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지방에 폭설이 내린 지 꽤 오래됐지만 추운 날씨 탓에 길이 군데군데 얼었다. 때문에 4시간 가까이 걸려 조 필립보 신부가 머물고 있는 강원도 신남 근처 '겟세마니 기도의 집'(인제군 남면 부평3리)에 도착했다.
굽이굽이 휘감아도는 소양호를 언덕에서 내려다 보고 있는 '겟세마니 기도의 집'. 빼어난 경치에도 불구하고 적막감부터 앞선다. 치우다 만 눈이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마당을 휘젓고 다니고, 성당 지붕 끝에는 어린애 키만한 고드름이 매달려 있다.
얼마후 조 필립보(81)신부가 2층 성당에서 나왔다. 층계 난간을 걸어 내려오는 발걸음이 예전같지가 않고 힘들어 보인다.
1940년, 24살 청년 때 성골롬반회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왔으니 이 땅에서 산지 올해로 57년째. 그 오랜 세월 동안 일제로부터의 추방, 죽음의 행진 등 파란만장한 선교사 생활을 했지만 앞에 나서서 얘기 하는 성격이 아니라 풀지 않은 이야기 보따리가 많은 신부다.
강원도 산골에서 57년
"지난 10일간 춘천에 있는 병원에 누워 있다 나왔어요. 감기 때문에 목이 부었는데 이제는 괜찮아요. 1년 전부터 무릎과 팔의 관절이 아픈 것을 빼고는 건강합니다. 보고 듣고 말하는데 아직까지 아무 지장 없습니다."
건강을 자랑하는 조 신부가 유독 관절이 아픈 이유는 홍천. 인제. 원통. 간성 등지에서 가난한 본당과 공소를 꾸려가느라 노동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춘천 교구의 어느 신부가 "조 신부 만날 기회 있으면 강원도 산골에서 사목활동 외에 무엇을 했느냐고 물어보세요. 아마 땅파고 못질하는 '노가다' 외에 별로 대답할 게 없을 거예요"라고 한 귀뜀이 생각났다.
조 신부에게 "그의 말이 정말이냐"고 물어 보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가벼운 웃음뿐. 몸에 밴 겸손 때문인지 개인적인 얘기는 별로 하지 않으려 한다.
조 신부의 검소한 생활과 겸손을 엿볼수 있는 최근의 일화 한토막.
감기 때문에 지난해 12월 27일 병원에 입원할 때 조 신부는 고물 승합차를 신남 시내까지 직접 몰고가서 춘천행 시외버스를 탔다. 같이 생활하는 평신도 선교사 임숙녀(66.보나)씨가 "몸도 안좋으니 이번 한번만 승용차 갖고 있는 신자한테 신세를 지자"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사건'은 병원에서 벌어졌다. 엑스 레이촬영을 위해 윗옷을 벗자 팔꿈치와 겨드랑이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소매는 다 닳아 떨어진 거적같은 내복을 입고 있는 것이었다. 임씨는 의사와 간호사 눈을 피해 얼른 내복을 벗겨 감추었다.
퇴원하는 날, 임씨가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신부님, 그날 제가 얼마나 창피했는지 아세요.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려요"라고 했더니 조신부는 "그거 깨끗이 빨아 입은 겁니다. 냄새 안납니다." 라며 빙긋이 웃기만 했다. 임씨는 곁에서 식사와 빨래를 챙겨주고 싶지만 조 신부 자신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원하지를 않는다.
조신부에게 지난해 6월 문을 연 '겟세마니 기도의 집'에 대해 물었다.
"하루 한끼만 먹고 기도하면서 보속의 시간을 갖는 피정의 집입니다. 여기에 오면 맨발로 걸어 다녀야 합니다. 현대인들이 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2박 3일간 대자연 속에서 묵상을 하고 돌아가면 많은 영적 보탬이 될 것입니다. 앞만 보고 바쁘게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회개와 보속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독특한 피정은 아일랜드에서 몇백년의 전통을 갖고 있는 피정 프로그램을 옮겨 온 것이다. 조 신부 자신도 신학생 시절 아일랜드 롯도 호수의 작은 섬에서 열리는 이 피정에 매년 참가해 많은 영적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조신부는 "강의와 교육이 없기 때문에 보속거리와 지도지향을 갖고 오면 훨씬 좋을것"이라고 말했다.
화제를 돌려 그의 우여곡절 많은 선교사제 생활 57년을 되돌아보았다.
대동아전쟁 발발로 일제가 외국인 사제들을 잡아들이던 1941년 12월, 홍천본당 보좌신부로 있던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춘천으로 끌려갔다. 한국파견 임명을 받고서야 '코리아'라는 나라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알았던 그는 한국 도착 1년 만에 낯선 땅의 낯선 감옥에 갇혔다.
"아니, 여기가 제 1의 고향"
"그때 옷을 제대로 걸치고 가지 않아 감옥이 무척 추웠어요. 아마 12월 8일이었을 겁니다. 감옥에서 덜덜 떨고 있는데 옆방에서 구 주교님(초대 춘천교구장 퀸란 주교)이 당신의 외투를 벗어서 보냈어요. 어린 보좌신부가 어금니를 부딪칠 정도로 떨고 있다는 소식을 간수를 통해 들었나 봅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주교님의 외투를 입겠습니까. 다시 돌려보냈지요. 그런데 옆방에서 구 주교님이 '보좌신부가 주교의 말을 안듣는다'며 호되게 야단을 치는 거예요. 그때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주교님의 외투를 입고 있었어요."
조 신부는 고향 호주로 추방됐다가 47년에 다시 홍천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더 혹독한 6.25사변의 시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산군에게 체포돼 서울과 평양을 거쳐 만포에서 중강진까지 열흘 동안 눈속을 밤낮으로 걸었던 그 유명한 '죽음의 행진'...
"교황대사 번 주교와 가르멜 바오로회 수녀들과 함께 평양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미군 포로 7백명과 합류해 걸었어요.북한군들은 군대식 속보로 걸으면서 낙오자가 생기면 가차없이 그 자리에서 총살했습니다."
조 신부는 그때 절망이라는 것을 처음 경험했다고 한다. 그러나 모진 수용소 생활을 견뎌내고 종전 후에는 포로교환협정에 따라 시베리아와 모스크바를 경유해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조 신부는 그토록 모진 고통과 시련만 안겨준 이땅에 곧바로 다시 돌아왔다. 강원도 산골 가난한 사람들의 벗이 되어 주고 싶어서다. 그 소박한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요즘도 신남을 나갈 때면 그의 승합차는 마을버스가 된다.
"지금이야 길이 뚫려 편하지만 해방 무렵에는 홍천본당 관할 10여군데 공소를 모두 걸어다녔어요. 홍천에서 출발해 서석 물결리 공소에서 하룻밤 자고 그 다음날 현리로 가서 미사를 드리는 그런 사목이었는데 인상적인 것은 공소 신자 대부분이 옹기장이였던 거예요. 다들 박해시대에 산 속에 숨어살던 신자들의 후손이지요."
"일부에서 본당 대형화와 황금만능주의에 대한 우려를 하지만 평신도들은 대체적으로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어요. 이말은 일본의 어느 신부와 이야기를 나누다 발견한 사실입니다. 신자들의 신앙적 열의와 헌신은 우리 교회의 큰 희망입니다."
그는 "가끔 택시기사들이 '한국에 57년 살았으면 여기가 제 2의 고향이겠네요 하지만 그때마다 '호주보다 한국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여기가 제 1의 고향'이라고 대답한다"면서 "힘 닿을 때까지 신자들을 위해 한국에 남아 있겠다"고 말했다.
인제=김원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