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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연구소 제1회 풍물굿학교 자료집
목차
1.굿연구소 풍물굿학교 소개
1) 설립취지 및 목적
2) 학교운영방침
3) 주요사업
4) 향후계획
2. 제1회 굿연구소 풍물굿학교 커리큘럼
3 교육내용
1) 각 강좌의 성격과 교육목적
2) 날 별 강좌내용
[내용]
1.굿연구소 풍물굿학교 소개
1) 설립취지 및 목적
①양적 확산에 비해 이렇다할 질(質)의 성장에 실패하고 있는 지금 풍물의 한계를 보완할 내용 확보와 안정적인 교육체계의 필요성.
②수준을 갖춘 풍물 전문가 양성 프로그램이나 시스템의 필요성
③풍물굿의 실체 회복과 풍물굿운동의 실천력 구축 - 굿의 미학과 사상에 입각한
2) 학교운영방침
① 굿연구소 주요사업의 일환으로 운영한다.
② 굿연구소 산하에 둔다.
3) 주요사업
①교육안 개발
②강좌기획
③자료집 제작 및 배포
4) 향후계획
① 최고 수준의 풍물굿 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해 나간다.
② 주기성을 갖고 상설화시켜 나갈 것이다.
2. 제1회 굿연구소 풍물굿학교 커리큘럼
1) 이번 커리큘럼 작성의 기본 목표
①몸, 흥, 판을 살릴 수 있는 풍물호흡과 몸쓰기 익히기
②원로 명인들의 공력과 멋을 느끼며 배우는 시간
③풍물 활동에 필요한 사상적 지침을 마련할 수 있는 영상강돠, 이론강좌.
④배운대로 혹은 마음대로 노는 합굿
2) 커리큘럼
<수업일정표 들어갈 것>
3 교육내용
1) 각 강좌의 성격과 교육목적
-몸풀기 : 현대의 풍물이 너무 음악 중심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 풍물굿이 본래 갖고 있는 가무악희(歌舞樂戱)의 종합적인 내용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면, 먼저 음악 이전에 몸쓰기(舞)로 장단의 기운에 젖어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강좌는 그 목적달성과 아울러 아침운동의 효과를 동시에 얻을 수 있도록 배치하였다. 이 동작들은 어떤 운동이나 춤에도 효과적일 수 있도록 어떤 도구를 사용하지 않은 맨손 몸풀기에 초점을 맞췄다. 현대무용의 동작, 탈춤, 풍물의 동작 등에서 추출한 기본적인 동작들을 매일 반복하여 연습할 것이다.
-몸풀기 풍물 : 이 강좌는 풍물(악기)을 직접 활용하여 풍물굿이 갖는 가무악희(歌舞樂戱)의 내용에 젖어들도록 구성하였다. 특히, 몸으로 장단을 치는 방법과 자기 몸짓을 통해 장단을 표출하는 방법 찾기에 주력할 것이다. 장구, 북, 소고를 중심으로 풀어나간다.
-명인강좌 : 현대 풍물이 회복해야할 요소 중, 제의성과 살림성을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살림성이라 하면 장단의 기운과 맛을 가무악희를 통해 최대한 발현시켜 대중들의 몸과 마음에 신명을 지펴 올려 궁극적으로는 몸과 마음, 그리고 모든 살림살이를 살려내는 데에 있다. 이를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장단의 기운을 제대로 뽑아내는 것이 선결조건이다. 이는 정확한 장단 이해와 더불어 곰삭고 곰삭은 공력에 의한 내공이 높을수록 효과적이다. 풍물의 공력을 지닌 명인들을 주제별로 초청하여 직접 지도를 받으며 그 기운을 느껴보는 시간이다. 지역성을 고려하여 구성하였다.
-영상강좌 : 명인강좌에서 느껴본 그 기운과 실체가 지역과 사람에 따라 어떻게 차이가 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치되는 공통점은 무엇인가를 풍물굿 현장의 기록을 통해 다양하게 느껴보는 시간이다.
-합굿 : 그날 명인과 영상강좌를 통해 습득한 이론과 실제를 합굿을 통해 분위기로 체득해보는 시간. 강의를 해주었던 명인이 합굿을 끌어감으로서 그 흥과 맛(공력)에 감화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물론 술과 함께
-특별강좌 : 풍물굿운동의 좌표를 점검해 보는 시간이다. 변혁운동의 일환으로 수용되었던 풍물운동이 풍물굿운동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 필요한 좌표와 이념 설정을 위한 자리이다. 먼저 풍물운동사를 되집어 보고 향후 풍물굿의 미학과 사상에 입각한 풍물굿운동의 좌표를 고민해본다.
2)날(日) 별 강좌내용
<첫째 날(14일)>
①몸풀기 풍물1 : 원박의 소삼대삼을 살리는 법
현대인들이 치는 풍물은 너무 기교중심 지향성이다. 가치기준이 테크닉의 화려함에 있다. 아쉬운 것은 가장 기본이 되는 장단의 기운과 맛을 제대로 살려내면서 기교가 부가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반대현상이 강하다는 점이다. 즉, 장단 하나하나, 가락 하나 하나의 기운이 제대로 발현되지 않은 형태상의 테크닉만 횡횡하기 때문에 ‘살림’의 장단, ‘살림’의 풍물, ‘살림’의 (굿)판을 만나기가 힘들어졌다. 살림의 굿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첫쌔, 힘이 있어야 한다.
둘째, 원박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몸으로 체득되어야 한다.
풍물은 장단에서부터 시작한다. 가장 기본이 된다는 말이다. 힘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장단에 힘이 들어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장단에 힘이 들어가 있으려면 치는 사람이 그 만큼 힘을 써야 가능하다. 강력한 힘과 에너지는 그 사람의 생명력의 발현이다. 왕성한 에너지를 넣어 친 장단은 그 소리와 몸짓을 보고 느끼는 사람에게 그대로 뭔가를 전해주게 된다. 풍물을 치는 사람의 기운이 풍물(악기)과 몸짓이 증폭시킨 장단의 기운체, 즉 살림의 기운(에너지)이다.
장단은 고유의 기운이 있다. 굿거리는 굿거리 특유의 맛과 기운, 삼채는 삼채만의 특성과 기운이 있음을 우리는 체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 장단의 가장 완벽하고도 정확한 기운은 원박에 담겨있기 마련이다. .그 원박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풍물을 통해, 몸짓을 통해, 소리를 통해 표출시킬 수 있어야 한다. 단순히 머리 속에서의 이해가 아니라 몸으로 이해가 절대적이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그 기운을 다양하면서도 재미있게 전달하기 위해 수많은 가락이 자연스럽게 생성되기 마련인데, 여기에서 기교와 테크닉이 비로소 발현되게 된다.
우선 원박 기운의 구조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장단은 기본적으로 대삼소삼, 암가락 숫가락의 구조를 갖고 있다. 이에 대한 이해는 절대적이라 표현할 정도로 중요하다. 그 장단의 대삼소삼이 어떤 흐름으로 구성되어 있나를 파악하되 이를 몸으로 체득하여 표출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시간에는 원박이 소삼대삼으로 정확하게 구성되어 있는 장단을 선택하여 장구 중심으로 알아본다.
②지신밟기 고사반 : 부산 아미동 김한순의 비나리, 고사굿
풍물굿의 제의성 : 풍물이 풍물굿이 되기 위한 조건 중 빠뜨릴 수 없는 요소로 제의성이 있다. 풍물굿에서 제의는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풍물로 굿을 이룰 때는 반드시 당산굿으로부터 시작하였다.(당산굿이 불가능하면 ‘기굿’이라도 해야 했다) 정초면 전국적으로 행해졌던 마을굿의 지신밟기(마당밟기, 메구)도 풍물이 담당하였는데 바로 이는 제의(祭儀) 그 자체였다. 유량예인들의 걸궁마저도 그 기반은 가가호호에 지신을 밟아주며 축원해 주는 기원에 응답하는 답례물이었다. 주민들의 신앙을 건드려 나오는 답례품(돈과 쌀)이 유량예인들의 생존기반이었던 것이다. 풍물이 풍물굿이 되기 위해서는 제의성을 제외시켜서는 안된다.
신앙적인 측면을 제외하고도 제의는 다양한 기능을 갖고 있다. 우선 제의는 마음을 모아주는 경건성과 신성성이 발현된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제의는 그 자리에 모인 목적과 이유를 다시금 되새기는 기회를 제공한다. 제의의 내용(노래, 비나리, 덕담 등)은 그 자리에 왜 모여 굿을 하는 지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판에 모인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통합 수행능력을 갖는다.
제의는 그 집단과 개인의 정체성을 환기시켜준다. 근원과 근본뿌리에 대해 이야기(노래, 상징 혹은 상징체계)를 끊임없이 하기 때문이다. 제의를 경건한 마음으로 자신의 근원과 존재에 대한 실체를 되새기는 기회를 제공한다. 대부분의 제의는 생명의 근원에까지 맞닿아있기 마련이다.
이것들을 통해 마음과 영혼을 정화되는 기회를 갖게된다. 일상의 세속이 가져다 준 거짓과 더러움과 사악함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제공하여 순수함을 회복하는 기회가 된다. 적어도 제의를 행하는 그 순간만이라도.
니이체와 데카르트 이후 제의성을 잃어버린 현대과학문명에 제의성의 회복이 한편으로 거론되는 현대문명에서 예술과 제의가 훌륭하게 결합되어 있는 풍물굿의 여러 양식과 내용을 잘 갈무리하고 회복하는 것은 미래지향적일 수 있다. 이런 거창함을 차치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순수성에 잠시라도 잠길 수 있는 제의성의 회복은 분명 가치가 있다.
이 시간에는 경상도굿의 지신밟기양식(김한순)을 통해 접근해본다.
※김한순 상쇠의 지신밟기 사설
※김한순 :
1936년 : 삼대독자이시며 한약과 도 공부에 열성이신 아버지 (결혼 당시 부친16, 모친14)와 밤낮으로 칠성신을 모신 어머니 사이에서 공을 들여 6남매 중 째로 강릉 경포대에서 출생(계 유년). 강원도 양양군 연곡면에서 성장. 7세 때부터 농악에 취미
1945년경 : 맏형 상쇠, 둘째 무동, 스님 법구로 삼 형제가 농악판에 따라 다님. 일제 때 악기를 다 빼앗겨 그때 당시 깡통(통조림)으로 연습, 지게 목발로 연습. 부친이 그 이후 산에 공부하러 들어가 혼자서 팔도 강산을 다니며 부친을 찾음.
1955년 : 실상사 입산. 지리산에 부친이 계시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갔으나 아버지가 가족을 꾸리고 있어 실상사로 들어 감. 절에서 부산으로 왔다 갔다 하다 대신동 고분돌이 농악단 (걸립 농악단)에 들어 감.
1960년 밀양 표충사 수행. 12월 김귀엽 보살과 결혼
1963년 부산 아미동 대성사 창건
1972년 10월 제11회 신라문화제 전국 농악경연대회 1등 상쇠상 수상
1974년 10월 조선일보 대구지사 주최 ‘제3회 전국농악경연대회 상쇠상’
1976년 10월 제15회 신라문화제 전국 농악경연대회 1등 상쇠상 수상
1977년 6월 전주대사습 전국 대회 농악부분 장원
1979년 11월 24일 사단법인 부산 농악 보존회 발족
1980년 2월 22일 ‘부산 농악’ 부산 지방 무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상쇠 기능 보유자)
1981년 3월 다대포 후리 소리 발굴
1983년 10월 제24회 전국 민속 예술 경연대회 (경북) 개인 연기상 수상
1984년 10월 제23회 전라예술제 농악 단체상 수상
1985년 7월 대성사가 대한불교 총화종 사찰로 인정
1987년 11월 다대포 후리 소리 부산지방 무형 문화재 제7호로 지정
1989년 4월 일붕 삼장 대학 전법사 자격 취득
10월 제28회 전라예술제 농악 단체상 수상
1990년 10월 제31회 전국 민속 예술 경연대회 (제주) 개인 연기상 수상
불교 문화 예술원 원장
1998년 8월 대한 불교 총화종 대종사
1999년 1월 대한 불교 총화종 부산교구 종무원장 취임.
5월 세계 불교 승왕청 대승정
6월 세계 불교 승왕청 문화 예술상 수상
동국 불교 전법대한 교수 위임
각종 민속 경연대회 100여회 입상 및 출연
현재 대성사 주지
③ 영상강좌1 : 풍물의 제의성
여러 지역 풍물굿의 제의 현장을 영상으로 간접 체험하는 기회. 전라남도 고흥군의 여러 지역의 마당밟기, 광산농악의 걸궁(전남 함평), 전라남도 해남, 완도, 진도 등지의 도제, 서울 봉원사 난장의 기고사 등등
<둘째 날(15일)>
①몸풀기 풍물2 : 육방으로 몸쓰는 법
풍물굿은 야외 마당에 적합하도록 계발된 굿이다. 풍물(악기)은 이에 맞는 재질과 성음으로 제작되어 있으며, 또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원을 기본으로 하여 판(마당)을 형성하며 굿을 쳐나간다. 그러므로 시선과 동선에 앞․뒤가 있을 수 없다. 공간 전체를 다 활용하여야만 대중에게 관심을 효과적으로 유발시킬 수 있다. 전․후․좌․우․상․하(六方)가 모두다 활용하여야 할 공간이자 방향이다. 육방을 다 활용할 수 있는 몸쓰기와 움직임에 대한 개념과 훈련이 필요하다.
이의 획득은 시선과 동선의 앞․뒤가 분명한 플로시늄무대에서도 효과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몸쓰기와 움직임일 수밖에 없다. 표현영역과 가능성이 대폭 증대되기 때문이다.
②구음과 장단과의 상관관계 익히기 : 황재기 명인
구음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다. 장단의 기운을 가장 정확하게 담아내어 전달하는 방식이 구음이다. 어떤 악보도 구음이상의 정확한 전달효과를 얻기 힘들다고 단언할 수 있다. 구음의 성음 속에 장단의 기운과 실체가 그대로 묻어 나온다. 그 장단과 가락의 기운뿐만 아니라 장단을 치는 사람의 공력까지 파악할 수 있다. 구음을 통한 장단이해와 습득은 앞으로 교육방법으로 깊이 연구되고 계발되어야 할 영역이다.
풍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황재기 선생의 풍물 장단과 가락의 구음을 접해보고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큰 공부가 될 것이다.
※황재기선생
황재기 선생은 고깔소고춤의 명인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다. 그러나 쇳가락에 있어서도 최고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그분의 쇠와 장구가락의 구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독특하면서도 깊이와 흥취가 있다.
선생은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근동리에서 1922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굿(풍물굿)을 좋아하여 십리를 멀다하지 않고 구경을 다녔으며 13세때부터 굿물을 만지다가 17세에는 이모졸이라는 분으로부터 고깔소고춤을 배우게 된다. 이후 우리국악단, 등 여러 포장걸립패에 소속되어 임방울, 김연수 등과 유랑생활을 하였으며, 이 시절 설장구의 명인인 김오채 선생하고 같이 소고춤을 추기도 하였다. 난장과 포장걸립이 쇠퇴하자 한동안(3년) 가요계의 지방흥행단인 ‘새나라쑈’단의 총무를 보며 연명하기도 하였다. 이후 서울에서 활동을 하였으며, 국악협회 농악분과위원장을 여러 번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국악대상,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③영상강좌2 : 장단과 가락의 구성원리
장단의 생성 양태를 살펴보면 몇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첫째, 자연의 호흡주기를 장단화 한 경우다.
장단은 호흡이다. 호흡은 들술날숨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장단은 들숨날숨이 한 번 이뤄지는 사이에 생성된 기운의 흐름체이다. 우리 장단에는 자연의 호흡주기를 장단화 하는 경우가 발견된다. 일년 12달을 한 호흡으로 본 중머리장단(12박), 24절기를 장단화 해 놓은 진양조(24박) 등이 대표적이다. 자연의 변화과정도 살아있는 생명체로 인식하였다는 뜻이며, 그 호흡과 사람의 호흡의 상호조화를 장단이라는 것을 통해 꾀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노동리듬에서 우러나오는 호흡을 장단화 한 경우
우리 몸의 움직임과 호흡은 리듬이 있게 마련이다. 각 노동동작은 독특한 리듬이 있어 이 리듬에 일꾼의 호흡과 동작을 일치시키면 힘들이지 않고 장시간 일을 할 수 있어 노동생산성을 극대화 할 수 있다. 각 노동동작과 리듬의 호흡을 장단화 해 놓은 것으로 세마치 장단이 대표적이다. 세마치장단의 발생에 대한 몇 가지 설이 있는데 밭에서 씨를 뿌리기 위해 흙을 파고 씨를 뿌린 다음, 흙을 덮는 세 가지의 동작을 장단화 했다는 설과, 두엄을 뒤짚어 주기 위해 두엄 위에 올라가 쇠스랑으로 두엄을 찍어 엎은 다음 발로 밟아주는 세 가지의 동작을 장단화 했다는 설 등이다. 어떤 설이든 일동작에서 나왔다는 것은 일치하고 있다. 세마치 장단은 우리 음악과 춤의 큰 특징인 3박장단의 가장 기본이 되는 장단이다. 이의 변형과 변화가 다양한데, 양산도, 삼채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우리말을 그대로 장단화 한 경우.
말은 의미를 전달하게 된다. 우리말을 그대로 장단화 해 말을 일일이 하지 안으면서도 장단만으로 말이 갖는 의미를 똑 같이 전달시키는 경우가 발견된다. 우리 어법과 말의 억양이 그대로 장단에 살아있어 장단구성원리로 작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신- 지신- 지신-, 당-산 지신- 지신-”(전남 여수시 소라면 일원의 ‘당산굿’) 혹은 “가만- 가만- 갑시다. 조-심 조-심 갑시다”(전남 보성군 벌교지역의 ‘질굿’)
넷째, 우리 몸의 호흡구조를 장단화 한 경우
사람은 호흡을 해야만 한다. 그 호흡이 건강하고 힘차야 한다. 편안한 때의 호흡, 슬플 때의 호흡, 달릴 때의 호흡, 등 사람의 움직임과 감정의 희노애락에 따라 다양한 변화가 있다. 이들 기운체를 장단화 한 경우다. 휘몰이, 굿거리 등이 이 경우에 해당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우리 몸의 움직임과 지형조건과의 상관 관계를 장단화 한 경우
혼합박으로 된 질굿 같은 경우, 울통불퉁한 한국의 지형조건에 맞는 걸음걸이를 위해 계발된 지혜의 산물이다.
기타.
이처럼 장단의 생성원리와 구조를 풍물장단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그 구조를 파악해 보는 시간
<셋째 날(16일)>
①몸풀기 풍물3 : 흥․몸․판을 살리는 풍물 치는 법
풍물굿판은 신명과 흥이 넘쳐나야만 한다. 치배는 판에 모인 사람들의 신명을 끌어내 흥이 넘쳐나도록 만들어 줘야 한다. 그리고 오른 신명을 적극적으로 판 안으로 끌어들여 하나로 묶어나가야 한다. 치배와 판에 모인 일반 대중과의 접점이 소고이고 잡색이다. 이 시간에는 소고를 중심으로 자신의 신명을 살리고 남의 신명도 끌어내는 훈련을 한다.
②진도 북놀이 : 김내식 명인
북은 무척 남성적이고 전투적이다. 금고(군고)의 경우 북수들은 전투병들에 해당한다고 본다. 북놀이의 힘찬 움직임과 성음은 원초적인 생명력을 느끼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특히, 전문 예인들 보다는 두레풍장이나 뱃사람들의 북놀이에서 그 느낌은 강하다.
북놀이는 풍물판굿에 나오는 북놀이와 두레굿, 김매기굿 등 두레풍장에서 일의 기운을 북돋아 주던 모방구(못북)로 크게 나뉜다. 후자의 경우, 지금까지 명성을 날리는 북놀이로 진도북놀이를 들 수 있다. 진도 북놀이는 장구처럼 북채를 두 개 들고 치는 쌍북놀음이다. 대다수의 외북치기는 한 손으로만 북을 치기 때문에 원박 중심의 웅장한 소리를 내지만, 양북치기는 양손에 북채를 들고 치기 때문에 장구처럼 잔가락을 많이 활용할 수 있으므로 멈춤과 이어짐이 민첩하고 가락이 다양할 뿐만 아니라 섬세하다.
진도북놀이는 양태옥, 박관용, 박병천, 장성천, 김기선 등 여러 명인들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이번에 만나게 될 김내식씨는 여타 세련된 북놀이꾼들에 가려 별로 알려지지 않은 북꾼이지만 진도에서는 가장 투박하면서도 힘찬 북놀이로 나름대로 독특한 맛을 내는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내식
<프로필 추가할 예정>
③영상강좌3 : 풍물의 공력(몸과 악의 성음)
풍물에도 분명 공력이 존재한다. 풍물의 명인들도 판소리꾼이나 춤꾼들처럼 “이 세계는 끝이 없는 길”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한다. 해도 해도 그 깊이와 가능성에 있어 종착점을 찾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공력에 우리는 환호하는 것이다. 그 공력은 몸짓과 소리 성음에서 동시적으로 나타난다. 끝없는 연습과 다양한 판의 경험이 만들어내는 세계이기도 하다. 여러 명인들의 움직임과 소리, 그리고 그 삶의 역정을 살펴보면서 그 특성과 맛을 만들어낸 공력의 실체를 파악해 보는 시간
<넷째 날(17일)>
①몸풀기 풍물4 : 곡선을 살리는 풍물치기
풍물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민중예술은 곡선의 미학이다. 곡선의 선율, 곡선의 움직임을 체득하는 것이 풍물의 깊이와 맛을 우려내는 지름길이다. 곡선은 3의 수리체계가 빚어내는 결과이기도 하다. 3박자, 3쪽 기운을 제대로 소화하고 제대로 표출시켜내는 훈련이 필요하다. 장구와 소고춤을 통해 접근해 본다.
②금고의 대포수
대포수는 풍물패의 대장이다. 풍물굿판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는 역할이기도 하다. 그러나 농악, 사물놀이뿐만 아니라 현대의 풍물에서마저 대포수의 위상과 역할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포수의 역할이 상쇠에게도 넘어가버린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포수의 권위와 역할이 건재한 풍물굿을 아직 발견할 수 있다. 금고(군고) 지대의 금고가 그러하다. 금고지대의 다양한 대포수들의 모습과 피에로로 전락한 여타 지역의 대회용 농악의 대포수들을 비교해 보면서 대포수들의 위상을 재음미해보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금고/군고란
『軍鼓』란 군사적인 성격이 강한 풍물굿으로 그 분포지역은 주로 낙안, 고흥, 순천, 여수, 광양, 장흥, 해남, 강진, 진도, 완도, 신안, 목포, 무안, 법성 등 전라도의 서남해안도서지방이다.1) 유독 이 지역에 전투성이 강한 풍물굿이 아직도 강한 전승력을 갖고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오게 된 것은 앞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다. 즉, 역사적인 격량을 겪으면서도 항상 민족적이고 민중적인 입장에 선 싸움을 치뤄왔으며, 청해진의 몰락이후에는 이 지역이 북방의 변경과 더불어 최전방 군사지역이라는 성격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끊임없는 왜구와 해적으로부터 효과적으로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관군(정규군)에게만 자신들의 생명을 의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위적인 방어조직과 전투력을 스스로 담보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인 필요2), 4교대로 일 년간 3개월을 근무하는 조선시대의 육군에 비해 2교대로 6개월씩 근무해야 하는 조선수군의 무거운 군역3)4)은 생활 속에 군사적인 감각과 내용이 내륙지방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녹아들게 했을 것이다. 독자적인 전투수행이 가능했던 육지의 의병들과는 달리 수군과 공동으로 전투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던 해상전투의 특성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국가적인 변란에 처할 경우의 의병활동5)이라 하더라도 수군에 편재되어 수군과 전투를 공동으로 수행케 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정규군의 전투방식과 문화가 이 지역의 문화(풍물굿)와 직접적으로 부딪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결과이리라. 이 지역의 군고가 갖는 특성을 몇 가지만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군고에는 ‘龍旗’나 ‘농자천하지대본기’ 같은 農旗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군고에서 가장 중시되는 기는 ‘令旗’이며 영기 이외에는 특별한 기가 보이지 않는다.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임이 분명하다.
둘째, 軍師와 집사의 존재다. 군사는 잡색들과는 많은 점에서 성격을 달리한다. 군사가 있는 군고
패에서는 군사가 실질적으로 군고를 지도하고 군고를 대표한다. 군사와 집사는 한문 해독 능력을
필수조건으로 한다. 집사는 순한문의 청령을 하달하는 것이 주된 임무다
셋째, 엄격한 軍律이다. 군고의 규율과 질서는 군율에 준한다.6) 치배를 軍衆 · 軍中 혹은 軍廳 · 軍摠이라고 부르며, 명령을 하달하는 聽令法이 아주 체계적으로 정립되어 있다. 특히 聽令文은 순한문으로 되어 있어 한문으로 청령을 주고 받는다.
네째, 징과 북의 중요성이다. 징의 점수(타점)는 군령을 전달하는 신호기능도 하였기 때문에 징점의 정확한 타점이 더욱 더 요구되었으며, 정규군의 전투에서 돌격명령을 하달하던 북소리는 바로 군고에서 북의 중요성으로 부각된다. 전투를 최전선에서 수행하는 전사(군졸)들이 군고에서는 바로 북수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징이 끝쇠 다음에 위치하는 내륙지방의 풍물패와는 달리 군고에서는 상쇠 다음에 위치하며7), 법고(북)의 타법도 궁편만 치지 않고 강한 공격성을 갖는「각소리」를 집중적으로 활용한다.
다섯째,「도둑잡이굿」의 비중이다. 판굿의 가장 정점에 해당하는「도둑잡이굿」이 어느 지역· 어느 성격의 굿보다도 군고에서는 더 정점이다. 놀이의 내용에서도 ‘생쥐’가 도둑이 되고 잃어버린 ‘꽹과리’를 찾는 과정의 놀이성이 촛점인 내륙지방의 두레풍물굿이나 연희풍물굿과는 달리 군고의 ‘도둑’은 명확하게 ‘賊將’이 되며 ‘적장의 목을 베는 순간’은 도둑잽이굿 뿐만 아니라 전체 굿의 정점을 이룬다.
여섯째, 공동체성의 두드러짐을 들 수 있다. 군고는 연희성을 강화하기 위한 개인적인 기예가 발달해 있지 않은 대신 군사집단의 일체성과 두레풍물굿적인 대동성(공동체성)이 중시된다. 이런 원칙은 놀이방식과 굿의 구성, 그리고 굿판의 분위기를 규정하는 기준이다. 특히 연희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풍물꾼들의 개인적인 기예를 총동원하는「판굿」의 경우를 살펴보면, 명칭을「판굿」으로 부르지 않고「밤굿」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으며, 밤굿의 구성에 있어서도 잡색들보다도 구경꾼과 동네사람들이 주체가 되는「광대놀음」이 발달해 있다. 개인놀이에 있어서도 소고놀이가 중시되어 그 놀이방식은 한 명씩 빠짐없이 판에서 놀려주는 원칙이 견지된다. 즉, 밤굿의 정점이 개인놀이가 아니라 공동체의 안녕과 질서를 깨뜨리고 풍요를 방해하는 요인(도적)을 함께 물리쳐 없애는「도둑잽이굿」이 정점에 배치되는 구조임을 알 수 있다.8) 그 결과 풍물패가 주체가 아니라 마을공동체성원들이 바로 굿(판)의 주체이자 주인이라는 굿의 본질이 철저히 견지된다. 군고에서는 개인의 기예만 뽐내는 상쇠는 배척당하며, 사람들을 얼마마큼 ‘잘 놀리느냐의 여부’가 상쇠의 가장 중요한 덕목과 조건이 된다. 즉 풍물패는 마을을 수호하기 위하여 전장에 나가 싸우는「전사」, 마을사람들을 잘 놀려 즐거움과 기쁨과 단합을 이끌어내는「광대」, 신(자연)과 인간 · 사람과 사람 · 사람과 일을 잘 만나 합일되게 함으로써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하여 막힘없이 잘 돌아가게 판을 벌려주고 놀려주는「중간자(무당;광대)」라는 본래의 성격이 종합적으로 잘 견지되고 있다.
일곱째, 상대적으로 잡색들의 역할과 기능이 살아있다. 연희풍물굿으로 가면서 퇴화해 버렸거나 화석화되 버린 잡색이 군고에서는 아직도 본래의 기능과 역할을 담당하며 중요한 풍물패의 구성원으로서 자기 몫을 확실하게 해낸다.
여덟째, 놀이와 춤이 중시된다. 공동체성과 대동성의 중시는 굿판에 모인 사람들을 구경꾼으로만 머무르지 않게 하여준다. 이를 위해 구경꾼들이 직접 놀이꾼이 될 수 있도록 ‘놀이’를 강화시켜야만 한다. 연희풍물굿이 가락중심으로 발전해 가고 곡예적인 성격의 몸놀이를 집중적으로 개발시킨데에 비해 이 지역의 굿은 가락보다는 몸짓을, 전문적인 몸짓보다는 보릿대츰적인 춤사위를 선호하게 된다. 이런 특징은 특히 장고 놀음에서 두드러진다.9)
아홉째, 굿의 제의성이 아직도 살아 있다. 연희풍물굿화, 서구과학적 사고와 기독교의 영향으로 퇴색되버린 풍물굿의 제의성이 그 지역민들의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비교적 내륙지방의 굿에 비해 잘 보존되고 있다.
③영상강좌4 : 마당성이란?
마당성은 우리 민중예술의 가장 큰 특성 중의 하나다. 마당성의 본질은 공간성에 있지 않다. 대동성을 어떻게 획득하느냐 여부가 마당성 획득의 핵심이다. 공간의 문제, 놀이 방식, 치배와 구경꾼간의 위상 설정, 이야기의 내용 등은 부차적인 조건으로서 마당성을 획득하기 위한 장치와 통로들일 뿐이다.
이들 조건들의 내용과 장치들이 어떤 메카니즘을 갖으며 마당성을 획득해 가는지 파악하는 기회를 갖는다.
<다섯째 날(18일)>
①몸풀기 풍물5 : 자기 멋 찾기
풍물굿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삼신세상을 현세에 이루려는 것이다. 삼신세상은 3의 수리체계에 의해 운영되고 완성되는 세상이다. 이는 ‘나’(제3의 존재)로부터 시작되며, 궁극적으로 자기(나)의 최대 발현을 통해 달성된다.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체성에 입각한 자기(나)의 개성과 자기 실현이 기저와 골간을 이룬다. 예술의 영역에서는 그것이 ‘자기 멋’으로 나타난다. ‘자기 멋’ 찾기는 풍물굿을 제대로 하기 위한 가장 기본 조건이자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하다. 참석자 서로가 ‘자기 멋’을 찾아주는 시간
②민요(소리)배우기 : 차영녀
풍물굿은 양식적으로 가무악희를 다 동원한다. 소리의 영역도 무척 중요한 요소이다. 특히, 민요의 맛과 감각으로 접근하는 것이 요체였다. 황해도민요와 접하는 기회를 갖고, 소리굿의 질펀함을 느껴보는 자리를 갖는다. 동시에 민요장단을 익히는 기회도 갖어볼 만하다.
※차영녀
<추가 예정>
※차영녀의 소리 사설
<배치기소리>
연평 바다에 올라온 조기
양주(싸받이할 암놈 수놈)만 남기고 다 잡아 싣자네
아에헤 에헤아 어흐아 에헤야오(후렴)
삼국 충신 임장군(임경업)이
안선주 불러서 도장원 주었네
아에헤 에헤아 어흐아 에헤야오(후렴)
첫 정월부터 치는 북
일 년 열두 달 내내 눌러 쳤네
아에헤 에헤아 어흐아 에헤야오(후렴)
<나나이 타령>
소연평 꼭대기 실안개 돌고
우리집 문턱엔 정든 님만 돈다
이나이나이 나니로다 산이로구나(후렴)
뱃집 아주머니 인심이 좋아서
막득딸(막내딸) 길러서 화장아이(배에서 밥 짓는 아이) 주었네
이나이나이 나니로다 산이로구나(후렴)
울타리 밑에서 꼴 베는 저 총각
눈치가 있거든 옭아다 먹어라
이나이나이 나니로다 산이로구나(후렴)
뱃집 아주머니 거동을 보소
막걸리 동이 이고 엉덩춤 추네
이나이나이 나니로다 산이로구나(후렴)
③특별강좌1 : 풍물굿 운동사
풍물굿운동의 좌표 점검을 위한 개괄적인 운동사 정리. ‘풍물운동의 태동과 초기역사’<좌담회>의 내용을 참조
<여섯째 날(19일)>
①특별강좌2 : 풍물미학(삼신미학)
박흥주가 그간 나름대로 규명한 풍물굿의 실체인 삼신미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향후 풍물굿운동의 좌표를 함께 고민해 보는 시간.
<일곱째 날(20일)>
① 수료식
[부록]
<특별강좌1>
풍물운동의 태동과 초기역사10)
이야기꾼 : 황선진(‘생명축제’ 예술감독), 조경만(목포대학교 교수), 오영호(‘생각과느낌’ 실장)
사회/정리 : 박흥주(굿연구소 소장)
-전략-
박흥주(이하 ‘박’): 학교에서 합숙을 했었습니까?
조경만(이하 ‘조’): 예, 그 때 선진이형이 왔고, 연성수가 왔고, 가면극회에서는 이지현이라고 있었어요. 지금은 딴 일 하는데, 그리고 정현이라고 그 다음에 여기서는 일년 후배가 권태호, 정여창 쭉- 몇 사람이 있는데 죽 이어졌고. 그렇게 해서 가면극회가 엮어졌는데 해가 넘어가서 1975년이 됐죠. 합숙을 같이 하다 보니까 3월달 돼서 뭐가 있었느냐 하면, 관악산으로 서울대가 옮겼을거예요. 옮기자 마자 동아투위사건이 났을 거예요. 그리고 이 ‘진동아굿’이라는 것을, 진동아굿을 하는데 김도연, 뭐 몇 사람들이 나와서 막 하고, 누가 무당을 했드라? 정해일이든가, 해일이 형이었는가 아니면 중문과에 딴 사람이 있었는데 그 양반이 무당을 하고 인제 악기란 악사는 전부 농악반에서 간 거예요. 연성수하고 나하고 가서 했는데, 그리고 난 다음에 조금 지나고 나서 이상하게 선진이형은 지 학교 안가고 수원에 와서 많이 살드만. 그리고선 5월달까지 콘센트에서 계속 연습하고… 그 다음부터는 이게 학과가 농학관지 그랬어요.(웃음)
그래서 5월달 됐을 때, 그 때 아마 나하고, 학교 뒤 관산가 자취방을 빌려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나하고 선진이형하고 임명구씨하고, 명구형도 자주 왔어요. 수원에 계속 와서 저녁이며는 뒤에 있는 숲속에 마로니에라는 집이 있는데 라면 먹거나 술을 먹고, 앞에 가면 전봇대집이 있는데 동태찌게 먹고 연습하고, 낮에는 자고, 잠을 내 자취방에서 자고… 이렇게 자고 있었는데, 4월달이야. 갑자기 사람이 죽었다고 그래요. 아침에, 아주 맑은날 아침인데. 우리는 전혀 관여가 안돼있었어요. 전혀 관여가 안돼 있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냐?” 그러고서는 나갔는데 그날 오후에 데모를 했죠. 아침 데모는 이미 끝났을 때고. 술먹고 떨어져 모르고 있었어. 오후에 다시 데모를 굉장히 세게 했어요. 교문 다 밀어버리고. 활복을 한거죠 김상진형이. 그 현장은 우리가 못보고 활복 딱 한 다음에 다시 데모를 할 때는, 선진이형이나 명구형은 그쪽 대학 재학생이 아니니까 입장이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뒤에 있었고, 나는 같이 참여해서 같이 데모를 하고 있다가 딱 보니까 “아 사태가 이게 아니구나 이게 문제가 있구나.” 해서 이 때 말하자면 문화운동, 무슨패라 그럴까 그 때는 우리를 ‘딴따라패’라 그랬는데, 딴따라패가 할 일이 뭐냐. 그래서 그 즉석에서 농성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서울농대 강당 2층인가 거기서 농성이 시작됐는데, 선진형이랑 나랑, 명구형은 서울인가 인천으로 올라갔고, 그 때 농학과의 아주 천부적인 무당이 하나 있었어요. 장욱이라고, 원래 우리 서클 사람은 아닌데 워낙 같이 술마시고 지냈는데 너무 재치가 좋은 친구였어요. 즉석에서 썼죠. 어떻게 어떻게 한다. 무당은 정욱이다. 반주는 내가 한다. 선진이 형은 아무래도 그쪽 학생이 아니니까 아무튼 선진이 형이 악사를 했을 거예요 나하고 어쨌든. 주동을 하는 학생이 차성환이었어요. 차성환이 아마 부산에서 민주공원
오영호(이하 ‘오’): 73학번
조: 옛날에 남민전했던. 그 친구랑 몇 사람이 있는 곳에 가서 ‘이 판에서 하겠다’ 이렇게 얘기를 건네주고서는 들어가자 마자 굿을 벌렸죠. 굿을 벌렸는데 그 전까지는 하도 문제가 심각하니까 경찰이 들어오지를 못했어요. 뒤에서 교수들이랑. 그런데 이 굿을 벌이자 마자 굉장히 경직돼버렸어요. 엄청나게 경직돼버리고, 완전히 사색이 다 되가지고 바리케이트를 부수고 들어와버렸다고. 너무나 각오를 했었는데, 너무나 묘했던 것은 확 밀고 들어오는데 앞 선의 장욱이랑 우리를 지나쳐서 밀고 들어가버린거야. 우리는 뒤로 싹 빠졌어. 뒤로 싹 나와버렸는데 그 때 잡혔으면 큰일날 뻔했어. 근데 우리는 괜잖은데 까짓거. 선진이 형같은 경우는 외부가 돼가지고 더 꼬일수가 있었죠. 그 때 교수들도 밀고 들어가라고 하면 들어가야할 땐데 마침 그 때 있었던 분이 고광철선생이라고, 우리과 선생 한 사람이 다들 못봤는데 그양반만 나를 보고 장욱이를 본거예요. 그 후로 그 때 “굿을 벌인 자를 잡아라”가 상당히 오래갔어요. 한 학기 내내 갔을 거예요. “누구냐? 잡아라” 그런데 아무도 말을 안해. 그 선생만 알고 있어요. 학장은 “제적이다. 잡아라”. 그 양반이 끝까지 말을 안 하는 바람에 살았죠. 그 후에 이 문제가 농대에서 사람이 죽었으니까 뒷 수습은 관악에서 할 차례다. 그렇게 얘기가 돈 거예요. 그 때는 이쪽 딴따라패 쪽에만 선이 댄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사실 신동수씨라고 있어요. 동수형이 전체적으로 리완다하고 인류학과 출신의 영표형이 있고, 이렇게 몇 사람이 있었고. 나는 그 당시에 모르는 상태고. 내가 아는 범위란게 장만철, 장선우 하고, 희완이형은 알고는 있었는데 언제나 희완이형은 그 뭐라고할까 ‘이 일을 계속해서 키워나가야할 사람’이라고 하니까 항상 이렇게 해주는 거예요. 정성현이가 가면극회회장이었는데 요번에는 그러면, 이전에 서울농대에서 있었던 것은 그 후로는 아무도 모르고 그냥 넘어간 거야 넘어만 가고, 본격적인 굿이라고 하는 것은 이쪽에서 하는 걸로 이렇게 됐어요. 그래서 정성현이가 회장이었으니까 자기가 총대를 메는 거고, 그 위에 선배로서는 장선우니 뭐 이렇게 죽 있었고, 그 때 가면극회 3학년 위에 4학년들은 다 포함이되어 있었던 거예요. 김도연에서부터 전부. 있었고. 선진이 형이 있었고. 선진이 형한테 “그러면 농대에서는 뭘하랴?”. 공조체제라는 것이 나는 농대쪽의 대표. 이쪽에서는… “공조체제를 같이 할까?”, “그게 아니고 이쪽에서는 이쪽 대로 뒤에 키워나가야할 것이 있다” 이렇게 대충 이야기가 되고 선진이형이랑 몇 사람이 알고만 있는 거죠. 5월 22일, 나는 그때 농촌실습 나가서 전정하고 있었어.(웃음) “오늘이다”. 그래서 그 때 난 게 ‘오둘둘(5․22)‘이예요. 그래서 오둘둘 때 관악산에서 최고로 많은 제적생이 나왔죠.
그 후로는 풍물쪽에서 농대 풍물이 있었고, 관악산에서는 가면극회 그 친구들이 풍물을 하는 거죠. 가면극회쪽에서 오둘둘이, 가면극회만 있는 것은 아닌데, 이렇게 쭉 했었고. 그 후로 농대 풍물패는 그전부터 해왔던 발표공연, 각 대학에 확산시키기가 시작되었어요. 너무나도 요순시절처럼 좋은 것은 대학가에 탈패 풍물패해서, 풍물은 어떻게 된 게 고대하고 우리하고만 있었는데 근데 인제
오: 건대
조: 건대도 있었구나, 그런데 같이 많이 술 마신 게 고대 원왕철씨였을 거예요, 통나무 사장. 고대 쪽은 이제 농악을 하는 것이었고, 우리는 이제 색깔을 좀 바꾸는 거죠. 그래서 한 쪽으로는 뭐라 할까 당시에 민주화? 이런 쪽인데, ‘풍물의 민주화를 한다’ 그럴 때 창작을 해서 뭐 할게 없어 별로. 어쨌든 간에 내 꿈은 말하자면 집체적인 무용이거나 뭐거나 그런 스타일로 나가면서, 아니면 시위현장이면 시위현장을 하나의 판으로 보자였는데 이것을 감당해낼 만한 연희역량이 안되는 거예요. 그런 정도였고, 가면극은 뭐 옛날에 말뚝이만 춰도, 지금 보면 웃기는 노릇이지만, 저 말뚝이를 괜히 중앙정보부에서 하고 그러던 시절이죠. 풍물은 너무 싫어했어요 형사들이. 오둘둘 난 후로다가 계속 조사당하고 선진이형 찾아내라고, 공연하면 뒤에서 쫒아다니고 그랬는데,
이태호(이하 ‘이’): 중간 질문. 그 때 용어상으로 간단하게 ‘농악’ 아니면 ‘굿’, ‘풍물’이라는 용어는?
조: ‘풍물’이라는 용어는 낯설었어요.
오: ‘풍물’이라는 용어는 안썼구나
조: 그냥 ‘농악반’ ‘농악반’ 그랬지.
오: 그냥 의심없이 농악반이었어. 이름도 ‘농악반’이었고. 나 때까지도
이: 일상적으로 쓰는 용어도 ‘농악반’?
오: ‘농악반’
박: ‘굿’이라는 말은 쓰셨어요?
조: 그렇게 많이 쓰지는 안았어요. 답사를 다녀서 ‘굿, 굿’ 그러기도 하고 그랬지만. “우리가 이 용어를 바꿔야 되는 것 아니냐.” 이런 얘기도 했고. 농악이라는 용어의 어원을 우리가 자세히는 잘 모르겠는데 뭐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뭐 이런 문제의식은
오: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는데
조: 하여튼 풍물로 치며는 한편은 농악반이라는 것이 만들어지면서 일종의 행사성 위주에다 그냥 순수한 마음으로 했던 시대에서부터, 나는 별로 운동성이나 의식성을 잘 모르던 사람이예요. 그것부터 시작했던 것도 아니고, 다만, “아 이걸 좀 발표공연도 하고, 답사 다니면서 아 이런 것도 좋다. 뿌리를 깊게 해보자. 뿌리를 깊게하면 뭔가 연결되고 그래야 되는 것 아니냐” 이런 식의 생각을 하고 답사를 하고, 이것이 하나의 동아리면 동아리로서 제 나름대로 제대로 된 것을 하자는 쪽의 생각에서 이렇게 죽 해나갔었고. 그러다 이렇게 만나게 된 거고… 그 다음에 어차피 풍물이라는 것은 농민이고 뭐고, 또 이 자체가 그 당시에는 누구나 다 의식을 안 가지고 있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죠 세상이. 지금처럼 학생들이 여러 가지 의식으로 갈려져 있던 시대가 아니라 거의가 그랬어요. 거의 가 그럴 때니까 당연하게 할 거는 해야된다. 그 다음 단계가 단계적으로 보면, 중간에 시위나 그런 것에서 참여하고 같이 하는 것은 그냥 뭐 그건 기본으로 알고 하는 거고, 문제는 이 자체가 어떻게 커나가느냐? 할 때, 나는 이제 오둘둘 이후에 친구들은 들어가 있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이걸 키워 나가고 뿌리를 내려가는 일이다 딴따라 쪽으로 살 역할은. 그래서 타 대학들과 연계를 맺는 그런 일들을 했는데, 이것은 저절로 됐어요 당시만 해도. 지금도 다 같은 선후배로 알고, 그러니까 경상대학의 정병훈선생이 있는데 철학과에, 그 친구는 연대 탈춤연구횐가 그랬지 이름이. 회장이었는데 지금 봐도 완전히 선후배관계죠. 딱 이렇게 되고, 그런 식으로, 처음에는 두 명밖에 참여하지 않았던 공연이 그 다음에는 레파토리가 별로 좋아진 것도 없는데 붐을 타기 시작한 거야 서서히 서서히 주-욱. 76년대니까 붐을 타고. 그 때 내가 휴학을 해버렸어. “안되겠다” 두 가지를 다 할 수도 없고,(웃음)
이: 농악반을 위해서 전공과목을 일단 쉬었어요.
조: 전공하기도 싫었고. 딱 하고서는 76년 5월에 연세대 탈춤연구회에선가 풍물을 하겠다고 그래서 거기 가서 사는 거예요. 참 집이 인천이었는데, 왔다 갔다 통학을 하고 그랬었는데 집에는 안 들어가고 보름을 연대에서 탈반에서 자다가 오고. 거기 나보다 선배들은 그냥 내가 계속 선배라고… 그러면서 풍물패를 하나 만들었었고, 그 다음에 이대 판소리회에서 해보겠다고 해서 했고. 이대 가면극회에서도 뭘 한다 그래서 갔었는데 이대 가면극회는 그때 그 회장하고 별로 사이가 안좋았어요. 있어요, 이름은 기억 안나는데, 참 기껏 지들이 오라고 해놓고는 그 다음에 가며는 이상하게 지들끼리 연습하다가 한참을 기다리게 하니까 정병훈 연대 이 친구가 “형이 왔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그러면 와서 뭐 쫑알쫑알거리고. (웃음)
어쨌든 가면극회는 희완이형 형수가 이대 2회 회장이었고, 그 때는 다 같이 나와있으니까. 또 뭐 한거지 뭐. 직접적으로 거기는 풍물 가지고 가르쳐 본 적은 없어요. 그렇게 하다가 보니까 고대농악반하고 연결되고, 외대, 서강대… 서강대 가서도 좀
-중략-
중요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어요. 지금까지들 기억들이 안나고 사소하게 넘어갔던 건데 실제로 그 당시에는 어떻게 보면 의미가 있는 일이었어요. 연성수가 나 군대가기, 입대하기 전전날이야. 그 때 농악반에 여창이가 있었나? 하여튼 서병무 몇 사람 죽 하고, 오종호 하고, 가면극회 몇 사람 하고 같이 이제 어디 간다고 해서 간 게, 사당동에 교회가 하나 있었어요. 교회가 개척교회이면서 인제 기장교회였었고, 사당동 판자촌 주민들을 위한 무슨 공연이었어요. 근데 그런 것이 일회적인 공연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때는 “민중에게 돌려준다” 뭐 이런 의식이 강할 때죠. 그거 한 번 공연한다고 돌려지는 것도 아닌데. 한참 어떻게 하며는, 그냥 우리는 마당밟이를 죽 하면서, 폼이지 말하자면, “판자촌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통문화의 신명을 넣는다” 하면서 판자촌 공연을 했었고, 그 후로 아마 뒤로 지속하자 그랬는데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빈민을 대상으로 한 운동이랄까 하는 기운이 막 싹틀 때였어요. 그 때 기억이 있고. 마침 그 당시 보니까 다 전라도 사람들이예요.
박: 판자촌 사람들이요?
조: 어마어마했어요. 사당동 판자촌 동네가 요만한 텐트 하나, 군대 2인용 텐트 하나에 한 가족씩 사는 거예요. 옆에다 장독이니 뭐니 죽 늘어놓고, 이렇게 사는 게 끝도 없이 많았어요. 그 위에 언덕배기에 올라가서 공연을 하고,
이: 이 때만 해도 불록집들 보다 그런 집들이 많았던 때예요?
조: 예 전부 텐트 집이었어요.
이: 저는 블록집들일 때 가서 싸웠어요.
조: 그 일 하나가 기억나고, 그 전에 풍물패들이 가서 했던 것들이 뚝방, 뚝방주민들이 하나는 남양만으로 이주를 했고, 하나는 ‘보금자리’로 갔잖아요. 저쪽에 시흥에. 보금자리는 제정구씨가 갔고, 남양만은 김진홍목사가 간 거예요. 그런데 이제 김진홍목사가 갔을 때 의대를 한 게 기독교장로회랑 같이 참 많이 일을 했어. 그래서 그 때 황인성씨랑, 인성이 형이 형수하고 같이 거기를 들어가서 활동을 하고 있을 때예요. 갑자기 희완이 형하고 같이 마당밟이 해줘야 하고, 뚝방사람들 하고
조: 그 때 잘만 생각했었으면 풍물을 가지고 그러한 마당밟이를 넘어서서 좀 다른 형태의 뭔가로 현실적으로 파고들어갈 수도 있고, 뭔가의 장르를 개척할 수도 있었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죠.
이: 마당밟이라고 그러셨는데 마당밟이의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세요.
조: 그 뭐 보통 시골에서 하는 것하고 똑 같죠. 집 돌면서 하고, 그 때 괜히 의식적인 내용이 있어야 된다고 해서 내용을 바꿔서도 하고 그러는 건데,
박: 그 때 반응들이 어땠었습니까?
조: 똑 같죠 뭐. 하고 들어갔을 때, 지금이나 똑 같애요. 그 내용에 대해선 관심은 없고 그냥 풍물소리 들으니까 좋아서 하는 거고. 가면극은 기본적으로 잘 안됐고. 안돼는 거고, 본인들은 대개 생각해서 별걸 다 바꿔오는데 일반 민중한테 가면 잘, 그들이 어느정도 자기들도 만들고 참 활동도 하며는 맞아들어가는데 그러지 않으면 잘 안돼잖아요. 우리같은 경우도 내용에서 보다도 한참 하다가 보며는 주문이 들어오는데 “성주풀이 좀 해줄 수 있냐?”고 물어오니까(웃음) 뭐 그런 식이지 뭐.
박: 그 때 소화를 해 내셨어요.
조: 뭐 대충 아무거나. 한참 그 때 강령탈춤을 원래 하던 사람들과 같이 하면서 말뚝이도 하던 때라. 양소운선생한테 성주풀이도 배우고 그랬거든. 그러니까 해버리고 그랬는데
이: 사자 뒷다리에서 벗어나셔서(웃음)
조: 그 당시에 사람들은, 이게 뭐 대학생의 문화운동에 영향력도 있고 굉장히 대단한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데, 본인들도 의식화니 뭐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는데 민중들과 코드가 안맞는 거예요. 코드가 안맞고, 코드를 맞게 하려면 그 머리속으로 들어가서 우려내야 하는데 그럴 수 있는 단계가 아니었고, 그런데도 우리는 괜히 의식적인 내용을 써가지고 가 듣지도 않는데 그런게죠. 그랬었고.
하여튼 빈민이나 농촌에 관심을 두게되고, 농촌은, 농대는 그게 강해요. 옛날부터 주간농대 야간농대가 따로 있다시피, 해방공간 이전에는 독립운동 하던 동요 서요라는 게 있었어요. 서울농대역사라는 것은 지금처럼 서울대학교사 이런 스타일로 쓰면 안되요. 그것은 안되고 숱하게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일제 때에는 기숙사가 동요가 있었고, 서요가 있었는데 동요는 일본인들, 서요는 한국인들, 이게 바뀌었나? 아무튼 양요가 팽팽하게 경쟁을 해서 일종의 상록수 그런 스타일에서부터 발전을 하다가 나중에는 코뮤니스트가 굉장히 많이 나와요. 그 후에 해방공간에 있으면서 많은 수가 월북을 하고, 그 다음에 이 서울대학교 국립대학서부터 국대안반대, 그 때를 기점으로 해가지고 상당수가 싹쓸이를 당해요. 그 후로 뿌리로는 ‘농사단’이다 ‘개척농사회’다 뭐. 내가 다닐 때는 그런 이름들이었는데, 그런 식의 이념서클, 농민운동써클들이 쫙 서울농대 뒷문쪽으로 터를 잡게 되고, ‘서둔야학’이라는 게 있고, 그게 학생들에게 있어서 74년에 전철이 생기기 이전까지 주간에는 농학공분데 저녁이되면 어! 뒤에서는 다 이런 농업문제 이것들에 대한 토론이 쫘-악 벌어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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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진(이하 ‘황’): 서울대 농대 ‘두레’에서 우도가 퍼졌고, 홍대팀에서 좌도가 퍼졌다고, 뿌리로 말하자면 이 두 뿌리가 아닌가 싶은데, 그런데 홍대는 워낙 늦었고, 그러니까 서울대 농대가, 원래 ‘두레’라고 부르나? 이름이
오: 원래 ‘농악반’이라고 불렀죠. 두레라고 부르기 시작한 게 70년대 후반 언제쯤일 거예요.
황: 그래서 농악하고 민주화운동이나, 민중문화운동이나, 또는 민중운동과 연결시키게 된 게 이 조(조경만)하고 나하고 이렇게 해서 했을 거야. 하여튼 농대 두레가 풍물은 우리나라에서 문화운동으로 승격시킨, 응 발아시킨 주역이었어
박 : 형님(황선진)이 바람잡이 역할을 하시고 조교수님이 주역이시고 그렇게 되는 건가요.
황 : 평가는 잘 못하겠고, 하여튼
박 : 그 때 데모가 있으면 당연히 하는 것은 하는 것이지만, 독자적인 운동으로 전환돼야 한다는 과정에서 농악반 기존의 회원들과 의견차라든지 그런 것은 없었습니까?
조 : 그게 잘 없었던 이유는, 그 전에 상당히 쇠약해 있었던 점도 있었고, 선배들이 일단 마음이 어떻게 보면 선한 거죠. 선해서, 그건 알아서 해라, 알아서 하고, 그 다음에 판이 완전히 달라지니까 본인들이 전혀 관여를 안하고, 그리고 하나의 취미서클이었기 때문에 취미로다가 하는 것이었고, 뒤에서 좋아했죠. 이게 굉장히 많이 활성화되는구나 그래서 좋아했던 게 있고, 딱 한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양반 이름이 뭐드라. 과 2년 선배였는데 농악반 반장을 했었어요. 언젠가 술을 마시다가 나한테 딱 한 마디 하였는데, “지금보다는 그 때가 참 좋았어“ 그러대요. ”아 뭔가 내가 지금 놓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옛날에 공연 한 번 하고 나면 몇 십만원이 모여요 일년동안, 그리고 다 풀어먹여요. 풀어먹이는데 색시집에 가서 촥 먹여요.(웃음) 그러면 개판 나는 거지 완전히. 막 다들 개판나서 무아지경에 빠지는데… 그거보다는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뭔가 다른 스타일로 나가는데 그러면서 같이 하는 쪽으로는 무심했다 그럴까. 무심한 것도 아니었지만 하여튼 그랬고. 나의 바로 위에 선배, 바로 위의 농악반 회장, 그 분은 뒤에서 ”아, 잘해 잘해“ 격려를 하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일경이 형이라고 교수를 하고 있는데 축산학과예요. 그 양반은 합숙하면서 같이 뒹굴며 개기니까 마음의 고향처럼 후배들이 언제든지 술 뺏어먹고 하는 사람이었고, 그 서울농대 두레 사람 말고도 다른 인물들이 쭉 있어요. 작고한 교수인데 염도일이라는 교수가 있었는데, 그는 오영호한테 이야기가 나와야 할 판인데, 나름대로 애들 활동하게 해준 면이 있어요. 우리에게 제일 큰 사건이 아마 국풍81 사건이 있었을탠데. 그것은 지금도 기억이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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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그 때 국풍 때 사람들 엄청 많았죠. 먹자판이었고. 돈을 엄청 풀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해서 공연을 하고
박: 그 때 애오개11)를 왜 만들자고 논의가 되어서 시작하셨나요?
이: 대략 80부터 2-3년을 정리해야 이 이야기가 나올 것 같은데요.
황: 박정희 죽고 나서 3개를 만들었어. 하나는 신협, 박정희 죽고 나서 서울의 봄 그 겨울부터 봄 사이에 준비를 해 가지고, ‘한두레 신협’을 만들었고, ‘놀이패 한두레’12)를 만들었고, 또 ‘연구소’ 이렇게 대개 3각으로 해서, 때가 왔으니까 새롭게 문화운동을 하자 그랬거든, 그래서 그 때 신협은 한두레 후원팀에서 대표를 맞았고, 놀이패 한두레는 정연도, 정연도가 대표를 맞았고, 돈을 그 때 돈으로 몇 백만원 모았을 거야 아마. 새롭게 문화운동을 한다고 해서 세 축을 만드는데 희완이 형이랑 같이. 그런데 곧바로 저기가 났잖아. 계엄인가 뭔가.
박: 탈반들이 싹 이대에서 달려들어 갔었잖아요.
황: 그때 다 들어갔고, 아니 밖에 있던 선배들. 그 때 돈을 홍석화형이 관리를 하고 있었어. 그런데 계엄이 나니까 사람들 죽고 그러는데 이제 세상 끝이다. “신협이 다 뭐냐” 그러고 그 돈을 유인물 만들고 그러는데 다 썼버렸을 걸 아마. 그래서 그 이후에 죽 후원하던 사람들이 그 깨지는 것을 보고서 후원을 안 하기 시작했어. 한참 지나고, 그러니까 그 때 맨들려다가 못한 것, 그 동력을 가지고 애오개가 맨들어진 거야.
박; 그 때 애오개에서 주로 했던 것이 탈춤 하고,
황: 탈춤, 풍물, 연극은 따로 안했었고,
오/황: 미술, 세 가지지.
박: 거기에서 풍물이 했던 역할은 무었이었어요?
황: 주로 강습하지 않았나?
오: 강습이지 뭐./
황: 강습하고, 어디서 뭐 와달하고 하면 성실히 응했을 거야 아마.
오: 후배들이 진짜, 선배들이 어디 판 있다 그러면 동원 당하는 것밖에는 뭐...
이: 열심히 동원당하셨어요?
오: 열심히 봉사하고
황; 빈민쪽으로 노동쪽으로 농민쪽으로 계속 다녔을 걸.
오: 그게 제일 불만이었어요 그때. 어쨌든 후배 입장에서는
조: 어떻게든 선배들이 그것을, 내가 참 잘못한 게 그걸 가지고 했었어야 했는데
오: 동원만, 동원만 하는
조: 그건 않고, 카농(카톨릭농민회)하고도 그 전에 연결될 때도 정작은 같이, 그 때부터 부리부 나오고 한참 할 때, 70년대에 풍물 가지고 뭘 해야 하는데 그게 가면극처럼 이렇게 할 수 있는 껀이 아니드라구.
박영희(이하 ‘박영’): 그런데 힘들지 않았어요? 그 당시만 하여도 기독교쪽하고 일을 많이 하셨잖아요. 기씨 집안은 타악기를 굉장히 거부해가지고 수용하는데 굉장히 어려웠을 탠대요.
조: 근데 카농도 그랬고, 기장(기독교장로회)도 그랬고, 그렇게 그걸 가지고는 탓을 안했어요
박영: 실지로는 내용적으로 들어왔을 때는 교수님들한테 제재를 당했거든요.
조: 음, 아마 집행부 쪽에는 그랬을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 알게 뭐야.
박: 조교수님은 애오개에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으셨어요?
조: 애오개 시절에 가서는 뚜렷하게 한 것은 없고, 하니까는 가서 보고, 그 다음에 강습할 때 뭐 참여를 어떻게 했나? 나는 터울림에서 강습한 기억밖에는 없거든.
황: 애오개는 홍석화, 나, 연성수, 김봉준. 그 때 당시 4인방이 선후배의 눈총을 받으면서 기승을 부릴 때야. 그러다가 76학번한테 넘겨줬지 그걸. 한 일년 안되서 넘겨줬을 걸
오: 영철이형
황: 영철이 원호, 희섭이
오: 정희섭씨,
황: 운영권을 아마 그쪽으로 넘겨줬을 거야
오: 그렇죠.
박: 넘겨주고 형은 어디로 옮기신 거예요?
황: 학교 잠깐 갔을걸 아마.
오: 그 때 잠깐 아마
조: 복직, 뭐 그런 건이 있었던데
황: 아냐 아냐.
오: 종로서적 있을 때가 언제였었죠?
황: 맞어 종로서적에도 있었지. 그런데 나보다 더 잘아냐? (웃음)
조: 그 때 번역도 했어. 종로서적 있었던 끝발로다가 미래 뭐 미래학쪽의 책을 하나
황: 아. 83년인가 보다. 내가 학교에서 해직 당하고 만든거야 애오개를. 해직당하고 나서 할 일이 없으니까 애오개를 만든거지.
이: 그러면 애오개 시절에 동원 당했던 풍물 현역들이 누구였어요?
오: 그 때가 상열이, 최상열이
조: 맞다. 최상열이.
오: 그 때 애오개 쪽에 상열이가 휴가를 하고 있었을 때든가? 아무튼 상열이가 애오개 쪽에 많이 였었고, 83년도에 내가 복학해서 일 년 동안 학교 다니었고, 83년 후반에 애오개 생기고, 생기었을 때 슬슬 졸업할 때쯤 되니까 내가 드나들기 시작했고, 상열이는 좀 더 자유로워서 미리부터 애오개 쪽에 드나들었었고,
황: 82년도부터 아마 가농(가톨릭농민회), 가농의 문화를 맏았지 애오개에서 거의. 가농의 추수감사 축제는 우리가 맏어서 하고, 주로 농대생들 하고 대전의 충남대 하고, 뭐 이런 데들이 팀 짜서 3인 일조로 각 지역에 파견나가서 했다고. 가르치고, 같이 축제 꾸미고, 공연하고, 그 때 했던 것이 모택동 시절에 했던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비슷한 것을, 사전에 선발대 가고, 그쪽 시민들하고 협의해서 같이 맨들고 공연하고, 후발대 가서 평가하고, 평가할 때 판 벌리려 다른 지역 가고,
이: 형님 기억이 조금 좋으시면, 그것을 좀 더 자세하게 말씀하실탠데(웃음)
조: 중요한 얘기 같은데, 선발대 후발대까지 가는 게 상당히 조직적이고 요시찰인데 이거
황: 그 때는 그렇게 했어. 82년 83년 84년인 것 같애. 3년 정도 했어 3년
이: 그 동력들이 두레만은 아니었던 거잖아요?
황/오: 그렇지
황: 풍물만 가지고 간게 아니고, 마당극, 그림 응 걸게그림 같은 것도 그 때부터 가지고 다녔고, 대동놀이까지 같이 갖고 다녔어.
오: 총체적으로 했죠
박영: 강의도 그렇게 종합적으로 했어요.
오: 맞어요. 총체적으로, 총체적으로.
조: 말하자면 시민강좌랄까 시민을 위한 그런 것들의 싹이 내가 볼 때는 애오개에서 있어던 것 같애
박: 그러니까 학생운동에서 사회문화운동으로 전환되는 분수령이 애오개라고 할 수 있겠네요.
오: 그렇죠. 맞습니다. 분수령이죠.
황: 극단으로 한두레13)가 있었고. 희완이 형 중심으로 계속 작품 짜고 이런 것 해왔고, 본격적인 문화운동은 애오개라고 보지. 그러니까 대학문화패 출신들이 현장에 그 다음부터 가기 시작했지 아마, 그 때부터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장에 안가는 문화패들이 애오개로 집결했지.
황: 애오개가 언제까지 있었냐? 근데
애오개가 종합적으로 전부 집결해 있다가 각 매체별로 분화되어 나가는
황:박: 그러니까 중간 풀이었어, 중간 풀. 뭐야 흘러들어왔다 거기서 흘러나갔어.
오: 그렇죠. 각각이 들어왔다가 분화된
이: ‘민문협’(민중문화운동협의회) 이름은 어떻게 된 거예요?
황: 아 그래서 민문협으로 간 거야.
박: 고 얘기 전에 저걸 좀 얘기해보죠. 조교수님은 답사를 통해 뿌리로 더 깊이 들어가는 작업에 비중을 두셨고, 70년대 후반학번부터는 현장지향적인 견해차들이 생기기 시작하잖아요. 광주 만나고서부터는 방향이 현장지향으로 확 틀어지는데 그 때 내부적으로 이야기된 내용이라든지, 애오개로 넘어가기 전에
오: 70년대 후반, 얘기가 거꾸로 돌아가네요. 근데, 어쨌든 제 개인사하고도 딱 맞네요. 그 중심에 있었으니까. 제 개인적인 얘기를 하면서 풀어나갈 수밖에 없네요. 그 때는 어쨌든 답사와 합숙이 거의 고정적인 서클의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던 때였고, 그랬었고, 제 개인적으로는 들어가자 마자 우도를 그렇게 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우도적인 정서가 맞아요. 그래서 죽 그쪽으로 해왔었는데, 그 때는 70년대 후반까지, 80년도 되기 전까지는 일정정도 운동성은 갖고 있었지만 공개된, 그러니까 합법적으로 활동을 하는 학내 서클, 그런 서클로서 필요성과 중요성을, 그런 틀을 깨지는 말아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80년대 전까지는. 그 이후에는 그런 게 의미가 없어졌지만. 그래서 그런 고민들이, 그러니까 축제를 한다고 그랬을 때, 그 때까지의 고민은 대학의 문화, 대학의 축제문화들이든가, 일반적인 일상의 대학 문화가, 그러니까 쌍쌍파티를 하는 그런 문화였으니까 70년대 후반까지 그랬으니까 고것 자체를 변모시켜야된다. 그 다음에 풍물이나 이런 전통문화를 확산시켜야 되고, 답사를 통해 그 원형을 찾아서 진짜 본래적인 의미가 뭔지를 파악을 하고, 대학문화라든가 일상적인 문화를 건강하게 변모시킬 것인가 고런 데에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점점 사회적으로 어려워지니까 인제 “고것만 하고 있어야 되느냐?” 는 논의가 내부에서, 그 다음에 특히 서클들 아까 뭐 ‘개척농사단’이라든가 ‘야학’이라든가 이념서클들이 공개된 서클들에게 주는 압력이 점점 더 강해지는 것이죠. 역할에 대해서. 그래서 그 때 가장 고민스러웠던게, 학교에서 공연을 하고 그러면 일차적으로 치열하게 논의되었던 것이 분명히 판을 통해서 데모로 이어지게 되는데, 거기서 이끌고 갈 것인가, 그러니까 판을 계속해서 뒤풀이까지, 데모까지 이끌고 갈 것인가? 그 다음에 판은 깨지말고 공연을 딱 마치고 그 뒤에 그 판을 이용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참여를 하되 악기 딱 갖다놓고 참여를 해야 되는가, 아니면 악기를 들고 선동을 해서 앞으로 계속 나가야 되는 건가? 그 고민이 아주 치열한 논쟁거리였어요
박: 그게 연장이 되며는 현장으로 들어가야되느냐 노동현장이나 농촌현장으로 들어가야되느냐 아니면 사회의 지원세력으로 문화가 나와야 되느냐?의 논의로 연결이 되는 건가요?
오: 그렇죠 말하자면. 판을 마련해 주는 쪽, 그 다음에 본래적인 문화로서의, 문화주의라고도 할 수 있는데 문화를 바꿔내는 것 쪽에 본령을 둬야 되는냐, 그것 자체가 가지는 역동성을 수단으로서 활용을 해서 사회변혁을 꾀해야 되는냐 그런 고민의 시발점이죠.
박: 그게 77년 78년쯤 되나요?
오; 그렇죠. 77, 78, 79년. 그 해, 내가 1, 2, 3 학년 때였으니까
박: 그 당시에 조교수님은 군대에 계셨습니까?
조: 내가 78년에 제대를 했으니까.
박: 그 때 논의를 함께 하셨습니까?
조: 78년까지는 논의를 할 수 없었고, 79년 때에는 나는 그런 느낌을 잘 못받았고, 인제 현장을 가야된다는데, 현장 자체를 가야된다는 것은 당연하게, 그렇게 살아야된다는 것은 사실인데 그 때의 내 기억에는 많은 사람들의 쟁점이 그런거예요. 학생들 중에 많은 후배들은 ‘두레는 두레로서의 굿패와 풍물 그 자체로서 충실해야 한다’ 며 문화적으로 하는 것과 그 다음에는 이것들을 벗어나서 들어가야된다는 것에서 언제나, 말하자면 “예술은 예술입니다”와 ‘예술의 참여’와 이런 식의 느낌을 갖는 기류들은 있었어요. 그런데 이것을 딱히 구분하고 언제부터 언제까지는 전환기다 이렇게 얘기하기가 참 어려운게 여전히 학생은 학생이었고, 그리고 또 본인들이 다 양자의 생각을 갖고 있는 거고, 그 다음에 이것이 시대적으로 상황에 따라가지고 만약에, 어떤 노동현장에서 무슨 일이 있다 하게 될 때는 결국 예술은 예술입니다 하는 그 친구들도 가서 해야되는 것이거든요.
오: 그렇죠.
조: 그러면 같이 하는 것이고. 이런 흐름이 죽 있어왔고, 의식의 전환, 딱딱 바뀌듯이 이렇게 할 수는 없는 현실이었는데, 내가 생각을 할 때는 크게 시대적인 구분을 한다면 두레에서 두레는 지금도 두레로 남아있는 것이고, 학생들이 학내의 사정이나 학생운동의 상황에 따라서 변모를 할 것이고, 되려 인제 처음에는두레랑 크게 씨앗을 거기서 했다 하더라도 노동조합이나 농민들이나 여기서 자생적으로 올라온 것들이 크게 활성화되었고, 그 자체가 움직여가는 것들의 논리라 할까 그런 움직임들이 있었어요. 예를 든다며는 콘트랄데이터나, 부평이나 뭐 여러 군데는 그 나름대로 해왔던 풍물패고, 그 나릉대로 해왔던 것이고, 처음엔 같이 했다 하더라도 학생들은 학생들 마인드를 가지고 한 것이고, 여기는 여기대로 하는데, 여기에도 초기에는 아까 말했던 것처럼 “나는 대학간 것 처럼 한다”든지, 나중에는 투쟁을 거듭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고, 이러든 상황들이 죽 지속이 되다가 난 기억에 남는게 터울림이 저 홍제동에 있을 때, 백기완선생이 성당 가서 강의를 하고, 노동절이었어요.
오: 음, 맞어 맞어
조: 그때 같이 움직이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데, 영순씬가 누군가 같이. 부딪혀서 밀고 들어가려다가 밀려나오고 밀고 들어가려다가 밀려나오고, 도망가고 뒤쪽으로 돌아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도착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 때에는 이미 이거는 풍물에서의 두레나 이쪽하고는 떠나있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터울림과 같은 위상은 일종의 시민운동으로 시민 위상으로 사회문화적인 운동으로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을 때로서 그게 시작을 하고 있는 그 타이밍이었어요. 그게 그 틀이 누구나 콘트롤데이터건 대학 출신이건 누군가 건 그 사무실을 기점으로 해서 할 수 있었던 그러한 때였고, 그러니까 두레에서부터 출발하여 전환되고 전환되고를 찾기는 아마 연결이 잘 안될 것 같애
박: 근데 저희가 얘기를 듣고 싶은게, 그런 논의들이 저희들 세대에 와 가지고는 굉장히 치열했거든요. 민문협에서 노문협으로 파생돼 나가고 서노문협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나름대로는 엄청 치열했었거든요. 그런 씨앗의 출발이 그 때 당시의 어떤 생각들로 인해 가림새들이 이뤄지는 지를 한 번 짚어보고 싶어서 여쭤봤던 것이고요. 연성수씨 같은 경우는 현장으로 바로 들어가 버리지 않습니까. 주로 서울대 탈반이, 북을 치며 끝까지 선동을 해야 한다는 견해가 주류를 이룬게 탈반이 아니었습니까. 어뗗습니까?
황: 여러 가지가 있었지 다. 연합탈반까지 왔다가 바로 현장으로, 연합탈반이 현장운동에 직접 노동조합을 만든 친구들이 많아요. 인천 같으면 ‘까치파’, 그 까치파가 NL의 주류가 됐다고. 문화패가 만든 노조원들 중심으로 해서 까치파가 형성되고 까치파가 노동운동의 NL의 주류가 됐다고, 지금도 그래 지금도. 죽 내려오고, 연합탈반서부터 현장으로 직접 가거나 아니면 예술로 그렇게 가거나, 예술이 아니고 그냥 문화운동으로, 공개적인 문화운동으로 가거나 크게 그렇게 세 흐름 아닌가?
이: 까치파하고 또 뭐 있었는데요?
황: 아냐 그렇게 이름 붙인게 까치파야. 까치파가 그때 오해성이가 까치지? 까치 만화가 선풍을 일으킬 때라고. 근데 그거를 유인물, 그러니까 노조에 비밀리에 뿌리는 유인물 같은데에 까치를 등장시킨게 그 팀들이라고 문화패출신들.
이: 그러니까 캐릭터?
박: 그거는 간단히 그렇게 짚어놓고 다시 애오개로 넘어가죠.
황: 애오개에서 주로 한 일이 주로 그렇잖아. 강습하고 공연하고,
박: 애오개가 활동을 할 때요, 노동현장으로 들어가서 작업을 하던 때에는 풍물을 어떤 식으로 수용했었나요?
오: 고 쪽은 선진이 형이
황: 그러니까 풍물이 어느 정도 대중화되어 있을 때이니까 어느 정도, 어느 한 선으로 가서 강습이 이뤄지지는 않았고, 계속 다양한 선으로 이뤄졌으니까. 그 중에서 애오개로 많이 왔지, 그러니까 현장으로 들어갔어도 연결을 갖고, 자신이 가르칠 수는 없는 거니까. 애오개를 통해서 가르키기도 하고, 대학에서 직접 가기도 하고, 갈래가 수 없이 많아졌지 그 때는.
조: 말하자면 그 때는 이미 서울농대 두레하고는 다른 각 대학에서 풍물패나 가면극 하는 데서들 풍물을 하고 있었고,
박: 70년대 후반에 되며는 고대 농악반에서 나름대로 있었고, 홍대 그 쪽은 그 쪽대로 나름대로 활동을 하고, 이렇게 다원화되는 시기가 80년대인데, 다 모여서 얘기가 됐었으면 좋았을탠데 그것은 아쉬움으로 남기고, 터울림으로 일단 넘어가 보죠. 여기 모이신 분들의 면면이 그렇고.
조: 고 전에 어떻게 보면 노동현장이나 이렇게 할 때는 풍물 가지고 할 때는 봉준이가 있어야… 응 역할을 많이 했으니까.
박: 그 부분, 애오개시절부터 아니 그 이전 때의 봉준이형 얘기는 따로 찾아가서 다시 종합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터울림은, 아까도 나왔지만 시민사회문화운동 시작의 토대로서 터울림의 의미. 아까도 주장하셨지만 옛날 20년 전에 치던 가락을 아직까지도 치고 있는 등등의...
-중략-
오: 굿패비나리도 그 뒤고. 어쨌든 장르별로 보면, 사회에 나와서 본격적으로, 그러니까 학생이 아닌 장르별 조직으로서는 풍물이 없었던 거예요. 그때 총체적으로 애오개에서 같이 만나서 활동하고 교류가 있고 그러면서도 뭔가 독자성, 특수성을 갖는 어떤 모임이 없었기 때문에… 계속 그 때의 피해의식은 그런 거예요. 총체적으로 이렇게 가는데 제일 동원을 많이 당하는 것은 풍물이면서도 제일 대접 못받는다. 아 참 정말 노가다“
조: 운명이예요. 그것은.(웃음)
오: 그런 피해의식은 선배들한테 동원 당하는 피해의식도 있지만, 장르별로 볼 때도 “야 이 제일 궂은 일은 다 하고, 동원만 당한다. 그러면서도 독자성은 별로 없는 것 아니냐?” 그런 생각을 갖고 있어 독자성을 갖는, 그리고 저변 확대도 하는, 풍물을 더 대중화시키고,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그러니까 졸업하고 개별적으로 어디 가서 활동하는 것 보다는 풍물패끼리 좀 더 기량도 향상시키고, 졸업하고도 본격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틀이 있어야 되지 않겠냐, 그런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민요연구회라든지 다들 독자적인 장르로 분화돼 나가는 분위기도 있었고, 그래서 “만들자” 그 때 주축이 된 게, 78학번의 최상열이 하고, 그 다음에 성심여대? 역곡에 있던, 성심여대 민요반 친구들 몇몇 하고 홍제동에 터를 잡았죠. 그 때 재정은, 전세보증금 마련하고 하던 돈은 국풍 때 남았던 돈이 있어요. 그 돈은 뜨거운 감자였어요.
박: 아무도 손 안대고...
오: 예, “이 개 같은 돈을 어떻게 쓰리”. 하고 남아있었던 돈이 있었어요. 그래서 어쨌든 학교에서 애들이 관리를 하고 그랬었는데, 그 돈을 빌렸을 거예요. 일 이백만원 남아 있었을 탠데, 빌려서 보증금 하여 공간을 마련했죠.
이: 아까 잠깐 가다가 말았던 얘기 중에 터울림 만들 때 78학번 상열이 형부터 해갖고 성심여대 민요반 하고, 또 몇 사람 있을 것 아녜요?
오: 그 멤버들이 나하고, 최상열이 하고, 시초에는 두 사람이었어요. 풍물패 출신으로는 두 사람이었고, 성심여대 민요반에 박명희, 최상열 마누라, 그 다음에 이경희, 최경희, 이렇게 성심여대 민요반에서 세 사람,
이; 장르간에 핍박과 선배들로부터 당하는 것과, 이런 것들 때문에 “만들자”가 아니라 일정정도 문예적 논의가 정리되면서 가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논의와는 깊은 연관은 없더라도 분화되는 형태에 그냥 추진되었던 것인지?
오: 여러 가지 복합적일 거예요. 꼭 어떤 이유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고, 분위기였고, 좀 더 전문성을 가지면서, 그냥 일회적인 봉사가 아니고 좀 주체적으로, 분화를 할 때는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은 거죠. 나름대로 독자성이라는 것이, 그렇게 동원당하지 않고 좀 더 독자적으로 그러니까 현장의 외곽에서 지원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 의해 기획돼 있는 것에 동원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독자성을 가지면서 기획논의에 참여를 한다든지. 아니면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좀 더 기량도 쌓아야 되고, 여러 가지 독자적으로 체계를 잡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에서 만들었어요, 분화해 나가는 분위기에 편승하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 그런 조직을 만들어 놀 필요성이 있기 때문에…
조: 오영호가 동원 당한다는 말을 많이 했는데, 그 풍물이라는 것과 다른 장르하고는 속성상 구분이 확실히 되어야 된다고 봐요. 풍물 내에서도 분화가 있는데, 어떻게 보면 ‘두레’라고 이름을 붙일 때 그 이유를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장단과 연희만이 아니라 지역사회면 지역사회 전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이 두레에 수렴이 되겠끔, 옛날의 생활방식이 그랬으니까, 겉으로 봤을 때 예술적인 형태로 표출되기 이전에 잠재워져 있었던 표현욕구라 할까 이런 것들을 다 감당해내야할 것이 풍물이죠, 기본적인 것이 말예요, 이것을 젖혀놓고 다른 기획으로만 들어가면 돼려 더 그것은 굉장히 어렵다고 봐요. 왜 어려운가 하면, 가면극도 어렵고, 판소리도 어려워요. 공력을 쌓아야 되니까. 풍물과 같은 경우에, 다른 비유를 들자면, 재즈 하는 사람들한테 “당신들이 계속 재즈를 연주하고 기획해 내는데 있어 나름대로 사회의식적인 것을 표현하라”고 하면 그 사람들이 어떻게 하겠어요. 그렇지는 않는데 재즈는 굉장히 퍼져있으면서 쫙 갖고 있는 힘이 있잖아. 그러다 보니까 이것은 계속 장단 간의 하나하나, 뭐 계속 후배들하고 얘기를 하다보면, 언제나 전문성의 얘기, 그 다음에 기량의 얘기가 굉장히 크게 차지하고 있어요. 그런데 가면극도 물론 기량이지만 이게 지나놓고 생각해보면, 기량이라는 것이 어쨌든 표출되서 두드러지는 것이기 때문에 쌓으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쪽은 그것은 아니고, 계속 세월과 함께 공력이 들어가야 표현되고, 별로 차이도 없어보이는데 가림새를 알아 보고 이럴 수 있는 체제가 풍물이란 말예요. 그래서 굉장히 다른 건데 이것 자체를 같이 할려고 하니까 방향이 좀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다음, 되려 나는 노동현장이나 농민현장이나 하는 곳에서 볼 때, 결국은 무엇이 남는가? 계속 사람들한테 촥 퍼지기도 하고, 대단위로 동원능력도 갖고 있고, 또 사람들을 움직이게끔 만들어 주고, 그 사람들도 자기들의 커뮤니케이션에 스타일이 있는데, 그 스타일이 촌극도 있고 뭐도 있고 해서 할 때는 하지만 묻어 있는 것은 풍물의식이라고. 그들의 커뮤니케이션이 별로 말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그냥 말 없이 하는 스타일이예요. 그러니까 그런 걸로 보면, 이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매체가 가지고 있는 힘이 대단히 큰 거고, 실지로는 대단히 큰 일들을 하는 건데 하고 있는 주체들이 그 생각을 못해요. “아 선배들이 기획하는데...”로만 생각하고.
터울림에서도 그렇고 고것은 앞으로 방향을 달리 생각해 봐야될 것 같아요. 이게 인제 다른 면에서 본다면 그런 것 같애요. 상징이라고 보통 이야기하는데요. 굿에서도 그렇고, 굿 자체가 여러 가지 사설도 있지만 사람들이 그걸로 묶일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연희와 몇 가지 복을 주는 말 이걸로 묶여요. 그 때 보여지는 상징이라는 것은 복합적인 의미들이, 여러 복합적인 의미들이 하나로 응어지는 거라고. 이것을 가면극은 죽 응축되왔던, 그 당시의 민중의식이랄까 그런 것들이 희화적으로나 다른 형식, 극형식으로 풀어내 나가면서 나타내주는 것이고, 풍물은 그것과 상징 형식이 틀려요. 틀리는데 뭔가 하나 큰 푯대를 세우고 행진을 해버린다든지 하면서 사람들을 묶어낼 때 상징인데, 요즘에 많이 필요한 것은 사실 지역축제나 여러 군데에서 보면 그걸 묶어내는 상징이 없어서 이게 안되는 것이지 뭐 구체적인 프로그램 하나하나가 이렇게 내용적인 데에서 흐트러져서 안되는 것은 아니거든, 바로 그 상징이라는 큰 복합성을 생각한다면 그거는 우리나라도 그렇고, 다른 나라도 다 그래요. 축제니 뭐니 이렇게 보면 그걸 가지고 나서는 거고, 역사적으로 축적돼 왔으며, 의미들이 막 붙어있어요. 그러니까 유럽 같으면, 십자가 하나 놓고 나면 뭘 얘기 하겠어? 다 갖고 가는 거지. 그게 풍물이라고 생각한다면 되려 다른 방향에서, 우리는 그 방향과는 다르게 생각하니까 동원됐다고 느껴지는 것이지. 그런 의미가 아직도 해내야 될 것인데,
박: 네 지금 이야기하신 말씀은 핵심적이고 중요한 얘기고 두고두고 논의돼야될 내용이라고 보는데요, 이것이 제대로 축적됐을 때 풍물의 방향과 운동의 좌표가 형성되리라고 봅니다. 이 문제는 있다가 풍물 내지는 풍물굿 그리고 사물놀이 쪽에서 얘기를 좀 더 해 봤으면 좋겠고요. 아니면 나중에 글을 청탁하든지, 또 다른 이런 자리를 통해 심도있게 논의를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하여튼 지금도 여전히 그런 피해의식 속에서 계속 가고 있는 것만은 사실인 것 같애요.
일동: (웃음)
-중략-
황: 대중운동. 대중운동의 발전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문화적 욕구가 실효성있게 나타나는데 이것을 터울림이 상당부분 다 받아 낸 거죠. 소화해 내고
조: 그러니까 굉장히 큰 역할이었죠, 아까 말했던 것처럼 극이나 다른 것들과는 달리 사람들은 좋고 편하거든, 그 다음에 스스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그냥 하는 것인데, 어떤 때는 기량 가지고 따져도 좋고, “내가 왜 이렇게 안될까?”라 해도 그것만 가지고도 돼고, 한데 어떻게 보면 큰 스폰지라고 할까 이런 것처럼 죽죽 해낼 수 있었던 기능이 있었어요.
황: 특히, 사무전문직 쪽으로 많이 했지?
오: 초창기 쪽이 그렇죠.
황: 교사, 사무전문직.
-중략-
이: 선진이 형도 오셨으니까. 아까 질문을 했다가 그냥 넘어갔는데, 농악이라는 용어와 풍물이라는 용어, 그러니까 농악이라는 용어는 그 이전부터 “그 용어는 별로 아니다”는 문제의식들은 광범위하게 쭉 있어왔던 것 같은데,
황: 있었어?
조: 농악반 농악반 그러다가도 이거가 좀 용어도 그렇고, 다른 용어가 없는가? 그런 식의 생각들은 계속 있었지.
이: 어떤 계기가 있어서 탁 바꾼 것인지요?
조: ‘풍물’이란게 나로서는 걸렸던 게, 그냥 ‘세상 풍경’, 뭐 “김삿갓이 돌아다녀 여기저기 구경하니” 그런 식의 느낌이 들어서 “‘풍물’도 좀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었고, 달리 하면, 옛날에는 ‘굿것’, ‘굿’, 또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굿’하면 또 무속하고 의미의 혼동이 생기고, 그래서 그때 참 딱히 정하지를 못하고 있었죠.
황: 용어? 몰라! 농악이 일본사람들이 만든 거라는 것이 확실하니?
조: 그것도 떠도는 말로 그렇게 전해오지
이: 말만 그렇게
조: 일설이 있다.
황: 일설이 있는 거지?
박: 구한말에 씌였을 것도 같다는 추측도 들고요. 그런데 분명한 것은 1902년부터 생긴 원각사에서 전국으로 돌 때, 농악이라는 용어를 쓰긴 쓴 것 같애요. 그리고 농악이라는 흔적이 당진 쪽에 가니까 농기가 있는데, 그게 1906년이드라구요 간지를 쓴 게 보니까. 형태는 용기, 형태는 용기면서 명칭만 “농지천하지대본야(農之天下之大本也)” ‘야’가 덧붙여 있어요. 이런 걸로 봤을 때, 농악이라는 용어가 일본사람들이 만든 것은 아닌 것 같고, 일본 사람들은 농악이라는 말을 적극 부각시켜서 잘 활용해 먹은 것은 분명한 것 같은데
황: 근데 그 바꿀 때, 그게 뭐야 고증은 못했는데, 그런 말들이 많이 들렸어. 농악이라는 말이 일본사람들이 만들어왔다. 왜놈들이 우리 조선의 얼을 말살시키기 위해서 농사꾼들이 하는 이런 악으로 맨들었다고 해서
그게(풍물) 처음으로 활자화해서 나온 게 어디야, 공동체문환가 창비인가 거기서 내가 쓴 글에 농악에 대해서 그렇게 지칭하고 “앞으로는 ‘풍물’로 부르기로 하겠다”고 언명을 했던 것 같애.
이: 그 명칭 정리에 언명이 됐든 정의가 됐든 선언의 기치는 분명 누군가 있었던 거죠?
황: 그렇지 그것은 내가 했지.
오: 맞어
조: 그 전에 메구도 있었고, 별에별 말들이 다 있었으니까.
황: ‘굿’은 그래서 못썼어. 당시의 일반적인 통념이 굿이라 그러면 ‘미신’이라는 생각이 있어서
박: 당시 ‘굿’이라는 용어를 쓰고 싶은 욕구는 있으셨어요?
황: 나로서는 많지 않았어
조: 나도. 굿 그러면 무속이고 미신이라는 생각은 별로 나는 아니었는데, 참 ‘굿’ 그러면 “흐드러진다‘는 생각이나 뭐 별다른 생각은 없었어요. ”굿하고 저것하고는 좀 다르다” 는 생각이 있었는데, 사실상 옛날의 우리의 연희형식을 따져보면, 따지고 들어가면 다 종교적인 게 아닌 게 어딨어. 그러니까 ‘메구’지. 근데 그것을 달리 하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죠.
박: 그것을 탈피 내지는?
황: 그러니까 굿은 무속굿이 생각이 나서, 일단 첫 이미지가 그렇잖아?
이: 그게 쓴 게 언제신데요?
황/오: 애오개 때 본격적으로 쓴 것이지
이: 83-4년?
황: ‘창비’인가 공동체문화 인가 그래.
이: 후배의 입장에서 이것이 정설인양 얘기 하잖아요. 저희는 그러거든요. 그러니까 농악도 일본에서 만든 것이다는 말이 당연히 맞다고 그 얘기 밖에 안하고, 강습을 나갈 경우에는. 풍물 용어일 경우에는 또 어떻게 얘기하냐면 지방에 이렇게 이렇게 있었는데 풍물이라는 용어는 수도권이나 웃다리 정도에서 쓴 용어이다.
박: 그러니까 조교수님이 말씀하신대로 많이 공부를 해야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그런 얘기를…
조: 글쎄, 아마 풍물이란 말을 웃다리에서도 딴 데 가서 하면 시골사람들은 잘 못 알아들을 거예요. “굿치자” 그러지.
오: “굿치자”고 응
조: 그런데 농악이라고 그럴 때는 농악 자체가 워낙 일반화된 용어이니까 대충 알아들을 거고
이: 추측컨데 아무래도 그게 의식적으로 명칭 정하고 할 때 있었던 사람들이 수도권 일대에 있던 양반들이니까 전략적으로 풍물이라는 용어를 쓴 게 아닌가…
황: 아니야 아니야. 용어가 몇 개 있었는데, 제끼고 선택된 것이 ‘풍물’ 밖에 없었어.
박: 그 때 대두된 용어들이 무엇 무엇이 있었죠?
오: 이미 대체해야될 용어라고 ‘농악’이 있었고,
조: ‘굿’이 있었고,
오: ‘굿’이 있었고, 저기 그 다음에 ‘풍장’이라고 있었어, 그 다음에 ‘풍물’이라고 있었어. 그 중에 안되는 것은 농악하고 굿은 이미 설명이 됐고, ‘풍장’은
조: 장례 풍속하고 연결되는 거지 뭐
오/황: 아냐 아냐. 노작,
황: 맞어 맞어
오: 풍장굿, 그러니까 노작할 때
박: 두레할 때라든지 김매기 할 때라든지 치는 굿을 풍장굿이라고 하였죠.
오: 그렇죠 그렇죠. 좀 더 대중적이고 거부감도 없고, 대중적으로 쓸 수 있는 용어, 그런 면에서 ‘풍물’을 택한 거죠
황: 맞어 맞어.
이: 그 때만 하여도 사물(사물놀이)은 별로 고려대상이 아니었고요?
조/오: 사물은 따로 나왔으니까.
박: 궁금한 것 중의 하나가 ‘풍물’이라는 용어를 선택하는데 있어, 굳이 ‘풍물운동’이라는 용어를 사회적으로 강조하는데 있어 ‘사물놀이’를 의식하면서 하셨는지, 의식하지 않으셨는지 가 궁금하드라구요.
조/오: 그 때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죠.
황: 그 때 사물놀이가 있었냐?
조: 사물은 저 때, 78년 12월인가?
황: 그 당시는 대중적 영향이 별로 없을 때 아닌가?
오: 별로 없었을 때여요.
황: 우리 80년대 초반반 하드라도 별로 영향력이 없었어.
조: 사물놀이는 사실 앉은반이지.
오: 사물놀이는 80년대 후반 정도에 와서 대중적으로
황: 맞어 맞어.
오: 요즘은 사물놀이가 일반화된 명칭이고
박: 역전이 된
오: 역전이 돼 버린거죠. 그 때는 별로 고려대상이 아니었죠. 그러니까 그거는
황: 잘 몰랐어 우리도. 사물이라는 말은 별로 없었으니까 생소한 용어였어.
이: 83-4년 즈음하여 터울림이 만들어질 때 지방에는 별로 그런 것이 없었나요?
조: 터울림 만들어질 때? 잊지 않아야될 게 터울림보다는 뒤 일지 어쩔 지 모르지만 탈패겸, 지방에서는 탈패다 풍물패다 가르면 안되요.
오: 예 종합적으로 하니까
<특별강좌2>
풍물미학(삼신미학)14)
박 흥 주(굿연구소 소장)
# 머리글 : 풍물굿이란 용어를 의도적으로 정착시키는 경향성 - 그 용어의 개념을 정립할 필 요가 있다.
용어의 선택이 적합한가? - 담긴 뜻(철학적 의미, 실체적 의미, 용례, 사용범위, 등
을 살핀다.)
# 논의의 촛점
1. “풍물”이라는 용어의 정확한 뜻과 의미를 규명해야할 필요성
2. “바람”에 대한 이해
3. 바람과 굿과의 상관관계
4. 풍물굿의 기능과 의미
# “風物”
* 풍물
1. 굿물. 굿(풍물굿)을 치는데 필요한 器物(악기). (신)바람을 일으키는 굿물
2. 두레 :
“두레풍장”의 의미로 쓰임
예) 금산군 진산면 두레 : 약 30명의 두레조직, 상쇠1 징1 장구1 북1로 구성
“풀두레”의 의미로 쓰임
예) 전남 신안군 장산도 마초머리
* 풍장(두레풍장) :
모내기, 피뽑기(아시메기, 두벌메기, 세벌메기)
豊壯(?) ... 장원놀음, 만두레굿,
# 風物, 風流, 風樂, 風俗, 風韻(풍류와 운치), 風雲(兒), 風月(道)
# “바람”에 대한 이해
* 바람과 風의 사전적 해석
바람 風
1. 바람 ㄱ. 바람 풍(大塊噓氣)
ㄱ. 기압의 변화로 일어나는 ㄴ. 흘레할 풍(牝牡相誘)
대기의 흐름 ㄷ. 울릴 풍(王者聲敎)
ㄴ. 공기 ㄹ. 풍속 풍(風俗)
ㄷ. (어떤 대상이나 인물에) ㅁ. 경치 풍(風景)
마음이 끌려 들뜬 상태 ㅂ. 위엄 풍(威風)
예) 바람이 나다 ㅅ. 병풍 풍(中風病名)
바람을 피우다 ㅇ. 모양 풍(容姿)
바람이 들다
ㄹ. ‘風病’을 속되게 이르는
말
ㅁ. 허풍 거짓말
2. 바람 : 소망, 염원, 바라는 일
<이기문 “동아국어사전” 동아出, 1991, 912쪽> <장삼식 “실용新字源” 집문당, 1983>
* 바람에 대한 자연과학적 정의
바람이란 大氣가 온도차이에 의해 移流와 對流로 바뀌면서 생성됨. 지표면온도의 불균
형이 바람의 원인
* 생물의 생명활동에 미치는 바람의 역할
1.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생명유지에 필요한 에너지를 전적으로 태양빛 energy에 의존한다.
식물 : 뿌리에서 흡수한 물과 입에서 흡수한 공기중의 이산화탄소를 원료로
하여 태양에너지의 힘에 의해 탄수화물로 만들고(광합성), 다시 탄수화물을
호흡작용에 의해 분해하면서 생기는 에너지를 생명활동에 이용한다.
동물(인간) : 직접 광합성의 능력이 없기 때문에 식물이 만들어 논 탄수화물,
탄수화물을 원료로 합성한 단백질, 지방 등을 식료로 하여 그 속에 포함된
에너지로 생명활동을 유지 - 탈취(약탈), 공격적 성격
2. 벼의 일생 ... 잔존 풍물굿이 농경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ㄱ. 야생벼 : <자연 그대로 상태>
종자번식 : 외영선단(껍질:왕겨)에 붙어 있는 길고 큰 ‘까락’
(몸 크기의 10배 정도)이 종자번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존재. 까락은
용수철과 같이 탄력성이 있으며 종자를 바람에 의해 보다 머리 떨어진
장소 까지 날려 분산시키는 기능을 함
성장 : 몬순기후(계절풍)에서 주로 성장. 바람이 계절에 따라 바뀌면서 강우
량과 온도와 열의 변화를 적절하게 조절해 줘햐 성장이 가능
수정 : 꽂이 피고 수술이 개영부(벼는 꽂잎이 없슴)밖으로
수술주머니가 나 와 터지면 화분(꽂가루)이 바람에 날려(40m정도)
암술과 만나 수정이 이뤄짐. 他花受精이 많다.
ㄴ. 재배벼 : <인간의 의지가 반영된다>
종자번식 : 사람에 의해 파종. 그 결과 까락의 퇴화과정을 걷게 됨.
의도적으로 종자개량이 시도된 최근의 품종은 까락을 거의 볼 수 없슴.
성장 : 몬순기후(특히 우리나라는 온대성 계절풍지대)에서만 성장.
수정 : 암술의 주두가 수술의 바로 밑에 있고, 꽂이 피면서
동시에 수술의 꽂밥이 터지면서 곧바로 자신의 꽂가루가 암술의
주두에 떨어져수정. 95%가 自花受精. 꽂가루의 확산 범위는 20m정도.
수확 : 타작후 바람을 이용하여 껍질과 현미를 분리해 냄.
* 소리를 만들어 내는 바람
“대개 物은 그 편안함을 얻지 못하면 우는 것이다. 草木은 본래 소리가 없으나 바람 이 흔들어 울고, 물은 본래 소리가 없으나 바람이 쳐서 우는 것이다. 물이 튀는 것은 이것을 사납게 함이고, 물이 달리는 것은 이것을 거슬리는 까닭이며, 물이 끓는것은 이것을 끓이는 까닭이다. 또 금석도 본래 소리가 없으나 이것을 두드려 우는것이다. 사람의 그 말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며 참을 수 없어서 말하는 것이다. 노래함은 생각이 있음이요, 울음을 우는 것은 슬픔이 있는 까닭이니, 무릇 입에서 나 와 소리가 되는 것은 다 그 마음에 편안치 못함이 있는 까닭이다. 음악이란, 속에쌓인 것이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인데. 그 가장 잘 우는 것을 가리어 그것을 빌어
우는 것이다.” <韓退之 ”送孟東野序“ 古文眞寶>
* 周易의 八卦중 바람의 표상인 다섯번째 卦, “巽”에 대한 이해
바람과 같이 안으로 파고 드는 象. 들어(入)가는 성질.
만물이 은복하여 제 처소로 들어가 업드리는 모습
선천8괘로 볼 때 후천이 시작하는 때로서 陰이 처음 생기는 과정.
* 바람잡기 :
1. 음과 양이 동하게
2. 마음을 흔들어 놈 - 비정상의 상태로 - 일상을 일탈하게 - 일상을 탈출 - 해방
* 바람끼(氣)
“우리가 보통 ‘그놈은 끼가 있다.’라고 할 때는 ‘끼’며 ‘느낌’의 ‘낌’과 관련이 있다.
‘낌새’의 ‘낌’이며 ‘장끼’의 끼다. ‘신끼’의 끼는 神의 끼며, 玄妙한 끼며, 바람의 끼 며, 바람의 맛이며, 바람의 멋이다. 맛은 멋이며, 멋은 맛이며, 맛은 끼다. 우리가
보통 ‘바람끼가 있다.’ ‘바람피운다’라는 표현을 모두 남녀간의 사랑과 관련하여 부 정적으로 쓰고 있지만 남녀의 사랑이야말로 무속에서 말하는 신끼의 일상적 체험의 극치며
사랑처럼 인간에게 있어서 ‘신바람(神風)나는 것’은 없으며 그것이야말 로 ‘신나는 것(神出)’이며 곧 神明인 것이다. 신명은 곧 신풍(신바람)이며 곧 ‘바람맛’인 것이다” <김용옥 “나는 불교를 이렇게 생각한다” 통나무, 1989, 202쪽>
* 風은 神의 妙用이다
1. 하늘의 뜻(乾)을 받들어 아래로 펼치는 역할로서의 巽 ... 先天八卦
2. 神의 오고 감은 바람으로 먼저 안다.
예1)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귀신의 출현모습
예2)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 <요한복음 제3장 8절>
예3) 프뉴마(pneuma) : “바람”과 “성령”을 희랍어에서는 동일한 글자인 퓨뉴마로 씀.
원래 “바람(wind)"을 의미하며, “호흡(breth)” 즉 “氣”를 의미한다. 프뉴마 는 “생명(life)”을 의미하며 “영혼(soul)”을 의미한다. 퓨뉴마는 “귀신(spirit)”을 의미하며 “신성(divinity)”을 총칭한다.
3. 風伯(風神)
“持提야! 너는 風伯이 되어 명령을 맡으라. 위헤서 베풀고 아래서 행함이 명령이 요, 위에서 행하고 아래서 본받음이 교화이니, 그 명령을 거듭하되 바람이 땅에 불듯 오직 고루하여야 교화가 이에 두루 퍼지느니라” <강천봉 “삼일신고” 대양 서적, 1973, 65쪽>
4. 鬼는 陰, 神은 陽으로서 이 鬼神의 음양이 합치하여 완전한 神의 妙用이 나타난다. ... 주역의 神觀<김석진 “주역과 세계” 동신사, 1990, 106쪽>
5. 鵬과 鳳은 神의 전령
ㄱ. “大鵬(장자 ‘소요편”에 나오는)은 또 九萬里장천을 나르는 大風(큰바람)을 상 징하고 있는데 우리가 鵬과 더불어 쓰고 있는 鳳이라는 글자는 바로 이러한“바람(風)”속에 새가 들어있는 형상이다. 요즈음 우리나라 유행가에 ‘바람’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지만 ‘바람’이야말로 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神의 靈이며 神의 소리( 詩經에서는 노래를 風이라고 한다)이니 鵬이나 鳳은 또한 신의 전령인 것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에 風土, 風氣, 風俗과 같은 말이 있는데이러한 말속에는 고대인의 神性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김용옥 “여자란 무 엇인가?” 통나무, 1987, 139쪽>
ㄴ. “貝塚茂樹씨는 이때의 鳳을 風으로 풀이하고 鳳을 上帝의 使者로서 巫術을 툥하여 바람의 害를 방지하는 巫女群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박용숙 “한국고대미술문화사론” 일지사, 1988, 84쪽>
* 병(中風)을 만드는 바람
1. 질병의 원인(韓醫學적 분석)
外因 : 外感 ... 風, 寒, 濕, 燥, 署, 熱 (六氣)
三因 內因 : 內傷 ... 음식의 무절제가 主요인
不內外因
2. 中風 : 外風, 內風으로 인해 肝木의 風이 선동하는 것을 中風이라함. 中은 “당한다”는 뜻. 즉 바람에 의해 陰陽의 평형이 실존되고 陰虛로 인하여 肝陽이 향 진되어 火가 치성하여 風으로 化하고 氣形이 상충하여 痰이 됨
* 冷害, 颱風, 突風의 피해
1. 냉해
예) 무우에 바람들다
2. 태풍, 돌풍
예) 바다생활
* 바람이 부정적으로 쓰이는 용례 : 바람의 지속적이지 못한 성질에서 기인.
1. 바람들다 : 무우에 바람들었다
허황한 마음이 들어 들뜬 상태가 되다.
다 되어 가는 일에 엉뚱한 탈이 생기다
2. “바람맞다”, “바람맞히다” : 속이다. 속다.
# 바람을 인간 세상에 어떻게 활용하느냐의 문제 : 신바람 나는 세상
* 申命行事 : 주역(儒敎)의 風에 대한 인식과 신바람행사
1. 출전 : 周易 57번째 卦인 中風巽卦 大象
“象曰 隨風이 巽이니 君子ㅣ 以하야 申命行事하나니라”(바람이 불고 또 불어만물을 고동 진작시키며, 한 쪽으로 쏠리게 하는 것이 손이니 군자가 이러한 상을 보고, 인군의 명을 받들어 백성에게 다시 命(命은 위에서 아래로 말(言)을 내리는 것)을 폄으로써 政事를 행하는 것이다.) <홍역학회 “大山 周易講解 下” 대유학당 1993, 232쪽>
2.. “申”에 담긴 뜻 <이응문 “신명행사에 대한 소고(1)” 홍역학회 ‘同人’ 1996.12.>
식물의 종자(알곡, 씨)는 보는 눈도 듣는 귀도 없으면서 경엽부는 위로 향하여 자라는 성질인 背地性을 가지며 뿌리는 밑으로 향해 뻗는 성질인 向地性을 갖는 메카니즘으로 이뤄져 있다.
甲 : 씨가 뿌리를 내리는 형상 ... 天干의 시작
田
申 : 싹이 돋아오르는 형상 ... 12支(地支)의 9번째. 先甲 後甲이 合한 모습
ㄱ. 搗精의 의미 : 申은 臼(절구 “구”)와 ㅣ(뚫을 곤; 공이)이 합성된 글자로서
햇곡식을 거두어서 방아를 찧어 깨끗이 도정하는 상
ㄴ. 흥취를 불러 일으킴 : 두 손(臼)을 맞잡아 공이(ㅣ)를 움켜쥐는 모습은
피리를 두 손으로 잡고 부는 상으로도 봄
ㄷ. 雷電의 의미 : 申은 번갯불이 퍼지는 모습. 막혔던 天地陰陽의 두 기운이
交合 하여 雷電이 일어나는 天地調和를 상징
ㄹ. 合體의 의미, 대동의 의미 : 申은 두 身體가 하나로 합해 거듭 포개지는
뜻이있으므로 ‘거듭 신’이라고 하며(身은 申의 半字), 손은 또한
두 몸(己)이 하나로 같이(共) 합하는 뜻이 들어 있다.
ㅁ. 주축의 의미 : 申은 수레바퀴의 중심인 굴대軸을 뜻한다. 車(수레 거)에 申이들어 있고
經(가벼운 짐을 싣는 홑바퀴의 경수레)과 重(거듭중, 무거운 짐을 싣는 겹바퀴의
중수레)을 나타내는 것에서 이를 알 수 있슴. 수레가 굴러감이 세월의 흐름과
같으므로 申은 日月運行의 중심축이기도 함
3. 精義入神과 無思無爲 : 곡식을 도정하듯이 정신을 하나로 통일하여 마침내 神의 경지로
들어감으로서 안으로 심신의 괴리를 바로 잡고 나아가 세상의 어긋난 바를
義에 합치하도록 하는 것이 申命行事
ㄱ. 周易 繫辭下傳 5장 : “精義入神 以致用也” (의리를 정미롭게 하여 신의
경지에 들어감은 씀을 이룸이라)
ㄴ. 周易 繫辭上傳 10장 : “易은 無思也하며 無爲也하야 寂然不動이라가
感而遂通 天下之故하나니 非天下之至神이면
其孰能與於此ㅣ리오”(易은 생각함도 없으며 하옴도 없어서, 고요히 動하지 않다가 느껴서 드디어 천하의 연고에 통하나니, 천하의 지극한 神이 아니면 그누가 능히 이에 참여하리오)
ㄷ. “땅에 직접 의존하지 않고 사는 귀족들이나 도시사람들에게는 땅보다는 하늘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농민이라는 하부구조를 딛고 서있는 그들의 권력기반이 피폐해져 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대중국에서도 이러한 하느님숭배가 귀족과 도시중심으로 발달하였다. 아마도 儒敎란 것은 이러한 귀족계급과 도시생활층을 기반으로 발흥한 것임에 틀림이 없다는 것이 사계의 정설이다.” <김용옥 “여자란 무엇인가?” 통나무, 1987. 207쪽>
* 天地公事(무당공사) : 강증산의 신바람세상 만들기
ㄱ. “증산 자신이 실제로 후천개벽공사를, 그의 천지공사를 바로 ‘천하굿”이라고 불렀고 바로 ‘무당공사’라고도 불렀습니다. 이 때에는 언제나 농악장단으로 북을치고 때로는 꾕과리치며 춤추면서 주문을 외고 천하사를 처리했다고 했습니다. 즉, 농악가락과 장단 그리고 농민들의 일에서부터 나온 춤사위를 퉁해서 한울님의 신명을 해방시키고 한울님의 신명을 해방시킴으로서 사람을 안밖으 로 해방시키고 세상과 천지우주를 해방시키는 춤을 춘다는 주장인 셈입니다.” <김지하 “밥” 분도出, 1980, 103쪽>
ㄴ. “천지공사는 증산사상의 핵심이 되는 해원, 즉 하늘귀신과 땅귀신과 사람귀신등 모든 신명의 원혼을 풀어주는 공사로 부터 출발한다. 사람과 사람, 신명과 사람, 신명과 신명 사이에 맺힌 원한이 풀려야 보은상생하는 造化政府가 열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춤과 노래로서 원혼을 달래주는 무속의 ‘살풀이’와 같은 개념이면서도 온 인류가 참여하는 대동사회의 건설이라는 이념적 발전을 보이고 있다.” <오병수 “증산 강일순의 발자취를 따라” 전통문화 1986.6 29 쪽>
* 풍물굿의 신명세상 : 굿의 신명세상
1. “바램”의 세상
ㄱ. “바람”과 “바램(바람)”은 어원적으로 연관이 있슴
> 람 > 바람 : 風
아다 > 라다 > 바라다 : 바라보다, 쳐다보다
바라다, 기대하다
ㄴ. 바람올린다 = 영등굿 = 풍신제
@ 神格 : 영등할만네 = 영등바람 = 2월할만네 = 풍신할만네
@ 시기및 굿의 방법 :
정월 그믐날 : 황토, 금줄(푸른 댓가지를 꼽은)친다
이월 초하루 : 첫닭이 울면 우물에서 정화수를 떠서 장독대나 뒷간에 둠
푸른 댓가지 3개를 교차하여 위에서 1자쯤 되는 곳을
묶고 색실, 색헝겊 조각, 백지를 달고 그 위에 정화수를 둔다.
10일
15일 정화수를 갈아준다
20일
기원내용 : 풍농, 풍어와 가정의 안녕, 그리고 바람의 피해 방지
2. 하늘과 땅과 인간의 상호 回通을 추구 : 巫 , 삼신사상 - “신난다(神出)”
3. 살림 : 죽이고 뺏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기
ㄱ. 物活論(애니미즘)적 세계관 : 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物은 살아있는 것 으로 간주. 모든 物은 최소한 活의 가능태이며 그 물을 활화시키는 힘, 그 “힘” 을 총칭하여 “神”이라고 부름
ㄴ. 생명(인간의)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원을 일차적으로 만들어 내는 식물(벼, 오 곡, 과일 등) 키우기(농경)에 기반하고 있다.
ㄷ. “生命은 다른 말로 ‘神明’이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신명’이 바로 일과 춤의 추체요 근본입니다. 신명이 나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고 신명이 나지 않으면 춤을 출수 없습니다. 신명이 나지 않는 일은 노예노동이며 강요된 노동입니다.” <김지하 “밥” 분도出, 1980, 96쪽>
ㄹ. 식물 : 자기가 박고 있는 땅이란 自然의 논리에 의하여 성장할 뿐.
간섭하고 지배하고 명령하고 휘모는 논리를 거부
인간은 단지 그 식물이 그 자신의 논리에 따라 성장하도록 도와줄 뿐
그 성장을 인위적으로 조장할 수 없다.(농민의 철학) - 無爲自然(老子)
4. 난장(orgy)의 해방감
ㄱ. 농경과 어업은 무척 어려운 것 :
“인류에게 있어서 ‘농경’이란 이러한 ‘현재적 고통’을 ‘미래적 쾌락’을 위해서 참는 ‘이성의 발전’이 없이는 발생하지 않는다.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에 열심히 한눈팔지 않고 모든 육체적 고통을 인내하면서 가을의 수확의 기쁨을 위하여 노동하지 않으면 안된다.” <김용옥 “여자란 무엇인가?” 통나무, 1987, 267쪽>
ㄴ. 亂場 : 비이성적 해방공간, 카오스의 세계
“농경의 질서, 이성적질서 속에서만 인간은 살 수 없다. 인간은 이러한 이성적 질서로부터 어떠한 “비이성적 해방”을 추구하게 된다. 농경문화에 있어서 이러한 해방의 최초의 문명적 산물은 바로 “술”이었다. 술! 술! 술이야 말로, 인간의 이성적 질서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것은 인간의 육체내 에 장치되어 있는 것이다. 씹! 씹! 씹! 그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말에 항상 ‘酒色’이라는 말이 쌍을 가지고 나타나는 이유는 바로 이 두가지가 인류문화에 가장 원초적인 해방을 나타내는 보편적 그 무엇이기 때문. ‘酒色’에서 전자 ‘酒’에 대한 종교적 예배가 곧 희랍의 농경민족에게서 발견된 ‘바카스예배’이며 후자 즉 ‘色’에 대한 종교적 예배가 곧 ‘바알의 축제’ 즉 ‘혼음의 축제’인 것이다.” <김용옥 “여자란 무엇인가?” 통나무, 1987, 267쪽>
ㄷ. 마을굿 :
일상으로부터의 해방공간, 飮酒歌舞의 난장판
“신남”(하늘과 땅과 인간이 통하는 날)의 神明판
5. 풍물굿 :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바람을 잡는 器物이자 짓거리
ㄱ. 모든 난장에 풍물이 반드시 등장 - 풍물은 판을 벌리고 생명체의 마음을 흔들어 변화가 오도록 한다.
ㄴ. 모든 굿에는 어떤 형태로든 풍물(굿물)이 등장
ㄷ. 풍물굿만으로도 마을굿이 가능
6. 풍물굿에서 신명의 주체는 민중.
ㄱ. 굿꾼(농민, 어민, 무당, 광대 등 ; 민중)이 바로 “신바람나는 세상”을 만들어 내는 주체
ㄴ. “증산은 ‘광대와 무당이 바로 큰 개벽장이다. 광대와 무당이 바로 가장 큰 후천개벽의 전위다.’ 이런 뜻을 말했으며, 자기 자신이 광대요 무당이라고 늘 저처했습니다. 그의 이른바 ‘천지공사’ 즉 후천개벽을 실질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집행하는 그의 천지공사는 모두 다 이와같은 우리나라 농민들의 농업노동의 가락과 장단 및 전통적인 굿의 형태로서 진행되었으며, 스스로 천지생명을 낳고 키우고 살피는 한울님일 뿐만 아니라 ‘무당’이요 ‘천지농사꾼’이 라고 자기 자신을 비유했습니다.” <김지하 “밥” 분도出, 1980, 102쪽>
ㄷ. 申命行事를 주관하는 존재가 君子인 것과는 달리 풍물굿이 만들어 내는 신명나는 세상의 주체는 굿꾼
삼신사상의 구현체로서 풍물굿
박 흥 주(굿연구소 소장)
# 굿물의 구성
* 깃발의 구성
1. 令旗(令字旗, 神令旗, 軍旗, 法旗, 靑旗(수컷), 紅旗(암컷) 등)
ㄱ. 구성요소 : {사람, 삼지창, 깃발(천, “令”字, or 지네발), } x 2쌍
ㄴ. 삼지창의 의미(비밀) : “셋이면서 하나고 하나이면서 셋이다 - 會三歸一사상”, 天地人(三神)의 命을 하달.
“一始無始一析三極無盡本 .... 人中天地一 一終無終一(하나의 시작은 無에서 시작한 하나이다. 三極을 밝히면 根本은 限이 없다......... 인간은 天地와 더불어 같은 것이다. 하나의 끝은 無에서 끝나는 하나이다.)”
<김일훈 “天符經주해” 민속신약 제3집, 1988, 9쪽>
“析三極析分也 極者 天地人之至理也 繫辭曰 六爻之動 三極之道也 道生一 一生 二 二生三 至于三而變化不窮 故曰三生萬物(쪼갠다 함은 나눔이요, 한끝이란 하늘과 땅과 사람의 지극한 이치라, 계사에 이르기를 ‘육효의 움직임은 三極의 道라, 道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아 셋에 이르되 그 變 化가 다함이 없으므로 셋이 萬物을 낳는다’ 하였다)”
<정재승 “천부경의 비밀과 백두산족 문화” 정신세계사 4322, 74쪽>
“易之爲書也ㅣ 廣大悉備하야 有天道焉하며 有人道焉하며 有地道焉하니 兼三才 兩之라 故로 六이니 六者는 非他也ㅣ라 三才之道也ㅣ니(역의 글됨이 넓고 커서 (세상이치를) 다 갖추어, 天道가 있으며 人道가 있으며 地道가 있으니, 三才를 겸해서 둘로 하니라, 그러므로 六이니, 六이란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三才의 道니) - 周易 繫辭下傳 十章”
<대산 김석진 “주역강해” 대유학당 1995., 395쪽>
三才之道
소성괘 대성괘
上爻 天(陰)
五爻 天(陽)
四爻 人(義)
天 三爻 人(仁)
人 二爻 地(柔)
地 初爻 地(剛)
<대산 김석진 “주역강해” 대유학당 1995, 394쪽>
ㄷ. 쌍(둘)의 의미 : 음양의 조화, 六의 數.
“ ........ 天二三地二三人二三大三合六 ......... (하늘은 陰陽으로 하나를 얻어 셋이 되고 땅도 陰陽으로 하나를 얻어 셋이 되고 사람도 音陽으로 하나를 얻어 셋이 된다. 天地人三才가 陰陽으로 六을 이룬다.,)”
<김일훈 “천부경주해” 민속신약 제3집, 1988, 9쪽>
“ [三.一神誥]에는 六이 員의 상징수로 되어 있다. 즉 三이 角( ), 四가 方(ㅁ) 을 나타내는 數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의 圓이란 무엇인가. 물론 그것은 天, 즉 陽이다. 이 경우 天이란 것은 나무로 치면 뿌리를 뜻하는 것이며 사람으로 치면 머리(頭), 즉 精神이다. 따라서 그것은 모든 것의 始發點이라고 할 수 있 다. [三.一神誥]는 圓과 方, 角의 확대비례를 1:2:3으로 하였다. 말하자면 方이나 角이 각기 2배, 3배로 불어난다고 하더라도 원은 제자리에 있는 시발축인 것이다. 즉 아무리 굴러도 변함이 없는 자리, 그것은 곧 法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圓塔이나 圓墳은 사실상 六을 나타내는 조형물인 것이다.”
<박용숙 “한국고대미술문화사론” 일지사, 1976, 36쪽>
ㄹ. 솟대와의 상관관계
2. 龍旗(龍堂旗, 새명기, 天龍旗, 덕석기, 서낭기, 낭기, 두레기, 농상기 등)
ㄱ. 구성요소 : 사람, 새깃털(꿩털), 대나무, 깃발(광목천, 龍(靑龍, 黃龍 2마리)그림 혹은 龍글씨, 지네발),
ㄴ. 의미 : 三神(天地人)을 상징, 물의 神으로서 농사에 필요한 풍족한 물을 기원하는대상. 즉 堂이다.
하늘 : 새깃털
龍堂旗 땅 : 지네발
사람 : 용(水神)
“셋은 샘과 같은 뜻의 말이며 이는 古語에서 三을 미리(miri)라고 한 것과 일 치한다. <미리>는 물(水)의 變音이므로 역시 여기에서도 水와 三은 같은 뜻이 된다. 더욱 <미리>라는 것은 고어의 龍이라는 뜻인데, 이때의 龍도 또한 三을 뜻하는 동물이 되는 것이다. 이 점은 日本語의 水와 三에서도 그대로 立證된다. 일본말의 水는 mizu이며 三을 또한 mits이다. 말하자면 水와 三은 거의 같은 식으로 발음된다. ”
<박용숙 “한국고대미술문화사론” 일지사, 1976, 30쪽>
“漢字에서 水字가 글자의 邊으로 쓰일 ,때에는 반드시, 즉 三으로 표시된다. 이를테면 河, 海, 湖 등은 그러한 實例에 속한다. 이 점은 물이 곧 化學的으 로도 세번째에 나타나는 현상임을 암시하고 있다. 즉, 陽氣와 陰氣가 부딪치면 맨 처음에 生하는 物質이 水分이며, 그 수분을 통하여 불이 발생한다. 이점은 電氣현상에서도 실증된다. ”
<박용숙 “한국고대미술문화사론” 일지사, 1976, 47쪽>
“이는 龍이라 하는 靈物로서 龍은 千年을 수도하여 자리를 옮기며, 또한 風雲 造化를 이루고 있으니 인간들이 善行하면 風雨를 고르게 베풀어 年豊을 이루 게 하고 인간들이 不善하면 풍우를 고루 베풀지 아니하여 凶年이 오게 하느니라” <김재환 “인류시원사” 백수사, 1974, 228쪽>
“요컨대 龍이란 陰陽을 겸비한 靈物의 표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능히 龍 은 人, 즉 中性의 상징이 될 만하다. ”
<박용숙 “한국고대미술문화사론” 일지사, 1976, 84쪽>
* 풍물의 구성
1. 나발(나팔, 초레, 영초 등)
ㄱ, 구성 : 쌍(2개)
ㄴ. 용도 : 신호용(시작, 끝, 굿머리의 변화), 흥이 오를 때.
“ 일초 이초 단3초 후에 행군하랍신다.” - 우도판굿
ㄷ. 의미 : 天地人을 상징. 陰陽의 조화에서 생성되는 소리. 창조의 소리를 상징.
2. 풍물의 구성
ㄱ. 구성 : 쇠(숫쇠, 암쇠), 징, 장구(陰陽聲), 북, 소고(남자, 여자), 잡색, 사람(구경꾼; 여자, 남자)
ㄴ. 의미 : 천지인의 조화로운 소리와 춤, 그리고 온갖 짓거리를 만들어 냄
天 : 꽹과리 징(징과 꽹과리는 음양관계, 숫쇠 암쇠 음양관계) 陰陽
地 : 장구, 북(북과 장구는 陰陽관계, 장구는 陰陽兩性) 관계
人 : 소고, 잡색(여자와 남자는 陰陽관계)
3. 소리의 구성
ㄱ. 구성 : 쇳소리, 징소리, 장구소리, 북소리, 그리고 사람소리
ㄴ. 의미 : 음양의 교합(조화)에서 나오는 소리들
┌ 天 : 쇳소리
├ 地 : 가죽소리
└ 人 : 사람소리
4. 춤의 구성
소고춤 : 三神(天地人)을 잘 놀려 통하게 하려는 의지를 상징화 한 춤
“ 똥싸고 밑닦고” - 소고춤의 구음
* 치복의 구성원리
1. 삼색띠의 의미
ㄱ. 삼색띠가 쓰이는 곳 : 농기, 상쇠덧거리, 치배의 치복
ㄴ. 삼색띠는 삼신의 표상 : 세개의 셋(三)이라는 숫자
ㄷ. “밝사상”의 표상 : 빛의 삼원색(靑, 綠(靑黃色), 赤)
“三神의 원어는 <삼부루>, 촉호(促呼)하여 <삼불>이었을 양하다. <부루>는 <밝>의 轉으로서 古語에 神明을 의미하는 語인즉 <삼부루>는 곧 <삼>의 神 이라 함인데 후에 한문으로 音義交譯하여 三神이라고 씀으로부터 三의 字義에 附會하는 種種의 類說이 일어났다.”
<최남선 “최남선전집(3)” 현암사, 1951, 241쪽>
2. 고깔의 의미 : 三神山(太白山)을 의미. 三神(천지인)을 상징. “밝사상”의 발현
“三神山天下之根山以三神名 ...... 三神或說有以三爲新 新爲白 神爲高 高爲頭 故亦稱白頭山又云蓋馬奚摩離之轉音 古謂白爲奚爲頭爲摩離也 白頭山之名亦起拖是矣(삼신산은 천하의 근산이다. 삼신을 갖고 붙여진 이름인데 ....... 삼신은 혹 三으로써 새롭게 하는 것이라는 설이 있다. 새로운 것은 흰것이다. 신은 높고, 높은 것은 머리다. 그러므로 백두산 또는 蓋馬라 하는 것은 해마리(奚摩離)의 전음이다. 고어에 白을 해(奚)라 하고 頭를 摩離라 하였다. 백두산의 이름 역 시 여기서 나온 것이다.)”
<김은수譯註 “한단고기(태백일사 - 三神五帝本記)” 가나出, 1985, 126-127쪽>
“산신숭배(山神崇拜)는 원래 청반족(靑班族) 사이에 공통된 古代信仰으로 싹텄 으며 역사적 기록으로도 4천여년전부터 그런 신앙이 있었으리라는 점은 쉽게 추정할 수 있는 일이다”
<조자룡 “三神民考” 가나아트出, 1996, 132쪽>
“칠교도보(七巧圖譜)라는 장난감 그림책에 三神山이 그려져 있으리라고는 생 각도 못했던 일이다. 그모습은 ‘山’자의 상형문자와 같이 그려져 있으니 삼봉 일산(三峯一山)의 모습이요 삼신일체(三神一體)의 뜻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 리고 보면 신모(神帽)는 마땅히 삼신산을 상징하는 삼신관(三神冠)이라고 불러야 옳겠다. 그러니까 고깔제석은 불교의 제석천(帝釋天)도 아니고 베다경의 인드라 신도 아니며 신교(神敎) 기원의 삼신상(三神像)이란 점이 밝혀진 것 이다.” <조자룡 “三神民考” 가나아트出, 1996, 84쪽>
“山은 萬物의 始終을 이루는 곳이며, 우리나라를 의미하니 山이요”
<김석진 구술 중산학회 편저 “주역과 세계” 동신出, 1990, 31쪽>
* 三太極의 의미
1. 삼태극 문양이 있는 악기 : 북, 소고
2. 삼태극의 의미 : 삼신(天地人)을 상징.
# 굿의 구성
* 내드림(모듬굿)
1. 상정리 군고
2. 황재기선생 우도굿
* 당산굿
1. 상정리 샘굿
“ 3 X 1 = 3 , 3 X 3 = 9, 9 X 9 = 81 ” <천부경 총 81글자>
“삼장구 아홉자리 절” <이용수. 전남 여천군 소라면 가사리>
“丁巳二年 禮官請行三神迎鼓祭乃三月十六日也 帝親幸敬拜 初拜三叩再拜六叩三拜九叩禮也 從衆特爲十叩是爲三六大禮野(정사 2년(B.C 424) 禮官이 請하여 三神迎 鼓祭를 행하였다. 곧 3월 16일이었다. 帝가 친행하여 경배하였다. 初拜는 세번, 再拜는 여섯번, 三拜는 아홉번을 두드렸다. 衆이 따라 특별히 열번을 두드리기도하였다. 이를 三六大禮라 한다.) ”
<이암編 “檀君世紀 - 44세 檀君 ‘丘勿’ 條”,
김은수譯註 “한단고기” 가나출판사, 1985, 81쪽>
2. 장좌리 당산굿
* 삼채굿의 의미
1. 당산삼채
ㄱ. 원박
ㄴ. 당산삼채의 구성원리
ㄷ. 용도
ㄹ. 의미
2. 삼채(늦은삼채)
ㄱ. 원박
ㄴ. 삼채의 구성원리
ㄷ. 용도
ㄹ. 의미
* 3박자(3분박)의 구성원리
* 마침굿(인사굿)
# 三神과 五神과의 관계
* 五神을 표상하는 굿물
1. 용당기 : 五色
ㄱ. 깃발의 천(白色) : 西方, 白帝將軍, 西方白帝龍王, 白虎
ㄴ. 지네발(흑색) : 北方, 黑帝將軍, 北方黑帝龍王, 玄武
ㄷ. 비행기(삼색띠) : 中央, 黃帝將軍, 中央黃帝龍王
東方, 靑帝將軍, 東方靑帝龍王, 靑龍
南方, 赤帝將軍, 南方赤帝龍王, 朱雀
2. 치복 :
ㄱ. 농민복(白色), 전립(黑色), 삼색띠(靑色, 綠色, 赤色)
ㄴ. 상쇠덧거리 : 소매의 오색띠의 五色
3. 고깔 : 다섯송이의 꽃. 오색 or 흰꽃
* 오신을 위한 굿
1. 당산굿의 오방돌기
2. 오방진풀이
* 三神과 五神과의 상관관계
“太初에 온 宇宙 속은 上下四方도 없는 암흑세.계 오직 하나의 光明이 있었으니 바 로 三神이었다. 삼신은 一神이면서 나타날 때는 三神으로 작용한다. 삼신의 모습은 볼 수 없으나 무량한 지능으로 萬物을 創造하고 統治한다. 항상 큰 빛을 내며 神妙를 나타내는데 이 세상 구석구석에 나타나지 않는 데가 없다. 첫째로 물을 창조하시고 太水로 하여금 北方에서 하늘의 黑帝와 짝을 지어 지키도록 하셨다. 둘째로 火를창조하시고 太水로 하여금 南方에서 하늘의 赤帝와 짝을 지어 지키도록 하셨다. 셋 째로 木을 창조하시고 太木으로 하여금 東方에서 하늘의 靑帝와 짝을 지어 지키도록 넷째로 쇠를 창조하시고 太金으로 하여금 西方에서 하늘의 白帝와 짝을 지어 지키도록 하셨다. 다섯째로 흙을 창조하시고 太土로 하여금 中央에서 하늘의 黃帝와 짝을 지어 지키도록 하셨다. 天下大將軍으로 하여금 하늘의 黑,赤,靑,白,黃 五帝를 다스리도록 하시고 地下女將軍으로 하여금 水,火,木,金,土 五靈을 다스리도록 하셨다.”
<李裕 역 “태백일사 - 삼신오제본기” 배달민족사(2) 고려가, 1987>
“三神은 形體도 없고 無爲하고 말도 없지만 능히 물건을 나게 하고 化育하고 이루어 지게 한다.”
<김교헌著 이민수譯 “神檀實記” 한뿌리, 1987, 11쪽>
“결국 三神一體神은 天神, 地神, 人神의 작용없이 존재할 수 없고 三神은 각각 五神 (五帝)의 움직임없이 작용할 수 없으니 이것이 神數의 1, 3, 5 기본 神統이다”
<조자룡 “삼신민고” 가나아트出, 1996, 274쪽>
<五行(河圖)과 相生>
(熱)
(夏)南(火) (赤)
(風) (濕) (燥)
(春)東(木) 中央(土) (金)西(秋)
(靑) (黃) (白)
(寒)
(冬)北(水)
(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