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1
제목 : 베돌이
바라미야 / 엄경제
가을이 깊어지면서 하염없이 가랑비가 내리는 시애틀은
괜스레 한잔의 커피가 생각나고 없던 추억까지 만들어 내고 싶어지는 곳이다.
오늘 한통의 이메일이 왔다.
지인께서 인사 말씀과 함께
제 5회 시애틀 문학상 공모전에 한번 글을 보내 보라신다.
택도 없는 저에게 인사치례로 그러신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고 넘기려다
큰아들을 불렀다.
메일 내용을 보여 주고는 "어떻게 생각 하니..." 물으니
"하하하 아빠께서 글을 계속해서 배우고 싶으시다면 한번 응모해 보세요."
많은 문인들께서
짧게 또는 길게 써내려간 표현들로
읽는 이의 마음을 기쁘게도 슬프게도 하는 글의 힘과 묘미는
내게는 참으로 신기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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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하며 여기까지 왔는가
여기는 어디인가
누구와 함께 가고 있는가
즐거운가 슬픈가
나의 의지대로 살고는 있는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나 세 살박이로 엄마의 등에 업혀
서울로 이사를 왔다.
나의 기억이 어슴프레 생각나는 시절은
아마도 한 다섯 살 정도 부터인 것 같다.
이웃집 베돌이와 함께 늘 붙어 다녔다.
그때 당시 그애 집은 2층으로 된 건물에 다방을 하고 있었고
이름은 빠리다방이었다.
우리는 무지 조그맣게 식당을 하였는데 영남옥이었다.
꼭 이름이 술집 같은 느낌이 난다.
하지만 분식집이었다.
조그만 했지만 이대 앞은 월성당, 광생약국, 그린하우스, 빠리다방, 영남옥...
이런 몇몇 곳이 그때 당시 여대생들에겐 인기가 있었다.
베돌이는 얼굴이 까무짭짭 하니 건강해 보이는 키 큰 소년이었고
난 좀 마른편에 얼굴은 하얀 편이었다.
서로 재미나게 놀다가 하루는 싸움이 붙었는데
기억이 가물거리지만 아마도 건너편 골목에 사는 수정이 때문이었던 것 같다.
상당히 예뻤었다. 삼각관계까진 아니어도 놀다 보면 은근히 그런것이 있다.
그런 자존심 같은 것이 발동 되면서
아무래도 덩치에 치인 나는 끝까지 싸우질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기가 죽어 들어오는 나를 쳐다보시던 아버지는
곧바로 나가셔서 과자(옷꼬시)를 한보따리 사오셨다.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다시 한번 나가서 끝을 보고 오너라...
하는 깊고 깊은 뜻이 담긴...
고만한 나이 때엔 별 수 없다.
먼저 코피를 터뜨리는 놈이 이기는 것이고
한번 판이 지나고 나면 다 자랄때까지
여간해선 뒤집기가 힘이 든다.
"베돌아 놀자!"
다시 불렀다. 그리고 동내 길가에 가서 다시 한번 붙자고 했다.
이번엔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힘을 다해서 베돌이의 코를 갈겼다.
툭 소리와 함께 베돌이의 코에선 코피가 쏟아졌다.
빨갛고 빨간 피다. 잠시 마음이 뜨끔했지만
곧 내가 이겼다는 생각과 함께
아싸! 터졌다.
이어 베돌인 울면서 빠리다방 이층으로 올라갔고
아버진 베돌이 엄마에게
애들이 같이 놀다가 그랬나 보다며 능청스럽다.
교과서에 나오는 부모의 역할과
실제로 자식에게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이렇게 다를 수 있나보다.
치료비를 물어 주더라도 맞고 들어 오는 것 보다는 낫다는...
하지만 그날 이후로 나와 베돌인 더 친한 단짝 친구가 되었고
언제나 눈 뜨면 만나서 해질녘까지 서로 없으면 불안할 정도였다.
한참을 지나 엄마와 함께 이태리로 이민을 간 베돌이는
나의 어릴적 친구
그리움의 일호다.
그리고 골목안 수정이는 어디로 갔을까
툭하면 내게 시집 온다고 했었는데...
베돌이 한테도 같은 말을 했을까?
여시 같은 것...<끝>
수필 2
제목 : 죽음의 문턱
바라미야 / 엄경제
몇 년 전 부모님 살아 계실적
직장이 옮겨지던 형님을 따라 이사를 하셔야만 했던
편찮으신 아버님과 어머님을 이천으로 모셔다 드리며
바쁜 이민 생활에 얼른 시애틀로 돌아 와야만 했던 저는
짐꾸려 부모님께 인사 드리며 흘리던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바다 낚시를 가자던 아는 분들의 말씀을 거절 못하고
따라 나섰던 일부터가 잘못되었지 싶습니다.
거절하지 못할만한 상황이 있었던 것은 저만의 핑계일 뿐...
전날 비가 올 것이라는 일기 예보를 들으며
'비가 오려면 확실하게 많이 와야 출발 하지 못할텐데...'하는 마음도
들면서 출발 전까지 갈팡질팡 하다가
결국엔 따라 나서게 되었습니다.
늘 이렇게 인간의 마음에는 흑과 백
이중성이 함께 존재하며
갈등을 일으키나 봅니다.
제가 함께 했던 일행은 여섯 명이었고 다른 팀이 세 명으로
우리는 조그마한 배에 선원 둘과 함께 비가 내리고 있는
바다로 출항했습니다.
바다 낚시는 초보라 그저 시키는대로
일행이 주는 멀미약 먹고 처음부터 약간의 불안한 마음을 떨치지 못하며
나갈 때는 가는 방향과 같은 파도를 타고
높은 파도가 조금이라도 덜한 잠잠한 곳을 찾아서
약 한 시간 반을 나갔나 봅니다.
배를 운항 하던 선원도 처음에는 적당한 시간을 메워주고 돌아와야 할 날씨라고
생각은 했었던 모양입니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폭풍우에 높은 파도를 타고
크지 않은 배는 밑창을 쳐들며 하늘로 솟았다가
사라진 파도 위에 직강하 하기를 연속
타고 있던 우리들을 긴장 속에 몰아 넣으며
아무리 잠잠한 곳을 찾아도 그럴만한 곳이 없자
선장님은 소리쳤습니다.
"이 장소에서 몇 분간 낚시를 하겠습니다!"
채 2분이나 되었을까?
그 높은 파도가 치는 상황에서도
노련한 일행 두 분이
양쪽에서 어른 팔만한 물고기를 잡아 올렸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이리 저리 쏠리며
험한 파도에 얼굴들은 질려 있으면서도
나름 기쁨에 함성을 질렀습니다.
"이야! 양쪽에서 한 마리씩 두 마리 건졌습니다!"
하지만 그나마 그것이 그날의
낚시 시간 전부였습니다.
배는 더 흔들리기 시작했고
여지껏 우리들 보다는 여유롭던
선장님의 얼굴도 굳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는 드리웠던 낚시대를 거두고
우리는 나온 길을 한시라도 빨리 되돌아 가야 한다고
약속이나 한듯이 같은 생각을 했었나봅니다.
낚시를 포기하고 얼른 철수하자고
만장일치로 결정이 쉽게 나왔습니다.
나올 때도 항해가 쉽지 않았지만
돌아가는 길은 파도를 마주 보며 가야 했기에
배의 속도는 나지를 않았고
정면으로 달려 드는 파도는 배를 오히려 뒤로 보내는 듯 했습니다.
점점 파도는 높아지고
10년 넘게 바다 낚시 경험이 있다는 분들도
멀미약이 소용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그날 아침 맛있게 먹은 김밥을 바다에 나누어 주고는
정신이 하나도 없을 때인데도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구명 쪼끼가 보이질 않는데
만약에 인원보다 모자라면 영화에서처럼 양보를 해야하나...
각자가 불안함 속에서도 끝까지 태연한 척하는 모습들...
종교는 서로 다르지만 바라는 마음은 다 같지 않을까...
빌고 나서 만약에 저 땅을 다시 밟는다면 본인들의 신앙에 감사를 하겠지...
이토록 신앙이란 믿고저 하는 마음의 방향으로 길이 열리는 것
뻑... "윽..."
한쪽에 부착되어 있던 묵직한 식탁이 떨어져 나오더니
휘청거리며 선실 옆쪽에서 가까스로 기둥을 붙들고 서 있던
나를 강타했습니다.
식탁은 내부에서 저 마음대로 움직이며
배의 중심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우리의 불안함을 더욱 고조시켰습니다.
나갈때 한 시간 반이 걸린 뱃길은 네 시간이 넘도록 끝나지 않았으며
죽음의 문턱을 수 없이 넘나 들던 회개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래도 노련한 선장님 덕분에
높은 파도의 굴곡에 반하지 않도록
배의 시동을 껐다 켰다를 반복하면서
겨우 도착한 선착장
배의 실내에만 조금 흠이 생겼을 뿐
그래도 인명 피해 없이
다시 땅을 밟을 수 있는 것에 감사하며
'아직 죽을 때는 아니었나 보구나'
안도의 숨을 쉴 수가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이제 다시는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는 일은 없을거야'했는데
그 날 못한 낚시를 다른 날 보상을 해준다는 연락을 받고
다음엔 정말 좋은날 골라서 다시 한번 가자고들 합니다.
며칠도 안되어서 그 죽음의 느낌을 잊어 버리는 우리
흔들리는 이 마음은 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합니다.
삶은 흔들림의 연속이라지만
흔들릴 때 흔들리더라도
다시 한번 나가 봐? <끝>
수필 3
제목 : 삶에 목표가 무엇이기에
바라미야 / 엄경제
엄마 아빠의 원을 풀어 주려는 것이 삶에 목표가 되어 버렸는지
조금씩 세상 물 먹어 보니 공부하며 살아 보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 생각이 든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공부가 진짜 재미있는지...
부모 품에서 벗어나 시켜서라기 보다는 알아서 하는 시절이 된지
그럭저럭 한 6년정도는 된것 같네요.
평상시 주중에는 근무하느라 신경을 못쓰면서
얼마 전부터
그나마 하루 쉬는 일요일엔 건강을 챙긴답시고
부부가 다 등산에 취미가 붙어서
가족 네 명이 제 각각에 생활이 되어버린 요즈음
가끔은 공부하는 아들 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곤 합니다.
이민 생활하며
언어부터 극복을 해야 하는 이민 1.5세들
대학까지만 나와도
부모 마음으론 장하다 느끼고 싶은데
아마도 아이들은 좀 더 가고 싶은가 봅니다.
다니던 대학에서 대학원 생활을 하게 될지 타주로 가게 될지 아직은 모르지만
오늘 그 자격을 묻는 시험을 치루는 날이어서
혼자 보내도 안될것은 없지만
괜히 태워다 주고픈 마음에 아침 일찍 아들과 함께 시험장엘 갔습니다.
마치 제가 아주 큰 일을 하는 느낌으로 말이지요.
십여 년 전 미국 워싱턴주로 이민을 오며
자리를 잡은 곳은 아름다운 항구 도시 에드몬드였습니다.
톰 행커스와 맥 라이언이 나왔던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으로 잘 알려진 도시
시애틀과 불과 20분 거리 떨어진 곳이죠.
이민 생활이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에게 힘들고 외롭고 여유 시간을 갖기가 힘들기에
에드몬드로부터 멀리 다녀 보기가 쉽지 않아서 그랬는지
타코마에 이리도 아름다운 대학이 있는줄은 미쳐 몰랐었습니다.
University of Puget Sound 는 아마도 오랜 역사가 있는 학교인 듯
건물 담벽을 다고 오르는 등나무 잎들이 빨갛게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대학원 지원생들에게 시험장으로 잠깐 장소를 내어 준 것이었지만
짧은 시간 아들을 따라 온 제게는 행운을 잡은 것처럼 아름다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아들은 시험 잘 치루라고 시험장으로 드려 보네고
일단 아담하게 생긴 담벼락 없는 담을 타고 한 바퀴 돌아 보았습니다.
처음엔 그냥 돌았습니다. 운동삼아...
한 바퀴 돌고 나니 다른 욕심이 납니다.
요즈음 얼마 전부터 사진 모임에 다니게 된 이후부터는
"삼보 이상 외출이면 카메라를 지참한다."
뭐 이런 구호는 없지만
집에서 출발하기 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카메라와 삼발이를 갖고 나오길 잘 했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가 올 듯 말 듯한 구름 끼인 날
애인이라도 있으면 학생인 척하며 팔장 끼고 돌고픈
낙엽 딍구는 소로길을 따라
천천히
천천히 걸어가 보았습니다.
붉은 벽돌로 된 담을
한걸음 한걸음 뻗어 오르는 담장이 넝쿨과
마치 미술과 학생들만을 위한 듯한 학교처럼
노랗고 빨간 단풍진 나무들과
고불고불한 소로 길 위엔
골고루 뿌려 놓은듯한 울긋불긋한 단풍잎들
사진 작가는 못 되지만
"풍경이 작품을 만든다"란 생각을 굳이 하면서
몇장 담아 보았습니다.
사진을 배운지 얼마 안되었지만
그래도 풍경이 아름다워 찍어 놓은 사진 몇 장들을
글 속에 함께 집어 넣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이렇듯 아름다운 풍경에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여기 저기서 시험을 일찌기 끝낸 학생들이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대학 사 년을 다니며 나름 데로의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고
앞으로의 삶에 대해서 무엇인가 더 가치 있는 길을 찾기 위한 젊은이들
눈앞에 보이는 한사람 한사람을 감싸 안으며
그동안 어려운 공부 하느라 애 많이들 썼네 하고 토닥이고 싶습니다.
자식들은 목표를 세워 나가면서 꾸준히 학업에 전념하고
부모들은 그 뒷받침을 하기 위해서
한눈 팔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교민 사회
그런 사회가 되어지기를 바라면서
대한에 뿌리박은 아들 딸들아
결과에 매이지 말고 정열과 성실로 삶을 살아다오.
가족을 위해 외로움을 불싸 하고 이민의 길을 선택한
이민 1세 여러분
첫 마음 잃지 마시고 행복이 마중 나오는 그날까지
다시 한번 뛰어 보았으면 합니다. <끝>
응모자 ; 엄경제
Kyoungje 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