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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도 (尋牛圖, 十牛圖) 해설
* 불교방송, 월호 스님 특강을 중심으로 * 심우도 촬영, 정리 ; 이재익, 장흥 보림사에서
1) 첫 번째, 심우. ‘소 찾아 나서다.’
게송 <곽암선사 십우도 1. 심우(尋牛)> 망망발초거추심(茫茫撥草去追尋) 수활산요로갱심(水闊山遙路更深) 역진신피무처멱(力盡神疲無處覓) 단문풍수만선음(但聞楓樹晩蟬吟)
아득히 펼쳐진 수풀 제치고 소찾아 나서니 물 넓고 산 먼데 길은 더욱 깊구나. 힘 빠지고 정신 피로해 소 찾을 길 없는데 단지 들리는 건 늦가을 매미 물음 소리뿐’
* 10우도는 12세기 중엽 송나라 곽암 선사가 도교의 8우도를 보완해서 그렸다고 전해 진다.
첫 번째 그림을 보면 소를 찾아 나서는 산속으로 들속으로 이 물을 건너고, 산을 지나서 깊은 길속으로 숲을 헤치면서 소를 찾아나서는 그림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의미는 마음공부를 실감나게 하기 위해서 몸뚱이를 받아서 태어났다. 마음공부를 하려면 도대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또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알아야 공부를 할 수 있다. 불교에서는 ‘마음이 운전하고 몸은 자동차다. 이 마음이라는 게 과연 어떤 건지? 이것을 알아야 모든 번민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 최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소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찾아나서는 것처럼 마음이라는 게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찾아나서는 단계이다.
2) 두 번째, 견적. ‘자취를 보다.’ 게송 <곽암선사 십우도 2. 견적(見跡)> 수변임하적편다 (水邊林下跡編多) 방초리피견야마 (芳草離被見也磨) 종시심산갱심처 (縱是深山更深處) 요천비공즘장타 (遼天鼻孔怎藏他) ‘물가 나무 아래 발자국 어지러우니 꽃다운 풀 헤치고서 그대는 보았는가. 설사 깊은 산 깊은 곳에 있다해도 먼 하늘 향한 콧구멍 어찌 숨길 수 있으랴.’ 두 번째 단계인 견적. ‘자취를 보다.’ 이 순서에서는 소의 발자취 발자국을 보는 그림이다. ‘먼 하늘 향한 콧 구멍 어찌 숨길 수 있으랴.’ 콧구멍은 우리의 본래 면목자리, 본마음, 참나 자리 이것을 의미한다. “마음이라는 게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하고 찾아 나섰지만 “아! 이제 보니깐 마음이라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이구나! 현상만 있을 뿐이구나! 마치 저 아지랑이와 같이….”아지랑이는 먼 데서 바라보면 있다. 가까이 가서 잡으려고 들면 잡히는 게 없다. 이것처럼 ‘현상은 있지만 고정된 실체는 없다.’라는 것을 터득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자취를 본다는 것이다.
3) 세 번째, 견우. ‘소를 보다.’ 게송 <곽암선사 십우도 3. 견우(見牛)> 황앵지상일성성 (黃鶯枝上一聲聲) 일난풍화안류청 (日暖風和岸柳淸) 지차갱무회피처 (只此更無回避處) 삼삼두각화난성 (森森頭角畵難成)
노란 꾀꼬리 가지 위에 지저귀고 햇볕 따사롭고 바람 온화해 언덕엔 푸른버들 다만 이 회피할 수 없는 곳에 삼삼 한 쇠뿔을 그리기가 어려워라.
세 번째 단계는 바로 견우. ‘소를 보다.’ 에서는 소를 보긴 보는데 이 뒷부분 꼬리 있는 엉덩이 부분만 보는 그림이다. 우리가 이 견우단계에서 소를 보긴 보지마는 그러나 아직도 그 성품자리에 완전히 사무치진 못한 경지이다. 이 견우까지 경지가 해오(이해)로써 깨친 그런 단계이다. 아직 공부가 다 된 건 아니고 다만 그 꾀꼬리가 지저귀고 푸른 버드나무가 언덕에 피워있는 상태. 유록화홍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다.’ 안횡비직 ‘눈은 옆으로 찢어져 있고 코는 우뚝 솟아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단계이다. 성품을 보게 되는 단계가 3번째 단계인데 불교에서 ‘성품은 공한 것이다.’ 성품이 공하다고 하는 것은 ‘무아설’ 하고도 통한다. 오온개공 ‘오온이 다 공하다.’ 나라는 것은 오온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온은 색 ` 수 ` 상 ` 행 ` 식 인데 그것은 바로 몸과 마음을 뜻한다. 색이 몸이고, 수`상`행`식은 마음을 4단계로 나누어 놓은 것이다. 그러니까 ‘몸과 마음이 공하다.’라고 한 것은 무엇이냐? 바로 고정된 실체로써에 ‘나는 없다.’ 이것이다. 그럼 고정된 실체로써에 나가 없기 때문에 어떠한 나도 만들어 갈 수 있다 고하는 불교의 ‘역동적’인 가르침이다. 불교는 허무주의가 아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 도리를 알아서 내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이야 말로 진리를 보여 주고 있다. 사람들은 진리를 찾아 헤매지만, 실상은 진리 아닌 것을 찾는 것이 진리를 찾는 것 보다 더 힘들다. ‘진리 아닌 것을 찾는 것’ 이것이 바로 3번째 소식이다.
4) 네 번째, 득우. ‘소를 얻다.’ 게송 <곽암선사 십우도 4. 득우(得牛)>
갈진정신획득거 (渴盡精神獲得渠) 심강역장졸난제 (沈强力壯卒難除) 시유재도고원상 (時有縡到高原上) 우입연운심처거 (又入煙雲深處居)
온 정신 다하여 이놈을 잡았으나 힘세고 마음 강해 다스리기 어려워라. 어느 때는 고원 위에 올라갔다가 어느 때는 구름 속에 들어가누나.’
덕우에서는 성품을 보긴 보았지만 아직 내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는 그런 경지에는 아직 못 들어섰다. 그래서 득우 그림에 보면 소고삐를 잡기는 잡았는데 아직 팽팽한 접전을 버리고 있다. 언제 남의 밭으로 침범할지 모르는 소의 고삐를 잡아서 당겨 줘야한다. 우리가 성품을 보긴 봤으나 과거의 습기는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물론 성품을 봄과 동시에 습기도 완전히 살아지는 그런 경우도 있기는 있다. 그런 경우는 드물다. 습기라는 것은 말 그대로 습관적인 기운이다. 번뇌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수소단의 번뇌와 견소단의 번뇌. 견소단의 번뇌는 보면 끊어지는 번뇌지만, 수소단의 번뇌는 닦아야만 끊어지는 번뇌이다. 그래서 이 습기를 닦기 위해서는 먼저 참회가 중요하다. 과거의 업장을 참회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습기를 닦아 내는 것이다. 나아가서 베푸는 마음을 연습하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탐욕을 다스려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심우, 견적, 견우 이 세 가지를 통해서 어느 정도 불교의 핵심을 파악만 했지 아직 진정으로 내것으로 만들기는 쉬운 게 아니다. 이치로 만 터득하는 것과 그것을 정말 사무치게 몸에 온몸으로 터득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네 번째 득우 부터는 이것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그런 단계다.
5) 다섯 번째, 목우, ‘소를 기르다’ 게송 <곽암선사 십우도 5. 목우(牧牛)> 편삭시시불리신(鞭索時時不理身) 공이종보입애진(恐伊縱步入埃塵) . 상장목득순화야(相將牧得純和也) 기쇄무구자축인( 鎖無拘自逐人) . 채찍과 고삐는 떼 놓치 않음은 멋대로 티끌 세계로 들어갈까봐 잘 길 들여서 온순하게 되면 멍에 걸지 않아도 절로 사람 따르리 목우는 마침내 고삐를 손에서 놓은 상태이다. 그냥 놔둬도 소가 함부로 이리저리 날뛰지 않고 어느 정도 길들여진 상태다. 그래서 멍에를 걸지 않아도 저절로 사람을 따른다. 이것은 바로 참회와 보시를 통해서 어느 정도 습기가 다스려진 상태를 말한다. 그러나 아직도 온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그러기 때문에 이럴 때는 서원을 발해야 한다. 서원을 발하지 않으면 다시 세상을 욕심으로 살게 된다. 서원을 발 하면 세상을 원생으로 살게 된다. ‘중생의 삶은 업생이요, 보살의 삶은 원생이다.’ 그래서 업생은 과거에 지은 업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체 그냥 사는 삶이 업생이고, 원생은 자기가 미래의 목표를 세워 가지고 그 목표에 입각해서 자신의 인생을 갈무리 해 가는 삶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하고 능동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 있다. 원을 세움으로써 비로소 구걸하는 종의 삶에서 베푸는 주인공의 삶으로 바뀌는 것이다. 원 중에 원은 무엇이냐? “법륜을 굴리겠습니다.” 하고 이렇게 원을 세우는 것이다.
6) 여섯 번째, 기우귀가, ‘소타고 집에 돌아가다.’ 게송 <곽암선사 십우도 6.기우귀가(騎牛歸家)> 기우이리욕환가(騎牛迤邐欲還家) 강적성성송만하(羌笛聲聲送晩霞) 일박일가무한의(日拍一歌無限意) 지음하필고순아(知音何必鼓唇牙) 소타고 굽이굽이 집으로 돌아가니 오랑캐 피리소리가 저녁 놀에 실려간다 한박자 한곡조에 한량없는 뜻이야 지음 지음이 어찌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십우도에 여섯 번째 기우귀가. 이 그림을 보면 소를 타고 유유자적하게 피리를 불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그림이다. 여기선 이 소와 하나가 되는 경지를 말한다. “법륜을 굴리겠습니다.” 하고 원을 세워서 살다 보면 모든 일이 법륜을 굴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 된다. 밥을 먹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돈을 버는 것도 법륜을 굴리기 위해서 사는…. 기도도 마찬가지다. 구걸형 기도나 청탁형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고, 불보살님과 동일한 마음을 연습하는 일심공부로써의 기도를 하는 경지이다.
7) 일곱 번째, 도가망우, 바로 집에 도착해서 소를 잊어버린다. 게송 <곽암선사 십우도 7.도가망우(到家忘牛)> 기우이득도가산(騎牛已得到家山) 우야공혜인야한(牛也空兮人也閑) 홍일삼간유작몽(紅日三竿猶作夢) 편승공돈초당간(鞭繩空頓草堂間) 소타고 이미 고향에 도착 하였으니 소 또한 공하고 사람까지 한가롭네 붉은 해 높이 솟아도 여전히 꿈속이니 채찍과 고삐는 띠집에 할일 없이 놓여있네. 소가 없어지고 사람만 남아 있다. 이것이 바로 참선을 하면서 첫 번째로 몸뚱이가 사라지는 그런 경지를 말한다. 기도는 일심공부요, 참선은 무심공부요, 행불은 발심공부다. 그중에서도 참선은 또 3가지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먼저 몸이 사라지는 경지이다.
8) 여덟 번째, 인우구망. ‘사람도 소도 모두 잊어버리다’ 게송 <곽암선사 십우도 8.인우구망(人牛俱忘)> 편삭인우진속공(鞭索人牛盡屬空) 벽천요활신난통(壁天遼闊信難通) 홍로염상쟁용설(紅爐焰上爭容雪) 도차방능합조종(到此方能合祖宗) 채찍과 고삐, 사람과 소는 모두 비어 있으니 푸른 허공만이 아득히 펼쳐져 소식 전하기 어렵구나 붉은 화로의 불꽃이 어찌 눈을 용납하리오. 이경지에 이르러야 조사의 마음과 합치게 되리. 여덟 번째 인우구망은 소도 사람도 없이 동그라미만 그려져 있다. 참선의 두 번째 단계인 마음이 사라진 단계이다. 마음, 분별심이 완전히 쉰 그런 경지죠. 모든 것이 공하게 된 그런 경지를 말한다.
9) 아홉 번째, 반본환원, ‘근원으로 돌아가다.’ 게송 <곽암선사 십우도 9.반본환원(返本還源)> 반본환원이비공(返本還源已費功) 쟁여직하약맹롱(爭如直下若盲聾) 암중불견암전물(庵中不見庵前物) 수자망망화자홍(水自茫茫花自紅) 근원으로 돌아가 돌이켜 보니 온갖 공을 들였구나 차라리 당장에 귀머거리나 벙어리 같은 것을 암자에 앉아 암자 밖 사물을 시비하지 않으니 물은 절로 아득하고 꽃은 절로 붉구나. ‘반본환원’에는 자연 산 강 나무들만 그려졌다. 이것은 몸이 쉬고, 참선의 세 번째 단계로 마음이 쉬니까 본마음이 드러난 상태이다. 본마음이라고 해서 특별한 현상과 소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눈앞에 세계가 그대로 본마음의 세계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일뿐!”
10) 마지막 단계 열 번째, ‘입전수수’ 다시 저자거리로 돌아가다.
게송 <곽암선사 십우도 10. 입전수수(入廛垂手)> 로흉선족입전래(露胸跣足入廛來) 말토도회소만시(抹土途灰笑滿顋) 불용신선진비결(不用神仙眞秘訣) 직교고목방화개(直敎枯木放花開)
맨 가슴 맨 발로 저잣거리 들어오니 재투성이 흙투성이 얼굴 가득 함박웃음 신선이 지닌 비법 따윈 쓰지 않아도 당장에 마른 나무 위에 꽃을 피게 하누나!
마침내 십우도의 열 번째 ‘입전수수’ 저잣거리에 들어가 자비의 손을 드리우는 경지다. 이것은 바로 법륜을 굴리는 이런 장면을 뜻한다. 이 법륜을 굴리는 것이야 말로 열 번째 단계에 놓여 있지만 그러나 첫 번째부터 아홉 번째 단계까지 모두에 해당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심우, 견적, 견우 상태에서도 법륜을 굴릴 수 있고 득우, 목우, 기우귀가 전부 법륜을 굴릴 수가 있다. 각각의 상태에서 아는 만큼 전하고 가진 만큼 베푸는 그런 뜻을 가질 수 있죠. 전반적으로 설명을 다시 되짚어 보면 먼저 ① 심우, ② 견적, ③ 견우 이렇게 세 번째까지는 일단 이 불법에 대해서 본성에 대해서 어느 정도 깨닫게 되는 그런 경우이고 그 다음에는 ④ 득우는 참회, ⑤ 목우는 발원, ⑥ 기우귀가는 기도의 단계고 그 다음에 세 가지 ⑦ 도가망우, ⑧ 인우구망, ⑨ 반본환원은 바로 참선에서 몸이 사라지고, 마음이 사라지고, 본 마음자리가 드러나는 이런 3단계로 볼 수 있다. 그래서 ⑨ 반본환원까지 오면 이것이 바로 증오 제대로 깨달음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든 이런 상태이다. 진정한 견성이다. 그 다음 마지막 ⑩ 입전수수는 바로 지혜를 자비로써 전환해서 행불, 부처의 행을 수행하는 보살행을 하는 그런 그 발심이다.
그래서 이 십우도는 참선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라고 수많은 좋은 구슬들이 있지만 이것들이 아직 체계화가 좀 안된 면이 많다. 특히 한국불교에 있어서…한국불교에 수행체계를 세우는데 있어 이 십우도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또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정말 가슴에 손을 얹고 “내가 몇 번째 단계에 와 있나?” 이걸 확인하고 그 다음에 “앞으로 어떤 단계를 거쳐야 할 것인가?” 이것을 확인 할 수 있는 그림과 게송이다. 그래서 이 그림과 게송을 통해서 마음공부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정말 “나는 어디 쯤 와 있을까?” 그리고 “내가 앞으로 어디까지 가야 될 것인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런 하나에 지침으로 삼을 수 있다는 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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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에 대한 오해와 이해 몇 가지
① 불교는 자력신앙인가? 타력신앙인가? 이렇게 질문을 하면 많은 분들이 “자력 신앙이다.” 이렇게 대답을 해요. 그러나 자력적 요소만 있다면 종교라는 게 사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종교라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뭔가 기대고 싶어 한다. 관세음신앙이라든가, 아미타신앙 이런 것들은 타력적 요소가 강하다. 그래서 불교는 자력적 요소와 타력적 요소 모두 다 가지고 있다. ‘자력은 인(因)이요, 타력은 연(緣), 그래서 인연설 이다. 결국 궁극적으로는 무엇인가? 자각(自覺 = 자각(自覺), 각타(覺他)) 신앙이다. 스스로 깨닫고 남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게 도와주는 것, 이것이 불교에 근본이다. 자력만도 아니요 타력만도 아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되는 것처럼 자력이든 타력이든 자각을 이루고 각타에 이르면 되는 것이다. ‘자력이라고 해서 수승(낫다)하고 타력은 열등하다.’ 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 궁극에 가면 자타불이(自他不二), 자타일여(自他一如)이다. 나라든가 남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니 남이니 하는 것으로 나눈 것 자체가 아직 중생계에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세계로 가게 되면 ‘자타불이, 자타일여’ 이렇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굳이 따질 필요조차 없어진다.
② 불교는 무신론 ? 유신론 ? 많은 분들이 또 “무신론 입니다.” 라고 대답한다. 틀린 답이다. 불교는 ‘비신론’(월호 스님)이라고 할 수 있다. 절에 있는 신중단은 바로 신의 무리를 모신 단이다. 불교에서는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다만, 다른 종교와의 차이는 다른 종교에서는 신을 주인으로 섬기고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 이렇게 해서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주종관계로 설정하지만, 불교에서는 신과 인간과의 관계가 결코 주종 관계가 아니다. 왜냐? 나의 주인은 나이기 때문에 신도 나의 주인이 될 수 없고, 다만 나를 돕고 옹호해주는 그런 정신적 존재라고 규정한다. 신과 부처님의 관계는 사제관계이다. 부처님의 또 다른 이름 가운데 천인사(天人師)가 있다. 부처님은 인간의 스승일 뿐 아니라 신들의 스승이다. 그러기에 신과 우리는 도반관계이다. 도반관계로 잘 지낼 수 있는데 굳이 주인님으로 섬기며 종노릇을 할 필요가 없다.
③ 불교는 성선설인가? 성악설인가? 성선설도 아니고 성악설도 아니다. 그러면 뭐냐? ‘불교는 성공설(性空說)이다.’ 성품은 선한 것도 아니요 악한 것도 아니다. 空한 것이다. 공하다고 허무주의는 아니다. 비워져서 무엇이든 채울 수 있는 그런 공간으로서의 공이다. 공하기 때문에 선하게도 표현 될 수 있고 악하게도 표현 될 수 있다. 모든 것을 수용하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품이 공하다는 것은 매우 역동적인 사상이다. 부처가 될 수도 있고 또 악마가 될 수도 있다. 그런 무한한 가능성을 어떻게 쓸 것인가는 온전히 나에게 달려 있다. 나는 내가 주인이 되어서 나를 만들어간다. 나를 창조해 나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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