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4장을 시작하면서 예수의 제자들의 수가 요한의 제자들의 수보다 많은 것과 예수의 제자들이 베푼 세례의 양이 요한이 베푼 세례의 양보다 많다고 기록한다. 이 말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이제 세례요한을 비롯한 이전 시대가 끝나고, 이제 새 시대가 열림으로 많은 사람들이 새 시대 안으로 들어오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요한의 말대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말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기록한다.
특별히 (2절)에서 괄호안의 말을 기록한 것은 훗날에 교회 공동체가 베푸는 세례의 정통성을 이야기 하고 있다. 즉 예수로 인해 열려진 새 시대가 교회를 통해 확장되어가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가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고, 예수를 통한 빛과 생명의 교제가 교회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3절 이후의 기록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유대지역에서 북쪽의 갈릴리 지역으로 통행 할 때에 일반적인 길로 가지 않으시고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가려고 하셨다. 당시에는 사마리아는 이방인처럼 여겼고, 일반적인 유대인들은 그 길을 통해서 왕래하지 않았다. 그러나 실상 그 지역은 에브라임 지파의 지역이다. 바벨론 포로 후에 다른 지파들이 다 사라지고 오직 유다 지파의 이름만 남았을 뿐이다.
아무튼 사마리아라는 이방인 지역을 통과하신 사건을 기록한다. 요한복음의 의도 속에는 누구든지 예수를 빛과 생명으로 영접하는 자들은 그가 누구든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과 한 장막의 교제를 할 수 있는 새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그 알림이 가장 가까운 사마리아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이야기 한다.
시간적으로는 여섯시로 우리의 정오쯤 되는 시간이다. 그 때 사마리아 여인 하나가 물을 길러 오고, 예수는 그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 하신다. 이 때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간 상태였다. 이 때 여인의 첫 말 속에서 유대인과 사마리아 인들의 관계를 알 수 있다. 서로 말도 섞지 않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 때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네게 물을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다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고,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참 뜬금없는 이야기 이다. 이야기가 어떤 서론이 있고 본론이 나오고 결론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결론부터 말씀하신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특징이다.
주님과 이야기 하는 당사자의 믿음이 있고 없고의 관계없이 주님이 하시고 싶은 말을 먼저 던지는 형식이다. 그리고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동문 서답을 하게 되고 주님은 그 때서야 주님이 가져오신 새 시대에 대해서 이야기 하신다.
본문에서 여인의 말에 우리 조상들이 준 이 우물에서 우리는 마실 물을 얻었는데 예수가 생수를 준다고 하니 당신이 우리 조상 보다 큰 자냐고 물었다. 본문에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옛 시대의 큰 자들 보다 더 큰 자가 오셨다는 것이다. 그들이 줄 수 없었던 것을 주는 자로 왔다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품에 있었던 아들만이 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생명의 교제이고, 영생이다. 이것이 장차 성령을 부으심으로 온 세상에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 여인의 말 속에서는 주님의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 왜인가? 그 여인의 믿음과 생각은 여전히 땅에 속하고 육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주님이 주는 생수를 얻을 경우 그들이 받는 은혜와 혜택이란 것이 단순히 물 길으러 오는 고생 안하는 정도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자칫 예예수를 믿는 것에 대해서 육에 속한 사람으로 만들고, 하늘의 것을 증거 하면서 땅의 은혜와 혜택을 누리고, 바라는 성도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신다. 여기에서도 예수님은 그 여인의 속사정을 다 아시는 것으로 이야기 한다. 그 여인에게 남편 다섯이 있다는 것은 당시의 계대법을(수혼법) 말한다. 첫 남편이 본 남편인데, 어떤 이유로든 아들이 없이 죽었을 때에 그의 동생(시동생)이 남편의 일을 대신하여 형의 아들을 낳게 하고 기업을 이어가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연속해서 4번이나 있었던 비운의 여인이다. 즉 기업을 이어가기 위해 아들을 낳아야 했던 당시 여인들의 고난의 인생을 나타내는 이야기이다.
이 일을 알고 있는 예수 앞에 그 여인의 고백이 이것이다. 당신은 선지자라는 것이다. 곧 하나님이 보낸 자인 것이고, 당신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요한복음 처음부터 예수를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같다. 예수는 그들을 아시고,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이 보낸 자로 고백하는 것이고, 그들은 지금 하나님의 보낸 자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낸 자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신다. 그리고는 그들이 이해를 하던지 이해하지 않던지 새로운 시대와 하늘의 것을 말씀하시고 그것을 믿고 영접할 것을 요구하신다.
이 여인에게는 는 예배의 장소에 대해서 이야기 하시고 그것을 믿으라고(21절 상) 하신다. 즉 새로운 방식의 예배를 말씀하신다. 옛 예배의 방식은 성전의 제사이다. 즉 하나님께 나아가는 옛 방식이 유다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이라면, 사마리아 에서는 그리심산의 성전이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이것이다. 이제 예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의 예배,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때가 왔으니 믿으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예배의 방식을 아는 것이라 했고, 사마리아 인들의 예배의 방식을 모르는 것을 예배한다고 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둘 다의 방식은 지나간 방식이다. 이제 새것이 왔는데 그것은 참된 예배라고 말한다. 이 참된 예배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다. (영과 진리는 같은 것이다. 다르더라도 깊이 연관된 것이다.) 즉 예수님이 부어 주시는 성령이다. 성령을 통해 진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전에는 이런 방식의 예배는 없었다. 여기서 말하는 참 예배라는 말은 앞에서 말했던 참 빛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예수가 육신으로 오기 전에도 세상에 빛이 있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참 빛으로 말씀의 실체로 오셨다. 이처럼 이전에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식이 있었다. 그러나 참 예배는 하나님 앞에 가리움 없이 가까이 나아가고, 하나님의 얼굴을 대아여 봄으로 알게 되는, 그래서 온전한 생명의 교제를 하게 되는, 하나님과 한 장막 안에 거하게 되는 예배의 방식을 참 예배라 말한다.
예수가 그 길을 여신자이고, 예수가 그 일을 가능하게 하는 성령은 부으실 자인 것이다. 즉 예수의 세례를 통해 성령의 부음을 받고, 그 성령을 통해 하나님과 한 장막의 교제를 통해 하나님과의 교제와 생명을 아는 진리가운데 예배하는 예배를 참 예배,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인 것이다. 이것은 땅에 속하고 육에 속한 예배가 아니고, 그들은 알지 못하는 예배이다.
이 예배를 말하자 그 여인은 대답하기를 메시아가 오시면 그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 여인도 뭔가를 알고 있는 것이다. 메시야가 오면 사람들이 하나님과 영과 진리로 교제 하게 될 것을 아는 것이다. 그 때 주님이 하신 말씀이 이것이다. ‘내가 그다’라고 하신다. 요한복음은 지금 이런 사실들, 즉 예수가 하시는 말씀들을 통해 예수가 메시아인 것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고 그 여인은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먼저 예수를 만나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 했던 것처럼, 동네 사람들에게 와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동네 사람들이 그 증언을 듣고 믿었다고 기록한다. 그러면서 고백하기를 우리가 친히 들었다. 그리고 믿었다고 말하며, 고백하기를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안다고 고백한다. 여기에서도 예수가 무엇을 증거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전부터 알아왔던 것을 새삼 깨달은 것으로 이야기 한다.
즉 전에 말한 것처럼 땅의 일을 말하여도 믿지 않는 즉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땅의 일이라는 것은 전부터 있어왔던 말씀이다. 즉 이미 그들이 알고 있었던 말씀이다. 그 말을 예수님이 와서 내가 그라고 해도 그들은 믿지 않았다. 영접치 않았다. 그러나 지금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영접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장막 안에서 하나님과 생명의 교제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들에게 생명이 있는 것이다
(30-38)절에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가 나온다. 예수의 양식은(생명)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 했다. 즉 예수는 자기 자신을 소개하기를 보냄 받은 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일은 보내신 분의 뜻이고 그분의 일이다. 즉 예수의 말은 보내신 분의 말이다.
또 대화중에 추수에 관하여 이야기 하신다. 이 추수는 농사의 추수가 아니다. (36절)에 말한데로 영생에 이르는 열매들의 추수이다 이 영생에 이르는 열매들에 대하여 뿌리는 자가 나오고, 거두는 자가 나온다. 거두는 자는 이미 삯을 받았다고 했다. 여기서 씨를 뿌리는 자는 하나님이실 것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자들을 보내어서 씨를 뿌렸다.(말씀) 거두는 자들은 다음 구절을 보면 제자들(교회)이다. 그들이 받은 삯은 성령(곧 생명)이다.
그런데 다음 구절을 보면 다른 사람들의 노력이 나온다. 즉 거두는 제자들 외에 다른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즉 이들은 씨를 뿌리러 왔던 자들이다. 여기에는 세례 요한도 포함될 것이다. 그러면 이들의 노력은 무엇일까? 무엇을 위한 노력일까? 그들이 뿌린 것(말씀)은 무엇일까? 요한복음의 문맥으로 보자면 그들이 뿌린 말씀은 하나님과의 교제, 즉 빛과 생명이다. 이제 추수의 때가 되어서 이 빛과 생명의 교제가 무르익은 때가왔으므로 그 교제를 이루는 추수의 일이 제자들의 일이고 교회의 일이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과의 빛과 생명의 교제, 이전에 없었던 온전한 교제를 이루는 곳이다. 하나님의 아들 되어 하나님을 친히 대면하는 진리 가운데 이루는 교제이다. 하나님의 장막 안에서 영생의 영으로 교제하는 교제이다.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해 오신분이 예수 곧,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 누구든지 이 예수를 믿는 자는 그 빛과 생명의 교제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세상은 그를 영접하는 자와 거절하는 자로 나누어 질 것이다. 이것이 요한복음이 말하는 하나님이 나라와 세상이다. 또한 빛과 어두움이고, 생명과 사망이다.
(43-54절)에 갈릴리에서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 나오고 있다. 이 사건은 (마 8:5절)과 (눅 7:1절 이하)에 있다. 마태와 마가는 거의 비슷하지만 요한 복음은 상당히 내용이 차이가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이 사람을 백부장이라고 이야기하고 있고 또 하인에 앞서서 예수님께 나왔다. 그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말씀으로 고치신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의 쫓겨남과 믿음 있는 그런 사람들이 천국에 참여함을 이야기 하신다.
누가복음에서도 다르게 이야기를 한다. 이제 이 사람의 종이 병들었는데 이 사람이 예수님께 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보냈다. 이 사람이 우리의 회당도 짓고 좋은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의 뜻을 들어 달라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시는데 예수님께서 오시는 소식을 듣고 이 사람이 하는 말이 나는 너무 천해서 우리 집에 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니까 말씀한 하시면 나을 줄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그를 고쳐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중보적인 입장을 그리고 있으며 두 성경은 그 이방인의 믿음을 강조한다.
그런데 이 요한복음에서는 그렇게 되어 있지를 않다. 여기서는 왕의 신하가 있었는데 그 아들이 병들었다. 와서 말하기를 내려오셔서 내 아들을 고쳐 주시라고 내 아들이 곧 죽게 되었으니까 내려오셔서 살려 달라고 그렇게 요구를 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크도다. 그런 적이 없고 너희들은 도무지 표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하느니라. 이렇게 하고 예수님께서 표적을 나타내셨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믿고 말고 그런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여기서는 믿음 없는 것이 오히려 정죄된다.
무슨 말이냐면 43-45절을 보면 친히 증거 하시기를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갈릴리로 가셨는데 갈릴리 사람들이 영접했다. 그러면 이 영접했다는 말은 그들이 다 믿었다는 말인가? 요한복음에서는 그렇게 해석되지를 않는다. 예루살렘에서 많은 표적을 행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속을 잘 아신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에게 자기를 의탁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고향에 돌아와서 자신에 대해서 증거 하셨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그런데 거기서 한 사람이 나왔다. 그 사람은 갈릴리 사람은 갈릴리 사람인데 나사렛 사람은 아니고 가나 사람이다. 그런데 가나는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고 그렇게 말씀하심으로 54절 이것은 예수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 첫 표적과 이 표적을 연결시켜서 예수님께서 누구 신가? 표적에서 자기를 나타내신 분이 누구 신가? 하는 사실을 연결시켜서 복음서 기자는 증거를 해주고 있다.
거기 왕의 신하가 있다. 왕의 신하인가 하는 것을 보니까 이방인 중에 존귀한 자가 아닌가 그렇게 이해가 된다. 그 사람이 예수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아들을 고쳐 주라고 원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한다고 책망하셨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하고 고쳐 주셨다.
이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갔다. 이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 이 문장에서는 직접 설명을 하고 있지 않다. 가다가 종들이 오는데 그들이 하는 말이 아이가 살았다. 그래서 물었다. 몇 시에 살았냐고 물어 보니까 예수님이 네 아들이 살았다 할 때와 똑 같은 줄 알고 그와 온 집이 다 믿었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처음 믿음과 두 번째 믿음은 분명히 다르다. 이런 것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개인들의 믿음을 점점 성장시키는가? 그런 말을 지금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와서 간절히 고쳐 주기를 원했을 때도 그는 온전히 믿는 사람이 아니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했을 때도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전체의 구조에서는 예수님께서는 땅에서 증거하고 제자들이 믿지만 아직도 그들이 믿음과 지식은 온전하지를 못한다. 그가 위로 가시면 더 좋은 보혜사를 보내실 것이고 더 좋은 보혜사로 성령이 오시면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세상에 자기를 증거 하실 것이다. 그것이 온전한 믿음이다.
그러면 여기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로도 그렇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 도마는 말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내가 그의 못 자국에 손을 넣어 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 만져 보기 전에는 나는 믿을 수가 없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나를 만져보라. 그 때 도마가 고백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너는 나는 보는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되도다.
그러면서 요한복음 기자는 말하기를 내가 이런 것을 기록한 것은 너희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고 그런다. 자기 기록을 거기다 붙이고 있다. 예수님을 그렇게 따라 다녔던 제자들의 믿음까지라도 아직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이 만져 보았다. 그리고 믿었다. 그러나 그 믿음도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너는 나를 만져 본고로 믿느냐? 나를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되도다. 그리고 이 글을 기록하여 교회에게 증거한다. 즉 교회는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이다. 너희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고 내가 이 사실을 기록하노라. 그렇게 교회에 복됨을 말씀하셨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더 복되다 하는 말은 그냥 안 보고도 믿으니까 마음이 더 순수하고 신뢰성이 더 간다. 보는 사람은 의심이 많고 그런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은 땅에 속한 것과 하늘에 속한 것을 대비시킨다. 땅에 속한 것은 모세에게 속한 것이요 그림자요 하늘에 속한 것은 아들에게 속한 것이요 참이요 진리요 빛이시다.
예수님 제자들까지라도 어떤 의미로 땅에 속한 자들이었다.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진 것처럼 아무리 주를 위해서 생명을 바치리라고 고백한 베드로도 그렇게 살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위로부터 오셨지만 아버지께로 가셔야 되고 그가 가셔서 아버지께로부터 영광을 받기 전에는 성령은 임하실 수 없는 것이라고 그렇게 요한복음에서 증거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로까지라도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가지 아니했노라.
이렇게 요한복음의 목적지는 성령의 오심에 있다. 즉 영원토록 함께하는 교제에 있는 것이다. 성령의 오심을 통해서 비로소 완성된다. 그런데 이 성령의 오심은 예수의 부활과 하늘로 올라가심이 있어야 오는 것이다. 지금 이글을 읽는 교회에는 이미 성령이 오셨다. 그러므로 교회의 복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어떤 의미로 처음부터 믿음을 요구하고 있지를 않는다. 요한복음 서론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는 만물을 지으신 말씀이요 아버지와 함께 대면해 계셨던 분이신 데 그가 모든 만물을 지으시고 그가 지으신 세계에 빛과 생명으로 계셨지만 세상은 그를 영접하지 아니했고 그리고 자기 백성 중에 모세 제도를 통해서 증거 하셨지만 그들도 믿지 않았다. 주님께서 자기 백성 중에 찾아 오셨지만 그들이 영접하지 아니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그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 되는 권세를 주시는 것이다. 이 일을 이루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예수는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시는 분이시다.(영원 토록 솟아나는 샘물)
그러니 요한복음은 그들의 믿음에 응답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 없는 세상에 친히 하나님의 아들이 임하셨다. 임하셔서 다른 사람들을 의탁하지 않으시고, 보내신 분의 뜻을 온전히 이루심으로 하나님과 자기 백성의 온전한 생명의 교제의 길을 여셨고, 더 나은 보혜사를 통해 그 교제를 완성하신 분으로 이야기 한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예배이고, 요한복음의 구원이다.
여러분 안에 계셔서 더 좋은 보혜사로 주님 오시도록 까지 여러분 계셔서 영원한 생명의 교제를 주신 분 그분이 여러분에게 증거하고 있다. 그냥 증거 하신 것이 아니라 너희는 내 안에 있고 나는 너희 안에 있노라.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처럼 너희들은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영원한 생명의 표적과 증거로 여러분 안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 그리고 죽음의 권세를 스스로 영원히 이기신 분은 여러분 안에 계신 영이시오. 주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여러분 안에 계신 주님의 영은 주님처럼 영광스런 생명으로 새롭게 살리실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겠고 또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생명의 성령이 여러분 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의 증거는 지금도 내가 병들었는데 하나님이 고쳐 주셔야 나를 사랑한다는 표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반복을 위해서 쎈풀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자기를 증거 하심으로 우리로 볼 필요 없이 만져 볼 필요 없이 하늘의 영광으로 오신 분을 믿도록 그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이처럼 주님께서 표적을 행하셨고 사도들은 기록해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런 표적으로 살지를 않는다. 지금도 죽은 자들이 살 수 있다. 병들어서 죽게 된 자들이 살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한다는 표적으로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는 표적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베푸신 긍휼의 표적일 뿐이다. 복음의 증거를 통해서 표적은 완성되었다. 부활하신 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영원히 우리 안에 생명의 표적과 증거로 계심을 통해서 표적은 영원히 완성되었다.
지금도 많은 교회들이 성경에 이런 증거를 들어서 나는 예수 믿고 기도하니까 이런 표적이 있노라. 또 이런 증거가 있노라. 이런 증거가 없는 것은 별로 확신이 없는 것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은 성경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반복된 사랑의 표적이 없으면 배교할 사람들이다. 우리들은 그런 표적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의 성령이 우리 안에 주어져 있다. 이것이 교회가 누리는 영원한 표적이요 증거다. 여러분들은 이제는 보지 않고 믿는다. 표적 없이 믿는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표적이 완결되었기 때문에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