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웨일즈 부흥 연구의 권위자 에이비온 에번스 박사의 1904 웨일즈 부흥에 대한 상세한 역사적 고찰과 탁월한 신학적 통찰력이 결합된 작품이다. 평생 부흥을 열망하며 살았던 탁월한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D. M. Lloyd-Jones)는 추천의 글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지난 수년 간 웨일즈 부흥 운동에 대한 연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왔다. 이 책은 그 목마름의 결실이다. 나는 뜨거웠던 부흥 운동의 분위기를 직접 떠올릴 수 없는 젊은 세대에 속한다. 그러나 나는 부흥 운동을 이끌었던 인물들을 잘 알고 그 혜택을 몸소 누리고 있다. 나처럼 부흥을 직접 체험한 세대는 아니지만 지나간 시대의 부흥에 깊은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아주 소중하다. 에이비온 에번스 박사는 놀라울 정도로 면밀하게 모든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다. 실제로 이런 작품에 필요한 사람은 숙련된 역사가, 곧 객관적 입장을 취하면서도 그 주제를 신학적으로 다룰 수 있는 작가여야 한다. 나아가 이 작품은 영적 통찰력, 이해력, 포용력을 두루 갖춘 작가를 요구한다. 에번스 박사는 이러한 자질을 고루 겸비했다. 그래서 웨일즈 부흥 운동이라는 구체적인 역사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부흥을 연구하는 데 필요한 탁월한 작품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원래 광부이자 대장공이던 에번 존 로버츠(Evan John Roberts)는 그 무렵 칼빈주의 감리교회 목사가 되기 위해 목사 후보생이 된 지 한달째였는데, 이후 26년 동안 성직에 종사했다. 19세기가 끝날 무렵, 셋 조수아는 영성보다 지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만연해 있다는 사실에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는 ‘강단에 서기 위한 지적 자질을 주제로 열띤 논쟁’을 벌인 후 ‘탄광이나 농촌으로 가서, 마치 엘리야가 쟁기로 밭 갈던 엘리사를 취한 것처럼, 하나님의 일을 부흥시키기 위해 한 젊은이를 취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려는 뜻을 품었다. 이런 기도는 응답되었는데, 조수아는 하나님께서 바로 그날 택하신 사람을 거룩한 예복으로 감싸는 것을 목격했다. 로버츠는 글래스모건셔와 카마던셔에 인접한 루고르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때부터 주로 성경과 주일학교와 가정 예배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12세기가 되기 전에 로버츠는 아버지와 함께 탄광 일을 시작했으며 1년도 지나지 않아 가족이 출석하던 모리아 칼빈주의 감리교회의 세례 교인이 되었다. 그 당시 로버츠는 웨일즈어로 ‘세이에트’라고 부르던 교우회에서 어느 장로가 한 이야기가 도전을 받았다. “신실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성령께서 강림하실 때 여러분이 그 자리에 없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도마를 기억하세요! 그가 얼마나 큰 낭패를 겪었던가요?” 그 순간부터 로버츠는 성령께 기도하기로 작정하고 은혜의 수단을 굳게 붙들기로 결심했다.
“나는 스스로 다짐했다. ‘꼭 성령을 받을거야.’ 그래서 궂은 날씨와 온갖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집회에 꾸준히 참석했다.……월요일 저녁 교회에서 열린 기도회, 화요일 저녁 비스가(주일학교의 분교가 있던 곳)에서의 기도회, 수요일 저녁 집회, 목요일 소망의 밴드, 금요일 저녁 성경공부……10~11년 동안 나는 계속해서 부흥을 위해 기도했다. 부흥에 대해 생각하도록 나를 감동시킨 것은 바로 성령이었다.”
로버츠는 좀처럼 성경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심지어 지하에서도 로버츠는 가끔씩 성경책을 뒤적거렸다. 찢어지고 그을린 페이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것은 다섯 명의 광부의 목숨을 송두리째 삼켜 버린 갱도 폭발 사건을 견뎌 낸 것이었다. 지식을 갈구하는 로버츠의 목마름은 존 번연(John Bunyan)의 「천로역정」과 아르키볼드 하지(Archibald A. Hodge)의 「신학개요」(Outlines of Theolgy), 그리고 토마스 챨스(Thomas charles)의 「성경 사전」(Geiriadur Ysgrythurol) 등과 같은 책을 읽으면서 해갈되었다. 토마스 찰스의 「기독교의 지침: 기독교의 원리들에 대한 요리 문답」(Hyfforddwr yn Egwyddorion y Grefydd Gristionogol)은 특히 칼빈주의 감리교회에서 높이 평가받은 작품이었는데, 로버츠는 그 속에 담긴 풍성한 성경적 가르침으로 영적인 것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켰다. 탄광 일은 당시에도 전망이 불투명한 직업이었다. 파업과 여러 가지 요인이 겹쳐 채탄 작업이 중단되자, 로버츠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 여러 차례 고향을 떠나야 했다. 1902년, 마침내 어느 대장간에서 견습공이 되었지만, 그는 상당히 오랜 기간에 걸쳐 설교자로서의 소명에 대해 눈떴다. 결과적으로 로버츠를 기다린 것은 오직 한 가지, 곧 25세의 나이에 목사 후보생으로 헌신하는 것이었다. 1903년이 끝날 무렵 로버츠는 단호한 결정을 내렸다. 로버츠는 친구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동기를 털어놓았다.
“영혼은 지식과 더 폭넓고 유익한 분야에 대해 갈급함을 느끼고 있었으나 나는 필요한 것보다 훨씬 많은 육체노동에 종사했다네. 대부분의 학생들보다 나이가 많겠지만 그래도 공부하기에 너무 늙은 것은 아니지 않나? 강한 학문적 욕구를 느낀 식기가 있었으나 그 때는 ‘학문’이 신학생의 영혼을 산산이 부숴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그들과 어울려 감히 학문에 도전할 만한 기백이 나에게 남아 있지 않았네. 이제 나는 설교단에 서기 위해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없게 되었네. 나도 다른 사람과 같은 길을 걷기로 결심했네.……무엇 때문에 이런 결정을 했냐고 의아해하는 것도 당연하네.……곰곰이 생각하다가 나는 다음과 같은 동기가 나를 옥죄고 있음을 알았네. 첫째, 지난 10년 동안 내가 도저히 꺾을 수 없었던 영혼의 간절한 열망……둘째, 하나님의 백성의 부르짖음……셋째, 성령의 약속과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바로 그것이네. 지난주일 밤, 하나님의 일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나의 무례함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울지 않을 수 없었네. 그래서 나는 자네와 나에게 성령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주님께 기도했네.”
이런 결정을 내린 다음 달, 로버츠는 목사 후보생으로 설교하는 일에 전념했으며 교단의 요구조건에 따라 성경 시험을 치르느라 분주한 나날을 보냈다. 그 시기는 로버츠에게 있어서 지적 측면만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이 아니었다. 기도를 통한 영적 훈련, 성경 강독 그리고 묵상을 통해 로버츠는 지속적으로 하나님과 교제했다. 1904년 봄, 하나님과의 교제를 너무 깊이 체험한 나머지 육체에서 벗어나 셋째 하늘로 올라간 것처럼 보였던 로버츠는 이런 친밀한 교제가 가져다 준 극도의 흥분 상태를 수개월 동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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