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궁궐문화연구회의 자랑인, 시니어 역사연구가로 저명하신 일조 이효일선생님의 2시간 30분에 걸친 '한국역사에 대한 이해' 강좌를 듣고 딱 한줄 스마트폰 메모장에 기록해 온 것이 이 글의 제목이다. 이 기막힌 역사적 고리를 왜 나만 모르고 있었나?, 자책하면서 적어왔다.
며칠 전까지 교학사 국사교과서에 대한 논란이 한창이었다. 사실 나는 이문제에 대하여 잘모른다. 너무 일방적이어서 이런 대화에 관심을 두는 것 자체가 저어해진다. 여론의 주류는 이 교과서가 지나치게 오류가 많고 친일을 찬양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 같지만, 현재 우리나라 대부분의 성인들이 교육받은 역사관이 친일사학자 이병도선생에 의하여 정립되어 있다는 사실과 이를 교정하기 위한 사학계의 진통에 대한 근본적인 논급과 방향제시는 보이지 않았다. 정곡은 비껴가고 삐뚤이 논란만 있다고 심통이 나있던 참이었다. 이 때에 어쩌면 나의 국사관조차 이병도를 넘어 이완용에게서까지 영향을 받았다 생각하니 한순간 머리가 띵하기도 했다.
이완용이 한일 합방문서에 서명하기 전까지의 행적을 보면 그는 누구보다고 애국과 충성심이 높은 외교관이었다. 한학을 공부하여 25세에 오늘날의 행정고시에 수석으로 합격한 수재다. 한학으로 입신했지만 영어공부도 열심히 하여 미국에 3년간 주재하며 대리공사까지 지냈다. 일본어 보다는 영어로 소통하고 문서를 작성하는 친미외교관이었다. 독립협회 결성도 주도하고 아관파천도 주도했다. 하지만 그는 을사늑약이후 한일합방조약 체결까지 주도하며 친일의 거두로 변신했다. 그의 이러한 변신을 개인적인 권력욕이 아닌 당시 조선의 현실을 반영한 실용주의라고 변명해 주는 역사관도 있다. 국권이 이미 쇄퇴해 합방될 수 밖에 없다면 조금이라도 옛 조국에 유리한 합방이 되도록 노력한 사람이이완용 이라고 평가해 주는 견해도 있다.
나는 선의로 해석하는 편에 서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이완용 문제는 후자처럼 선의로 해석하고 나서도 여전히 문제가 심각하다. 그는 한일합방이 되고 나서도 16년을 더살며 온갓 권력과 호사를 누렸다. 이 기간이 문제다.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얼마나 치열하게 친일에 몰두 했을까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온 집안을 동원하여 친일하느라고, 조카인 이병도를 일본에 유학시켜 조선을 일본에 영구히 복속시킬 역사체계를 연구해 오게 했다면 결과를 놓고 해석하는 지나친 작위적 해석일까?
이완용 본인은 한일 합방 이후 1916년에 시작한 조선사편수회의 사실상의 수장인 고문을 맡는다. 일본에서 식민지 역사체계구축을 위한 공부를 마친 이병도는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고 해방후에는 문교부장관이 되고 그가 주도한 사관에 의거하여 국사교육이 이루어졌다. 나는 나의 부족한 두뇌로 아무리 노력하여도 어디서 어디까지가 진정한 우리역사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내 민족스스로를 혹시나 열등한 민족아닌가?, 하는 의심에 빠질 때가 있다. 이제는 이병도 역사관, 아니 이완용의 역사관 때문이 아닐까 하는 염려까지 하면서 나를 추스려함을 이번 강의에서 들었다.
시니어가 되어서도 참 잘 살아야 하겠다. 현재는 실용주의라는 생각으로 선택한 결정이라 하여도 앞으로 살 30여년은 이 결정에 절대적으로 구속될 부분이 남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완용과 이병도박사에게 연민의 정을 보내며 우리나라 역사공부를 통해서 시니어로서의 나의 삶에도 밝은 지침의 가르침을 주신 이효일선생님께는 마음깊게 존경과 고마운 인사를 드린다.
첫댓글 역사는 옛 이야기지만 항상 새로움을 풍기지요.
제가 제글에 댓글을 달려니 쑥스럽습니다. 1987년 이래 단 한번도 쉼없이 달려온 수필문학지 '월간 에세이' 2014년 3월호에 이 글이 원본 그대로 실렸네요. 듣기로 이 잡지는 정기 구독자가 12만명이라 합니다. 그보다, 문제의식에 동참하는 매체가 있다는 사실에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