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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조선로동당 삼호 청사 대회의실.
김정은 당 중앙군사위 위원장이 국가 비상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중앙군사위 위원, 당정치국 위원, 인민군 총정치국장, 총참모장, 내각 총리 등 권력 핵심들이 엄숙히 앉아 있었다.
그들은 핵 문제를 둘러싸고 미국과 벌이고 있는 고도의 전략과 경제난 타개책, 대남전략, 대 중국 및 대 러시아 등 비교적 우호적인 외국에 대한 외교 전략을 종합 토론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군사위 위원장과 몇 몇 핵심멤버의 의중대로 기본 방향은 정해져 있었다.
회의에서는 대남 강경파의 주도로 극비에 추진되고 있는 시월 일일의 ‘백두산작전’에 대한 전략이 중점적으로 논의되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이번 건국 기념일을 조선인민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승리의 날로 만든다는 것이다.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오대열, 총 정치국장 최성태, 총참모장 김광철, 등은 대남 강경파다. 반면에 김백주 당청치국 상무위원, 이상국 당정치국 위원과 한영일 당비서국 비서,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야전군 사령관 배동명 인민군 대장, 박기웅 대장 등은 온건 합리적인 대남 협상파에 속한다.
그러나 회의석상에서는 강경파의 의중에 따라 강경한 목소리가 더 높다. 김백주, 이상국 등은 전략, 전술상 일보 후퇴했다. 온건파는 특히 북한 정권이 인스펙터와 손잡는 듯 한 기미에 극력 반대하는 입장이나 최고위층에 그 의견이 잘 먹혀들어 가지 않았다. 권력 핵심부는 북한이 남한에 대한 핵 공격을 담당하고 인스펙터가 자체적인 핵무기 공격 태세를 완전히 갖추는 대로 일본에 대한 핵 공격을 담당키로 한다는데 동의했다.
인스펙터가 북한의 공조를 받아 일본에 대한 기습공격을 할 때 미국과 중국, 러시아 등이 개입 못하게 견제하는 일이 중대한 숙제로 남아 있었다. 과연 미국, 중국의 개입을 막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김백주, 이상국 등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인스펙터 수뇌부는 이에 대한 전략으로 이란, 시리아 등 회교권을 부추겨 미국과 국지전을 벌이는 방법을 검토했다.
인스펙터는 시베리아에 가스전 개발을 위장해 거대한 지하 핵 기지를 건설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과 인스펙터는 미국의 첨단 정찰위성의 사찰을 피하는 일과 일단 기습공격을 한다 해도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미국의 공격을 어떻게 막아내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서로 의견이 엇갈리며 대책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도 절대로 가만있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인스펙터의 본거지가 있는 러시아는 아직 막강한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어 러시아의 수사와 공격을 막아내는 일이 가장 큰 숙제로 남아있다.
북한은 중국의 입장과 미국의 개입에 대한 우려 때문에 이 엄청난 전쟁계획에 대해 다소 신중한 반면 인스펙터는 보다 강경하게 밀어 붙였다. 제삼차 세계대전을 몰고 올지도 모르는 이 엄청난 음모가 지구 한구석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싱가포르 창이 국제공항. 언제 보아도 깨끗하고 세련된 모습이다.
채영은 간단한 가방을 들고 공항 입국장을 나왔다. 그녀의 마음은 무겁기 짝이 없었다. 동행했던 영사는 급한 일이 있어 며칠 후에 들어오기로 했다.
베이지 색 티셔츠에 흰 바지, 흰 구두 차림으로 북한 여성치고는 비교적 세련된 모습이나 다소 피곤해 보였다. 그녀의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가 걸음걸이에 따라 치렁거렸다. 최신식 공항시설과 밖의 싱그러운 풍경도 그녀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지섭씨를 만나지 않겠다고 아버지에게 반쯤 약속했지만 과연 나 자신의 의지로 가능할까. 백두산 작전. 이 어마 어마한 사실을 어떻게 하나. 신문기자인 지섭씨에게 알려 신문에 보도해서 이 엄청난 비극을 막아야 하지 않을까. 한반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되나’
그녀는 한 손을 이마에 얹고 머리가 터질 것 같은 고민 속에서 정신없이 걸었다.
그때, 그녀 뒤로 선 글래스를 낀 젊은 남자가 아까부터 몸을 숨기고 뒤를 따르고 있었다. 채영은 혹시 지섭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까 해서 이리저리 공항 안을 살피다가 어이없어 했다. 그와는 만나지 않아야 한다. 더구나 내가 언제 오는지도 모르는데 그가 나와 있을 리가 없겠지. 그녀는 안타깝게 지섭을 찾는 자신에게 타이르듯 마음을 굳게 먹었다. 채영이 두리번거리자 남자는 재빨리 몸을 숨겼다.
채영은 택시를 타지 않고 시내까지 공항 셔틀버스를 탔다. 달러를 절약하기 위해서다. 남자는 머리를 숙이고는 채영의 눈에 띄지 않게 버스에 재빨리 함께 올라타 구석 자리에 앉아 잠을 청하는 척 했다.
안락한 버스 밖으로 보이는 언제 보아도 싱그럽고 깨끗한 거리. 그녀는 북한의 농촌 모습을 생각하고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와 수영의 얼굴도 떠올랐다. 우리도 이렇게 사람답게 살 수는 없나. 이제 한반도는 핵전쟁 속에서 잿더미로 변하는 것은 아닐까. 채영의 머리가 다시 아파왔다.
‘그의 목소리만이라도 마지막으로 들을 수 없을까. 지섭씨에게 전화를 걸어 목소리만 듣고 끊을까. 안 돼. 휴대폰에 내 번호가 찍히니까, 내가 전화한 줄알아버리지. 그래, 휴대전화 말고 사무실 전화로 걸어보는 거야. 다행히 그가 전화를 받으면 목소리만 들어보고 끊지 뭐’
채영은 더 참지 못하고 수상한 사람이 없는지 잠시 주위를 살피고는 무심코 휴대폰을 꺼내려다 재빨리 그만두었다. 뒤쪽 구석에 있는 남자가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선 글래스와 콧수염, 모자 등으로 변장했지만 지덕만이 틀림없었다. 채영은 그를 잠시 노려보다 일단 그냥 모른 척 했다.
얼마 후 그녀는 버스에서 내려 북한대사관 쪽으로 걸어갔다. 습하고 더운 공기가 후끈 끼쳐 왔다. 남자도 재빨리 버스에서 내려 그녀를 멀찌감치 감시하며 따라갔다. 그녀는 똑바로 길을 가다가 재빨리 뛰어 옆 빌딩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그녀를 놓친 지덕만이 건물로 뛰어들어 왔다. 그녀는 인파로 붐비는 쇼핑센터 통로를 지나 오른쪽으로 꺾어졌다. 지덕만이 헐레벌떡 뒤쫓아 왔다. 그녀는 모퉁이에 숨어 잠시 기다렸다. 지덕만이 숨차게 코너를 돌아 왔다. 그가 나타나자 채영은 재빨리 다리를 뻗어 그의 다리를 걸었다. 불의의 공격을 받은 지덕만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동무는 할 일이 그렇게 없소? 남의 뒤나 미행하게. 변장한다고 모를 줄 아시오?”
채영이 꾸짖자 지덕만이 얼굴이 벌개 지며 엉거주춤 일어났다.
“내가 일을 서투르게 한 건 인정하오. 그러나 민채영 동무가 그동안 한 짓을 생각하면 수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오.”
“내가 뭐 이 수상하단 말이요?”
“여기서 긴 말 할 수는 없고 사무실에 가서 따져 봅시다.”
“공무로 다녀오는 사람을 미행이나 하고... 맘대로 하시오.”
채영은 찬바람이 일게 돌아서서 가벼렸다. 지덕만이 서서 그녀를 노려보았다.
채영은 대사관에 와서 출장 보고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지덕만도 변장한 모습을 원래 모양으로 고치고는 자기 자리에 앉아 채영을 곁눈질로 노려보았다.
지덕만은 신의주 출신으로 한 때 생산 공장에서 일하다가 노동당에 입당했다. 그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열성 당원으로 일해 왔기 때문에 당 고위층의 눈에 들어 외무성에 파격적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다가 해외 근무 발령을 받고 싱가포르 대사관에 근무하고 있다. 그의 주 임무는 공관원들이 이탈하지 않고 감시하는 역할이다.
그는 채영을 은근히 흠모하고 있으나 그녀가 정무원 부총리 딸인데다 그녀가 쌀쌀하게 대해 접근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두고 보자 하는 감정을 갖고 있었다. 채영은 그가 음험하고 인간미가 메말라 있은 것 같아 싫어하는 편이었다.
지덕만은 최근 들어 채영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고 그녀의 동태를 살펴 약점을 잡으려고 벼르고 있는 중이었다. 채영이 공무로 외출을 해도 돌아오는 시간이 조금 지체되는 것을 눈치 챘다. 중국어 강습을 갔다 올 때도 좀 늦게 오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미행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제 채영이 그의 그물에 걸려들 때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고 남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약점을 잡아 채영에 대한 욕망을 달성해 보려는 것이다.
자리에 앉아 공무를 보던 채영은 잠간 화장실로 갔다. 마침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더는 참지 못하고 지섭의 사무실로 전화를 해보았다. 여직원이 “여보세요.”하고 전화를 받았다. 이쪽에서 말이 없자 저쪽에서는 계속 “여보세요. 여보세요.”했다. 그녀는 힘없이 통화종료를 했다.
‘그가 전화를 받을 리 없지’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지섭은 취재를 마치고 사무실로 들어 왔다. 사무실을 지키는 여직원이 지섭의 데스크로 전화가 왔는데 그냥 끊었다고 전해주었다. 발신전화를 보니 채영의 전화번호였다.
‘채영씨가 돌아왔구나!’그가 속으로 외쳤다. 그러나 채영이 위험할까봐 함부로 전화를 할 수 없었다. 그는 망서렸다.
‘운명을 하늘에 맡기자. 진동으로 해놓고 호주머니에 넣었겠지. 그래도 위험하긴 한데 한번 해보자’
그가 버튼을 눌렀다. 수신자가 받을 수 없는 상태라는 녹음만 들렸다. 밤에 숙소에 가서 카톡 메시지를 넣어보자.
지섭은 취재한 기사를 노트북에 입력시켜 본사로 송고한 다음 사무실을 맥없이 나왔다. 그는 차를 몰고 가서 번화가인 오차드 로드 주차장에 세워놓고 이리저리 발길 닫는 대로 거리를 쏘다녔다. 쇼핑센터가 줄줄이 늘어선 거리. 럭키 플라자의 화려한 쇼윈도, 줄줄이 늘어서 있는 특급호텔들의 화려한 불빛을 무심코 보며 걷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북한 대사관으로 달려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래봐야 그녀만 의심받을 것 같았다. 입안이 바짝 타들어갔다. 그는 다시 차를 몰고 탱린로드 부근으로 달려갔다. 채영과 앉았던 오키드 공원으로 가서 그 벤치에 앉아 보았다. 그녀와 함께 온 것이 불과 얼마 전 일이었다. 그녀의 체온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채영이 저쪽에서 긴 머리칼을 바람결에 날리며 들어서고 있는 것 것도 같았다.
숙소인 아파트로 돌아와 채영에게 카톡을 넣어보았다. 그러나 역시 답이 없었다. 다음 날도 그녀에게서는 끝내 연락이 없었다.
‘북쪽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봐. 내일은 채영이 중국어 학원에 나오는 날이지. 거기 가 보면 알겠지’
지섭은 채영의 생각을 잊기 위해서라도 미친 듯이 취재하러 뛰어 다니고 기사작성에 매달렸다. 그럴수록 또렷해지는 그녀의 얼굴... 그는 일을 마치고 채영이 다니는 학원의 시간에 맞춰 그곳으로 차를 몰았다. 제법 큰 규모의 어학원에서는 영어, 중국어, 한국어, 일어, 등을 가르치고 있었다. 지섭은 학원 복도에서 채영이 수강하고 있는 중국어 중급반을 숨죽여 들여다보았다. 아직 강의 시작시간이 안돼서인지 서너 명의 학생만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 몇몇 학생들은 복도에서 자판기의 커피를 빼내 마시며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지섭은 학원건물 밖으로 나와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기다렸다. 그러는 사이 이미 강의 시간이 다 되었고 학생들이 대부분 자리에 가 앉았다. 그러나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 강의가 시작되었다. 강의를 시작한지 십 분이 지나고 십오 분이 지나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학원도 나오지 않는구나.’
지섭은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허탈하게 서 있었다. 그때 저쪽 길에서 한 여성이 급한 걸음으로 땅을 내려다보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눈 같이 흰 원피스를 입고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여인.
채영이다! 지섭은 뛰쳐나가려다 가만히 그녀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미행자는 없는 것 같다. 그녀는 걱정에 싸여 앞도 보지 않고 걸어왔다. 정신없이 걸어오던 채영은 문득 앞에서 인기척을 느끼고 쳐다보았다. 지섭이었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채영씨!”
지섭의 목소리만 듣고도 벌써 그녀의 눈이 젖어왔다. 그러나 다음 순간 단호한 표정으로 바꾸려는 안간 힘이 역력했다.
“채영씨, 무슨 일이 있지요?”
지섭이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녀는 급히 몸을 빼내 도망갈 차비를 차렸다.
“왜 그래요. 위험한 일이 있어요?”
지섭은 주위를 한번 살피고는 그녀를 억지로 끌고 학원 뒤편으로 갔다.
“지섭씨, 안돼요. 우린 만나면 안돼요!”
“아버지가 노하셨어요? 그만 만나래요?”
“이제, 더 만나선 안 되겠어요.”
“채영, 날 봐요. 무슨 일이 있었죠?”
지섭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아무 일도 없어요. 아니 잘 모르겠어요.”
채영 자신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다.
“오늘 강의는 듣지 말아요.”
지섭은 그녀를 완강한 힘으로 이끌고 주차장으로 급히 갔다. 채영은 안 가려고 버티며 강의실 쪽으로 몸을 틀었다. 하지만 지섭의 완강한 힘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자신을 억제할 수 없었다. 채영을 차에 태운 지섭은 그녀의 두 팔을 잡았다.
“보고 싶었어요. 얼굴을 들어 봐요.”
채영은 눈물에 붉어진 눈으로 그를 보았다.
“일이 잘 안 됐어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어디 가서 얘기해요.”
지섭은 무서운 속도로 차를 몰았다. 그들은 오키드 공원으로 들어섰다. 벤치에 앉자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
“아버지께 우리 일을 모두 말했어요?”
“네. 다 말했어요.”
“자, 그럼 차근차근히 말해 봐요.”
“아버지의 노여움이 보통이 아니야요. 지섭씨, 우리 이제 그만 만나야겠어요.”
“그건 이미 각오한 것 아니에요?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뚫고 나가야돼요. 우린 서로 사랑하잖아요. 우리 헤어져도 살 수 있어요?”
채영이 잠시 침묵하다 대답했다.
“아버지께서 지섭씨를 만나서는 절대 안 된다고 엄하게 말씀하셨어요. 다시 만나지 않는다고 약속했어요.”
“만나지 않겠다고 약속 했다구요?”
“그렇지 않으면... 난 여기 나올 수 없었어요.”
“그 말을 어기면...?”
“본국으로 송환하신대요. 이젠 방법이 없어요, 지섭씨.”
지섭은 깊은 신음을 삼켰다. 송환조치는 가장 치명적이다.
“아버지께서 우리가 만나는지 확인하려고 감시를 시킬지도 몰라요. 그리고 대사관 직원 한 명이 몹시 감시를 심하게 해요.”
두 사람의 가슴에 무거운 돌덩어리가 누르는 것 같았다. 채영이 다시 결심하고 말했다.
“지섭씨, 그것뿐 아니야요. 또 한 가지 중대한 문제가 있어요.”
“또 중대한 일이라뇨?”
“한반도가 어떻게 될지 아, 끔찍해요.”
“무슨 일인데요.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우리 함께 풀어가요.”
지섭이 채영의 등을 가만히 쓸어주었다. 채영은 비탄에 젖은 얼굴을 들고 무거운 입을 열었다.‘백두산 작전’ 이 엄청난 사실을 세계에 알려야 돼. 알려서 조선민족의 비극을 막자.
“지섭씨 지금부터 어떤 얘기를 해도 놀라지 말기야요, 네?”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지섭은 일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채영은 입을 떼지 못하다가 드디어 아버지 방에서 우연히 발견하게 된 백두산 작전에 대해 털어놓았다. 얘기를 다 들은 지섭은 경악했다. 드디어 올 것이 온건가. 남한에 대한 핵공격이라니! 한반도가 초토화되는 게 아닌가.
우리 민족이 핵을 머리에 이고 불안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실제로 핵전쟁이 계획되고 진행될 줄이야. 북한이 핵공격을 한다면 한국과 미국이 가만있을 것인가. 정밀한 정찰위성으로 파악한 공격원점을 첨단무기로 선제 타격할 것이다. 어찌 되었던 한반도는 전쟁의 참화에 휩싸이게 된다. 시월 일일이면 이제 아홉달 남짓 남았다. 그 짧은 기간 이 비극을 막아야 한다.
“그 엄청난 계획에 대해 아버지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버지께서는 물론 핵전쟁에 반대하시는 입장이어서 밤낮으로 고민하시는 걸 차마 못보겠어요. 아버지 자신이 개발한 핵무기로 남조선을 공격한다는 사실이 더욱 괴롭고 가슴 아프신가 봐요.”
민 박사는 이 음모야말로 인스펙터가 세운 세계적인 전쟁계획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까지는 몰랐다. 지섭은 단호하게 결심하고 말했다.
“채영씨 가족 망명에 대해서 아버지께서 뭐라 하세요?”
“지섭씨와 만난 얘기를 말씀드리면서 이 급박한 사태의 해결방법으로 해외에 가서 폭로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여쭤봤지만 많이 노하셨어요. 수영이까지 날 비난했어요.”
채영이 한가지 제안을 했다.
“지섭씨가 기자니까 신문기사로 보도하면 세계여론 때문에 핵전쟁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요. 세계에 알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이 비극은 막아야 해요. 민 박사께서 망명하셔서 폭로하면 더욱 확실하게 되죠.”
“그건, 그건 어려워요.”
지섭의 머리가 띵해왔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아나스타샤와 그녀가 속해 있는 국제조직. 그 조직을 파고들어 음모를 폭로하면서 북한의 핵전쟁 계획도 세계에 알리면...
“우리 함께 생각을 잘 정리해 봐요. 채영씨, 그렇다고 날 피하면 안돼요.”
채영이 답변을 하지 않았다.
“날 안 만난다고 전쟁계획이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우리가 만나서는 더 위험하잖아요.”
“같이 해결책을 찾아야지요. 우리 함께 가기로 했잖아요.”
지섭이 그녀의 두 어깨를 잡았다.
“채영, 날 봐요. 나 사랑해요?”
채영이 지섭을 한참 바라보았다.‘공화국에선 들어보지 못한 말을 이 사람에게서 듣다니...’
“이런 말이 익숙진 않지만... 지섭씨 사랑해요. 내 생명보다 더...”
지섭은 그녀의 입에서 처음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녀를 격하게 쓸어안았다. 탄력 있는 채영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며 더워졌다. 그녀는 두 팔로 지섭을 안았다. 지섭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닿았다. 지섭이 격렬하게 키스하자 채영의 입술이 열렸다.
흐린 하늘에서 당장 열대 소나기라도 쏟아질 듯 번개와 우레가 치며 더운 바람이 땅을 쓸고 지나갔다.
서울 행 비행기 안. 지섭은 좌석에 등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잠은 오지 않았다. 비행기 소리가 심장소리처럼 점 점 더 크게 들려왔다. 흥분과 긴장으로 온 몸이 굳어왔다. 위스키를 청해 마셨으나 정신은 더 말똥해졌다.
‘백두산 작전 - 핵전쟁이 실제 일어날까. 과연 믿을 만한 정보인가. 북한의 역정보는 아니겠지. 역정보로 북한이 얻어낼 건 없을 것이다. 채영이 고도로 훈련된 정보원일까. 그럴 순 없지.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이 엄청난 계획을 세계에 폭로하면, 채영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사랑은?’
머리가 더욱 복잡해졌다.
지섭은 진영에게 백두산 작전의 내용을 알려주었다. 진영은 아나스타샤를 통해 자세한 계획을 알아보고 있었다.
귀국한 뒤 지섭은 오랜만에 가족과 늦게까지 이야기꽃을 피웠다. 채영에 대한 얘기를 간략하게 했다.
다음 날, 지섭은 편집국에 들어섰다. 낯익은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아직 시간이 일러 몇 사람 출근하지 않았다. 기사 쓸 준비를 하고 있던 후배들이 다가 와 반갑게 인사했다. 선배들이 그의 어깨를 툭 치며 악수했다. 국제부장과 사회부장에게 인사하고 강인태 편집국장에게 갔다.
편집국의 창문 쪽 한가운데 커다란 국장 석에 앉아 있던 강 국장은 지섭의 귀국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긴장된 모습으로 우선 한쪽 별실로 되어 있는 국장 소회의실 겸 응접실로 지섭을 데리고 갔다.
“전화로 전해 들었지만 그 백두산 작전이라는 게 뭐야?”
“말씀 드린 바와 같이 북한이 시월 일일에 한국에 대해 핵 공격을 한다는 겁니다.”
지섭은 민채영으로부터 전해들은 백두산 작전에 대해 요령 있게 설명했다. 강 국장은 얼굴이 굳어졌지만 이내 반신반의 하는 표정으로 다시 확인했다.
“그 민채영인가 하는 북한 여성한테서 들은 얘기를 완전히 믿을 수 있나?”
지섭은 채영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곤혹스러웠다. 그래서 지난 번에 러시아 취재차 갔을 때 북한외상의 통역으로 나왔으며 모스크바 대학 도서관에서 자료를 조사하다 우연히 마주 친 일, 괴한으로부터 손가방을 날치기 당할 뻔 했을 때 구해준 일, 그리고 그녀가 북한의 민영대 부총리 딸이라는 걸 알아 낸 사실 등을 설명했다. 그리고 인스펙터와 연계 가능성도 있다는 사실도 덧붙여 설명했다.
강 국장은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하고 편집국의 몇몇 간부를 회의실로 불러들였다. 부국장단과 정치, 국제부장, 그리고 지섭이 원래 소속되어 있던 사회부장 등이다. 지섭도 배석했다.
강 국장과 지섭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부국장 중 한명이 말했다.
“앞으로 아홉 달 후에 한반도에서 핵전쟁이 일어난다는 얘긴데... 참 믿어지지 않네요. 이건 보통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북한이 이미 핵무기를 실전배치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 아닌가요. 우리 예상보다 훨씬 빠르네요.”
이어서 정치부장이 말했다.
“민채영이라는 북한 여자가 그 어마 어마한 정보를 한국기자에게 흘린 이유가 석연치 않아요. 그걸 믿을 수 있을지. 결정적으로 믿을 만한 근거나 문서로 된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그건 그렇고, 인스펙터인지 하는 조직이 국제적인 핵전쟁을 일으킨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
국제부장이 말했다.
“저번 우리 신문에 보도된 바 있지만 민영대 부총리는 북 핵 개발의 주역이고 그 딸이 말한 것이라면 일단 중대한 정보라고 봅니다. 인스펙터가 무모한 계획을 세운 건 사실이지만 지금 그들의 본거지 위치가 분명치 않아 선제 타격하는 것도 쉽지 않아요. 또 그들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본다면 러시아로서는 핵 공격을 당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제 시간이 너무 없습니다. 우리 신문 취재진을 총동원해서 각 채널을 통해서 더 알아보는 게 좋겠습니다.”
“민채영이란 여자가 고도로 훈련된 정보원일 수도 있어요. 치밀한 계획 하에 우리 취재진에 접근해서 역정보를 흘린 게 아닌지도 검토해봐야 합니다. 김현희 처럼 우리에게 협조한다면 문제가 다르지만요.”
“박지섭씨, 민채영을 모스크바에서 처음 만났나고 했는데 그 때 쭈욱 피해오던 여자가 어떻게 싱가포르 북한 대사관에 근무한다는 정보를 흘리고 우리에게 이런 중대한 사실을 알려 주었는지 난 잘 이해가 안되는데... 그 여자가 어떤 경로로 우리 편이 되었는지 석연치 않네. 우리 기자의 끈질긴 설득과 추적취재의 결과인지, 어떻게 된 거야?”
이렇게 여러 의견이 나왔다. 손태영 사회부장이 나섰다.
“사실은 사회부에 있던 박지섭 기자가 싱가포르 특파원으로 부임하게 된 경위가 있습니다. 작년 박 기자 모스크바 특집취재 때 우연히 민채영 씨를 호텔 커피샵에서 봤습니다. 그 후 그 여자가 접촉하는 인물들을 보고 평범한 북한 여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탐지하고 끈질기게 추적해서 싱가포르 대사관에 근무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지요. 그 때 박 기자의 보고를 받고 민채영씨에게 중대한 정보가 있는 거 같아서 싱가포르 특파원으로 밀었어요. 이 사실은 좀 더 구체적인 정보와 기사거리가 나오면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손 부장은 지섭과 채영의 개인적인 감정은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려는 배려였다. 국제부장이 이어 말했다.
“이번 특집취재를 하면서 상당한 부수적인 성과가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어딘가에 인스펙터라는 특수한 범죄, 테러조직이 있다는 사실과 지난 번 피살된 피요토르 한과 민영대, 사브로프스키 등등 핵물리학자 간의 커넥션. 이번 백두산 작전 등등...좀 더 취재 해봐야겠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상관관계가 예견되고 있어요.”
국제담당 부국장과 국제부장은 지섭과 이진영 특파원이 캐낸 정보의 심각성을 부연 설명했다. 사회부장은 채영이 이 정보를 우리 측에 흘리지 않을 수 없는 당위성을 덧붙여 얘기했다. 지섭은 채영이 토론의 중심에 있는 게 괴로웠다. 남쪽 기자와 북쪽 민영대의 딸이 사랑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면 언론과 사회의 관심이 얼마나 폭발할 것인가.
“민영대가 갖고 있던 특급 비밀문서를 딸이 우연히 발견했고 또 민 씨가 이 사실로 고민하고 있었다는 정황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또 하나 문제는 민 씨가 알고 있는 대로 실제로 북한이 열 달 후에 핵 공격을 감행하느냐 하는 점을 확인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건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우리 취재진이 일단 초특급 비밀을 탐지해 냈으므로 지금으로서는 만에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는 핵전쟁을 막을 수 있다면 대한민국 아니 인류를 위해 우리 신문사가 큰일을 하는 것 아닌가요?”
“이 사실을 우리정부와도 상의하고 언론에 터뜨려 국제여론을 일으켜 전쟁을 막는다면 그 보다 보람 있는 일이 없겠지요.”
“북한이 당장 그런 계획은 당초에 없었고 남한정부가 허위 날조한 정보로 전쟁을 일으킬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역공을 가할 가능성이 있어요,”
“그러니까 민채영인가 하는 여자가 고도로 훈련된 북한 정보원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박지섭씨, 그 여자 사진 갖고 있나? 어떻게 생겼나 한번 보자.”
지섭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 그건 안되지. 민채영씨가 자신의 사진을 찍거나 사진을 유포하는 걸 극력 반대했고 또 설사 사진이 있다 해도 그 여자의 신변안전을 위해 지금 절대 공개해선 안 돼.”
강 국장이 잘라 말했다. 지섭의 마음이 괴로웠다. 강 국장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가장 확실한 방법은 민영대씨 일가족이 한국으로 망명하는 거야. 그 일가가 사실을 폭로하면 북한이 아무리 잡아떼도 백두산 작전 계획이 백일하에 폭로되고 또 전쟁도 막을 수 있지.”
“그건 좋은 말씀이지만 그 망명 작전을 어떻게 성공시키느냐가 문제 아닙니까?”
“백두산 작전을 폭로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만 쉬운 일이 아니지요.”
이렇게 여러 간부들이 제각각 의견을 말했다.
“귀순 작전에는 결국 박 기자와 이진영 특파원이 나서야겠는데...”
모두 지섭을 쳐다보았다.
“어때, 가능성이 있는 작전인가?”
강 국장이 지섭을 지긋이 건너다보았다.
“저도 그 계획이 가장 좋다고 봅니다. 좀 어렵기는 하지만 한번 해보지요.”
지섭이 말했다. 강 국장이 결론을 내리듯 말했다.
“이 정보가 굉장히 중요하지만 일단 사실인지 좀 더 취재해보지요. 우리 신문 취재진을 총 동원 해서 외부에 정보가 새 나가지 않도록 극비리에 취재하고 어느 정도 확인되면 내가 청와대에 들어가서 민영대 부총리 일가족의 귀순 작전을 의논해 보기로 합시다.”
대한신문 편집국은 정치부, 국제부, 사회부, 통일문제 연구소 등의 몇 몇 기자들로 특별취재팀을 구성하고 극비리에 백두산 작전에 대한 취재에 들어갔다.
강 국장은 편집국 데스크들의 아침 편집회의를 마치고 사장, 주필, 편집국장 등이 참석하는 고위 편집회의에 들어갔다. 그날의 지면에 대한 협의가 끝나자 강 국장이 입을 열었다.
“사실은 오늘 우리 취재진이 입수한 중대한 정보에 대해 상의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북한이 백두산 작전이라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합니다. 우리 취재진이 확인해 봐야 하겠지만 열 달 후인 시월 일일에 한국에 대해 핵 공격을 한다는 엄청난 계획입니다.”
“뭐라구요?”
사장과 주필은 경악했다. 그 엄청난 정보를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침착함을 되찾고는 예상대로 김덕창 주필이 시비를 걸고 나왔다.
“기자가 단순히 북한 여자에게서 들은 이 어마어마한 이야기를 무슨 근거로 믿을 수 있어요?”
사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시했다.
“그 여자가 정보원인지 알 수 없잖소? 해외에 나와 있는 북한 여자는 훈련된 정보원일 가능성이 있어요. 괜히 북한의 역정보에 휘둘려 망신하는 거 아닌가요. 그 박 기자가 함정에 빠졌을 수도 있지...”
“아무리 북한이라도 핵전쟁은 함부로 일으킬 수 없지. 중국의 입장도 있고 미국도 있고...”
그들은 강 국장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무시하고 나왔다. 그러나 호락호락 물러설 강 국장이 아니었다.
“물론 이 정보가 백 프로 사실이라고 믿을 수는 없지만 만에 하나라도 사실이라면 미리 막는 게 최선이지요. 우리 편집국의 취재진을 총 동원해서 사실 여부를 알아볼 계획입니다.”
“일단 알아는 보시요만, 괜히 우리 신문 망신시키면 안돼요. 잘 확인해 봐요.”
사장이 말을 마치고 바쁘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필의 입가에 냉소가 스쳐 지나갔다. 채영 일가의 귀순 작전에 대한 얘기는 할 분위기도 안되었다. 강 국장이 지긋이 어금니를 물었다.
이월 초. 대한신문 편집국 저녁 여섯시 반.
지섭은 아직 싱가포르에 귀임하지 않았다. 초판 마감이 끝나자 전쟁을 치르듯 팽팽했던 편집국 안의 긴장감이 다소 누그러졌다. 지섭은 복도에 나와 자판기의 커피를 뽑아 마시고 있었다. 어제 저녁 카톡으로 편집국에서 논의된 내용을 채영에게 전해주었다. 그녀의 주변 사람들에게 들킬까봐 카톡도 조심하고 있으나 꼭 필요할 땐 문자를 주고받았다. 그때 그의 휴대폰에 카톡이 떴다는 신호음이 울렸다. 휴대폰을 꺼내 보았다. 채영이었다.
“어제 아버지께서 연락을 하셨어요. 공화국에 들어오래요. 무슨 일이냐고 여쭈니까 와서 얘기하자고...”
“그래요? 특별한 일 있었어요?”
“그런 일은 없었지만 소환하려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건 거 아니라고 생각해요.”
“불안해요,”
“맘 굳게 가져요. 언제 북에 가요?”
“아직 날자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아마 이달 중순 쯤?”
“그럼 며칠 안 남았네. 가기 전에 우리 꼭 만나야 해요. 모래 싱가포르로 귀임하니까 그때 어떡하든 봐요.”
“...”
“왜 대답 없어요.”
“이번 가면 못 올지도 몰라요.”
“채영씨, 꼭 다시 올 수 있어요.”
“나도 그렇게 믿고 싶지만 아버지가 안 보내실 거예요.”
“무슨 수를 쓰던 다시 나와야 해요. 알았어요? 우리 지금 전화로 얘기해요.”
“전화 못해요.”
“지금 어디?”
“잠간 화장실에서...”
“전화 언제 할 수 있어요?”
“밤에 시간 봐서요. 카톡 이만 해야겠네요”
“나중에 꼭 전화해요.”
“네.”
“사랑해요.”
“♥♥♥”
지섭은 전화기를 들고 한참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편집국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마감이 끝났지만 아직도 편집국 안은 어수선 했다.
지섭이 편집국장석을 보니 마침 일면 대장(신문 나오기 전에 보는 가 편집판)을 보고는 최종사인을 한 후 화장실 쪽으로 가고 있었다. 사회부 쪽을 보았다. 손 부장은 격전을 치른 듯한 마감을 끝내고 지쳤는지 의자 뒤로 머리를 젖힌 채 목운동을 하고 있었다. 지섭은 손 부장 쪽으로 갔다.
“긴급하게 상의드릴 일이 있습니다.”
지섭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손 부장은 그의 심상치 않은 얼굴표정을 잠시 보더니 말했다.
“우리 오랜만에 차 한 잔 할까?”
그들은 회사를 나와 길 건너에 있는 단골 찻집으로 갔다. 차를 주문하고 손 부장은 지긋이 지섭을 건너다 보았다.
“무슨 중요한 일이 있는 거 같은데?”
“네, 조금 전에 민채영씨 한테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 무슨 긴급한 상황이라도 있나?”
“채영씨 아버지가 저와 채영씨가 접선하는 것에 대해 질책했나 봐요. 아버지가 크게 화를 내며 본국 소환 명령을 받았어요. 아마 북쪽으로 가면 쉽게 내보낼 것 같지 않아요.”
“민채영씨가 가버리면 백두산 작전에 대한 자세한 후속 정보가 끊기잖아. 이거 문젠데...언제 북쪽으로 가나?”
“이달 중순 쯤 이라니까 며칠 안 남았어요.”
“그럼 가기 전에 빨리 싱가포르에 가서 비상수단을 써야지.”
“비상수단이라면 민영대씨 가족들이 망명하도록 채영씨를 설득하는 거 말입니까?”
“쉽지는 않겠지. 민채영씨가 얼마나 굳게 결심하고 우리에게 동조해 주느냐 하는 것도 확실치 않지만 민영대씨가 과연 딸의 말에 동조하느냐 하는 거...쉽지 않지.”
“저번에도 말씀 드렸지만 민영대씨는 자신이 개발한 핵무기가 막상 실전에 사용된다는 점에 엄청난 고뇌에 빠졌다고 합니다. 어떻게든 전쟁을 막아보려 하겠지만 최후에는 중대 결심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해외에 망명해서 세계여론에 호소하는 거 같은...”
“북한을 배신하는 건 대단한 모험일거야.”
“채영씨 말로는 북한에 민 박사에 동조하는 세력이 노동당과 군부에 적지 않게 있다고 합니다.”
“그 세력들이 대세를 장악하면 어떻게든 전쟁은 막을 수 있을텐데...일단 강 국장 하고 국제부장과 상의해 보고 지섭이 자네는 빨리 싱가포르에 귀임해서 채영씨를 만나.”
손 부장은 지섭을 쳐다보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그 아가씨가 북한으로 완전히 가기 전에 잡아야 될 거 아냐.”
‘저도 그게 급합니다. 빨리 가서 채영이 북한으로 가지 못하게 하거나 가족과 함께 해외로 빠져 나온다는 결심을 받아내야 합니다’
지섭은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손 부장과 지섭은 곧 회사로 들어가서 강 국장, 국제담당 부국장, 국제부장, 정치부장과 함께 별실로 들어가 긴급회의를 가졌다. 긴급 상황을 전해들은 강 국장이 말했다.
“역시 민영대 부총리 일가의 망명 작전이 가장 확실한 해결책이지. 그런데 그게 실패할 경우에는? 민채영 만이라도 탈북 시켜야 하는 거 아닌가.”
“그건 민채영과 북한에 남은 가족에게 큰 불행이 아닐까요. 민채영이 가족과 떨어져 망명한 뒤 북한에 남은 가족에게 엄청난 박해가 따를텐데요. 민채영은 그렇게는 안할 사람입니다.”
지섭이 말했다.
“민채영이 혼자 탈북 한다면 남은 가족에게 엄청난 재앙이 덮치겠지. 그 여자도 굳이 그런 불행을 자초하지는 않을 거야. 현재 북한에서 그런대로 대접받고 살고 있지 않나. 그렇지만 북한으로 들어가서 그 여자가 영영 못 나온다면 정보라인이 끊어진단 말야.”
강 국장의 말에 국제담당 부국장이 제안했다.
“망명 작전이 실패할 경우를 생각해서 민채영이 본국에 소환 돼 들어간 뒤에도 서로 연락할 수단을 강구해 놓으면 되지 않을까요.”
“그런 비상 연락 수단을 생각해 보지. 어이 박지섭씨, 어떤 방법이 좋을까.”
“북한으로 가면 민채영씨와 연락할 통신수단은 없고 어떤 명목으로라도 우리 취재진이 북한으로 가서 서로 사전에 약속된 접선 방법으로 연락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전에 민 부총리 일가의 망명을 적극 추진하는 게 더 좋습니다.”
지섭이 주장했다.
“박 특파원을 빨리 싱가포르에 귀임시켜 민채영씨를 어떡하든 설득해서 가족이 모두 망명하게 해야 합니다. 지금 시간이 없어요.”
손 부장도 거들었다. 강 국장이 이어 말했다.
“백두산 작전은 아직 보도하기 전에 좀 더 확인해야겠지만 우리 신문으로서는 역사적 대 특종이 될 수 있는 기사거리야. 물론 민채영씨를 비롯한 민씨 일가의 신변안전을 위해서 기사소스는 절대 비밀이고 그저 우리 취재진이 확인한 기사로 써야 될 거요. 일단 이 기사가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비밀을 지키도록 기자들을 철저히 단속하시오. 팩트가 확인되면 보도합시다.”
그러면서 강 국장은 눈살을 지프렸다. 소심한 사장과 주필이 국내 좌파와 북한의 눈치를 보느라고 보도를 극력 반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그런 계획이 없다. 대한신문이 꾸며낸 허위날조 기사라고 우기면 우리 신문만 낭패를 당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다음 날, 서울 경찰청 앞 생태매운탕 집.
지섭은 사건기자 시절 가까웠던 차대환 경무관과 만나 술잔을 주고받았다. 일선 경찰 출입기자 시절부터 절친이었다. 차 경무관은 중부경찰서장을 거쳐 경찰청 정보과장으로 승진했다.
“박 기자, 그래 특파원 재미가 어떻수?”
“사건기자 할 때가 좋았지요. 좀 고생은 했지만 신명났지. 차 과장 혈색은 좋아보이네.”
“허 헛, 박기자가 기사로 조지지 않으니까 혈색이 돌아오나 본데.”
“이거 서운한데요. 나 보고 싶지 않았우?”
“보고 싶었지. 그 왜 대동일보 서 기자 있잖우. 그 친구하고 몇몇이 죽이 맞아 명동에서 시작해 신사동, 서초동으로 밤새 돌아다니며 마시던 생각 안 나우?”
“그 때가 그리워요. 서 기자 잘 있어요?”
“아 참, 박 기자 모르던가. 서 기자가 기사 문제로 부장한테 대들다가 지금 국제부로 발령 나서 내근하고 있어요.”
“그래요? 그 친구 성격이 괄괄해놔서... 유능한 기잔데...”
“박 기자 하고는 라이벌이자 좋은 친구였지. 그건 그렇고 싱가포르 그놈의 데는 깨끗하기만 하지 술 마실 데도 없고 무슨 재미로 지냈수? 멋진 아가씨라도 하나 꿰차지 않고...”
지섭은 그 말에 불현 듯 채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섭이 깊은 한숨을 쉬다가 문득 물었다.
“요즘 북쪽 동향은 어때요?”
“그놈아들 이랬다저랬다 하니 뭐라 해도 믿을 수가 없네. 박 기자니까 믿고 하는 얘긴데 뭔가 내부적으로 복잡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 냄새가 난단 말씀이야. 우리 경찰 정보도 그렇고 청와대, 국정원 쪽에서 흘러나오는 얘기가 심상치 않아요.”
“심상치 않다뇨?”
“북쪽에서 중요한 일을 꾸미고 있는 느낌이랄까, 불안해요. 해외 특파원 하고 있으니까 뭐 이상한 낌새 없어요?”
지섭은 북한이 지금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 같다는 정보만 귀띔 한 채 좀 더 자세한 정보가 있으면 알려 달라고 했다.
그들은 오랜만에 회포를 풀며 밤새워 마셨다. 얼큰하게 취해 어깨동무를 하며 밤길을 걷던 지섭이 말했다.
“차 과장, 지금 사모님이랑 연애할 때 어땠수?”
“아이구, 말도 말아요. 이 소도둑놈 같은 나 싫다고 도망 다니는 걸 온갖 아양 다 떨어 결혼 승낙 받지 않았수?”
“차 과장도 그런 일면이 있었네.”
“나 이래뵈도 그 뭐냐, 로맨티스트요.”
차 과장은 지섭의 표정을 슬쩍 살피더니 한마디 했다.
“박 기자, 지금 연애하지. 내 눈 못 속여요.”
“연애는 뭘...”
“그러지 말고 털어놔 봐요. 고민거리가 있으면 이 몸이 상담도 해 줄 테니까.”
잠시 후 지섭이 말했다.
“차 과장이니까 털어놓지요. 나 어떤 여자가 좋아졌수.”
“히야, 천하의 박 기자를 사로잡은 그 아가씨가 누굴까?”
“지금 얘기할 수는 없어요.”
“흠, 사연이 있는 아가씬가 보네. 그러니까 더 궁금해지는데...”
지섭이 허공을 보았다.
“박 기자, 그 아가씨, 많이 사랑하는가 보오.”
“그래요.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할 텐데, 때가 되면 모종의 도움 좀 부탁해요.”
건장한 덩치답지 않게 예리한 눈치를 가진 차 과장은 아까부터 지섭의 심상치 않은 기색을 눈치 채고 있었다.
“이번에 중대한 일로 회사에 온 거요?”
“이 한반도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데...”
“전쟁이라... 북한에서 뭔가 움직임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구려. 그게 아까 그 홀딱한 아가씨와 무슨 상관이라도 있는 거유?”
“미안해요. 오늘은 이 정도로만 알아둬요.”
“박 기자 자세한 말 지금 안 해도 돼요.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요.”
차 과장은 술 취한 사람 같지 않게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남산 중턱에 있는 호텔의 로비 라운지 에메랄드.
은경은 오랜만에 지섭을 만나기로 하고 기다리면서도 어쩐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동안 지섭에게 문자를 여러 차례 보내고 전화를 해도 뭐가 바쁜지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모처럼 귀국했으면서도 날 만나고 싶지도 않은가봐. 오빠가 뭔가 변했어. 이번에 단단히 따져봐야겠어.’
은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지섭이 입구에 나타나 은경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새침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갑자기 신문사에 일이 생겨 늦었어. 미안...”
“오빠 만나기 힘들다. 나 안보고 싶은가 봐.”
“그렇게 됐다. 오랜만에 귀국하니 여러 가지 일이...”
“얼굴도 잊어버리겠어, 이젠...”
두 사람 사이에 잠간 침묵이 흘렀다.
“오빠, 뭔 일 있지? 중대한 일이 있어서 들어온 거 아냐?”
“중대한 일은 무슨...”
“아니야. 내 눈은 못 속여. 싱가포르에 심상치 않은 일 있지?”
“은경아. 맥주 마시자.”
지섭은 맥주잔을 들고 은경의 잔에 부딪치고는 두어 모금 들이켰다. 은경은 마지못해 잔을 부딪치고는 그대로 내려놓다가 무슨 생각인지 그대로 꿀꺽 꿀꺽 마셨다.
“왜 술을 그렇게 급히 마셔.”
“나 오늘 취해볼까.”
은경은 잔에 남은 맥주를 단숨에 다 마셨다.
“나 오빠 맘 다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 지금 맘 다른데 가 있지?”
“은경아. 내가 중대한 일로 귀국한 거 사실이야. 그치만 이번 일은 우리 신문이 총력을 기울여 추진하는 극비 사항이기 때문에 나중에 알려줄게. 미안...”
“몰라, 몰라. 술이나 더 마셔. 아니 그럴게 아니라 우리 어디 가서 춤춰.”
은경이 발딱 일어서 먼저 걸어 나갔다.
잠시 후 호텔 나이트클럽 안.
은경이 플로어에서 신나게 춤을 췄다. 몸이 비틀거렸다. 지섭도 취해 함께 춤을 추면서도 정신은 말똥해졌다. 신나게 울려 퍼지던 음악이 블루스 곡으로 변했다. 그들은 천천히 춤을 추었다.
“오빠.”
은경이 지섭을 불러 놓고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오빠. 나 좋아해?”
그녀가 힘들게 말했다. 발랄하던 평소와 많이 달랐다.
“그럼 좋아하지. 은경이는 언제나 귀엽고 사랑스러워.”
“아니 그렇게 좋아하는 거 말고 날 사랑하느냔 뜻이야.”
“은경아, 난...”
“것 봐. 대답 못하지. 맨 날 동생 취급만 해.”
그녀는 휙 돌아서 자리로 가버렸다. 자리로 돌아온 은경은 술을 들이켰다.
“오늘 너무 마시는 거 아냐?”
“무슨 상관이야. 내가 마시는데...”
지섭이 은경이 든 술잔을 잡자 그녀는 술잔을 탁 내려놓고 지섭을 빤히 보며 말했다.
“오빠, 나 이월중순에 싱가포르 출장 갈 거야.”
“뭐? 무슨 취잰데?”
“세계에서 가장 앞서 가는 싱가포르 항구의 물류 인프라와 모범으로 알려진 공무원 시스팀 같은 거...”
순간 지섭의 머리가 띵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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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세계적으로 일루미나티, 프리메이슨, 빌더버그 같은 비밀조직이 존재한다. 그들 조직은 인류사회의 공존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지배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돈, 권력,명예,핵, 인구 등을 지배하여 세계를 그들 의지대로 움직이려고 한다는 것이다. 거대 마피아 집단임에 틀림없다.
이 글에 나오는 북한의 ’인스펙터나’ 러시아에 본부를 두고 A-1.B,C,D,의 이름으로 활약하는 비밀조직도 그런 부류인듯하다.
채영이 밝힌 북한의 거대 음모를 일개 특파원인 지섭이 어떻게 막아낼 수 있을까.국가를 구하는 일, 대의 앞에 지섭과 채영의 사랑이 희생되지는 않을까.
10월1일 북한 노동절에 핵침공<백두산>작전 계획은실현 될것인가.
동감입니다. 국내에서는 금서(禁書)에 해당되는 책들이 많이 있지요.
그 내용들이 픽션을 넘어,,소수가 모든 인류를 지배하는 그 방법과 조직은 상상을 초월하는 사실 같구요..
분단 국가의 러브 스토리가 물과 기름의 이질감을 초월하는 것이 우선은 반갑고..아름답고...
그렇다면,,김광섭 작가님의 리드에 따라가도록 하지요.. ㅎㅎ
수자의 열변이 섞인 도서 해설에 참말 동감하며...
지고지순한 사랑이 이념에서 사는 자들에게도 남아 있을까 의문이 일었네요.
흥미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