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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산김씨 세계 스크랩 연성군(안산군) 신도비, 김성대 묘비
희망나라 추천 0 조회 171 12.04.04 06:25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연성군(안산군) 김정경 신도비

(金定卿 神道碑) 해석문

  김정경 :

1345(충목왕 1)∼1419(세종 1)

 

유명조선 좌명공신 이조전서 연성군 시위정 김공 신도비명

 위정공 묘 신도비 (소재지 : 하남시 감북동)

 

추충분의 익대동덕 좌명공신 숭정대부 행 이조전서 연성군 시위정 김공 신도비명병서
자헌대부 예조판서 홍문관제학 경연일강관 신석우가 글을 짓고,
수록대부 영명위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홍현주가 글씨와 함께 전액을 쓰다.

당과 같은 모습에 높이가 4척이며 광주 고을 서쪽의 현천에 해방을 등진 언덕은 곧 연성군 김공 정경의 묘소이다.  (* 광주 현천 = 하남시 감북동 안촌마을)

 

본관은 안산이고, 선계는 고려좌복야 긍필에서부터 나왔다. 시중 위와 판삼사 원상과 목사 성경이 공의 증조와 조부, 아버지이다.

 

 어머니는 평양조씨로 밀직부사 천사의 딸이다. 원나라 지정 을유년(충목왕 1, 1345년)에 태어나 벼슬하여 연강전직 · 판호군종부부령 · 군부총랑 · 중정대무가 되었고, 우리 태조를 섬겨 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태종때에는 박포의 반란을 평정하여 좌명공신에 책봉되어 품계가 숭정에 올랐으며, 작위를 봉하고 전호와 민호를 하사한 권서가 있다. 일찍이 의흥친군위 절제사를 지냈으며 이조를 관장하였다.

 

 두 번이나 명을 받들고 명나라 조정에 사신으로 가서 공적이 모두 현저하였다. 병들어 눕자 세종께서 대의를 보내어 진료하게 하고, 내시를 보내어 문병하셨으며, 사냥하여 노루 간을 하사 하셨으니, 이는 병중에 먹고 싶어하기 때문이었다.

 

 공은 성은에 감읍하여 끝내 만에 하나도 갚을 수 없음을 한스럽게 여겼다. 7월 15일에 마침내 부음이 들렸으니 향년 75세이며, 해는 영락 기해년(세종 1, 1419년)이다. 조정의 정사를 거두고 제물과 제문을 모내어 조상하고, 위정이란 시호를 추증하여 신하의 죽음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공은 일찍이 남용이 세 번 반복했다는 ‘옥의 흠은 갈 수 있지만 말의 흠은 갈 수 없다’는 말을 좋아하였고, 황석소서를 즐겨 읽어 무릇 벼슬하여 일을 처리 할 때에 여기에서 힘을 얻은 것이 많았다.  (*황석공소서 : 황석공이란 사람이 유방을 도운 한나라

개국공신 장자방, 즉 장량(張良)에게 전수했다는 병서.  편 상세내용 붙임)

 

오호라! 성조가 용흥하여 하늘이 한번 다스림을 열어주시어, 기미에 밝고 권형에 통달한 분들이 마치 산천에 구름이 일듯하여 그 사람이 많았다. 학문은 양촌이요, 나라를 위한 계책은 방촌이며, 질박하고 검소함은 하정이니, 모두 운을 타서 세상에 이름난 인재들이다.

 

공으로 말하자면 평소에 육도삼략을 지고 화란을 평정하여 제공들과 명예를 나란히 하여 국초에 영호가 될 수 있었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 그 하늘의 뜻에 순응하여 아름다움을 맞이하고 그 복지를 육성 발전시키는 것이 당연하도다.
공은 부인을 세 번 맞이하였으니, 판서 신익지 · 신양군 노영 · 남평군 왕화의 딸이다. 5남 1녀를 낳았다.

 

별장 지는 신씨 소출이요, 호군 관 · 별장 척은 노씨 소출이요, 판중추 평호공 개와 안성위 한과 서령 안철산 처는 왕씨 소출이다.

 

 평호공의 아들 맹강은 교감 그리고 맹강의 아들 필이 비로소 과거에 1등으로 합격하여 진출하였고, 손자는 곤 · 위 · 비인데, 비는 기묘년 휘정 때에 저명했다. 6대손 취의와 7대손 항은 계속하여 문과에 올랐으며, 6대손 부사 취려와 7대손 참봉 성대 · 증지평 성옥과 8대손 참봉 시성은 모두 학행으로써 일컬어졌으며, 석명 · 석고는 무로써 드러났다.

 

9대손 지충추 상두와 현감 정오는 함께 신축사화에 걸렸으며, 목사 상정과 10대손 방어사 양일은 함께 분무훈에 올랐고, 양심은 문과 대간이다.

 

외손도 높은 벼슬과 현달한 사람들이 많았다. 현천의 무덤을 완성하고 나서 신씨와 노씨는 부장하였으며, 왕씨는 그 아래에 임좌로 장사 지냈다. 14대손 악붕이 도곡 이공께서 찬한 묘표를 가지고 와서 신도비를 청하니, 나는 사양 할 수 없어서 차례를 모아 비문을 짓고 이어서 명하노라.

아! 연성이여! 혁혁한 문벌에 큰 그릇이로다.
좌명으로 군운을 붙잡았으니 혁괘 육이를 점침이로다.
표창한 기를 이미 올렸고 황금과 비단도 많이 내리셨도다.
포상하신 성은을 갚으려하여 마침내 몸이 병들도록 충성을 다하였도다.

전조의 일을 맡아 왕명을 받드니 시용에 공적이 많았도다.
옥의 흠은 갈 수 있지만 말의 흠은 갈 수 없다는 것과 황석공의 소서에는 비법이 있도다.


공은 이것을 가슴에 간직하여 행동하고 일을 처리하였도다.
큰 공훈은 산처럼 솟아있고 복록은 냇물처럼 흐르도다.


문무충효는 번성하여 대대로 자손이 이어 가도다.
나는 비석에 명하여 영원히 전해지도록 표하노라.

숭정기원후 네 번째 계해년(철종 14, 1863년) 4월 일에 세우다.

 

 

 

有明朝鮮佐命功臣吏曹典書蓮城君謚威靖金公神道碑銘」
推忠奮義翊戴同德佐命功臣崇政大夫行吏曹典書蓮城君謚威靖金公
神道碑銘?序」 *** 전자체(전서체) ***
資憲大夫禮曹判書弘文館提學 經筵日講官 申錫愚 撰」
綏祿大夫永明尉兼五衛都摠府都摠管 洪顯周 書?篆」
有若堂而高四尺于廣之治西玄川負亥原寔惟蓮城君金公定卿攸藏氏貫安」
山系出高麗左僕射肯弼若侍中渭判三司元祥牧使星慶爲曾祖祖稱母趙氏」
密直副使平壤千?女生于元至正乙酉任爲延康殿直判護軍宗簿副令軍簿」
摠郞中正大夫及事我 太祖策原從功 太宗時佐戡朴苞亂策佐命勳秩視」
崇政封爵田民有券書嘗節制義興軍典吏曹再銜 命赴 朝咸著勞績寢疾」
世宗遣太醫而診內侍而訊?而賜獐肝以病中欲嘗也公感泣 恩造恨無以」
卒萬一報是年七月十五日竟以赴 聞壽七十五? 永樂己亥輟 朝致侑」
贈謚威靖禮備哀榮公?喜南容三復語好讀黃石素書?立 朝處事得力爲」
多嗚呼 聖祖龍興天開一治炳幾達權如山川出雲盖多其人學問於陽村?」
謨於?邨質儉於夏亭皆乘運名世之材若公素負韜略戡平禍亂可以幷駕諸」
公爲 國初英豪豈不偉哉宜其順天?休毓繁厥祉凡三娶判書申翼之新陽」
君盧瑛南平君王和女生五男一女別將沚申出護軍灌別將滌盧出判中樞平」
胡公漑安城尉澣署令安鐵山妻王出平胡之子校勘孟鋼始以科甲進孫琨瑋」
珌珌顯己卯彙征時六代孫就義七代孫沆繼登文科六代孫府使就礪七代孫」
參奉聲大 贈持平聲玉八代孫參奉始聲皆以學行稱錫命錫保以武顯九代」
孫知中樞相斗縣監定五?罹辛丑士禍牧使相鼎十代孫防禦使養一竝參奮」
武勳養心文大諫外裔多達官顯人玄川之?旣成申氏盧氏?王氏葬其下壬」
坐十四代孫樂朋以陶谷李公所撰表來請神道之刻愚辭不獲謹纂次爲文而」
系之以銘 ?嗟蓮城赫閥宏器佐命翊運筮革六二?常旣揭金帛蕃賜」
允?相報聿?殄?秉銓銜 命績懋厥試圭無言?石有書秘公服膺斯勳措」
于事勳烈山峙福履川至文武忠孝衍錫其類我銘牲繫永表玄隧」
崇禎紀元後四癸亥 四月 日立」 

위치 : 경기도 하남시 감북동 157

하남시청에서 둔촌동방향의 180번시도를 타고 15분쯤 가면 배다리

(서하남인터체인지)에 이르게된다.

배다리의 서울한약방앞에서 안촌마을가는 마을버스를 타고

5분쯤가면 종점에서 하차. 두갈래길의 좌측 50m쯤가면 길의 왼편에 위정각이 있고, 위정각 뒷편에 연성군 묘가 있다.
교통정보

시청에서 30-5,30-1번 버스, 1번 마을버스로 15분 감북마을버스

(안촌 : 30분간격) 5분

묘비 글을 지으신 예조판서 신석우(申錫愚)에 대하여
(순조5년 1805 ∼ 고종2년 1868)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성여(聖如), 호는 해장(海藏)이다. 순조34년에 식년문과급제. 용강현감 병조참판 우승지 양주목사 홍문관제학 이조참판 경상도관찰사 예조판서 역임.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글씨와 전액을 쓰신 영명위 홍현주에 대하여

해거도인(海居道人) : 홍현주(洪顯周)의 호, 자는 세숙(世叔), 호는    해거재(海居齋), 약헌(約軒), 정조(正祖)의 딸인 숙선옹주(淑善翁主)에게 장가 들어 수록대부 영명위(永明尉)가 되었다.

풍산인(豊山人), 영의정(領議政) 낙성(樂性)의 손자이자, 우부승지(右副承旨) 인모(仁謨)의 아들이다. 형 석주(奭周)는 좌의정(左議政)을 지냈다, 순조 15년(1815)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가 되었고, 문장에 뛰어났다

 

 연성군 묘소, 화혜택주 묘소,  위정각

 

 

 

위정사 신도비

 

 

 

 

회화나무는 중국이 원산지인데 중국에서는 회화나무를 괴수[槐樹(훼나무 괴, 나무 수)]라 하며 길상목(吉祥木)의 하나로 귀하게 여겼다.
그 기원은 중국의 주(周)나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삼괴국극(三槐九棘)이라 하여 조정의 뜰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고 우리나라로 하면 3정승(영의정, 우의정, 좌의정)에 해당하는 삼공[三公 ; 태사(太師), 태전(太傳), 태보(太保)]이 마주보고 앉도록 하였다는데 있다.

여기서 유래하여 벼슬을 기원하고 의미하는 것으로 발전해나가면서 회화나무를 심어서 출세(出世)하거나 또는 출세의 시작인 과거시험에 합격하면 회화나무를 심어 기념하였던 것이다.
회화나무의 노수(老樹)들은 대개가 고궁, 서원, 문묘, 당대 명문대가들의 뜰에 심어져 있으며,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 "괴(槐)는 허정(虛精)의 정(精)으로서 노괴(老槐:오래된 회나무)는 불(火)을 잘 만들어 신선(神仙)이 깃들어 있어서 그 신기함이 귀히여겨야 한다."라고 표현되어 있다.
옛날에 판관(判官)이 송사를 들을 때 반드시 회화나무를 가지고 재판에 임했다고 하니 회화나무의 정(精:정할 정)으로 하여 진실에 이르도록하고자 함에 그 뜻이 있었고, 훗날 회화나무 3그루를 집 정문 안에 심어두면 그집에 행복이 찾아오고 자녀들이 출세한다라고 생각하며 즐겨심는 정원수로 자리잡은 민속의 나무이기도 하다.

 

고려왕씨 성원록에 나타난 남평군 왕화의 사위 김정경

 

 

 

 

왕화(王和)에 대하여


왕화(王和)

?∼1394(태조 3). 고려의 왕족. 개성왕씨(開城王氏).

 

할아버지는 순화후 유(淳化侯 유)이고, 아버지는 학성부원군 향(鶴城府院君珦)은 공양왕의 숙부이며 고려 신종의 6대손이다.

 

남평군(南平君)에 봉해졌으나, 1392년(공양왕 4) 정몽주(鄭夢周)가 주살될 때 도평의사(都評議司)의 탄핵을 받아 원지에 유배되었다.

 

조선이 개국한 뒤인 1394년(태조 3) 고려 종실들이 다시 거제도에 유배될 때 안동에 투옥되었으며, 이어 수원부에서 국문당한 뒤 주살(죄를 물어 죽임)되었다.

 

 

고려 34대 공양왕
 고려 제34대 마지막 왕(1345~1394). 이름은 요(瑤). 정원부원군(定原府院君) 균(鈞)의 아들.
시호 : 공양대왕 恭讓大王
신종의 7대손, 양양공(襄陽公) 서(恕)의 6대손, 시안공(始安公) 인(絪)의 5대손, 서원후(西原侯) 영(瑛)의 고손자, 익양후(益陽侯) 분(昐)의 증손자, 순화후(淳化侯) 유(柔)의 손자이다. 이성계 일파에 의하여 왕위에 올랐으나 정몽주가 살해된 후, 덕이 없고 어리석다는 이유로 폐위되어, 귀양을 갔다가 2년 뒤에 삼척(三陟)에서 살해당하였다. 이로써 고려는 34대 475년 만에 멸망하였다. 재위 기간은 1389~1392년이다

 

왕화는 공양왕과는 사촌간이다. 사위는 이조판서를 지내고 연성군에 봉군된 안산김씨 김정경이다.

 

위정공 안산군(연성군) 김정경 묘 (경기도 하남시 감북동 57)

 

 현천의 무덤을 완성하고 나서 평산신씨와 교하노씨는 부장하였으며, 개성왕씨는

그 아래에 임좌로 장사 지냈다.

 

 

 

  안산군(연성군) 부인 개성왕씨 화혜택주 묘

 

 

 * 옹주 및 택주 설명

 조선시대 외명부(外命婦) 봉작(封爵)의 하나. 왕자군(王子君)과 종1품 종친의 처(妻)에게 이런 호칭을 붙였다. 군부인은 중국 당나라 때의 외명부제도에서 문무관 3품 이상의 모(母)와 처를 칭하던 데서 비롯되었다.

고려 공양왕 때에는 대군과 군의 처를 구별하지 않고 옹주라 하였으나, 조선 초기에 와서 대군의 처를 옹주, 군의 처를 택주(宅主)라 하여 서로를 구별하였다.

세종 때에는 종실 종1품의 적처(嫡妻)와 공신 정1품·종1품의 적처를 모군부인(某郡夫人)이라 칭하고 군부인의 앞에 읍호를 붙이도록 규정하였다 


 

위정공은 부인을 세 번 맞이하였으니, 판서 신익지,  신양군 노영, 남평군 왕화의 딸이다. 5남 1녀를 낳았다. (부인 : 평산신씨, 교하노씨, 개성왕씨)

 

별장 지는 신씨 소출이요, 상호군 관 · 별장 척은 노씨 소출이요, 판중추 좌참찬

평호공 개와 안성위 대호군 한과 사섬시 서령 안철산 처는 왕씨 소출이다.

 

* 사섬시는 사담서로 개칭되었으며 조폐관청 

저화의 제조와 외거노비의 공포 등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였으나, 동전과 전폐의 주조사업도 관장

 

 

 

연성군(蓮城君) 김정경(金定卿)

신대광의 안산역사이야기 15
신 대 광(원일중학교, 안산향토사연구소)
 
  조선 건국 벽두.
  나라는 건국되었지만 그 기틀이 다져지기까지 혼란한 세월이 이어진다. 고려의 풍속 역시  그대로 남아있었으며, 여러 차례 궁중의 암투도 벌어진다. 이런 혼란과 변혁의 시기에 나라의 초석을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한 안산의 인물로 김정경(金定卿)이 있다. 우리는 그의 일생을 통하여 건국 초, 생생한 역사 개벽의 현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볼 수 있다.
  김정경은 안산 김씨로, 현재의 수암동에서 나고 자랐다.
  김정경은 고려 말에 군부사총랑(軍簿司摠郞)을 역임했는데 이는 병부의 4품 벼슬이다. 그는 고려 말에서 조선 건국으로 이어지는 혼란기에 이성계를 도와 대업을 이루게 되는데, 무장이었던 그가 자연스럽게 이성계의 측근에서 지지 세력이 되었을 것임을 짐작키는 어렵지 않다. 그리하여 조선건국에 일조(一助) 함으로 왕조 개창 후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봉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원종공신이란 누구를 이름인가? 조선시대에 공신 책봉에서 제외된 무수한 유공자들을 포상하는 것이 이른바 원종공신제도 인데, 이는 보다 직접적으로 큰 공훈을 세워 임명된 ‘정공신’ 다음 급에 해당하는, 이른바 ‘부공신’에 해당되는 모든 유공자들을 대상으로 포상한 제도로,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씩 책봉하곤 하였다. 조선 개국 공신을 책봉하였을 때의 원종공신은 1천 6백 명이 넘었으며, 임진왜란 후 책봉된 원종공신인 선무공신의 경우에는 9천여 명이 양산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원종공신은 모두 얼마나 될까?
  조선시대 원종공신의 수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모두 합해 몇 만 명이 넘을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이처럼 수많은 원종공신이 생겨난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국가적 위기 상황이나 불안 정국에서 국가와 왕실에 조금의 공이라도 있는 모든 유공자들을 포상함으로써 국가와 왕실을 안정시키고 위상을 드높이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1400년(정종 2년)에 방간의 난(일명 ‘박포의 난’ 또는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한성부윤이었던 김정경은 난을 진압하고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봉된다. 좌명공신(佐命功臣)은 형제들의 왕권 쟁탈 싸움에서 방원이 형 방간을 몰아내고 사실상 왕으로 등극하는 마지막 과정에서 그를 도운 신하들에게 내린 공훈이다.
  또한 김정경은 1410년(태종 10년), 성절사(聖節使) ― 명나라 황제나 황후 생일에 파견하는 축하 사절 ― 로 명나라에 직접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 후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한 김정경은 고향인 안산에서 여생을 마치게 된다. 현재 그의 묘는 하남시 감북동에 있다.
  안산에 거처하면서 그가 지었다는 정자가 있는데, ‘망해정(望海停)’이라 불린다. 옛날에는 해수가 내륙 쪽으로 들어오는 지형이었으므로 현재의 수암동 일대에서도 바다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김정경은 그 바다를 바라보며 유유자적하며 말년을 보내지 않았을까. 그 당시에 심었다는 은행나무 세 그루 중 한 그루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
  그는 세종 즉위 1년인 1419년에 75세의 긴 삶을 마감하는데 당시로서는 상당히 장수한 셈이다. 그는 왕조가 바뀌는 역사의 현장 한복판에서 함께하였고, 공신으로 책봉되어 ‘연성군(蓮城君)’에 봉해졌으며,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안산 수리산(修理山) 자락에서 여생을 보내었다.
  장구(長久)한 역사 속 급변하는 왕조 교체기에서 자신의 삶을 고뇌하고, 사랑하며, 치열하게 살다간 인간 김정경의 길고도 짧은 생을 통해 굽이굽이 흘러 온 안산 역사의 한 자락을 조용히 되짚어 본다.

 

600년전 국내 最古 병서 발굴 : '황석공소서'


600년전 국내 最古 병서 (서울=연합뉴스)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 병서(兵書)인 황석공소서(黃石公素書). 조선 태종 5년(1405) 11월 제주도에서 당시 제주목사 이원항(李原恒)과 제주판관 한이(韓彛) 책임 아래 목판으로 판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 박철상 제공 >>
1405년 제주도판 '황석공소서'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 병서(兵書)가 발굴됐다.

고문서 연구가 박철상(42)씨는 조선 태종 5년(1405) 11월에 제주도에서 당시 제주목사 이원항(李原恒)과 제주판관 한이(韓彛) 책임 아래 판각한 '황석공소서(黃石公素書)'를 발굴했다고 4일 말했다.

600년전 국내 最古 병서 (서울=연합뉴스)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 병서(兵書)인 황석공소서(黃石公素書). 조선 태종 5년(1405) 11월 제주도에서 당시 제주목사 이원항(李原恒)과 제주판관 한이(韓彛) 책임 아래 목판으로 판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 박철상 제공 >>

황석공소서란 황석공이란 사람이 유방을 도운 한나라 개국공신 장자방, 즉 장량(張良)에게 전수했다는 병서다. 현전하는 판본은 이 때의 텍스트가 아니라 후대에 누군가가 만들어낸 위서(僞書)라는 견해가 있기는 하지만, 손자(孫子) 등과 더불어 무경칠서(武經七書)에 포함되어 병가(兵家)에서는 매우 중시된 텍스트였다.

목판본인 이 황석공소서 1책은 크기가 19.5 × 13.5cm에 22장(44쪽)이며 각 쪽당 10행 20자에 걸쳐 텍스트를 기록했다.

앞 부분에는 송나라 때 인물인 장상영(張商英.1043-1121)이 쓴 서문에 붙었으며 끝에는 판각에 관한 사정을 기록한 대목이 발견된다.

박씨는 "이 판각 부분이 탈락이 극심하지만 "(年)十一月日濟州…刻手僧性"과 같은 구절이라든가 "兼勸農兵馬團練判官儒學敎授官 韓彛, 兼勸農管學兵馬使濟州道按撫使 李原恒"과 같은 대목을 판독할 수 있으므로 이 황석공소서가 조선 태종 때 제주에서 목판본으로 찍어낸 판본임을 의심할 나위가 없다"고 말했다.

600년전 국내 最古 병서 (서울=연합뉴스) 현존하는 국내 최고(最古) 병서(兵書)인 황석공소서(黃石公素書). 조선 태종 5년(1405) 11월 제주도에서 당시 제주목사 이원항(李原恒)과 제주판관 한이(韓彛) 책임 아래 목판으로 판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 박철상 제공 >>

따라서 이 황석공소서는 현전하는 국내 최고 병서이자 현전하는 최고 제주도 간행물이 된다고 박씨는 덧붙였다.

병서는 삼국시대 이후 한반도에서 줄곧 간행됐지만 이번에 발견된 황석공소서 이전으로 올라가는 판본은 하나도 없으며, 나아가 1296년(고려 출렬왕 22년)에 간행됐다고 알려진 금광명경문구소(金光明經文句疏)가 제주도판 최고 인쇄물이라 하지만 현전하지는 않는다.

이번 황석공소서는 형태 측면에서는 고려시대 판본의 특성을 농후하게 띈 것으로 밝혀짐으로써 한국 인쇄술사 연구에서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박씨는 말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호조참판 김성대묘비


연대

유형/재질

크기

소재지

서체

찬자/서자

/각자

1727년(영조3년)

비문 / 돌

높이 206cm, 너비 74cm, 두께 46cm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리

해서(楷書)

좌의정,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 김창집

/ 미상

 

 

 

 

 

해석문


김성대묘비


유명조선국 증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행 통덕랑 제릉참봉 김공성대묘

배 증정부인수원백씨부좌


공의 휘는 성대이고 자는 이원이며, 본관은 안산으로 고려시대 좌복야를 지낸 김긍필의 후손이다.

우리 조선조에 들어와 휘 정경이 계셨는데 태종 때 좌명공신으로 숭정대부 이조전서를 지내고 연성군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위정공이시다. 위정공께 막내아들 휘 개가 계셨는데 숭정대부 이조판서로 시호가 평호공인데, 이분이 공의 6대조이시다. 부호군 휘 언량과 사복시정으로 증직된 휘 태록과 좌승지로 증직된 휘 찬은, 바로 공의 증조와 조부와 아버지이며 어머니는 안동 김씨로 김정삼의 따님이다.


공은 천계 임술년(광해군 14, 1622년) 정월 22일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행의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었다. 병자년(인조 14, 1636년)에 어버이를 모시고 오랑캐를 피하여 산중으로 들어갔는데 그때에 공은 15,6세의 소년이었지만 날마다 한 가마의 쌀을 등에 짊어지시고 험한 길을 넘어 운반하셨다. 비록 난리 속이었지만 부모 공양에 빠뜨림이 없었던 것이다.

신묘년(효종 2, 1651년)에 아버지 승지공의 상을 당했는데, 병환에 계실 때부터 탕제 다리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고, 손수 분뇨를 맛보아 달고 쓴 것을 징험하였으며, 위독하시게 되자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올려드려 상당 기간 효험을 얻었었다.


갑인년(현종 15, 1674년)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자제들이 늙은 아버지께서 몹시 슬피 우셔 몸 상하심을 걱정하여 권변을 청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았으니, 그 지성스런 효성이 이와 같았다. 이 정성을 미루어 여러 누이와 아우 및 조카에 이르기까지 공경과 사랑이 지극히 독실하였으니, 향당에서 탄복하여 마지않았다.

공이 일찍부터 과거시험장에 출입하여 성대히 문장에 대한 명성이 있었으므로 일시의 선비들이 모두 먼저 등제하라고 사양하였다. 공도 이에 이르기를, “시험 하나도 취할만 하지 못하는데 여러 차례 향시에 입격하는군요.”라고 하였다. 그러나 끝내 성시에는 낙제하므로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나이 72세에 비로소 진사에 급제하여 방목이 보고되니, 주상께서 관직을 제수하라는 특명이 있어 즉시 제릉참봉에 제수되니 특이한 은전이었다. 이에 공께서 감격하여 주상의 은혜를 사례하였으나 얼마 뒤에 벼슬을 버리고 출사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나 을해년(숙종 21, 1695년)에 병으로 돌아가시니 2월 4일이었다. 후에 아들 절도사 석명의 추은으로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아내 백씨는 정부인에 추봉되었는데 부사 대진의 따님으로, 착하고 어질어 부인의 덕이 있었고 공보다 5년 후에 돌아가셨다.

공께서는 5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바로 절도사요, 2남 석범은 무과로 절충을 지냈고, 3남 석규는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일찍 죽었으며, 4남 석구는 문학에 종사하고 있고, 5남 석보는 무과 중시에 급제하여 도총부 경력을 지냈고, 딸은 사인 이제안에게 출가하였다. 상규는 석명의 소생이요, 상두 · 상진과 감찰 서명신, 사인 이탁, 이환의 처는 석범의 소생이요, 이세무의 처는 석규의 소생이요, 상태 · 상정 · 상복과 조윤적의 처는 석구의 소생이요, 상기 · 상익 · 상벽 · 상성은 석보의 소생이요, 담석과 김요경 · 정운길의 처는 이제안의 소생인데 아들은 어리다. 상규는 1남 양오를 두었고, 상두는 4남을 두었으며, 상태는 1남을 두었고, 양오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공은 사람됨이 질박하고 입이 무겁고 말이 적어,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접함에 진실하고 꾸밈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하였고, 이미 늙어서도 여전히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집이 영평 백운산 밑에 있어 자못 전원으로 숲과 시내의 경치가 좋았고, 자손들이 그 집 근처에 둘러 살면서 각자 농사짓고 뽕과 삼을 심고, 혹은 출사하여 고을 수령을 지내면서 가볍고 따뜻한 옷이며 맛있는 반찬을 두루 갖추어 공을 봉양하였다. 공께서 좌우로 봉양을 받으면서 조용히 문묵을 스스로 즐기고 생산의 일에 대해서는 일체 묻지 않았다. 혹 흥이 나면 자손들을 거느리고 이웃사람들을 불러 함께 산수 사이를 거닐면서 소일하니, 사람들이 그의 청한한 복은 누구도 미치기 어렵다고 일컬었다. 아들의 고을로부터 무슨 선물이 들어오면 문득 얼굴을 찡그리고 “백성들을 고달프게 하는 것이 아닌가?”라 하시고 매양 청렴결백과 절제근검을 당부하여 경계하였다. 절도사가 여러 지방을 역임하며 간소하다는 것으로 칭찬받았으니, 그 법도를 얻음이 이와 같아서이다.


공을 집에서 남쪽의 도성산 아래 정좌의 언덕에 장사 지냈고 백부인을 그 왼쪽에 부장하였다. 절도군의 형제가 장차 묘 앞에다 비석을 세우고자 나 창집에게 비문을 부탁하였다. 나는 진실로 글을 못하는데 어찌 영원히 전할 글의 부탁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다만 생각해보니, 옛날에 나의 선군께서 백운산의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하고 이곳에 사실 뜻이 있었다. 선군께서 일찍이 혼자 말을 타시고 이 산중으로 오시어 공을 만나 머무르셨으며, 시를 지어 산을 나누는 약속을 증거로 삼았었다. 내가 때때로 따라가서 가만히 보니 공은 용모가 헌걸차고 순박하여, 마음속으로 덕의가 훌륭한 분임을 알았었다. 그 후 선군께서 나에게 명하여 이씨의 낚시터 위에다 자그마한 집을 짓게 하여 후일에 거처할 계교를 삼았는데, 이곳에서 공의 집과의 거리는 몇 리였다. 내가 이로 말미암아 공의 집을 드나들면서 더욱 친하여졌다. 그러나 선군께서 마침내 그곳으로 가시지 못하고 기사년(숙종 15, 1689년)의 사화에 돌아가셨다.


공께서 이에 우리 모자와 형제의 궁박하고 의지할 곳이 없음을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를 맞아 자기 집 아래 집을 마련하고 또 힘을 다하여 옛 집을 수리하고 거처를 정하여 주셨다. 무릇 어루만져 주시고 도와주심에 극진한 은의가 있어 비록 가슴속이 불처럼 타올랐으나, 돌아보지 않으셨다. 지난날 그 어진 마음과 옳은 기개가 아니었다면, 쇠퇴한 세속에 멀리 생각하심이 어찌 여기에 미칠 수 있었겠는가? 내가 공에게 실로 종신토록 감격함이 있어 그 여러 아들들과 모두 서로 대하길 골육과 같이 지내었다. 이제 이 묘문의 부탁이 또한 이 때문이라. 어찌 차마 글을 못한다고 사양하겠는가? 드디어 감히 참람하고 망녕됨을 헤아리지 못하고 본말을 간략히 이와 같이 기록하였다. 아아! 이 어찌 공의 사행을 영원히 전하는데 족하다 하겠는가?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감춘추관사 세자부 김창집 지음.

제 4남 석 달은 피눈물을 흘리며 삼가 글씨를 쓰다.


비문이 이루어진 뒤 5년 을미년(숙종 41, 1715년)에 백운산 아래 구정천 기방을 뒤로 한 언덕에 이장을 하였고, 다시 그 뒤 13년만에 비로소 비석을 갖추게 되었다. 모든 자손들의 현달한 자와 어리거나 성인이 된 사람 중 미처 기록되지 못한 자를 삼가 다음에 추가로 기록한다. 석 달은 곧 석구의 고친 이름이다. 석보는 수사, 상두는 군수, 상태는 감찰, 상정 · 상기 · 상익은 급제, 상벽은 부사이다. 상두는 5남을 두었는데, 양호는 부사, 양일은 선전, 양정 · 양중은 모두 무과 급제하였고, 막내는 양검이다. 상진은 1남 1녀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며, 상태의 아들은 양록, 딸은 아직 어리다. 상정은 2남 2녀를 두었고, 상복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고, 상기의 아들은 양성이다. 상익은 3남 2녀를 두었고, 상벽은 4녀를 두었으며, 상성은 2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양오는 4남을 두었으니, 처눌 · 처밀 · 처열 · 처필이고, 양일은 3남을 두었으며, 양중은 1녀를 두었다. 처눌은 1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외손과 증손과 현손이 매우 많으나 생략한다.


숭정기원후 두 번째 정미년(영조 3, 1727년) 3월 일 세움.


판독문

有明朝鮮國 贈嘉善大夫戶曹?判兼」

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行通德郞」

齊陵?奉金公聲大墓」

配 贈貞夫人水原白氏?左」

公諱聲大字而遠安山人高麗左僕射肯弼之後入我 朝有諱定卿爲 太宗佐命功臣崇政吏」

曹典書封蓮城君謚威靖公威靖有季子諱漑崇政吏曹判書謚平胡公寔公六代祖也副護軍諱」

彦樑 贈司僕寺正諱台錄 贈左承 旨諱讚卽公曾祖祖考若考而?安東金氏鼎三之女公」

以天啓壬戌正月二十二日生自少行誼過人丙子奉二尊人?冠山谷中時公甫成童能日負一」

斛米越險輸致以故雖在?攘而供養無乏辛卯遭承 旨公憂目疾時湯劑不委人手嘗糞以驗」

甛苦及其革也?旨進血得以復甦者有間甲寅丁內艱子弟愍其老而毁泣請權變竟不聽其誠」

孝如此推以及於諸姑弟姪敬愛篤至鄕黨爲之歎服公蚤游場屋蔚有文聲一時輩流咸讓其先」

登公亦謂一第不足取而屢捷解額輒困於省試??留落人皆嗟惜?七十二始中進士榜 聞」

特命除職卽授 齊陵?奉盖異數也公感激謝 恩俄而棄不仕越二年乙亥以疾卒二月初四」

日也後以子節度使錫命推 恩贈戶曹?判配白氏貞夫人府使大璡之女淑哲有婦德後公五」

年以卒公凡生五男一女男長卽節度使次錫範武科折衝次錫圭武科早?次錫龜業文次錫保」

武科重試都摠府經歷女適士人李齊顔相奎錫命出相斗相軫監察徐命新士人李濯李?妻錫」

範出李世懋妻錫圭出相兌相鼎相復曹潤迪妻錫龜出相箕相翼相壁相星錫保出聃錫金堯鏡」

鄭運吉妻李出一男幼相奎一男養吾相斗四男相兌一男養吾一男二女竝幼公爲人木訥寡言」

待人遇物眞實無矯飾少好讀書旣老猶手不釋卷家在永平白雲山下頗有田園林澗之勝子姓」

環其宅而居各自理??藝桑麻或出爲州郡具輕?甘?以奉公公則左右受養肅然以文墨自」

娛不復問生産事興至雋子姓呼?竝?佯山水間人謂其淸福不可及然見有物自子邑來輒蹙」

然曰無乃病民乎每申戒以廉白節儉節度君在弁?中以簡素著稱其得於義方者然也公葬于」

宅南道成山下負丁之原白夫人?其左節度君兄弟將樹石墓前屬昌集識其隧昌集誠不文何」

足以當不?之託獨念昔者先君子愛白雲山水有卜居之志嘗匹馬會公於山中留詩證分山之」

約昌集時從行竊公儀度豊偉氣味淳?心知爲長德人矣其後先君子命昌集作小屋於李氏」

釣臺之上以爲異日計去公家盖數里昌集因得與公還往益親然先君子竟未能歸而有己巳之」

禍公於是哀昌集母子兄弟窮無所歸?迎置宇下因又出力葺舊屋以定其居凡所以撫視?救」

曲有恩意雖凶?如火而不顧問焉向非其仁心義氣遠邁衰俗何能及此盖昌集於公實有沒身」

之感而其諸子皆相視如骨肉今?墓文之託亦以此耳又何忍以不文辭遂敢不揆?妄?記其」

本末如右嗚呼此豈足以不朽公也哉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 經筵事監春」

秋館事 世子傅金昌集述 ?四男錫達泣血謹書 文成後五?乙未移?于白雲山下九政遷」

負己之原又後十三年碑始具凡子姓之顯若冠若?而未及載者謹追識于左錫達卽錫龜改名」

也錫保水使相斗郡守相兌監察相鼎相箕相翼及第相壁府使相斗五男養浩府使養一宣 傳」

養正養中及第皆武次養儉相軫一男一女幼相兌男養祿女幼相鼎二男二女相復一男二女竝」

幼相箕男養性相翼三男二女相壁四女相星二男竝幼養吾四男處訥處謐處說處養一三男」

養中一女處訥一男竝幼外出曾玄甚蕃?略焉 崇禎紀元後再丁未三月 日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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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보(金錫保)ㆍ1664(현종5)~1774(영조17)

 

무신으로 자는 여극(汝極), 호는 죽헌(竹軒), 본관은 안산. 참봉 성대(聲大)의 자이다.

1693년(숙종19)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지냈다.

1698년(숙종24)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를 거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흥덕현감(興德縣監)을 역임했다.

1705년(숙종31) 훈련원판관(訓練院判官)이 되고 이어서 도청부도사(都廳副都事),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으로 가리포(加里浦)에 출진하였다가 사고가 발생하여 파직되었다.

1710년(숙종36)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고 이어서 중화부사(中和府使)를 거쳐 순무사(巡撫使)가 되었다.

1712년(숙종38) 안동영장(安東營將)으로 좌의정 김창집(金昌集)이 연행(燕行)할 때 수행하였다.

1713년(숙종39) 순천영장(順天營將) 1716년(숙종42) 창성부사(昌城府使)에 이어 삼수부사(三水府使)를 역임했다.

1726년(영조2)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 1727년(영조3)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 1728년(영조4) 제주목사(濟州牧使)에 배수되었다.

묘는 이동면 연곡리에 있다. 묘갈명(墓碣銘)은 최익현이 지었다.

 

김석명(金錫命)ㆍ1642(인조20)~1717(숙종43)

 

무신으로 이동면 연곡리에서 출생하여 성장하였다.

자는 여삼(汝三), 본관은 안산 촌로 성대(村老 聲大)의 자이다.

1670년(효종11) 천거로 선전관(宣傳官), 도사(都事)를 역임하고 강동현감(江東縣監)이 되었다. 1674년(숙종6) 훈련원 부정(訓練院 副正)이 되었다가 순천(順川)과 박천(博川)군수를 역임하고 창주진관첨절제사(昌州縝管僉節制使)로 승임되었다.

1686년(숙종12)에는 홍주영장(洪州營將)에 임명되었고 이어서 이천부사(伊川府使)로 전직되어 선정을 베풀어 치적이 많았다.

1695년(숙종21) 부친상(촌로)을 당하여 사직 탈상후 다시 죽산부사(竹山府使)에 임명되었다.

1700년(숙종26) 진무중군(鎭撫中軍)으로 공적이 인정되어 품계가 종이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으며, 훈련도감(訓練都監), 좌별장(左別將)을 역임하고 통진부사(通津府使)에 임명되었다.

1704년(숙종30)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호서병마절도사(湖西兵馬節度使)로 나갔다.

임기가 만료되어 다시 훈국별장(訓局別將)이 되었다.

1708년(숙종34)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 副摠管)이 제수되고 이어서 강계방어사(江界防禦使)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다시 동지중추부사, 수어사, 중군 등을 역임하고 1717년(숙종44)에 별세하였다.

묘는 이동면 백운산 아래 있으며 묘비명(墓碑銘)은 영의정 유척기(兪拓基)가 지었다.

 

김상두(金相斗)ㆍ1674(숙종15)~1752(영조28)

 

무신으로 이동면 연곡리에서 출생, 본관은 안산, 자는 산앙(山仰)

1711년(숙종37)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고 이어서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덕흥현감(德興縣監), 서천군수(舒川郡守) 등을 역임하고 1728년(영조4) 성진첨사(城津僉使)에 제수, 이어서 경흥부사(慶興府使)를 거쳐 전라도수사로 임명되었다.

1743년(영조19) 내직으로 들어와서 도총부부총관(都摠府副摠管)으로 있다가 여주목사(麗州牧使)로 나갔다.

1752년(영조28) 노환으로 별세하니 향수가 78세이었다.

묘는 이동면 백운산하에 있다.

묘비명(墓碑銘)은 영의정 유척기(領議政 兪拓基)가 찬하였다.

 

김처곤(金處坤)ㆍ1726(영조2)~1803(순조3)

 

무신으로 이동면 연곡리에서 출생하였다. 초명은 처관(處觀), 자는 중빈(仲賓), 본관은 안산, 연성군(連城君) 정경(定卿)의 7세 손이다.

1753년(영조29) 무과에 급제하여 1755년(영조31) 선전관(宣傳官)이 되었고 이어서 훈련원주부(主簿), 판관(判官), 부정(副正), 도청부도사(都廳副都事), 장원서별제(掌苑暑別提),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보성군수(寶城郡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활을 잘 쏘아 매년 봄, 가을 전정(殿庭)에서 기사(騎射)할 때 장원하여 동호(動弧-붉은 칠을 한 화살로 활을 잘 쏘는 사람에게 왕이 하사하는 물품)를 하사 받기도 하였다.

 

김성발(金聲發)ㆍ1624(인조2)~1670(현종11)

본관은 안산, 자는 정이(正而), 호는 반성재(反省齋)로 촌로(村老) 김성대(金聲大)의 아우이다. 학자로서 효성과 우애가 투철했다. 동음사(洞陰祠)에 배향 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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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명을 지으신 영의정 김창집에 대하여

 

1648(인조 26)∼1722(경종 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성(汝成), 호는 몽와(夢窩). 좌의정 상헌(尙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광찬(光燦)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수항(壽恒)이며, 어머니는 호조좌랑 나성두(羅星斗)의 딸이다. 창협(昌協)·창흡(昌翕)의 형이다. 이른바 노론 4대신으로 불린다.

 

1672년(현종 13)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1675년 아버지 수항이 화를 입고 귀양가자 과거 응시를 미루었다. 1681년(숙종 7) 내시교관을 제수받았고, 1684년 공조좌랑으로서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정언(正言)·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 때 아버지가 진도의 유배지에서 사사되자, 귀향해 장례를 치르고 영평(永平)의 산중에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정국이 바뀌어 복관되고, 병조참의를 제수받았으나 사임하였다.

 

다시 동부승지·참의·대사간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그 뒤 철원부사를 제수받았는데, 이 때 큰 기근이 들고 도둑이 들끓어 민정이 소란하자 관군을 이끌고 토평하였다.

 

강화유수·예조참판·개성유수 등을 역임하고, 호조·이조·형조의 판서를 지냈다. 1705년 지돈녕부사를 거쳐 이듬 해 한성부판윤·우의정, 이어서 좌의정에까지 이르렀다. 1712년에는 사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 해 귀국, 1717년 영의정에 올랐다.

 

노론으로서 숙종 말년 세자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다가 소론의 탄핵을 받았다. 숙종이 죽은 뒤 영의정으로 원상(院相 : 나이어린 왕을 보필하던 재상급의 원로 관료)이 되어 온갖 정사를 도맡았다. 경종이 즉위해 34세가 되도록 병약하고 자녀가 없자, 후계자 선정 문제로 노론·소론이 대립하였다.

 

1721년(경종 1) 다시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상소해, 처음에 경종은 대소 정사를 세제에게 맡길 것을 허락했으나 소론의 격렬한 반대로 실패하였다. 수개월 후 소론의 극렬한 탄핵으로 노론이 축출되고 소론 일색의 정국이 되었다. 곧 이어 소론의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 등이 노론의 반역 도모를 무고해 신임사화가 일어나자,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듬 해 성주에서 사사되었다.

 

1724년 영조 즉위 후 관작이 복구되었으며, 영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영조 때 과천에 사충서원(四忠書院)을 세워 이이명·조태채·이건명과 함께 배향했으며, 거제의 반곡서원(盤谷書院)에도 제향되었다. 저술로는 ≪국조자경편 國朝自警編≫·≪몽와집≫ 등이 있다.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참고문헌≫ 肅宗實錄
≪참고문헌≫ 景宗實錄
≪참고문헌≫ 英祖實錄
≪참고문헌≫ 國朝榜目
≪참고문헌≫ 辛壬提要
≪참고문헌≫ 黨議通略
≪참고문헌≫ 夢窩集

 

조선을 뒤흔든 아버지와 아들
지은이: 이종호 | 브랜드: 역사의 아침 | 출간일: 2008-10-24
 

너희들은 마땅히 (사형당하는) 나를경계 삼아 항상 겸손하게 물러나려는 뜻을 갖고 벼슬에서는 높이 드러나는 요직을 피하도록 해라. 집에 거처할 때는 공손하고 검소할 것이며, 사람을 사귐에 신중하고 의논하는 말은 간소하게 하여라.


(……) 너희들은 여러 자식들을 부지런히 가르쳐서 문헌에 전하는 충효의 가르침을 잃지 않도록 하고, 가문을 지키되 반드시 과거를 보아 벼슬할 필요는 없다. 기사년 4월 초7일 문곡文谷(김수항의 호) 늙은이가 아들 창집, 창협, 창흡, 창업, 창즙에게 주노라. 그리고 여러 자손들이 자라면 역시 이 글을 보여주도록 하여라.

(224쪽, ‘죽어서야 깨달은 아버지의 유훈 : 김수항-김창집’ 중에서) 
 
 
 

高麗贈尙書左僕射上柱國邵城縣開國侯李公許謙神道碑銘幷序

 

余嘗謂爲人肇祖創可繼之業樹不拔之基孫麗不億歲垂百古.有若天保而神護者.是孰使之然哉.及乎閱世旣久歷數今古.人未有爲家國自致者.適見其升沈興衰之循環瞬目則.輒瞿然心語曰曷爲其然也嗟夫天長地久.人多如雨點.其來也無謂.其去也無憑.風烟之聚散而已.草樹之腐朽而已.乃若豊功偉烈爲國楨??之土而命之氏封其?而立其宗者.或不能千百之一二以千百一二之人.爲能保有閥閱.傳之屢百代計以鉅萬戶爲餘人所誦慕焉則其必有修之豊積之厚.不期然而然也.歲乙亥之秋仁川李氏大宗會長南浩翁以僉宗議袖譜牒世德等諸文獻而踵余熊津之靑儒堂謁其始祖顯刻之役閱歲餘文未克就不惟不遑所不敢爾.其請不但已.謹受而卒業按舊譜公諱許謙實爲邵城氏一世之祖焉.邵城氏遠昉於駕洛國首露王王立許氏黃玉爲后有子十人比其薨也.王哀戚甚且感后言賜二子以后姓.金之爲許是已.又按家錄有諱奇以首露王之裔.新羅景德王朝官至兵馬使大匡.唐玄宗天寶十四年乙未冬.有祿山亂.翌年二月奉使至蜀.帝嘉甚.贈之以五古一篇而.益致引重眷戀之意.丁酉復從帝還都.賜皇姓李氏封邵城伯.許復爲李而.或稱以李許複姓焉.厥後失系考諸文正公之?所撰皇考文忠公公壽誌文稱邵城伯爲十三代祖文忠之於公爲玄孫則邵城間公九代也家錄以奇儉波貴浚系之公上而書以獨子則.於公五代也壬戌譜及邵城世德幷系以九代與上誌文所載代數不無契合而若其諱與事蹟則有不免杞宋之莫徵矣無寧舊譜不從諸說而斷以公爲一世者.豈亦闕疑謹重之道也歟噫武成經也鄒夫子止云取二三策而已.以是銘公則庶免爲杜撰之歸矣公生於羅季事麗朝.歷大官襲封邵城伯後贈尙書左僕射上柱國邵城縣開國侯食邑一千五百戶生卒年月及官階履歷不著.藏在仁川文鶴山下看雉島辛坐原.術者謂龜形配慶州金氏父工部侍郞.樂浪君殷說祖敬順王墓與公同?.嗣後大昌.是州之縣而郡.郡而府.未始不由於仁川氏.雖尋常行過.知其爲名墓碩塚而指點焉矜式焉苾芬孝祀勿替引之.寧不休哉長子翰.中樞副使.累贈門下侍中諡文景二子訥大將軍三子?右僕射女適安山金殷傅知中樞戶部尙書中樞使贈上柱國安山郡開國侯長房孫子淵推誠佐世保社功臣門下侍中上柱國慶源郡開國公食邑三千戶配享文宗廟庭子祥尙書右僕射歷事三朝忠義堂堂子若孫幷登台鼎人有作詩賀之者曰庭下芝蘭三宰相門前桃李十公卿次房孫成幹上將軍檢校太子小保三房孫聰顯禮部尙書曾以下歷擧其著顯者而內外椒房.之親.及女壻若而人別爲之採入.古無例也.蓋有非常之人則宜乎史蹟之非常而文不容苟焉而已子淵八男?守太傅進太師門下侍中慶源伯諡貞憲?殿中少監碩兵部侍郞東北面兵馬使工部尙書?門下侍郞平章事韶顯家出法名眞應諡惠德王師顥門下侍郞平章事守太傅贈慶源伯諡景德?贈門下侍郞平章事守太傅顔門下侍郞平章事諡襄愼曰預歷事六朝翰林學士政堂文學進中書侍郞平章事諡文顯曰?號金剛居士文德殿太學士判尙書吏部事監修國史門下侍郞平章事諡文良卽子祥二男也曰資仁兵部侍郞右諫議大夫尙書左丞中樞院副使曰資義中樞院使宣宗朝奉使如宋有聲譽曰資玄號息菴又號希夷諡眞樂登第爲大樂署丞棄官入淸平山蔬食布衣樂道終身.退溪先生詩以序之?稱其淸修苦節曰資德諡莊懿中書侍郞平章事曰資謙門下侍中中書令朝鮮國公曰資諒守司空中書侍郞平章事曰公壽字元老諡文忠天資宏厚兒時外祖崔文和公惟善撫其頂曰此兒當爲大器.及長力學登第推忠衛社同德功臣開府儀同三司門下侍中上柱國曰彦林工部尙書右僕射曰軾金紫光祿大夫尙書左僕射?知政事判尙書戶部事曰之?卽文正公政堂文學守司空左僕射判西京留守事有直節能文章嘗侍從.西都有詩膾炙人口至朝鮮世祖朝採入樂府曰之茂門下侍郞平章事曰光縉中書侍郞平章事諡貞懿曰仁老號雙明齋文章鳴世.明宗朝擢魁科以書狀官如宋謁考亭夫子得聞爲學之要所著有銀臺雙明破閑三集行于世曰藏用政堂文學中書侍郞平章事太子太傅門下侍中諡文眞文章絶倫一時大作多出其手元宗甲子從王如元時元要我援軍緊迫不已.公敏於專對.事竟得解元帝親賜宴至再曰作臣官門下侍中痛斥妖僧.被貶黜曰.?號永慕齋中顯大夫典醫監與鄭圃隱李石灘李遁村諸賢相善性純孝有米櫃之感事聞國王遣按廉使竪雙碑以褒之曰元紘登第有詩聲政堂文學麗革以節流于仁川有喜晴及.新亭詩載在權陽村集其子?監正太祖龍飛守罔僕義灌文科太宗朝京畿咸鏡兩道監司陞資憲吏曹判書曰賢佐大匡輔國崇祿大夫慶城府院君曰萬英仁川府院君曰文和號烏川斥佛崇儒左?贊議政府事兼藝文館大提學贈領議政諡恭度有六男位幷卿宰曰若稽古坤殿曰元成太后曰元惠太后曰元平王妃卽金殷傅之三女而於公獅孫也曰仁睿太后?仁敬仁節兩王妃子淵之女而間公三代也曰元信王后?之女曰思肅太后碩之女曰長慶王妃顥之女曰貞信王妃預之女而其女爲敬和王妃者間公四五代也曰文敬太后延德王妃福昌王妃資謙之三女而間五代也曰恭讓世子嬪元紘之女而間十二代也至漢朝坡平尹?女爲貞熹王后寔恭度之外孫而間十五代也東床之達而爲人始祖與中顯祖者則曰尹瓘籍坡平門下侍中判尙書鈴平縣開國伯諡文肅成幹之壻也曰金義元籍光山檢校太子太師戶部尙書兼三司使特進金紫光祿大夫諡忠貞碩之壻也曰南平文公元平章事諡貞敬?之壻也曰江陵金仁存檢校太師門下侍中諡文成顥之壻也若夫源遠而派益分代久而孫愈繁則餘他科宦簪笏忠孝德學之蔚有聲望者多不能盡記嗚呼.詩不云乎維嶽降神生甫及申麗興之初公?應運挺生巍勳嘉謨裕乎己而傳諸後.世臣林立而.食列鼎.賢媛輩出而.母萬民.儼乎爲宗廟之主?.社稷之源府實東方有史之所未曾有也.?亦盛矣曾於?政時公墓近爲農郊.至光復後自政府區劃城市.陵谷之變.朝不慮夕.?其滄桑之貿遷有如是矣?者.諸苗裔同心協謀.旣認許當局而淨化塋域.又復醵出巨자無遠或忽無人或漏而.齋舍凉?增制移建.旣落之.治豊珉以侈墓噫如今板蕩.滔滔是遺親忘本.此豈易究而易圖者哉將見仁川氏之興未艾而.向所稱孫麗不億傳之屢百代者.幸余言之靡錯也是宜銘銘曰

仁川之李出自首露.孰配至尊黃玉許后后感王衷.二子從許.阿?諱奇.奉使天寶奔命于蜀.祿山可討.錫之皇姓.帝衷是誘.杞宋莫徵.發歎宣父公生麗興寔天啓佑封之邵城錫之民戶公爲一世昭昭舊譜.子姓內外高步雲路貂蟬滿堂孰非公輔.賢媛鍾毓十數國母.?公厚蔭.以庇以燾.有?佳城遵彼鹹鹵.百世在前萬代在後.長發其祥受天之祜.我書于石其辭不誣

歲舍丙子流火節         月城 李鍾洛 撰

 

해설

고려증상서좌복야상주국소성현개국후이공허겸신도비명병서

 

 

 나는 일찍이 말하기를 「한 씨족의 始祖가 되어 이어갈 수 있는 偉業을 創造하고 확고한 터전을 수립하여 불억(不億:많은 수효를 말함)의 後孫으로 悠久한 歲月에 걸쳐 하늘과 신의 保護를 받은 것과 같기에는 그 누가 시켜서 그러한 것인가」라고 했다. 급기야는 많은 世故를 겪으면서 古今의 사람들을 가늠해 보니 거의가 家庭이나 國家를 위하여 자기의 할 수 있는 힘을 다하는 자가 없음으로서 덧없는 興亡盛衰가 瞬息間의 循環反覆을 보게 되었다. 나는 두려운 듯이 마음속으로 말하기를 「어찌하여 그렇게 되었나?」

  아! 天地는 유구하다 빗방울처럼 많은 사람들은 意義없이 왔다가 根據없이 가게되니 風烟과 같이 모였다 흩어지고 草樹와 같이 ?어 없어질 뿐이다. 그러한 와중에서 풍성하고도 偉大한 勳業으로서 國家의 틀이 되어 임금이 土地와 성씨를 내려주며 爵을 封하고 宗을 세울 정도인 사람은 아마도 千,百명 가운데서 하나 둘도 채 못될 것이다. 천 백분의 一, 二 밖에 안되는 소수만의 사람으로서 훌륭한 門閥을 保有하여 누백대에 전해지고 몇萬戶로 헤아려서 餘他사람들의 欽慕대상이 되기에는 반드시 豊富한 修養과 累積된 德望의 土臺에서 그렇게 되길 바라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된 것이다.

  乙亥年 가을에 仁川李氏大宗會長南浩氏가 僉宗의 決議에 따라 譜牒과 邵域世德등  모든 文獻을 가지고 公州의 靑儒堂으로 나를 찾아와 始祖의 신도비문을 要請했다. 一年이 지나 도록 글이 이뤄지지 못했으니 겨를을 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不敢했기 때문이었는데 끊임없는 要請에 삼가 붓을 들게 되었다. 舊譜를 살피건대 公의 諱는 許謙이니 실로 인천이씨의 一世祖가 된다. 인천이씨는 駕洛國 首露王에서 비롯되었는데 王이 許氏 諱 黃玉으로 王后를 삼아 十兄弟의 아들을 두었더니 돌아감에 미처 王은 심히 哀悼하고 또한 后의 말씀에 感動하여 두 아들에게 모성을 따르게   하니 金氏로서 許氏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또한 家錄을 살피건대 諱 奇는 首露王의 後孫으로서 新羅 景德王 때 벼슬은 兵馬使大匡에 이르렀고 唐나라 玄宗 天寶十四年乙未年 겨울에 安祿山의 난리가 일어나자 이듬해 二月에 使臣의 명을 받들고 巴蜀에 이르니 唐帝는 勞苦를 가상히 여겨 五言古詩一篇을 기증하여 引重과 眷戀의  뜻을 전하고 다음해 丁酉年에 唐帝를 따라 還都하자 皇帝의 姓 李氏를 내려주고 邵城伯을 封하니 許氏에서 다시 李氏가 되었으며 혹은 李 許 複姓으로 일컬어 지기도 했으나 그후 失系하였다. 文正公 諱 之?께서 撰述한 아버지 文忠公 公壽의 誌文을 참고로 한다면 邵城伯 諱 奇를 十三代祖라 稱하였으니 文忠公은 公에게 玄孫이 되며 邵城伯은 공에게 九代祖가 된다. 家錄에는 奇, 儉, 波, 貴, 浚으로서 公以上의 계대를 대고 五代 모두가 獨子로 되었으며 그대로라면 邵城伯은 公에게 五代祖가 된다. 壬戌譜 및 邵城世德에는 모두 邵城伯과의 九代로 記錄되었으니 위 誌文의 所載와 代數는 一致가 되나 諱字나 事實에 대하여는 기송(杞宋 : 문헌의 증거가 없는 것을 말함)을 證據할 수 없으니 차라리 舊譜에선 다른 記錄과 달리 공을 一世로 斷定한 것이며 역시 의문되는 것을 제쳐놓고 愼重을 기하는 道理인가 보다.

  아! 무성(武成 : 書經의 篇名)은 聖經임에도 孟子께선 그 중에서 「몇몇 부분만을 取擇한다 라고」말씀하셨으니 이러한 의미에서 공의 신도비명을 가늠한다면 거의 두찬(杜撰 : 典據가 확실치 못한 저술)이라는 結果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공은 新羅末에 誕生하여 高麗朝에서 벼슬을 하여 大官을 지내고 邵城伯에 襲封되고 상서좌복야 상주국 소성현 개국후의 벼슬에 贈職되고 食邑 一千五百戶를 下賜받았다. 生年月日과 官階履歷은 記錄이 없고 墓는 仁川 文鶴山 아래 看雉島 辛坐의 자리에 있으니 風水家에선 거북의 形이라고 말한다. 配는 慶州金氏니 아버지는 工部侍郞 樂浪君 殷說이요 할아버지는 敬順王이며 墓는 公과 合?이다.

그후 後孫들이 크게 繁昌하여 본 고을이 縣에서 郡. 郡에서 府로 昇格되기까지에는 모두가 仁川李氏와의 關係가 없지 않으며 비록 보통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이 墓가 名墓임을 알 게 되어 지점(指點 : 손가락으로 가리킴)과 긍식(矜式 : 공경하여 표본으로 삼음)을 가하고 祭祀가 지금까지 이어지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長子 翰은 中樞副使로 여러번 門下侍中에 증직되고 諡文景이요. 二子 訥은 大將軍이요. 三子 ?은 右僕射요. 女는 安山 金殷傅에게 出嫁하니 知中樞 戶部尙書 中樞使로 문하시중 상주국 安山郡 開國侯에 증직되었다. 長房孫 子淵은 推誠佐世保社功臣 門下侍中 상주국 慶源府 開國公이며 食邑 三千戶를 下賜하고 文宗廟庭에 配享되었다. 다음 子祥은 尙書右僕射로 歷事三朝하여 忠義가 堂堂하고 아들 손자 모두가 宰相의 자리에 오르니 어느 사람은 詩를 지어 祝賀하기를 「뜰아래 芝蘭은 세 宰相이요. 문앞에 桃李는 열 公卿이라」하였다.  (芝蘭과 桃李는 子孫 또는 兄弟를 가리킴) 二房孫 成幹은 上將軍 檢校太子小保요. 三房孫 聰顯은 禮部尙書이다.

曾孫이하부터는 가장 顯達한 분만을 列擧하고 內外 遠近孫에서 王妃의 至親 및 女壻 몇몇 분을 별도로 採入하니 古例에 없다. 그러나 非常한 사람은 史蹟이 非常함으로 文字가 簡略할 뿐 만은 없다.

  子淵의 八男에 ?은 守太傅進太師侍中慶源伯諡貞憲이며 ?은 殿中少監이요. 碩은 兵部侍郞東北面兵馬使工部尙書요 ?는 문하시랑평장사요 韶顯은 집을 떠나 佛門에 들어가니 法名은 眞應이요 諡는 惠德王師이다. 顥는 문하시랑평장사 수태부 경원백이며 諡는 景德이다. ?은 贈門下侍郞平章事 守太傅요 顔은 문하시랑평장사이며 諡는 襄愼이다. 預는 歷事六朝하여 翰林學士 政堂文學 進中書侍郞平章事이며 諡는 文顯이다. 오는 號 金剛居士이며 文德殿太學士 判尙書吏部事 監修國史 문하시랑평장사요 諡는 文良이니 곧 子祥의 二男이다. 資仁은 兵部侍郞 右諫議大夫 尙書左丞 中樞院副使요 資義는 중추원사이며 宣宗朝때 宋나라에 使臣으로 가서 남다른 名聲과 칭찬이 있었다. 資玄은 號 息菴 또는 希夷諡眞樂이니 科擧에 及第하여 大樂署丞이 되었다가 벼슬을 버리고 淸平山에 들어가서 菜食과 布衣로 道를 즐거워 하면서 平生을 마치니 退溪先生은 詩에다 序文을 곁드려 그의 淸修苦節을 特別히 稱述했다. 資德은 중서시랑평장사이며 諡는 莊懿이다. 資謙은 門下侍中 中書令 朝鮮國公이요 資諒은 守司空 중서시랑평장사요 公壽의 字는 元老요 諡는 文忠이며 天稟이 宏厚하니 아이 때 外祖 崔文和公 惟善은 그의 이마를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이 아이는 마땅히 큰 그릇이 될 것이라」하더니 成長하자 學問에 힘쓰고 大科에 及第하여 推忠衛社 同德功臣 開府儀同三司 문하시중 상주국이요 彦林은 공부상서 우복야요 軾은 金紫光祿大夫 상서좌복야 ?知政事 判尙書戶部事요 之?는 즉 文正公이니 정당문학수사공 좌복야 判西京留守事이며 直節이 있고 文章에 能하여 일찍이 임금을 모시고 서도(西都 : 平壤)에 갔다가 詩를 지어 한 세상에 알려졌더니 조선 世祖朝에 이르러 樂府에 採入되었다.

  之茂는 문하시랑평장사요 光縉은 중서시랑평장사요 諡는 貞懿이다. 仁老는 號 雙明齋이니 文章으로 세상에 울렸고 明宗朝에 壯元及第하여 書狀官의 職責으로서 宋나라에 갔다가 朱子를 뵙고 學問의 要領을 배우니 著述에는 銀臺, 雙明, 破閒등 세 文集이 刊行되어 퍼졌다.

藏用은 정당문학 중서시랑평장사 태자태부 문하시중이요 諡는 文眞이니 文章이 普通에 뛰어나서 한 時代의 큰 著作 그 수중에서 많이 나왔다. 元宗 甲子年에 王을 따라 元나라에 가니 이때 元나라에선 高麗에게 救援兵을 要請했다. 끊임없는 긴박한 상황에도 公는 전대(專對 : 외국에 사신으로 가서 황제와 독단적으로 응답함)에 敏捷하므로 事態는 마침내 풀렸고 元帝는 친히 두차례의 宴會를 베풀었다. 作臣은 문하시중이니 妖僧을 痛斥하다가 貶黜을 당했다. ?은 號 永慕齋요 벼슬은 중현대부 典醫監이니 鄭圃隱 李石灘 李遁村 諸賢과 더불어 서로 親善하고 性稟이 純孝하여 쌀궤의 感應이 있으니 사실이 알려지자 國王은 按廉使를 보내어 두 碑石을 세워 표창했다. 元紘은 科擧에 及第하고 詩를 잘 지었으며 정당문학을 歷任했다. 고려가 滅亡하자 忠節로서 仁川에 流配되어 유명한 喜晴 및 新亭이라는 題目의 詩를 지으니 權陽村의 文集에 실려 있다. 그의 두 아들에 ?은 監正이니 李太祖가 革命을 하자 臣僕이 아니되겠다는 義理를 지켰으며 灌은 문과에 급제하여 太宗朝에 京畿, 咸鏡 兩道 監司를 역임하고 資憲 吏曹判書에 승진되었다. 賢佐는 대광보국 숭록대부 慶城府院君이요 曰萬英은 仁川君이고 文和는 號 烏川이니 斥佛崇儒하고 左參贊 議政府事兼藝文館大提學을 歷任했으며 領議政에 贈職되고 諡는 恭度이며 六男을 낳으니 모두가 卿宰相의 자리에 올랐다.

  歷代의 王妃를 열거한다면 元成太后, 元惠太后, 元平王妃는 곧 金殷傅의 세 따님이며 公에게 外孫이 된다.  仁睿太后 및 仁敬, 仁節 두 왕비는 子淵의 따님이며 공에게 四世가 된다.

元信王后는 ?의 따님이요 思肅太后는 碩의 따님이요 長慶王妃는 顥의 따님이요 貞信王妃는 預의 따님이며 그의 따님이 敬和王妃가 되었으니 공에게 五六世가 된다. 文敬太后,  延德王妃, 福昌王妃는 資謙의 세 따님이며 공에게 六世가 되고 恭讓世子嬪은 元紘의 따님이며 공에게 十三世가 된다. 朝鮮朝에 이르러 坡平 尹?의 따님이 貞熹王后가 되었으니 恭度公의 外孫이며 공에게 十六世가 된다. 동상(東床 : 사위의 별칭)으로서 顯達하여 始祖 또는 中顯祖가 된 분을 열거한다면 坡平 尹瓘은 문하시중 판상서 鈴平縣 開國伯이요 諡는 文肅이니 成幹의 사위요 光山 金義元은 檢校太子太師 戶部尙書兼三司使 特進 金紫光祿大夫이며 諡는 忠貞이니 碩의 사위요 南平 文公元은 평장사요 諡는 貞敬이니 ?의 사위요 江凌 金仁存은 검교태사 문하시중이요 諡는 文成이니 顥의 사위이다. 그밖에 세대가 멀어지고 分派子孫이 더욱 번창함에 따라 科擧, 仕宦, 忠孝, 德學으로서 훌륭한 名望이 있는 분들도 다 기록지 못한다.

  아! 詩經에 이르지 않았던가. 「山嶽이 神을 내려 甫와 申을(甫 : 甫侯. 申 : 申伯. 周宣王의 賢臣.)  낳았다」라고 하였다. 고려가 興旺하던 초기에 공이 運에 맞게 빼어나서 偉大한 勳業과 훌륭한 計劃을 자신에 여유있게 간직하고 후손에게 전수하여 숲의 나무처럼 늘어선  세신(世臣 : 대대로 한 王을 섬긴 공로가 있는 신하)은 경제상의 國祿을 받게 되고 연달아 나온 賢淑한 女人은 萬民의 國母가 되어 어엿이 宗廟의 神主가 되고 社稷의 本府가 되었으니 실로 東方의 역사에서 없었던 일이라 하겠다. 아! 거룩하도다.

  일찍기 倭政때에 山所의 附近이 農土로 造成되었고 光復後 政府計劃으로 都市가 됨에 능곡지변(陵谷之變 : 산소 보존의 위태로움)이 朝夕에 박두하게 되었으니 아! 덧없는 滄桑의 變遷 이와 같구려

  이제 그의 후손들이 同心協謀하여 當局의 認許를 받아 墓域을 淨化하고 또다시 巨金을 醵出하는데 먼 始祖라서 소홀함이 없고 많은 자손들 누락된 사람이 없게 하며 재실의 몸채와 행랑채 모든 부속건물을 增築移建하고 落成式을 하자 큰 碑石으로 墓를 華麗하게 장식하니 아! 이제와 같은 混亂한 세상 물흐르듯 걷잡을 수 없음에 어버이를 버리고 先祖를 忘却하게 되었구나! 이처럼 거룩하고도 훌륭한 일 어찌 쉽사리 圖謀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仁川氏 장래의 運興을 볼 수 있으며 위에서 열거한 수없이 많은 후손으로 屢百代에 전해 진다는 나의 말이 착오가 아니었음을 새삼스레 다행으로 여겨진다. 이로서 銘에 가름하니 銘에 이르되

  인천이씨는 首露王에서 나왔어라.  그 누가 임금의 배우자였나? 휘 黃玉이신 허씨 왕후로세. 왕후께선 王의 마음 감동시키니, 두 아들 母姓따라 허씨 되었군. 阿?벼슬을 한 諱 奇는 당나라 天寶년에 사신으로 갔었네 命令에 따라 巴蜀 安祿山을 토벌키 위해서였지.

皇姓의 李氏을 사성하니 황제의 마음 역시 勸誘되었나봐. 杞守의 문헌증거 없으나 선보(宣甫: 당나라 때 孔子를 추존한 칭호)께서 마냥 죄하 셨네. 공이 탄생하자 고려가 흥왕하였으니 이 모두 하늘이 도와주신거야. 邵城縣에 봉하고 食邑의 民戶를 하사하였지. 공이 一世祖가 된 사실 舊譜에 환하게 나타났도다. 內外 후손들 환로에 높이 뛰니 堂에 꽉찬 초선(貂蟬 : 담비의 꼬리와 매미의 날개. 高官의 冠의 장식) 그 누가 공보(公輔 : 三公四輔.  즉 임금을 보필하는 大官)의 적임 아니런가.  빼어난 賢媛 十數名의 국모로다. 아! 공의 음덕이 감?기 때문이겠지. 樹木 우거진 가성(佳城 : 분묘의 이칭) 저 해변가에 위치하였네. 기왕의 百世와 미래의 萬代에 무궁한 發祥으로 하늘이 주신 복 받으리로다. 내가 쓴 碑文 그내용 거짓 아니로세.

歲丙子 流火節          月城  李鍾洛 撰

※流火節= 陰七月첨부이미지  

 

 

일주일 내내 보고 싶은 사람

 

월요일은

월계수잎을 따서 한올한올 엮어서
월계관을 씌워주고 싶어 보고 싶습니다

 

화요일은

화사하게 웃는 하얀얼굴이
하늘 가득 보고  싶습니다

 

수요일은

수도없이 내마음에 들어있는
내마음에 수호천사가 보고 싶습니다

 

목요일은

목숨걸고 사랑하고 싶어서
보고 싶어집니다

 

금요일은

금빛날개 휘날리며 날아서
태양같이 환하게 보고 싶습니다

 

토요일은

토라지는 모습까지 사랑스러워
너무 많이 보고 싶습니다


일요일은

일주일 내내 보고싶은 마음
극에 달해 일일이 보고픈마음 점검하여
보고 싶습니다

 

첨부이미지

일주일 내내 보고싶은 사람..

바로..

바로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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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04.14 03:10

    첫댓글 좋은 자료감사합니다 수고 하셨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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