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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平章事文貞公神道碑銘(고려 평장사 문정공 신도비명)
어느날 佐郞金東稷(좌랑김동직)이 그 아우 東灝(동호)와 같이 호남에서 와 그 선조 文貞公(문정공) 神道碑文(신도비문)을 부탁하여 생각하니 세대가 멀어서 事跡(사적)이 희미하여 고증하기가 어려우나 석담 李先生(이선생)이 지으신 공의 後裔(후예)의 글을 보니 扶寧金氏(부령김씨)는 오랜 세대에 걸쳐 적선한 공적이 현저하여 명예스럽고 世世家門(세세가문)이 법도가 규범에 어긋남이 없다고 하였으니 석담선생의 추상하신 바는 다 문정공의 적선의 덕행에 연유된 명예스런 家範(가범)이라 고로 碑銘(비명)을 지음에 부족함이 없도다. 그러므로 史記(사기)와 家牒(가첩)을 상고하여 序(서)하노라. 공의 諱(휘)는 坵(구)요 字(자)는 此山(차산)이며 世系(세계)는 신라국성이니라. 공의 고조는 扶寧府院君(부령부원군) 諱(휘) 春(춘)이며 증조의 諱(휘)는 仁順(인 순)인데 숨은 덕행이 있었으나 벼슬은 하지 아니하였고 祖(조)의 諱(휘)는 作辛 (작신)으로 右僕射(우복야) 吏部尙書(이부상서) 扶寧君(부령군)이요. 考(고)의 諱 (휘)는 宜(의)로 右僕射(우복0)시며 妣(비)는羅州金氏(나주김씨)이시다. 고려 희종 七년 서기1211년 신미에 태어나셨는데 어려서부터 얼굴과 전형이 단정하고 후중하며 氣宇(기우)와 행동이 깊어서 경서와 사기를 알았으며 또 글을 잘지으니 세상 사람들이 신동이라 하였다. 12세에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22세 에 문과에 제2위로 합격하시니 지공거(시험관)인 金仁鏡(김인경)씨가 장원을 못 시킴을 한스럽게 여겼으며 자신도 역시 제2위로 합격하였다 하며 和笵傳衣(화범전의:학술과 문예를 제자에게 전함) 고사를 인용하여 위로하니 공이 답하기를 魯公(노공)이 魯門(노문)에게 나서 기꺼이 傳衣(전의)의 跡(적)을 받았다고 하셨다. 문순공 李奎報(이규보)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를 계승하여 나라의 글씀을 맡을 사람은 공이라」 고 하였다. 처음에 정원부사록에 보임되었다가 같은 고을사람 黃閣寶(황각보)의 거짓 고자질로 濟州判官(제주판관)으로 가셨는데 그 때 제주부사 문청공 崔滋(최자)가 공의 글씀을 보고 그 아들에게 말하기를 글의 표본이라고 칭찬하였다. 제주의 전답이 본래 두럭이 없어 강폭한 사람이 취탈할 뿐아니라 사슴과 말의 피해가 심하여 백성들이 고통을 겪고 있음으로 공이 돌담을 쌓아 경계를 분명히 하게하여 그 피해를 없게 하니 그 힘이 지금까지 백성들에게 미치고 있다. 임기를 마치고 한림에 배명되어 고종27년 서기1240년 경자에 서장관에 부임 원나라에 가셨으며 “북정록”을 기술하여 세상에 전하였다. 한림원에 8년간 계시다가 옮겨서 국학직강으로 계실 때 儒道(유도)가 침체하고 불법이 횡성하였다. 권신崔沆(최항)이 국권을 마음대로 하였으며 조금이라도 자기마음에 거슬리면 여지없이 처벌하였다. 최항이 불경을 조각할 때 공을 위협하여 발문을 지으라 함으로 공이 詩(시)로써 조롱하기를「벌이 노래하고 나비가 춤추며 백화가 새롭게 되는 광경은 모두 華藏(화장)속의 진풍경임에도 불구하고 온종일 원각경의 설법만을 지껄이기보다는 오히려 입을 다물고 남은 봄을 지나는 것만 못할 것이니라」 하니 최항은 대노하여 「나 더러 입을 다 물라 하는가」하고 공을 파면시켰다. (고종34년에서 고종44년까지 휴직, 최항 사망 후 재등용) 원종4년 서기1236년 계해에 원나라의 왕 홀필열이 우리나라에 불만이 많아 힐책이 빈번함으로 공이 글을 지어 보냈더니 그 글뜻이 간곡하여 홀필열의 성난 마음이 풀려 나라의 위기를 모면하고 오히려 상을 보내 왔다. 평장사李藏用(이장용)과 문하사 柳璥(유경)의 천거로 좌간의 겸 한림학사 지제고에 발령되었는데 공이 상소하여 사양하니 왕이 공의 글솜씨를 중히 여겨 특히 칭찬하여 말하기를 「東壁(동벽)의 精粹(정수)함을 타고나서 西京(서경)의 名手(명수)로 뽑혔다」 고 칭찬 하였다. 원종八년 서기1267년 정묘에 대사성에 배명되어 柳璥(유경)과 같이 林衍(임연) 등 여러 소인배의 죄상과 환관의 폐단을 논죄하니 내시 金鏡(김경)이 깊이 원한을 품고 공이 나라를 원망한다고 왕에게 고자질하니 왕이 공을 준절이 나무래고 장차 벌하려 하였으나 공이 국가의 글씀에 중한 책임이 있으므로 특히 용서하시다. 당시 왕세자가 글을 좋아하여 공과 같이 隨問隨答(수문수답)한 龍樓集(용루집)을 남겼다. 같은 해 12월에 좌복야로 승진하여 추밀원부사와 정당문학이부상서를 거쳐 보문각태학사를 겸하셨고 원종 14년 서기1273년 계유 가을에 왕이 군신을 거느리고 원나라 명절을 축하 하려 할 때 내수 강윤소가 원나라사람 달로화적에게 아부하여 원나라 의복을 입고 들어와서 자기도 객으로 온 사신이라 하고 왕에게 절하지 않으므로 공이 그 불손함을 추궁하니 달로화적이 노발대발하였으나 공은 조금도 두려움이 없이 말하시니 사람들이 장하게 여기다. 같은 해 10월에 참지정사로 지공거(시험관)에 임명되어 鄭賢佐(정현좌) 등을 뽑으니 士林(사림)들이 말하기를「공정한 출제를 내세워 그러한 훌륭한 사람을 얻었다」고 탄복하였다. 공이 말씀하시기를「사람 이 과거에 합격한 후에는 글을 읽지 아니하여 글씀이 심히 노둔하니 시험제도릍 두어 참하문신은 이에 응하게 하여 성적이 우수한 사람에게는 상을 내리소서」하니 왕이 옳게 생각하고 윤허하였다. 원종15년 서기1274년 갑술에 평장사가 되시고 다음 충열왕 원년에 첨의부 찬성사 판판도사사를 역임하셨다. 충열왕 2년 병자에 공이 말씀하시기를「통역하는 사람들이 미천하고 배움이 없어 사실대로 통역하지 못하고 혹은 간악한 마음을 품고 사리에 얽매여 나라에 해를 끼치는 예가 있으니 通文館(통문관)을 두고 내외학관에서 연소한 사람을 뽑아 외국어를 교육시켜서 통역으로 말미암아 잘못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청하셨다. . 충열왕3년 정축 봄에 世子二師(세자이사)를 배명 받았고 여름에 동수국사에 겸직되어 유경과 같이 고종실록을 편수하고 충열왕4년 서기1278년 무인 봄에 참문학사로 전임하셨다. 같은 해 9월 26일 松京廣里(송경광리) 자택에서 돌아가시니 향년69세 이시다. 왕이 輓章(만장) 등 모든 것을 平章事
(평장사)로 쓰라 명하시고 諡號(시호)를 文貞(문정)이라 하셨으며 같은 해 11월 13일 官庇葬(관비장)으로 松京(송경) 椒山麓(초산목)에 장사지냈다. 후에 扶寧縣(부령현) 서쪽 오십리 知止浦(지지포) 斗雲洞(두운동) 현 雲山里(운산리) 艮脉艮坐原(간맥간좌원)에 이장하였다. 配位(배위)는 初娶(초취)에 朴氏(박씨) 內侍令(내시령) 同正朴(동정박)의 따님이신데 일찍 돌아가시고 再娶(재취)는 慶州崔氏(경주최씨) 禮賓卿(예빈경) 㺹(변)의 따님이시다. 4남2녀를 두셨으니 朴氏生 (박씨생) 1녀는祗侯(지후)李(이)의 妻(처)가 되고 崔氏生(최씨생)4남1녀는 장남汝盂(여우)는 형부상서문한학사요. 따님은贊成事(찬성사)鄭瑎(정해)의 妻 (처)가 되고 2 남 宗盂(종우)는 전교시부령이오 3남叔盂(숙우)는 서도감판관이오 4남 承印(승인)은 大司成(대사성)으로 江陵按撫使(강릉안무사)를 지냈다. 지금은 연대가 오래되어서 후예 자손들을 다 기록하지 못하고 그 중에서 행의가 있고 현저한 관직이 있으신 분 중에 汝盂(여우)의 아들 恪(각)은 이부상서겸 문한학사요 손자 之冏(지경)은 전의시고 증손 龍壽(용수)는 밀직부사요. 고손자 仁鼎 (인정)은 中郞將(중랑장)이요. 信鼎(신정)은 侍承(시승)이다. 仁鼎(인정)의 아들 世英(세영)은 한성소윤이요. 光敍(광서)는 고부군사요. 光信(광신)은 소감이요. 光矩 (광구)는 랑장인데 형제 네 분이 고려의 운이 다하고 신세력이 등장함으로 지조가 있는 사람은 두조정을 설길 수 없다하고 고향에 돌아오셨다. 世英(세영)의 손 自美(자미)司正(사정)인데 호를 月溪(월계)라하고 自賢(자현)은 현감이오. 五대 손 應瑞(응서)는 종사랑이오. 應祥(응상)은 장사랑 전연사참봉이오. 景德(경덕)육은 문과로 응교며 임진에 창의하고 6대손 應龍(응룡)은 한성좌윤이오. 鐵(철)은 遺逸(유일)로 천거되어 직장이니 임진에 창의하였으며 號(호)를 雲塢(운오)라 하였다. 七세손得仁(득인)은 司議요 友仁(우인)은 부호군이며, 정묘에 성가를 호종하였고 병자에 창의하셨다. 應祥(응상)의 증손 成弼(성필)은 호를東岡(동강)이라하고 첨중추요 증손直孫(직손)은 홍문박사요 次孫(차손)은 남대지평이오 後孫(후손)은 충무위부사직이오 현손 彭齡(팽령)은 博士(박사)요. 錫弘(석홍)은 기묘 명현이니 호를 甕泉(옹천)이라하고 錫賢(석현)은 습독이오 錫弼(석필)은 교리요 錫忠(석충)은 승사랑이니삼형제가 다 녹을 표한 문권이 있다. 錫良(석양)은 진사니 호를 甕村(옹촌)이라하다. 宗(종)은 생원이니 세상에 학행이 이름났으며 호를 梅竹堂(매죽당)이라하다. 瑞星(서성)은 부응교요 瑞奎(서규)는 봉사요 坫(점)은 진사니 호를 梅堂(매당)이라하다. 啓(계)는 황해감사로 호를 雲江(운강)이라하고 彭齡(팽령)의 손 英武(영무)는 참봉이니 임진에 창의하고 증손億鎰(억일)은 주부로 순효비가 있으며 임진에 창의하고 호를 晩休堂(만휴당)이라하다. 고손자 克溫(극온)은 아버지를 따라 거의하시여 좌찬성의 중직을 받았다. 六대손瑞慶(서경)은 생원으로 학문이 뛰어났으며 호를 澹溪(담계)라하고 瑞星(서성)의 손자 垓 (해)는 직장이니 임진에 창의하였으며 호를 退憂堂(퇴우당)이라한다. 錫賢(석현)의 아들 滌(척)은 진사니 학행으로 참봉이오 錫弼(석필)의 증손 弘遠(홍원)은 생원으로 임진에 창의하여 나주목사를 지내시고 호를 海翁(해웅)이라한다. 錫忠(석충)의 손 應虬(응규)는 참봉이니 학행이 뛰어났으며 應鰲(응오)는 사마로 資憲(자헌)에 오르셨고 고손자 宅三(택삼)은 학행으로 주부를 제수받고 호는 礱巖 (농암)이라한다. 後孫(후손)의 증손 益福(익복)은 군수로 임진에 창의하고 호를 金陵(금릉)이라하고 泰福(태복)의 호는 甕井(옹정)이니 임진에 창의하여 영광성을 지켰으므로 수성록이 있다. 고손자 滭(화)는 사마양시에 합격하고 호를 在澗堂(재간당)이라하고 沇(연)은 진사니 병자호란에 창의하고 호는 陶村(도촌)이라 하고 湍(단)은 학행으로 현감에 추천되고 갑자란에 창의하여 모의록이 있다. 5대손 之鳴(지명)은 호를 兩忘齋(양망재)라하며 사마요 之白(지백)은 호를 澹虛齋 (담허재)라하며 생원이오 宗(종)의 손자 鈜(굉)은 호를 竹溪(죽계)라하며 생원과 진사에 장원하였고 銘(명)은 호가 火谷(화곡)이며 진사에 이차합격하고 증손 致遠(치원)은 학문으로 승지니 直節公(직절공)이라 칭한다. 灝(현)은 학문으로 승지요 5대손 璞(박)은 호가 露軒(노헌)인데 학행이 있었다. 光信(광신)의 아들 坤(곤)은 목사요 5대손 得淸(득청)은 첨정이오 9대손 漢祐(한우)는 임진란에 성상을 용만까지 호종하였고 아들 元龍(원룡)은 부사요 承白(승백)도 부사인데 같이 병자란에 남한산성까지 성가를 호종하였으므로 왕이 특히 녹권과 팔첩병풍을 주셨다. 東稷(동직) 東灝(동호)는 글을 청한 사람으로湍(단)의 5대손이다.
문정공께서는 넉넉한 성품이 지성스럽고 꾸밈이 없으며 단정하고 법도가 있으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하신 후로 승진하심을 서두르지 아니하였으며 文成公 安裕(문성공안유)와 서로 도의적으로 사귀었으며 같이 경학과 성전을 강구하고 연마하여 유학을 흥기진작시킴에 힘쓰시니 그 포부는 普通儒者(보통유자)에 비할 바 아니었다. 조정에 계실 때 제의하신 말씀은 실로 들어둘만 함이 많았다. 林衍(임연) 등의 전횡 농권함을 배척하고 시국을 근심하고 악한 자를 미워하신 마음이 철저하셨다. 강윤소의 미친 행동을 규탄하고 왕을 존중히 여기고 못된 도리를 막은 의리지심이 늠름하셨다. 원나라 학사 王鸚(왕악)이 공의 글을 보고 서로 상면하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겼다. 공의 글은 널리 중국대륙에까지 빛났다. 거기에다 많은 분의 칭송이 많았으며 더욱이 孤峰(고봉기대승)은 경술군자로써 덕행 으루나 秋空(추공)하였고 史家(사가서거정)는 문학에 으뜸가는 분으로써 공을 문학에 뛰어났다고 하였으니 공은 가히 탁월한 인재였으며 전대의 명신이 되었음을 알 것이로다. 부족한 내가 공을 경앙하고 탄복하는 바는 고려조시절에 불교가 성행하여 상하가 날뛰어 복을 구하고 이익을 추종하는 때에 당대 나라를 한손에 쥐고 흔들었던 권력자 崔沆(최항)이 글을 빌려 佛界(불계)에 자기의 권위를 높0이려는 청탁을 공은 정색하고 불행을 각오하고서 통절히 배척하셨다. 권신의 권세를 물리치고 사회를 바르게 지킨 공은 실로 우리 동방에 무궁한 혜택을 주었다
공은 부령현 선학동(현재 선은동)에서 어렸을 때 살으시고 중년 휴직시에는 변산에 집을 짓고 거처하시니 그 지명을 知止浦(지지포)라 이름하였다. 여가에 거문고와 글로 스스로 즐기시고 후진에게 훈학함을 자신의 일로 여기고 매일 과정을 엄하게 정하여 훈교하시니 인재양성의 효과가 뚜렷하였다. 돌아가신 후에 지방인사들이 도동서원에 향사하니 그 유풍과 여운이 지금까지 사라지지 아니하였다. 공의 자손들이 덕행과 절의로 인하여 많이 공공한 향사와 별사에 향사되었으니 누가 예천이 근원이 없다고 말하리오 공의 묘가 전란으로 인하여 한때 실전되었는데 숙종 무오 서기1678년에 후예 弘逴(홍탁)이 그 아비를 밀장하고 지석을 숨겼다. 숙종 병신 서기1716년 홍탁이 죽음으로 그 사실이 발각되어 무술 서기1718년에 자손들이 관가에 제소하여 그 핍장을 제거하니 공의 묘역이 다시 뚜렷이 나타남으로 봉축하고 묘표를 세웠다. 부족한 나도 공의 외손이라 현손의 부탁을 받아 분수에 넘치면서도 피하지 못하고 이와 같이 갖추어 기록하도다. 다시 새겨서 말하자면 정당하고 믿음직하도다. 문정공이시여 타고난 성품이 영특하도다. 전대에 제일이시다. 평소에 말씀이 적었도다. 높은 명성 이 널리 빛나니 선배들이 추장하도다. 재임시의 발언과 논의는 권세와 강한자에 조금도 굴하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이 서로 추앙하도다. 권신 최항의 만행에 세상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는 때에 그의 비위를 건드려 미움을 받고 십여년동안 휴직중에도 조금도 후회한 빛이 없도다. 역대 조정에 벼슬하였으나 충성과 근엄함이 시종일관 독실하시니 크나큰 절개로다. 사교를 배척하고 힘껏 儒道(유도)를 扶仰(부앙)함은 그 공이 더욱 크도다. 남은 경사가 면면히 이어 후손들 중 에 현인이 많으니 天道(천도)가 역시 儼然(엄연)하도다. 내가銘(명)을 써서 묘전에 세우니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극히 존경하리라.
정조대왕 16년임자(서기 1792년)세움
資憲大夫議政府左參贊兼弘文館提學世孫左副賓客 鄭實 撰
자헌대부의정부좌참찬겸홍문관제학세손좌부빈객 정실 찬
資憲大夫工曹判書兼五衛都摠府都總管 李敏輔 篆
자헌대부공조판서겸오위도총부도총관 이민보 전
嘉善大夫行副司直兼五衛都摠府副摠管 曺允亨書
가선대부행부사직겸오위도총부부총관 조윤형 서
그후 자손록에 미흡한 부분이 있어 종중원로들의 논의 끝에 오로지 자손록 추가 삽입하기로
결의하고 서기1960년에 개수하였음
대종회장 창원 풀어 씀
서보실업대표 김삼철 협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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