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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도사 사주 --
-1935년 11월 22일 기유시 경남 함양군 서상면 옥산리 439번지에서 출생하다. 호는 제산, 필명 박재현, 이름은 박병태, 진주농고를 졸업하다. 지리산 백운암(함양군 마천면)에서 청허선사를 은사로 구령삼정주를 수도하며 도학적 영성을 수행해 명리학에 접목을 시키다. 계룡산에서 仙佛家眞修語錄(백운산인 청허(윤일봉)선사 저)을 발행하다. 2001년 중풍으로 귀천하다.
*, 청허선사는 윤일봉이라는 사람으로 함양군 함양읍에서 한약방을 하면서 道를 닦는 수도를 하였고 그 道가 무르익을 무렵 모든 것을 정리하고 지리산에 들어가 산생활을 하면서 수행해 道를 이뤄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사주간명--
乙亥생 돼지띠가 추운 엄동설한의 초저녁 촛불과 같은 丁火의 기운으로 태어났다. 일간 丁火는 실령하여 卯木에 의지하려 하나, 卯酉로 상충하여 의지하기 어렵고, 멀이 있는 乙木은 亥水에 앉았으나 戊土에 가로 막혀 丁火를 도울 木氣가 겨울 차가운 물살에 얼어 붙어 불기운을 도울 수가 없는 형편이다.
월령에서 壬水가 사령하고 지지에 金水가 강하니 관살의 위협으로부터 丁火를 지켜야 하는 절박함이 있어 보인다. 찬 겨울 바람을 가로 막아주는 戊土가 지지의 관살인 水氣를 제압해 丁火가 안심이 되는 형상이다. 상관제살격으로 戊土를 용하고 싶어진다.
상관제살격으로 머리는 영리, 비상하고 박학다식하나 규칙적인 학교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나라의 규율과 법질서를 무서워하지 않으며 자신의 재능으로 능히 상대를 제압 하려 해 일찌기 영특함으로 낭인처럼 떠돌며 공부하고 기도하며 영통했다고 한다.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으로 농부면 농부대로, 장관이면 장관대로, 정치인이면 정치인대로 대화로 상대를 제압하니, 상관제살의 위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丁火는 추운 겨울 초저녁에 모닥불이나 촛불과 같이 추위를 녹이고 초저녁 어둠이 깔리는 밤을 밝히듯이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촛불, 달빛과 같은 형상으로 만인의 등불과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캄캄한 밤길을 걷는 상담자에게 밝은 등불처럼 속시원하게 갈 길을 제시해 주었으며, 상관이 관살을 제압하니 아무리 높은 관직의 사람앞에서도 당당하게 기죽지 않고 그들을 상대하였던 것으로, 오히려 그런 분들이 제산 박재현(박도사)앞에서는 고분고분하고 맥을 추지 못했다고 본다. 제산(霽山)선생이 중생구제를 하는 역학을 하지 않았으면 당대의 암흑세계의 큰 보스가 되었지 않았을까....,
박정희 대통령시절 박대통령이 직접 함양군수를 하라고 해도 사양했다는 일화는 유명한 얘기로 전해져 내려 온다. 이런 고위직도 사양하는 것은 상관의 위력이리라. 제산(霽山) 선생은 일생을 세상의 어둡고 캄캄한 중생구제에 힘을 쏟았으며, 국사에도 깊숙히 간여 하여 나라의 대사결정에도 관여했다고 한다.
卯酉가 상충하니 가정운이 불우하여 가정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해 평생을 떠돌며 살았고, 子卯형살로 편인이 형살로 부서지니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남의 보증을 섰으며, 시지의 편재가 卯酉로 상충하니 본인 명의로 재산을 지니지 못하고 부인이 재산관리를 했다. 시주에 식신생재하여 많은 재물을 거둬들였으나 문서운과 편재가 충돌하여 깨어지니 남의 빚보증으로 재산을 날리게 되었다. (실제 박정희 維新시절 담배갑에 幽神이라고 써 정보부 에서 고통을 당할 때 잘 봐준 사람의 빚 보증을 서 후일 말년에 시달림을 많이 받았다).
중년이후에는 부산의 수영초등학교 근처에 자리를 잡고 전국에서 몰려드는 고객들을 상대 하면서 하루에도 많게는 사십명을 감정했다는 말이 있으니 그 체력이 어떻게 감당을 해내 었는지 모를 일이다. 하루는 노개식선생이 부산의 제산(霽山)선생을 찾아 가 "이제 그만 일선에서 물러나서 고향에서 노년을 보내는게 어떠 하느냐?"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노개식선생은 남원군 인월-지리산 기슭-에서 한약방을 하였는데 제산(霽山)선생이 자주 찾아가 기숙을 했다).
그 후에 제산(霽山)선생은 부산생활을 접고 고향에 제자양성을 위하여 큰 규모의 서당인 덕운정사를 세우면서 고생했다고 한다(밑에 있는 사진에서 1번째는 생가, 2,3,4번째가 덕운정사이다). 환갑이 다 되어가는 노년에 집 짓기가 얼마나 힘든 역사임은 능히 짐작이 갈만하다. 옛말에 나이들면 집을 넓히지 말라는 말이 있듯이 그런 힘든 역사를 하면서 건강을 해친것이 아닌가 하는 분들이 더러 있다.
환갑인 壬午대운의 乙亥년에 갑자기 중풍이라는 질병을 얻어서 7년을 고생하시다가, 辛巳대운의 2001년 辛巳년 丁酉월 壬午일(음력 7월 29일)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대운 午火가 월령의 왕수인 子水를 상충하니 왕수가 노하여 중풍이라는 질병이 온것이 아닌가 싶다. 돌아가신 대운인 辛金은 편재로 乙木을 충하고 일간 丁火를 빛이 흐리게 하고, 丁酉월의 酉金이 일지와 卯酉로 상충하고, 壬午일의 壬水가 일간 丁火를 합하여 묶으며, 午火가 월령 子水를 상충하니 그만 졸했다.
일설에 의하면 제산(霽山)선생이 발병한 그 해에 官에서 고향 乙海저수지에 포크레인으로 준설공사를 하면서 저수지 둑을 절개해서 중풍이라는 병이 왔다고도 한다. 乙亥명당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분이 그 명당의 氣가 흐르는 저수지를 절개하였으니 발병한(同氣感應) 것이다 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으니 그럴만도 하다(풍수지리).
67세라는 비교적 아쉬운 나이에 제자육성도 제대로 하지 않고, 그의 박학다식한 학문을 제대로 저서 등으로 남기지 못하고 가신 것은 많은 역학자들이 대단히 아쉬워 하는 것이다. 근대 한국 역학계에서는 100년에 한명 나올까 말까하는 인재라고 칭송하면서 그를 기리는 것이다.
--필자는 올해 추석날 제산(霽山)선생의 생가를 방문한 적이 있다. --사진--
(생가, 덕운정사 서당)
(친필간명지를 확인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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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9.12. 추석날)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2011년의 추석날, 고향산천 아침은 언제나 낙동의
江 청취가 어릴적이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강가 암바위에 앉아 있노니 옛날의 그림자들이
주마등 되어 지나고 세월의 무상함과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의 화두가 사그라 들지를
앉는다.
인생무상, 佛, 象이 없는 변화의 그림자, 易..., 이러다가 추석이 앉아서 보내지면 안되지,
가부좌를 풀고 일어나 선조들이 계시는 선산으로 가 배례하고, 아버지 어머니 산소를
돌보며, 먼저 간 작은 형의 산소를 둘러 보았다. 이 형은 언제나 눈시울을 붉히게 하는
형이다. 허!
산을 내려와 함양 上林으로 차를 몰았다. 風流道의 최치원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다.
신동으로 태어난 선생은 당나라 유학에서 천하에 학풍을 날리고 돌아와 여기 함양의
태수로 있으면서 물 범람의 방제를 위해 이 상림에 나무를 심고 벌레가 생기면 내가
저 세상으로 간 것으로 알라는 말씀을 남기고 선유동 계곡에 들어가 신선으로 천화(天化)
했다는 전설이 있다. 벌레들이 있나 없나를 살폈더니 벌레들이 있었다. 신선이다!
최치원 선생은 우리나라의 고유한 사상을 풍류도(風流之道)라고 했다.
조의선사, 화랑도, 선비정신이 아우러진 風流道인 것이다. 나는 신선도(神仙道)라 하지만...,
上林을 중앙 숲길로 빠짐없이 걸어 내려와 현대 명리의 신화적인 존재 박도사(제산
박재현)를 만나러 떠났다. 서상IC에서 물었더니 추석을 당직하는 남자의 검표원은 몰랐다.
관광 안내지를 받아 차를 옆에 대고 면사무소로 전화를 했다. 경남 함양군 서상면 옥산리
439번지라고 했다.
면직원이 알려준대로 차를 몰고 가 박도사(제산 박재현) 생가와 웅장하게 지어놓은
서당(덕운정사) 앞에 주차를 하고 둘러 보았다. 생가에는 동네 어른 말씀대로 박도사
(제산 박재현)의 부인(전씨, 2011년 올해 73세)이 살고 있었는데 부산 아들집에 추석을
쉬러 가고 없었다.
묵례하고 사들고 간 과일박스를 처마 밑에 내려 놓고 생가를 한방 찍었다. 그리고 서당,
몇 바퀴를 도는데 문이 잠겨 들어 갈 수가 없었다. 관리를 하고 있는 처남되는 분이 한참
후에 오더니 어디서 왔느냐, 서울서 왔다. 뭐 하러 왔느냐, 박사학위 논문으로 박도사(제산
박재현)의 理氣法이다로 인사를 나눈 후 사진을 찍어도 좋다는 허가를 받고 들어가 한참
서당(덕운정사)을 둘러 보면서 사진을 다섯방 찍었다.
잔듸에 앉아 仙道를 닦는 지리산 산사의 정좌한 박도사(제산 박재현)을 보았다.
함양군 마천면 백운암이다(여기서 잊지 못하는 사부인 청허선사에게 10년동안 道學 사사를
받았음, 소리(물을 관하며)에 집중하는 능엄경의 개운조사파의 맥이다).
최치원선생 선도(풍류도)의 후예들이다. 명리를 달통후 격물취지로 세상을 헤아리며 山에서
수행을 하고 道를 닦아 인간적인 술사가 되라고 우라부락한 얼굴로 힘차게 강조하고 있었다.
명리학에 道學을 접목시키기 위해 구령삼정주(도교의 주문)를 읊고 있었다.
주문이란 신선이 되기 위해 神들을 설득하는 소리다. 우뢰(震)의 神, 소리를 숭배하나 보다.
거기서 영성이 계발되고 눈이 밝아져 훤히 볼 수 있었던 거다. 그래서 격국용신을 무시하고
용신보다 희신을 중요하게 여기며 사주의 흐름을 중시했을까? 이 암자에서 山寺에 전수되어
오는 수장법을 익힌 것일까? 理氣를 논하며 포태를 돌리고 간지의 합충을 충합시키며 문점
자의 찾아온 시간에 五行을 대입하면서 선제기압으로 찔러대는 낙화법을 달통했을까?
또 六爻와 닮은 월령도는? 월령도는 여수 문둥이 술사보다 나았을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명상은 한이 없었다. 여기에도 장서가 없었고 자료가 없어 못내 아쉬웠다. 대포만 한대포
했을 뿐 박도사(제산 박재현) 친필간명지도 감정을 할 수 없었다. 월령도, 이기법, 마야법,
낙화법, 수장법, 등 비법들을 실제로 몹시 보고 싶었고 박도사(제산 박재현) 친필간명지도
감정을 해 보고 싶었던 거다. 하기사 책 한권 안 남기고 자료도 없기로, 그리고 제자를 안
남긴 그분의 성격 아닌가. 동네 중년되는 분의 말씀 (거나하게 한대포 하면서), 초등학교
동창회도 딱 한번 나가고 일체 동네와 지역을 위해 일을 보신 게 없단다. 그 많이 벌은 돈도
이 서당(덕운정사)을 짖는 외에 친인척에게 나눠 준 사실도 없다. 한번 봐 주는데 크게는 집
한채 값이었다는데 좀 쓰시지 참. 식신생재 편재성이라 남을 위한 씀씀이는 컸었던가 보다.
박정희 維新시절에 幽神이라는 간명을 해 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이 때 잘봐주던 사람의 빚보증으로 훗날 말년에 심하게 시달렸다. 술과 줄담배로 식사를
안하시는 대꼬챙이의 성미이시라 몸이 허약했고 병고(중풍)를 앓다가 일찍 돌아 가셨단다
(2001년도 귀천-일설에는 뒷산인 극락산 을해명당에 할아버지가 묘를 썼는데 저수지 둑을
官에서 파내어 同氣感應으로 중풍을 얻었다고 하고, 덕운정사를 노년에 무리하게 공사하느라
풍을 맞았다고도 한다). 壬午대운에 午火가 월령 子水를 자오상충으로 그만 졸했으리라.
천하의 명인달사인 박도사(제산 박재현)께서도 생로병사의 윤회는 벗어날 수 없었던가 보다.
막걸리 한잔 부어드리고 배례라도 올리고 가야 하는데 방문들이 잠겨 있어 방문틈으로
들여다 보는 아쉬움만 남을 뿐 어쩔 수가 없었다. 장서! 자료! 없었다. 아쉽지만 다시 훗날
내려 와 부인과 부산의 아드님, 서울의 동생분을 만나 내가 소장하고 있는 장서들 몇권이
진본인가, 짜가인가도 가려 보리라 생각하면서 옥산리를 떠나 고속도로에 차를 올렸다.
달려 올랐다. 허무했다. 니힐(nihil)리야, 니힐(nihil)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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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주 잘 읽었습니다. 역학에 통달한 도인들도 易의 기로에서 어두울 수 있군요.
진솔하신 글에서 님이 느껴집니다. 고맙습니다.
해운을 격국용신으로 보아야 하는 건지 억부용신으로 보아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대부분 신강신약으로 해서 억부로 많이 보는 경향이 있는데 공부해도 모르겠네요
역학에는 천재였지만 감히 한 마디한다면 인간적인 성숙은 부족한 사람이었군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역학에서는 굉장히 유명하신 어른인데 이 카페에서 또 글을 읽으니 전에 선생님에 대해 읽었던 글이 떠오릅니다.
lY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