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다. 공은 원래 중국에 살았었는데 하늘이 낸 성스런 인물로 남보다 총명하시고 재질도 뛰어나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았다. 15세에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갔는데 계모 주씨(朱氏)가 매우 사나웠으나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 그래서 동요에 `오얏나무 밑에 반드시 왕기가 서려 있다'라고 하였다. 그 때가 18 세였다. 이렇게 어리셨는데도 문장이 비범하고 성품이 인자하여 탁월한 재능과 더불어 기품이 널리 떨쳤다. 우리 나라로 오신 지 얼마 안되어 명성이 조정에까지 떨쳐 신라 문성왕(文聖王)이 사공에 임명하니 정치를 하신 지 1년만에 나라가 태평하여 온갖 벼슬아치들이 다 화합하고 온 백성이 모두 즐겼다. 그래서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10세손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 의 딸로 아내를 삼게 하니 이분이 바로 경주김씨(안산김씨 상계)이다.' 으로만 쓰인다. 조경단은 우리의 시조 한(翰) 할아버지의 묘역(墓域) 의 이름이다. 다만 묘가 있는 곳이 불확실 하여 단을 쌓아 놓고 제향을 지내니 조경단이라 하는 것이다. 끝에 모셔져 있다. 고종태황제가 친히 지은 조경단비음기 (肇慶壇碑陰記)에 이렇게 적혀 있다. 기록이 없 지만 전주는 곧 우리 왕실의 시조가 탄생한 곳이다. 경기전(慶基殿) 전의(殿儀)에는 전주부 북쪽 10리에 건지산이 있으니 곧 시조 사공공 의 묘소가 있다 하였고, 읍지(邑誌)에도 `건지산에 사공공의 묘소가 있다고 하였다. 피도록 명하였다. 그러다가 영조대왕 때 이르러 실제로 묘역의 경계를 조사해 보았으나 알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근방의 백성들의 무덤을 파내게 하고 감독 관과 산지기를 두어 경계를 확정하고 절대로 벌목을 못하게 하였다. 문헌으로 가히 징험될 수 있으되 지금에 와서는 아득하여 묘소를 알 길이 없으니 참으로 서글플 따름이다. 아, 이제 봉분을 높이 쌓아 올리고 싶으나 그 일이 극히 어려운 일이라 열성조께 서 미쳐 이루어 놓지 못한 것이리라. 겨를이 없어 실천하시지 못했던 것을 오늘을 기다려 이어 행 한 한 가지 일일 뿐이로다. 있었는데 모두 마모되어 겨우 7자만 볼 수 있으니 `完山'과 `己亥五月立' 뿐이다. 금년은 곧 기해년이요, 단을 쌓아 마치는 일도 5월이다. 하늘의 이치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도 때가 있어 꼭 부합함이 이와 같도다. 오호라. 고황제도 관심을 기울여 묘역 을 수호케 하였으며 특히 영조 대왕은 대대적으로 정화 작업을 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시조공 의 묘소를 분간할 수 없게 되었었다. 여러 열성조가 선조 묘역 수호 보존에 힘을 썼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종황제가 본격적으로 정화사업을 하여서 묘역을 넓혀 경내를 넓히고 단을 쌓아 `조경단'이라 이름을 붙이고 비와 비각도 세웠다. 닳 아 버리고 7자만 남았다는 내용도 알 수 있다. 쌓고 5월 25일에 묘소 위에 흙을 더했다고 <선원계보기략>에는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고종 때까지는 시조 할아버지의 묘소를 알고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되었었다. 그러나 광복 후 전 북대학교 등 각종 관서의 부지로 거의 뺏기고 지금은 묘역과 재실을 합쳐 10만평도 남아 있지 않다. 전북도지사로 있었고, 해권(海權)종현이 부지사로 있을 때 당시 대통령 에게 간청하여 예산을 얻어 지금과 같이 정화했다. 1976년 6월 23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3호 로 지정되어 있다. 1355년(공민왕 4) 원나라 사신 야사불화(野思不花)를 거 두었던 곳이라 하여 강등되어 부곡(部曲)이 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 다시 완산부로 복구 되었다. 1392년(태조 1)에 조선 태조의 본관이므로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승격, 1403년 (태종 3) 전주로 환원, 부윤(府尹)을 두었고 세조 때에는 진(鎭)을 두었다. 그 뒤 줄곧 전라 도의 감영이 이곳에 있었다. 부로 승격, 1949년 시로 개칭되어 오늘날에는 인구 30만의 도시가 되었다. 완산은 원래 전주에 있는 산 이름이었다. 전주부의 남쪽 3리에 있었던 작은 산으로 고덕 산(高德山)으로부터 갈라진 산이었는데, 전주의 안산(案山)으로 남복산(南福山)이라고도 하 였다. 건지산(乾止山)과 마주 바라보이던 산이었다. 부 르고 간혹 기호에 따라 완산이씨라고 기록할 때도 있다. 관계에 있고, 전주이씨를 빼놓고 전주를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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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이씨(全州李氏) 시조 이한(李翰)의 조경단(肇慶壇)
단(壇)과 지석(誌石) 묘소를 답사하다보면 안장된 이의 신분과 사적을 알리는 비석을 흔하게 보게 된다. 대개 누구누구 지묘(之墓)라고 쓰여있다. 실제 주인공이 그곳에 묻혀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가끔 누구누구 지단(之壇)이라고 쓰여있는 비석도 있다. 이는 유골이나 묘를 잃어버려 주인공이 그곳에 없다는 뜻이다. 실전(失傳)한 묘지의 비석에 붙이는 이름이 단(壇)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고 왕이 된 후에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족보인 선원보(璿源譜)를 만들기 위해서 그의 22대조이며 시조인 사공공(司空公) 이한(李翰)의 묘를 찾았다. 전주의 건지산(100.5m) 기슭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수많은 지사들과 사람들을 동원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시조 묘를 찾기 위한 노력은 역대 왕들도 계속했다. 영조는 묘지를 찾지 못하자 유생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영조47년(1771) 시조 이한과 그의 비인 경주김씨 위패를 봉안하는 사당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경기전(慶基殿) 경내에 건립하였다. 경기전은 전주의 주산인 기린봉(306m) 아래에 있으며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서 태종10년(1410)에 창건한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지났다. 조선말엽인 서기1899년 어느 날 우연히 전주시 덕진구 건지산 근처에서 나무를 하던 나무꾼의 갈퀴에 이상한 돌 하나가 걸렸다. 자세히 살펴보니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예사 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나무꾼은 그 자리에 표시를 해놓고 그 길로 현감에게 가지고 가서 아뢰었다. 현감이 보니 이것은 왕실에서 그토록 애타게 찾던 전주이씨 시조 이한의 묘의 지석(誌石)이었다. 지석이란 묘지석이라고도 불리며 죽은 사람의 인적사항이나 생전의 전기, 무덤의 소재 등을 돌에 기록하여 관과 같이 봉분 속에 묻는 것을 말한다. 묘 앞 비석에도 이러한 사항을 기록하지만 세월이 오래 지나면 비바람에 훼손되고 망실되어버린다. 혹시나 자손들이 조상 묘를 찾지 못하는 경우를 대비에서 지석을 묻었던 것이다. 지석의 중요성은 실로 대단해서 역사학적인 가치가 높다.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덤 조성 당시의 시대적 배경도 알 수 있다. 공주의 백제 무녕왕릉은 지석문이 나와서 주인이 누구인가를 확실히 알 수가 있었다. 또한 당시의 역사적인 실체를 명확하게 복원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야의 고분들이나 신라왕릉들은 이 지석을 묻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많은 무덤의 주인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조경단의 지석(誌石) 현재 전라북도 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조경단 재실에 보관되어 있는데 `천보십삼재구척하(天寶十三載九尺下)`라고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제35대 경덕왕13년(754)으로 추정한다. 천보는 당나라 현종의 연호다. 이 지석에는 후손 춘옥(春玉)이가 캐고 이 글을 곤옥(崑玉)이가 해석하리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과연 1000여년 후에 춘옥이가 캐내고 곤옥이가 이 돌이 사공공 묘의 지석임을 해석하였다고 한다. 지석문은 다음과 같다. [앞면] 千一未白玉午 赤符秦文叔起 口或改三走三返 春玉採崑玉解 馬入海木石崇 天寶十三載九尺下 천일미백옥오 적부진문숙기 구혹개삼주삼반 춘옥채곤옥해 마입해목석숭 천보십삼재구척하 [뒷면] 千載之下 中山復起 黃海白馬 己亥五月 천재지하 중산복기 황해백마 기해오월 대한조경단(大韓肇慶壇)의 설치 현감은 즉시 한양으로 달려가서 보고하였다. 시조 묘를 애타게 찾던 왕실은 기뻤다. 그러나 어느 곳이 정확한 묘인지는 알 수가 없는 일이었다. 지석이 발견된 능선 주변 남북 3520척의 경내의 다른 묘소를 모두 없애고 단(壇)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주변 어디에는 틀림없이 시조 묘가 있으므로 경내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했다. 시조 묘를 후손이나 타인들이 밟고 다니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에 대한 『고종실록』을 살펴보면 광무3년(1899) 1월25일, "전주의 건지산(乾止山)에 제단을 쌓고 비석을 세우며 관리를 두는 등 문제는 전부 종정원(宗正院)의 의견대로 집행하며 제단 이름은 조경단(肇慶壇)이라 부르고 수봉관(守奉官) 2명은 일가 중에서 특별히 둘 것이다. 비석 앞면의 글은 내가 직접 써서 내려보낼 것이니 뒷면의 글은 전 대학사(大學士)가 지어 바치도록 할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같은 해, 3월11일 궁중내부 특진관인 조경단심재신(肇慶壇奉審宰臣) 이재곤(李載崑)이 전주에 와서 건지산 묘소 검분(檢分)이 실시되었다. 설단(設壇), 수비(竪備), 건재(建齋)의 후보지는 따로 지관이 정하기로 했다. 동시에 창경 토지나 단의 좌우계곡에 건립된 접단을 본단 수봉궁(守奉宮)에 속하게 할 것을 제언, 마침내 고종어필의 전제(篆題)와 찬문(撰文)으로 대한조경단비 건립이 준비되었다. 6월21일, 궁내부대신의 대리 민영기(閔泳琦)는 회계원 검사과장 오현기(吳顯耆)와 흥덕군수 오응선(吳應善)을 특별감독으로 파견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들은 장인(匠人)과 공인(工人)들을 잘 정비하여 수일 내에 대한조경단을 준공하게 된다. 7월11일, 고종은 시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조경묘(肇慶廟)와 묘지인 조경단(肇慶壇),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안한 경기전(慶基殿)의 관리를 맡을 제조(提調)는 해당 도(道)의 관찰사로 겸임시킨다는 어명을 내렸다. 그리고 해마다 한 차례의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이는 전주가 조선왕조의 발상지라는 의의를 한층 높이기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왕릉이나 왕실의 묘에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예컨대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5대조인 이양무(李陽茂)의 묘를 준경묘(濬慶墓), 그의 부인 평창이씨 묘는 영경묘(永慶墓)다. 조경단(肇慶壇)에서 조(肇)란 `시작하다`라는 의미가 있으며, 경(慶)은 `경사스럽다`라는 뜻이다. 전주이씨와 시조 이한(李翰) 현재 우리나라 이(李)씨의 본관은 237본이라고 한다. 이씨는 대체로 한국계와 중국계, 그리고 기타로 나눈다. 한국계는 신라6성의 하나인 경주이씨(慶州李氏)에서 갈라져 나간 것이다. 6성이란 『삼국사기(三國史記) 1권』 「신라본기(新羅本紀)」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유리왕9년(서기32년) 6촌을 개정하여 사성(賜姓)한 성씨들을 말한다. 양산촌장 알평(謁平)에게는 이씨(李氏), 고허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에게는 최씨(崔氏), 대수촌장 구례마(俱禮馬)에게는 손씨(孫氏), 진지촌장 지백호(智白虎)에게는 정씨(鄭氏), 가리촌장 기타(祈陀)에게는 배씨(裵氏), 고야촌장 호진(虎珍)에게는 설씨(薛氏)를 하사했다. 중국계로는 연안이씨(延安李氏), 고성이씨(固城李氏), 안성이씨(安城李氏) 등과 같이 시조가 중국에서 건너온 성씨들이다. 기타계로는 안남국(월남)에서 망명해온 화산이씨(花山李氏), 김해허씨(金海許氏)에서 분적한 인천이씨(仁川李氏) 등이 있다. 전주이씨는 현재 인구가 240만 명에 이르는데 한국계인 이알평의 후손이라는 설과 중국에서 귀화한 설로 나누어져 있다. 이 두 가지 설 모두 근거가 모호하여 정확한 생성유래는 전주이씨 종친들조차 단정하지 못하고 있다. 작자와 연대 미상인 『완산실록(完山實錄)』에는 "전주이씨 시조 한(翰)의 자는 견성(甄城)으로 본디 중국에서 살았는데 태어날 때부터 총명하여 15세에 한림원에 입학하였다. 그때에 오얏나무 밑에 반드시 왕기가 나타난다는 동요가 유행했는데 배씨 성을 가진 자가 이를 모함하였다. 이에 한이 바다를 건너 신라에 오니 당시 나이 18세였다. 약관이 되지 않은 나이임에도 문장이 비범하고 도덕이 탁월하니 신라 문성왕이 불러 사공(司空) 벼슬에 임명하였다. 1년 남짓에 국정을 공평하게 다스리니 모든 관원들이 교화되고 만백성들이 즐겼다. 그리고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10세손 김은의(金殷義)의 딸과 결혼하여 자연(自延)을 낳았고 자연은 천상(天祥)을 낳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간 합천이씨(陜川李氏) 족보에 의하면 "이알평의 34세손 이진두(李辰斗)의 둘째 손자 한(翰)이 지금의 전주인 완산이씨(完山李氏)의 시조가 되었다. 사공(司空)으로서 자금어대를 하사 받았다. 배위는 군윤(軍尹) 김은의의 딸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경주이씨의 시조인 이거명(李居明)도 이알평의 36세손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둘은 항렬이 같은 셈이다. 이상으로 볼 때, 전주이씨가 중국에서 왔는지 또는 경주이씨에서 갈라져 나왔는지 기록이 애매 모호하여 단언할 수 없다. 중국에서 왔다는 설은 아마도 사대사상(事大思想)에서 연유한 것 같다. 풍패지관(豊沛之館) 전주 현재의 전라북도 도청소재지인 전주는 본래 백제의 완산이었다. 백제가 신라에 망한 뒤에도 완산주(完山州)였다가 신라 경덕왕16년(757) 전주(全州)로 개칭하였다. 그 후 견훤이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후백제라 하였다. 고려 태조19년(936) 왕건이 후백제의 신검을 쳐서 평정한 후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라 일컬었다가 태조23년(940) 다시 전주로 환원하였다. 조선 태조1년(1392) 이성계가 등극하자 자신의 조상이 난 고장이라 하여 완산유수부(完山留守府)로 격을 올렸다. 태종3년(1403)에 다시 전주로 개칭하고 부윤(府尹)을 두었다. 세조 때에는 진(鎭)을 두기도 하였으며 그 뒤로 줄곧 전라도 감영이 이곳에 소재하였다. 조선왕조의 발상지 전주는 풍패지관으로 불린다. 전주객사 본관에는 명나라의 대문장가 주지번(朱之蕃)이 유려한 초서체로 쓴 `풍패지관(豊沛之館)` 현판이 걸려있다. 주지번은 중국 남월(南越)출신으로 조선에 사신으로 온 차에 은인이자 스승인 표옹 송영구의 익산 집을 찾았다. 그가 전주객사에 머물면서 쓴 글씨가 현재의 현판이다. 풍패란 한나라 고조 유방이 태어난 고향이름이다. 전주 역시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본향이란 뜻이다. 왕실의 족보 - 선원선계(璿源先系), 선원세계(璿源世系), 선원파계(璿源派系) 임금의 조상을 `선원(璿源)`이라고 한다. 선(璿)이란 옥구슬이라는 의미이므로 임금의 조상을 `구슬의 근원` 또는 `구슬 같은 뿌리`라는 뜻에서 이런 용어를 썼다. 임금은 한 종파의 조상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임금은 만백성의 어버이이기 때문에 한 씨족의 시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임금을 1세로 하여 세대(世代)를 따지는 것은 불경스러운 것이다. 이를 `제왕불감조기조(帝王不敢祖其祖)`라고 표현하였다. 그래서 전주이씨는 시조부터 17세 이양무까지를 선원선계(璿源先系)라 한다. 17세까지의 직계와 방계를 모두 포함하는데 시중공파(侍中公派),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주부동정공파(主簿同正公派) 등이 이에 속한다. 그리고 추존왕인 목조(穆祖) 이안사부터 마지막 순종까지 역대 왕의 세계를 선원세계(璿源世系) 또는 선원본계(璿源本系)라 한다. 추존왕 4대와 태조부터 순종까지 20세를 합치면 모두 24세의 세계를 의미한다. 그리고 목조의 5왕자부터 대군(大君)이나 군(君)의 파계를 선원파계(璿源派系) 또는 선원속계(璿源續系)라 한다. 예컨대 양녕대군파, 효령대군파 등이 이에 속한다.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 따르면 현재 86개 파종회가 있다고 한다. 선원선계(璿源先系) - 시조에서 17세 이양무까지 신라 사공 벼슬을 지낸 이한(李翰)이 전주에 터를 잡은 이후 17세 양무(陽茂)까지 호족세력으로 살아왔다. 2세 자연(自延)은 시중(侍中) - 3세 천상(天祥)은 복야(僕射) - 4세 광희(光禧)는 아간(阿干) - 5세 입전(立全)은 사도(司徒) - 6세 긍휴(兢休)는 사공(司空) - 7세 염순(廉順)은 호장(戶長) - 8세 승삭(承朔)은 생원호장(生員戶長) - 9세 충경(充慶)은 생원(生員) - 10세 경영(景英)은 생원호장(生員戶長) - 11세 충민(忠敏)은 장사(長史) - 12세 화(華)는 추밀원사(樞密院使) - 13세 진유(珍有)는 생원호장(生員戶長) - 14세 궁진(宮進)은 한림(翰林) - 15세 용부(勇夫)는 대장군(大將軍) - 16세 인(璘)은 내시집주(內侍執奏) - 17세 양무(陽茂)는 장군(將軍)을 지냈다. 이양무는 부인 이씨(李氏)와의 사이에 이안사(李安社), 이영필(李英弼), 이영밀(李英謐), 이영습(李英襲) 등 4명의 아들을 두었다. 안사는 후에 목조대왕(穆祖大王)으로 추존 되어 선원세계(璿源世系)가 된다. 영필과 영밀은 자손이 없었고, 넷째 영습은 주부동정(主簿同正) 벼슬을 해 `주부동정공파`의 파조(派祖)가 된다. 선원선계의 조상들 중에서 풍수와 관련되어 살펴볼 인물은 3세 천상(天祥)과 17세 양무(陽茂)다. 『완산실록(完山實錄)』에 의하면 "천상은 젊어서부터 매우 호탕했는데, 늦게 이치를 궁구(窮究)하는 것을 좋아해서,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앙관서에 들어가서 천문지리를 연구하다가 9년 만에 이를 달통하여 만물의 이치를 깨달았다.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완산부(完山府) 기린산(麒麟山) 왕자봉(王字峯) 밑에 산소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이곳에 산소를 쓰면 우리 후세 자손들 중에서 반드시 왕이 나오리니 아무리 괴롭더라도 절대로 천장하지 말라” 고 하였다. 양무는 목조 이안사의 아버지로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에 있는 준경묘(濬慶墓)의 주인공이다. 전주에 살다가 이안사가 삼척으로 이주하자 그곳에서 살다가 고려 고종18년(1231)에 죽었다. 신좌을향(辛坐乙向)인 준경묘에는 `백우금관(白牛金棺)`이라는 유명한 설화가 전한다. 백우금관(白牛金棺)과 준경묘의 전설 - 준경묘 답사기 참고 양무의 아들 이안사는 호걸풍으로 전주 관기(官妓) 하나를 총애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주사(知州事)가 전주 고을 안렴사로 부임하는 산성별감(山城別監)을 접대하기 위해서 그 관기를 수청들게 하였다. 평소 지주사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안사는 크게 노했다. 많은 기생들 중에서 왜 하필이면 자신이 총애하는 기생을 수청들게 하는가. 그러자 지주사는 안렴사와 의논하여 이안사를 역적으로 음해하기 시작했다. 그 구실은 전주이씨 3세 천상(天祥)의 묘가 기린산 왕자봉 밑에 있으므로 후손 중에 왕이 나와 고려 조정을 무너트릴 염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또 당시 유행하던 이씨가 왕이 된다는 목자왕기설(木子王氣說)을 이안사에게 혐의를 씌웠다. 이러한 사실이 고려조정에 알려지면 역모 죄로 멸문지화를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안사는 병든 아버지를 업고 모든 식솔들을 거느리고 밤을 틈타 머나먼 강원도 삼척으로 도망을 쳤다. 삼척시 미로면 활기동에서 자리를 잡고 산지 1년 만에 아버지(이양무) 상(喪)을 당하였다. 이안사는 아버지 묘 자리를 구하려고 이산 저산 산등성이를 넘어 사방으로 헤매고 돌아다녔다. 그러나 마땅한 자리를 구하기 어려웠다. 마침 활기리 노동(盧洞) 산마루에 이르러 몹시 고단하여 나무 밑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이때 한 도승이 동자승과 함께 나타나 주위를 두루 살펴 인적이 없음을 확인한 뒤 한 곳을 가리키면서 "대지(大地)로다 길지(吉地)로다"하는 것이었다. 이안사가 나무 밑에 앉아 지켜보고 있는 것을 모르는 도승은 동자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었다. "이곳이 제대로 발복 하려면 개토제(開土祭)에 소 백(百)마리를 잡아서 제사를 지내야 하고, 관을 금으로 만든 것을 싸서 장사를 지내야 한다. 그러면 5대손 안에 왕자가 출생하여 기울어 가는 이 나라를 바로 잡고 창업 주가 될 것이다. 또한 이 땅은 천하의 명당이니 함부로 발설하지 말라" 하는 것이었다. 동자승은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더 있다가 그들은 다른 곳으로 길을 떠났다. 자신의 귀를 의심한 이안사는 곧장 집으로 돌아와 생각에 골몰하였으나 가난한 살림살이에 소 백 마리를 어디서 구하며, 금으로 만든 관은 더욱이 어디서도 구할 수가 없었다. 부친의 묏자리를 명당에 쓰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지만 형편상 어쩔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안사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궁여지책을 찾아내게 되었다. 그렇다! 손바닥을 친 이안사는 소 백(百) 마리는 흰소(白牛) 한(一) 마리로 대신하고 금관은 귀리 짚이 황금색이니 이것으로 대신하면 될 것 같았다. 마침 처가에 흰 얼룩소가 있었는데, 흰 소를 한자로 쓰면 백우(白牛)이므로 숫자상 일백 백자와 발음이 통하게 되어 백우(百牛)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다음날 아침 처가에 간 이안사는 밭갈이 할 일이 있는데 흰 소를 잠시만 빌려 달라고 하여 소를 끌고 노동 산마루로 올라갔다. 그리고 양심의 가책을 무릅쓰고 소를 잡아서 제물로 사용하였다. 부친을 넣을 관은 귀리짚으로 대신하였다. 같은 황금색이므로 금관과 의미가 통하기 때문이다. 부친의 묏자리를 잡은 이안사는 삼척에서 자리를 차츰 잡고 살았다. 그런데 자신과 갈등이 있었던 전주 지주사가 관동안렴사(關東按廉使)로 부임하여 삼척으로 순시를 나온다는 말을 전해 듣게 되었다. 그에게 발각되는 날이면 죽음을 면치 못하므로 다시 짐을 꾸려 일족(一族)을 거느리고 함길도(지금의 함경도) 덕원군 용주리로 도피하였다. 무예가 뛰어난 그는 여진족의 천호(千戶) 벼슬을 하면서 차차 그 지방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안사(목조)의 아들 이행리(李行里, 익조)와 손자 이춘(李椿, 도조)이 대대로 원나라 관리를 지냈나. 춘의 아들 이자춘(李子春, 환조)은 원의 총관부 쌍성의 천호로 있으면서 공민왕의 반원정책을 도왔다. 자춘의 아들 성계는 1335년 화령부(지금의 함경남도 영흥)에서 태어났다. 이자춘과 최한기의 딸 최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담대했으며 특히 궁술에 뛰어났다. 이성계는 1356년 쌍성총관부 수복전쟁을 시작으로 1388년 위화도회군에 이르기까지 30여 년을 전쟁터에서 살다시피 했지만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았던 맹장이었다. 이 혁혁한 전공에 힘입어 그는 고려 조정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성계는 1362년 쌍성총관부를 재탈환하기 위해 침입한 나하추 부대를 격퇴시키면서 장수로서의 능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그리고 1388년 이성계는 위화도회군을 강행하여 고려 정권을 완전히 장악한 다음 1392년 조선을 건국하여 왕에 올랐다. 도승의 예언대로 백우금관(百牛金冠)으로 이양무 묘를 쓰고 나서 5대 162년 만에 조선조 창업의 태조(太祖)가 된 것이다. 조경단의 풍수 호남정맥 만덕산에서 기린봉을 거쳐 건지산 쪽으로 내려온 용맥 전주의 주산은 기린봉이다. 백두산에서부터 뻗어 내려온 백두대간이 장수군 백운산에서 장계면 무령고개로 뻗은 산맥이 금남호남정맥이다. 장수의 장안산, 사두봉, 신무산을 거쳐 진안의 팔공산, 성수산, 마이산, 부귀산을 만들고 진안군과 완주군의 경계를 이루는 모래재고개에서 두 산맥으로 갈린다. 북쪽 운장산과 대둔산, 계룡산으로 이어지는 산맥은 금남정맥이다. 남쪽 곰치재를 넘어 만덕산, 박외뫼산, 옥녀봉, 경각산, 오봉산, 내장산, 추월산, 무등산, 조계산을 거쳐 광양 백운산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는 호남정맥이다. 전주시 대부분 지역은 호남정맥 만덕산(763.3m)을 태조산(太祖山)으로 한다. 모악산(793.5m)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구이저수지가 있는 삼천(三川)과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만덕산과 경각산(659.3m), 모악산 세 영역으로 구분된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하므로 물줄기를 보고 산줄기를 파악한다. 모악산 줄기로는 삼천 서쪽 전주박물관과 전주대학교, 전주산업단지, 월드컵경기장 등 주로 새로 개발된 지역이 이 맥을 받아 형성되었다. 경각산 줄기로는 삼천 동쪽, 전주천 서쪽지역으로 완산구청과 기전여자대학, 완산구청, 효자동, 서신동 일대다. 만덕산 줄기는 전주천 동쪽, 아주천 서쪽에 있으며 전북도청, 전주시청, 풍남문, 전주향교, 경기전, 조경묘, 덕진구, 전북대학교 등이 있는 기존 시가지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곳 조경단도 만덕산 줄기의 맥을 받는 곳이다. 만덕산에서 갈라져 나온 한 산줄기가 은내봉(452m)과 묵방산을 세우니 전주의 중조산(中祖山)들이다. 숯재를 지난 산줄기가 크게 방향전환을 하여 아담한 산을 만든다. 바로 전주의 주산인 기린봉(306m)이다. 이 기린봉 아래에 풍남문을 비롯한 경기전, 조경묘, 오목대, 전주향교 등이 있다. 기린봉에서 중앙여고 쪽으로 뻗은 야트막한 능선은 인후동과 우아동 일대를 가로지른다. 그리고 백제광장을 지나 전북대학교 뒷산을 만드니 이 일대의 주산이라 할 수 있다. 이 산에서 좌측으로 개장한 능선은 전북대학교 쪽으로 내려가 청룡을 이룬다. 진행방향으로 계속 가던 산줄기는 전주동물원 뒤를 돌아 드림랜드 뒤로 방향전환을 한다. 그리고 건지산(100.5m)을 만드니 이곳 조경단의 백호자락이다. 주산 중심에서 갈라져 나온 한 맥이 크게 과협하고 굴곡으로 변화하여 작고 야트막한 현무봉을 세운다. 이 봉우리 아래 언덕 모두가 조경단 경내다. 이곳 어디에 시조 이한의 유골이 묻혀있다고 보고있는 것이다. 1만여 평에 이르는 경내 주변에 담을 쌓고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했다. 시조가 누워있는 땅을 함부로 밟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제사를 모시는 단은 언덕 아래에 돌담을 쌓고 동서남북에 문을 냈다. 그러나 이 단이 혈은 아니다. 기세 장엄한 양룡합기혈(兩龍合氣穴) 현무봉 아래에서 내려오는 용맥 중턱에 가묘를 하나 만들어 놓았는데 이 역시 정혈이 아니다. 혈은 그 아래 능선이 끝나는 곳에 있다. 현무봉에서 가묘를 거쳐 이곳까지 연결된 용맥은 마치 근육질의 팔뚝처럼 울퉁불퉁하다. 그만큼 변화가 많고 기세가 있다는 뜻이다. 좌측 청룡 쪽으로도 한 맥이 내려오는데 그 기운이 대단하다. 그 끝나는 지점 역시 기가 뭉쳐있으니 혈이 되겠다. 그런데 좌측으로 내려오는 맥이 끝 부분에서 일부를 가운데 맥으로 연결된다. 참으로 보기 드문 현상이다. 이처럼 두 개의 용맥이 하나로 합하여 혈을 맺는 것을 양룡합기혈(兩龍合氣穴)이라고 한다. 용의 역량을 극대화하여 혈을 맺기 때문에 매우 귀하다. 옛 책에서는 이러한 곳에 혈을 괴교혈(怪巧穴)이라고 한다. 혈이 기이하고 교묘하여 일반적인 것과는 다른 것으로 대개 천장지비(天藏地秘)한다고 한다. 즉 하늘이 감추고 땅이 숨기고 있다가 공덕이 있는 사람에게만 보여준다는 혈이다. 괴교혈은 주로 대혈이 많으며 대대손손 자손이 번창하고 부귀가 끊임없이 이어진다고 한다. 양룡합기혈은 개인적으로 김대중 전대통령 하의도 선영에서 보고 이번이 두 번째다. 아마도 전주이씨 시조 유골이 묻혀있다면 이곳일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대단한 용맥에 대단한 혈이 아닐 수 없다. 한 왕조가 탄생한 것은 이러한 산천정기를 받았기 때문에 가능하리라. 청룡백호가 겹겹으로 감싸주고 명당은 평탄 원만하며 수구는 좁게 관쇄 이곳에서 좌측으로 보이는 청룡은 겹겹으로 감싸주고 있다. 전북대학교 의대와 농대가 있는 능선으로 모두 이곳을 향해있다. 산세는 높지도 낮지도 않으며 수려하고 유정하다. 백호는 드림랜드와 어린이회관이 있는 능선들로 겹겹으로 이곳을 감싸고 있다. 이중 제일 높은 봉우리가 건지산으로 귀인의 형상이다. 이들 청룡백호가 서로 교차한 곳이 수구인데 완벽하게 닫혀있어 물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쉽게 파악할 수 없을 정도다. 수구가 자물쇠로 잠근 것처럼 좁게 관쇄(關鎖)되어야 보국(保局)이 형성되고 기가 안정된다. 또 물은 재물을 관장한다 했으므로 재산이 모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지리 중에서 제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 수구라고 하였던 것이다. 청룡백호가 양팔을 벌리듯 감싸주면 그 안쪽공간에 생기는 들판이 명당이다. 이 명당은 평탄하고 원만하여야 좋다. 이곳은 물이 어디로 흐르는지를 모를 정도로 평탄하고 원만하다. 이 명당으로 주변의 모든 물들이 모인 다음 좁은 수구를 빠져나가 덕진연못으로 흘러간다. 그리고 다시 전주천으로 합류 만경강으로 흘러간다. 혈처로 추정되는 곳에서 보면 물은 좌측에서 나와 우측으로 흘러가는 좌수도우(左水倒右)다. 수구의 방위를 측정하면 정미(丁未)이므로 자좌오향(子坐午向)이나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남향을 하면 부귀왕정한다는 자왕향(自旺向)에 해당된다. 형기와 이기가 모두 잘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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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안 산 김 씨 원문보기 글쓴이: 희망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