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는 고려 현종때 좌사 시랑을 지냈고 평장사에 추증된
하공진(河拱辰)을 시조로 하는
시랑공파(侍郞公波)이며,
이러한 하씨(河氏)는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 훌륭한 인물을 배출하여 가문을 빛냈으며, 특히 학자와 문인을 많이 낳은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순흥부사 윤린(允麟)의 아들
륜(崙/하공진의 후예)이 뛰어났다. 그는 공민왕때 문과에 급제하고 감찰규정이 되어 신돈의 비행을 공박하기도 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 경기도 관찰사로 계룡산 천도를 반대하여 한양 도읍(都邑)을 주장했다. 정종때 제 2차 왕자의 난에 공을세워 진산백으로 진봉되어 좌명일등공신에 책록되었으며, '태조실록' 편찬을 지휘하는 한편 시문에 능하여 이첨과 함께 '동국사략'을 편찬한 후 진산부원군에 봉해졌다.
한편
부윤 자종(自宗)의
아들 연(演)은 일찍이 정몽주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고 수찬, 집의, 예조참판 등을 거쳐 세종때 대사헌에 이르러 불교 개혁을 추진했으며, 형조 판서, 좌찬성, 우의정을 역임한 후 영의정에 이르렀다.
조선조에 충절로써 하씨 가문을 빛냈으며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으로 가문에서 자랑하는
단계공 하위지(河違地)는 첨(詹)의 아들인데, 1438년(세종 20)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로 학문을 연마한 후 집현전교리가 되어 '오례의주(五禮儀註)', '역대병요(歷代兵要)' 편찬에 참여했다.
단종때 부제학에 이어 예조판서를 지낸 그는 성격이 침착 과묵했고, 집현전에 있는 동안 왕의 측근에서 시정(施政)을 보필했으며,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후 받은 녹(祿)은 하나도 먹지 않고 창고에 보관한 절신이었다.
1456년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거사에 실패하자,
형 강지(綱地), 아우 기지(紀地), 소지(紹地)와 함께 죽음을 당했다.
그외 예조좌랑을 지낸 윤(潤)은 당대의 이름난 학자로 '운수당실기(雲水當實記)를 저술했고, 참봉 영수(永水)의 아들 응림(應臨)은 명종때 예조정랑을 지냈는데, 문장이 뛰어나 송익필 등과 함께 당대에 '8문장(八文章)'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진다.
시인 만리(萬里)는 극윤(克潤)의 아들로 일찍이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심하였으며, 부모의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받아 대접한 효자로 이름을 날렸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진주하씨(晋州河氏)는 남한에 총 33,233가구, 178,83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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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
진양하씨족보 [晉陽河氏族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