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80 슈팅 스타 (Shooting Star), 최초로 전투에 참전하게 된 미국 공군의 제트 전투기)
1947년 미국 육군 항공대에서 드디어 분리되어 미국 공군 (United States Air Force)로 출범하게 됩니다. 하지만 미국의 두번째 제트 전투기인 동시에 미국 공군이 채택한 최초의 제트 전투기로 기록된 록히드 F-80 슈팅 스타의 역사는 미국 공군의 출범 이전부터 시작합니다. 엄격히 따지면 공군의 전신인 육군 항공대가 먼저 사용하는 바람에 기종 名도 F가 앞에 붙기 전에 P가 붙은 이름인 P-80으로 먼저 불리다가 공군 발족과 함께 F-80으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어찌 되었든간에.....육군 항공대가 최초로 채택했던 P-59는 앞글에서 설명드렸듯이 민망할 정도로 실패작으로 끝나버렸습니다. 때는 1943년 2차대전이 아직 끝나지 않았던 때에 미국에 유명한 항공기 제조사인 록히드에 의해 제트 전투기가 설계되고 프로토타입이 제작되어 육군 항공대에 공급되게 됩니다. 놀랍게도 설계 스타트에서 시제기 제작 완료까지 143일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P-80이 양산 버전이 생산을 시작했을 때는 2차대전이 이미 끝난 후였습니다. 불과 몇년 후에 미공군 주력기로 등장하는 F-86 세이버의 V형 날개와는 달리 직선형 날개를 가진 이 전투기는 2차대전 종전 후에 불과 5년 후에 한반도에서 발발한 한국 전쟁에 최초로 투입된 미공군의 제트 전투기로 등록됩니다.(물론 그때는 F-80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지요.)
미국의 최초의 성공적인 터보젯 엔진 전투기이면서 미국 공군의 제트 전투기의 역사를 개막한 의미있는 기종이기도 합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성능에서 한발 앞선 V자 주익(전문 용어로는 SWEPT WING이라 부릅니다.)이 적용된 소련의 Mig-15를 한반도 상공에서 맞닥뜨리게 되자 성능의 열세를 면치 못하게 되고 미그와 동일한 V자 주익을 갖고 실질적으로 미그보다 성능 면에서 앞섰다고 평가 받은 노스 아메리카社의 F-86 세이버에게 서둘러 공군 주력기의 자리를 넘겨줘야 했던 비운의 기종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미 공군과 해군에서 1970년대까지 일부 사용되었습니다.
한국 전쟁 초기에는 북한 공군이 보유하고 있던 소련제 야크-9 (Yak-9) 프로펠러 전투기가 상대였을 때만 해도 2차대전 중에 메서슈미트 제트 전투기와 연합군 전투기들의 상황처럼 스피나나 공격력에서 충분히 우위를 점할 수 있었습다.
(2차대전 후기 소련 공군의 주력기였으며 한국 전쟁 발발과 함께 북한 공군이
사용했던 소련제 프로펠러 전투기 야그-9, F-80과는 상대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한국 전쟁에서 최초로 참전한 소련 제트 전투기 미그-15, 미공군 F-86 세이버가
박빙의 차이로 성능면에서 우위였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미국과 유엔군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1951년 스탈린의 결정으로 한국 전쟁에 투입된 미그-15 제트 전투기는 F-80의 성능을 훨씬 앞서가는 기종이었고 미공군은 서둘러 F-86 세이버로 교체하여 미그 킬러의 명성을 쌓기 시작합니다. 일단 F-86은 얼마 안있어서 심층 분석 할 것이고 오늘은 비운의 기종이긴 하더라도 제트 전투기 역사에서 나름 의미가 있는 F-80에 대하여 차분하게 소개를 해볼까합니다.
설계 및 테스트 단계 - 2차대전 미국 최고의 에이스를 희생시킨 불운의 P-80
(2차대전 중에 루프트바페가 최초의 제트 전투기 Me 262를 투입한 싯점은 1944 4월이었습니다. F-80 설계에
앞서서 Me 262를 입수하여 V자 주익(SWEPT WING)이 고속 비행에 얼마나 효과적인지 미리 발견했다면
F-80의 1자형 주익은 V자형으로 설계되었을 것입니다. 이래저래 나치는 밉지만 그들의 앞선 기술력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습니다....)
미육군 항공대가 붙힌 프로젝트 모델명 XP-80의 이 기종은 순전히 철 프레임과 좁은 직선 주익을 가지고 "트라이사이클 언더케리지" 방식의 랜딩기어(위에 Me 262처럼 앞에 바퀴 하나가 있고 주익에 두개가 있어서 3개의 랜딩기어를 가진 형식)를 가진 설계였습니다. 여기서 2차대전 중에 영국이 개발한 글로스터 전투기와 마찬가지로 XP-80(훗날 F-80) 역시 1자형 주익을 갖게 되는데 이 두기종 모두 V자형 주익을 가진 F-86 세이버나 소련의 미그-15에 비행 고속 비행시 성능이 열세가 되는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F-80 슈팅 스타의 1자 주익)
※"트라이사이클 언더케리지" 방식의 랜딩기어는 Me 262나 F-86 세이버처럼 주익에 붙은 2대의 렌딩기어와 추가로 후미가 아닌 앞쪽에 설치된 방식의 설계를 말합니다.
(나치 독일 치하에 유명한 전투기 제조업체였던 하인켈은 1939년 최초의 터보제트 엔진의
전투기 He 178을 시작품까지 제작에 성공합니다. 하지만 시험 단계에서 취소되었습니다.
XP-80은 훗날 루프트바페가 실전에 투입한 Me 262보다 He78에 더 흡사한 형태입니다.)
1942년 영국의 글로스터 제트 전투기 개발을 직접 보고 서둘러 벨社에 미국의 최초의 제트기를 의뢰하였다가 실망스러운 실패를 경험한 미육군 헨리 아놀드 장군은 더 이상 P-59에 기대할 수 없다는 생각에 또다른 미국 항공기 제조업체인 록히드社에 새롭게 개발 의뢰를 하였습니다. 미육군의 입장에서 마침 불과 1년 후에 유럽 상공에 등장하게 될 루프트바페의 최초의 제트 전투기 Me 262가 현재 프로토타입 단계상태에서 시험 비행 중이라는 정보까지 듣게 되자 1년 전 벨社와 얘기하던 것보다 훨씬 더 조바심을 내면서 190일내로 시작품 제작을 마치고 캘리포니아에 뮤록 항공 기지로 가지고 오라는 요구를 하였습니다. 엔진은 1년전 P-59의 경우와 동일하게 영국 터보제트 엔진을 사용하는 조건이었습니다.
(영국의 할포드 터보제트 엔진 - 최초의 시제기 XP-90에 장착된 엔진입니다.)
록히드 설계팀은 영국제 할포드 H-1B(훗날 하빌랜드 고블린으로 불림) 터보제트 엔진을 사용하는 전제 하에 설계에 들어갑니다. 설계팀은 28명의 우수한 엔지니어들로 선발되었고 전설적인 항공 엔지니어 글레어런스 "켈리" 존슨이 팀을 이끌게 됩니다.
(록히드社의 걸작 전투기 P-38 라이트닝은 바로 XP-80 개발팀을 이끌었던
클레어런스 "켈리" 존슨의 작품입니다. 그는 훗날 초음속 정찰기로 냉전시대
아이콘이 되었던 U2기를 개발한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스컹크 웍스"(Skunk Works)라고 불리던 이들 팀은 10년 후에 F-104 스타파이터 전투기 개발의 주역이 되기도 합니다.
(F-104 스타 파이터 전투기, 이 전투기가 2차대전 후에 독일 공군에게 선택되려고 할 때 그 성능에
대해서 완강하게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던 사람이 바로 2차대전 최고의 격추왕이자 전쟁 영웅으로
당시 독일 공군에 참여했던 에리힉 하르트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도리어 그가 독일 공군을 떠나 야인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빌미를 제공합니다. - 이야기가 너무 산으로
간 듯 하군요.......)
켈리 존슨 팀장은 6월 중순 디자인 제안을 제출했고 프로토타입 시제기는 143일만에 제작된 셈이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극도의 보안이 유지되었고 이 작업에 동원된 130명 이상의 인원 중에서 5명 정도의 소수 인원만이 자신들이 개발하는 물건이 제트 항공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영국에서 시제기에 장착할 할포드 터보제트 엔진을 가지고 온 영국 기술자들조차 철저한 보안이 요구되었습니다. 하지만 처음 도착한 엔진을 시제기에 장착하고 엔진 가동을 하였을 때 엔진이 고장나버려서 두번째 엔진을 영국에 요구해야 했습니다.
(P-80 최초의 프로토타입 시제기 XP-80 (별명 룰루 벨)
두번째 엔진이 도착하여 결국 완성된 최초의 프로토타입은 별명을 "룰루 벨"(Lulu-Belle)이라 불렸고 최초 비행은 1944년 1월에 이루어졌습니다. 시험 비행이 끝난 후 존슨 팀장은 "이것은 괭장한 시험 비행이었습니다. 우리 비행기는 성공이었습니다. 그것도 독일놈들이 그동안 제트 전투기 개발에 있어서 앞서 있었던 거리를 좁히는 대단한 성공이었습니다!"라고 자화자찬을 늘어놨습니다.
한편 이 과정에서 영국이 자신들의 제트 항공기 개발 중에 얻은 know how라고 하면서 제공해준 기술적 데이타 리포트는 전혀 쓸모없음이 밝혀졌습니다. (같은 연합군 입장이었지만 영국조차 미국이 자신들이 고생하며 벌려놓은 제트 항공기 기술의 차이를 선선히 좁혀줄 생각은 전혀 없음이 입증된 셈입니다. 사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태도인지 모르겠지만.....
XP-80의 속도는 시속 502마일(시속 808km)까지 이르렀으며 미 육군 항공대가 갖고 있던 비행기 중에서 터보제트 엔진으로 시속 500마일을 넘는데 성공한 첫번째 기종이 되었습니다. 당시에 프로펠러기로는 P-47 선더볼트 전투기를 특별히 개조하여 속도를 증가시켜서 시속 502마일까지 기록한 바 있습니다.
두번째 프로토타입 XP-80A는 보다 큰 사이즈의 제너럴 일렉트릭 I-40 엔진 (성능이 개선된 롤스 로이스 엔진)을 장착하게 됩니다. 2기의 XP-80A가 제작되었고 첫번째 시험기는 "그레이 고스트"라 명명되었고 두번째 시험기는 "실버 고스트"라고 명명되었습니다.
이들의 첫번째 시험 비행은 뜻밖에 매우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설계 상의 결함들은 곧바로 발견되었고 테스트 프로그램 상에서 수정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최초의 프로토타입 XP-80에 대해서 록히드社 개발팀조차 긍정 일색의 자평을 하면서 떠벌렸던 것에 비하면 두번째 시제기 XP-80A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로 얼룩져 버렸습니다. 선임 시험 조종사였던 미로 부컨은 영국 할포드 엔진을 장착했던 최초의 시작기 XP-80을 조종할 때 느낌과는 전혀 달랐고 지금 두번째 시작기는 매우 실망스럽다고 평가했습니다. 두번째 시작기들은 임시였지만 더 무겁지만 강력한 엔진을 장착하는 바람에 XP-80보다 무려 25%나 무거워졌습니다.
(록히드 선임 시험 조종사 미로 부컨 (1903년~1944년) 1944년
10월 P-80 시험 비행 도중 추락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값진 희생으로 미국 제트 전투기 시대는 개막을 하게 됩니다.)
P-80 시험 비행은 초기 독일 루프트바페의 제트기들의 시험 비행이 그랬듯이 매우 위험스러웠습니다. 1944년 10월 선임 조종사 부컨은 세번째 시작기 YP-80A 시험 비행 도중 추락 사고로 사망하게 됩니다. 두번째 시작기 중에서 그레이 고스트는 이듬해인 1945년 3월 시험 비행 중에 추락하여 완파되버립니다. 다행히 이때는 시험 조종사 토니 르비어는 비상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사망한 부컨에 이어서 선임 조종사로써 임명되었던 르비어는 비행 중에 터빈 엔진 속에서 회전 날개가 부서지면서 꽁무니에 배출구에 치명적인 파손을 일으킨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이 결함으로 인해서 르비어는 불시착을 하였고 심하게 등을 다치게 되어 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용감한 조종사는 6개월 후에 회복되어 다시 자신의 보직으로 돌아왔습니다.
(리차드 봉 소령 (1920년~1945년) 미국 최고의 전투기 에이스,
확인된 일본군 전투기 격추 댓수 40대.)
(미육군 항공대 소속 리차드 봉 소령은 2차대전 중 그의 애기인 록히드 P-38
전투기를 몰고 일본군 전투기 40대를 격추시킨 미국 조종사 중 최고의 기록을
수립하였습니다. 기체 앞부분에 부착된 사진은 그의 아내 마지의 사진입니다.)
2차대전 미국의 최고 격추왕으로 기록된 리차드 봉 소령은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던 1945년 8월 6일 전쟁터도 아니고 미국 본토에서 P-80의 시험 조종사로 비행 중에 사망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전쟁 중에 수많은 공중전에서도 살아남았던 역전의 용사인 그가 어처구니 없이 1년전에 부컨의 죽음의 원인과 동일하게 메인 연료 펌프 불량이 원인이 되어 추락사한 것입니다. 1년 전에 부컨의 사고 후에 연료 펌프 결함이 원인임을 발견한 록히드 개발팀은 펌프의 불량을 백업 해주는 시스템을 추가하여 결함을 해결했다고 믿었으나 리차드 봉의 사고 후에 조사한 결과 그가 가뜩이나 불안한 연료 펌프를 작동하면서 본인의 작동 실수도 있었지만 여전히 불안정한 연료 펌프의 문제점이 그의 죽음의 원인이었습니다. 기체가 거꾸로 뒤집어지면서 그는 비상 탈출의 기회를 놓쳤고 다음 순간 그를 태운 P-80은 지면에 충돌하며 대폭발을 일으켰습니다. 불과 25세의 젊은 나이에 이 전쟁영웅의 최후는 너무나 허무했습니다.
(1945년 8월 6일 2차대전 미국 최고의 에이스 리차드 봉은 P-80 제트
전투기의 시험 비행 중에 추락사를 당합니다. 사진은 당일 추락 사고
직후 산산히 부서진 기체 잔해들의 모습입니다.)
P-80 (F-80) 실전 투입
여전히 기체의 신뢰성이 불안한 상태였던 1944년 말에 세번째 시작기 YP-80A 12대가 제작되었는데 1대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록히드 선임 조종사 부컨의 추락 사고로 파괴되었고, 공중 촬영용으로 개조했던 1대는 12월에 추락하여 완파되어버립니다. 4대는 실전 테스트를 위해 유럽으로 보내지는데 2대는 영국으로 나머지 2대는 아직 전투 지역인 이태리에 미육군 제1비행단으로 보내집니다. 이듬해 1월 28일 영국에서 프레드릭 보르소디 소령이 시험 조종을 하던 1대는 또 다시 추락하여 조종사는 사망합니다. 결국 영국에 보내진 나머지 1대는 일체 비행 임무가 주어지지 않고 영국 공군 기지 구석에 쳐박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1945년 1월에서 3일 사이에 이태리로 보내진 2대의 YP-80A는 제한적으로 전투 임무에 참여하게 되는데 전쟁 말기에 루프트바페가 투입한 제트 정찰기 아라도 Ar 234에 대한 요격 임무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공중전이나 그 비슷한 상황도 벌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유럽에서 같은 해 5월 8일 나치 독일이 항복을 함에 따라 P-40은 본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루프트바페의 제트 전투기 Me 262와 거의 같은 시기에 개발이 완료된 제트 정찰기 아라도 Ar 234.
Me 262와 마찬가지 너무나 늦게 전선에 등장했던 탓에 변변한 활약을 못하고 물러나게 됩니다.)
어쨌든 지금까지 유럽에 보내졌다고 해도 정식 양산 버젼이 아닌 세번째로 제작한 12대의 시작기들을 가지고 시험적으로 시도해본 일종의 실전 테스트였으나 1945년 2월 미육군 항공대의 결정으로 총 80대의 양산이 허가됩니다. 1945년 7월말까지 45대는 캘리포니아 뮤로크 기지에 412 전투 비행단으로 투입됩니다. 다음 달인 8월에 일본의 무조건 항복 소식으로 전쟁이 끝나기 전에 군이 록히드 社에 발주했던 P-80 5,000 대 주문은 3,000 대로 급격히 감소하게 되었는데 어쨌든 그 당시 P-80은 최종적으로 미육군의 최초의 제트 전투기로써 그 역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8월에 리차드 봉의 추락 사고가 발생하지만 어쨌든 P-38이라는 이름뿐만 아니라 "슈팅 스타"라는 별명으로 불리면서 양산이 시작되어 한국 전쟁이 발발한 1950년 말까지 1인승으로 1,714대가 생산되었습니다.
1947년 미육군에서 공군이 분리해나오자 P-80은 F-80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반면 2인승으로 만들어진 TF-80C는 1948년 3월 첫 비행을 시작한 후에 연습기 T-33의 기본 설계로 사용되어 무려 6,558대가 생산되었습니다.
(비록 F-80 슈팅 스타가 그 다음 세대 F-86 세이버만큼 전쟁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지는 못했지만 F-80 기본 설계로 개발된 2인승 연습기 T-33은 베트남 전에서 활약한
미공군에 우수한 전투기 조종사들을 양성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기종입니다.)
1946년 아직 미육군 항공대 시절 윌리엄 카운실 대령이 조종하는 P-80은 최초로 미국 본토를 횡단 비행한 최초의 제트 전투기의 기록을 세웠는데 L.A.에서 뉴욕까지 4시간 13분 (평균 시속 940km)의 기록이었습니다.
1947년에는 P-80B(양산 버젼)을 항공기 레이스 용으로 개조하여 만든 P-80R을 앨버트 보이드 대령이 조종하여 당시 최고의 속도 기록인 시속 1,004.2km로 비행하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특별한 개조없이 미공군이 사용한 F-80 사양을 기준하면 최고 속도는 965km/h입니다.
2차대전 중에 최강 전투기의 반열에 올라섰던 연합국과 추축국의 걸작품 전투기들의 최고 속도가 P-51 무스탕(703km/h), 스핏파이어 (605km/h) 그리고 메서슈미트 Bf 109 (640km/h)였던 점을 비교하면 제트 전투기의 시대의 개막이 얼마나 큰 혁명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루프트바페의 최초의 제트 전투기 Me 262의 최고 속도가 900km/h 정도 였으므로 F-80 슈팅 스타는 신뢰성에서나 성능에서 모두 전쟁중 Me 262에서 한발 앞선 기종임이 분명합니다.
1948년부터는 1년전에 발족한 미국 공군 (USAF)의 주문으로 F-80C 버전이 본격적으로 생산이 진행됩니다. 공군의 전략 항공 사령부는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본토 방위는 물론 서서히 냉전 대립 구도가 만들어지고 있던 유럽은 2차대전과는 전혀 다른 이데올로기의 긴장 분위기에서 소련과의 군사력 경쟁이 시작되고 있는 가운데 본격적으로 유럽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 공군 비행단에 배치되기 시작합니다. 또한 일본 주둔 미공군 비행단도 F-80의 배치가 시작되었습니다. 1948년까지는 추가로 멕시코와 알라스카에 주둔하는 비행단까지 배치를 마치게 되었고 본토에 갓 창설된 방위군 소속 비행단에도 1947년까지 배치를 마침에 따라 1940년말까지 명실상부 미공군의 주력 전투기로 자리를 굳히게 됩니다.
여기서 미국 해군 비행단에 대한 언급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1945년 6월 2차대전이 채 끝나기 전에 몇대의 P-80A가 미해군 비행단으로 보내지게 됩니다. 얼마 후 1946년 10월 미해군 항공모함 프랭클린 D. 루즈벨트호에 탑재할 함재기로써 P-80을 개조하는 계획이 결정됩니다. 2차대전 때부터 미해군은 미육군 항공대와 별도의 함재기 시리즈를 운용해왔습니다. 2차대전이 끝난 직후 미해군은 자체적으로 앞으로 함재기로 사용할 제트 전투기의 개발을 서두르고 있었으나 생각보다 생산 준비가 늦어지자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이미 신뢰성이 어느 정도 보장된 P-80을 함재기로 도입하게 된 것입니다.
(1946년 곧 공군으로 분리될 미육군 항공대가 개발이 완료된 P-80을 운용하기 시작한
싯점에 미해군과 미해병대는 아직도 F4U 콜세어 같은 프로펠러 함재기를 사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1940년대말 미해군 조종사들에게 미국 본토 훈련 비행장에서 새롭게 등장한 제트 전투기 조종을 가르치기 위해 미공군의 F-80이 공급되었고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게 되어 F-80에서 개조된 훈련기 T-33 698대가 훈련용으로 미해군에 공급되게 됩니다. 또한 록히드는 F-80 전투기의 항모 함재기 버전인 T2V SeaStar를 개발하여 1957년부터 투입되게 됩니다.
(1957년부터 미해군 항공모함 함재기로 배치된 T2V SeaStar)
한국 전쟁
1950년 6월 한국 전쟁의 발발과 함께 F-80도 드디어 실전 기회를 갖게 됩니다. F-80은 공중전과 지상 폭격 임무를 맡고 전쟁 초기에 한반도 상공에서 활약을 합니다. 특히 위에서 말했듯이 북한군이 운용한 소련제 프로펠러 전투기 Yak-9이나 II-10 전투기로는 F-80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소련제 일류신 II-10 전투기, 야크-9과 함께 북한 공군에게 공급되어 한국 전쟁 초기
미공군 F-80와 공중전을 벌이게 되지만 압도적인 열세를 보입니다.)
한국 전쟁에 투입된 F-80C는 주익에 총 6정의 12.7mm M2 브라우닝 기관총이 장착되었고, 8기의 로켓을 주익에 장착하여 발사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1,000파운드(454kg) 폭탄 2기를 탑재하여 투하가 가능하였습니다.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F-80 미공군 비행 편대. 한국 전쟁 초기에 그들은
북한 공군에게 밀리지 않고 한반도 제공권을 장악한 전쟁 영웅이었습니다.)
하지만 북한 공군의 프로펠러 전투기들과의 일방적으로 우세한 전투 상황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1950년 11월 F-80을 조종하던 미공군 러셀 부라운 대위는 소련이 최초로 한국 전쟁에 투입한 소련제 미그-15 전투기를 발견하고 공중전에서 한대를 격추시켰다고 보고하게 됩니다.하지만 소련측 발표에 따르면 그 미그기는 격추되지 않았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격추가 되었느냐 안되었느냐를 떠나서 이때부터 F-80은 객관적으로 스피드에서 열세인 상황에서 소련이 자랑하는 최신예 제트 전투기 미그-15를 상대하는 힘겨운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F-80의 1자형 주익은 스피드에 있어서 미그-15에게 비교할 수 없는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2차대전 당시 루프트바페의 Me 262와 영국 공군의 글로스터를 보고 초조함에 그만 Me262의 V자형 주익을 선택하지 않고 손쉽게 설계를 참고할 수 있는 영국의 글로스터가 적용한 1자형 주익을 선택한 결과물인 F-80은 이제 음속에 가까운 속도를 낼 수 있는 미그-15(최대 시속 1.033km/h)가 등장하자 서둘러 노스 아메리카 F-86 세이버에게 공군 주력기의 자리를 양보해줘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F-80 조종사들은 공중전에서 총 6대의 미그-15를 격추했노라고 주장하였지만 이런 그들의 주장이 F-80의 성능적인 열세를 바꿔줄 수는 없었습니다.
(F-86 세이버와 미그-15 최근 에어쇼에서 함께 시범 비행하는 모습.)
결국 F-86 세이버가 충분히 공급이 완료되자 미그-15를 상대하는 공중전은 세이버가 맡고, F-80은 지상 목표물 공격 임무에 주력하게 됩니다. 그나마 시간이 지나면서 전쟁 막바지에는 공중 촬영 목적의 정찰기로써 한정된 숫자의 F-80이 한반도 상공에서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비록 한국 전쟁 중에 초라한 전공을 세우면서 너무 빨리 F-86 세이버에게 선봉장 역활을 넘겨주고 물러섰지만 F-80이 있었기에 그 이후 제트 전투기들의 발전이 가능했다는 것이 항공 역사가들의 일치된 의견이며, 평가입니다. 또한 비록 불과 몇개월 정도의 활약이었지만 전쟁 발발 직후에 지상군들이 파죽지세로 후퇴하며 일방적인 열세를 면치 못하던 싯점에 북한 공군 전투기들에게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며 제공권을 잃지 않았던 F-80의 공헌은 결코 평가 절하할 수 없습니다.
한국 전쟁 후에 브라질,칠레,우르과이 등 남미 국가에서 F-80을 수입하여 196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 초까지 자국 공군 전투기로 사용하였으며 대한민국 공군의 경우 1957년 T-33 과 2인승 RT-33을 수입하여 연습기와 정찰기로 운용하였으며 1990년대 초반에야 퇴역했습니다.
(브라질 공군에서 운용했던 F-80C)
|
첫댓글 F-86과 함께 나란히 비행하는 Mig-15를 보니 디자인이 나쁘지 않네요. 리처드 이라 봉 소령과 미로 부컨이 F-80 시제기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사실은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리처드 이라 봉은 25세에 소령이었으니, 생존했으면 장성으로 퇴역했겠네요.
루프트바페의 최고 에이스 에리히 하르트만 역시 전쟁 말기에 최고 에이스로 등극했을 때 봉 소령과 비슷한 나이였습니다. 노르망디에 미국 공수부대 영웅 게빈 소장은 30대에 별읊달았구요. 난세에 젊은 영웅들이었지요....
나머지 절반은 아껴뒀다가 내일 사무실에서 한가할때 읽겠습니다.
아까운 에이스들의 희생으로 오늘날의 렙터가 있었군요...
형님 좋은글 감사합니다~! ^^
아껴두시지 말고 한번에 좌악 읽으세요! 술도 원샷하듯이 말이죠!
덕분에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의 관심과 응원의 댓글이 다음글을 쓰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과학의 발전은 많은 사람의 희생을 토대로 발전된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됩니다. 제가 좋아하는 수업을 듣는 기분이라 읽고나서도 너무 좋고 또한 김작가님께 늘 감사 드립니다. 힘내시고 다음편 부탁드립니다. 건강 챙기시면서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김작가 아닌데.....부끄
@따블오남편(김준만) 저 팬클럽 회장 시켜주세요^^
과찬!
진짜 딴건 몰라도 라이트닝 저놈만은 꼭 한번 만들고 싶다!!!!!!
제트기 역사가...줄줄줄~~~ 감사합니다.^^
p-38은 저렇게 큰 몸집인데도 전투기로써 우수한 성능과 전공을 기록한 걸작입니다! 언젠가는 2차대전 미국 정투기 심층 분석 들어갑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