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대 광(원일중학교, 안산향토사연구소)
조선 건국 벽두. 나라는 건국되었지만 그 기틀이 다져지기까지 혼란한 세월이 이어진다. 고려의 풍속 역시 그대로 남아있었으며, 여러 차례 궁중의 암투도 벌어진다. 이런 혼란과 변혁의 시기에 나라의 초석을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한 안산의 인물로 김정경(金定卿)이 있다. 우리는 그의 일생을 통하여 건국 초, 생생한 역사 개벽의 현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볼 수 있다. 김정경은 안산 김씨로, 현재의 수암동에서 나고 자랐다. 김정경은 고려 말에 군부사총랑(軍簿司摠郞)을 역임했는데 이는 병부의 4품 벼슬이다. 그는 고려 말에서 조선 건국으로 이어지는 혼란기에 이성계를 도와 대업을 이루게 되는데, 무장이었던 그가 자연스럽게 이성계의 측근에서 지지 세력이 되었을 것임을 짐작키는 어렵지 않다. 그리하여 조선건국에 일조(一助) 함으로 왕조 개창 후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봉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원종공신이란 누구를 이름인가? 조선시대에 공신 책봉에서 제외된 무수한 유공자들을 포상하는 것이 이른바 원종공신제도 인데, 이는 보다 직접적으로 큰 공훈을 세워 임명된 ‘정공신’ 다음 급에 해당하는, 이른바 ‘부공신’에 해당되는 모든 유공자들을 대상으로 포상한 제도로,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씩 책봉하곤 하였다. 조선 개국 공신을 책봉하였을 때의 원종공신은 1천 6백 명이 넘었으며, 임진왜란 후 책봉된 원종공신인 선무공신의 경우에는 9천여 명이 양산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원종공신은 모두 얼마나 될까? 조선시대 원종공신의 수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모두 합해 몇 만 명이 넘을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이처럼 수많은 원종공신이 생겨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국가적 위기 상황이나 불안 정국에서 국가와 왕실에 조금의 공이라도 있는 모든 유공자들을 포상함으로써 국가와 왕실을 안정시키고 위상을 드높이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1400년(정종 2년)에 방간의 난(일명 ‘박포의 난’ 또는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한성부윤이었던 김정경은 난을 진압하고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봉된다. 좌명공신(佐命功臣)은 형제들의 왕권 쟁탈 싸움에서 방원이 형 방간을 몰아내고 사실상 왕으로 등극하는 마지막 과정에서 그를 도운 신하들에게 내린 공훈이다. 또한 김정경은 1410년(태종 10년), 성절사(聖節使) ― 명나라 황제나 황후 생일에 파견하는 축하 사절 ― 로 명나라에 직접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 후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김정경은 고향인 안산에서 여생을 마치게 된다. 현재 그의 묘는 하남시 감북동에 있다. 안산에 거처하면서 그가 지었다는 정자가 있는데, ‘망해정(望海停)’이라 불린다. 옛날에는 해수가 내륙 쪽으로 들어오는 지형이었으므로 현재의 수암동 일대에서도 바다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김정경은 그 바다를 바라보며 유유자적하며 말년을 보내지 않았을까. 그 당시에 심었다는 은행나무 세 그루 중 한 그루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는 세종 즉위 1년인 1419년에 75세의 긴 삶을 마감하는데 당시로서는 상당히 장수한 셈이다. 그는 왕조가 바뀌는 역사의 현장 한복판에서 함께하였고, 공신으로 책봉되어 ‘연성군(蓮城君)’에 봉해졌으며,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안산 수리산(修理山) 자락에서 여생을 보내었다. 장구(長久)한 역사 속 급변하는 왕조 교체기에서 자신의 삶을 고뇌하고, 사랑하며, 치열하게 살다간 인간 김정경의 길고도 짧은 생을 통해 굽이굽이 흘러 온 안산 역사의 한 자락을 조용히 되짚어 본다.
600년전 국내 最古 병서 발굴 : '황석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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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전 국내 最古 병서 (서울=연합뉴스)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 병서(兵書)인 황석공소서(黃石公素書). 조선 태종 5년(1405) 11월 제주도에서 당시 제주목사 이원항(李原恒)과 제주판관 한이(韓彛) 책임 아래 목판으로 판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 박철상 제공 >> | 1405년 제주도판 '황석공소서'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 병서(兵書)가 발굴됐다. 고문서 연구가 박철상(42)씨는 조선 태종 5년(1405) 11월에 제주도에서 당시 제주목사 이원항(李原恒)과 제주판관 한이(韓彛) 책임 아래 판각한 '황석공소서(黃石公素書)'를 발굴했다고 4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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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전 국내 最古 병서 (서울=연합뉴스)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 병서(兵書)인 황석공소서(黃石公素書). 조선 태종 5년(1405) 11월 제주도에서 당시 제주목사 이원항(李原恒)과 제주판관 한이(韓彛) 책임 아래 목판으로 판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 박철상 제공 >> | 황석공소서란 황석공이란 사람이 유방을 도운 한나라 개국공신 장자방, 즉 장량(張良)에게 전수했다는 병서다. 현전하는 판본은 이 때의 텍스트가 아니라 후대에 누군가가 만들어낸 위서(僞書)라는 견해가 있기는 하지만, 손자(孫子) 등과 더불어 무경칠서(武經七書)에 포함되어 병가(兵家)에서는 매우 중시된 텍스트였다. 목판본인 이 황석공소서 1책은 크기가 19.5 × 13.5cm에 22장(44쪽)이며 각 쪽당 10행 20자에 걸쳐 텍스트를 기록했다. 앞 부분에는 송나라 때 인물인 장상영(張商英.1043-1121)이 쓴 서문에 붙었으며 끝에는 판각에 관한 사정을 기록한 대목이 발견된다. 박씨는 "이 판각 부분이 탈락이 극심하지만 "(年)十一月日濟州…刻手僧性"과 같은 구절이라든가 "兼勸農兵馬團練判官儒學敎授官 韓彛, 兼勸農管學兵馬使濟州道按撫使 李原恒"과 같은 대목을 판독할 수 있으므로 이 황석공소서가 조선 태종 때 제주에서 목판본으로 찍어낸 판본임을 의심할 나위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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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전 국내 最古 병서 (서울=연합뉴스)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 병서(兵書)인 황석공소서(黃石公素書). 조선 태종 5년(1405) 11월 제주도에서 당시 제주목사 이원항(李原恒)과 제주판관 한이(韓彛) 책임 아래 목판으로 판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 박철상 제공 >> | 따라서 이 황석공소서는 현전하는 국내 최고 병서이자 현전하는 최고 제주도 간행물이 된다고 박씨는 덧붙였다. 병서는 삼국시대 이후 한반도에서 줄곧 간행됐지만 이번에 발견된 황석공소서 이전으로 올라가는 판본은 하나도 없으며, 나아가 1296년(고려 출렬왕 22년)에 간행됐다고 알려진 금광명경문구소(金光明經文句疏)가 제주도판 최고 인쇄물이라 하지만 현전하지는 않는다. 이번 황석공소서는 형태 측면에서는 고려시대 판본의 특성을 농후하게 띈 것으로 밝혀짐으로써 한국 인쇄술사 연구에서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박씨는 말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호조참판 김성대묘비
연대
유형/재질
크기
소재지
서체
찬자/서자
/각자 |
1727년(영조3년)
비문 / 돌
높이 206cm, 너비 74cm, 두께 46cm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리
해서(楷書)
좌의정,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 김창집
/ 미상 |
해석문
김성대묘비
유명조선국 증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행 통덕랑 제릉참봉 김공성대묘
배 증정부인수원백씨부좌
공의 휘는 성대이고 자는 이원이며, 본관은 안산으로 고려시대 좌복야를 지낸 김긍필의 후손이다.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휘 정경이 계셨는데 태종 때 좌명공신으로 숭정대부 이조전서를 지내고 연성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위정공이시다. 위정공께 막내아들 휘 개가 계셨는데 숭정대부 이조판서로 시호가 평호공인데, 이분이 공의 6대조이시다. 부호군 휘 언량과 사복시정으로 증직된 휘 태록과 좌승지로 증직된 휘 찬은, 바로 공의 증조와 조부와 아버지이며 어머니는 안동 김씨로 김정삼의 따님이다.
공은 천계 임술년(광해군 14, 1622년) 정월 22일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행의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었다. 병자년(인조 14, 1636년)에 어버이를 모시고 오랑캐를 피하여 산중으로 들어갔는데 그때에 공은 15,6세의 소년이었지만 날마다 한 가마의 쌀을 등에 짊어지시고 험한 길을 넘어 운반하셨다. 비록 난리 속이었지만 부모 공양에 빠뜨림이 없었던 것이다.
신묘년(효종 2, 1651년)에 아버지 승지공의 상을 당했는데, 병환에 계실 때부터 탕제 다리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고, 손수 분뇨를 맛보아 달고 쓴 것을 징험하였으며, 위독하시게 되자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올려드려 상당 기간 효험을 얻었었다.
갑인년(현종 15, 1674년)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자제들이 늙은 아버지께서 몹시 슬피 우셔 몸 상하심을 걱정하여 권변을 청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았으니, 그 지성스런 효성이 이와 같았다. 이 정성을 미루어 여러 누이와 아우 및 조카에 이르기까지 공경과 사랑이 지극히 독실하였으니, 향당에서 탄복하여 마지않았다.
공이 일찍부터 과거시험장에 출입하여 성대히 문장에 대한 명성이 있었으므로 일시의 선비들이 모두 먼저 등제하라고 사양하였다. 공도 이에 이르기를, “시험 하나도 취할만 하지 못하는데 여러 차례 향시에 입격하는군요.”라고 하였다. 그러나 끝내 성시에는 낙제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나이 72세에 비로소 진사에 급제하여 방목이 보고되니, 주상께서 관직을 제수하라는 특명이 있어 즉시 제릉참봉에 제수되니 특이한 은전이었다. 이에 공께서 감격하여 주상의 은혜를 사례하였으나 얼마 뒤에 벼슬을 버리고 출사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 을해년(숙종 21, 1695년)에 병으로 돌아가시니 2월 4일이었다. 후에 아들 절도사 석명의 추은으로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아내 백씨는 정부인에 추봉되었는데 부사 대진의 따님으로, 착하고 어질어 부인의 덕이 있었고 공보다 5년 후에 돌아가셨다.
공께서는 5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바로 절도사요, 2남 석범은 무과로 절충을 지냈고, 3남 석규는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일찍 죽었으며, 4남 석구는 문학에 종사하고 있고, 5남 석보는 무과 중시에 급제하여 도총부 경력을 지냈고, 딸은 사인 이제안에게 출가하였다. 상규는 석명의 소생이요, 상두 · 상진과 감찰 서명신, 사인 이탁, 이환의 처는 석범의 소생이요, 이세무의 처는 석규의 소생이요, 상태 · 상정 · 상복과 조윤적의 처는 석구의 소생이요, 상기 · 상익 · 상벽 · 상성은 석보의 소생이요, 담석과 김요경 · 정운길의 처는 이제안의 소생인데 아들은 어리다. 상규는 1남 양오를 두었고, 상두는 4남을 두었으며, 상태는 1남을 두었고, 양오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공은 사람됨이 질박하고 입이 무겁고 말이 적어,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함에 진실하고 꾸밈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하였고, 이미 늙어서도 여전히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집이 영평 백운산 밑에 있어 자못 전원으로 숲과 시내의 경치가 좋았고, 자손들이 그 집 근처에 둘러 살면서 각자 농사짓고 뽕과 삼을 심고, 혹은 출사하여 고을 수령을 지내면서 가볍고 따뜻한 옷이며 맛있는 반찬을 두루 갖추어 공을 봉양하였다. 공께서 좌우로 봉양을 받으면서 조용히 문묵을 스스로 즐기고 생산의 일에 대해서는 일체 묻지 않았다. 혹 흥이 나면 자손들을 거느리고 이웃사람들을 불러 함께 산수 사이를 거닐면서 소일하니, 사람들이 그의 청한한 복은 누구도 미치기 어렵다고 일컬었다. 아들의 고을로부터 무슨 선물이 들어오면 문득 얼굴을 찡그리고 “백성들을 고달프게 하는 것이 아닌가?”라 하시고 매양 청렴결백과 절제근검을 당부하여 경계하였다. 절도사가 여러 지방을 역임하며 간소하다는 것으로 칭찬받았으니, 그 법도를 얻음이 이와 같아서이다.
공을 집에서 남쪽의 도성산 아래 정좌의 언덕에 장사 지냈고 백부인을 그 왼쪽에 부장하였다. 절도군의 형제가 장차 묘 앞에다 비석을 세우고자 나 창집에게 비문을 부탁하였다. 나는 진실로 글을 못하는데 어찌 영원히 전할 글의 부탁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다만 생각해보니, 옛날에 나의 선군께서 백운산의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하고 이곳에 사실 뜻이 있었다. 선군께서 일찍이 혼자 말을 타시고 이 산중으로 오시어 공을 만나 머무르셨으며, 시를 지어 산을 나누는 약속을 증거로 삼았었다. 내가 때때로 따라가서 가만히 보니 공은 용모가 헌걸차고 순박하여, 마음속으로 덕의가 훌륭한 분임을 알았었다. 그 후 선군께서 나에게 명하여 이씨의 낚시터 위에다 자그마한 집을 짓게 하여 후일에 거처할 계교를 삼았는데, 이곳에서 공의 집과의 거리는 몇 리였다. 내가 이로 말미암아 공의 집을 드나들면서 더욱 친하여졌다. 그러나 선군께서 마침내 그곳으로 가시지 못하고 기사년(숙종 15, 1689년)의 사화에 돌아가셨다.
공께서 이에 우리 모자와 형제의 궁박하고 의지할 곳이 없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맞아 자기 집 아래 집을 마련하고 또 힘을 다하여 옛 집을 수리하고 거처를 정하여 주셨다. 무릇 어루만져 주시고 도와주심에 극진한 은의가 있어 비록 가슴속이 불처럼 타올랐으나, 돌아보지 않으셨다. 지난날 그 어진 마음과 옳은 기개가 아니었다면, 쇠퇴한 세속에 멀리 생각하심이 어찌 여기에 미칠 수 있었겠는가? 내가 공에게 실로 종신토록 감격함이 있어 그 여러 아들들과 모두 서로 대하길 골육과 같이 지내었다. 이제 이 묘문의 부탁이 또한 이 때문이라. 어찌 차마 글을 못한다고 사양하겠는가? 드디어 감히 참람하고 망녕됨을 헤아리지 못하고 본말을 간략히 이와 같이 기록하였다. 아아! 이 어찌 공의 사행을 영원히 전하는데 족하다 하겠는가?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감춘추관사 세자부 김창집 지음.
제 4남 석 달은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글씨를 쓰다.
비문이 이루어진 뒤 5년 을미년(숙종 41, 1715년)에 백운산 아래 구정천 기방을 뒤로 한 언덕에 이장을 하였고, 다시 그 뒤 13년만에 비로소 비석을 갖추게 되었다. 모든 자손들의 현달한 자와 어리거나 성인이 된 사람 중 미처 기록되지 못한 자를 삼가 다음에 추가로 기록한다. 석 달은 곧 석구의 고친 이름이다. 석보는 수사, 상두는 군수, 상태는 감찰, 상정 · 상기 · 상익은 급제, 상벽은 부사이다. 상두는 5남을 두었는데, 양호는 부사, 양일은 선전, 양정 · 양중은 모두 무과 급제하였고, 막내는 양검이다. 상진은 1남 1녀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며, 상태의 아들은 양록, 딸은 아직 어리다. 상정은 2남 2녀를 두었고, 상복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고, 상기의 아들은 양성이다. 상익은 3남 2녀를 두었고, 상벽은 4녀를 두었으며, 상성은 2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양오는 4남을 두었으니, 처눌 · 처밀 · 처열 · 처필이고, 양일은 3남을 두었으며, 양중은 1녀를 두었다. 처눌은 1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외손과 증손과 현손이 매우 많으나 생략한다.
숭정기원후 두 번째 정미년(영조 3, 1727년) 3월 일 세움.
판독문
有明朝鮮國 贈嘉善大夫戶曹?判兼」
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行通德郞」
齊陵?奉金公聲大墓」
配 贈貞夫人水原白氏?左」
公諱聲大字而遠安山人高麗左僕射肯弼之後入我 朝有諱定卿爲 太宗佐命功臣崇政吏」
曹典書封蓮城君謚威靖公威靖有季子諱漑崇政吏曹判書謚平胡公寔公六代祖也副護軍諱」
彦樑 贈司僕寺正諱台錄 贈左承 旨諱讚卽公曾祖祖考若考而?安東金氏鼎三之女公」
以天啓壬戌正月二十二日生自少行誼過人丙子奉二尊人?冠山谷中時公甫成童能日負一」
斛米越險輸致以故雖在?攘而供養無乏辛卯遭承 旨公憂目疾時湯劑不委人手嘗糞以驗」
甛苦及其革也?旨進血得以復甦者有間甲寅丁內艱子弟愍其老而毁泣請權變竟不聽其誠」
孝如此推以及於諸姑弟姪敬愛篤至鄕黨爲之歎服公蚤游場屋蔚有文聲一時輩流咸讓其先」
登公亦謂一第不足取而屢捷解額輒困於省試??留落人皆嗟惜?七十二始中進士榜 聞」
特命除職卽授 齊陵?奉盖異數也公感激謝 恩俄而棄不仕越二年乙亥以疾卒二月初四」
日也後以子節度使錫命推 恩贈戶曹?判配白氏貞夫人府使大璡之女淑哲有婦德後公五」
年以卒公凡生五男一女男長卽節度使次錫範武科折衝次錫圭武科早?次錫龜業文次錫保」
武科重試都摠府經歷女適士人李齊顔相奎錫命出相斗相軫監察徐命新士人李濯李?妻錫」
範出李世懋妻錫圭出相兌相鼎相復曹潤迪妻錫龜出相箕相翼相壁相星錫保出聃錫金堯鏡」
鄭運吉妻李出一男幼相奎一男養吾相斗四男相兌一男養吾一男二女竝幼公爲人木訥寡言」
待人遇物眞實無矯飾少好讀書旣老猶手不釋卷家在永平白雲山下頗有田園林澗之勝子姓」
環其宅而居各自理??藝桑麻或出爲州郡具輕?甘?以奉公公則左右受養肅然以文墨自」
娛不復問生産事興至雋子姓呼?竝?佯山水間人謂其淸福不可及然見有物自子邑來輒蹙」
然曰無乃病民乎每申戒以廉白節儉節度君在弁?中以簡素著稱其得於義方者然也公葬于」
宅南道成山下負丁之原白夫人?其左節度君兄弟將樹石墓前屬昌集識其隧昌集誠不文何」
足以當不?之託獨念昔者先君子愛白雲山水有卜居之志嘗匹馬會公於山中留詩證分山之」
約昌集時從行竊公儀度豊偉氣味淳?心知爲長德人矣其後先君子命昌集作小屋於李氏」
釣臺之上以爲異日計去公家盖數里昌集因得與公還往益親然先君子竟未能歸而有己巳之」
禍公於是哀昌集母子兄弟窮無所歸?迎置宇下因又出力葺舊屋以定其居凡所以撫視?救」
曲有恩意雖凶?如火而不顧問焉向非其仁心義氣遠邁衰俗何能及此盖昌集於公實有沒身」
之感而其諸子皆相視如骨肉今?墓文之託亦以此耳又何忍以不文辭遂敢不揆?妄?記其」
本末如右嗚呼此豈足以不朽公也哉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 經筵事監春」
秋館事 世子傅金昌集述 ?四男錫達泣血謹書 文成後五?乙未移?于白雲山下九政遷」
負己之原又後十三年碑始具凡子姓之顯若冠若?而未及載者謹追識于左錫達卽錫龜改名」
也錫保水使相斗郡守相兌監察相鼎相箕相翼及第相壁府使相斗五男養浩府使養一宣 傳」
養正養中及第皆武次養儉相軫一男一女幼相兌男養祿女幼相鼎二男二女相復一男二女竝」
幼相箕男養性相翼三男二女相壁四女相星二男竝幼養吾四男處訥處謐處說處養一三男」
養中一女處訥一男竝幼外出曾玄甚蕃?略焉 崇禎紀元後再丁未三月 日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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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보(金錫保)ㆍ1664(현종5)~1774(영조17)
무신으로 자는 여극(汝極), 호는 죽헌(竹軒), 본관은 안산. 참봉 성대(聲大)의 자이다.
1693년(숙종19)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지냈다.
1698년(숙종24)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를 거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흥덕현감(興德縣監)을 역임했다.
1705년(숙종31)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이 되고 이어서 도청부도사(都廳副都事),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으로 가리포(加里浦)에 출진하였다가 사고가 발생하여 파직되었다.
1710년(숙종36)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고 이어서 중화부사(中和府使)를 거쳐 순무사(巡撫使)가 되었다.
1712년(숙종38) 안동영장(安東營將)으로 좌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연행(燕行)할 때 수행하였다.
1713년(숙종39) 순천영장(順天營將) 1716년(숙종42) 창성부사(昌城府使)에 이어 삼수부사(三水府使)를 역임했다.
1726년(영조2)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 1727년(영조3)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 1728년(영조4) 제주목사(濟州牧使)에 배수되었다.
묘는 이동면 연곡리에 있다. 묘갈명(墓碣銘)은 최익현이 지었다.
김석명(金錫命)ㆍ1642(인조20)~1717(숙종43)
무신으로 이동면 연곡리에서 출생하여 성장하였다.
자는 여삼(汝三), 본관은 안산 촌로 성대(村老 聲大)의 자이다.
1670년(효종11) 천거로 선전관(宣傳官), 도사(都事)를 역임하고 강동현감(江東縣監)이 되었다. 1674년(숙종6) 훈련원 부정(訓練院 副正)이 되었다가 순천(順川)과 박천(博川)군수를 역임하고 창주진관첨절제사(昌州縝管僉節制使)로 승임되었다.
1686년(숙종12)에는 홍주영장(洪州營將)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이천부사(伊川府使)로 전직되어 선정을 베풀어 치적이 많았다.
1695년(숙종21) 부친상(촌로)을 당하여 사직 탈상후 다시 죽산부사(竹山府使)에 임명되었다.
1700년(숙종26) 진무중군(鎭撫中軍)으로 공적이 인정되어 품계가 종이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으며, 훈련도감(訓練都監), 좌별장(左別將)을 역임하고 통진부사(通津府使)에 임명되었다.
1704년(숙종30)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호서병마절도사(湖西兵馬節度使)로 나갔다.
임기가 만료되어 다시 훈국별장(訓局別將)이 되었다.
1708년(숙종34)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 副摠管)이 제수되고 이어서 강계방어사(江界防禦使)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다시 동지중추부사, 수어사, 중군 등을 역임하고 1717년(숙종44)에 별세하였다.
묘는 이동면 백운산 아래 있으며 묘비명(墓碑銘)은 영의정 유척기(兪拓基)가 지었다.
김상두(金相斗)ㆍ1674(숙종15)~1752(영조28)
무신으로 이동면 연곡리에서 출생, 본관은 안산, 자는 산앙(山仰)
1711년(숙종37)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고 이어서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덕흥현감(德興縣監), 서천군수(舒川郡守) 등을 역임하고 1728년(영조4) 성진첨사(城津僉使)에 제수, 이어서 경흥부사(慶興府使)를 거쳐 전라도수사로 임명되었다.
1743년(영조19) 내직으로 들어와서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으로 있다가 여주목사(麗州牧使)로 나갔다.
1752년(영조28) 노환으로 별세하니 향수가 78세이었다.
묘는 이동면 백운산하에 있다.
묘비명(墓碑銘)은 영의정 유척기(領議政 兪拓基)가 찬하였다.
김처곤(金處坤)ㆍ1726(영조2)~1803(순조3)
무신으로 이동면 연곡리에서 출생하였다. 초명은 처관(處觀), 자는 중빈(仲賓), 본관은 안산, 연성군(連城君) 정경(定卿)의 7세 손이다.
1753년(영조29) 무과에 급제하여 1755년(영조31) 선전관(宣傳官)이 되었고 이어서 훈련원주부(主簿), 판관(判官), 부정(副正), 도청부도사(都廳副都事), 장원서별제(掌苑暑別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보성군수(寶城郡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활을 잘 쏘아 매년 봄, 가을 전정(殿庭)에서 기사(騎射)할 때 장원하여 동호(動弧-붉은 칠을 한 화살로 활을 잘 쏘는 사람에게 왕이 하사하는 물품)를 하사 받기도 하였다.
김성발(金聲發)ㆍ1624(인조2)~1670(현종11)
본관은 안산, 자는 정이(正而), 호는 반성재(反省齋)로 촌로(村老) 김성대(金聲大)의 아우이다. 학자로서 효성과 우애가 투철했다. 동음사(洞陰祠)에 배향 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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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명을 지으신 영의정 김창집에 대하여
1648(인조 26)∼1722(경종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성(汝成), 호는 몽와(夢窩). 좌의정 상헌(尙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광찬(光燦)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수항(壽恒)이며, 어머니는 호조좌랑 나성두(羅星斗)의 딸이다. 창협(昌協)·창흡(昌翕)의 형이다. 이른바 노론 4대신으로 불린다.
1672년(현종 13)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1675년 아버지 수항이 화를 입고 귀양가자 과거 응시를 미루었다. 1681년(숙종 7) 내시교관을 제수받았고, 1684년 공조좌랑으로서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정언(正言)·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아버지가 진도의 유배지에서 사사되자, 귀향해 장례를 치르고 영평(永平)의 산중에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정국이 바뀌어 복관되고, 병조참의를 제수받았으나 사임하였다.
다시 동부승지·참의·대사간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 철원부사를 제수받았는데, 이 때 큰 기근이 들고 도둑이 들끓어 민정이 소란하자 관군을 이끌고 토평하였다.
강화유수·예조참판·개성유수 등을 역임하고, 호조·이조·형조의 판서를 지냈다. 1705년 지돈녕부사를 거쳐 이듬 해 한성부판윤·우의정, 이어서 좌의정에까지 이르렀다. 1712년에는 사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 해 귀국, 1717년 영의정에 올랐다.
노론으로서 숙종 말년 세자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다가 소론의 탄핵을 받았다. 숙종이 죽은 뒤 영의정으로 원상(院相 : 나이어린 왕을 보필하던 재상급의 원로 관료)이 되어 온갖 정사를 도맡았다. 경종이 즉위해 34세가 되도록 병약하고 자녀가 없자, 후계자 선정 문제로 노론·소론이 대립하였다.
1721년(경종 1) 다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상소해, 처음에 경종은 대소 정사를 세제에게 맡길 것을 허락했으나 소론의 격렬한 반대로 실패하였다. 수개월 후 소론의 극렬한 탄핵으로 노론이 축출되고 소론 일색의 정국이 되었다. 곧 이어 소론의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 등이 노론의 반역 도모를 무고해 신임사화가 일어나자,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듬 해 성주에서 사사되었다.
1724년 영조 즉위 후 관작이 복구되었으며, 영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영조 때 과천에 사충서원(四忠書院)을 세워 이이명·조태채·이건명과 함께 배향했으며, 거제의 반곡서원(盤谷書院)에도 제향되었다. 저술로는 ≪국조자경편 國朝自警編≫·≪몽와집≫ 등이 있다.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참고문헌≫ 景宗實錄 ≪참고문헌≫ 英祖實錄 ≪참고문헌≫ 國朝榜目 ≪참고문헌≫ 辛壬提要 ≪참고문헌≫ 黨議通略 ≪참고문헌≫ 夢窩集
조선을 뒤흔든 아버지와 아들
지은이: 이종호 | 브랜드: 역사의 아침 | 출간일: 2008-10-24
너희들은 마땅히 (사형당하는) 나를경계 삼아 항상 겸손하게 물러나려는 뜻을 갖고 벼슬에서는 높이 드러나는 요직을 피하도록 해라. 집에 거처할 때는 공손하고 검소할 것이며, 사람을 사귐에 신중하고 의논하는 말은 간소하게 하여라.
(……) 너희들은 여러 자식들을 부지런히 가르쳐서 문헌에 전하는 충효의 가르침을 잃지 않도록 하고, 가문을 지키되 반드시 과거를 보아 벼슬할 필요는 없다. 기사년 4월 초7일 문곡文谷(김수항의 호) 늙은이가 아들 창집, 창협, 창흡, 창업, 창즙에게 주노라. 그리고 여러 자손들이 자라면 역시 이 글을 보여주도록 하여라. |
첫댓글 좋은 자료감사합니다 수고 하셨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