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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
장소 |
내용 |
비고 |
08:00 |
잠실역 주변 |
서울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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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 |
화천민속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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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0 |
계성사지 석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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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0 |
위라리 칠층석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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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0 |
점심식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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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 |
성불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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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 |
화천향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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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0 |
화음동정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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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0 |
평화의 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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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0 |
꺼먹다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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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0 |
화천 출발 |
화천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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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0 |
잠실역 주변 |
서울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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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강사(오덕만 선생 011-417-7481)에게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 旅路에서 즐기는 詩 感想 ]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 [도종환]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자연의 하나처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서둘러 고독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기다림으로 채워간다는 것입니다
비어 있어야 비로소 가득해지는 사랑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몸 한 쪽이 허물어지는 것과 같아
골짝을 빠지는 산울음소리로
평생을 떠돌고도 싶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흙에 묻고
돌아보는 이 땅 위에
그림자 하나 남지 않고 말았을 때
바람 한 줄기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모두 크고 작은 사랑의 아픔으로
절망하고 뉘우치고 원망하고 돌아서지만
사랑은 다시 믿음 다시 참음 다시 기다림
다시 비워두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찢긴 가슴은
사랑이 아니고는 아물지 않지만
사랑으로 잃은 것들은
사랑이 아니고는 찾아지지 않지만
사랑으로 떠나간 것들은
사랑이 아니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비우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큰 사랑의 그속에 들 수 있습니까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한 개의 희고 깨끗한 그릇으로 비어 있지 않고야 평온한 마음으로 다시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거듭거듭 가득 채울 수 있습니까 - 도종환의 [접시꽃 당싱]에 수록
화천의 문화유적
화천군은 구름이 가까워서 늘 옷이 젖을 만큼 산이 많은 고장이라고 한다. 사명산, 일산, 광덕산, 화악산, 매봉, 대성산, 백암산 등 1천m가 넘는 산이 열 개도 더 된다. 그처럼 높은 산이 많은 화천군은 한국전쟁 때 치열한 싸움터였다.
화천은 자기 고장을 소개하는 캐치프레이즈로 가곡 "비목(碑木)의 고장을 내세우고 있다.
군의 북쪽이 휴전선과 맞닿아 있고 곳곳에 전적지가 많이 남아있으며 가장 대표적인 전적관광지는 평화의 댐 전적관광지와 파로호 전적 관광지이다.
평화의 댐은 1987년 2월부터 1988년 5월까지 15개월에 걸쳐 축조된 댐으로 북한의 금강산 댐 건설에 따라 수공에 대비하기 위해 국민들의 성금으로 쌓은 댐이다.
평화의 댐은 95년, 96년, 99년 수해 시 홍수조절 기능이 입증되면서 관광명소로 자리 잡았다.
평화의 댐 한켠에는 비목공원이 조성되어 여행자들의 나들이를 돕고 있다.
국민적인 가곡 "비목"의 탄생지가 바로 이곳이다. 사연은 196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평화의 댐 북방 14km 백암산 계곡 비무장지대에 배속된 한 청년장교는 잡초가 우거진 곳에서 이끼 낀 무명용사의 돌무덤 하나를 만난다. 녹슨 철모, 이끼 덮인 돌무덤, 그 옆을 지키고 있는 새 하얀 산목련, 화약 냄새가 쓸고 간 깊은 계곡을 붉게 물들이는 석양. 그는 돌무덤의 주인이 자신과 같은 젊은이였을 거라는 깊은 애상에 잠긴다. 조국을 위해 산화한 젊은 넋을 기리는 "비목"의 가사는 이렇게 탄생되었고 이 노래는 70년대 중반부터 가곡으로 널리 애창되기 시작했다. 가사를 쓴 초급장교가 바로 한명희 씨이다. 주차장 입구에 "비목"노래비가 서 있어 방문자들은 누구나 한 번씩 그 앞에 서서 가사를 되새겨 본다. 현재 비목공원에는 기념탑 외에 철조망을 두른 언덕 안에 녹슨 철모를 얹은 나무 십자가들이 십여 개 서 있어 한국전쟁이라는 민족비극의 아픔을 되새기게 해준다. 화천군에서는 매년 6월 3일부터 6일까지 이곳 비목공원과 화천읍내 강변에 들어서있는 붕어섬 등에서 "비목문화제"를 개최한다. 진중가요, 시낭송 등으로 짜여 진 추모제, 비목 깎기 대회, 주먹밥 먹기 대회, 병영체험, 군악퍼레이드 등이 나흘간 펼쳐진다.
평화의 댐에서 양구 땅으로 넘어가면 제 4땅굴과 을지전망대 등의 안보교육장이 기다리고 있다. 평화의 댐을 돌아본 후 파로호 전적관광지도 가볼만 하다. 파로호는 1944년 화천댐 건설로
생긴 인공호수로 산 속의 바다라고도 불린다. 호수에는 쏘가리, 잉어등 70여종의 민물고기가 서식한다. 한국전쟁 당시 화천댐 사수를 위해 중공군 3개 사단을 수장시킨 처절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훗날 이곳을 방문했던 故이승만 대통령은 오랑캐를 격파한 호수라는 뜻에서 "파로호"라는 친필을 썼다.
그 이후부터 호수 이름이 파로호라고 지어졌다. 현재 전망대, 안보관 등이 들어서 있고 월하 이태극의 시조비도 세워져 있다.
계성사지 석등
계성사지 석등은 고려 충렬왕 때 계성사 건립과 함께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이 석등의 특징은 불을 밝히는 부분인 화사석이 6각형이라는 점이다. 6각형 석등은 우리나라에 총 4기 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꼬불꼬불 산길을 한참 따라 계산골에 이르면 석등이 모습을 드러낸다.
장군산은 임진왜란 당시 방어사 원호장군이 이끌던 군사들의 진영터로 전해진다. 왜적이 옮겨 간 다음 이름 붙여진 산이다.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계산골에 이르면 1968년에 보물 제496호로 지정된 석등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약 200m 더 올라가면 나말여초(羅末麗初) 낭천(화천의 옛 이름)이 본향인 당대 최고의 건축가 수주최씨(水州崔氏) 최사위가 지은 것으로 보고 있는 산지가람 계성사의 유적지와 만난다.
계성사지 석등은 고려 시대 문화유산으로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 부분이 주로 4각이나 8각 형태로 이뤄진 일반 석등과 달리 6각 형태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같은 석등 양식은 북한을 제외하고 우리나라에서 전북 남원 실상사 석등(보물 제35호)과 계성사지 석등이 유일하다. 또 각 면의 석등 재료를 따로 조립할 수 있도록 만들어 기존의 석등과 차별화되고, 무엇보다도 고려 시대의 유물로는 보존상태가 훌륭하다는 장점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현재 석등은 군부대 전차 사격장 안쪽에 위치해 있어 화천군청에서 허가를 받아야만 찾아갈 수 있어 그동안 실질적으로 일반인들의 관람이 불가능하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위라리 칠층석탑
화천대교 건너편 구릉 탑둔지 위는 고려 충렬왕 때 계성사의 분사가 있었던 자리다. 현재 사찰은 소실되고 석탑(강원도지방 유형문화재 제30호)만 보존되어 있다. 이 탑의 원형과 유사한 고려시대의 7층석탑으로 서울 경복궁안의 남계원 7층석탑(국보 제100호)이 있다.
이 탑 주변은 수목이 울창하고 경관이 아름답다.
고려시대의 옛 절터에 남아 있는 7층 석탑이다. 기단부재, 탑 몸돌, 지붕돌 등이 사방에 흩어져 있던 것을 수습하여 다시 세운 것으로, 지붕돌과 탑신의 1 ·2 ·3층의 몸돌은 원래의 것이고 4층 이상의 몸돌은 1975년 복원할 때 보충한 것이다.
탑의 형태는 커다란 바닥돌 위에 7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탑신의 몸돌은 각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을 새겨놓았고, 2층에서 1층에 비해 큰 폭으로 높이가 줄어들다가 그 이후부터는 아주 조금씩 줄어들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3단씩이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네 귀퉁이에서 살짝 치켜 올라갔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이 모두 없어지고 둥근 돌 하나만 남아 있다.
규모만 작을 뿐, 탑신의 몸돌에 기둥을 조각한 것이나 지붕돌받침이 3단인 점 등이 남계원칠층석탑(국보 제100호)과 매우 비슷한 양식과 수법을 보이고 있어 두 탑의 제작연대가 비슷한 시기일 것으로 보인다.
고려(高麗) 충렬왕(忠烈王)(1274∼1308, 재위) 때에 사찰(寺刹)을 세울 당시 이 석탑도 건립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나 확실치 않다. 높이 3.32m인데 기단부는 없어졌고 탑신(塔身)과 옥개(屋蓋)만을 다시 모은 것으로 옥개는 7개 모두 있으나 탑신은 1, 2, 3층만 원래의 것이고 나머지는 뒤에 만든 것이다.
선사시대의 유적지 탑둔지 위라유적
화천강 강변을 따라 대규모 선사유적이 발견된 탑둔지 위라유적은 화천대교 아래 북한강 물줄기를 따라 용암리와 거례리 경계수변 하류에 변형된 고인돌로 보고 있는 돌들이 약 200-300m 거리를 두고 나란히 물속에 잠겨있기도 하고 밖으로 드러나 있기도 하다.
이 주변에 화천민속박물관과 생활체육공원이 조성 중에 있다.
성불사지 석장승
1996년 2월 27일 강원도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되었다. 화천군 유촌리의 용화산(龍華山) 동쪽 산기슭에 있는 성불사지에서 정상 쪽으로 약 600m 정도 떨어진 암자 터 부근에 있는 장승이다. 재료는 화강암이며 크기는 높이 196㎝, 어깨너비 60㎝, 얼굴 두께 58㎝, 몸체 두께 47㎝이다.
장승은 허리 부분에서 두 조각으로 부러져 하반신이 땅에 오랫동안 묻혀 있었으나 나중에 발견되어 1993년 5월 복원하였다. 두 손을 모아 홀(笏)을 쥐고 선 문인석(文人石) 모양의 건장한 무인상(武人像)이다. 눈과 코가 크고 뺨은 둥글고 후덕하게 생겼으며 턱을 앞으로 내민 모습이 돌장승의 일반적인 인상과 서로 통한다.
몸체는 문인석이지만 얼굴은 화엄신장(華嚴神將)인데, 드물게도 몸체는 온전한 형상으로 조각하였다. 대개의 호법(護法) 장승 얼굴이 귀신 모습으로 발전·유행하였지만, 이 석장승은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인상은 신장의 분위기를 표출한 수작이라 하겠다.
또한 전립형(戰笠型) 테를 두른 모자를 쓰고 구슬 띠를 한 모습은 전형적인 무장의 외모로서는 보기 드문 예이다. 강원도에는 호법 장승이 없다고 알려진 이제까지의 인식을 뒤엎는 중요한 자료이다.
호법 장승이 조선시대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고 성불사의 폐사시기로 볼 때 이 석장승은 조선 전기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건립 장소가 성불사 어귀가 아닌 산등성이 암자 부근이라는 점에서는 본사가 폐사된 후 암자가 유일한 승가람(僧伽藍)이었던 조선 중기 이후로 볼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는 호법 장승에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지 않으면 그 연대가 아주 오래 되었거나, 아니면 아주 근래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석장승은 나주 운흥사 석장생(1719년:중요민속자료 12)이나 남원 실상사 석장승(1725: 중요민속자료 15)보다 오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성불사지 석불입상
1996년 2월 27일 강원도유형문화재 제115호로 지정되었다. 불상의 크기는 상체가 118㎝, 하체가 100㎝이며 결합하였을 때에는 214㎝가 된다. 원형 대좌(臺座)는 150㎝×120㎝×35㎝이며, 재료는 화강암이다.
유촌리의 용화산(龍華山) 동쪽에 위치한 성불사지에서 정상 방향으로 약 760m 떨어진 곳에 있으며, 화천 성불사지 석장승(강원민속자료 5)으로부터는 정상 방향으로 약 160m 지점에 있다. 불상은 머리와 목 부분을 잃어버리고 불신(佛身) 또한 상체와 하체로 분리된 채 나란히 엎어져 있으며 그 뒤쪽으로는 원형 대좌가 함께 남아 있다. 이는 불상의 각 부분을 별도로 만들어 끼워 조성하였으므로 구조상 분리되기 쉽기 때문이다.
상체는 떡 벌어진 어깨와 발달된 가슴으로 당당하고 강건한 모습이다. 오른쪽 어깨와 손목 부분이 깨어지고, 다소 부자연스럽게 표현된 두 손은 수인(手印)이 불분명하다. 왼손은 팔을 약간 벌린 듯 구부려 왼쪽 가슴에 얹고 있으며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뜨려 손등을 밖으로 하고 손가락을 가지런히 편 채 하복부에 대고 있다. 그런데 왼손은 보이지 않고 손 모양의 홈만을 왼쪽 가슴에 깊게 파서 나타낸 점이 특이하다.
하체는 다리의 두께가 가슴과 복부보다 얇아 상체에 비해 양감이 훨씬 뒤떨어진 모습이다. 이러한 부피감은 대의(大衣)가 끝나고 다리가 시작되는 부분에 이르러 더욱 무시되어 마치 직육면체의 판석(板石)을 보는 모습이다. 하체 하단에는 대좌에 세울 수 있도록 꽂이 역할을 하는 사각형의 촉이 만들어져 있다.
대좌는 네모반듯한 모양의 판석 위에 원형의 연화대(蓮花臺)를 1개의 돌로 만들었는데 연화대 윗면에는 하체의 촉을 꽂는 직사각형의 홈이 있고 홈 앞에는 두 발을 새겨 놓아 하체의 발목과 연결되도록 하였다. 또한 측면에는 홑꽃잎의 연꽃을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어깨부터 허리까지의 길이가 50㎝에 불과할 정도로 짧은 상체에 비해 하체는 불상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길어져 인체의 비례가 조화롭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실성이 결여되고 양감이 떨어지며 돌기둥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양식은 고려시대 석불입상에서 보이는 특징 중의 하나이며, 따라서 이 불상의 조성 시기는 고려시대 초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또한 수인이 불분명하여 어떤 성격의 불상인지 단정하기 어려우나 양손의 모습과 신라 중기 이후 미륵불(彌勒佛)을 주존(主尊)으로 하는 법상종(法相宗)이 유행하였던 점, 그리고 이 불상이 위치한 용화산이 미륵불의 주처(住處)라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볼 때 이 불상은 미륵불로 추정된다.
화천향교
병자호란 당시 산양역을 거쳐 남한산성을 향하던 유림장군이 이끌던 군사들이 군기를 재정비했던 성채산은 생산이라고도 불린 화천의 진산이었다. 또한 옛날 위험이 닥쳤을 때 봉화를 밝혔던 곳이라는 봉화산 전설이 전해지는 산이기도 하다.
산록아래에는 화천향교(강원도 지방문화재자료 제102호)가 서있다. 인근 칠성루에서는 화천시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경치가 아름다워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다.
향교는 조선시대에 각 지방에 설치된 국립교육기관으로, 성현에 대한 제사와 유학교육을 담당하던 곳이다.
외삼문 안에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의 명륜당이 있고, 계단을 올라가면 내삼문 안에 앞면 3칸·옆면 2칸의 대성전이 자리 잡고 있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창건 연대(創建年代)는 명확히 알 수 없다. 역대 지리지(歷代地理誌)에도 향교의 위치나, 건물의 규모에 대하여 대략 기술하고 있을 뿐이다.
1735년 김시민(金時敏)이 현감으로 부임하여 향교의 전사청(典祀廳)을 건설하고 외문누(外門樓)를 창건하였다. 1773년 조무(趙懋)가 명륜당(明倫堂)을 중수하고 외삼문(外三門)을 중건하였으며, 1786년 이재항(李在抗)이 향교를 중수하였다.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대성전(大成殿)을 비롯한 교궁건물(校宮建物)이 전소(全燒)되고, 남아 있던 기문(記文)들도 소실(燒失)되어 알 수 없다. 수복 후 전직원(前直員) 이종석(李鍾奭)등 관내 유림(儒林)들의 노력으로 관계당국의 지원을 받고, 향교재산의 일부를 매각하여 1960년 대성전(大成殿)과 내삼문(內三門)을 짓고, 중단되었던 석전행사(釋奠行事)를 계속하게 되었다. 1963년 교궁주위(校宮周圍)의 분기(墳基)를 이장(移葬)하고 담장 공사를 하였으며, 1968년 명륜당 중건성금모금운동(重建誠金募金運動)을 전개하여 1975년 6월 명륜당이 중건되었다.
현재 향교는 외삼문을 정면으로 전면 4칸, 측면 2칸의 명륜당이 자리하며, 계단을 올라가서 내삼문이 있고, 그 정면으로 전면 3칸, 측면 2칸의 대성전이 자리한다. 그 오른쪽에 제기고(祭器庫)가 있다.
화음동정사지
강원 화천군 사내면과 경기 가평군 북면의 경계에 있는 화악산(해발 1,468m)은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와 있는 ‘경기 5악’(화악산·운악산·송악산·관악산·감악산) 중에서도 으뜸가는 산으로 좌우로 뻗은 골과 능선이 웅장해 사시사철 산행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게 자연의 이치. 화악산의 높은 능선을 따라 여러 계곡이 발달해 있다. 정상에서 북사면에 위치한 골짜기에 해당하는 곳으로 내려오면 용담이라 불리는 계곡이 있고 다시 평지 쪽으로 한동안 달려 내려가면 삼일계곡이 유명하다. 삼일계곡은 계곡의 초입부터 울창한 수림이 가득 차 있어 원시림을 연상시킨다. 지류를 따라 넓고 평탄한 바위가 곳곳에 펼쳐져 있어 돗자리만 깔면 최적의 휴양지가 된다. 공기, 특히 비 그친 뒤의 공기는 폐부를 찌르듯 상쾌하다.
화천군 사내면 삼일1리는 성리학의 대가 곡운 김수증(金壽增·1624∼1701년) 선생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곡운구곡(谷雲九曲)과 화음동정사지(華陰洞精舍址)의 고장이다.
조선시대(17세기) 곡운 김수증 선생이 9곳의 절경을 정하였는데 이를 곡운구곡이라 부른다.
조선후기 대학자요, 문신이었던 김수증 선생은 관직을 버리고 이곳에서 30년 이상 은둔생활을 하면서 심오한 유학의 근본원리를 넓은 바위에 도상화하고 이곳의 빼어난 경치 9곳에 이름을 붙인 뒤 당대의 화가 조세걸(曺世杰)에게 그림을 그리게 해 후세에 역사적 명소로 거듭난 곳이다.
조세걸의 그림 곡운구곡도(谷雲九曲圖)는 조선시대의 실경산수화로 실제 경치와 유일하게 일치하는 작품으로 문화적 가치가 매우 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주자학과 상수학(象數學)의 유적이 또렷한 이 일대는 정약용, 유인석, 최익현 등 조선시대 선비들의 순례지로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유교문화의 성지(聖地)이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막내 동생 김수항과 친구인 우암 송시열이 화를 당하자 2차 은거지로 삼일리를 선택해 화음동이라 이름하고 화음동 정사를 지어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화음동 정사는 성리사상의 우주관과 상수역의 원리를 적용한 조형건축의 상징적 공간으로 다른 곳에서는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다.
김수증선생은 이곳에서 관직을 버리고 30여년이나 은둔생활을 하며 생을 보내신 분이다.
사내면 삼일리에 소재한 화음동 정사지는 곡운 선생님이 학문을 닦고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그러나 그의 정사 경영에는 후생들을 가르치는 성격은 전혀 없이 난세를 당하여 몸을 숨기고 가묘를 만드는 복거라는 의미만이 나타난다. 1689년 가을에 짓기 시작해 1699년 여름까지 약10년에 걸쳐 지어진 화음동 정사는 그의 생애 말년을 보낸 곳이다.
이곳은 성리학과 조선조 조형예술, 정사의 구조와 사상적 계보파악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곳이다. 과거의 성리학이 윤리적 차원이나 철학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구체적 행동양식과 외형적인 모습으로 우리 문화 속에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막연하게 전해 내려오던 성리학이란 사상이 곡운 김수증선생의 화음동 정사를 통해 구체적인 구조물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화음동 정사는 현재 강원도 기념물 제63호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곡운구곡
곡운구곡도(谷雲九曲圖)는 지금의 강원도 화천 용담리 일대에서 30년 가까이 은둔 생활을 한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1635~1705) 선생이 빼어난 경치에 이름을 붙인 뒤 당대의 화가 조세걸(曺世杰)에게 그리게 한 작품으로 이 작품은 조선시대의 실경산수화가 실제 경치와 유일하게 일치하는 작품으로 문화적 가치가 매우 큰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한국의 자연경관 문화에는 3경(景), 8景(詠), 9景(曲), 10景(詠), 12景(詠)이 있는데 8경은 약 98처, 9곡은 6처가 파악되고 있습니다.
9곡은 강원도 화천의 곡운구곡(谷雲九曲), 강원도 삼척의 무릉구곡(武陵九曲), 충청도 괴산의 화양구곡(華陽九曲), 선유구곡(仙遊九曲), 고산구곡(孤山九曲), 황해도 해주의 고산구곡(高山九曲)등 6개처가 밝혀지고 있습니다.
구곡(九曲)의 연원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1130~1200)의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朱熹는 처음 건영부(建寧府) 숭안현(崇安縣) 오부리(五夫里)에 살았고 41세에 건양(建陽)땅 노봉(蘆峰)아래 운곡(雲谷)에다 회암(晦庵)을 짓고 숭안에서 80리를 왕래 하였습니다. 1183년 그가 54세때 오부리(五夫里) 무이산하(武夷山下) 30리 되는 곳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만들었는데 여기서 이듬해 1184년 7언절구의 무이도가(武夷櫂歌)를 지었습니다. 주자는 무이정사잡영서(武夷精舍雜詠序)에서 이곳의 산세, 정사의 위치, 근처의 승경, 인간에 끼치는 자연의 영향, 동호인, 제자들과의 생활을 기술하면서 12수의 시를 읊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자연의 묘사는 시가(時歌)의 모티브로서 오래 전부터 관용되었으나, 1곡에서 9곡까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자연모사 방법은 구곡도(九曲圖) 또는 구곡가(九曲歌)라는 특수한 산수화와 묘사시의 장르를 이루게 됩니다.
조선왕조는 건국과 더블어 그 국가이념을 주자의 성리학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구곡도의 형식은 주자의 철학과 함께 자연스럽게 유행된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에서의 구곡도(九曲圖-時)의 연원은 선초 안평대군의 무이정사에서 찾고, 퇴계(退溪)의 무이구곡도와 율곡(栗谷)의 고산구곡도에 이르러 정착되며,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1635~1705)의 곡운구곡(谷雲九曲)에 맥통 된다 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곡운 김수증이란 분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곡운선생은 목민자요 성리학자이며 운둔선비로 세상의 시비를 꺼리고 산수를 완상하는 것을 좋아하는 성품의 소유자이다. 45세 때인 현종 9년에 춘천을 거쳐 평강현감으로 부임도중 일찍이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렀던 화학산 북록이 절경이라는 소문을 듣고 이듬해인 현종 11년에 이곳 영당동으로 들어와 주자의 무이구곡을 본 따서 농수정사를 짓고 구곡을 경영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난세를 피해 경관이 수려한 곳에 운둔하며 학문에 정진하면서 경영한 구곡에는 황해도 해주에 있는 이이의 고산구곡, 충북 괴산에 있는 우암의 화양구곡을 비롯한 삼척의 무릉구곡, 춘천의 이산구곡, 가평의 옥계구곡 등이 대표적인 구곡이다. 이러한 구곡들이 수려한 경관 때문에 현대에 이르러서는 유명관광지로 각광을 받고는 있지만 당시의 선비들이 시로 표현한 내용에는 관심들이 없는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화천의 곡운구곡은 조세걸(1635~1705)이 그린 실경산수화인 곡운구곡도를 참고해서 1곡 방화계로부터 9곡 첩석대까지 찾았으나 이미 도로건설로 또는 수해복구사업으로 인하여 상당부분 훼손되었지만 지금이라도 원형을 유지하면서 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어 천만다행이다.
곡운구곡도(谷雲九曲圖)
곡운 김수증이 1671년 송시열에게 곡운정사기(谷雲精舍記)를 쓰게 하고, 사인화가(士人畵家)인 조세걸에게는 그림을 그리게 하였는데 곡운구곡과 농수정을 포함한 실경(實景)을 열 폭 비단 위에 담채(淡彩)로 그렸다(1682년 완성).
그림이 완성된 지 10년 후 곡운 자신과 아들을 비롯하여 다섯 조카들, 외손까지 합한 아홉 사람이 곡운의 매곡(每曲)을 묘사하는 칠언절구의 시를 지어 화첩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곡운구곡도’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곡운서원의 기원 청람산 농수정사지
김수증이 화음동으로 들어가기 전에 지냈던 곳으로 후에 곡운서원으로 발전한다. 숙종1년(1675년) 김수증이 성천부사로 있던 중 동생 김수항이 송시열과 함께 유배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이곳으로 들어가 곡운정사라는 편액을 걸고 농수정과 가묘를 세우고 산 곳이다. 농수정사지의 뒷산이 청람산이다. 이곳에 개설된 등산로를 따라 정상에 오르면 제3곡 신녀협으로부터 시작해 제9곡 첩석대가 발아래 펼쳐진다.
반수암지 법장사
김수증이 화음동에 들어와 살던 시절, 승 홍눌에게 권해 세워진 절이다.
이곳의 용중에서 나오는 감로수가 아주 좋다고 하며 풍수적으로 혈맥 상통한 위치에 있다. 이곳의 승탑은 승 홍눌의 사리탑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춘천부사 이덕중이 다녀간 흔적으로 입구암벽에 이름 석 자가 붉게 새겨져 있다.
춘천에서 화천군 사내면 사창리로 가다보면 시군의 경계지점 강가에 커다란 너럭바위가 보인다. 바위에는 큰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일부는 떨어져 없어졌지만 예전에는 방화계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곳이 곡운구곡(화음구곡)의 1곡으로 곡운 김수증(1624~1701)선생의 구곡의 시작점이다.
이미 3곡 신녀협에 청은대라는 정자가 복원되었고, 이어서 농수정사 복원사업을 시작하려 한다. 복원사업이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조선시대 선비들의 운둔문화와 유기문학 그리고 생활상을 함께 이해하고 이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복원사업이 되었으면 한다.
평화의 댐
북한강, 파로호, 평화의 댐, 만산동 계곡, 용담계곡…. 군청에서 받은 관광지도를 펼쳤더니 사방팔방이 물이다. 오죽하면 군 이름이 '빛나는 내'란 뜻의 '화천(華川)'일까. 잔잔한 호수와 강 주위를 서성이는 구름은 깊고 진지해 보였다. '동국여지승람'에 고려 말·조선 초 학자 이지직(李之直)이 적은 "화천은 구름이 가까워서 옷이 젖을 정도"라는 묘사가 떠올랐다.
"화천에서 평화의 댐으로 가는 아흔아홉 구비 길목 해산('해 뜨는 산'이란 뜻이다)을 이 고장 사람들은 신산으로 숭배한다…반세기 동안 인적이 없어 곤충류와 조류가 풍성하며 계곡엔 열목어와 수달이 놀고 산엔 이따금 호랑이가 출몰한다고 언론에 보도되는 것으로 유명하다."
화천군청이 있는 화천읍에서 460번 지방도를 따라 평화의 댐으로 향하는 고개 중턱 해산 전망대에서 만난 표지의 '호랑이'란 단어에 시선이 콕 박혔다. 북한과 가깝다는 지리적 특수성 때문에 통행이 금지되는 산길이 많고, 그래서 깊은 '원시'를 아직 간직하고 있다는 뜻이리라. '평화의 댐'을 향해 고도(高度)가 높아질수록 두꺼운 붓을 힘주어 눌러 느릿느릿 그린 듯한 산은 겹겹이 두꺼워졌다. 북으로 향하며 비무장지대를 성큼성큼 넘어 금강산으로 이어질 재안산 수리봉 백암산 등 산맥의 줄기는 기운 세 보였다.
화천군청에서 지방도를 따라 약 32㎞를 가면, 드디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평화의 댐'에 도착한다. 댐 바로 옆에 위치한 물문화관(033-480-1532·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동촌리 321-4)의 한 자료에는 '한때는 애물단지, 이제는 보물단지'라고 표현해놨다.
1980년대 초 학교에서 '평화의 댐 성금 모으기'에 참여해본 경험이 있는 30대, 40대들은 이 댐의 탄생에 얽힌 오싹한 이야기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북한이 금강산에 커다란 댐('임남댐'. 당시에는 '금강산댐'으로 불렸다)을 만들어 유사시 이를 터뜨리면 63빌딩이 3분의 2나 물에 잠기므로 이를 막기 위해 그 아래 더 커다란 댐을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로 정부는 '평화의 댐'에 1987년 착공한다. 북한강 상류에 넘어진 삼각기둥 모양으로 콘크리트 벽을 세워 만든 댐은 다행히 20년 넘게 애초의 목적을 수행할 기회를 갖지 못했고 지금은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라는 관광지로서의 새 임무를 수행 중이다.
해산을 오르며 터널 세 개를 통과한 차는 길이 601m에 달하는 댐 위를 달리게 된다. 댐 한가운데 설치된 작은 전망대에 서면 한쪽으로 낡은 철교(鐵橋)와 깊디깊은 진초록 물이, 반대쪽으론 빠른 물살이 마을을 휘감아 돌고 있는 '비수구미'(飛首龜尾·화천군청 관광정책과 김세훈 과장은 "이름에 대해선 설이 분분하지만 봉황의 머리나 거북이의 꼬리를 닮았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했다)가 내려다보인다. '평화의 댐 저수량 26억3000만㎥·임남댐 저수량 26억2000만㎥'이라는 표지가 '금강산댐보다 더 큰 댐'이라던 이 댐의 거대한 사이즈를 드러낸다. 베이징올림픽 수영장 약 105만2000개가 들어갈 크기의 콘크리트 조형물은 댐이라기 보단 끊어진 한반도를 상징하는 설치 예술품처럼 고고한 자태다.
'평화의 댐'에서 '비수구미'라는 이정표를 따라 올라온 길과는 다른 좁고 울퉁불퉁한 굽잇길을 10여분 내려가 산기슭에 닿았다. 비수구미는 주변에 물이 차오르면 차로 닿을 수가 없어서 마을 주민에게 미리 전화해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할 정도로 깊디깊은 산간 마을이다. '평화의 댐'을 둘러싸고 출렁이는 산들이 호수처럼 맑은 하늘과 어우러진 싱싱한 '날 풍경', 호랑이가 하품하며 어슬렁거린들 전혀 놀라울 것 없어 보였다.
'평화의 댐' 부근 세계 평화의 종은 세계 각국 분쟁지역에서 수집한 탄피를 모아 2008년 10월 완성한 거대한 금속 종이다. 1만관(37.5t) 규모의 종 중 날개 모양으로 된 1관(3.75㎏)을 따로 분리해 두었는데 통일되는 날 본체와 합칠 예정이라고 한다. 종을 쳐볼 순 없고 종 앞 버튼을 누르면 녹음된 종소리를 들려준다. 1944년 화천댐 건설로 생긴 파로호는 호수 주변에 난 어느 길을 달려도 아름다운 창 밖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여유 만만한 드라이브 코스를 선물한다. 곳곳의 낚시터에선 쏘가리, 잉어 등 민물고기가 잡힌다. 호수 서쪽 파로호 안보전시관(033-440-2563·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 215―6·매주 월, 화요일 휴관)은 한국전쟁에 관한 자료와 모형을 전시한다. '추석은 왔건마는 고향은 멀고멀어' '유엔 쪽으로 넘어오라' '집안에 전염병이 있다고 하고 팡래하라(돌아오라)' 같은 전쟁 당시 전단지 속 선전 문구들이 오랜 비극의 상처를 드러낸다. 전시관 옆 파로호 전망대엔 2층짜리 정자와 예쁜 두 개의 벤치가 있어 시원한 물, 바람 즐기며 호수를 내려다보기 제격이다.
가곡 ‘비목’ 작사가 한명희씨
화천 파로호 하면 가곡 ‘비목’을 빼놓을 수 없다. 1967년 만들어진 이 노래는 사무치면서도 애잔한 전쟁의 상처를 비감 넘치는 노랫말과 곡조로 표현해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70년대 중반 한진희·장미희가 주연한 드라마 ‘결혼행진곡’의 배경음악으로 쓰인 게 폭발적 인기를 누린 계기였다. 노랫말은 60년대 초반 화천 지역의 최전방에서 장교로 군 생활을 한 음악인 한명희(71·예술원 회원·사진)씨가 썼다. 평화의 댐에서 멀지 않은 백암산 부근 DMZ에서 마주친 돌무더기 무덤이 훗날 노랫말 소재가 됐다. 작곡자인 장일남씨는 2006년 별세했다.
경기도 남양주시 도곡리 한씨의 자택을 찾았다. 서울시립대 음대에서 정년퇴임한 한씨는 한문고전 강독, 전통음악 감상 등을 하는 문화단체 ‘이미시문화서원(www.imisi.or.kr)’을 이끌고 있다. 한씨는 초등학생 시절 충주 고향집에서 미처 피란가지 못한 채 인민군과 마주쳤다. 하지만 끔찍한 전쟁 체험은 없었다. 자신보다 불과 몇 살 정도 많은 데다 다리를 다친 한 인민군 소년병은 비가 오자 한씨 집 마루에 주저앉아 “엄마가 보고 싶다”며 울었다고 한다.
한씨가 전쟁의 실상을 체감한 건 군 시절이었다. 화천은 격전지였던 터라 호박을 심기 위해 막사 주변 땅을 파면 해골이 나왔다고 한다. 땔감나무를 베다 보면 박혔던 파편이 튀어나오곤 했다. 충격적이었다.
한씨는 제대 후 TBC(동양방송) PD로 입사해 ‘가곡의 오솔길’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중 장일남씨의 채근에 못 이겨 비목 가사를 썼다. 돌무덤을 떠올렸다. 두 사람이 가곡 작곡 운동을 벌이던 시절이었다. 한씨는 한국전쟁에 대해 “인간이 불완전한 이상 전쟁이 없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인간은 맹목적이기 때문에 전쟁은 반복된다”는 것이다. 한씨는 “그렇다면 전쟁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게 필요한데 그러기 위해 잘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한씨는 ‘비사곡(碑史谷·Bimok Story Zone)’을 조성할 것을 제안했다. 일종의 추념문화단지를 만들자는 것이다. 비사곡 안에는 성전(聖殿)도 들이고 문화예술인 창작촌도 조성한다. 한씨는 이달 국군유해발굴단과 함께 화천 지역을 방문한다. 유해 발굴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비목의 현장을 직접 찾는 것이다.
인민군 사령부막사
한국전 당시 인민군 사령부로 사용되었던 건물로 상서면 다목리 군부대 안에 소재하고 있다.
문화재청에서 2002년 5월 27일 등록문화재 제27호로 지정하였다.
다목리 인근에는 인민군사령부 막사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철원 노동당사가 전쟁 전 북한의 행정기관을 엿볼 수 있는 유적이라면 1945년 건립된 이 인민군사령부는 그 시절 군사시설을 체험할 수 있는 건물이다. 이곳은 화천과 철원 일대 군부대를 관할했다. 38선 이북 지역이었던 화천은 1951년 중공군의 춘계공세가 시작된 곳이다. 51년 4월,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중공군이 밀고 내려와 서울을 내주고 다시 찾는 공방 끝에 전선이 38선 부근에 형성되었다. 중공군은 본토로부터 6개 군을 보충 받아 총병력 70만 명을 전개시켰다. 그해 4월 중공군은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그 첫 전투는 광덕산 전방에서 벌어졌다. 국군 6사단은 김화를 확보하고 중공군을 막기 위해 사창리 일원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크게 패했다. 그러나 6사단은 양평 용문산지구로 후퇴해 중공군과 접전을 벌였다. 용문산지구 전투에서 중공군은 3개 사단 10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강원도 화천은 용문산지구 전투, 파로호 전투 등 그 어느 곳보다 치열한 전투가 많이 벌어진 곳이다. 전쟁은 상처와 흔적을 남긴다. 사진은 상서면 다목리에 있는 인민군사령부 막사 건물이다. 화천은 전쟁 전 38선 이북 지역이었다. 인민군사령부 건물은 사용 목적에 걸맞게 단순하고 튼튼하게 지어졌다. 일자형 복도 양쪽으로 방들이 있는 화강암 건물이다.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누런 돌들은 전쟁의 무상함을 웅변하는 듯하다.
파로호 전투는 그해 5월 용문산지구 전투에서 크게 패한 중공군이 북한강 이북으로 철수하는 과정에서 벌어졌다. 강과 골짜기로 대거 몰린 중공군을 국군과 유엔군이 거세게 몰아붙였다. 이 과정에서 소대 병력이 중공군 대대 병력을 생포하는 진풍경이 벌어졌고, 5월 28일에는 하루 동안 3만8000여 명의 중공군 포로를 잡기도 하였다. 파로호 전투에서 중공군 6만2000명이 사살 혹은 포로로 잡혀 파로호 일대는 피로 물들었다. 당시 화천 저수지로 불리던 이 호수를 이승만 대통령은 오랑캐를 무찌른 곳이라 하여 ‘파로호(破虜湖)’라 이름 지었다.
화천 수력 발전소
1944년 북한강 협곡을 막아 축조한 호수로, 한국전쟁 때 화천 전투의 승리로 발전소가 수복되었다.
높이 77.5m의 낙차를 이용하여 출력 10만 8000kW이다
화천군 꺼먹다리
꺼먹다리는 해방전에 일제가 기초를 놓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소련군이 들어와 교각을 놓았으며, 휴전이 된 후에는 화천군이 상판을 놓아 완성되었다.
1945년에 세워진 폭 4.8m의 꺼먹다리는 화천댐이 준공되면서 세워진 교량으로 화천수력발전소와 함께 당시의 산업상황을 알 수 있는 시설물이다. 이 다리는 철근콘크리트 주각위에 형강을 깔고 그 위에 각재를 덧댄 가구식 구조로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단순하면서 구조적으로 안정감 있는 입면형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건립당시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교량사 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주요시설 확보를 위한 최대 거점 격전지였던 파로호와 화천 댐, 지금은 DMZ로 변한 백암산을 연결하는 유일한 교량이었고 당시에는 콘크리트와 철근 등으로 만든 다리가 지역에는 없어 주민들의 구경거리가 될 정도로 유명했다고 한다.
꺼먹다리는 폭 4.8m, 길이 204m의 철골과 콘크리트로 축조된 국내 최고의 교량으로 교량구조는 콘크리트 주각위에 형강을 세우고 그 위에 콜타르 먹인 목재를 대각선으로 설치하는 공법으로 목재부식을 최소화 하였으며, 단순하면서도 구조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공법을 사용한 현대 교량사 연구에 아주 귀중한 자료라고 합니다. 교량 상판이 검은색 콜타르목재이므로 꺼먹다리로 불리 운다고 한다.
등록문화제 제110호로 지정된 이 다리는 파란 많은 근세역사를 말없이 지켜 본 증인이라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산 하나가 다른 산과 떨어져 강변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화천군민들은 이곳을 딴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꺼먹다리를 지나면 도령과 사랑에 얽힌 슬픈 전설의 터 처녀고개가 보인다.
옛날 이 고장에 살던 도령이 과거보러 떠나면서 사랑하는 처녀에게 꼭 장원급제하여 돌아오겠다고 고갯마루에서 약속을 하고 떠나고 그 후부터 처녀는 날이 저물면 도련님이 넘어 간 고갯마루에 올라 산굽이를 돌아 흐르는 강줄기를 바라보며 도련님이 올 날만 기다렸고 한다.
자기 키만한 소나무에 버선목을 걸어놓고 님을 기다렸는데 세월은 흘러 10년이 지나고 소나무에 걸어놓은 버선목이 너무 더러워지자 깨끗한 것으로 바꿔 걸어 놓으려다가 벼랑에서 떨어져 그만 죽고 말았다.
그날 장원급제하여 돌아온 도령이 이 소식을 듣게 되고 도령은 10년 고생하여 이룬 벼슬도 마다한 채 처녀의 무덤 옆에 남아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그 때부터 이 마을에는 풍년이 들어 마을 사람들은 이 동리 이름을 ‘풍산리’라 짓고, 처녀의 명복을 빌기 위해 그녀가 버선목을 매달았던 소나무를 성황으로 모시고 이 고개 이름을 ‘처녀고개’라고 지었고 한다.
[다 같이 공부해 봐요] 사찰의 기원
불교 사원은 종교적 동기에서 건립되었습니다. 불교사원을 뜻하는 가람(伽藍)은 산스크리트어(梵語) Saaghrma에서 유래된 것으로 음역(音譯)하여 승가라마(僧伽羅摩, 僧伽藍摩)라고 합니다. 가람이란 승가라마의 약칭인 것입니다.
Sa agh 는 승려들이 모여 있는 것을 뜻하고, rma는 거주처를 뜻합니다. 이는 의역(意譯)하여 중원(衆園) 또는 승원(僧院, 僧園)으로도 부릅니다. 어원에서 알 수 있듯이 인도의 불교사원은 원래 많은 불제자(佛弟子)들이 한 곳에 모여 불도(佛道)를 닦는 곳이었습니다.
『사미율의(沙彌律儀)』에도 절(寺)이란 출가 제자가 불법을 섬겨 받들어 가르침에 의거해 수행하는 곳, 곧 수행(修行)의 도량(道場)이 절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초기의 인도 불교사원에는 불상을 모신 법당이나 사리를 모신 탑은 없었고 승원만 있었는데.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自燈明), 법을 등불로 삼아(法燈明)" 열심히 정진하라고 한 것에서도 연유합니다
후세에 와서 가람은 불상과 탑이 조성되기 시작하면서 승원으로서의 가람에 당(堂)과 탑(塔)이 있는 불교건축 일반을 말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불교사원은 승원과 당, 탑을 이룬 것을 말하게 되었고, 불교사원 건축은 이들 시설들의 배치관계와 건축 형식에 대한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가람을 이루는 승원, 당, 탑은 처음부터 일정한 체계를 가지고 배치되어 불교사원 건축을 형성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가람이 형성된 과정을 보면 승원이 먼저 조성되었고, 다음으로 탑, 그리고 당이 세워져 불교사원 건축을 형성하면서 여기에 일정한 질서를 반영하며 가람배치 형식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승원은 오늘날의 승방과 같은 곳으로서 스님들의 거주처인 동시에 수행처였습니다. 승방에는 단독의 승방과 집단의 승방이 있었는데 단독의 승방은 비하라(Vihra, 毗訶羅, 精舍, 僧院)라 하는데 영구적인 시설물을 갖춘 곳이고, 집단의 승방은 비하라에 비하여 규모가 큰 것으로서 승가라마라고 합니다.
불교 경전에서 흔히 말하는 기원정사(祇園精舍, Jettavana), 죽림정사(竹林精舍, Venavana) 등은 모두 집단의 승방의 대표적인 것입니다.
비하라는 일종의 석굴사원으로서 그 배치는 거의 모두 하나의 비교적 큰 방형 굴실(窟室)을 빙 둘러싸고 정면 입구를 제외한 좌,우벽과 뒷벽에 개착한 일부 작은 동굴들로 이루어졌는데 비하라굴은 소승불교의 수행방식의 하나인 좌선(坐禪)을 반영합니다. 스님들은 이 고요하고 정밀(靜謐)한 동굴 속에 단정히 앉아 명상을 하며 해탈을 추구합니다. 이런 작은 동굴은 그들이 선정(禪定)에 드는 곳이기도 하고, 또 거주하는 곳이기도 한 것입니다.
비하라와는 별도로 불멸후 인도에는 차이트야 Caitya(支提窟, 制多堂)가 많이 건설되었는데, 기원전 1, 2세기에 출현하였습니다. 차이트야는 부처님께서 입멸한 후 불상이 생기기 전 승속(僧俗)이 한 장소에 모여 예배도 하고 설법을 하기 위한 공간으로 만든, 즉 불당과 강당을 합친 것과 같은 기능을 한 공간이었습니다.
이 차이트야는 평면이 좁고 긴 말발굽형(馬蹄形)으로 형성됐는데 내부공간은 앞뒤 두 부분으로 나뉘어 졌으며, 앞 부분은 평면이 장방형인 예당(禮堂)이고, 뒷 부분의 반원형 평면의 중심에는 탑과 비슷한 원형의 구조물이 조성되어 있으며, 그 주위는 통도를 형성하였습니다.
앞 부분은 승도들이 모이기 위한 곳이고, 뒷 부분은 승도들이 중심 구조물을 요잡(circumambulation, 回繞, 탑돌이)하며 예배의식을 할 수 있게끔 한 것입니다. 굴 안의 좌우와 원형 구조물 뒤에는 돌로 된 열주가 둘러있고, 뒷 부분의 굴 천정은 반궁륭으로 개착(開鑿)되어 있습니다. 차이트야의 중심을 이루는 구조물은 탑과 닮았으나 탑은 아니고, 또 불전을 닮았으나 불전도 아니다. 즉 차이트야는 불사리를 봉안하지 않은 탑, 불상을 모시지 않은 불전과 같은 것입니다.
1. 목조 불교건축
그 후, 중국과 지형상 가장 밀접한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보다 먼저 중국의 영향을 받아들여 활발한 건축 활동과 높은 수준의 건축기법을 유지하였는데, 이는 현존하는 그들의 고분벽화를 통하여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고분벽화에서 밝혀진 건축술은 목조가 주된 형식인데, 삼실총, 산연화총, 환문총 등에서는 기둥과 공포의 윤곽만을 선으로 간단히 그렸으나, 구신총, 용강대묘, 쌍영총, 안악1,2,3호분 등에서는 구체적으로 공포의 구성을 상세하게 나타내었고 구조도 세부까지 치밀하게 나타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공포는 동양건축에만 보이는 특색 있는 수법으로 그 위치는 기둥과 지붕의 중간에 놓여 지붕 하중을 기둥에 전달하는 구조상의 기능이 주목적인데, 이러한 기능적인 역할은 차차 의장적 기능으로 발전되어 그 형태에 적지 않은 신경을 썼으며, 그 결과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과정을 예민하게 나타내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공포의 구성 부재는 기둥 바로위에 놓인 주두와 전후좌우로 전개되는 각종 첨차 그리고 첨차와 첨차 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소로, 첨차위에 놓는 장혀로 되어있습니다.
4세기 후반에 들어온 불교의 영향은 우리나라 건축에 현저한 변화와 발달을 촉진시켰는데 불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고구려는 왕권의 확립과정에서 불교가 지주 역활을 하였으며, 백제와 신라는 국가 형성과정에서 정신적 기반이 되었으며 널리 보급되고 신봉되었습니다. 이들 삼국은 도읍을 중심으로 장대하고 화려한 많은 사찰을 건립하게 됐습니다.
목조건축은 그것들이 어떠한 양식으로 건립되었는지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사지의 발굴을 통해 가람배치로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불교를 수용한 고구려는 평원군 원오리 사지(元五里寺址), 평암리 사지 淸巖里寺址와 대동군 임원면 상오리 사지(上五里寺址) 등이 대표적인 사지입니다.
고구려에 이어 백제에 있어서는 특히 건축술이 발달되어 그 당시의 장관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신라 황룡사의 9층탑을 건립하였다는 백제의 아비지(阿非知)나 일본 초기 가람의 장엄을 통해서도 백제의 건축술이 탁월하였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는 부여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와 동남리의 폐사지 및 금강사지(金剛寺址) 등의 대표적 백제사지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백제의 가람배치는 대부분이 일탑 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이 많은데 익산(益山) 彌勒寺址는 새로운 가람배치로 조사연구가 더 필요합니다.
신라의 사원건축도 대략 고구려나 백제와 많은 유사점이 있다고 추정되는데, 황룡사의 조사에서 밝혀진 당 탑의 배치가 이를 뒷받침합니다.
또한 이들 삼국의 불교건축에 있어서 가람의 중심을 차지하는 것이 목탑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초기의 목탑은 3국 모두 중국에서 전래한 누각형식을 따랐으며 방형이나 다각의 다층탑이 주류를 이루었다고 생각됩니다.
2. 불교목조건축의 종류
◇ 피안교(彼岸橋)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돌이켜 보는 자리
◇ 일주문(一柱門)
산문이라고도 하는데, 산사에 들어서면 맨 먼저 만나게 되는 문으로써 절 이름 현판이 걸려 있다.
◇ 천왕문(天王門)
사찰을 수호하는 뜻으로 천왕의 모양을 나투어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정신을 일깨우는데 그 뜻이 있는 것이다.
◇ 해탈문(解脫門)
이미 일주문을 넘어 해탈문을 지나게 될 때 벌써 해탈의 경지에 들어가게 된다는 뜻으로 뜨거운 정진(精進)을 촉진시키는 중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 불이문(不二門)
불이(不二)란 뜻은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며, 선과 악이 둘이 아니며, 유와 무가 둘이 아니며, 공과 색이 둘이 아니라는 깊고도 묘한 뜻을 가지고 있다.
◇ 대웅전(大雄殿)
△ 대웅보전(大雄寶殿),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왼쪽에 문수보살을, 오른쪽에 보현보살을 모시는 절의 큰 법당, 또는 중앙에 아미타불을 모시고 왼쪽에 관세음보살, 오른쪽에 지장보살(혹은 대세지보살)을 모신다. 부처님을 대웅(大雄) 즉, 대장부라는 뜻으로 '대장부를 모신 집'이라는 뜻이다.
△ 비로전(琵蘆殿)
맑고 깨끗한 법신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법당, 혹은 대적광전, 대광명전이라 한다.
△ 극락전(極樂殿) 미타전(彌陀殿),
극락세계의 부처님이신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 혹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도 함.
△ 관음전(觀音殿) 원통전(圓通殿),
대자대비의 상징인 관세음보살을 모신 법당. (대웅전 좌측)
△ 지장전(地藏殿) 명부전(冥府殿),
대원력의 상징인 지장보살을 중앙에만 모시기도 하나 대부분 우리나라 사찰은 명부의 십왕(十王)을 좌우로 모시기 때문에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한다.
△ 미륵전(彌勒殿)
용화전(龍華殿)이라고도 하며 앞으로 오실 미륵 부처님을 모신 법당.
△ 영산전(靈山殿) 나한전(羅漢殿), 응진전(應眞殿),
영산회상(靈山會上)의 모습을 재현하여 중앙에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좌우에 10대 제자 혹은 16대 아라한을 모신 법당 혹은 500나한전도 있다.
△ 팔상전(八相殿)
부처님의 생멸을 팔상으로 나누어 주로 탱화로 그려서 모신 법당.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모심.
△ 신중단
불법을 옹호하는 호법신장을 모신 단. 주로 탱화로 그려 모시되 동진보안보살를 주존으로 그려 모심.
△ 삼성각(三聖閣)
산신(山神), 칠성(七聖), 독성(獨聖)님을 모신 법 당. 사찰에 따라 각각 따로 모시기도 하며 큰 법당보다 뒷편에 모심.
△ 약사전(藥師殿)
약사여래불을 모신 전각.
△ 강당(講堂)
설법과 강의가 이루어지는 큰 강당 또는 그런 식의 방.
△ 선방(禪房)
참선하는 집 또는 방을 말함. 선종(禪宗)에서는 가장 중요시하는 집.
△ 요사(寮舍)
스님들이 거주하는 방 또는 건물.
△ 장경각(藏經閣)
경전을 봉안하여 둔 곳. 대부분 목판을 보관하는 곳임. (해인사 팔만대장경각이 유명)
△ 종루(鐘樓)
사물(四物)을 갖추고 조석 예불시에 치는 건물. 보통 2층으로 되어 있음
3. 석조 불교건축
단석산의 석굴사원은 자연석으로 이뤄진 3개의 큰 바위를 중심으로 삼존불과 미륵불, 관음보살상이 부조와 선각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경주 석굴암과 같이 인공적인 모습보다는 자연적인 지형을 이용해 자연석굴사원의 형태를 띄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또한 신라에는 인공으로 축조한 석굴사원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경주 석굴암으로서, 석굴암의 기본구조는 전실(前室)과 주실(主室)로 이루어져 있다.
4. 가람배치
인도에서는 기원전 2세기경부터 석굴사원이 경영됨에 따라 예배 대상인 불사리(佛舍利)를 안치한 탑이 있는 탑원(塔院)과 승려의 수도처인 승원(僧院)은 서로 장소와 방향을 구별하여 배치하였는데 이러한 영향을 받은 중국의 경우도 육조시대 이전까지는 동일하였습니다.
이후 점차 불탑과 불상을 봉안한 금당을 중심으로 강당(講堂), 승방(僧房), 중문(中門), 종루(鐘樓), 경루(經樓) 등을 비롯한 많은 크고 작은 전각이 마련되고 육조시대부터 일정한 기본적인 가람의 배치 형식이 자오선상(子午線上)에 남쪽에서 북으로 중문, 탑, 금당, 강당의 순으로 배치하고 중문과 강당을 잇는 회랑을 조성해서 불탑과 금당을 중심으로 한 불역(佛域)이 이루어졌습니다.
다시 이 성역 주위에 승방과 부속건물이 배치되어서 커다란 집단체의 사역을 구성하는 양식을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가람배치의 양식은 시대에 따라 변천했고 시대적인 변천은 그 기능과 규모를 알 수 있게 했습니다.
그리고 절마다 각각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는 가람의 형태도 일정한 시대나 종파에 거의 변화 없이 일정한 정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삼국시대의 가람배치
가. 고구려시대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때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 (372년)인데 이와 함께 소수림왕 5년(375년)에 이불란사와 성문사가 세워졌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 뒤에도 평양 구사등 여러 사찰이 있었다고 문헌에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 조사된 예는 몇 되지 않습니다. 평양 청암리 사지와 평남 대동군 상오리 사지의 경우 모두 8각탑(목탑으로 추정)을 중심으로 동 서 남 북 세 곳에 각각 금당이 있고 남쪽 앞으로는 중문이 배치되었으며 북쪽 금당 뒤에는 강당이 마련되어 회랑이 중문에서 나와 각 금당을 지나 닿거나 금당과 강당 사이를 지나가는 특이한 배치형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 백제시대
신라와 같이 남북 자오선 상에 중문, 탑, 금당, 강당의 순서로 배치되어 있는 중국의 영룔사의 가람배치인 단금당식(單金堂式)의 계통을 잇고 있습니다. 충남 부여의 정림사지, 군수리 사지, 금강사지 등이 이에 속합니다. 이 양식은 일본의 사천왕사지에 전해졌는데. 특히 전북 익산 미륵사지는 북쪽에 동서로 나란히 3개의 금당이 놓이고, 또한 탑도 그 남쪽에 각각 나란히 배치된 삼탑 삼금당식 (三塔三金堂式)으로 밝혀졌습니다. 그 중 가운데 탑은 석탑이 아닌 목탑으로 확인되었으며, 탑과 금당을 한 조씩으로 구획하는 남북의 회랑을 놓아 셋으로 독립시키고 있어 백제다운 독특한 배치양식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 신라시대
신라에 공식적으로 건립된 최초의 사찰은 이차돈의 순교로 세워진 천경림의 홍륜사입니다. 신라 사찰양식도 백제와 마찬가지로 남북 자오선 상에 중문, 탑, 금당, 강당의 순으로 배치된 단탑 단금당식 (單塔單金堂式)의 계통입니다. 경북 의성군 금성면 탑리사지, 경주시 흥륜사지 등이 이런 예지요.
황룡사지는 일탑일금당식 (一塔一金堂式)배치를 한 신라시대의 독특한 양식을 하고 있습니다. 목탑지 남방 전방의 좌우에 치우쳐 경루와 종구로 보이는 건물지가 있고 금당과 강당 좌우에도 나란히 동당(東堂), 서당(西堂)의 건물지가 각각 노출되어 고구려 양식인 일탑삼금당 (一塔 三金堂) 배치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강당 및 중문의 좌우에서 나온 회랑은 금당 좌우에 회랑과 서로 만나지 않고 그냥 동서로 뻗어지고 있는 특이한 양식으로 신라 가람배치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주시 적동 고선사지에서도 특이한 양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단탑식 배치인데 협소한 지리적인 여건 탓인지는 알 수 없으나 중문 다음에는 바로 금당과 강당의 순으로 배치되어 회랑에 싸여 있으며 탑은 금당과 중문 사이에 해당하는 서쪽에 회랑밖에 독립된 회랑을 갖고 배치되어 있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탑원(塔院)과 금당원(金堂院)이 만나는 쪽에만 두 회랑이 겹쳐 복랑(複廊)으로 되어 있는데 이러한 가람배치는 일본의 국분사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주당 10걸
술 타령 잡(雜)타령
갓 쉰이 져믈가마는 간대마다 술을 보고
닛집 드러내여 웃는 줄 므스일고
젼젼의 아던 거시라 몬내 니져 하노라
정철(鄭澈) 송성(松星) 58
당대의 주선(酒仙)으로 알려진 청록파 시인 조지훈이 매긴 주당(酒黨) 18 단계
1. 불주(不酒) : 술을 아주 못 먹거나 안 먹는 사람
2. 외주(畏酒) : 술을 마시긴 하나 겁내는 사람
3. 민주(憫酒) :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으나 취하는 것을 민망하게 생각하는 사람
술 먹지 마자타니 수리라서 졔 따로니
먹는 내 왼지 따로난 술이 왼지
잔 잡고 달다려 뭇노니 뉘라 왼고 하노라
병가(甁歌) 710
4. 은주(隱酒) :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으며 취할 줄도 알지만 돈이 아까워서 혼자 마시는 사람
5. 상주(商酒) : 마실 줄도 알고 겁내지도 않으며 취할 줄도 알지만 무슨 잇속이 있을 때만 마시는 사람
6. 색주(色酒) : 성생활을 위해서 술을 마시는 사람
술도 머그려니와 덕(德) 업스면 난(亂)하나니
춤도 추려니와 예(禮) 업스면 잡(雜)되나니
아마도 덕예(德禮)를 닥희면 만수무강 하리라
윤선도(尹善道) 고유(孤遺) 26
논어에서 보면 공자는 유주무량불급란(唯酒無量不及亂) 술은 얼마든지 마시되 어지러워지지 않는 경지에 들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7. 수주(睡酒) : 잠이 안 와서 술을 마시는 사람
8. 반주(飯酒) : 밥맛을 돋구기 위해 술을 마시는 사람
9. 학주(學酒) : 술을 참맛을 배우는 사람
술두고 날 안주는 첩과 첩한다고 새오는 안해
둘 다 잡아 내여 보내고져 제주귀향
일년의 열두 사(赦) 나린들 플릴주리 이시랴
만횡청(蔓橫淸) 근악(槿樂) 390
10. 애주(愛酒) : 술을 취미로 맛보는 사람 .. 여기서부터 주단(酒段)의 경지에 입문하게 됨. 초단(初段) 주도(酒道)
11. 기주(嗜酒) : 술의 미에 반한 사람 .. 2단 주객(酒客)
12. 탐주(耽酒) : 술의 진경을 체득한 사람 .. 3단 주호(酒豪)
술 븟다가 잔 골케 븟는 첩과 색(色)한다하고 새움 심히 하는 안해
헌 배에 모도 시러다가 띄우리라 한 바다희
광풍(狂風)에 놀나 깨닫거든 즉시 다려 오리라
청육(靑六) 807
13. 폭주(暴酒) : 주도를 수련하는 사람 .. 4단 주광(酒狂)
14. 장주(長酒) : 주도 삼매에 든 사람 .. 5단 주선(酒仙)
15. 석주(惜酒) : 술을 아끼고 인정을 아끼는 사람 .. 6단 주현(酒賢)
술아 네 그르다 네 글은 줄 내 니르마
너 아닌 젼의는 내 아니 단사(端士)러냐
취하야 미친 말 하고 깨온 후의 뉘웃노라
고금(古今) 173
16. 락주(樂酒) :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 술과 더불어 유유자적하는 사람 .. 7단 주성(酒聖)
17. 관주(關酒) : 술을 보고 즐거워하되 더이상 마실 수 없게된 사람 .. 8단 주종(酒宗)
18. 폐주(廢酒) : 술로 인해 다른 세상으로 떠나게 된 사람 .. 9단 입신(入神)
이몸이 죽어지거든 뭇지 말고 주푸리여 매혀다가
주천(酒泉) 깁흔 소에 풍덩 드리쳐 둥둥 띄여두면
일생에 질기던 거시미 장취불성(長醉不醒) 하리라
병가(甁歌) 1060
해량(海量) : 술을 바닷물처럼 마시는 사람을 칭찬하는 말이다.
술에 반쯤 취하여 언제 고꾸라져 죽을지 모르니 삽을 들고 따라다니다가 아무데서라도 숨이
멈추거든 땅 파서 묻어달라고 했다는 유령(柳伶)이란 위나라 시인 못지않는 시인이 바로 이 시를 쓴 주인공이 아닌가 한다.
술통 같은 소(沼 못)에 풍덩 던져 술에 저리게 해달라는 유언이니 술을 얼마나 즐기면 이런
경지에 이르는가?
저 잔에 술이고라시니 유령(柳伶)이와 마시도다
두렷한 달이 이즈러시니 이백이와 갓치도라
나문 술 나문 달 가지고 완월장취(翫月長醉) 하오리라
유령(柳伶) 그는 누군가?
221-300 경(생몰 미상) 중국 위(魏) 나라의 시인. 자는 백륜(伯倫), 패(沛) 출신.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 용모는 아주 못생겼으나 성정은 방자. 술을 몹시 좋아했고 원적(院籍) 혜강과 교제하며 언제나 녹거(鹿車-사슴이 끄는 수레)를 타고 술 한 병을 차고 사람을 시켜 삽을 메고 따르게 하여 “죽거든 곧 나를 묻어라” 했다 하는 괴이한 사람이었다.
님 그리워 황진이가 마시는 술
내 정령(精靈) 술에 섯거 님의 속의 흘너드러
구회간장(九回肝腸)을 다 차자 단닐만졍
날 잇고 남 향한 마음을 다스로려 하노라
김창흡(金昌翕) 병가(甁歌) 341
주당(酒黨) 1 걸(傑) : 황진이(黃眞伊)
고금을 통틀어 각계 인사들이 추천한 주선은 모두 140명. 두주불사의 주량과 풍류가 특출한 당대의 호걸들을 망라한 것이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 최고의 주선으로 황진이가 선정되었다.
술은 뉘 삼기며 이별은 뉘 내신고
술나자 이별나자 이별후에 술이 나니
취하고 님 이별하니 그를 슬허 하노라
시가(詩歌) 400
우리나라 주당 10걸의 선정기준은 1) 주량, 2) 마시는 스타일, 3) 스케일, 4) 지구력- 평생을 즐기는 끈기, 5) 사람을 감화시켜 세계의 주당 인구를 늘린 기여도 등을 그 기준으로 평가하였다고 한다.
술이 취하거든 깨지 말게 삼기거나
님을 만나거든 이별 업게 삼기거나
술 깨고 님 이별하니 그를 슬허 하노라
청영(靑詠) 364
악주종생(樂酒終生)의 기라성 같은 대장부들을 젖히고 가장 많은 17명의 인사들로부터 추천을 받았다. 서화담, 박연폭포와 더불어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불리는 그녀는 '여성으로서 일종의 당연직'처럼 추천을 받은 셈이다(張德順).
옥(玉)갓치 고흔 님과 눈과 갓치 발은 달에
금준(金樽)에 술이 잇고 물읍 우희 거문고라
평생에 풍류가인(風流佳人) 되여 백년안락(百年安樂)
호석균(扈錫均) 원일(源一) 705
'동짓달 기나긴 밤', '산은 옛 사이로되',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 간들 어떠리'란 시조에서도 볼 수 있듯이 뛰어난 시서음률과 술로 당대의 문인, 석유(碩儒)들을 매혹시켰다는 점을 높이 샀다(김정옥, 김종길, 이어령, 주종항(朱宗恒), 사기주 제씨). 말하자면 주선 중의 주선이자 '한국적 낭만파의 거장'(최정호)으로 떠올려진 셈.
이몸 싀여져서 님의 잔의 술이 되여
흘러 속의 드러 님의 안 흘 알고란쟈
매야코 박절(薄絶)한 뜻이 어늬 궁긔 들엇는고
근악(槿樂) 281
애증일심(愛憎一心)의 짧은 삶을 숨 가쁘게 달려간 여인.
황진이 문학은 이별의 한과 그리움으로 일관된 문학이다. 인간의 숨결과 사랑과 미움의 몸부림. 체념할 줄 모르는 사랑의 갈구에서 보여준 끈기… 이런 그 녀의 삶과 사랑이 고스란히 작품 속에 담겨있는 여성의 정한을 노래한 대표적 여류시인이 주선으로 뽑힐 줄이야…
相思相見只憑夢(상사상견지빙몽) 생각고 보고픈 마음 만날 길은 다만 꿈낄 뿐
濃訪歡時歡訪濃(농방환시환방농) 임을 찾아가 반겨할 땐 임은 나를 찾아 오네.
願使遙遙他夜夢(원사요요타야몽) 원컨대 이후부터는 서로가 어긋나는 꿈길을
一時同作路中逢(일시동작로중봉) 같은 때 같이 떠나 길 가운데서 만났으면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버린 첫 남자인 부운거사에 대한 황진이의 연연한 정을 한 잔 술로 달래볼 수 있었으려나...
벗을 위하여 벗과 더불어
곳즌 밤비의 피고 비즌술 다 익거디
거문고 가진 벗이 달 함끠 오마터니
아희야 저담(苧담)에 달 올나다 벗님 오나 보아라
정철(鄭澈) 병가(甁歌) 132
주당 2걸은 수주 변영로(1898-1961, 시인, 성대교수)이다.
술과 시로 자기 이상에 취해 살다간 수주(樹州) 변영로이다 (김용성, 송지영, 신우식, 이규동, 전봉건 등).
곳 피면 달 생각하고 달 밝음연 술 생각하고
곳 픠자 달 밝쟈 술 엇으면 벗 생각하네
언제면 곳 알래 벗 들이고 완월장취(翫月長醉) 하련요
이정보(李鼎輔) 해일(海一) 315
두주불사의 기행을 담은 <명정(酩酊) 사십년(四十年)>을 보면 그는 이미 대여섯 살 때 술독에 기어 올라가 술을 훔쳐 마신 천부적인 모주꾼이다.
곳 픠쟈 술이 닉고 달이 밝쟈 벗이 왓내
이갓치 됴흔 때를 어이 그져 보낼소냐
하물며 사미구(四美具)하니 장야취(長夜醉)를 하리라
병가(甁歌) 770
또 이 수필집에서 그는 성균관대 뒷산에서 공초 오성순, 성제 이관구, 횡보 염상섭 등과 함께 술에 취해 벌거벗고 소를 탄 기상천외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있다.
내 ㅜ부어 권하는 잔을 덜 머그려 사양(辭讓)마소
화개추제(花開鶖啼)하니 이 아니 됴흔땐가
엇더타 명년간화반(明年看花伴)이 눌과 될 줄 알리오
남파(南坡) 청진(靑珍) 267
주당 3걸로는 조지훈(1920-1968, 시인 고대교수)씨가 선정 됐다
매영(梅影)이 부드친 창에 옥인금채(玉人金釵)비겨신져
이삼(二三) 백발옹(白髮翁)은 거문고와 노래로다
이윽고 잔(盞)드러 권(勸)하랼제 달이 또한 오르더라
안민영(安玟英) 금옥(金玉) 6
시인 조지훈을 두고 "신출귀몰의 주선" 또는 "행동형의 주걸"이라고 한다(김용권, 김진찬 씨).
무셔리 술이 되야 만산을 다 권하니
어졔 푸른 닙히 오늘 아침 다 붉거다
백발도 검길줄 알면 우리님도 권하리라
시가(詩歌) 682
통금은 안중에도 없고 야밤에 주명(酒朋)의 집을 습격, 대작하다가 새벽에 귀가하기가 예사였다(정한모 씨)고 그를 아는 사람들은 생생하게 기억한다(백인호, 이광훈 씨).
옷 버서 아희 주어 술집이 볼모하고
청천을 우러러 달더러 무른 말이
어즈버 천고이백이 날과 엇더하던뇨
김천택(金天澤) 병가(甁歌) 471
그는 밤새 눈 한번 붙이지 않고 통음을 해도 자세를 흐트러지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화우(梨花雨) 흣터지고 행화설(杏花雪)이 날릴 젹의
청려(靑驢)에 술을 싯고 어드러로 향하는고
무릉(武陵)에 봄간다하매 전송(餞送)코져 하노라
동국(東國) 199
주당 4걸, 김삿갓(1807-1863, 본명 炳淵, 호 蘭皐. 방랑시인)
자네집의 술 익거든 부디 날을 부로시소
초당(草堂)에 곳 피거든 나도 자네를 청하옴세
백년덧 시름업슬 일을 의론코져 하노라
김육(金堉) 병가(甁歌) 844
삼천리 방방곡곡을 떠돌며 풍자와 해학으로 세상살이의 고달픔을 노래한 시인 김삿갓은 풍류가 넘치는 주선이다.
저 잔에 술이고라시니 유령(柳伶)이와 마시도다
두렷한 달이 이즈러시니 이백(李白)이와 갓치도라
나문 술 나문 달 가지고 완월장취(翫月長醉) 하오리라
병가(甁歌) 822
장원급제는 했으나 자신이 홍경래의 난 때 항복한 선천(宣川) 방어사 김익손의 손자임을 뒤늦게 알고 일생을 방랑하며 술과 시로 보냈다.
주인(主人)이 술 부으니 객(客)으란 노래하쇼
한 잔(盞) 술 한 곡조(曲調)ㄷ식 새도록 즑이다가
새거든 새술 새노래로 니여 놀녀 하노라
이상두(李象斗) 원국(源國) 228
동가식서가숙하며 시를 주고 술을 얻어 마셨다는 <시작걸주(作詩乞酒)>등 많은 시를 남겼다.
취객(酒客)이 청탁(淸濁)을 갈희랴 다나 쓰나 마고 걸너
잡거니 권(勸)하거니 양(量)대로 먹으리라
취하여 초당명월(草堂明月)에 누어신들 엇더리
병가(甁歌) 809
주당(酒黨) 칠계(七戒)
-청탁(淸濁) 불문(不問) : 소주든 막걸리든, 생맥이든 병맥이든, 스트레이트이든 물 타먹든…
-원근(遠近) 불문(不問) : 광화문이든 영등포든, 서울이든 인천이든, 지하실이건 옥상이건…
창(窓)밧긔 국화(菊花)를 심거 국화(菊花)밋틔 술을 비저
술닉쟈 국화(菊花) 픠자 벗님 오쟈 달 도다 온다
아희야 검은고 청(淸)쳐라 밤새도록 놀리라
해일(海一) 533
-주야(晝夜) 불문(不問) : 밤이든 낮이든, 아침이든 저녁이든, 새벽이든 한밤중이든…
-수하(誰荷) 불문(不問) : 남자든 여자든, 노인이든 젊은이든, 사장이든 주임이든…
태백(太白)이 술 실너 가서 달지도록 아니 온다
오는 배 긘가하니 고기 잡는 소강(小舡)이로다
아희야 잔(盞) 씨셔 노하라 하마 올가 하노라
병가(甁歌) 661
-주효(酒肴) 불문(不問) : 치즈 안주로 빼갈을 마시든지, 한우등심에 막걸리를 마시든…
-금전(金錢) 불문(不問) : 현찰이든 외상이든, 맞돈이든 얻어먹든…
현학금(玄鶴琴) 빗기 안고 일배(一盃)을 먹근후에
죽리군자(竹裏君子) 무진무진(無盡無盡) 권커니와
명월(明月)이 새로 발가시니 못고 먹자 하노라
이야(李野) 시가(詩歌) 220
-생사(生死) 불문(不問) : 조지훈 시인이 말한 입신(入神)에 이르기 위한 계율
혼자 오노라니 달이조차 오는고야
올줄 아던들 술을 조차 가질거슬
주인의 비러 취코 간들 엇더하리
고금(古今) 155
자연(自然)에 취하고 흥(興)에 겨워
뒤 뜰애 벼 다 익고 압내에 고기 찻내
백주(白酒) 황계(黃鷄)로 내노리 가자시라
술 취코 전원에 누어시니 절(節)가는 줄 몰내라
시사(詩歌) 373
주당 5걸 : 김시습(1435-1493, 호 梅月堂, 생육신의 한 사람)
바우로 집을 삼고 폭포로 술을 비저
송풍(松風)이 거문고 되며 조성이 노래로다
아해야 술 부어라 여산동취(如山同醉) 하리라
장현광(張顯光) 장씨필사본(張氏筆寫本)
생육신의 한 사람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神話)>의 작가인 매월당 김시습도 한 시대를 풍미한 주선이다.
술깨야 이러 안자 거문고를 희롱(戱弄)하니
창(窓)밧긔 셧는 학이 즐겨서 넘노난다
아희야 나문 술 부어라 흥(興)이 다시 오노매라
김성최(金盛最) 병가(甁歌) 335
그는 당대의 비리를 닥치는 대로 조롱하며 중이 되어 산천을 주유할 때도 툭하면 시내로 들어와 대취한 채 거리를 누볐다.
술 먹지 마쟈하고 큰 맹서 하엿더니
잔 잡고 구버 보니 선우음 절노 나네
아해아 잔 가득 부어라 맹서푸리 하오리라
근악(槿樂) 212
당시의 영의정(領議政) 정창손(鄭昌孫)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나쁜 놈, 영상이고 뭐고 집어치워라" 하고 일갈했을 만큼 세상과 담을 쌓으며, 한평생을 술과 방랑으로 보냈다.
술을 취케 먹고 거믄고를 희롱하니
창전에 섯는 학이 졀노 우즑 하는괴야
져희도 봉래산학(蓬萊山鶴)이매 자연지음(自然知音) 하노라
김식(金湜) 시가(詩歌) 242
주당 6걸 : 임제(林悌, 1549-1587, 호 白湖, 예조정랑. 조선의 문장가)
술이 몃가지오 청주와 탁주로다
먹고 취할션졍 청탁이 관겨하랴
달 밝고 청풍헌 밤이어니 아니 깬들 엇더리
신흠(申欽) 병가(甁歌) 245
백호는 우리나라의 '주선 문장가 중의 한 사람이다(송지영 씨). 황진이의 묘 앞을 지나가다 지었다는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엇난다…"의 시조는 그의 호방한 기질을 잘 나타내 준다.
술이 취하거늘 송근(松根)을 벼고 누어
져근듯 잠드러 꿈깨야 도라보니
명월이 원근방초(遠近芳草)에 아니 비쵠데 업드라
시가(詩歌) 360
일생을 술로 벗 삼으며 봉건적인 권위에 저항하는 가운데 시문(詩文)으로서 인간미가 돋보이는 저서 <백호집>을 후세에 남겼다.
잔들고 혼자 안자 먼 뫼흘 바라보니
그리던 님이 오다 반가옴이 이리하랴
말삼도 우움도 아녀도 몯내 됴하 하노라
윤선도(尹善道) 고유(孤遺) 3
주당 7걸 : 김동리(金東里 1913- 본명 始鍾, 소설가, 중앙대 교수)
즌서리 술이 되야 만산(滿山)을 다 권하니
먹어 붉은 빗치 벽계(碧溪)에 잠겨세라
우리도 취토록 먹은 후에 붉어 볼가 하노라
원국(源國) 576
4살 때부터 술을 입에 댄 타고난 애주가로 아려졌다. 술이라면 청탁불문의 주량 제일주의자.
창(窓)궁글 뉘 뚜러 술독의 달 드느니
이 술 먹으면 달빗도 먹으려니
진실노 달빗 곳 먹으면 안히 조차 밝으리라
고금(古今) 174
그러면서도 끝까지 주석을 이끄는 대주가로 명성을 얻었다(이해랑, 조경희 씨).
청녀에 술을 싯고 명월 산즁 드러 가니
화향은 습의하고 월색은 만졍니라
동자야 잔 가득 부어라 달지기 전에 마시고저
시철가 62
음치이면서 주석이 익으면 노래를 즐겨 부르고, 매일 저녁상 앞에서 취할 때까지 반주를 든 다음 식사를 하는 애주가이기도 하다.
큰 잔에 가득 부어 취토록 먹으면서
만고(萬古) 영웅을 손고바 혜여보니
아마도 유령(柳伶) 이백(李白)이 내 벗인가 하노라
이덕형(李德馨) 병가(甁歌) 187
주당 8걸 : 임꺽정 (林巨正 ?-1562, 조선 명종때의 의적)
한달 셜흔 날의 잔을 아니 노핫노라
팔병도 아니들고 입병도 아니난다
매일에 병업슨 덧으론 끼지 말미 엇더리
송인(宋寅) 병가(甁歌) 92
신출귀몰의 의적으로 관가를 닥치는 대로 부수고, 재물을 털면서도 유유히 한양에 나타나 술을 마셔 덴 임꺽정을 두고, '심장에 털 난 주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잔을 먹사이다 또 한잔을 먹사니다
꼿츠로 술을 빗저 무궁무진(無窮無盡) 먹사이다
동자야 잔 가득 부어라 취코 놀고 하자고나
조사(調詞) 52
백정 출신으로 서민이던 그는 조선조 명종 10년(1555년)에 도둑의 우두머리가 되어, 12년간 황해도 일원에서 탐관오리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며 의적으로 종횡무진 누볐다.
화산(花山)에 유사(有事)하야 서억사(西岳寺)에 올나오니
십리 강산(江山)에 한 업슨 경개(景槪)로다
아희야 잔(盞) 자로 부어라 놀고 가자 하노라
김태석(金兌錫) 병가(甁歌) 368
그런 와중에서도 한양에 4명의 애첩을 두어 거느리고 술을 마셔댄 배짱 두둑한 사내.
흰 이슬 서리 되니 가을히 느저 잇다
긴 들 황운(黃雲)이 한 빗치 피거고야
아희야 비즌 술 걸러라 추흥(秋興)계워 하노라
신계영(辛啓榮) 선석유고 (仙石遺稿)
심산 긴 솔 아래 제 뉘라 차자오리
공명(功名)이 긔 무섯고 욕(辱)된 일 만흔이라
삼배주(三杯酒) 일곡금(一曲琴)으로 사업을 삼아두고
이 죠흔 태평연월(太平烟月)에 이리졀이 늙을이라
김천택(金天澤) 해주(海周) 417
주당 9걸 : 대원군(大院君 1820-1898)
대원군은 왕권을 손아귀에 쥐기 전 막강한 세도가들을 의식, 철저히 파락호로 위장해 술로 야망을 불태운 술의 영웅이다(최일남 씨).
벼슬을 져마다 하면 농부(農夫)하니 뉘 이시며
의원(醫院)이 병 곳치며 북망산(北邙山)이 져려하랴
아희야 잔만 부어라 내 뜻대로 하리라
김창업(金昌業) 병가(甁歌) 347
세도가들의 잔치집이나 詩會에 나타나 술을 얻어먹고 대감의 품계를 가지고 여염집 상가를 버젓히 드나들었다. 때론 시정의 잡배들과 어울려 대작을 하는가 하면, 투전판에까지 끼어들기도 했다. 술값이 떨어지면 난초 그림을 팔아 충당하면서 그는 술독에 파묻혀 민심의 동향을 살피고 세도가들의 정보를 입수하였다.
사라셔 먹던 술을 주근 후에 내아던야
팔진미(八珍味) 천일주(千日酒)를 가득 버려 노하신들
공산(空山)에 긴 잠든 후는 다 허사(虛事)인가 하노라
오준(吳竣) 시가(詩歌) 174
후일 야망을 달성한 뒤에는 파락호 시절의 주붕인 심복들을 중용해 술과는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맺은 주선이다
사람이 한번 늘근 후에 다시 져마 보는 것가
갱소년(更少年) 하닷말이 천만고(千萬古)에 업슨말이
우리는 그런줄 알므로 매양 취코 노노라
남파(南坡) 청진(靑珍) 269
주당 10 걸 : 원효대사
원효는 고대 인물가운데 유일하게 주선의 반열에 올랐다. 화엄종의 고승으로서 신라 무열왕 때 요석 공주와 사랑을 나눠 대유학자 설총(薛聰)을 낳은 승려.
화엄경을 노래로 지은 <무애가>를 부르며 시정의 술집까지 출입, 기녀들에게 불법을 전파하였다. 범사에 구애받지 않고 비파를 타며'깊은 삶의 멋과 슬픔'을 노래한 행동형의 주선이다 (이홍구 씨등 추천).
석숭(石崇)이 죽어 갈제 무어슬 가져 가며
류영(劉伶)의 분상토(墳上土)에 이내 술이 이르더니
아희야 잔(盞) 가득 부어라 사라신졔 먹으리라
병가(甁歌) 675
주당 10 걸 : 연산군
주지육림 속에 묻혀 산 주선으로는 단연 연산군이 으뜸이다. 채청사, 채홍사를 두고 8도의 미녀들을 뽑아 춤과 술과 노래를 즐기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점에서 파격적인 주선이라고 불린다.
주색(酒色)을 삼간 후에 일정백년(一定百年) 살쟉시면
서시(西施)ㅣ들 관계하며 천일주(千日酒)ㅣ들 마실소냐
아마도 참고 참다가 양실(兩失)할가 하노라
병가(甁歌) 647
주당 10 걸 : 마해송
마해송은 '따뜻한 청주 한 잔을 컵에 따라 1시간 동안 핥아 마시는 술의 신사요 선비'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남재희 씨). 방안에는 늘 상 술과 안주를 준비해 두고 주야불문 조금씩 마시는 선비풍의 기질을 지니며 술을 즐기는 것으로 알려졌다.
천지(天地)도 애주(愛酒)하샤 주성주천(酒星酒泉) 상기시고
고석(古昔) 성현(聖賢)도 다 즑여 먹엇거든
허물며 바리인 이몸이 안이 먹꼬 어이리
해일(海一) 363
주당 10걸 : 심연섭
칼럼리스트 심연섭은 일반적으로 소문난 언론인 중 첫손에 꼽히는 애주가였다(백승길, 임승준, 임영 씨 등). 서울 명동 무교동 일대의 단골 술집이 칼럼의 산실이었고, 스스로 '한국에서 술 맛을 가장 잘 아는 언론인'이라고 자랑스레 말하며 술과 함께 살다가 갔다.
취하느니 늘그니요 웃느니 아희로다
흐튼 슌배 흐린술을 고개 수겨 권할 때여
뉘라셔 흐르쟝고 긴 노래로 차례춤을 미루는고
위백규(魏伯珪) 삼족당가첩(三足堂歌帖)
월탄(月灘) 박종화는 한창 마실 때 동대문과 종로를 오가며 50사발의 막걸리를 마신 일화를 남기고 있다. 현진건(玄鎭健), 김학진(金基鎭), 이상범(李象範)등 당대의 모주꾼들이 모두 주붕들. 일생을 술과 원고지에 묻혀 지낸 주선으로 "댁에서 내놓은 술도 좋았지만 알찌개 등 술안주가 별미였다"고 회고하는 인사도 있다(송지영, 정한모 씨 등).
한달 셜흔 날에 취(醉)할 날이 몃날이리
잔(盞)자븐 날이야 진실(眞實)로 내날이라
그날 곳 지나간 후면 뉘집 날이 될줄 알리
남파(南坡) 청진(靑珍) 268
비록 10걸에 들지는 못하였지만 술을 마시면 '기생의 치마폭에 시를 써주던 대주선' 고려 때 문장가 이규보(이어령 씨 등)와 집을 팔아 술을 마시며 "내가 네 안에 들어가 살았으니 이젠 내 안에 들어와 보라"라며 웃은 국어학자 권덕규(權德奎)(이흥우 씨)도 특출한 주선으로 손꼽힌다. 여성으로는 모윤숙, 최정희 씨 등이 추천되기도 했고, '꿈의 정치, 환상과 현실을 술로 달랜' 여운형이 주선의 후보에 오른 것도 이채롭다 (이홍구 씨). (호모 비불루스/ 박석기 편. 1976).
한번 죽은 후면 어늬날 다시 오며
심산(深山) 긴 솔아래 제 뉘라 차자와서
술부어 저 잡고 날 권하며 노세하리 이시리
김천택(金天澤) 병가(甁歌) 647
경음(鯨飮)
고래가 물을 마시듯이 술을 퍼 마신다는 뜻이다. 이 말은 시인 두보의 음주팔선가(飮酒八 仙歌)이도 나오고 경음마식(鯨飮馬食) 즉 ‘고래처럼 마시고 말처럼 먹는다’ 라는 고사성어에도 들어있다.
위례역사문화연구회 평생교육원 여행프로그램 [別有風景]
한비야 씨는 여행이란 무엇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서 수많은 나를 만나는 일이라고 합니다.
한동안 진행되었던 위례역사문화연구회의 정기답사를 2009년 9월, 102차로 끝내고 송파문화원의 '테마가 있는 문화탐방'이라는 강좌로 변경되다보니 우리 회원님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금년 4월부터 새롭게 여행 프로그램을 위례역사문화연구회 평생교육원의 정규 프로그램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프로그램 이름을 고민하다가 이백의 시 <산중문답>에
問爾何事棲碧山(문이하사서벽산) 묻노니, 그대는 왜 푸른 산에 사는가.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불답심자한) 웃을 뿐, 답은 않고 마음이 한가롭네.
桃花流水杳然去(도화류수묘연거) 복사꽃 띄워 물은 아득히 흘러가나니,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별천지 따로 있어 인간 세상 아니네.
이란 詩가 떠올랐습니다. 별유천지(別有天地)라는 말을 별유풍경(別有風景)으로 바꿔보니 보통 볼 수 없는 특별히 좋은 풍경을 표현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이제 좋은 인연으로 만난 사람들과 함께 별유풍경(別有風景)을 구경하러 가보시지 않겠습니까? 진정한 자유와 평화로움이 가득한 곳으로 말이죠.
여행일정은 종전과 같이 매월 4째 주 화요일에 진행되며 접수 및 신청은 위례역사문화연구회 사무국(02-3401-0660)으로 하셔야 합니다. 1회 참가 시에 회비는 4만원이며, 3개원 단위로 신청을 하실 경우에는 10만원입니다. 강사는 오덕만 선생님이 진행하실 계획입니다. 회원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회차 |
일자 |
탐방주제 |
탐방지 |
5 |
8월24일(화) |
자연에 심취해 정작 깊은 의미를 지닌 문화유산을 소홀히 했던 고성 |
건봉사 사리탑 → 간성향교 → 화진포 (금구도, 화포리 고인돌) → 문암리 선사유적지 → 화암사 수바위 |
6 |
9월28일(화) |
산삼과 산약초가 유명한 고장 함양 |
학사루 → 함양상림 → 함양석조여래좌상 → 남계서원 → 청계서원 → 안의광풍루 → 용추사 → 심원정 → 농월정 → 동호정 → 군자정 → 거연정 |
7 |
10월26일(화) |
청정한 자연과 향토문화가 어우러진 괴산 |
각연사 → 미륵산성 → 우암송시열 관련 유적 → 산맥이옛길 |
8 |
11월23일(화) |
풍요롭고 아름다움이 넘치는 충절과 예학의 고장 논산 |
관촉사 → 계백장군묘소 → 돈암서원 → 개태사 → 상계사 → 성삼문묘 → 견훤왕릉 → 강경젓갈시장 → 명재고택 |
9 |
12월28일(화) |
서해안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간직한 당진 |
당진면천읍성 → 면천향교 → 영탑사 → 영랑사 → 안국사지 → 필경사 → 김대건신부생가지 |
10 |
1월25일(화) |
하늘의 뜻과 땅의 기운, 사람의 정성이 하나로 어우러진 금산 |
개삼터 → 태고사 → 보석사 → 남이자연휴양림 → 육백고지전승탑 → 백령성지 → 서대산 → 칠백의총 |
11 |
2월22일(화) |
북부에는 궁예, 남부에는 이 성계와 관련된 땅이름이 많은 포천 |
포천향교 → 구읍리석불입상 → 구읍리미륵불상 → 반월산성 → 청성사 → 용연서원 → 채산사 → 인평대군묘 → 성석린 선생 묘 |
12 |
3월29일(화) |
치악산과 섬강이 휘감아 흐르며 유구한 전통과 문화유적이 남아있는 원주 |
강원감영 → 박경리문학공원 → 원주시립박물관 → 충렬사 → 국형사 → 보문사 → 입석사법천사지거돈사지흥법사지 |
회 비 : 3개월(100,000원), 1개월(40,000원)
회비입금: 국민은행 836301-04-002170(예금주: 오덕만)
접수처 : 위례역사문화연구회 사무국(담당: 오유정 02)3401-0660)
위례역사문화연구회 평생교육원
서울시 송파구 방이동 193-17 광진빌딩 2층 ☏ 3401-06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