바위에 동쪽으로 약 50m지점에 있다. 학현 청년들이 먼곳에서 돌을 던져 이 바위에 얹히면 장가를 간다하여 ‘장가바위’라 부르고 있다.
● 장사바위
학현 모선바위에서 동북쪽으로 약50m 지점에 있다. 엿장사가 갔다 놓은 바위라고 하여 바위 밑에 상투자국과 머리자국이 남아있다.
● 장자부리
북골 뒤 산 모퉁이로 이곳에 큰 부자가 살았으므로 ‘장자부리’라 부르고 있다.
● 절터골
점말뒤에 있다. 이곳에 절이 있었다가 빈대 때문에 폐사되었다고 한다. 백운저수지 제방은 이 골짜기에 있던 돌을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 제청들
점말 앞에 있는 들을 말한다. 대부분의 지역이 논으로 일명 ‘안자리’라 부르기도 한다.
● 터골
학현 웃말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학현 최초의 주거지라고 한다.
● 팥죽배미
흉년이 들어 팥죽과 바꾸어 먹은 논으로 새텃말 수장들 안에 있다.
● 학고개
학현 웃말과 새텃말 사이에 있으며 ‘구리고개’라 부르기도 한다. 서낭이 있었다가 1980년 초에 포장공사를 할 때 없앴다.
● 학의교
백운저수지 제방에서 서북쪽으로 약200m지점에 있는 다리이다. 다리의 길이 24.3m, 교폭 7.1m, 1977년 12월 30일에 준공되었으며, 다리 밑으로 학의천이 흐르고 있다.
● 학의천
백운산에서 발원하여 서북쪽으로 흘러 백운저수지를 이루고, 포일동을 거쳐 안양시 평촌동에서 안양천에 합류된다.
● 함박봉
바라산 정상에 있는 봉우리로 마치 함박꽃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봉우리 북쪽은 불이 잘 나는 고개라 하여 ‘불깃재’라 부른다.
● 헌터골고개
점말과 오링게 사이를 왕래하는 고개로 비포장 도로이다. 고전소설 《전우치전》에 전우치가 다니던 고개로 유명하다.
● 헌터골논
북골 아래로 백운저수지 동북쪽에 있는 논이다. 천수답이었는데 백운저수지로 수답이 되었다.
● 호랑이골
호랑이가 득실거렸던 곳으로 학현 웃말에서 동남쪽으로 약 1㎞ 지점에 있다.
● 흔들바위
의일 부녀자들이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흔들던 바위로 북골 남쪽 약100m지점에 있다.
● 흰돌박이논
속말 쉰토논 북쪽에 있다. 논 가운데 흰돌이 있어 ‘흰돌박이논’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