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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을 통해 본 새천년과 한국종교의 과제
유동식
< 이 글의 필자 유동식 박사는 감리교신학대학과 보스턴대학교 대학원에서 신학을, 일본 고쿠가쿠인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감리교신학대학 교수와 연세대 신학대학 신학과 교수를 지냈다. 저서로는 『한국 무교의 역사와 구조』(연세대 출판부, 1989), 『한국 신학의 광맥』(다산글방, 1990),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연세대 출판부, 1997), 『한국감리교회의 역사 1권 ․ 2권』(기독교대한감리회, 1997) 등이 있다. 1998년 3월에는 제 39회 3 ․ 1문화상 인문사회과학 부문 학술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으며 최근에는 문화예술과 종교를 접목시키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
1. 역사의 전환점과 무언의 계시
우리는 이제 옛 천년을 마감하고 새천년의 아침을 맞이하게 되었다. 전 세계는 밀레니엄 축제로 들떠 있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문에서는 매일같이 밀레니엄이라는 표어가 난무하고 있다.
여기에는 몇 가지의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첫째는 앞으로 전개될 새천년 시대의 인류 문화에 대한 기대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지난 천년의 문화가 초래한 위기의식이 뒷받침하고 있다. 곧 오늘의 문명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불안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이 전개되는 미래에 희망을 걸고 있다. 또 하나는 우리들의 역사를 보는 시야가 확대되었다는 사실이다. 요즘 들어 21세기라는 말을 별로 쓰지 않는다. 100년 단위가 아니라 1,000년 단위로 인류의 문화와 문명을 고찰하려고 한다. 비록 과학기술 문명이 급속도로 발전해 간다고 해도 인류의 문화는 천년 단위로 변해 간다고 보는 것이다.
밀레니엄이란 천년왕국을 뜻하는 기독교적 개념이다. 재림한 그리스도가 사탄을 감금하고 부활한 성도들과 함께 천년 동안 세상을 다스린다는 성서적 개념이면서 (묵시록 20:1-6), 천년을 단위로 인류 문화의 패러다임 변화를 보고 또한 예측하려는 종교적 개념이기도 하다.
문화의 패러다임 변동은 대체로 부정적 위기를 매개로 일어나는 것이며, 종교는 그 위기 극복의 길을 제시해 왔다. 그런데 성서에는 두 가지 유형의 제시 양식이 있다. 하나는 예언문학적 양식이고 또 하나는 묵시문학적 양식이다. 예언문학은 과거의 하나님과의 계약을 상기시키며 현재의 회개를 통해 위기를 극복하도록 충고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율법에 입각한 윤리적 전환이다.
“공의가 물같이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라”고 한다.(야모스 5:24). 기원전 8세기의 예언자의 말이다. 그러나 이와는 대조적으로 묵시문학은 시각적인 환상을 통해 미래에 일어날 사실을 열어 보임으로써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도록 한다. 이것은 이성과 율법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적인 직관을 통해 절대자의 뜻을 헤아리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그 전형적인 것이 기원전 2세기경의 다니엘서와 기원후 1세기 말의 요한계시록이다.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다”고 했다.(계시록 21:1)
오늘의 문화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은 먼저 윤리적 정의실현을 촉구한다. 그러나 인간성이 갖는 무능과 한계를 아는 절대자는 이것을 넘어선 초합리적인 하늘의 자비에 의존하도록 계시한다. 그것은 시각적인 형상을 통한 묵시로 나타난다.
환상은 하나님의 뜻을 표현한 일종의 예술적 조형언어이다. 예술은 인류에게 보편적인 조형언어이다. 따라서 형상을 통한 계시는 반드시 유대인이나 기독교를 통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방인인 바벨론의 왕 느브갓네살에게도 환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갖는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것을 하나님의 계시로 해명한 이는 유대인인 다니엘이었다.
각 민족에게는 그들의 문화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고 생각한다. 문화의 중심에는 종교와 함께 그 표현인 예술이 있다. 따라서 한국의 예술문화사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말씀하신다고 믿는다. 다만 이것을 보고 해독하는 것이 기독교인에게 주어진 과제이
다.
한국문화의 현주소는 동양의 전통문화와 서양문명이 마주친 교차로에 있다. 그리고 이것을 상징한 두 거대한 예술작품이 동서에 놓여 있다. 곧 동쪽 토함산에 건립된 <석굴암>과 서울 태평로 끝자락에 건립된 <로댕갤러리>가 그것이다.
여기에 겉들여 또 하나의 걸작을 지적한다면 1998년에 정주영씨가 500마리 소떼를 앞세우고 판문점을 통해 남북을 건너지른 행위예술이다. 그뿐이 아니다. 옛 천년을 마감하는 지난해 연말에 10만대의 자동차가 동해안을 향해 해맞이 행렬을 이루었다. 그러고 보면 한반도 위에 우리는 거대한 십자가를 그린 셈이다. 한반도는 실로 동서남북의 문화와 이데올로기의 만남의 장이고, 20세기 문명과 새천년 문화의 본질을 표현한 하나의 거대한 예술작품이다.
예술을 무언의 계시이다. 한반도에서 우리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오늘의 계시를 읽어내야 한다. 새천년이 열린 현 시점에서 밀레니엄이 갖는 문화적 의미와 절대자의 경륜을 읽어내야 하는 것이다.
2. 현대 문명과 <지옥의 문>
지난 천년기를 마감하는 1999년 한여름 서울 태평로 한 끝에는 서구문명을 중심으로 한 현대문화를 상징할 하나의 작품이 설치되었다. 남대문 옆 삼성프라자에 건립된 로댕갤러리 안에 6미터 높이의 <지옥의 문>이 안치된 것이다.
남대문 앞으로 뻗어나간 남대문로 끝에는 한국은행이 있다. 말하자면 황금의 상징이다. 다시 남대문 옆으로 뻗어 나간 태평로의 연장선상에 세종로가 있고, 그 끝에 정부의 중앙청사가 있다. 말하자면 집단권력의 상징이다. 남대문은 바로 이 두길이 마주친 곳에 있고, 로댕갤러리는 그 옆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황금과 권력은 사회와 국가 운영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기주의와 결부되었을 때 황금은 바알이라는 우상신으로 변하고, 집답권력은 레비아탄이라는 우상신으로 변한다. 이 두 우상신이 만난 곳에 지옥의 문이 있다. 남대문 옆에 로댕의 <지옥의 문>을 안치했다는 것은 지난 천년의 세계 문화의 본질을 표현한 하나의 놀라운 설치미술작품이다.
르네상스 이후 인간은 봉건사회에서 해방되었고, 인간의 이성은 과학기술문명을 발전시켰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형성 등이 인간의 생활조건을 풍요롭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 약육강식의 제국주의와 그칠 줄 모르는 전쟁, 그리고 무서운 살생무기의 대량생산과 생태계의 파괴는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그뿐이 아니다. 인간이 세계의 주인으로 등장하면서 점차 무신론적 물질만능주의와 관능적인 쾌락주의가 지배하는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물질적, 정신적으로 비인간화를 촉진하며, 인간성이 상실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지난 밀레니엄의 실상이다.
현대문명의 본질을 직감한 이는 조각가 로댕(1840-1917)이었다. 1880년 프랑스 정부는 그들이 새로 세울 장식미술관의 정문 제작을 로댕에게 위촉해왔다. 내용은 단테의 『신곡』전체를 묘사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지옥편에 집중했다. 이것은 그가 직감한 당시 문명의 실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단테의 “지옥의 문” 위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는 간판이 달려 있었다.
나를 지나면 우환의 도시가 있다.
나를 지나면 영원한 고난이 있다.
나를 지나면 멸망의 백성이 있다.
......
이 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지옥편 3: 1-9)
지옥이란 하나님도 희망도 없이 사는 저주받은 사람들의 세계이다. 신음하고 있는 현대문명은 이제 지옥의 문에 매달려 있다.
100여 명의 인체들이 조각되어 있는 <지옥의 문>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상인방 중앙에 앉아 있는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죽음을 향한 인간의 운명과 오늘의 문명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며, 슬픔과 체념에 찬 표정을 짓고 있다. 어쩌면 이성의 승리와 패배를 맛본 현대문명의 표정일지도 모른다.
로댕이 “지옥편”에서 직접 따온 주제로는 왼쪽 문짝 하단부에 조각된 “우골리노와 그의 자식들”과 “파오로와 프란체스카” 둘 뿐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체의 사상적 기저를 이루고 있다.
왕권을 노렸다가 정치적 음모에 휘말려 자식들과 함께 피사의 탑 속에 감금되어 굶어 죽는 우골리노는 굶주림에 못 견뎌 자식들의 살을 뜯어 먹으려 하고 있다. “고뇌에는 지지 않던 나도 배고픔에 지고 말았다”는 것이 그의 고백이다(지옥편 33). 정치적 음모와 경제적 전쟁 속에 인간성을 잃은 현대문명의 실상을 열어 보이고 있다.
지옥의 두 번째 계곡은 정욕의 범죄자들이 가는 곳이다. 성주에게 시집 간 프란체스카는 잘생긴 시동생 파오로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들이 첫 입맞춤을 하려는 순간 이를 본 남편이 두 사람을 다 찔러 죽였다. 그로부터 두 영혼은 항상 함께 지옥에서 떠다니고 있다. 만족과 성취의 끝을 알지 못하는 에로스와 욕망의 상징이다. <지옥의 문> 오른쪽에 새겨진 것으로 “허무한 사랑”이 있다. 양손으로 머리를 쥐고 엎드려 있는 젊은 여인 위에 등을 대고 드러누워서 두 팔을 뻗어 여인의 가슴을 잡으려는 남자의 상이다. 갈망하지만 영원히 도달하지 못하는 에로스의 사랑이다. 이상이라는 이름의 끝없는 쾌락을 추구하는 현대문명의 상징이기도 하다. 지옥은 인간 영혼 속에 있는 고통과 채워지지 않는 욕망의 세계이다.
3. 석굴암과 동방의 등불
새천년에 희망을 걸게 하는 작품이 있다면 그것은 8세기에 조성된 석굴암의 예술이다. 이것은 비록 불교를 소재로 한인들이 만든 작품이지만 여기에는 인류의 미래를 바라보게 하는 하나님의 계시가 들어 있다.
석굴암을 창건한 김대성은 나라의 재상이요 동시에 훌륭한 예술가였다. 그러나 석굴암은 한 개인의 작품이 아니라 우리 민족 전체의 마음을 표현한 예술작품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것은 한 나라와 민족의 작품이 아니라 “동양의 종교와 예술의 귀결”이었다(야나기 무네요시). 이 작품에서 종교와 예술을 하나가 되어 있다.
석굴암이 위치한 곳은 동악 토함산이며, 그곳에 안치된 부처님은 다시 동쪽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동방에서 떠오르는 햇빛을 몸으로 받아 이것을 온누리에 비추어 주기 위해서이다.
동방을 이(夷)라고 한다. 이는 뿌리이다. 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한다. 만물은 뿌리에 의존하여 자라난다(최치원).
빛이 왕성하고 충실하여 온누리를 빛나게 하는 것으로는 새벽 해보다 고른 것이 없고, 기가 온화하고 무르익어 만물을 기르는 것으로는 봄바람보다 넓은 것이 없다. 이 큰 바람과 아침 해는 모두 동방에서 저절로 나온 것이다(최고운).
동방에서 떠오르는 햇빛은 어질고 광명한 생명의 뿌리이다. 동방의 빛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생명이다. 부처님은 이 빛을 받아 온누리에 반사하는 거울이다. 거울은 자기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실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것을 다시 반사할 수 있다. 아집에 사로잡혀 있는 한 진실을 비추어낼 수 없는 것이 거울이다. 부처님은 무아(無我)의 거울이다.
석굴암의 본존불이 받아 세상에 비추는 동광(東光)의 실상은 자비의 사랑과 지혜의 자유와 행원의 평화이다. 이것을 상징한 것이 둥근 주실벽면에 조작된 관세으보살과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다. 자유와 평화와 사랑이야말로 동방으로부터 떠오르는 하늘의 빛이요,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을 받아 실현할 때에 새천년에는 평화의 새하늘과 새땅이 전개될 것이다.
석굴암의 불상을 본 일본의 야나기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많은 불상을 보아왔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신비에 가득찬 영원한 불상의 하나이다. 나는 이 불상에서 조선이 이해해 온 불교가 얼마나 깊고 컸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종교와 예술은 하나가 되어 있다. 사람은 미에서 진리를 맛보고, 진리에서 미를 맛보는 것이다.
예술의 사명은 영원한 종교를 드러내 보이는 데 있다.
조선에는 유구한 예술적 사명이 있는 것이다.(『조선과 그의 예술』중에서)
인도의 시성 타골은 또 이렇게 노래했다.
아시아의 황금시대에
코레아는 등불을 들었던 손의 하나였다.
이제 그 등불이 다시 점화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동방에서 찬란히 빛날 문화를 위하여.
신라는 당나라와 함께 아시아의 문화를 꽃피게 한 나라였다. 그러나 신라나 한국이 곧 동방의 등불은 아니다. 우리는 다만 등불을 높이 들었던 손들(lamp bearers)중의 하나였다. 동방의 등불은 동쪽에서 떠오르는 하느님의 빛이다. 우리는 이것을 받아서 찬란한 문화를 만들었을 뿐이다.
새천년을 맞이하는 온 누리는 문화와 역사를 빛나게 할 동방의 등불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밝힐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우리는 모두 석굴암의 부처님이 되어야 한다. 곧 모든 사욕과 집착을 떠난 무아의 거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난 천년의 문화가 오늘의 위기와 어두움을 초래한 자아 중심의 천년기(The ME Millenium)였다면, 다가오는 새천년에서 밝은 세상을 기대하게 하는 것은 남을 생각하는 무아의 문화이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사랑의 화신인 그리스도가 계셔서 살고 있다고 고백해야 한다(갈라디아서 2:20). 이것이 무아의 종교인이다. 새천년에 밝은 희망을 초래하는 이는 무아의 사람들이다.
4. 한국종교의 과제와 사명
새천년이 밝아오는 2000년 1월 1일 파주 임진각 앞뜰에는 한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거기에서 0시를 기해 백남준의 <DMZ 2000> 퍼포먼스가 있었다. 임진각이란 남북 사이의 장벽을 뚫고 올라간 500마리 소 떼가 그린 수직선과 동서를 가로지른 해맞이 행렬이 그린 수평선이 만든 거대한 십자가의 중심을 상징하는 곳이다. 그곳에 설치된 무대의 서쪽에는 서양문명을 상징하는 악기 첼로를 그린 형광 그림이 설치되어 있고, 동쪽에는 동양문화를 상징하는 비파의 형광 그림이 설치되어 있다. 남쪽을 향해 열린 무대의 배경을 만들고 있는 것은 남북을 가로막는 벽돌 벽이었다. 무대 한가운데 꿇어앉아 있는 사람은 등에 첼로 줄을 늘어뜨리고 있다. 말하자면 인간 악기이다. 의자에 앉아 있는 악사가 활을 들어 그 악기를 연주했다. 곡목은 통일 행진곡이다. 동서남북의 화합과 통일을 노래하는 연주였다. 음률이 화합을 초래한다. 그러나 그 음률을 내는 것은 악기가 아니라 인간이다. 인간 악기는 이것을 상징한다.
마지막에는 모든 출연자들이 무대에 등장했을 뿐만 아니라 외국인이 섞인 관객들까지 등장하여 무대를 꽉 채운 가운데 통일의 노래를 합창했다. 이것은 실로 한국과 세계문화, 그리고 그 실체인 모든 종교들이 지닌 오늘의 과제와 사명을 제시한 위대한 행위예술이었다. 한마디로 인간 사이의 모든 장벽과 종교간의 장벽과 이념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하나의 새문화 창조를 향해 전진하는 새천년을 계시한 예술작품이었다.
동서의 문화는 대립할 것이 아니라 서로 화합함으로써 제3의 차원 높은 새로운 세계문화를 창조해야 한다. 남북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서로 싸울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하고 화합하는 가운데 민족을 하나로 만들고 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것이 되어야 한다. 모든 종교들은 서로 배타적인 독선적 신조를 내세울 것이 아니라 종교본연의 목적에 따라 본래적인 인간 회복을 위해 서로 협력해야 한다. 비인간화하는 모든 세력은 종교의 공동의 적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종교들은 이미 3 ․ 1독립운동을 통해 종교간의 협력 가능성과 당위성을 입증한 바 있다.
<DMZ 2000>의 행위예술이 계시한 바와 같이 이제부터 전개될 새천년의 인류문화의 과제는 화합과 평화 창조에 있다. 그리고 그 과제 수행을 담당할 주역은 한국의 종교인들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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