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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통일과정 (GERMANY, 1815-1870) ☞ HERBERT L. PEACOCK 저 <<MODERN EUROPEAN HITORY>>
■ 번역 ; 이재익
< 차 례 >
1. 빈회의 후의 독일 2. 관세동맹 3. 1848년의 프러시아에서의 자유주의 운동 4. 1848-1849 프랑크푸르트 회의 5. 프러시아 동맹 < 요약 >
6. 프러시아의 독일, 1850-1870 7. 대외 정책 ; 덴막에 대한 전쟁 8. 오스트리아의 패배 7주간의 전쟁, 1866 9. 전쟁의 보편적인 결과 10. 프러시아와 프랑스, 1866-1870 11. 스페인 계승전쟁, 1869년 < 요 약 > < 연보 > < 질문 >
1. 빈회의 후의 독일
빈회의는 39개의 독일 영방(35개 군주국, 4자유시)을 창조했다. Assembly 또는 Diet라고 하는 의회는 이러한 영방들로 뭉쳐진 독일연방을 위해 설립되어졌다. 그것은 프랑크푸르트에서 회의를 가지고 17개 구성원으로 설립되었다. 더 큰 영방들이 과반수를 차지하고 메테르니히는 오스트리아 대표로 Diet의 상임의장직을 차지했다. 특히 두 가지 요소의 의견차이를 조정하는 문제로 불만스러웠다. 즉 A) 완전한 통일된 독일을 원하는 민족주의자 B) 각각의 영방에서 의회를 선출하고 책임지는 정부를 가지며, 또한 통일 독일의 의회도 별도로 가지기를 원하는 자유주의자들.
자유주의체제에 접근한 것은 단지 4개의 영방- 바덴, 바바리아, 부르텐부르크, 작세바이마르 -이었다. 주민의 대부분은 1815년에는 자유주의에 흥미가 없었다. 그것의 주지지층은 직업상의 위치에서이거나, 대학생들- 즉 체육클럽과 부르센샤프트(학생연합단체)이 종종 자유주의적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다. 1817년 발트부르크 축제에서는 프러시아 기병용 장화와 메테르니히 초상화가 불태워졌다. 메테르니히는 이러한 사건과 1819년 코체부 암살사건으로 독일의 군주들이 칼스바트 선언을 수용하도록 설득하는데 이용할 수 있었다.
칼스베드선언은 마인쯔에 상설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대학생들을 엄격하게 감독하는 임무를 부과하였다. 샤를르 10세에 대항하는 프랑스의 1830년의 혁명은 독일에 영향을 미쳤는데, 독일에서는 자유주의 시위가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시위는 일사불란한 운동은 아니었고 메테르니히는 모든 정치적 회합을 완전히 통제하였다. 이 모든 억압은 자유주의 시위운동을 더욱 지리멸렬하게 만들었다.
2. 관세동맹
1834년까지 프러시아는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의 대부분 지역과 관세동맹을 체결했다. 이것은 독일의 여러 영방들은 UNION 또는 ZOLLVEREIN(촐베어라인)이라고 하는 관세동맹을 통하여 영역 내에서는 보다 자유롭게 무역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독일 통일의식을 고무시켰고, 많은 독일의 영방들이 오스트리아보다는 프러시아의 지도력에 따르기 시작했다.
어쨌든 프러시아의 빌헬름 4세는 관세동맹을 확산시킴으로써 부유하고 진보적인 중산계층의 자유주의적 성장의 희망을 좌절시켰다. 그의 통치 초창기 프러시아에서는 불안이 고조되었다. 루이 필립에 대항하는 1848년의 프랑스에서 발생한 혁명은 독일에 깊은 영향을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하여 독일 영방 통치자들의 대부분은 선거에 의한 의회, 출판, 언론의 자유, 배심원에 의한 재판을 포함한 자유주의적 체제를 승인하도록 강요되었다.
프러시아에서의 불안은 1848년에 급속히 확산되었으며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자들의 그동안 억압된 불만이 이제 표면으로 떠올랐다. 베를린에서는 많은 불평거리를 가진 노동자 계급이 스스로 급속히 성장해 갔었는데, 이들은 일찍이 실레지엔 직조공들의 폭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것에 감정이 남아있었다.
3월 12일부터 17일까지 베르린의 시위는 왕으로 하여금 출판과 언론 자유를 선언하고, 프러시아 의회로 하여금 새로운 헌법을 만들기 위한 회의를 개최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왕 자신은 베를린 폭동 현장으로부터 포츠담에 있는 왕국으로 철수했다.
3. 1848년의 프러시아에서의 자유주의 운동
제헌의회는 1848년 5월에 베를린에서 개회되었다. 어쨌든 왕은 선거로 구성된 의회에 책임을 지는 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를 거절하였다. 의회에서의 왕의 열렬한 지지자들은 비스마르크를 한 멤버로 하는 일단의 융커그룹이었다.
왕은 특히 공화정체를 원하는 극좌파와 제한된 군주제에 만족하는 보다 신중하고 자유주의적인 중산층- 이두 계층 사이에 틈이 나타났을 때 시간을 벌었다. 포츠담의 왕과 그의 고문들은 이들의 차이에서 실리를 취할 수 있었다. 왕은 또한 다음과 같은 사건으로 고무되었다. 즉
A) 귀족계급에 의해 지휘되는 그의 군대는 여전히 충성스러웠다. B) 오스트리아와 이탈라아에서의 혁명은 실패하였다. C) 공화주의자와 공산주의를 두려워하는 베를린 의회는 좌익에 의해 요구되어진, 근위대에 도전하여 싸울 수 있는 전투부대 조직에 실패했다.
1848년 11월 9일 프러시아 군대는 베를린에 다시 들어갔고 한 달 후 의회는 해산되었다. 1850년 프러시아 헌법은 군주를 위해 만들어 진 것이지 국민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하원이 선출되고 상원의 일부는 세습직이고 일부는 왕에 의해 임명되었는데 왕은 법안을 제출할 수 있었고 의회의 동의 없이 각료를 임명할 수 있었다. 각료는 왕에게만 책임을 졌다. 유권자는 세 부류로 나뉘어졌는데 더 부유한 자는 부에 비례하여 투표권의 몫이 커졌다. 공개투표는 무기명 비밀투표를 대체하였다. 융커, 군대, 프러시아 영방의 관료들의 지지를 받는 왕이 승리를 거두었다.
4. 1848-1849 프랑크푸르트 회의
한편 민족주의자들은 독일 통일을 꾀했다. 1847년 관세동맹국의 대표들은 독일의 통일을 논의하기 위하여 회의를 가졌고, 1848년에는 Vorparlament(포어파르먼트)라고 하는 임시의회의 600명의 대표들이 1848년 5월 18일에 프랑크푸르트 마인강변(Frankfort-on-Main)에서 열릴 독일의회를 민중들이 선거 할 것을 결의했다.
그것은 831명의 정원으로 구성되었는데 전에 약간의 정치적 경험이 있는 지식인들이 대다수였다. 인권과 통일된 독일이 지향해야 할 체제에 대하여 긴 토론 후에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나타났다.
1. 통일 독일의 섭정의 지위가 군주들의 마음에 드는 오스트리아 존 대공에게 제의되었다.
2. 슐레스비히 홀스타인의 독일 영역은 독일로의 통합을 요구하였다. 프레데릭 빌헬름 4세는 그들을 지지하였으나 그의 군대는 덴마크에게 패배했고 그에게 평화를 이룩하도록 큰 힘이 작용하였다.
3. 회의는 다음으로 통일 독일에 오스트리아의 독일지역을 포함하도록 해야 한다고 제안했으나 오스트리아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자 회의는 만장일치로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기로 결정했고, 오스트리아대표는 철수했다.
4. 통일독일의 왕관은 이번에는 프레데릭 빌헬름 4세에게 제의되었다. 민중에 대한 그의 증오가 그의 사퇴로 이끌어갔고, 그도 '또랑에서 왕관을 건지고' 싶어하지 않았다. 프러시아 대표는 철수했다. 곧 얼마 후 프러시아 군대는 프랑크푸르트 회의에 압력을 가하곤 하였고, 본국에서는 이미 혁명을 진압하고 있었다.
5. 프러시아 동맹
프레데릭 빌헬름 4세는 이제 하노버, 삭소니, 헤세와 다른 작은 영방국가들로 프러시아 동맹의 조직을 시도했다. 그 동맹의 회의가 1850년 에르푸르트에서 열렸으나 오스트리아 압력 하에 몇몇 나라들은 곧 탈퇴하였다. 헤세에서 민중혁명이 일어났을 때 프레데릭 빌헬름의 지원을 요청했으며, 오스트리아 군대가 그에 대항하여 출동하여 그는 오스트리아와 1850년에 올뮛쯔 조약을 맺고 프러시아동맹의 이상을 포기하였다. 그런 후 오스트리아는 1815년 연방을 회복했고,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는 모두 실패하였다.
< 요 약 >
1. 프랑크푸르트회의 부분적으로는 그 속의 계급적 의견차이로 실패하였다. 즉 일부는 프러시아를 지지하는 민족주의자들이었고, 다른 일부는 프러시아의 지도력에 반대하는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일부는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사이를 분리하였고, 극좌파는 무장된 공화국을 원하였다.
2. 회의는 오스트리아 프러시아(두쪽 다)와 독립된 군사력을 갖지 못하였다.
3. 슐레스비히 홀스타인의 실패는 회의의 민족적 위치를 약화 시켰다.
4. 유럽의 자유와 민족주의 혁명에 대항하여 그것을 전복시키려는 일반적인 조류가 프랑크푸르트회의를 고립시켰다. 그것은 좀 더 나은 일반적 상황에서만이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5. 회의는 편협하게 그들의 계급구성에 기반을 두었다.
6. 회의의 실패는 그것에 대하여 민중시위를 가져왔는데. 그것은 (민중시위는) 부분적으로는 칼 마르크스와 그의 지지자들의 새로운 공산주의 연합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활성화되었다. 프롤레타리아계층은 처음부터 회의의 중산계층에 대하여 저항적이었다.
6. 프러시아하의 독일, 1850-1870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저지했던 융커의 왕자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그의 귀족 지지자들의 필수적인 대단히 중요한 업적이 독일의 통일이었다. 후에 그의 프러시아 의회에서의 능란한 수완을 보면 그가 프레데릭 윌리엄 4세에게 총애를 받았으리라고 여겨진다. 그는 1851년에 부활한 독일 연방의 프러시아 대표자가 되었다. 그는 1859년-1862년에는 러시아 대사로서 그리고 1862년에는 프랑스대사가 되었다.
1861년 강력한 반자유주의의 빌헬름 1세가 프러시아의 왕이 되었다. 그는 또한 프러시아에게 굴욕적인 올뮛쯔 조약을 강요한 오스트리아에 대항하여 프러시아를 증강시키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폰룬을 국방장관에 폰 몰트케를 참모총장에 임명했다. 군대를 25만 명으로 확장시키려고 세금을 늘리려고 요구하였을 때 왕실의 재정을 통제하기를 바라는 프러시아 의회의 자유주의자들은 이러한 제안에 반대하였다. 주저하던 윌리엄 왕은 폰룬의 권유에 의하여 비스마르크를 프랑스로부터 소환하여 그를 국무 재상으로 임명하였다. 그의 냉철함이 필요했다.
비스마르크는 베를린과 프랑크푸르트에서 일어난 자유주의적 저항을 경멸했고, 프러시아의 군대에 의지할 수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한 때 신문 검열을 강행했고, 자유 시민 봉사기구를 일소했다. 그런데 세금을 걷는데는 거의 저항이 없었다.
7. 대외 정책 ; 덴마크에 대한 전쟁
1863년 덴마크의 정부는 슐레스비히를 덴마크에 완전히 통합시키려고 시도했다. 이것이 슐레스비히의 독일인들과 홀슈타인에서 다수의 독일인의 반발을 초래했다. 비스마르크는 이 분쟁을 독일민족주의자들의 지지를 얻고, 동시에 드디어 오스트리아에게 굴욕을 갚아 줄 수단으로, 그리고 독일영방들 사이에서 프러시아의 지도력을 얻기 위한 기회로 여겼다. 따라서 그는 오스트리아로부터 아무런 협조도 없을 것으로 확신했다.
(a) 1863년에 러시아를 지지하고 폴란드에 대항하였으며, 폴란드 난민을 프러시아국경으로부터 돌려보내었다. (b) 나폴레옹Ⅲ세에게 라인강 연안을 양보한다는 모호한 약속을 하였다. (단지 파리에서 프러시아의 대사를 통해서 구두로 )
비스마르크는 이제 오스트리아와 연합해서 덴마크에 대항했고, 그는 공국령의 문제를 해결할 유럽회의 개최를 받아들이기를 거절하였다. 연합공격이 덴마크를 패배시켜 1865년 게스타인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프러시아는 슐레스비히 관리권을 얻고, 오스트리아는 홀스타인의 관리권을 얻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비스마르크는 팔마스톤의 갑(岬)이라고 불리는 곳을 성공적으로 얻었으며, 정확하게 그 가치를 간파했으며, 영국은 덴마크에 대한 동정심에도 불구하고 홀로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8. 오스트리아의 패배 7주간의 전쟁, 1866
비스마르크는 이제 오스트리아를 독일 연방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슐레스비히 홀스타인 카드를 미끼로 이용하였다. 1865년 10월 비스마르크는 나폴레옹3세와 비아리쯔에서 회동하였다. 거기에는 합의문서가 없었지만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 사이의 어떠한 분쟁에 대해서도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기로 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나폴레옹 3세로 하여금 라인란드에서 프랑스에게 양보가 이뤄질 것으로 믿게 하였다.
비스마르크는 이제 이탈리아에 베네치아를 주기로 약속함으로써 이탈리아의 새 왕국을 동맹국으로 확보했다. 오스트리아는 슐레스비히 홀스타인에서 아우구스텐부르크 대공이 공국령을 지배하려는 요구를 계속 지지했다. 비스마르크는 이에 반대하고 또한 슐레스비히가 프러시아에 대한 반감을 가지도록 선동하는 오스트리아에 항의했다.
이 시기에 비스마르크는 또한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시도로 전반적인 선거권에 기반을 둔 독일민족의회의 구성을 제안했다. 1866년 6월 프러시아는 홀스타인 지배를 강행했다. 독일의회에서 오스트리아는 독일 영방 대부분의 지지를 얻었지만 이미 현대화 된 프러시아 군대가 빠르게 진격하여 북독일 영방들을 공격하여 패배시켰고 오스트리아 주력군을 1866년에 사도바 전투에서 격파시켰다.
비스마르크의 성공의 이유들은 대체로 (1) 오스트리아를 고립화시킨 외교정책 (2) 동맹국 이탈리아의 중요성은 이태리는 독립을 위한 그들의 전쟁에는 패배해서 고생했지만 15만 오스트리아 군대는 이태리에서의 허가가 필요로 하였으므로 발이 묶였다. (3) 프러시아의 전쟁을 위한 충분한 준비 뛰어난 무기-총개머리 쪽으로 탄환을 장전할 수 있는 소총-는 현저한 효력이 있었다 (4) 오스트리아는 총구로 탄환을 재는 구식 소총을 사용한 것 (5) 오스트리아 제국에는 불안이 있었다. 특히 오스트리아 역내 헝가리 쪽에서. (6) 프러시아 군대는 순 독일인이었지만 오스트리아 군대에는 충성심이 의심스러운 국적의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7) 오스트리아의 재정은 나쁜 상태에 있었으나 그러나 프러시아의 전쟁에 대한 재정적 준비는 완벽했다.
1866년의 프라하 조약에서 비스마르크는 프러시아의 슐레스비히 홀스타인 (독일 덴마크 중간 국경 지대)을 확보했다. 오스트리아를 원조했던 북독일 영방들은 ( 예, 하노버 ) 접수당하였다. 그래서 프러시아는 약 400만의 새로운 인구를 늘려다. 베네치아는 약속대로 이탈리아로 넘겨졌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의 영토를 병합 또는 배상금 부과, 또 다른 복수심에 불타는 상태도 바라지 않았다. 그는 오스트리아를 영원한 적으로 두기를 원하지 않았다.
9. 전쟁의 보편적인 결과
비스마르크는 이제 북독일 연맹을 형성했다. 전쟁에 패한 대부분의 영방( 예 삭소니) 들은 강제로 가입되었다. 수장은 프러시아의 왕이었고 수상은 비스마르크였다. 많은 수의 군대와 외교 정책은 프러시아에 의해서 통제되었으나, 대부분의 다른 힘은 그 영방들에 남겨졌다.
비스마르크는 매우 용의주도함(교활함)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프러시아에 의한 완전한 합병이 아니었다. 그리고 연방협의회 혹은 분데스라트에서, 프러시아는 실제로 투표로 이길 수 있었다.
온건한 프라하의 조약과 북독일 연맹이 형성되었던 방식으로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제외하고는 프러시아의 전 독일 지배를 확고히 하기 위한 목적달성에서 현명한 정치가의 수완을 보여 주었다. 나폴레옹 3세와의 피할 수 없는 전쟁에서는 그는 그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원조를 필요로 했다.
10. 프랑스와 프러시아, 1866-1870
1866년에 비스마르크는 나폴레옹 3세로부터 새로운 요구를 받았는데 특히 바바리아를 상실한 대신으로 라인강에서 양보해달라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3세가 공언하였고 남부 독일을 뒤흔들 수 있는 이런 요구들이 비스마르크에게로 향해져 그를 몰아붙였다.
남부독일은 전시에 그들의 군대가 프러시아에 의해 통제된다는 협정을 받아들였다. 그는 또한 북독일 연방과 남독일 영방들 사이의 관세 협정도 이끌어 내었다. 1867년에 나폴레옹 3세는 룩셈부르크와 벨기에 대한 새로운 요구들을 하였다.
비스마르크의 대답은 룩셈부르크의 중립을 보장하는 유럽회의를 확실하게 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지위는 특히 나폴레옹3세의 모든 희망에 반대하여 일어난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의 전쟁의 빠른 종결후 그리고 멕시코의 대실패 이후 약해졌다. 나폴레옹3세의 동맹국을 얻기 위한 노력은 이제 비스마르크의 외교술에 의해 좌절되었다.
비스마르크는 1856년 파리 평화조약에서 '흑해에 대한 러시아의 거부'를 지지하기로 약속하였고, 이탈리아는 베네치아에 대해 감사해 했고, 로마에 있는 프랑스 주둔군을 분개하게 만들었으며, 조약이 관대하게 맺어진 오스트리아에서는 이제 아우스글레히라는 내적 개혁에 들어갔다. 반론과 반 몰트케에 의한 프러시아의 준비는 빠르게 앞으로 추진되고 있었다.
11. 스페인 계승전쟁, 1869년
1869년 스페인의 왕좌가 궐위되어 비스마르크에게 알맞은 분규가 일어났다. 계승후보자인 호엔졸레른 지그마린겐의 레오폴트 왕자가 프랑스의 압력하에 철수하였고 프랑스 3세는 독일의 후보가 다시 부활해서는 안 된다고 요구했다.
윌리엄 1세는 이것을 거절했고, 엠스로부터 사실들을 진술하는 유명한 전보를 비스마르크에게 보냈다. 비스마르크는 공포할 말을 바꿈으로서 윌리엄 왕이 그에게 보여주는 것을 거절함으로써 프랑스 대사를 모욕한 것처럼 보이게 했다. 비스마르크가 계산한 대로 프랑스에서는 전쟁을 하자는 격앙된 분위기였고 그 결과 프랑스는 1870년 7월 14일 전쟁을 선포했다. 그 비참한 결과는 프랑스부분에서 벌써 언급되었다. 1871년 베르사이유에서 비스마르크에 의해 독일제국이 선포되었다.
< 요 약 >
내적인 자유주의의 진압에 의해서 적극적인 군사상의 준비에 의해서, 현명하고 적절한 외교정책에 의해서 비스마르크는 독일인의 지지를 얻었고 프랑스를 고립시켰으며 냉혹한 결단력으로 프러시아 시기에 독일제국을 건국했다. 그는 진취적으로 한 단계씩 계획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장기적 목표로서 독일의 통일과 독일의 유럽 지배를 위하여 그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모든 기회를 포착했다. ●
< 연 보 > 1815 : 독일연방 설립됨 1817 : 바르트부르크 축제 1819 : 코체부 암살, 칼스베드 포고령 1830 : 독일영방에서의 폭동/ 칼 Ⅹ세에 대항한 혁명/ 프랑스 혁명 1847 : 졸브라인(관세동맹) 영방국가들의 대표회의 1848 : 독일 포어파르민트 / 베를린 제헌의회/ 5월 18일 프랑크푸르트의회 11월 프러시아군대의 베를린 재점령 1849 : 프랑크푸르트회의가 프러시아 군대에 의해서 억압됨 1850 ; 프러시아 헌법제정/ 올뮈쯔 조약/ 1815년의 독일연방 재설립 1861 ; 윌리엄 1세, 프러시아왕 즉위/ 비스마르크가 프러시아 자유주의자 분쇄 1863 ; 폴란드 폭동/ 프러시아가 진압을 돕다 1864 ; 프러시아가 덴마크를 격파함 1865 : 가스테인 협정/ 1866 : 6주전쟁/ 프라하 조약/ 북독일 연방 조직 1869 : 스페인 계승문제 1870-71 프랑스 프러시아 전쟁 1871 베르사이유에서 독일제국 선포
질 문 1. 왜 메테르니히는 1848년 이전의 혁명운동을 진압할 수 있었나? 2. 왜 프러시아 1848년의 혁명은 실패하였나? 3. 프랑크푸르트회의가 당면한 문제는 무엇이었으며, 어떻게 그 문제들을 처리하고자 시도하였나? 4. 프랑크푸르트회의를 실패하게 만든 까닭은 무엇인? 5. 독일의 통일을 이끈 비스마르크의 외교정책은 어떻게 전개되었나? 6. 다음중 세 가지를 요약해 써라 a) 올뮛쯔조약/ b) 1850년 프러시아 동맹/ c) 가스테인협정/ d) 엠스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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