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정기술의 역사
우리나라에서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 AT)이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전이다. 그만큼 대중들에게 있어서적정기술이라는 단어는 생소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외된 90퍼센트를 위한'이라는 수식어는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뒤흔들어 놓고 있다.
인도의 간디는 적정기술(중간기술)운동의 아버지로 불린다. 간디는 대자본에 의한 고도의 기술 집약적이며 대량생산 체제를 반대하며 이에 대한 대안으로 마을을 기반으로 한 지역 단위의 산업 활동을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간디의 주장과 정신을 확장시킨 사람은 독일 태생의 경제학자 E.F 슈마허(Ernst Friedich Schumacher)였다. 1950~60년대 슈마허의 주장과 제안들을 정리해놓은 1973년에 출간된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책을 통해 '중간기술'이라고도 불리는 적정기술이라는 개념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55년 버마 정부의 경제 고문으로 일하던 슈마허는 저개발국을 상대로 한 서양 경제학의 잘못된 점들을 지적하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인도를 비롯한 중간기술이 필요한 나라들의 실정에 필요한 일들을 활발하게 진행하였다. 1965년에 ITDG(중간기술개발그룹)을 설립하면서 농촌개발을 위한 프로젝트들을 진행하기도 했다. 과거 1960~1970년대 산업화 시절, 우리나라 역시 적정기술(중간기술)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적정기술은 저개발국을 위한 기술에 머무르지 않았다. 선진국에서도 에너지 및 환경문제들이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1970년대 이후 미국을 비롯한 OECD 국가들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적정기술이 도입되기도 했다. 하지만 거대한 산업자본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첨단기술의 압력으로 인해 오래가지 못하고 폐기처분되는 신세가 되었다. 이후 적정기술은 1980년대를 지나면서 제3세계 지원을 목적으로 다시 부활하는데, 물론 그간에도 민간 단위에서의 활동들은 지속되었다.
우리나라에도 최근 들어 주로 저개발국 지원을 위한 적정기술을 기반으로 한 움직임들이 활발하다. <적정기술: 36.5도의 과학기술(나눔과기술 지음)>이란 책을 발간한 국내 과학기술자들의 모임 '나눔과기술'을 비롯해 크고 작은 단체들이 아프리카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현지에 적합한 적정기술의 개발과 보급에 나서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적정기술은 더 이상 필요없을까? 우리나라 에너지 소비량은 세계 10위권이다. 경제적 측면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지속 가능한 발전 혹은 환경 친화적 사회 구조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따라서 국내 적정기술의 필요성 또한 절실한 형편이다. 물론 그 양상은 다르다. 아프리카에서의 적정기술의 양태와 국내에서의 모습이 같을 수는 없다. 환경적인 측면에서 우리가 오히려 더 절실하다는 생각이다.
적정기술은 양방향 기술이다
적정기술은 주류 기술들에 비해 자원의 소모량이 적고 환경을 고려한 디자인이 가능하며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유지, 보수가 비교적 쉽다. 누구나 참여 가능하고 스스로 만들 수 있으며 주변에서 필요한 자재들을 구할 수 있다. 적정기술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노동 집약적인 기술, 대체 기술, 자조(自助)기술, 마을 수준의 기술, 토착 기술, 따뜻한 기술, 양방향 기술 등으로 말할 수 있다.
소위, 최첨단 기술이라고 하는 것들은 일방적인 기술이라고 볼 수 있는데, 해당 정보를 가진 업체나 국가가 사용자의 양방향 소통을 허용하지 않는다. 사용자는 그저 결과물로 나온 것을 비용을 지불하고 사용하는 것이 고작이다. 고장이 나도 사용자가 고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최첨단 기술들은 공개되지 않을 뿐더러 특허권이라는 높다란 성벽 속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비약적으로 발전한 기술은 장밋빛 슬로건과는 달리 실업을 발생시키고 자원고갈, 공해를 발생시키는 부정적인 측면을 노출시켰다.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첨단기술을 폐끼처분하자는 주장은 아니다. 적정기술이 가진 장점들로 첨단기술이 가지고 있는 독성을 완화할 수 있다.
적정기술은 지속 가능한 방식을 채택한다
값싸고 효율 좋은 화석에너지, 더불어 비약적으로 발전한 기술 덕분에 사람들은 예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누려왔다. 전 세계 어느 곳으로도 단시간 내에 물품 이송이 가능해졌다. 때문에 사람들은 세계화만이 살 길이며 역사 발전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인식하는 듯했고, 이것을 거스를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다.
'지속가능성'이라는 단어가 화두가 된 건 우연이 아니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더 이상 생존하기 힘들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이것은 세계화의 종말을 고하는 큰 울림이다.
우리에게는 전혀 다른 경험이 필요하다. 새로운 경험이 아니라 과거에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기억들을 되살리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적정기술은 지속 가능한 방식을 대안으로 채택하고 있다. 해당 지역의 자연과 사회적 환경을 고려하고 그곳에서 찾을 수 있는 원재료를 우선적으로 사용한다. 그 지역에서 만든 제품들이 그 지역에서 소비되면 노동 집약적 방식을 통해 저렴하게 공급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실업문제가 해결되고, 사람의 소중함, 이웃의 고마움 등을 깨닫게 된다. 적정기술은 바로 인간적인 기술이기도 하다.
-<태양이 만든 난로 햇빛온풍기>(이재열 지음/ 시골생활 펴냄) 가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