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수련, 마음공부, 수련, 수양, 수행, 명상 같은 말이 있는데 마음닦기도 같은 뜻인가?
잘못 쓰인 말도 배운 사람들이 자꾸 쓰면 못 배운 사람도 따라 쓰게 되어 나중에 여럿이 쓰게 되면 바로 잡기가 아주 어려워진다. 쉬운 겨레말두고 (중국)한자말, 일본(한자)말이 널리 쓰이는 게 좋은 보기이다. 숨이란 말두고 호흡이라 하고 날씨란 말보다 기상, 기후라 많이 쓰고, ‘손님’보다 ‘고객’을 즐겨 찾는다. 싸다는 쉬운 말도 저렴하다에 눌려 숨죽인다. 그래서 ‘부엌’이 주방에 밀리고, ‘고맙다’도 ‘감사하다’한테 못 이긴다. 끝내 얼토당토 않는 ‘멘붕’같은 말이 ‘얼빠짐’ ‘얼나감’자리를 꿰어찬다.
마음을 깨끗이 닦아 오롯이 마음이 깨끗해진 사람, 깨달은 사람, 붓다가 되는 길을 가장 잘 나타낸 우리말이 ‘마음닦기’이다. 이 길은 붓다께서 다 밝혀 닦아 놓은 길이다. 배워 익혀 부지런히 따라가면 된다. 따라서 새삼 마음을 “공부”할 건 없고, 또 공부란 말은 잘못 쓰인 한자말이어서 ‘배우다, 익히다’ '파고 들다‘로 쓰면 좋다. 마음 수련, 수련, 수양, 수행은 모두 닦는다는 뜻이 들어있는 비슷비슷한 말이고 파고들어 보면 닦을 건 끝내 마음인데, 가 닿고자 하는 데가 같다고 보면, 굳이 뜻이 또렷하지 않은 어려운 한자말을 쓸 까닭이 없다. 이런 한자말이 널리 쓰이는 까닭은 한자를 배워 익힌 사람들이 어리석어 겨레말을 업신여기고 한자말이 더 높은 말인 줄 잘못 알아 굳이 배운 것을 즐겨 쓴 데서 비롯된다. 겨레말은 배워 익히려고도 하지 않고..
‘명상’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잘못 쓰인 일본(한자)말인데, 가장 널리 쓰인다. 본디 빠알리 말 “자아나”를 영어로 메디테이션이라 옮겼는데, 일본 사람들이 영어 메디테이션을 옮기면서 명상(“깊이 생각하다”는 뜻)이라 썼다. 자아나를 중국사람들은 ‘정’이라 옮기고 모자라서 ‘선’이라고 소리대로도 적었다. 사마아디와 같은 말인데 ‘마음이 한곳에 모아져 고요해짐’이란 뜻이다. ‘마음닦기’는 ‘위빠사나 바와나’를 우리말로 옮길 때 가장 잘 들어맞는 말 같다.
마음닦을 때, 첫걸음(들날숨닦기)은 마음을 한곳에 모으고, 이 모아진 마음힘으로 오래 쌓인 온갖 마음 더럼을 깨끗이 닦아가야 하므로 명상(메디테이션, 자아나)이란 말만으로는 마음닦기를 나타내는 말로 모자라고 그래서 다 담아낼 수 없다. 또 마음닦기는 깊이 생각하기(명상)와는 사뭇 다르다.
첫댓글 우리말 살려 쓰자는 뜻에는 오롯이 동감하지만, 마음 닦기에 대한 설명은 알듯 모를 듯 아리송하기만 합니다. 그러니까 사맛디=명상, 위빠사나=마음닦기로 이해하면 될까요? 그리고 궁금한 점은 말이야 뭐라 부르든 마음 닦아 참된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지 마음 닦는 모임에서 굳이 우리말 살려쓰기에 치중하는 이유는 뭔지요? 딴지 거는 것이 아니라 80년대 이후 여태까지 이 문제에 관심갖는 이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기에 그렇습니다..
사맛디는 세종 큰 임금이 훈민정음에서 어린 백성이 서로 말할바가 있어도 한자때문에 서로 통하지 못한다고 할때 "통하지"에 밟혀 죽은 우리말 이구요. 명상은 바르게 쓰면 마음닦기입니다. 온갖 마음닦기가 있고 그걸 배우려면 거의 한자말로 된 가르침을 만나지 않을수 없고 그래서 쉽게 가르침 알맹이를 알아들어 마음닦기가 쉽지 않습니다. 말이 쉬우면 마음닦기가 훨씬 수월하지요.알맹이를 놓치지 않게 되구요. 처음에는 이렇게 비롯했는데 이제와서 보니 겨레말글 살려쓰는 일이 겨래얼을 이어가는 겨레삶에서 대단히 종요로움을 알게됐지요. 그래서 마음닦기 못지 않게 제가 힘을 쏟게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