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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들을 바라보는 재미의 視覺
박 윤 배 (시인)
1.
깊이 들여 다 볼수록 세상은 모호하다. 그런 모호한 세상을 노래한 시는 더 모호하다. 또한 끊임없이 변하는 속도가 느껴진다. 희미하지만 불씨 같은 시는 그런 모호함과 속도 속에 있다. 인간이 살아가며 오감으로 인지되는 모든 대상들은 무수한 의미들로 생산되거나 망각되며 앞으로 백 년 후면 시가 사라질 거라는 불길한 예언을 던지기도 하지만, 누군가 다독이는 불씨 같은 시들은 살아남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변모를 할 것이다. 이를 일러 학자들은 발전적 변신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그 변신의 중심에는 불변으로 보이나 낡아가는 것과 새로운 것의 벌어진 틈 사이를 시가 어떻게 가교 역할을 하느냐가 매우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과거 70년대 이전의 시들은 대게가 불변의 시적 대상들을 직유나 은유로 빗대어 노래해 왔다. 이를 일러 식물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시들이라고 일컫는다면 그와 유사한 동물적 상상력, 신화적 상상력 또한 불변의 대상일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그 상상의 범주에 있어 기물을 통한 상상력, 또는 우주적 상상력 심지어는 미래를 지향하는 상상력들이 시안에 끌어들여지는 등 끊임없는 시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렇듯 상상의 폭이 확대되고 과거 기억의 나열이나 기억에의 향수로만 시를 바라보고 시 쓰기에 몰두한다면 평자들 혹은 약삭빠른 독자들은 구태의연하고 재미가 없는 시리고 탓할 것이다. 반면 미래지향의 시를 쓰게 되면 못 알아먹을 시를 흥얼거린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하는가. 곰곰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없다. 있다면 세상의 어느 누구와도 닮지 않은 자신의 세계를, 생각을 그려내는 것이 답일 것이다.
시를 쓰면서 왜 시를 써야 하는지, 그 답을 찾을 수 없다고 하소연하는 시인도 있다. 그 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 중요하다. 그냥 시가 거기 있으니, 시를 쓰는 거다, 라고 답하지만 실은 자신에 보이지 않는 어떤 잠재된 의식을 거울이라는 통로로 들여다보라고 말하고 싶다. 개 같은 자신이 보였다면 왜 개 같은 자신이 거기 있는지, 늘 늪의 바닥 안쪽이 궁금했다면 왜 늪과 자신이 묘한 필연성을 갖는지, 어릴 적 나보다 먼저 떠난 누이가 있었다면 그 누이는 지금 나의 정신을 어떻게 흔드는지 조차도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존재에 대한 탐구를 통해 가장 나다운 세계의 바닥을 흔들어 보는 것이 시일 것이다. 진흙에서 연꽃을 피워 올리는 늪을 관찰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여느 연꽃과 다른 자신의 색과 형태를 지닌 시의 꽃을 피워낼 것이다.
그게 재미다. 남과 다른 정신의 표현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이며 인식의 세계를 확장시키는 시 쓰기의 업적이 될 것이다. 시의 재미, 재미있는 시와 재미없는 시를 생각하다보면 우선 재미없는 시의 경우 몇 개의 특징을 지니고 있음도 간과할 수 없다. 그 예를 들어보면 첫째는 진지하게 대상에 접근하여 남이 보지 못한 세밀한 부분을 드러내는 시가 독자들을 재미있게 한다. 둘째는 대상을 엉뚱하게 보는 경우이다. 예를 들면 수면을 다한 기차의 바퀴를 꽃으로 본다면 얼마나 엉뚱한가, 꽃의 일생, 꽃의 이동경로, 꽃이 이별에게 보낸 손짓이며 레일과 바퀴를 망치로 점검하던 역무원이 몰래 질겨놓은 오줌냄새 등을 다 기억하는 기차의 닳은 바퀴를 녹슨 꽃으로 본다면 그 엉뚱함의 재미 또한 만만치 않을 것이다. 세 번째 재미는 역설이다. 일상 대화에서 역설적인 언어를 쓴다면 거짓말쟁이로 통하겠지만 시는 그 이면에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게 바로 역설의 묘미이다. 유모 위트 등등도 다 재미를 더해주는 시 쓰기의 한 방식일 수도 있고, 심지어는 어린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도 알고 보면 재미있는 일이다.
요즘의 기발한 시는 더러 자신을 물 혹은 거미 나무 등으로 환치시켜놓고 그런 대상들이 바라보는 세계를 시로 형상화 하는 작업도 시도하고 있다. 또한 완성된 한 편의 시보다는 그런 시를 만들어가는 과정의 개념들을 드러내므로 개념 그 자체가 하나의 시인정신의 표방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이렇듯 변모되는 시들의 재미를 주기 위한 장치들을 어떻게 나의 시에서 개성적으로 드러낼까? 하는 문제는 문집을 엮는 문장줄신작가들이 고민해봐야 할 과제가 아닌가 싶다. 한 분 한 분 시들에 나타난 재미의 요소를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2.
본인에게 넘겨진 순서대로 살펴보면 우선 홍정숙의 시는 자신의 삶에 숨겨진 슬픔이나 고통을 언어로 매만지며 위로를 얻어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달, 바람, 강이라는 익숙한 시적 대상을 시 안에 데려오는 것은 중의적 표현으로 볼 수 있으나 달을 노래함에 있어 “그 환한 덩어리가/ 찰진 주먹밥이 되고 있다”로 표현하는가 하면 바람을 노래함에 있어 ”배부른 바퀴를 달았다“로 자신의 독특한 눈을 드러내기도 한다. 강을 노래함에 있어 ”멀리서 바라보던 새벽강이 / 아침 식탁이었구나/ 세월에 비껴간 허리로/ 새벽이슬 멀겋게/ 양념치는 내가 서 있다 “라고 표현된 곳에서는 강이 아침식탁으로 다시 양념치는 나로 강을 환치하는 능력의 탁월함을 보여주고 있다. 사물 본질을 꿰뚫어 새롭게 의미를 만들어내는 시인의 안목은 생활의 일상사들도 시의 눈으로 들여다보기를 거듭하고 있다. 그의 시 <사월의 인연>은 그 재미에 있어 여느 시 보다 탁월하다.
발목 잡혀 말 빚 늘려가도 그냥 좋을 지금, 하나가 둘이 되어도 좋을 그 뻔한 장난에 세상은 버겁게 웃는다. 축의금 툭 던지며 그냥 내친다.
이참에 어디 가서 살아 봐!
-홍정숙 詩 <사월의 인연>중에서
혼사의 계절 사월을 자신의 눈으로 읽어내는 엉뚱한 그의 사유는 시를 신선하게 만드는 요소가 되기에 충분하다.
김응년은 긍정적 사유를 가졌다. 시조라는 형식을 통하여 배경으로 어둠을 두고 그 위에 긍정을 드러내지 못한 한계가 아쉽기는 하지만 분명 그의 생각에는 살며 부딪치는 사물이나 사건들이 환한 긍정으로 드러나고 있다. 읽는 이의 마음까지 밝게 하는 시다.
첫돌맞이 귀염둥이 천사 같은 얼굴로
눈망울에 겹친 미소 햇살처럼 곱구나
세상에 무슨 꽃인들 저 모습에 비기리
비틀 베틀 일어나서 아장 어정 걸음마
알아 듣도 못할 말 "아으야!", 생글 벙글
세상에 어떤 노랜들 저 소리에 비기리.
김응년 詩<손자>전문
이재하의 시에 나타난 시의 재미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시의 중심에 언제나 그가 살아온 날들의 기억들과 관련된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고, 그 위에 덧칠되어진 것이 발랄한 상상이 아닌가 싶다. 이때 내용이 되는 이야기는 그만이 지닌 독특한 체험과 무관하지 않은데 그 독특함이 얼마나 낮선 이야기이냐에 따라 시의 신선도가 감지된다. 그러나 이러한 과거사적 체험은 어느 날 우물이 마르듯이 말라갈 것이고 그가 후자의 재미인 발랄한 상상력에 더 많이 기대게 될 때 아마도 시인 이재하는 제대로 재미있는 시로 세상을 흔들지 않을까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억을 더 많이 퍼내는 작업이 있어야 할 것이고 기승전결의 시적구조를 어느 순간 버려야 할 것이다. 그의 시에 나타난 몇 군데 재미있는 구절을 나열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지금은 당신과 내가 서로 다른 나무를 심고
가끔 그 우물가를 찾아가 옛 고사를 떠올렸죠
치맛속에 심은 장미꽃이
물위로 떠오를까 기다리면서요
그 푸르렀던 옛 우물에
쪽박가득 떠오른 흰 달덩이가
내어놓을 수 있는 신표였나요?
-이재하 詩 <사랑, 오래된>에서
포기하고 싶지 않은 늦은 사랑
어붓집 마당에서 말라가고 있다
과메기들의 꿰어진 밀어가
멍든 상처의 바위 다독이면
같은 그물에 끌려 올라와 말라가는 청어들
갯바위 휘감던 바람의 잔뼈
서로 들여다보고 있다
-이재하 詩<구룡포에서>에서
김영숙은 다분히 가족사적인 이야기를 시로 빚어내고 있다.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흙을 고르고 그 흙을 반죽하고 형태를 만들었으나 불에 들어가 그릇이 되지 못하고 다시 토련기 회오리 칼날에 부서지는 것이 흙의 운명이듯 김영숙이 받아들이는 삶이란 그의 시 <겨울나무>를 통해서 아버지의 식구들을 위한 의지의 다양한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이밖에도 <그날>은 아버지가 아닌 시아버지가 병원으로 실려가 마지막 운명의 명줄을 놓는 순간의 감정들을 시로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산다는 것의 커다란 의미를 푯돌 즉 도로의 폭과 방향을 알리는 길에 박힌 표시된 돌을 통해 함축해 내고 있음은 매우 재미있는 요소이다
산다는 것이
살아내야 한다는 重壓을
이기는 일인 것처럼
몸이 닳도록 받아낸 푯돌은
발자국 무게를
일일이 기억하지 않기로 한다
-김영숙의 시 <동성의 푯돌>에서
이복희는 세상을 바라보는 애처로움의 눈길이 곳곳에 드러난다. 낮고 쓸쓸한 대상들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은 따뜻하다. “헤진 옷소매로 / 밤낮 새를 쫓고도/ 그 누구의 격려도 받지 못하는 허수아비/ 그가 선 곳은 여전히 허상이다/ 막걸리로도 채울 수 없어/밖으로 내몰린 아비의 자리다”- 이복희의 시<허상>이 그러하고 그의 시 장날에서도 그런 눈길은 신선한 재미를 만들어낸다.
오일장 귀퉁이에 자리 잡은
씨앗난전에 들렸더니
발을 달지 못해 안달인 씨앗들
아지랑이 품고있다
달아나지 못하게 닦달하는
할머니 주름진 손가락 사이로
미어져 나오는 봄기운
마음 같아서는 분무기로 물 몇번 뿌려주고
김 오르는 거름 씌워주고 싶지만
아직 뒤풀이 남은 냉기 때문에
어찌 할 수가 없다
오이씨, 열무씨, 상추씨, 쭈그러진 강낭콩씨
앞태 뒷태 살피다 돌아서는데
씨들, 어찌 좀 해달라고 안달이다
꽃무늬 통치마 아낙의 봄맛에
동상 걸린 붉은발의 비둘기
없는 발가락 주워볼까
안달난 발톱자리
이래 저래 당겨지는 봄은
통치마 꽃무늬에 하르르 부풀린다
-이복희 시(詩) <장날> 전문
김홍표의 시 안에는 삶과 죽음을 나름 새롭게 조명하는 노력들이 곳곳에 녹아 있다. 지는 꽃이 죽음이고 그런 죽음이 순수로 돌아가려는 몸짓으로 시인에게 읽혔다면 그의 시는 재미있다.
당신에게
옷을 벗어 던진 건
발가벗은 몸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야
절규絶叫는 아니었어
순수만 남은 날
그냥 바라봐줘
-김홍표의 시 < 꽃의 죽음 또는 낙화落花>에서
꽃의 말을 받아쓴다는 자세를 취하는 시인의 태도 또한 매우 재미있는 시도이며 그가 바라보는 죽음 또한 순수로 돌아가려는 제대로 된 몸짓인 것이다. 그의 침묵 속에는 끊임없이 나의 죽음과 너의 죽음의 관계를 연관 짓는 생각하는 언어의 치열한 몸짓을 보여준다. 죽음을 다루다보니 죽음을 둘러싼 상관물들과 유사언어들이 등장하기도 하며 그 반대인 웃음조차 통쾌가 아닌 절망적인 웃음의 색을 띠고 있다. 죽음을 바라본다는 것은 어쩌면 치열한 삶을 바라본다는 것이며 따라서 뿌리의 고통이 꽃이 된다는 그의 죽음 논리는 껍질을 부수고 미소로 답하려는 몸짓에 다름 아니다.
이정오는 성인인 자신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천진하고 호기심 많은 동심이 시를 쓰게 하는 눈이 있다. 간혹 그 동심의 세계는 마주치는 현실의 사건들을 동심으로 데려가서 동화적인 중얼거림이 시를 풀어가고 있다. 아마도 아이가 쓴 성인의 시처럼 보이나 성인이 아이처럼 사유하는 그의 시는 그 재미가 남다르다. “ 대문 옆에 쪼그려 앉은 철쭉 / 길쭉하고 엉성한 화분무덤에서/ 얼어 죽은 줄 알았어” 라고 겨울지난 화분을 바라보는 눈이 그러하고 “기지개를 켜기 전에 엿보는 일은/누가 가르쳐 주었을까/막 대문을 열고 봄바람을 마중 나오던/아이의 눈썹을 닮았구나 ” 가 그러하고 “평상시 한 번도 보이지 않던 비행기가/ 오늘은 다섯 대나 보여 친구에게 자랑을 합니다” 가 또 그러하다. 그러나 동심으로 보여지는 눈앞의 현실들에게서 정작 주제에 접근하려는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면 단순한 바라봄의 눈길이 아름다웠다라고 밖에는 달리 재미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정오는 너무 맑다. 시심이 맑고 눈이 맑다. 앞으로 그가 궁금할 세상은 호기심과 궁금한 투성이일 것 이므로 쓸 대상은 무궁무진할 것이다.
김용만은 내면이 어둡고, 습기차고, 상처 나 있다. 외면적으로는 밝음으로 감춰져 있지만 이는 이미 상처의 맛을 깊이 아는 탓에 밝음으로의 끊임없는 도피를 시의 언어로 치유하려는 몸짓이다. 그의 시가 재미있는 것은 그런 슬픔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듯 한 무의식에 있다. 그 멍한 가운데는 수많은 회상들이 지나가고 영감 하나를 건져내어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하리라. 답답함에 뿜어내는 한숨을 시인은 닮았다. 그리하여 독자들에게 잠시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사과를 집는데심장이 두근두근탐스러운 모습문지른다, 가슴에 대고 꼭지와꽃이 있던 자리를 만진다, 가슴이 뭉클또 하나의 심장이다 한 입 베어 물었다잇자국이 선명하다입안에 고인 침뜯긴 살점 홧홧 화상이다
-김용만의 시 <사과>전문
박태진의 시 안에는 어떤 재미가 있을까?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나는 일상사를 그대로 옮겨놓고 자신의 생각을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이야기하는 전형적인 시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경우 그 재미는 진솔함에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러한 시의 구조를 그는 선택하여 자신의 세계를 드러내지는 않을 것이다. 실험적인 요소가 없는 시는 재미가 덜하다는 것을 빨리 알수록 그 만큼 그의 시는 진보할 것이다. 난초가 피다말고 멍한 것은, 자신에게 다가온 죽음을 꽃이 피는 걸 통해 알아버린 것이다. 이러한 장면은 아이와 늙어버린 할머니를 통해 극명해지며 그 아이와 할머니를 보고 있던 시인 자신의 심정이 난초에게로 건너간 것이다. 이런 눈을 가졌다는 것은 그의 노력 여부에 따라 앞으로 시 창작의 전도에 커다란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기에 중분하다.
동네 안과에 할머니와 손녀가 왔다
할머니는 눈 치료를 받고
초등학생 꼬마 손녀가 보호자가 되어
따라 다니며 잔소리한다.
할머니는 귀가 잘 들리지 않는지
간호사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손녀가 큰소리로 일러주지만,
자꾸 엉뚱하기만 한다.
보호자가 다시 잔소리를 한다.
할매 그게 아니고
꼬마 손녀는 애가 탄다.
세월이 보호자를 바꾸었나보다.
탁자 모서리 난초
꽃피다 말고 멍하니 보고 있다.
-박태진의 시< 보호자>전문
주설자의 시는 외로움을 형상화한 표현이다. 자신에게 다가온 외로움들이 좀 더 발전되면 근원적인 인간의 외로움을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겨울 꽁꽁 언 나무가 꽃을 피우고 다시 아랫배 부풀린 암술의 자리가 그러하듯 그는 사랑 또한 외로움에서 시작되고 외로움을 남기는 것임을 식물적 상상력으로 표현하고 있다. 나도 그렇고 나 이전의 어머니도 그렇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하면 나를 떠나간 그대도 외로울 것이라는 공식이 성립된다. 그러한 흔적의 자리에는 모교의 가수 백년설의 노래비가 그러하고 돌비를 세우는 그의 “번지 없는 주막” 에 대한 심정 또한 그러하다. 그 외로이 잘 응축된 대표적인 시가 <낡은 집>이다
둥지 밖 세상으로 달려가
가장 맛있는 먹이를 물고 와서
아기들에게 먹여주는 시간
다물었던 아가의 노랑 주둥이 속으로
연한 살점 막 들어가네
서로 먼저 달라고 아우성치네
나도 지난 시절
어머니가 품어준 한 개의 알
그 알이 병아리 되고 어미 새로 자랐지
내가 깐 병아리들
이제 나의 둥지를 떠나고
오래된 낡은 집만 바람 속에 남아 있네
-주설자 詩 <낡은 집>후반부
이연주 시인의 시는 전통서정과 불교 신앙에서 오는 묘한 어울림 그리고 자신의 정신의 갈고 닦음의 한 방법에서 얻어진 등가물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시 속에 등장 하는 과거와 현재의 어울림 또한 시간을 건너뛰는 어떤 재미를 지녔다.
오늘 아침 거울 앞에서
헝클어진 머리를 빗었다
사 월 초 파 일
바람도 한 줌 없는 초여름 날씨에
부처님이 도솔천에서 사바세계 로 내려오시어
중생을 제도하셨다는 오늘이
오늘이 그날이다
머리 빗는 한 동작에
스님의 법문소리는 뜬구름같이 들리고
흘러내리는 땀방울은 머리를 소리 없이 적신다
이때 빗은 하나의 도구가 아니며
경전의 활자 세세한 삐침들을 낱낱이 적시던
먹물의 노고를 기억하는 중일 것이다
어둑해지는 하늘에 천둥번개소리 나더니
뜰 앞 초록에 닿은 소낙비
빗을 갓 빠져나온 머리칼처럼
수만 헝클어짐들이 펴지는 소리로
툇마루 건너 마당이 왁자하였다
- 이연주 詩 <사월 초파일> 전문
강시내의 시는 꽃이 아닌 것이 없다. 자신과 꽃을 일치시켜 보려는 노력일 것이다. 자신을 꽃으로 보아 달라는 건지, 아니면 꽃이란 내가 꽃으로 이름하며 불렀으므로 꽃이 된다는 건지는 굳이 따질 필요가 없다. 아마도 그렇게 꽃을 노래하는 데에는 그가 어떤 꽃을 직업적으로 대하거나 꽃에 대한 나름의 철학이 있을 것으로 추측하면 된다. 그의 수록시 <오동꽃 피다>는 아음다운 시다. 죽음의 시간이 지나고 이장을 하는 현장에서 발견한 머리핀 그리고 머리카락을 쇠몽둥이에 빻아 오동나무, 뿌리는 현장을 시인은 보았고, 그 머리핀이 빻아진 가루가 오동나무 너무도 쉽게 떨어지는 꽃잎을 잠시나마 더 붙들더라는 상상은 엄청 난 시의 재미요소 중에 하나로 보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또한 그의 귀는 열려있다. 꽃잎을 떨구기까지 이미 꽃핀 벚꽃의 향기가 ”그저 그렇다“ 로 바라보는 숙성 깊은 생의 관조가 서글프도록 아름답다. 아래쪽 물 고인 땅을 응시하던 꽃의 무게로 늘어졌던 가지가 팔을 들어 올리는 것은 이미 꽃을 버린다는 무언의 동작을 통해 우주의 생명원리를 나무를 통해 읽어낸 것이다.
민들레 할미꽃 품고 있던 봉분
40년 만에 열어보니 끝이 났다
몇 가닥 머리칼만 남았다
그 곁에 덩그러니 놓인 핀 하나
머리카락 한줌 남아있는
그것마저 쇠몽둥이에 빻아지더니
오동나무 그늘에 뿌려졌다
사연 알 수 없이
남겨진 머리 핀 하나
육친인 두 딸이 눈물 흘리는 동안
오동나무 둘레에 흰가루 뿌려질 때
소리 없이 뚝뚝 떨어지는
오동꽃들에게
누가 보랏빛 머리 핀
꽂아 주었는지, 오동나무는
꽃잎 떨구기를 멈추고 있었다
- 강시내 詩<오동꽃 피다> 전문
이꽃분 시인은 그 마음의 결이 곱다. 그 고운 마음의 결이 만나는 세상은 신비하거나 세상의 낮은 곳을 어루만질 줄도 안다. 그의 新年詩로 추측되는 <별을 그리다>를 통해 보는 한 구절은 “손 시린 노동자의 손을 맞잡고 사람의 외로움이 위로받는 세상으로 가자” 며 떠오르는 일출을 노래하고 있다“ 또한 그의 시 <거미줄>은 거미줄/아파트를 절묘하게 연결 시키면서 자신에게 감춰진 침묵의 내면을 배고픔으로 읽고 있다.
수 십 칸 칸 안과 밖이 없어
열쇠가 필요 없는
어느 간격의 사이
천차만별의 자유형 아파트를
거미가 짓고 있다
침묵 속에 눈 부릎 뜬
내 집을 바라보면
나는 자꾸만 배가 고프다
- 이꽃분 시 <기미줄>전문
배남이 시는 물의 상상력이 돋보인다. 물론 물을 이야기하는 데 물만으로 시가 되지 않기에 강이 등장하게 되고 돌이 등장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물과의 유기적인 관계성이지만 그 중심에는 물이 놓여 있어, 유년의 기억과 현재현인 물병에 이르기까지 그는 물을 이야기 하고 있다. 엄마의 젓 또한 물이고 보면 동물본능에서 이성이 사랑을 할 때도 물이 그 매개가 되며, 모든 생명의 시작이 물인 것처럼 그의 시는 유달리 물에 애착을 보이고 있다. 우물/ 수양버들가지/ 연못/ 푸른 강가/ 소나기/엄마젖/ 물병/콩나물시루 등이 다 물과의 상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투명한 플라스틱 병에 갇힌 물을 들여다본다 공중에 거꾸로 매달아 두면 다행히 병 입구가 잠겨 있어 물은 갇힌 채 해와 비와 바람을 받아 저 혼자 무지개를 만들기도 하고 그네가 되어 출렁이기도 한다 마개를 열면서 물은 물이 아닌 어떤 용도를 지니게 되는 것 나무에 뿌려 주면 나무의 피를 돌게 하고 입으로 들어가면 갈증을 풀어 줄 것이다 투명 플라스틱 병의 물은 어떤 욕망의 장치임에 틀림없다 제 멋대로가 아닌 이미 담겨진 물이라면 오래 그대로 두어서는 아니 될 일 나 또한 마개를 열고 각도가 아래로 향하는 폭포처럼 시원하게 쏟아지고 싶다 물이 시루의 콩나물을 키우듯
-배남이 詩 <물병에 관한 명상 >전문
고 있다. 우물/ 수양버들가지/ 연못/ 푸른 강가/ 소나기/엄마젖/ 물병/콩나물시루 등이 다 물과의 상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신윤자의 시는 일상의 도처에서 만나는 잔잔한 삶의 부산물들에게 의미를 부여하며 존재의 근원을 찾아가는 시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화장을 하는 일, 여행을 하는 일, 설빔을 통해 기억 속 오빠를 불러내는 일, 뻥튀기가 튀겨지는 현장을 바라보는 일 또한 자신의 삶의 거울에 비춰 의미들을 유출하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
흩어지는 것보다 뭉쳐지는 게
더 가치가 있는 거라며
물엿의 속성 속에서 쌀강정의 이름으로
새로워지기도 하는데
인생도 뻥튀기처럼 살 수는 없을까
한 개의 낱말이 세끼의 양식이 되는 기쁨
팽이처럼 돌아가는 시계추를 머물게 할 순 없을까
-신윤자 詩 <뻥튀기>일부
최영태의 시는 “갑이”라는 인물을 통해 새벽별의 눈시울을 노래하고 있다. 모깃불 자욱한 멍석 위라는 고정된 시점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는 “부자의 정”으로 정리되고 있는데, 아마도 이 시인이 지닌 트라우마는 부성에 대한 갈증이거나 다하지 못한 효행에 대한 반성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막니 뽑듯 정신의 내면에 상처들을 시로 줄줄이 뽑아내기를 기대해 본다.
3.
이렇듯 문장작가회의 사화집에 출품된 시의 원고, 각자의 색이 다르고 생각이, 정신이 다르다는 것은 어떤 표현의 옷을 걸치든 여러 수종들이 어우러진 커다랗고 아름다운 산임이 틀림없다. 최초부터 산이 여러 수종의 식물들로 우글거리며 아름다움을 구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먼저 우뚝 선 나무는 그늘로 작은 나무를 보듬고 일부 어떤 풀은 죽어서 나무의 거름이 되어주기도 하면서 산의 모양을 갖추어 가는 것을 연상할 수 있다. 이처럼 문장출신작가들이 더불어 상생 할 수 있는 큰 산이 되기를 기대한다. 지금은 좋은 시가 아니어도 언제든 좋은 시를 쓸 수 있겠다고 생각하면 시를 쓰는 일은 그리 힘든일도 아니며, 분명 가치 있는 일이고 앞서 전제한 바도 있지만 언제든 실험적인 정신으로 독자가 공감하는 재미있는 시를 향해 각자 발전적 변신의 모습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