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면이 바다인 반도의 땅. 원하기만 하면 몇 시간 내에 바다를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은근히 다가왔다가 조심스레 멀어져가는 서해, 따뜻하고 다정한 남해, 시원하고 푸른 동해. 바다는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을 지닌 채 사람들의 마음을 늘 설레게 한다. 삭막한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바다는 언제나 그리움과 동경의 대상이다. 한여름의 뙤약볕 아래 화려한 수영복을 입은 피서객들의 떠들썩함에서부터,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한겨울의 적막하고 쓸쓸한 바다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모든 바다는 언제나 모든 것을 다 받아줄 듯한 어머니의 표정을 한 채 항상 그곳에 있다.
이번 여행은 강릉에서 삼척까지 동해안 58km를 달리는 바다열차에 몸을 싣는 것. 바다, 해안선, 열차라는 지극히 낭만적인 이 단어들과 존재들이 조합해 만든 동해안 바다열차는 도대체 얼마나 낭만적일까. 기대에 부푼 채 아침 일찍 서울을 출발해 강릉에 도착한다. 강릉은 관동팔경 중에서도 으뜸이라는 경포대와 경포호, 경포해수욕장으로 유명한 곳.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태어난 오죽헌 역시 강릉에서 꼭 둘러보아야 할 곳이지만 열시 반에 예약된 바다열차를 위해서 아쉽지만 강릉에서의 다른 즐거움은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강릉역은 소도시의 작은 기차역답게 소박한 모습으로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역 앞의 넓은 광장, 관광안내소, 한적한 거리, 한가로운 가게 주인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 모든 것이 슬로 모션으로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며 마치 소설 속의 어느 공간으로 들어서는 듯 발을 내딛는다.
|
바다열차는 3량으로 연결된 아주 작은 열차다. 열차 외부는 바다를 연상시키는 파란색과 밝은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고 해변을 연상시키는 파라솔과 물놀이 기구들이 그려져 있다. 창문의 크기는 일반 열차와 다르게 더 큰 시야를 확보할 수 있도록 되어 있고 좌석 역시 바다를 바라볼 수 있게 특수 제작되었다. 프로포즈실과 일반실, 특수실로 구분된 120여 석이 전부.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자리가 없을 정도로 인기가 좋다고 한다. 어느새 모여든 사람들이 삼삼오오 기차에 오른다.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있다. 누구와 함께 와도 좋으리라. 지정된 좌석에 앉자 시간에 맞춰 열차가 출발을 한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머리 속에서 효과음이 들려오고 바다열차는 열심히 달리고 있다. 강릉 시내를 벗어나는가 싶더니 이내 시골 풍경이 이어진다. 논과 밭이 있고 나지막한 산도 있다. 나뭇잎들이 바로 손에 잡힐 듯 나무들은 기차길옆에 바짝 붙어 있기도 하다. 개천이 흐르는가 하면 신작로라고 할 만한 크고 작은 길들이 얽혀 있기도 한 풍경들이 무심하게 창밖으로 사라져간다. 그리고는 마침내 한 순간, 눈앞에 바다가 펼쳐진다. 살아 있는 듯 넘실대는 거대한 바다가 끝도 없이 드넓기만 하다. 태곳적의 기억부터 온전히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바다.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절대적이고 압도적인 바다의 위용이 서서히 드러난다.
| 바다를 끼고 달리며 제일 먼저 도착한 역은 정동진역이다. 정동진은 서울 광화문에서 정동쪽에 위치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도 바다와 가장 가까운 기차역이라고 하는데, 오래전 <모래시계>라는 드라마를 통해서 유명해진 이후 데이트코스로 자주 애용되는 곳이기도 하다. 일출을 보기 위해, 또 바다를 보기 위해 연인들은 밤차를 타고 정동진을 향한다. 정동진역과 바다는 바로 맞닿아 있고, 역 주변에는 해수욕장뿐 아니라 모래시계 공원 등이 조성되어 있다. 관광열차라고 해서 정차시간이 특별히 더 길지는 않다. 승객의 승하차를 위해 잠시 정차하는 것일 뿐. 열차는 인정사정없이 정해진 시간에 묵묵히 출발하고, 부지런히 해안선을 달린다. 바다열차라고 하지만 바다가 보이지 않는 구간도 꽤 여러 차례 반복된다. 그럴 때 열차 내에서는 음악을 틀어주고 열차 내 방송을 통해 관광열차를 탄 사람들의 특별한 사연을 소개하거나 이벤트를 진행해 선물을 주기도 한다. 동해에 오면 아름다운 바다를 보면서도 항상 안타까운 마음이 생기곤 한다. 바닷가에 쳐진 가시철조망 때문이다. 바다열차 역시 가시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바다와 생이별을 당한 듯 좀처럼 대면하지 못한 채 내달리고 있다. 길게 늘어선 철조망, 곳곳에 세워진 초소는 낭만적인 바다의 즐거움을 만끽하지 못하게 하며 문득문득 분단국가로서의 현실을 직시하게 해준다. 바다열차가 달리며 차례로 나타나는 묵호역과 동해역. 차창 밖으로 보이는 오토캠핑리조트에서는 자동차와 텐트가 어우러져 피서지의 유쾌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소나무 숲 건너 모래사장에서는 해수욕이 한창이고, 관광열차를 발견한 꼬마와 아빠는 열심히 손을 흔들며 인사를 전한다.
추암역에 다가서자 바닷가 어촌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추암은 해변의 촛대바위와 일출로 유명한 곳. 해안절벽, 칼바위, 촛대바위라 불리는 크고 작은 바위섬이 절경을 이루고 있는데, 특히 촛대바위는 촛대처럼 길게 생긴 바위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세조 때 한명회가 강원도 제찰사로 있을 때 추암에 와서 그 경치에 반해 ‘능파대’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고 한다. 바다열차는 삼척해변역을 지나고 마침내 종착역인 삼척역에 도착한다. 1시간 15분 정도의 시간이 꿈결처럼 흘렀다. 너무 많은 기대를 했던 탓일까. 무언가가 부족한 듯, 조금 아쉽기도 한 마음으로 천천히 열차에서 내린다. 바다열차에서 내린 관광객이 서둘러 빠져나간 삼척역은 고요하기만 하다. 종착역임에도 불구하고 어딘가로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철로들이 어지러이 늘어서 있고, 작은 역사 앞에는 봉숭아를 비롯해 이름 모를 꽃들이 어여쁘게 또 수줍게 피어 있다. 탱글탱글 익어가는 청포도는 시골의 정취를 물씬 느끼게 해준다. 삼척역을 빠져나와 삼척항으로 향한다. 항구에는 어선들이 정박해 있고, 바로 옆에 있는 어시장에서는 펄떡이는 생선들이 이제나저제나 팔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태양의 뜨거운 직사광선은 거침없이 내리쬐고, 후텁지근한 바닷바람, 끈적이는 비린내가 온몸을 감싼다. 냉방된 바다열차에서 그저 눈으로만 보았던 바다가 오감을 통해 생생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삼척항에서 삼척해수욕장까지 4.6km의 새천년해안도로는 그야말로 해안선을 따라 구불구불거리며 뱀처럼 이어져 있다. 도로의 중간쯤에는 비치조각공원이 있어 10여 점의 조각품이 바다를 배경으로 멋진 포즈를 취하고 있고, 넓은 전망대에서 수평선을 바라보노라니 한없이 아득하기만 하다. 접혀진 파라솔들이 늘어서 있는 삼척해수욕장은 어느새 여름이 끝나가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막바지 피서에 몰두한 사람들은 바닷물에 흠뻑 몸을 적시고, 철썩이는 파도를 따라 모래사장을 거닌다. 사실 삼척은 동굴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삼척에 있는 환선굴은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석회동굴로 알려져 있는데 약 5억 3천만 년 전에 생성되었다고 한다. 환선굴은 국내에서 가장 웅장하고 신비로운 동굴 중 하나이고, 모노레일을 타고 동굴내부 140m 지점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해 놓은 대금굴 역시 삼척의 자랑거리. 동굴까지 갈 시간은 부족하기에 대신 터미널 근처의 엑스포타운을 들렀다. 동굴신비관, 동굴탐험관 등이 있고 석회 동굴, 용암 동굴 등을 재현해 놓은 곳. 여행은 언제 마무리를 하든지 아쉬움이 남기 마련이다. 출렁이는 바다를 뒤에 남겨두고 일상으로 돌아와야 할 때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바다는 언제나 그곳에 있을 터. 낭만이 그립고, 꿈이 그리울 때는 또 언제든 다시 찾을 수 있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