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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재 지: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 447 ❏문화재지정: 약포사당(藥圃祠堂)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42호(1985.08.05지정) ❏배향인물: 정 탁(鄭 琢) 정윤목(鄭允穆) ❏창건연도: 1640년(인조 18) ❏향 사 일: 음력 8월 21일 |
이 서원은 임진왜란 때 많은 공을 세우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사형집행 전에 구한 인물인 정탁(鄭琢)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1640년(인조 18) 처음 사당을 지었으며, 강당을 더해 1700년(숙종 23) 도정서원으로 승격하였고 1786년(정조 10)에는 정탁의 셋째 아들인 성리학자 정윤목을 추향하였다. 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일부가 손실되었으나, 1997년 국비보조사업으로 동·서재, 전사청, 누각 등 5동의 건물을 복원하였다.
1)정탁(鄭琢, 1526~160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백곡(栢谷). 예천 출신. 현감 원로(元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교(僑)이고, 아버지는 이충(以忠)이며, 어머니는 한종결(韓從傑)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2년(명종 7) 성균생원시를 거쳐 155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5년 정언을 거쳐 예조정랑·헌납 등을 지냈다. 1568년 춘추관기주관을 겸직하고,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72년(선조 5) 이조좌랑이 되고, 이어 도승지 대사성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581년 대사헌에 올랐으나, 장령 정인홍(鄭仁弘), 지평 박광옥(朴光玉)과 의견이 맞지 않아 사간원의 계청(啓請)으로 이조참판에 전임되었다. 1582년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와서 다시 대사헌에 재임되었다. 그 뒤 예조·형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89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시 다녀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경사(經史)는 물론 천문·지리·상수(象數)·병가(兵家) 등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다. 1594년에는 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 등의 명장을 천거하여 전란 중에 공을 세우게 했으며,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72세의 노령으로 스스로 전장에 나가서 군사들의 사기를 앙양시키려고 했으나, 왕이 연로함을 들어 만류하였다. 특히, 이 해 3월에는 옥중의 이순신(李舜臣)을 극력 신구(伸救)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였으며, 수륙병진협공책(水陸倂進挾攻策)을 건의하였다.
1599년 병으로 잠시 귀향했다가 이듬해 좌의정에 승진되고 판중추부사를 거쳐, 1603년 영중추부사에 올랐다. 이듬해 호종공신(扈從功臣) 3등에 녹훈되었으며,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예천의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약포집≫·≪용만문견록 龍灣聞見錄≫ 등이 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2)정윤목(鄭允穆, 1571~1629)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목여(穆如), 호는 청풍자(淸風子)·노곡(蘆谷)·죽창거사(竹窓居士). 아버지는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탁(琢)이며, 어머니는 거제반씨(巨濟潘氏)로 충(冲)의 딸이다.
일찍이 가정에서 교육을 받다가 정구(鄭逑)·유성룡(柳成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세 전에 경사자집(經史子集)의 많은 서책을 읽었고, 시문에 뛰어나 일가의 체격을 이루었다.
필법이 신묘(神妙)하여 일찍이 이국창(李菊窓)의 당벽(堂壁)에 시 두 구절을 초서로 써붙였는데, 임진왜란 때 왜적이 그곳에 진(陣)을 치다가 글씨를 보고 경탄하며 뜰에 내려가 절하고 떠났다고 한다. 1589년(선조 22)에는 사은사(謝恩使)로 가는 사행(使行)길을 따라 중국에 다녀왔다.
벼슬에 뜻이 없어 두차례 재랑(齋郎)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1616년(광해군 8) 소촌도찰방(召村道察訪)에 취임하였으며, 1618년 통훈대부(通訓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실정에 불만을 품고 사직, 산수를 벗삼아 시와 서 (書)로 세월을 보냈다.
만년에는 용궁(龍宮)의 장야평(長野坪)에 초려(草廬)를 짓고 마을의 자제들을 모아 가르쳤다. 1786년(정조 10)부터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청풍자문집≫이 있다.
서원은 내성천을 바라보는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건물들의 배치가 지형에 따라 자연스레 앉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서원 문루인 입덕루, 강당, 동서재, 사당, 전사청, 고직사 등이 있다. 또 내성천이 가장 잘 바라다 보이는 곳에 읍호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이곳에서 약포 정탁이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1)사당
‘상현사(尙賢祠)’라는 현판을 단 사당은 강당의 좌측 후면에 위치함, 내삼문과 담장이 둘려쳐져있다. 내삼문은 사주문에 단청을 하였으며,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겹처마에 맞배지붕형식으로 되어있다. 지형상으로 산자락을 따라 배치되어 있어, 사당에 오르면 서원 일곽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2)강당
정면 4칸, 측면 3칸의 홑처마 팔작기와집이다. 중앙의 2칸은 마루로 꾸미고 좌우에 방을 들였다. 건물의 전면에는 누각형식으로 난간을 만들고 마루와 방 앞으로 툇마루를 연결하였다. 방들은 뒤쪽으로 툇간을 만들고 측면으로는 쪽마루를 달아냈으며, 좌측의 방은 측면에 상부 다락을 설치하였다.
3)동․서재
동재와 서재는 강당의 정면에 마주보고 배치되어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규모로 맞배기와집이다. 중앙에는 마루를 설치하고 좌우에 방을 들였는데 방은 측면 1칸 반을 다 사용하는 것과 한 칸은 방으로 하고 앞의 반칸에는 툇마루를 만들어 중앙의 마루와 연결되게 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4)입덕루
입덕루(入德樓)는 서원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기와집 건물이다. 정면 3칸 중 어칸을 협칸보다 크게 만들어 안정감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건물의 모든 기둥을 두리기둥으로 쓰고 있으며, 측면에 풍혈판을 설치하였다.
5)고직사․전사청
강당의 좌측에 위치한 고직사는 ‘ㄱ’자집으로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다. 평면은 마루를 중심으로 안방과 건넌방이 이어지고, 안방 아래로는 부엌이 붙는다. 전사청은 고직사의 뒤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기와집이다.
6)읍호루(挹湖樓)
읍호루(挹湖樓)는 서원의 영역과는 조금 떨어져 내성천을 조망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1601년(선조 34)에 건축되었다고 전해지며, 정탁이 말년을 보낸 곳으로 알려져 있다. 단청과 가구의 짜임, 장식적인 요소들이 매우 화려하게 조화를 이루는 건물이다. 우측으로 방을 배치하고 옆으로 마루를 들이고 방의 전면으로도 툇마루를 만들었다. 앞으로는 난간을 돌려 누각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약포 정탁선생관련유물
【정탁초상(鄭琢肖像)】
보물 제487호. 소재지 경북 안동시 도산면 퇴계로 1997 한국국학진흥원. 정탁초상(鄭琢肖像)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약포 정탁 선생의 초상화로, 크기는 가로 89㎝, 세로 167㎝이다. 선조 37년(1604)에 그려진 이 초상화는 직무를 볼 때 쓰는 관모와 가슴에 2마리 학이 수놓인 흉배가 있는 자주색 비단 관복을 입고 오른쪽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 전신상이다. 흰 수염은 선명하며 얼굴은 연홍색으로 가는 선을 이용하여 윤곽을 표현하였다.
관복의 구름무늬는 어두운 색으로 채색하였고 옷의 구겨짐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관념적으로 표현했는데, 이러한 표현은 이 시대 다른 초상화에서도 조금씩 보이고 있다. 바닥도 채색되어 안정감이 있는 이 초상화는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공신 초상화이다.
【정탁 문적-약포유고 및 고문서(鄭琢文籍-藥圃遺稿 및 古文書)】
보물 제494호. 소재지 경북 안동시 도산면 퇴계로 1997 한국국학진흥원. 정탁 문적-약포유고 및 고문서(鄭琢 文籍-藥圃遺稿 및 古文書)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약포 정탁 선생의 얼을 추모하고 선생이 남긴 유물을 보존하고 관리하기 위해 지은 유물각에 전해오는 유고와 문서들이다.
정간공교지 1장, 위성공신교서 1축, <용사일기> 상하 2책, <용사잡록> 1책, <용만문견록> 1책, <임진기록> 1책, <선조시집유묵> 1책, <약포선조유묵> 2책, <약포선조간첩> 2책, <선조초고유묵> 1책, 기로연시화첩 1첩, 관립, 벼루와 벼루집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공문서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들이며, 당시의 사회상과 특히 임진왜란 당시를 연구하는데 훌륭한 자료로 평가된다.
【정탁 문적-약포유고 및 고문서-정간공교지(鄭琢文籍-藥圃遺稿 및 古文書-貞簡公敎旨)】
보물 제494-1호. 소재지 경북 예천군 도산면 퇴계로 1997 한국국학진흥원. 조선 중기의 문신인 약포 정탁 선생의 얼을 추모하고 선생이 남긴 유물을 보존하고 관리하기 위해 지은 유물각에 전해오는 유고와 문서들 가운데 하나이다.
교지는 1장이며 인조 13년(1635) 나라에서 정탁 선생에게 ‘정간(貞簡)’이라는 시호를 내린다는 교지이다. 1장(張) 92 ×78㎝인조(仁祖) 13년(1635)에 정탁(鄭琢)에게「정간(貞簡)」의 시호(諡號)를 내린 교지이다.
【정탁 문적-약포유고 및 고문서-위성공신교서(鄭琢文籍-藥圃遺稿 및 古文書-衛聖功臣敎書)】
보물 제494-2호. 소재지 경북 예천군 도산면 퇴계로 1997 한국국학진흥원. 31.2 ×38㎝ 1축으로 되어 있으며, 광해군(光海君) 5년(1613) 정탁(鄭琢)에게 위성공신(衛聖功臣)을 추증(追贈)한 교서이다. 1축(軸) 31.2 ×38㎝광해군(光海君) 5년(1613) 정탁(鄭琢)에게 위성공신(衛聖功臣)을 추증(追贈)한 교서이다.
【정탁 문적-약포유고 및 고문서-용사일기 상ㆍ하(鄭琢文籍-藥圃遺稿 및 古文書-龍蛇日記 上ㆍ下)】
보물 제494-3호. 소재지 경북 예천군 도산면 퇴계로 1997 한국국학진흥원. 일기는 2책으로 되어있으며, 임진왜란 때 동궁의 이사로 세자를 따라 모시면서 쓴 일기이다. 2책(冊) 25 ×29㎝임란(壬亂) 때에 동궁(東宮) 의 이사(貳師)로 세자(世子)를 호종한 일기(日記).
【정탁 문적-약포유고 및 고문서-용사잡록(鄭琢文籍-藥圃遺稿 및 古文書-龍蛇雜錄)】
보물 제494-4호. 소재지 경북 예천군 도산면 퇴계로 1997 한국국학진흥원. 1책으로 되어있으며, 임진왜란 중에 치안의 사정과 정치의 동향을 살피고, 그의 의견을 직접 손으로 쓴 원고본이다. 임진왜란 중의 기록으로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다.
【정탁 문적-약포유고 및 고문서-용만문견록(鄭琢文籍-藥圃遺稿 및 古文書-龍灣聞見錄)】
보물 제494-5호. 소재지 경북 예천군 도산면 퇴계로 1997 한국국학진흥원. 1책으로 되어있으며, 임진왜란 중 의주에서 명나라 군대를 영접하여 보고들은 것과, 명나라 군대와 주고받은 문서, 진중에 파견된 관리가 임금에게 보고한 내용인 장계 등을 수록한 것이다. 임진왜란 중의 기록으로 중요한 자료이며, 특히 당시의 대외관계와 관련하여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1책(冊) 26.8 ×39㎝의주(義州)에서 명군(明軍)을 영접하며 보고 들은 것과 왕복문서 ·장계(狀啓) 등을 수록한 것이다.
【정탁 문적-약포유고 및 고문서-임진기록(鄭琢文籍-藥圃遺稿 및 古文書-壬辰記錄)】
보물 제494-6호. 소재지 경북 예천군 도산면 퇴계로 1997 한국국학진흥원. 2책이며, 임진왜란 중 우리나라에 구원병을 보냈던 명나라 군도독부와 주고받은 공문서 등의 자료를 수록한 것이다. 1책(冊) 26.7 ×26.7㎝임란중(壬亂中) 명군도독부(明軍都督府)와 왕복한 공문서 등의 자료를 수록한 것.
【정탁 문적-약포유고 및 고문서-선조시집유묵(鄭琢文籍-藥圃遺稿 및 古文書-先祖詩集遺墨)】
보물 제494-7호. 소재지 경북 안동시 도산면 퇴계로 1997 한국국학진흥원. 1책이며, 정탁 선생이 직접 손으로 쓴 시문집이다.
【정탁 문적-약포유고 및 고문서-약포선조유묵(鄭琢文籍-藥圃遺稿 및 古文書-藥圃先祖遺墨)】
보물 제494-8호. 소재지 경북 예천군 도산면 퇴계로 1997 한국국학진흥원. 2책이며, 두 책 모두 정탁이 손으로 직접 쓴 원고본이다. 1책(冊)은 28 ×33.6㎝, 1책(冊)은 25.2×37.2㎝ 두 책 모두 정탁(鄭琢)의 자필고본(自筆稿本)이다.
【정탁 문적-약포유고 및 고문서-약포선조간첩(鄭琢文籍-藥圃遺稿 및 古文書-藥圃先祖簡帖)】
보물 제494-9호. 소재지 경북 예천군 도산면 퇴계로 1997 한국국학진흥원. 2책이며, 정탁 선생이 직접 쓴 편지글을 모아서 첩으로 엮어 만든 것이다.
【정탁 문적-약포유고 및 고문서-기로연시화첩(鄭琢文籍-藥圃遺稿 및 古文書-耆老宴詩畵帖)】
보물 제494-10호. 소재지 경북 예천군 도산면 퇴계로 1997 한국국학진흥원. 이 화첩은 선조 32년(1599) 6월 24일 나라에서 70세 이상으로 나이가 많이 든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 광경을 그린 그림으로, 그림과 함께 이수연, 차천로 등 명인의 시문이 덧붙여 있다.
【정탁 문적-약포유고 및 고문서-선조초고유묵(鄭琢文籍-藥圃遺稿 및 古文書-先祖草稿遺墨)】
보물 제494-11호. 소재지 경북 안동시 도산면 퇴계로 1997 한국국학진흥원. 1책으로 되어있으며, 정탁 선생이 쓴 수필들이다.
【정탁 문적-약포유고 및 고문서-관립(鄭琢文籍-藥圃遺稿 및 古文書-冠笠)】
보물 제494-12호. 소재지 경북 안동시 도산면 퇴계로 1997 한국국학진흥원. 선생이 살았을 때 쓰던 갓이다.
【정탁 문적-약포유고 및 고문서-벼루와벼루집(鄭琢文籍-藥圃遺稿 및 古文書-벼루와 벼루집)】
보물 제494-13호. 소재지 경북 예천군 도산면 퇴계로 1997 한국국학진흥원. 선생이 살았을 때 쓰던 벼루와 벼루집 이다.
1582년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중국황제로부터 하사받은 벼루로 검은 돌로 만들었으며, 팔괘(八卦)를 조각해 넣었다. 모서리에는 여섯 장의 꽃잎이 달린 무늬가 새겨져 있다.
【약포사당(藥圃祠堂)】
소재지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 황지리 447.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선조 때의 문신 약포(藥圃) 정탁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1640년(인조 18)에 세운 사당이다. 1700년(숙종 23)에 사림들과 후손들이 성금을 모아 강당을 증축하여 도정서원(道正書院)으로 승격된 후 후손들에 의해 보전되었으며, 1866년(고종 3)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져 1868년(고종 5) 서원의 일부가 훼철되었다. 현재는 목조와가인 사당과 강당 2동(건평 28평), 문채(정면 1칸, 후면 1칸)만이 남아 있다.
현 보문면(普門面) 소재지인 미호동에서 남서쪽으로 약 1.1㎞ 떨어진 내성천(乃城川) 건너편에 자리잡고 있는데, 가을철 단풍 정경이 특히 아름답다. 사당에서 약 100m 떨어진 곳에 정탁을 위하여 세운 읍호루(挹湖樓)가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높이 5.6m로 맞배지붕에 방풍판이 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 높이 6.8m로 홑처마 팔작지붕이며, 전면에 난간을 돌려 누각 형식을 취하였다. 오랫동안 관리가 소홀하여 기와, 기둥, 연목, 문짝, 토벽 등이 많이 부서지고 일그러져 옛 모습을 잃게 되자, 1970년 강당을 보수하고, 1997년 동·서재, 전사청, 누각 등 5동의 건물을 복원하였다.
(정탁 초상)
(정탁 글씨)
(耆老宴詩畵帖)
(벼루)
(벼루집)
(先祖詩集遺墨)
(先祖草稿遺墨)
(藥圃先祖簡帖)
(藥圃先祖遺墨)
(龍灣聞見錄)
(龍蛇日記 上ㆍ下)
(衛聖功臣敎書)
(壬辰記錄)
(貞簡公敎旨)
참고-한국국학진흥원, 경북서원지, 2007.
문화재청 http://www.cha.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선 문신 정탁(鄭琢)|작성자 재봉틀
첫댓글 오늘 갔다 왔습니다.입구의 건물은 "입덕루"가 아니라 "팔덕루" 같습니다."입"자는 두 획이 서로 붙어 있는데 여기는 떨어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