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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의 본고장엔 역사의 향기가 배어 있다, 그라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에서 주인공 장 바티스트 그루누이는 자신이 결코 추출해낼 수 없는 몇 가지 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다. 그리고 죽어가기 직전 스승 발디니에게 자신이 아는 것
외에 또 다른 향기 추출법이 있는지 묻는다.
“내 아들아, 거기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단다. 데워서 향기를 얻는 법, 차게 해서 향기를 얻는 법, 그리고 기름을 이용해 향기를 얻는 법이 있다. 여러 면에서 이것들이 증류보다 우수한
방법들이다. 이런 방법을 쓰면 가장 섬세한 향기까지도 얻을 수가 있지. 재스민이나 장미, 혹은 오렌지꽃의 향기
같은 것 말이다.” “어디서요?” 그루누이가 물었다. “남쪽 지방, 특히 그라스에서 그런 방법을
쓰지.”
- ( 소설
『향수』중에서)
결국 답을 얻고 회복한 그루누이는 파리를 떠나 그라스로 간다. 그곳에서 그의 저주받은 능력은 극에 달하고, 끔직한 사건들이 시작된다. 소설은 코트다쥐르(Coted’Azur)에 자리 잡은 작은 도시 그라스를 주요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남알프스와 지중해 사이의 분지에 자리 잡은 그라스는 기후가 온화해 꽃이 만발하고, 고요하며 골목이 아기자기한 것 외에 큰 특징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알고 보면 아주 특별한 곳이다. 현대인의 삶에서도 떼려야 뗄 수 없는 향수의 본고장이기때문이다.
그라스는 중세 시대부터 무역이 활발하던 곳으로 가죽, 와인, 가축 등을 수출했다. 도시에는 원래 물이 아주 풍부했고,물은 가죽을 제조하는 데 필수 요소였기 때문에 12세기에 가죽 제조업은 도시의 주요 산업이 된다. 지금도 올드 타운을 거닐다 보면 곳곳에서 우물과 수로를 볼 수 있는데, 수로는 옛날 무두장이가 모여 가죽을 만들던 광장으로 이어진다.
“냄새가 아주 지독했지요. 시체 썩는 냄새보다 더했다고 해요. 그래서 무두장이는 가죽에 향기를 입힐 방법을 고안했어요. 그게 향수의 시초가 된 겁니다.” 국제향수박물관(Musee International de la Parfumerie)의 뮤지엄럭쳐러(museum lecturer, 박물관 강사)인 마리 세브린 피용(Marie-Sverine Pillon)이 박물관 내를 천천히 돌아보며 그라스의 향수 역사에 대해 설명한다. 박물관은 인류가 향수를 사용한 역사부터 프랑스 향수의 역사, 향수 제조법은 물론 기획 전시도 선보인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향기를 입힌 가죽 장갑이 크게 유행했어요. 부유층과 귀족이 주요 고객이었죠. 하지만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면서 세금이 무섭게 올랐고, 장갑 산업은 사라져버립니다. 그리고 향수만 남았지요.” 그녀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병에 담은 향수는 1825년부터 쓰기 시작했다고.
박물관에서는 당시부터 지금까지의 향수병을 나열해놓은 컬렉션을 만날 수 있다.시내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박물관 부설 정원이 있다. 2헥타르 넓이의 정원에서는 향수의 원료가 되는 다양한 식물군을 보고, 만지고, 향을 맡아볼 수 있다. 피용은 식물을 쓰다듬은 손을 코로 가져가며 말한다. “향수가 일반화된 지금 여전히 그라스가 유명한건 두 가지 식물 덕이지요. 5월에 피는 센티폴리아 로즈(centifolia rose) 그리고 8월에 피는 재스민(jasmin)입니다. 이 두 가지 꽃은 그라스의 특산품이에요. 이제 향수 원료로 꽃을 키우는 재배업자는 지역에서 거의 사라졌어요. 하지만 이 두 농장은 남아 있지요.”
(왼쪽부터)국제향수박물관의 부설 정원. 박물관에서 진열하고 있는 빈티지 향수 컬렉션.
몰리나르에서 향수 제조 수업을 진행하는 카롤린 비베르.
아무리 향수에 문외한일지라도 샤넬의 ‘넘버파이브(No.5)’와 크리스찬 디올의 ‘자도르(Jador)’는 들어봤을 것이다. 이 둘의 주 원료가 센티폴리아 로즈다. 오직 그라스에서만 재배하기 때문에 이곳에 직영 농장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세계적인 향수를 어떻게 만들게 된 걸까? “브랜드의 대표로 향수를 만들어 내는 사람을 뭐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바로 ‘노즈(nose)’라고 하지요. 퍼퓨머(perfumer)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사람을 일컫는 최고의 영예라고 할 수 있어요. 샤넬의 노즈, 디올의 노즈, 유명한 브랜드 향수의 노즈는 대부분 그라스 출신입니다.” 그라스에서 가장 유서 깊은 퍼퓨머리(perfumery, 향수 제조업체) 중 하나인 몰리나르(Molinard)의 인스트럭터 카롤린 비베르(Caroline Bieber)가 쾌활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곳에서는 일반인도 자신만의
향수를 만들어볼 수 있는 클래스를 운영한다. 먼저 향수의 구조를 간단히 배운 후, 인스트럭터의 지시에 차근차근 따르면 된다. 물론 온몸의 감각을
코에 집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향수는 톱, 미들, 베이스의 세 가지 노트로 나뉩니다. 향수를 뿌렸을 때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이 톱
노트, 그다음 미들과 베이스 노트의 순서죠. 가장 묵직한 향이 베이스 노트로, 가볍고 신선한 향이 톱 노트로 들어갑니다.” 비베르의 간단한
설명이 끝나면 향수를 제조하기 시작한다. 90여 개의 에센셜 오일 중에서 베이스 노트 오일 다섯 가지, 미들 노트와 톱 노트 오일을 세 가지씩
고르면 된다.
각 노트를 조합할 때마다 비베르가 시향지에 오일을 찍은 다음 함께 향을 맡아보곤 느낌을 말해준다. “저는 이 일이 정말 즐거워요. 사람마다 향을 고르고 배합하는 취향이 얼마나 개성 있는지 아세요? 향에서만큼은 인종도 연령도 관계 없다니까요. 게다가 가끔은 저도 깜짝 놀랄 만큼 훌륭한 향수가 나오기도 해요.” 오일을 모두 고른 뒤 비베르가 권하는 각 오일의 적정 배합 양으로 모두 섞으면 향수가 완성된다. 앞뒤 가릴 것 없이 모두 선호하는 향으로 채운 다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비베르의 평을 기다린다. “음, 아주 흥미롭네요. 첫 향은 산뜻하고 달콤하면서 끝은 은은하네요. 아주 훌륭해요.” 진지하게 시향을 하는 그녀에게서 평을 듣고 나니 솜사탕을 손에 쥔 아이처럼 기분이 들뜬다. 자신만의 향수를 갖는다는 건 생각한 것보다 훨씬 특별한 경험이다.
▶몰리나르 외에도 프라고나르(Fragonard)와 갈리마르(Galimard) 역시 들러볼 만한 유서 깊은 퍼퓨머리다.
fragonard.com, galimard.com
가늘게 이어지던 베르동 강이 생트 크루아 호수(Lac de Sainte-Croix)와 만나는 지점에
펼쳐지는 절경은 베르동 계곡의 클라이막스다
Scent from Nature, Gorges du Verdon
깊은 계곡에서 불어오는 자연의 향기, 베르동 계곡
코끝의 향기가 가시지 않은 채
그라스를 출발해 베르동 계곡으로 향한다. 달릴수록 고도가 점점 높아지고 그라스는 이내 멀어져 푸르른 녹음에 파묻힌 주홍색 장난감 마을이
되어버린다. 길 너머 펼쳐지는 절경도 으뜸이지만 지금 달리고있는 이 도로는 유럽사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다.
1815년 3월 1일, 이탈리아 엘바 섬(Isola d’Elba)에 유배된 나폴레옹은 칸(Canne)과 앙티브(Antibes) 사이의 주앙만(Golfe-Juan)에 몰래 상륙해 군사를 이끌고 알프스산맥을 넘어 파리에 입성한다. 그 후 워털루전투에서 패배할 때까지 그 유명한 백일천하를 누린다. 그가 지나간 주앙 만부터 그르노블(Grenoble)까지 이어지는 325킬로미터의 길을 루트나폴레옹(Route Napol?on)이라 부른다. 우리가 지나는 길은 그 일부 구간인 그라스에서 카스텔란(Castellane)까지 이어지는 D6085 도로. 길 이름 자체가 ‘루트 나폴레옹’이다.
“루트 나폴레옹에 속하는 모든 마을은 저마다 진위를 가릴 수 없는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어요. 어느 식당에서 나폴레옹이 밥을 먹었다더라, 이 잔은 나폴레옹이 실제 사용한 술잔이다 뭐 이런 식이죠. 좀 우습기도 하지만 나폴레옹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하고 자못 진지해요.” 베르동 계곡으로 향하는 절경 드라이브 길을 안내하는 프로방스 토박이 린다 우아기(Linda Ouarghi)가 말한다.
최신형 포드 자동차 엔진도 기를 쓰며 달리는 구불구불한 도로는 나폴레옹이 걸을 당시엔 포장도 되지 않은 첩첩산중 시골길이었다. 비록 그가 엄청난 노고에 대한 보상을 고작 100일밖에 누리지 못했을지라도 이 길을 걷는 동안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을 보고 느낀 감정은 나와 같았으리라. 거칠게 깎인 바위와 그 사이를 비집고 무성하게 자란 숲이 이룬 경이로운 풍경 때문에 육체의 피로함 따위 이 순간 너무나 보잘것 없게 여겨지는 그런 느낌.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 베르동 계곡 심장부에 자리한 마을 라 팔뤼드 쉬르 베르동.
계곡을 따라가는 길은 그림 같은 풍경의 연속이다.
베르동 계곡은 바이커에게도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로 꼽힌다.
그르노블까지 뻗어가는 루트 나폴레옹과 작별을 고하는 기점은 베르동 계곡의 관문 도시 카스텔란. 이곳에서 D952번 도로로 갈아타면 가늘게 이어지는 베르동 강을 따라 베르동 계곡의 심장부를 지나게 된다. 거친 절벽을 수호신처럼 두르고 있는 도시 카스텔란에 다다르자 우아기가 위를 보라고 말한다. 절벽 꼭대기에는 어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상이 우뚝 서 있다. 땅에서부터 184미터 높이에 세운 노트르담 뒤 로크(Notre-Dame du Roc)는 중세 시대에 세운 교회로, 카스텔란의 상징이다. 아래서 보면 아찔하게 높아 보이지만 30분 정도의 짧은 산행으로 교회에 닿을 수 있다.
위로 오를수록 작아지는 마을에 대비되어 계곡은 더욱 웅장하고 거대한 자태를 드러낸다. 마치 거대한 트롤에 둘러싸인 가옥들이 서로를 수호하는 것처럼 어깨를 마주한 채 빽빽하게 모여 있다. 벽과 벽으로 그늘을 드리운 좁고 긴 골목길엔 바깥에 의자를 내놓은 카페와 레스토랑, 상점과 액티비티 전문 여행사로 가득하다. 관광객은 이곳 카스텔란에서 카야킹과 캐녀닝(canyoning), 세일링 등 베르동 계곡을 온몸으로 즐길 수 있는 여러 액티비티를 체험할 수 있다.
D952번 도로를 따라 무스티에르 생트 마리(Moustiers-Sainte-Marie)까지 이어지는 베르동 계곡 최고의 절경 드라이브 코스를 내달려도 좋고, 액티비티를 신청해 계곡 깊은 곳으로 뛰어들어도 좋다. 나는 조금 여유를 갖고 계곡 중앙에 위치한 마을 라 팔뤼드 쉬르 베르동(La Palud-sur-Verdon)의 호텔에서 하루 쉬었다 가기로 한다. 푸르스름하던 하늘이 짙은 감색으로 변하는 밤 11시 야외 테라스. 어둠이 시야를 가리고 나니 다른 감각이 눈을 뜬다. 살짝 시린 공기 속에서 희미한 라벤더 향기를 찾아내고, 뺨과 머리칼을 어루만지는 바람의 손길을 느낀다. 어디선가 ‘찌르르르’ 하는 여름밤 소리가 들려온다.
▶카스텔란 여행 정보 castellane.org, 무스티에르 생트 마리여행 정보 moustiers.eu
옆 도시 포르칼키에르(Forcalquier)에서
매일 새벽 시작하는 열기구 투어는 만의 대표적 아침 풍경이 되었다.
Scent from Relaxation, Mane
프로방스 전원 호텔에서 누리는 휴식의
향기, 만
프로방스를 여행할 때 목적지에
닿는다는 건 크게 의미가 없다. 예상치 못한 야생 그대로의 자연, 중세 시대 모습이 크게 변하지 않은 농가 마을, 들판을 조각보처럼 물들이는
야생화 군락을 만나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목적지라 생각하던 건 어느새 무색해져버리고 마니까. 베르동 계곡에서 작은 전원 마을 만으로
향하는 길에 만난 발랑솔 고원(Plateau de Valensole)에서 또 한 번 가려던 곳을 망각하고 만다. 고원의 굽이진 언덕마다 자연
그대로의 색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선명한 보라색 라벤더밭이 코듀로이 직물처럼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올록볼록하게 뻗어 있다. 그 순간 이곳이
한여름 햇살의 축복을 받은 프로방스 지방의 한복판이라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라벤더의 유혹을 가까스로 뿌리치고 만으로 향한다. 그곳엔 또 다른
향기가 고여 있을 것임을 이제는 짐작할 수 있기에.
1613년 만에는
미님(Minim) 수도사가 생활하는 수도원이 있었다. ‘최소한’을 뜻하는 이름처럼 그곳의 수도사들은 철저히 검소한 생활 방식을 실천했다. 엄격한
규율에 따라 채식 생활을 했으며, 수도원 주변에 계단식 정원, 경작지를 가꾸며 여러 식물종을 연구하고 개발했다.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 수도원은
문을 닫았고, 그 후 1세기 동안 텅 빈 채로남는다. 1862년 지역의 가톨릭회는 빈 수도원 건물을 아프고 가난한 이의 안식처로 삼기로
결정한다.
1909년에는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Franciscan Missionnaires de Marie)가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진정한 호스피탤리티를 실천하기 시작한다. 수녀들은 그곳에서 과실나무를 경작하고, 가축을 기르며 축복받은 정원을 가꿨다. 식물을 연구해서 아픈 지역민을 위한 치료제를 만들기도 했다. 수녀원은 1999년까지 운영했지만 연로한 수녀 몇 명이 꾸려가기엔 너무 버거워 결국 수도원 건물은 다시 비게 된다.
2004년 프로방스 코즈메틱
브랜드 록시땅 그룹(만에서 20분 거리의 마노스크(Manosque)에 본사가 있다)은 수도사, 수녀의 삶과 관용 정신 그리고 그들이 연구하던 옛
식물 치유법을 이어가고자 르 쿠방 데 미님(Le Couvent des Minimes)이란 코즈메틱 브랜드를 론칭한다. 그리고 4년 뒤 비어 있던
옛 수도원 건물을 개조해 아름다운 정원과 프로방스풍 객실,야외 수영장과 최고급 스파 시설 그리고 가스트로노미 레스토랑를 갖춘 5성급 호텔 르
쿠방 데 미님 호텔 앤드 스파(Le Couvent des Minimes Hotel & Spa)를 탄생시킨다.
“우리 호텔은 2011년에
5성급이 되었지만, 대형 브랜드 호텔과는 확실히 차별화됩니다. 호텔에 묵는 모든 게스트와 소통하고 얘기를 나누면서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에 귀
기울이죠.” 숙박객에게 일일이 친필 카드를 남기는 쾌활한 제너럴 매니저 파비앙 피아첸티노(Fabien Piacentino)가 말한다. “호텔
건물은 아주 역사 깊은 건축물입니다. 게다가 옛 수도사들이 거쳐간 만큼 완벽하게 고요하고 평온한 곳에 위치해 있죠. 불과 몇달 전 대대적인
레너베이션을 마쳤습니다. 옛것과 새것이 완벽하게 어우러지는 공간이 되었지요.”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새로 단장한 스파 숍
프로방스의 햇살이 여과 없이 내리쬐는 호텔의 안뜰
헤드 셰프 제롬 로이
모던한 가구로 채운 로비 라운지
피아첸티노의 말처럼 소박한 수도원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밖에서는 도무지 예상하지 못할 모던하고 밝은 공간이 나타난다. 하얀 철사 소재 가구가 주를 이루는 리셉션 데스크는 미래에 온 듯한 느낌까지 더한다. 파스텔 톤 버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세상에 들어선 듯 모든 것이 매혹적이다. “이번 레너베이션에서는 록시땅 브랜드의 철학을 담는 데 중점을 두었어요. 예전엔 이곳이 호텔이 된 수도원이었다면, 지금은 수도원이었던 호텔이라고 할 수 있지요. 오래된 건물에 최신 디자인의 가구가 들어찼어요. 아주 파격적 변신입니다.”
호텔이 운영하는 스파 시설은
그야말로 최고급이다. 모든 트리트먼트는 록시땅과 르 쿠방 데 미님 제품을 사용한다. 스파와 이어지는 저쿠지며 야외 수영장엔 태닝 의자에 누워
따사로운 프로방스의 햇살과 은은한 꽃 내음을 만끽하는 이들이 가득하다. 어느 곳으로 눈을 돌려도 라벤더 벌판, 올리브 나무 숲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피아첸토가 말한다. “호텔에 들어서면 일단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그저 이 장소, 이 분위기를 느껴보는 겁니다. 그다음 스파를 경험하고, 셰프 제롬 로이(Jerome Roy)가 선사하는 로컬 가스트로노미를 맛보는 거죠. 충분히 휴식을 취했다면 주변을 돌아봐도 좋아요. 고트 치즈 농가에 들러도 좋고 코트 드 프로방스(Cote de Provence) 와인을 맛보는 것도 좋겠네요. 이곳에서만큼은 프로방스의 속도에 몸을 맡겨보세요. 진정한 특산품인 인간미와 환대를 경험할 수 있을 겁니다.”
▶르 쿠방 데 미님 호텔 앤드 스파, 객실 245유로부터, 스파65유로(30분)부터,
couventdesminimes-hotelspa.com
마르세유 구 항구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
잡아 온 물고기를 판매하는 떠들썩한 가판은 이곳에서 매일 아침 볼 수 있는 풍경이다
Scent from Port and Soap, Marseille
짭조름한 바다 내음에 섞인 풋풋한 비누
향기, 마르세유
어디로 눈을 돌려도 숲과 밭,
말이 목가적 풍경을 이루는 프로방스 시골을 돌아다니다가 프랑스 제2의 도시 마르세유에 도착하니 살짝 어지러울 지경이다. 눈앞엔 대체 어디서
왔는지 온갖 인종의 사람이 바삐 제 갈 길을 가고, 싱그러운 꽃향기 대신 비릿하고 짭짤한 바다 고유의 향기가 풍겨온다. 하지만 이곳엔 생기가
넘쳐 흐른다. 이른 아침 구항구(Vieux Port)에선 더더욱 그렇다.
항구 앞 메트로 역으로 출근하는 이들이 꾸역꾸역 들어가고, 작은 어선이 하나 둘 들어와 그날 새벽의 수확물을 항구변 가판에 차곡차곡 올려놓곤 흥정을 시작한다. 그 뒤로 우뚝 선 파빌리온의 안쪽 천장에 거리가 그대로 반사되어 항구의 생기는 두 배로 늘어난다. 이 요상하면서 멋진 파빌리온은 지난해 마르세유가 ‘2013 유럽 문화수도(European Capital of Culture)’에 선정되면서 생겨난 건축물로 세계적 건축가 노먼 포스터(Norman Foster)가 지휘하는 포스터 앤드 파트너스(Foster Partners)의 작품이다.
“마르세유는 볼거리도, 즐길
거리도 넘쳐나는 도시지만 마르세예(Marseillais, 마르세유 시민)는 그걸 개발할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했어요. 그 많은 역사 유적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이제 우리도 변하고 있어요. 역사적 가치를 깨닫고 더 많이 홍보하려고 노력하죠. 지난해 유럽 문화 수도에
마르세유가 선정되면서 그런 분위기가 더욱 가속화되었어요. 도시의 역사를 다시 쓸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마르세예인 에밀리 보넬(Emilie
Bonnel)이 말한다.그녀와 함께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Notre-Dame de la Garde)에 서서 구 항구 변을 바라본다.
어부의 수호성인을 모신 네오비잔틴 양식의 이 교회는 해발 149미터의 언덕에 자리해 마르세유 중심부를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다. 보넬이 육지 쪽으로 움푹 파인 듯한 형태의 구 항구 끝을 가리키며 말한다. “저기 검정색 네모난 건물 보여요? 그 옆에 하얀 건물과 일대 주변 단지가 모두 지난해에 생겼어요.” 그녀가 말하는 검정색 건물은 뮤셈(MuCEM)이라 부르는 지중해 문명 박물관(Musee des Civilisations d’Europe et de Mediterranee)으로, 건축과 공간 자체도 굉장히 매력적이고, 훌륭한 기획 전시를 열며, 들어가면 나오고 싶지 않은 서점을 갖추고 있다. 뮤셈뿐 아니라 이 일대가 모두 새로운 문화 예술의 도시 마르세유를 이끌어가는 주요 무대다.
눈이 핑 돌 만큼 멋진 핫
스폿이 도시를 장악하고 있어 마르세유가 프로방스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아이러니하게 요즘 도시에서 가장 트렌디한 장소 쿠르 줄리앙(Cours
Julien)에서 진정한 마르세유 전통을 만난다. 그라피티 투성이인 건물 사이에서 어울리지 않을 듯 어우러지는 오래된 상점 사보네리 마르세예 드
라 리코른(Savonnerie Marseillaise de la Licorne). 사봉(savon)은 프랑스어로 비누. 사봉 드
마르세유(Savon de Marseille)는 명사나 다름없는 도시의 역사적 산물이다.
(왼쪽)
구 항구 앞 지하철역 뒤쪽으로 노먼 포스터의 파빌리온이 보인다.
(중간) 뮤셈 건물을 그늘 삼아 휴식 중인 시민
(오른쪽) 사보네리 마르세유 드 라 리코른의 주인 세르주 부뤼나.
사봉 드 마르세유는 오직 식물성 기름으로만 만드는데 역사가 무려 600년이나 된다. 올리브유, 소금, 소다회(soda ash) 등 비누의 재료를 도시 인근에서 쉽게 구할 수 있어 예부터 비누 제조가 활발했다. 1688년 루이 14세가 오직 마르세유에서 올리브유로 만든 비누에만 사봉 드 마르세유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도록 법으로 제정하면서 이곳 비누는 더욱 유명해진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도시에 130여 곳의 비누 제조 공장이 있었을 정도. 오늘날 비누 장인이 운영하던 가게는 대부분 사라졌지만 라 리코른 같은 몇몇 곳은 아직도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상점과 이어지는 비누 공장
안으로 들어가자 느닷없이 재채기가 나온다. 멈추지 않는 재채기에 연신 코를 풀어대니 이곳 주인인 세르주 부뤼나(Serge Bruna)가 큭큭대며
웃는다. “여기서 1달만 일해봐요. 그럼 괜찮아질 거예요.” 1달은커녕 1시간도 버티기 힘들 것 같다. 게다가 비누 코팅된 바닥은 어찌나
미끄러운지 초면에 온갖 추한 꼴은 다 보이고 만다. 아담하고 낡은 공장에는 비누 재료와 잘 찍어낸 비누가 여기저기 쌓여 있다. 사봉 드
마르세유의 트레이드마크인 정육면체 모양 비누는 상당히 고전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모두 비누 만드는 장인이었어요. 여기 이 기계들은 여전히 잘 돌아가지만 모두 100년이 넘은 거죠.” 그에 따르면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제조법은변함이 없다. 몇 가지 에센셜 오일을 더해 향을 바꾸거나 매년 새로운 모양을 만드는 게 전부. “앞으로도 전통 제조법을 따르는 건 변함없을 거예요. 지난해엔 특별한 비누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어요. 고심 끝에 지역에서 유명한 파스티스(pastis, 식전주)를 떠올렸고, 파스티스의 주원료인 아니스(anise) 향을 넣은 비누를 만들었죠.”
부뤼나는 옛모습을 간직한 자신의 가게와 공장이 자랑스러운 듯 보인다. 상점은 허름하고, 옛날 디자인을 그대로 사용하는 패키지는 시대에 뒤떨어져 보이지만 이곳에서야 비로소 마르세유라는 도시의 참모습을 본 것 같은 호감을 느낀다. 아무리 최고급 향수가 판쳐도 사람들은 여전히 풋풋한 비누 향을 가장 선호하는 것과 같은 이유로 말이다.
▶사보네리 마르세유 드 라
리코른, 300g 큐브 비누3.50유로,
savon-de-marseille-licorne.com
심지아는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의 에디터다.
이규열은 여행, 패션, 인물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작업해온 사진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