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세봉장군 전기 한국어판 출간에 부쳐>
1. 양세봉장군의 항일 독립운동
양세봉(梁世奉)장군[호: 벽해(碧海), 이명: 서봉(瑞鳳)]은 1920년대에서 1930년대에 걸쳐 중국 남만주 일대에서 치열하게 항일 독립 운동을 전개한 항일 민족 운동사의 큰 영웅이다.
양세봉장군은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3부 통합운동의 성과로서 성립한 국민부의 무장 항일 군사조직인 조선혁명군의 총사령관에 취임한 후, 중국인 항일운동 지도자들이 조직한 요녕민중자위군 등과 연합하여 영릉가 전투(1932년), 흥경성 전투(1933년) 등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는 한편으로, 수십 차례에 걸쳐 지속적으로 국내진공작전을 벌여나감으로써, 1930년대 항일 독립운동에 있어서 하나의 금자탑을 쌓아올렸다.
2. 우리의 근현대사와 현시대의 과제
돌이켜 보건대 구한말 이래 우리 한민족의 근현대사는 외세의 침략적 접근과 일제에 의한 식민 통치 그리고 강대국들의 패권주의적 행태에 맞서서 외세의 침략을 저지하고 자주적으로 근대적 개혁을 시도해온, 일제의 식민지 통치 체제를 분쇄하고 자주적 민족국가 건설을 갈구해온, 그리고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그간 이룩해 놓은 경제 발전과 민주화의 기틀 위에서 평화와 통일의 길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온 지난한 노력의 과정이었다.
그간의 이와 같은 지난한 노력의 과정에서 한국 민족주의의 주요 논제는 항상 동일하였다. 그것은 민족 내부의 갈등 요소들을 최소화하면서 민족적 통합을 공고화하고 이를 토대로 하여 외세의 부당한 간섭 내지는 침략적 접근에 맞서서 민족의 이익을 지켜내는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 민족에게는 그간 쌓아온 경제 발전과 민주화의 기틀 위에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화에 슬기롭게 대처해 나감으로써 한반도 평화체제를 공고화하고 더 나아가 북녘 동포들에 대한 민족적 통합까지도 추구해가야 하는 시대적 과제가 제기되고 있다.
이와 같은 시대적 소명에 부응하기 위하여서는 첫째, 민족구성원들 사이의 경제적 사회적 여러 갈등요소들을 최소화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을 고양시켜 내부적 통합을 공고히 하여야 한다. 둘째,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사회에서의 여러 행위주체들의 위상과 그들의 대한반도정책이 변화하는 추이를 예의주시하면서 평화와 민족적 통합을 위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적절한 대응방안을 구사하여 적극적으로 대처해나가야 한다.
3. 왜 양세봉장군인가?
1920년대에 중국의 만주 지역에서는 조선인 이주민들을 대중적 기반으로 하여 수많은 독립군 부대들이 활약하였으며, 이들은 조직의 정비와 역량의 강화를 위해 통합운동을 추진한 결과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3부를 정립하였고, 이 3부가 1920년대 후반에 통합운동을 벌인 성과로서 1929년에 국민부가 결성되었다. 남만주의 신빈현 왕청문을 그 소재지로 한 국민부는 자신의 모체가 되는 지도기관으로 조선혁명당을 창건하였으며, 조선혁명당의 무장 독립군으로서 탄생한 것이 조선혁명군이었다.
조선혁명당의 당의ㆍ당강ㆍ정책은 “진정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며, 국민전체생활의 평등을 확보”하고 “대규모 생산기관과 독점적 기업은 국영으로 한다”고 천명하고 있는 등 ‘사회국가 원리’와 ‘사회적 시장경제 원리’의 단초들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혁명당은 민족주의 이념에 바탕을 두면서도 민족구성원 다수의 권익을 옹호하는 진보적인 이념의 색채를 일정 정도 가미하고 있었던 것이다.
1922년 무장항일단체인 천마산대에 참가한 이래 시종일관 독립군의 중견간부로서 활동해온 양세봉장군은 국민부와 조선혁명당, 그리고 조선혁명군의 탄생과 함께 그 핵심간부로 활동하게 되었으며, 1932년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에 취임한 이후 1931년 만주사변 이후의 급변하는 만주지역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함으로써 대일항전에 있어서 괄목할만한 성과들을 산출하였다.
양세봉장군은 중국인들 사이의 고조된 반일감정에 부응하여 중국인 명망가들의 주도하에 결성된 요녕민중자위군 등과 적극적으로 연대함으로써 중국인들과 한국인들의 항일연합전선을 결성하였다. 항일연합전선의 결성 이후 양세봉장군은 공세적인 항일 무장 투쟁에 나서서 영릉가 전투, 흥경성 전투 등에서 일본 군대에 맞서 승리함은 물론 강화된 조직적 역량을 기반으로 국내진공작전에도 적극 나서게 되었다. 만주사변 이후 수년간, 남만주 일대를 지역적 기반으로 하여 국민부의 모체인 조선혁명당의 무장 독립군으로서 결성된 조선혁명군은, 양세봉장군의 지휘 하에 항일 독립운동의 일대 전성기를 맞이하였던 것이다.
양세봉장군이 지휘한 조선혁명군의 지도기관인 조선혁명당이 표방한, 민족주의 이념에 기초하면서도 진보적인 이념의 색채에 눈감지 않는 ‘개방적 민족주의 이념’과 항일 독립운동이라는 공동의 대의를 위해 중국의 애국적인 여러 세력들과 연대해나가는 양세봉장군의 ‘유연하고 현실성 있는 투쟁방략’은 민족 내부의 갈등요소를 최소화하고 급변하는 국제정세 하에서 평화와 민족적 통합을 추구해야 하는 현시대의 과제를 목전에 두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4. 양세봉장군 전기 출간의 의의
사실 양세봉장군은 1945년 해방 이후 정치적 주도세력들에 의해 애써 외면당해온 인물이었다.
좌우대립에 뒤이은 퇴영적 형태의 민족주의의 득세, 그리고 이로 말미암은 경직된 시대분위기 하에서는 전통적 민족주의에 기초하면서도 진보적인 사회적 조류에 눈을 감지 않는 개방적 자세를 견지한 국민부와 조선혁명당 그리고 조선혁명군의 정치적 지향성은 그 진가를 인정받기 어려웠다. 아울러 서울의 국립묘지와 평양의 애국열사릉 양쪽에 모두 묘소가 있는 그의 독특한 위상은 그간 남북대립이라는 시대적 상황 하에서 양세봉장군과 그가 지휘한 조선혁명군의 활약상에 대한 적극적인 논의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해왔다.
그러나 이제 이와 같은 상황은 타파되어야 한다. 편협한 퇴영적 민족주의를 넘어서서 진취적으로 평화와 민족적 통합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양세봉장군이 실천한 ‘개방적 민족주의’와 ‘유연하고 현실성 있는 투쟁방략’의 길에서 많은 시사점을 찾아내야 할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양세봉장군과 그가 몸담은 국민부, 조선혁명당, 조선혁명군의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새로운 조명작업이 절실하다 할 것이다.
양세봉장군 전기를 출간하는 것은 이 새로운 조명작업의 첫 삽을 뜨는 일이다. 향후 양세봉장군과 그가 몸담은 국민부, 조선혁명당, 조선혁명군의 항일 독립운동에 대해 많은 관심과 논의가 이뤄지고 그 관심과 논의가 앞으로 우리 민족이 나아갈 평화와 민족적 통합의 길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기를 기대한다.
끝으로 이 책이 출간되기까지 물심양면으로 수고해주신 동북아역사재단과 (사)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및 서울정책재단의 관계자분들, 그리고 본회의 조사위원으로 있는 김충석과 그 외 회원 여러분들께 감사드리며, 아울러 중국측 양세봉장군기념사업회의 풍옥충회장(요녕대 전총장) 및 강명추 사무총장과 요녕성 신빈현 신빈중학교의 이종현 교장선생님 등 번역작업에 도움을 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양세봉장군기념사업회 회장 안병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