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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장의 아이들'
첫 이민목회지인 캘리포니아 산타크루즈 인근에 소재한 몬타비스타 크리스천 스쿨의 한국 유학생들을 생각하며 쓴 글로 이들이 잘 자라 하나님과 조국의 동량이 되는 일에 지역교회의 기도와 사랑이 필요함을 알리는 내용입니다. (Vision Twelve 책 발췌)
외로운 목장을 찾아
산타크루즈에서 4년을 목회하며 느낀 것은 소수의 한인사회가 형성된 이 지역은 환경 여건상 교회 사역이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주님의 전도명령을 등한시해도 되는 면제사유가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은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마태복음 28:19)라는 것이다.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누가복음14:23)고 주님은 전도명령을 하셨다. 인간적인 긍휼 이전에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들의 구원을 위한 긴박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하나님 앞에서 책임적 존재로 살아야 한다. 사회적으로는 착하게 빛과 소금으로 살아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책임이며, 영적으로는 마땅히 영혼구원의 책임이다. 주변에 한인이 보이지 않는 것이, 이미 다른 교회 나가고 있는 것이 전도를 포기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요한복음 4:35) 라고 말씀하신 것같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변을 바라보면 영혼이 보인다. 건너와 우리를 도우라는 외침이 들린다.
몬타비스타 아이들은 또 하나의 예쁜 양들
몬타비스타의 한국학생을 알게 된 것은 산타크루즈 주립대학교(UCSC) 철학교수의 한국 부인을 통해서이다. 새로운 복음 전도 사역에 대한 설렘으로 담당 선생님을 만나 매 주 목요일 저녁 기숙사를 방문하여 활동하기로 결정했다. 50여 명의 한국 학생들에게 영적, 정신적인 도움이 필요하다는 학교 측의 부탁과 선교 사역을 찾던 나의 미션 마인드를 일치하게 하신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복음 전파의 자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렸다. 세상에 마음대로 복음을 전할 수 없는 곳이 많지 않던가! 매주 편하게 들어와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 여간 큰 축복이 아니던가!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0:15).
이들에게 복음전파가 시급하다고 판단한 것은 학교에서 영어성경을 가르치고 주일에 한 번 미국교회를 출석하는 것이 의무이지만 반 이상이 넘는 불신자와 일부 타 종파 신자는 물론 소수의 기독교 신자조차도 초보단계인 한국학생들에게 학교만의 종교교육은 쉽지 않다는 담당 선생님의 말에 고무되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고교에 재학중인 큰 아들과 동년배의 자식 같은 아이들인 까닭이었다. 드디어 시작된 몬타비스타 사역은 오랜 기간 동안 군목으로 전방초소나 격오지 부대를 야간 방문하는 일에 익숙했던 터라 과거 군 선교의 연장같이 편하고 즐거웠다.
작은 것에 기뻐할 줄 아는 순수한 아이들
돌이켜 보면 4년 동안의 몬타비스타 기독학교(Monte Vista Christian School) 사역은 잘 한 일이었다. 작은 수이지만 다섯 명의 학생들이 세례를 받고, 독실한 불교 집안인 몇 학생들이 기독교로 전향하는 영혼구원 사역, 주일 산타크루즈 교회에 출석하는 학생들의 교통편 제공을 위한 안수집사님의 운전 사역, 개인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의 부모와 전화로 문제를 해결해 주는 상담사역, 짧은 방학을 맞아 한국에 가기 힘든 학생들에게 한국인 홈 스테이를 연결해 주는 임시 중개인(realtor) 사역, 장학생 선발을 위해 앞장서 추천서를 써주는 서포터 사역, 영어가 잘 안 되는 부모님들의 의견을 기숙사 사감에게 전달해 주는 통역 대변인 사역, 내자와 함께 라면을 끓여주고 가끔 교인들이 동참하여 만두와 잡채 등의 특식을 나누는 주방장 사역 등 한결같이 보람 있는 일이었다. 중간에 동참한 하나님의 사신인 타 교회 출석 안수집사님을 통해 월 1회 정기적으로 보급 (군대용어)되는 김밥과 그 후 이 사역에 감동을 받은 김밥을 파시는 비즈니스 주인께서 베푸시는 고급 음료수가 등장하면서부터 이들이 가장 기다리는 날은 매 주 목요일이 되었다.
작은 것에 기뻐할 줄 하는 이들의 꾸밈없는 모습은 찾는 사람들을 더욱 기쁘게 해 주기에 충분했다. 어떤 분들은 몬타비스타 학생들은 한국에서 다 부유한 가정 자녀들이니 별로 도움이 필요 없고, 또 언젠가 다 떠날 사람들이라고 말하며 손익을 따지는 경제적 논리로 이 사역의 불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 가정이 물질적으로 풍성하다는 것과 몇 년 뒤 타 지로 떠난다는 사실이 영혼을 향한 복음전도활동을 금하는 합당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게으름의 핑계일 수 있고 이득 없는 곳으로부터의 회피일 수 있다.
누구나 다 복음전도의 대상
성경은 복음전도의 대상에 부자나 가난한 자 혹은 남을 자나 떠날 자의 구분을 가르친 적이 없다. 오히려 이들이 있는 곳은 미 전도지역 (unreached place)이며, 이들은 이 지역의 숨은 영혼들 (hidden people)이요, 어른들의 사랑이 필요한 어린 영혼들이다. 복음 전도의 소외지역에 한시적으로 사는 이들은 역설적으로 복음을 가장 잘 받아들이기 쉬운 최상의 수용성을 갖춘 영혼들이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무엇이든지 여과없이 잘 받아들이는 틴 에이저들이란 사실과 가장 사랑 받고 자라야 할 나이에 부모와 친구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외로운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 고독한 학생들을 목장의 아이들이라 부른다.
목장은 풀피리가 울리는 한가로운 곳처럼 생각되지만 정작 그곳은 외로운 곳이다. 목장은 동 떨어진 곳이며 사람들이 잘 찾아가지 않는 곳이다. 더욱이 방목을 하는 목장은 더 쓸쓸하다. 많은 소들과 양들이 떼 지어 풀을 뜯어 먹을 뿐이고 어떤 소나 양은 멀리 후미진 곳에서 혼자 우두커니 서 있거나 누워 있기도 한다. 이들이 정말 방목을 하는 양들같이 보였다. 마침 몬타비스타 학교가 목장터 위에 세워진 학교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타국에 유학을 가서 때로 친구들이 외출 나간 기숙사 방에 혼자 누워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린다고 생각해 보자. 어찌 측은한 일이 아니겠는가?
캐나다 태생 사회학자인 고프만 (Erving Goffman)박사는 군대와 같이 구성원과 바깥세계와의 사이에 강한 이질감이 존재하는 집단을 총체적 집단 (total institution as collective group)이라 명한 적이 있다. 총체적 집단은 구성원들에게 나름대로의 세계를 제공하는데 이를 ‘에워싸는 경향’ (tendency to embrace)이라고 한다. 한 마디로 일정한 규율에 의해 통제되며 바깥의 자유를 동경하는 집단을 말한다. 목장의 아이들도 이와 같은 환경에서 산다. 때로 적적함을 못 이겨 에워 싸인 집단에서 뛰쳐나오고 싶은 아이들이다. 축사에 같인 가축이 우리를 박차고 나오고 싶은 본능처럼 말이다. 이들에게 다가오는 사랑의 만져짐은 매우 전달력이 빠르다. 이들은 있는 그대로 반응한다. 군대에 위문공연단이 오면 군인들은 가수의 인기도에 관계없이 기뻐 날뛴다. 외부세계의 자유와 관심이 그리운 곳이기 때문이다.
남이 느끼는 희락을 보는 것이 행복
사람이 살면서 즐겁게 사는 것보다 행복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무엇보다 매 주 기숙사에서 전하는 간단한 복음에 귀를 기울이고 쉽게 반응하는 학생들을 바라보는 이 즐거움은 자신의 이익을 위한 이기적인 노력에서 결코 찾을 수 없는 일이다. 남을 위해 무엇보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으로부터 찾는 기쁨이다. 소위 하늘이 주는 선물이다. 사실 진정한 행복은 남이 느끼는 희락을 보는 데 있다. 성경은 말씀한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고. 이 말씀은 주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보상해 주시는 기회가 있다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주는 자가 누리는 선취적(先取的) 낙에 있기도 하다. 받는 자가 기뻐할 것을 생각하고 주는 자가 먼저 기뻐하는 것이니 하나 주고 배로 받는 복이다. 값진 투자가 아닌가? 더 큰 복을 받으려고 하는 일은 아니지만 좋은 일을 하는 자에게 더 큰 복을 주시는 이 일이 참으로 귀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고 쉽게 얻을 수 있는 곳에만 관심을 집중하는 데 있다.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나라
전도와 선교도 마찬가지다.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나라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신앙은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경우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 있는가? 예수님을 가시적으로 만난 적이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본 적이 없지만 그 분을 믿고 살듯이 당장 눈에 안 보이는 젊은이들의 미래를 위해 작은 씨를 뿌리는 것이 실로 아름답고 고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일에 동참한 이웃교회 안수집사님과 무명의 김밥제공자 성도님은 이 일의 귀중함을 발견한 분이다. 진주가 무엇인지 발견한 분이고 인생의 참된 헌신이 무엇인지 발견한 분이다. 그래서 그 분은 꼭 한 달에 한 번 자신의 물질과 시간을 이 목장의 아이들에게 바친다. 몇 몇 학생들을 자신의 자녀와 같이 여기며 자신의 집에 편히 거하게 하기도 한다. 김밥을 파시는 주인도 흡사하다. “집사님께서 하시는 일에 저도 동참을 할 수 없을까요?” 그 분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하늘나라에 소망을 찾은 분이심이 틀림없다. 이 두 분은 세상 욕심보다는 하늘나라 상급에 관심을 두는 거룩한 욕심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복 있는 사람
복 있는 사람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발견한 ‘나는 찾았네’(I found it)의 사람이다. 지고의 행복자는 자신이 발견한 사명완수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발견하고 그 사명을 위해 자신을 보내 달라고 외쳤던 이사야와 같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지금 하는 나의 일이 신적 사명인 줄 알고 그 일에 기꺼이 자신을 드리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요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사람이다. 그 사람이 사는 맛을 아는 사람이다. 사명을 깨달았기 때문이며 사는 이유를 찾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큰 것만 사명인 줄 아는 착각에 쉽게 빠진다. 그리고 그 큰 것을 결국 이루지 못하고 산다. 하나님의 사람은 작은 일의 소중함을 볼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주님은 작은 일에 충성한 자에게 큰 일도 맡기신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 하니라”(누가복음 16:10)고 말씀하셨다. 강물은 시냇물로부터 출발한다. 바다는 강물이 모여 이루어진다. 우리는 강과 바다만 생각하고 작은 시냇물 아니 더 작은 작은 물방울을 간과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한다.
조국 대한민국의 동량들이여
금년 졸업생 중 어느 여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우리 후배들에게 계속 찾아가 주실 거죠? 저희들이 지나고 보니 목요일 밤이 가장 즐거운 시간 중의 하나였고 제일 기다리는 시간이었어요.” 수고한 열매를 찾는 말이었다. 목요일 밤 저들을 만날 때마다 “너희들은 커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한다. 너희들이 태어나고 자란 조국 대한민국의 빚을 갚아야 한다. 너희들을 길러주신 부모님들께 효도해야 한다” 라고 입이 닳게 가르친 이 말이 저들의 가슴 속에 자리잡아 정말 저 젊은이들이 장차 조국의 동량으로 세상의 빚과 소금으로 일할 수 있으면 바랄 것이 없겠다.
아직 연약한 나무들이 강건한 나무로 잘 성장하면 좋겠다. 미미한 씨를 뿌리고 거름을 준 일이 미래 젊은이들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면 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가! 이 보다 더 확실하고 효과적인 투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언제나 반복한다. “여러분들이 커서 몬타비스타를 추억할 때마다 세 가지를 잊지 마렴. 하나님, 조국 그리고 부모님!” 그리고 한 가지를 보너스로 추가한다. “선배, 후배, 친구들에게 잊지 못할 존재가 되렴.” 좋은 추억을 만들며 사는 인생은 아름답다. 남에게 기쁨을 주고 사는 인생은 자신이 더 기쁜 인생을 사는
초등학교 시절 제자를 끔찍이 사랑해 주신 담임 선생님을 지금도 늘 감사한 마음으로 기억한다. 군목시절 간신히 수소문하여 40년이 넘어 만난 선생님은 나 보다 훨씬 늦게 목사님이 되신 후 조그마한 기도원 원목으로 계셨다. 최고급 식당에서 사모님과 함께 식사를 대접하고 선물을 안겨 드린 후 몇 년이 지나 선생님은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지금도 선생님이 보고 싶다. 지금도 선생님이 살아 계셨으면 하는 생각을 한 두 번 하는 것이 아니다. 왜? 어린 시절 선생님이 베푸신 친절과 사랑이 내 가슴을 녹였기 때문이다.
작은 사랑, 영혼 감동
우리 주변에는 의외로 우리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에게 전한 작은 사랑은 순수한 그들의 영혼을 감동한다. 이 세상에 가장 필요한 것은 감동이다. 우리는 감동을 찾기 힘든 세상에 살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더욱 감동 전도사이어야 한다. 나를 만나는 사람마다 감동을 받고 메마른 세상에 살맛을 느끼게 해야 한다. 가정에서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감동을 먹고 자라야 한다. 일터에서 손님과 고용인들은 주인에게서 감동을 선물 받아야 한다. 교회에서 성도는 교역자들로부터, 교역자들은 성도들로부터, 성도들은 성도들에게서 감동을 전하고 받아야 한다. 국민은 대통령에게서 감동을 받아야 하고 대통령은 국민에게서 감동을 받아야 한다. 부하는 상관으로부터, 상관은 부하로부터, 학생은 교사로부터, 교사는 학생으로부터 모두 감동을 주고 받아야 한다.
감동이 있는 사회가 잘 되는 사회이다. 사랑하는 우리 목장의 아이들은 지금 긴 여름방학 중이다. 모처럼 자신들의 집에서 편히 쉬고 있을 것이다. 방학이 끝나면 그들은 모두 왓슨빌 외딴 목장으로 돌아온다. 돌아오는 양들 중에는 새 학기를 맞아 처음 보는 어린 양들도 있을 것이다. 이제 다시 그들을 맞을 준비를 해야겠다. 다음 달 첫 모임은 월 말에 오시는 Y 집사님을 모셔야겠다.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김밥과 김밥 주인이 주시는 한국에서 수입한 이름 모를 음료수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미국인 사감과 탁구시합을 벌리는 한국인을 위해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을 연호하며 목이 터지라 응원하는 이들의 순수함을 접할 때 가슴뭉클하는 기분을 느껴보라. 이 아들, 딸들이 보고싶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마태복음 25: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