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okPortrait.jpg윌리암 그림셔는 1708년 9월 3일, 랭카셔에 있는 브린들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의 신분이나 지위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블랙번과 헤스케스의 문법 학교에 다녔으며 18세가 되엇을 때 캠브리지의 크라이스트 대학에 입학해서 정규 과정을 마치고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1731년 그림셔는 부제로 임명되어 로크데일의 부목으로 성직자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이 거룩한 직분을 전혀 아무런 영적 감동 없이, 더욱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로서의 의무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한 상태에서 맡았다.


목회자로 임명되던 해인 1731년 9월에 그는 토드모르던의 부목사가 되엇고 로크데일을 완전히 떠나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림셔는 11년 동안 사역을 했다. 그림셔가 토드모르던에 머물렀던 11년은 그의 영적 여정에 있어서 일대 전환이 일어난 시기였다. 그림셔의 전기 작가 중 한 사람인 미들턴(Middlenton)에 따르면, 1734년 무렵 그가 토드모르던에 온 지 3년쯤 되었을 때 처음으로 그는 자신과 교구 사람들의 영혼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혼한지 4년 만에 그의 첫째 아내가 병들어 죽으면서 그에게는 두 아이와 외로움만이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끄는 강한 계기가 되었다. 브룩스(Brooks)의 ‘사탄의 공격에 대적하는 중요한 전략’(Precious Remedies against Satan's Devices)과 오웬(Owen)의 ‘칭의에 관하여’(on Justification)라는 두 권의 가장 귀한 청교도 책은 그의 영혼을 세워 가는 일에 막대한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7년 동안 진지하고 심각한 갈등과 투쟁을 겪은 후 그림셔는 더 이상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요8:12)을 얻게 되었다. 그의 눈에서 비늘이 완전히 벗겨지게 된 것이다. 그는 진리 전체를 보게 되었고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진리는 그에게 자유를 가져다 주었다. 그는 훨씬 더 지혜롭고 행복한 사람이 되어 토드모르던을 떠날 수 있었다.


1742년 5월 초, 그림셔는 요크셔에 있는 하워스의 목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21년 동안 그곳에 머무르며 사역하였다. 당시 하워스는 사역자가 활동하기에는 너무도 거칠고 개발이 안된 황량한 지역이었다.


하워스는 자신의 사역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주님의사역자로서 가장 작고 가장 보잘것없는 제가 교구 안에서 했던 사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죄인들을 회개케할 수 있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1년 동안 매주일 두 차례씩 전했습니다. 1년 중 얼마 동안을 따로 떼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 즉 교회 교리와 39개의신조를 해석, 설명하거나 설교집을 주일 아침마다 읽는 일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저는 이러한 훈련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유익을 우리 회중들에게 가져다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천 명, 1천 2백명, 혹은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영혼들이 모이는 여름철에는 그 은혜가 더욱 컸습니다.”


1763년 4월 7일 그림셔는 심한 열병으로 55세의 나이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전기 작가 중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에 그는 아름다운 경치를 한눈에 내려다보며 하워스 근처에 있는 언덕 위에 존 뉴톤 목사와 함께 서 있었습니다. 그는 그때 자신이 이 마을에 처음 왔음 왔을때 반나절 동안 동쪽, 서쪽, 남쪽, 북쪽으로 말을 타고 돌아다녀 보았지만 진정 하나님을 향해 진지하고 간절한 마음을 소유한 사람을 단 한명도 만나거나 들어 보지도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수고 위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해 예배에 참석할 뿐만 아니라 성만찬 때에는 그와 함께 열렬하고 간절한 주님의 성도가 된 수백 명의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마치 그들과 한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처럼 그들의 죄와 유혹, 시험, 긍휼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