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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지맥 3[공원묘지앞(619번도로)-팔봉산-용산-구양교(32번도로) ](終).
◈ 산행코소와 거리 및 소요시간.도상거리 약 17.95km.
평촌리-노화리고개 (619번도로)-2.2km(63분)-팔봉산(八峰山.207.4m)-3km(74분)-21번국도 면허시험장 사거리-3.5km(도로.)-양신초교앞-
3km(도로.)-예림리입구 사거리-1km(22분)-용산(94.2m)갈림봉-[2km-(94.2m봉-용산-추사고택)]-5km(도로.)-구양교(九陽橋).
◈ 일시 : 2009. 2. 11(수).
◈ 인원 : 아내와 둘이서.
◈ 날씨 : 봄날같이 푸근하나 하늘빛이 회색빛으로 시계는 안좋음.
◈ 지도 :. 1/25000.예산.합덕. 영진 1/50000. P243 예산. 217 당진.아산.
봉수지맥 3[공원묘지앞(619번도로)-팔봉산-용산-구양교(32번도로) ]지도 1.
봉수지맥 3[공원묘지앞(619번도로)-팔봉산-용산-구양교(32번도로) ]지도 2.
봉수지맥 3[공원묘지앞(619번도로)-팔봉산-용산-구양교(32번도로) ]지도 3.
◈ 개요(槪要).
봉수지맥의 마지막구간인데 예산공원묘지 입구에서 350 여 m떨어진 고개위에서 우측으로 들어 10여분가면 124봉이다.
124봉 좌측엔 큰 물탱크가 있고 정점을 넘어서면 묵은 사과밭이 나오며 팔봉산이 얼굴을 내민다.
앞둔덕을 직진해 오르면 안동권씨 종중묘지가 있고 복숭아밭을 지나 개활지에서 잠시 가시밭이 성가시지만
소나무숲을 지나 낡엽이 수북히 쌓인 된비얄을 올라서면 높은 산불초소가 있고 길은 나아진다.
산불초소봉에서 두 번째 봉이 제일높은 팔봉산정상이고 앞봉에서 우측으로 꺽어 내려가면 임도종점을 만난다.
임도를 조금 따르다 좌측 소나무숲길로 몇분 올라가면 삼각점이 있는 207봉이다.
207m 삼각점에서 내려서며 바로 나오는 좌측 마을길은 무시하고 좋은길을 따라 5분쯤 내려가면
리기다 소나무숲에서 길은 자연스럽게 좌측으로 휘어 내려가 인동장씨무덤을 만난다.
앞에 시야가 좀트이며 우측으로 마을이 보이더니 좌측으로휘어 나가면 과수원이 연이어 나오며
좌측아래로 굴이골골과 증실마을이 보이며 내려다 보이며 커다란 물탱크에 록색 팬스를 쳐놨다.
과수원 가장자리를 따라 조금가면 이번엔 하얀 물탱크가 나오고 건너편 11시방향엔 120봉이 높게 보이고 집들과 과수원이 보인다.
여기서 주의해야한다.저 120봉을 거쳐 120봉에서 우측으로 내려갈 듯 보이는데 그 120봉가지 가지 않고
바로 앞에 보이는 묘지가 여럿있는 창령조씨 충정공파 예산 중시조 제단묘지에서 우측으로 내려서야 한다.
중시조묘앞에선 아래쪽으로 가는 묘지길이 넓게있는데 이길을 따라가면 안되고 큰길 초입에서 다시 좌측잡목속으로 들어가야한다.
건너가면 다시 좌측 과수원쪽에서 온 넓은 묘지길이 또 있고 묘지길따라 우측으로 조금 나오며 과수원의 파란 물탱크가 있고
대전-당진 고속도로가 저앞에 보인다.이곳이 마루금을 그을 때부터 신경이쓰인 부분인데 이능선을 찾는데 9분 걸렷으면 좋은 성적이다.
2분쯤 나가면 咸從 魚씨무덤이 있고 4분쯤 더 잡목을 헤치고가면 당진-대전고속도로 절개지위가 나온다.
절개지위에서 내려다보면 건너편으로 과수원으로해서 면허시험장 좌측으로 맥이 이어짐을 알수있다.
절개지 좌측으로 내려오면 좌측에 굴다리가 있고 굴다리를 건너가면 과수원사이로 난 세멘트 포장길이 언덕넘어 5번군도로 이어진다.
5번군도 우측은 새화신이란 큰 공장이 있고 좌측으로 예산운전면허시험장이 보이고
온길쪽엔 월곡리 들아가는 길표시가 전봇대에 붙어있다.
100여m쯤 나오면 우측에 면허시험장이 있고 다시 100여m를가면 21번국도를 만나는 면허시험장 사거리다.
면허시험장 사거리서 한서 SS기앞으로 직진하여 장항선철로위를 건너고 다시 구 장항선철로위 신대교를 건너가면
45번국도인 임성교차로이고 직진하여 예산자동차학원,충효각,양신초교앞,분천리입구,내량리버스정류장을 지나면 오촌사거리다.
오촌 사거리서 합덕,신암방면으로 직진하여 조금나가면 오산주유소와 오산3리마을회관이 있는 사거리다.
사실상의 큰 산줄기는 팔봉산을 내려와 예산운전면허시험장이 있는 21번국도에서 끝이나고
여기서부터 삽교천을 만나는 구양교까지 대략 12km정도는 지맥능선위가 곧 도로로 이어지는데
그 중간쯤되는 오산3리 마을회관뒤 (지도상의 피직이 마을뒤)에서 좌측으로 1.3km정도 떨어져 94.2봉(오석산)과 70m인 용산이 있다.
이 오석산우측 아래엔 김정희의 증조부가 세운 화암사절이 있고 절뒤엔 김정희의 친필 암각문이있고
용산 우측아래엔 추사 김정희선생의 고택과 김정희묘,그의 증조부,고조부의 묘지와 영조의 둘째딸이며 김정희의 증조모인
화순옹주의 열녀정문이 있고 그옆엔 김정희가 중국에서 씨를 가자고 와서 심은 천연기념물 106호인 예산백송과 백송공원이있다.
대부분 종주자들이 이 용산에서 끝을 내겠지만 삽교천과 만나는 구양교까지 이어간다면 다시 돌아와야하는데
추사전시관에서 큰길따라 나오다 용궁1리 마을회관앞에서 우측으로 화암사 500m등산로 안내판 세멘트길을 따라 앞 잔등을 넘어가면
다시 5번군도를 만나고 화암사입구 도로 표지판과 용산 등산로입구 안내판을 만난다.
5번군도를 따라가면 32번국도를 만나는 용궁사거리엔 예산농업기술센터가 있고 직진하여 더가면
예산에서 당진으로 가는 4차선 신도로를 만나는 신택교차로가 나온다.
옥금리,신택리방향으로 직진하면 32번국도를 만나는 삼거리에서 좌측 합덕IC,합덕쪽으로 조금가면 삽교천을 건너는 구양교가 나온다.
오서산 자락에서 50여 km를 달려온 봉수지맥은 여기서 삽교천에 몸을 담그며 끝이난다.
다리앞에 구양도 주유소가있고 다리를 건너면 합덕읍 옥금리 구양도마을인데 삽교천방조제가 생기기전엔 바닷물이 안쪽깊이
용산앞까지 들어가서 구양도마을은 아마 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앞 삽교천은 좌측 1km지점에서 석우천을 흡수하여 우측으로 1.3km를 흘러가서서 무한천과 합류하여 북쪽 아산만으로 들어간다.
◈ 일정정리.(10 : 45~17 : 23. 6시간 38분).
08 : 30. 승용차로 천안출발.
09 : 30. 면허시험장 주차장에 파킹.
09 : 50. 면허시험장 사거리에서 광시행 시내버스(1000원).
10 : 02.예산 추모공원앞 하차.
10 : 04/6. 노화리-평촌리고개위에서 산행시작. 세멘트길 따라 오름.폐초소 있음.
10 : 11. 덕수이씨묘.뒤로 고개건너편지난구간이 보임.
10 : 16. X 124m봉. 정점전에 큰 물탱크있고 넘어가면 묵은 사과밭이 나오고 팔공산과 공원묘지가 보임.
10 : 27.안동권씨 典翰공파묘원.좌측 능선으로 가기쉬움.묘지길따라 가면 복숭아밭이 나옴.
10 : 50. 산불초소.깍아지른 경사지를 직등해 올라야하는데 길없고 낙엽이 쌓여 힘듬.
10 : 56. 우마차길 삼거리.지맥은 좌측으로 가고 우측능선밑에 팔봉암이 있을듯.동에서 북으로 꺽임.
11 : 09. 팔봉산(八峰山.207.4m)정상.별특징없고 큰 참나무 2기있고 2시방향에 207봉 삼각점봉보임.
11 : 17. 임도.조금 나가면 세멘트 포장길은 우측으로 내려가고 좌측 207봉 오름길로듬.길이 좋아짐.
11 : 26. 207m봉.삼각점(에산 313.1991재설).우측밑에 묘있고 내려서며 바로 좌측으로 마을길있음.
11 : 31. 리기다소나무지대서 좌측으로 꺽어짐.
11 : 43. 과수원. 좌측으로 굴이골 마을이 보이고 록색팬스친 물탱크 있음.
11 : 46. 두 번째 하얀물탱크.좌측 11시방향에 지맥에서 벗어난 120m봉이 높게 보임.바로앞의 묘지군으로 가야함.
11 : 48/57.105m.바로앞의 묘지군인 창령조씨 예산중시조 제단묘 앞에서 큰길 버리고 좌측으로 들어가야함.
21번국도부터 오산3리 마을회관과 오산주유소가있는 예림리입구 사거리까지 6.5km는
2차선 포장도로인 5번군도가 지맥능선 마루금위를 지나고 있다.
걷기엔 너무 지루해서 승용차로 이동했다.
면허시험장 사거리서 한서 SS기앞으로 직진하여 장항선철로위를 건너고 다시 구 장항선철로위 신대교를 건너가면
45번국도인 임성교차로에서 직진하여 예산자동차학원,충효각,양신초교앞,분천리입구,내량리버스정류장을 지나면 오촌사거리다.
오촌 사거리서 합덕,신암방면으로 직진하여 조금나가면 오산주유소와 오산3리마을회관앞 사거리다.
여기서 지맥은 잠깐 도로를 벗어나 앞 둔덕봉에서 좌측으로 용산을 가지치고 우측으로 내려와서 구양교까지 5km를 도로따라 이어진다.
14 : 29. 오산주유소옆 오산3리 마을회관.
14 : 32. 폐주유소.
14 : 39. 과수원을 가로질러 10번 송전탑.
14 : 49. 한성공업공장우측 개활지.
14 : 51. 주능선위.우마차길나옴.우측으로 내려가면 화암사입구 용산등산로입구인 5번군도.좌측은 용산.
14 : 55. 첫봉.큼직한 바위들이 많고 좌측에 묘 있고 공장경계인듯한 철조망이 쳐짐. 능선길이 좋음.
15 : 00/04.첫봉 내려온 안부 우측의 화암사.추사 김정희의 필적 암각문 있음.
15 : 19. 94.2m봉.오석산.삼각점(예산 21.)과 체육시설.
15 : 35. 휴식하고 내려온 세멘트길 안부.
15 : 44. 용산(약 70m).별특징 없는 솔밭.
15 : 50. 백송공원.
16 : 05. 추사고택.
16 : 47. 추사기념관출발.
17 : 08. 화암사입구.용산 등산로입구 안내판 있는 5번군도.
17 : 20. 다시 돌아온 오산주유소옆 오산3리 마을회관.
추사전시관에서 큰길따라 나오다 용궁1리 마을회관앞에서 우측으로 화암사 500m등산로 안내판 세멘트길을 따라 앞 잔등을 넘어가면
다시 5번군도를 만나고 화암사입구 도로 표지판과 용산 등산로입구 안내판을 만난다.
5번군도를 따라가면 32번국도를 만나는 용궁사거리엔 예산농업기술센터가 있고 직진하여 더가면
예산에서 당진으로 가는 4차선 신도로를 만나는 신택교차로가 나온다.
옥금리,신택리방향으로 직진하면 32번국도를 만나는 삼거리에서 좌측 합덕IC,합덕쪽으로 조금가면 삽교천을 건너는 구양교가 나온다.
오서산 자락에서 50여 km를 달려온 봉수지맥은 여기서 삽교천에 몸을 담그며 끝이난다.
다리앞에 구양도 주유소가있고 다리를 건너면 합덕읍 옥금리 구양도마을인데 삽교천방조제가 생기기전엔 바닷물이 안쪽깊이
용산앞까지 들어가서 구양도마을은 아마 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앞 삽교천은 좌측 1km지점에서 석우천을 흡수하여 우측으로 1.3km를 흘러가서서 무한천과 합류하여 북쪽 아산만으로 들어간다.
◈ 산행후기.
봉수지맥을 어디서 끝을낼까? 사실상의 봉수지맥의 끝이라할 수 있는 용산에서 끝을낼까? 아니면 더 내려가서 구양교에서 끝을낼까?
구양교로 바로 갈 수는 없고 구양교까지 가더라도 용산은 꼭 들려야겠는데 왕복거리가 4km이고
김정희유적지를 들리자면 시간이 적잖이 걸릴텐데...
지맥거리 18km에 용산왕복 4km를 더하면 22km인데 그중에 도로가 11.5km.도로위 11.5km를 걷는 것은 맥빠지고 별 의미도 없어 여긴 차로 가기로 했다.
산행거리를 짧고 유적지 관광도하자고 하니 집사람이 따라 나섰다.가는길에 예산옹기집에 들려 쌀독과 새우젓독을 사와야겠단다.
오랜만에 같이 길을 나섰다.구정맥을 끝내던 한북정맥까지는 같이 산줄기를 다녔으니 한 5년전까진 열심히 다녔는데
구정맥을 끝내고는 기맥,지맥한답시고 먼길다니면서 소홀해졌다.
예산터미널에서 광시가는시내버스가 08 :25. 9:30분에있으니 면허시험장까지 오는 시간을 감안하여
8시 반에 집에서 나와 면허시험장안 주차장에 파킹을하니 9시반이다.
사거리 버스정류장에 나와 20여분을 기다리니 광시행 버스가 온다.
응봉면 소재지들려 얕은 고개하나 넘으면 예산추모공원이니 10여분 남짓걸린다.
뒤로 350m쯤 올라간 고개위에서 우측의 세멘트도로를 따라 오른다.
면허시험장 사거리.
예산터미널에서 광시가는시내버스는 08 :25. 9:30분에 있다.여기는 20분후쯤에 지나간다.
팔봉산을 내려와선 좌측 면허시험장으로 나와 앞에 보이는한서 SS기 앞의 도로로 갈것이다.
노화리-평촌리를 잇는고개.
아래로 공원묘지앞의 도로표지판이 보이고 묘지가는 세멘트길을 따라 올라가면 덕수이씨 묘가 나온다.
노화리-평촌리를 잇는고개.
도로 건너편의 지난구간 하산길.도로양쪽위에 검표소가 있는데 무슨 검표소일까? 유원지도 아닌데...
주능선위 덕수이씨 묘에서 뒤 돌아 본 도로 건너편모습.
양반고장이라 그런지 큼직한묘지들이 많다.
x124m봉.좌측밑엔상수도 시설탱크인지 큰 탱크가있고 정점넘어엔 묵은 사과밭이 있다.
안동권씨 전한공파묘원인데 이봉 오름길전에 좌측으로 마을길이있어 그길로 들기쉽겠다.
직진해 올라서면 이묘지부턴 묘지길이 잠시 이어지고 복숭아밭이 나온다.
복숭아밭에서 본 팔봉산과 너머 안골모습.
산불초소로 오르기전에 뒤 돌아 본 124m과 안동권씨묘봉과 북숭아밭.
산불초소 오름길이 대단히 가파르고 낙엽이 쌓여있어 네발로 기어오른다.
좌측 능선쪽으로 돌아 오르면 좀 나을까 싶지만 마찬가지이니 직등해 올라서면 수렛길이 나온다.
수렛길은 조금나가서 Y라로 갈라져 좌측팔봉산쪽으로 올라가는데 우측길은 팔봉암쪽으로 가지 않나 생각된다.
팔봉산 우측아래의 후사리(後寺里).
팔봉산 자락에 전엔 큰 절이 있었는지 後寺,內寺,바깥뒷절등의 지명이 나온다.
팔봉산(八峰山.207.4m. 208m)
산불초소봉,전봉,정상봉,꺽임봉,207m삼각점봉등 5개정도의 봉우리가 제일 가운데있는 이봉이 제일높다.
혹자는 삼각점이있는 맨끝봉인 207m을 정상이라고도 할지모르지만
정상에 꼭 삼각점이있는 것은 아니고 삼각점과 정상은 별개의문제다.
국립지리원지도는 팔봉산과 삼각점봉을 엄연히 다르게 표기하고 있고 또 높이도 이곳이 제일높다.
별특징이 없고 큰 참나무 2그루 있고 앞에 꺽임봉과 2시방향으로 207봉이 건너다 보인다.
207m봉과 임도.
임도는 여기서 끝이나고 저앞의 207봉오른길 갈림지점부터 아래쪽은 세멘트포장이 돼있다.
후사리 예당저수지 갓길에서 운곡리 안골로 넘어가는 임도인데 공사중인 모양이다.
207m봉오름길과 삼각점(예산 313)
우측 아래이 묘지가 있고 내려서며바로 좌측으로 마을가는 길이있으나
직진하여 5분쯤간 리기다소나무숲에서 좌측으로 꺽어 내려가면 인동장씨무덤을 지난다.
록색팬스를 둘러친 큰 물탱크가 나오고 좌측아래로 회곡리 증실마을과 과수원들이 보인다.
두 번째로 나오는 하얀 물탱크를 만나는데 이 물탱크를 지나면서 갈길을 살펴봐야한다.
회곡리 증실마을과 과수원들.사과나무마다 물호스가 연결돼있다.
두 번째로 나오는 하얀 물탱크에서 보면 저 120m봉쪽이 지맥같고 저봉이지도상에표시된 x105봉 같아 보인다.
x105m는 주변보다 낮은 물탱크 바로앞에있는 소나무가 둘러쳐진 창녕조씨문중묘가있는곳이다.
서북으로 가다가 동북으로 꺽이는 지점이다.120m봉은 지맥이 아니다.
창녕조씨 문중묘앞에서 다시 좌측으로 들어서야한다.
묘지앞에서 사진 우측아래로 묘지길이 넓게 나있고 지맥길은 잡목에가려 있고 뚜렷한 능선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다.
창녕조씨 문중묘앞에서 뒤 돌아보면 좌측솔밭뒤로 하얀 물탱크가 보인다.
창녕조씨 문중묘에서 뒤 돌아 본 207m 삼각점봉.
창녕조씨 문중묘에서 잡목속으로 건너오면 왼쪽 과수원쪽에서 또다른 넓은 묘지길이 나오고
과수언의 파란물통에서 대전-당진고속도로 현장이 내려다 보인다.
2분정도 나오면 함종(咸從) 魚씨묘가 나온다.
魚씨 본관이 함종이라 함종땅이 어딘가 좀 생소한 지명이라찾아보니 평안남도 강서군이란다.
魚씨 본관은 함종(咸從) ·충주(忠州) ·경흥(慶興)의 3본이 전하지만, 대부분 함종어씨로 알려져 있다.
함종어씨의 시조 어화인(魚化仁)은 남송(南宋) 때 난을 피해 강릉(江陵)으로 왔다가 함종(평남 江西郡)에 정착 ·귀화하였다고 한다.
한편 충주어씨의 시조 어중익(魚重翼)은 본성이 지씨(池氏)였는데,
겨드랑 밑에 비늘 셋이 있어 고려 태조가 어씨로 사성(賜姓)했다는 전설이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충주지씨(忠州池氏)와 동족이성(同族異姓)이 되는 셈이다.
경흥어씨의 시조 어계복(魚繼福)은 명나라 상서시랑(尙書侍郞) 석규(石奎)의 손자로,
상란(喪亂)을 만나 함경도 경흥에 표착하여 어씨를 사성받았다고 한다.
공사중인 대전-당진고속도로
우측 파란건물이 새화신이고 하얀 큰건물이 예산운전면허시험장이다.
脈은 절개지를 건너 사과 과수원으로해서 면허시험장앞 도로를 따라 이어지고있다.
절개지를 좌측으로 내려가면 고속도로 굴다리가 나오고 굴다리를 지나면 파란집앞에서
세멘트도로가 과수원사이로 해서 면허시험장앞 도로인 5번군도로 이어진다.
공사중인 대전-당진고속도로
면허시험장앞 5번군도와 만나는 곳에서 뒤 돌아 본 지맥모습.
우측 나온길쪽의 전봇대엔 월곡리 →표지판이 걸려있다.
면허시험장
100여m앞이 21번국도를 건너는 면허시험장사거리이다.
면허시험장과 시험장에 들어오는 시내버스 시간표.
휴일엔 차가안들어오나 바로앞의 면허시험장 사거리에 나가면 예산이나 홍성으로 가는차가 자주있다.
21번국도를 건너는 면허시험장 사거리.
직진하여 한서SS기앞을 지난다.
장항선 철로.
이것은 장항선을 익산까지 연장운행하며 직선화한 새철로이고 구철로는 조금 더가면있는 신대교다.
임성교차로.신암,추사고택쪽으로 직진한다.
임성교차로 건너편모습이다.
예산운전학원을 지나면 나오는 충효각이다.
충효각옆으로 예당저수지에서 내려온 수로가 脈을 따라 흐르며 양쪽의 농경지물을 공급하고 있다.
양신초교앞을 지난다.
양쪽은 사과과수원이고 脈을 따라 수로가 같이가고있다.
금강정맥의 익산 미륵산을 넘어가며 함라면까지 이어지던 대형수로가 생각난다.
일제시대에 만든 수로인데 금강무을 끌어올려 김제,만경들을 적시는 수로인데
폭이 3m에 높이는 2m쯤되는 대형수로가 장장 10여 km를 금강정맥 마루금 능선위를 흐르고 있었다.
충효각분천3리,4리입구를 지나 내량리 정류장을 지난다.
오촌사거리.
계속 직진하여 갈 것이나 우측 오촌리에 있는 전총예산옹기집에들려 옹기도 사고
예산으로 나가서 점심을 먹고 다시 가던길을 이어갈 것이다.
전총예산옹기집(http://www.yesanonggi.co.kr/).
꽤 알려진집으로 전시실,판매실을 따로갇고 있을 정도다.
전통예산옹기는 4대에 걸쳐 150년 동안 전통옹기를 만들어온 기업으로
지난 96년에는 냉장고용 김칫독 옹기를 만들어 국무총리상을 받기도 했으며
황충길 대표는 지난 98년 대한민국 도자기 공예부문에서 국내 최초, 국내 유일의 옹기명장이됐다.
오산주유소앞 사거리.
현대오일마크 오산주유소뒤로 빨간지붕의 오산3리 마을회관이 있고
회관뒤로 용산 갈림봉이 보인다.좌측빨간지붕뒤론 94.2m봉인 오석산이 보인다.
오산3리 마을회관.
여기다 차를 파킹하고 회관뒷길로 들어서 오석산,용산,김정희유적지를 둘러보고 다시 여기로 돌아와서
구양교까지 도로를 따라 차로간다.
오산3리 마을회관뒤에있는 주유소(?).
도로에서 떨어져있어 일반주유소같지는않고 무슨 시설물인진 모르겠다.
앞 창고앞으론 좌측 큰 도로에서 우측 피직이마을로 들아근 세멘트도로가있고
그앞쪽엔 과수원 낡은 철조망이 있다.
지금은 수확철이 아니라 철조망을 밟고 넘어가 사과밭을 가로질러 숲으로 들어갔다.
사과밭뒤에서 뒤 돌아본 10번 송전탑과 폐주유소,마을회관,오산주유소.
산길에들어 공장우측의 개활지를건너 용산주능선에 오르면 넓은 산길이 좌우로 가고 있다.
우측으로가면 5번군도의 화암사,용산등산로입구가 나오고 좌측으로가면 오석산과 화암사로간다.
용산갈림봉인 첫봉.
돌을볼 수 없는 너른들반에 이런 큰 바위들이 많이 있는것이 예사롭지않다.
바위면엔 이런 암각글씨들이 보인다.
산갈림봉인 첫봉정상모습.
좌측엔 묘지가 하나있고 공장경계인지 철조망이 쳐져있고 좌측아래의 공장에서 암모니아 분료냄새가 독하게 올라온다.
화암사.
화암사(華岩寺)창건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추사(秋史)김정희(金正喜)선생의 증조부인 월성위(月城尉)김한신(金漢藎)이
영조(英祖)의 부마가 되었을때 별사전(別賜田)올 분급된 이곳 일대의 전토에 포함되어
추사 김정희선생의 일문에 세습화되었으며 1572년(영조 28년)에 월성위 김한신이 중건하였으나
그후 대웅전은 소실되고 요사만 현존하고있다.
추사 김정희선생은 이 화암사에서 불교를 심애하였고
선생께서 제주도 유배 7년째인 1846년(헌종12년)9월에 선생의 일문에서 다시 중건함에
선생께서는 적소(謫所)에서 문중에 일일이 서한을 보내어 중건사항을 지시하였단다.
화암사앞의 노거수.
추사 김정희선생의 일문의 원찰이라 절집같지 않은 분위기이고1572년(영조 28년)에 월성위 김한신이 중건하여 현존하는 요사채란다.
화암사 현판은 김정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의 글씨이고
<무량수각(无量壽閣)>, <시경루(詩境樓)> 등의 현판은 김정희의 친필이란다.
화암사 대웅전.대웅전뒤에 김정희선생필적 암각자가 있다.
대웅전에서 내려다본 요사채.
병풍암에 새겨진 김정희선생필적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암각자.
좌측끝엔 시경(詩境.좋은경치란 뜻이란다)이라쓴 岩刻字가 있다.
병풍암에 새겨진 김정희선생필적 시경(詩境.좋은경치란 뜻이란다).
청나라 옹방강으로부터 받아온 육유(陸游)의 글이란다.
화암사 뒷산의 이름이 오석산(烏石山)인데 까마귀 오(烏) 자를 집어넣은 이유는 돌을 깨보면 바위 속이 검기 때문이고,
그 바위가 잘 드러난 곳이 바로 이 병풍암이다.
오석산의 조산인 팔봉산에서 20리를 내려온 구절비룡의 산줄기 가운데서
유일하게 바위가 돌출되어 암기(岩氣)가 강하게 발산되는 곳은 이곳 오석산의 화암사 대웅전 뒤편의 병풍암인 것이다.
김정희선생필적 암각문.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의 천축(天竺)은 서역의 인도를 말하고 고선생(古先生)은 부처를 유교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은 부처가 사는집이라는 뜻으로 절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시경(詩境)외에 소봉래추사제(小蓬萊秋史題.화암사가 위치한 오석산(烏石山)의 경치가 작은 금강산처럼 빼어남을 의미)
등의 암각자가 있단다.
추사는 유배지에서 만난 선승들과의 교류를 통해 선불교에도 조예를 쌓았으며,특히 백파(白坡)와 초의(草衣)양 대사와의 관계가 깊었으며,
불교에 대한 관심도 많아 베이징[北京]으로부터의 귀국길에는 불경 400여 권과 불상 등을 가져와서 마곡사(麻谷寺)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70세에는 과천 관악산 기슭에 있는 선고묘(先考墓) 옆에 가옥을 지어 수도에 힘쓰고
이듬해에 광주(廣州) 봉은사(奉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다음 귀가하여 세상을 떴다.
병풍암뒤의 다른 암각자들.
오석산(烏石山. 94.2m)정상모습.저 앞의 제일높은 바위위에 삼각점이 잇다.
국립지리원 지도는 이곳을 94.2m,다음봉을 용산(龍山)으로 적고 있고 유적지의 안내문은 이곳을 오석산 다음봉을 용산으로 적고 잇다.
주민들은 이산군을 통털어서 용산이라 부르는지 이곳을 용산이라 부르고 있다.
오석산(烏石山. 94.2m)정상의 삼각점.
이등삼각점이다. 예산 21.1985재설.
오석산(烏石山. 94.2m)정상을 넘어서며 본 구양교로가는 산줄기.
앞에 보이는 도로가 만나는 능선위가 농업기술쎈터가있는 용궁사거리다.
오석산(烏石山. 94.2m)정상을 넘어서며 본 김정희유적지.
사진 좌측끝이 백송공원과 예산백송.포크레인앞이 화순옹주홍문 [和順翁主紅門]과 월성위김한신묘 [月城尉金漢藎墓]
주차장위의 소나무숲뒤에 추사고택과 추사묘가있고 맨우측에 추사기념관 건물이 보인다.
용산(龍山. 약 70m)정상모습.
세봉중 제일낮고(첫봉80m.가운데 오석산94.2m용산70m)볼품도 제일없는 소나무숲이다.
백송공원 [白松公園).
이 세한도를 좀더 자세히 볼걸그랬다.
백송공원 [白松公園).많은 백송들이 자라고 있다.
백송(白松lacebark pine)은 중국 북경근처가 원산지로 묘지 주변에 많이 심는 나무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번식이 어려워 잘 자라지 않는 나무로 알려져 있고 껍질이 나이가 들면 희게변하고
잎은 3개로 보통 솔잎이 2개인것과는 구별이 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던 백송(白松)은 총 12개였는데
천연기념물 10위안에드는것이 무려 6개(4~9호)였는데 지금은 5개만 남아있고 7개는 해제됐다.
남아있는 백송 5개는
8호 서울재동의 백송(헌법재판소안.박지원의 손자인 환재 桓齋박규수(珪壽)1807-1876선생의집터)
9호 수송동백송(조계사 대웅전앞.)
60호 송포백송( 일산 덕이동松浦)
106호 예산용궁리백송.(3가지중 2가지는 잘라냈고 고사일보전으로 생육불량)
253호 이천 백사면 신대리(18세기말엽 조선조때에 전라감사를 지낸 민정식(閔廷植)이 조부의 묘소에 심은것).
해제된 7개는
4호. 통의동백송 1993.03,24 고사.
5호 내자동1965.10.12 보존가치상실.
6호 원효로의백송 2003.7.4 고사.
7호 회현동 1973.8.14.보존가치상실.
16호 밀양의백송 1962.12.3 보존가치상실.
81호. 개성리의백송 1962.12.3. 미수복(북한).
예산 용궁리 백송 [禮山龍宮里栢松]
천연기념물 제106호. 1962년 12월 3일 지정.
이 나무는 1809년(순조 9) 10월에 이 마을에 살고 있던 완당(阮堂) 김정희가
부친 이조판서 김노경(金魯敬)이 청(淸)나라 연경으로 갈 때 수행하여 갔다올때 백송씨를가지고 와서
고조부 흥경(興慶)의 묘 옆에 심었던 것이라 한다.
지상 50cm에서 갈라진 세 줄기 중 서쪽과 중앙의 줄기는 부러져 없어지고, 동쪽의 줄기만 남아 있다.
나무의 나이가 200년이 넘는 고목으로 나무의 형세가 매우 약한 편이다.
추사의 서울 집인 통의동 월성위궁에도 백송(천연기념물 4호)이 있었으나,
1990년 7월 강풍을 동반한 벼락을 맞아 넘어져 그 수명을 다하였다.
지상 50cm에서 갈라진 세 줄기 중 서쪽과 중앙의 줄기는 부러져 없어지고, 동쪽의 줄기만 남아 있다.
예산 용궁리 백송 [禮山龍宮里栢松] 과 추사의 고조부인 김흥경 [金興慶)의묘.
이묘터가 명당자리란다.김흥경은 영의정을 지내고기로소(耆老所)에들고봉조하(奉朝賀)가 된사람이다.
용이 삽교천 용궁에 입수하는 형국이라 마을이름도 용궁리이고
삽교천방조제를 막기전 옛날엔 물이 여기까지 들어왔단다.
팔봉산부터 꾸불꾸불 구절비룡의 산줄기가 20여리를 흘러와서 유일하게 바위가 돌출한 오석산(용산)이 용머리란다.
김흥경 [金興慶, 1677~1750]은?
본관 경주. 자 자유(子有) ·숙기(叔起). 호 급류정(急流亭). 시호 정헌(靖獻). 서산 출생. 1699년(숙종 25)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검열(檢閱) ·주서(注書) ·대사간 등을 지냈다.
경종 때 한성부우윤(右尹)으로,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도승지가 되고, 이듬해 우참찬(右參贊)으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727년(영조 3) 정미환국으로 한성부판윤에서 쫓겨났다가, 이듬해 우참찬으로 복직되었다.
탕평책에 반대하여 다시 파직, 1730년 좌참찬에 복직되었다.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 ·영의정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조선시대에 나이가 많은 문신(文臣)을 예우(禮遇)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 )에 들어갔다.
중추부판사로 벼슬에서 물러나고, 봉조하(奉朝賀.종신토록 신분에 맞는 녹봉(祿俸)을 받으나
실무는 보지 않고 다만 국가의 의식이 있을 때에만 조복(朝服)을 입고 참여하였다. )가 되었다.
화순옹주홍문 [和順翁主紅門]
. 영조(英祖)의 딸이자 김정희의 증조모인 화순옹주(和順翁主)의 정절을 기려 정조(正祖)가 하사하였다.
영의정 김흥경의 아들 김한신(金漢藎)은 1720년(숙종 46) 13세 때 영조의 둘째딸 화순옹주와 결혼하여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지고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제용감제조(濟用監提調)를 지냈으며, 1758년 사도세자와의 말다툼 끝에 벼루를 맞고 세상을 떠났다.
화순옹주는 이에 격분,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열흘 동안 식음을 전폐한 뒤 남편의 뒤를 따라 숨을 거두었다.
영조는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면서도 부왕의 뜻을 저버린 데 대한 아쉬움 때문에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고 후에 정조가 하사했다.
옹주는 조선왕조의 왕실에서 나온 유일한 열녀라고 한다. 가까운 곳에 김한신과 화순옹주의 합장묘가 있다.
월성위김한신묘 [月城尉金漢藎墓]
. 추사 김정희(金正喜:1786∼1856)의 증조부인 김한신과 화순옹주(和順翁主)의 합장묘이다.
김한신은 1720년(숙종 46) 영의정 김흥경(金興慶:1677∼1750)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유보(幼輔), 호는 정미와(精美窩), 시호는 정효공(貞孝公)이다.
13세 때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혼인하여 월성위(月城尉)에 봉해졌다. 그뒤 오위도총부 도총관, 제용감제조 등을 지냈다.
글씨를 잘 쓰고 시문에 능하였다.특히 팔분체(八分體)의 글씨와 전각(篆刻)에 뛰어났다.
김한신이 38세인1758년 사도세자와의 말다툼 끝에 벼루를 맞고 세상을 떠났다.
화순옹주는 이에 격분,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열흘 동안 식음을 전폐한 뒤 남편의 뒤를 따라 숨을 거두었다.
월성위김한신묘 [月城尉金漢藎墓]
영조의 친필이 담겨있다.
월성위김한신묘 [月城尉金漢藎墓] 묘,화순옹주홍문 [和順翁主紅門],백송공원.
추사고택(秋史古宅).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799-2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이며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옛 집이다.
안채와 사랑채 2동 짜리 건물로 조선 영조의 사위이자 김정희의 증조할아버지인 김한신(金漢藎 1720~1758)이 지은
18세기 중엽의 건축물로서 당시의 전형적인 상류주택이다.
건물 전체가 동서로 길게 배치되어 있는데, 안채는 서쪽에 있고 사랑채는 안채보다 낮은 동쪽에 따로 있다.
사랑채는 남자주인이 머물면서 손님을 맞이하던 생활공간인데, ㄱ자형으로 남향하고 있다.
각방의 앞면에는 툇마루가 있어 통로로 이용하였다. 사랑채 댓돌 앞에는 석년(石年)이라 각자된 석주가 있다.
이 석주는 그림자를 이용하여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로 추사가 직접 제작하였다.
<석년> 글씨는 추사의 서자(庶子)인 김상우(金商佑 1817~1884)가 쓴 것이다.
안채는 가운데의 안마당을 중심으로 사방이 막힌 ㅁ자형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살림살이가 이루어지던 안채는 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지 않도록 판벽을 설치하여 막아놓았다.
대청은 다른 고택들과는 달리 동쪽을 향하였고 안방과 그 부속공간들은 북쪽을 차지하고 있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며, 지형의 높낮이가 생긴 곳에서는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층을 지게 처리하였다.
안채 뒤편 언덕에는 추사 김정희의 영정을 모신 추사영실(秋史影室)이 있으며,
<추사영실> 현판은 김정희와 평생 막역한 사이였던 권돈인(權敦仁 1793~1859)의 작품이다.
고택의 오른쪽 담장에 달린 쪽문을 나서면 대대로 마셔온 석정(石井)이 있고,
거기서 100m쯤 가면 김정희묘(문화재자료 188)가 있다. 방마다 모사품이기는 하나 선생의 유묵이 걸려 있다.
후손이 세거(世居)해 오다가 1968년 타인에게 매도된 것을 충청남도에서 1976년 문화재로 지정하고 동년 4월 25일 매수하였다.
집 안에 있는 김정희의 영정과 도장, 염주, 붓과 벼루 등은 일괄 보물 제547호로 지정되어 보관되고 있으며,
고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그가 어려서 공부했던 절 화암사가 있다.
현재의 추사고택은 1977년 조선 양반집의 한 범본으로 서울의 대목수인 인간문화재 이광규 옹이 원래 53칸의 집을 반으로 줄여 복원한 것이다.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자는 원춘. 호는 완당, 추사 등 수백가지에 이른다.
조선 후기인 1786년 충청남도 예산에서 병조 판서 김노경의 아들로 태어나 스물네살 되던 해에
청나라 연경(燕京)에 가서 당시 이름난 학자인 완원, 옹방강 등에게 금석학과 실학을 배우고 돌아왔다.
박제가의 제자이기도 한 그는 한때 규장각 시교·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병조참판에까지 이르렀으나,
말년에는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에서 12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유배지에서 만난 선승들과의 교류를 통해 선불교에도 조예를 쌓았으며,특히 백파(白坡)와 초의(草衣)양 대사와의 관계가 깊었으며,
학문에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켰으며, 특히 예서·행서에 새 경지를 이룩하였다.
그는 함흥 황초령(黃草嶺)에 있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巡狩碑)를 고석(考釋)하고,
1816년에는 북한산 비봉에 있는 석비가 조선 건국시 무학대사가 세운 것이 아니라 진흥왕 순수비이며, ‘진흥’이란 칭호도 왕의 생전에 사용한 것임을 밝혔다.
또한 《실사구시설》을 저술하여 근거 없는 지식이나 선입견으로 학문을 하여서는 안 됨을 주장하였으며,
종교에 대한 관심도 많아 베이징[北京]으로부터의 귀국길에는 불경 400여 권과 불상 등을 가져와서 마곡사(麻谷寺)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70세에는 과천 관악산 기슭에 있는 선고묘(先考墓) 옆에 가옥을 지어 수도에 힘쓰고
이듬해에 광주(廣州) 봉은사(奉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다음 귀가하여 세상을 떴다.
문집에 《완당집(阮堂集)》, 저서에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 《완당척독(阮堂尺牘)》 등이 있고, 작품에 《묵죽도(墨竹圖)》 《묵란도(墨蘭圖)》 등이 있다.
문인화(文人畵.전문적인 화가가 아닌 사대부층 사람들이 여기(餘技)로 그린 그림. )는 당대 최고의 성취로 평가받아
그림 가운데 '세한도(歲寒圖)'는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세한도'는 김정희가 59세 때인 1844년 제주도 유배 당시
지위와 권력을 잃어버렸는데도 사제간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그를 찾아온 제자인
역관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여 그려준 것이다.
'날이 차가워진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는 <논어>의 한 구절을 빌어 '세한도(歲寒圖)'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이다.
추사고택(秋史古宅) 사랑채.
각 기둥마다 주렴이 걸려있고 벽에는 많은 현판들이 걸려있다.
사랑채 댓돌 앞에는 석년(石年)이라 각자된 석주가 있다.
이 석주는 그림자를 이용하여 시간을 측정하는 해시계로 추사가 직접 제작하였다.
<석년> 글씨는 추사의 서자(庶子)인 김상우(金商佑 1817~1884)가 쓴 것이다.
추사는15세때 동갑인 한산 이씨(韓山李氏, 15세)와 혼인하였으나 5년후사별하고
3년후인 23세때에 예안 이씨(禮安李氏)를 재취(再娶)로 맞아들였으나 후사가 없었다.
제주도로 유배간 다음해인 56세때에 12촌되는 김태희의 아들 김상무(金商懋)를 양지로 들였고
다음해인 57세때 유배중에부인은 죽었다.김상우는 그의 서자다.
완당세한도 [阮堂歲寒圖] 국보 제180호.가로 108.3㎝, 세로 23.5㎝
〈세한도〉는 김정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그가 59세 때인 1844년 윤상도(尹尙道)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 유배 당시
지위와 권력을 잃어버렸는데도 사제간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그를 찾아온 제자인
역관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여 그려준 것이다.
한 채의 집을 중심으로 좌우에 소나무와 잣나무가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주위를 텅 빈 여백으로 처리하여 극도의 절제와 간략함을 보여주고 있다.
오른쪽 위에는 세한도라는 제목과 함께 ‘우선시상’, ‘완당’이라 적고 도장을 찍어 놓았다.
작은 글씨로 쓴 ‘우선시상(藕船是賞, 藕船은 이상적의 호)’이라는 관지가 이 그림이 이상적을 위해 그려진 것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림 끝에는 〈세한도〉를 그리게 된 연유를 담은 발문(跋文)이 붙어 있고, 그 뒤를 이어 이듬해 이 그림을 가지고 북경에 가서
그곳의 명사 16명에게 보이고 받은 찬시들이 길게 곁들여 있다.
그리고 뒷날 이 그림을 본 추사의 문하생 김석준의 찬(贊)과 오세창·정인보·이시영 등의 시문(詩文) 등이 실려 있다.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也( 추운 겨울이 되면 다른 모든 식물들은 낙엽지는데 오직 소나무와 잣나무만은 상록수의 푸름을 잃지 않으니
날씨가 차가워진 후에야 송백의 푸름을 안다)는《논어》 자한(子罕)편의 한 구절을 빌어 '세한도(歲寒圖)'라는 말을 쓰게 된 것이다.
가로로 긴 지면에 가로놓인 초가와 지조의 상징인 소나무와 잣나무를 매우 간략하게 그린 작품으로 그가 지향하는 문인화의 세계를 잘 보여준다.
갈필로 형태의 요점만을 간추린 듯 그려내어 한 치의 더함도 덜함도 용서치 않는 까슬까슬한 선비의 정신이 필선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 그림에는 김정희 자신이 추사체로 쓴 발문이 적혀 있어 그림의 격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세한도는 이상적의 제자였던 김병선이 소장하다 일제 강점기에 경성대학 교수이며 추사 김정희의 연구자였던 후지즈카를 따라 도쿄로 건너가게 됐다.
당시 고서화 수장가인 손재형이 이를 안타깝게 여겨 일본으로 건너가 매달린 끝에 결국 다시 찾아왔다.
(藤塚鄰.후지츠카 치카시.1879~1948.경성대학교수)가 수집한 많은추사와 관련된 많은자료들은
아들 후지츠카 아키나오(藤塚明直,1912~2006)가 2006년 과천시에 기증하였다.http://www.chusa.or.kr/
세한도(歲寒圖)와 화법서세(畵法書勢)
화법유장강만리(畵法有長江萬里). 화법(畵法)에는 장강(長江) 만리(萬里)가 들어 있고,
서세여고송일지(書勢如孤松一枝). 서세(書勢)는 외로운 소나무 한 가지와 같다.
추사고택(秋史古宅)사랑채의 추사글씨.勝蓮老人은 김정희의 호다.
추사고택(秋史古宅)사랑채의 추사글씨.
추사고택(秋史古宅)사랑채의 가리개.
추사고택(秋史古宅)사랑채뒤.
추사고택(秋史古宅)안채.
안채는 가운데의 안마당을 중심으로 사방이 막힌 ㅁ자형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살림살이가 이루어지던 안채는 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지 않도록 판벽을 설치하여 막아놓았다.
대청은 다른 고택들과는 달리 동쪽을 향하였고 안방과 그 부속공간들은 북쪽을 차지하고 있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며,
지형의 높낮이가 생긴 곳에서는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층을 지게 처리하였다.
추사고택(秋史古宅)안채뒤.
추사고택(秋史古宅)안채뒤에 추사의 영정을 모신 추사영실.
추사영실.
김정희는 1856년 음력 10월10일에 세상을 떠났다.
6개월뒤인 1857년4월3일에 부친김노경과함게사면,복권되었다.
이에 돈독한벗인 권돈인은 1857년 초여름에 이한철로 하여금 관복을입은 모습의 초상화를 그리게하여
예산 김정희고택뒤편에세운 재각에 봉안하고 추사영실(秋史影室)을 손수썼다.
이초상화는 19세기초상화를 대표할만한 명품으로 봉(鳳)의 눈에 미간을 넓게표현해 후덕한 인품을 느끼게한다.
추사 김정희선생 묘소(秋史 金正喜先生 墓所)
김정희 묘소는 추사고택에서 우측으로 200여m 떨어진 곳에 조성되었다.
묘역의 석물은 추사 사후 82년인 1937년 후손들에 의하여 만들어졌으며,
상석, 향로석, 망주석 한 쌍과 함께 천막을 칠 때 고정대 역할을 하는 차일석 한 쌍 등이 있다.
묘의 바로 오른쪽 앞에는 방부개석(方趺蓋石 장방형의 받침돌과 지붕모양의 덮개돌)형의 묘표가 세워져 있으며,
전면(前面)에는 "완당선생경주김공휘정희묘(阮堂先生慶州金公諱正喜墓)"라고 각자되어 있다.
비문은 추사의 후손인 김승렬(金承烈)이 짓고 썼다.
묘역앞의 추사기념관.
추사기념관을 나서며 본 추사고택과 추사묘지.
5번군도의 화암사와 용산 등산로입구 안내판.
다시 돌아온 오산3리 마을회관.
여기서 구양교까진 5km정도되며 지맥위로 2차선도로가 구양교까지 이어진다.
농업기술쎈터가있는 용궁사거리.
김정희유적지에서 도로따라 나오면 이길로 나온다.
신택교차로.에산-당진가는 4차선도로가 새로뚫렸다.직진해 나가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좀더가면 삽교천에 닿는다.
봉수지맥의 종점인 구양교다.삽교천 건너는 당진군 합덕읍이다.
구양교(九陽橋).
구양교(九陽橋) 좌측의 삽교천모습.1km위에서 석우천이 합수된다.
구양교(九陽橋)건너의 구양도마을.
삽교천은 우측 1.3km에서 무한천을 합류시켜 북쪽 아산만으로 들어간다.
다리앞에있는 구양도 주유소뒤로 지나온 봉수지맥을 뒤돌아보며 봉수지맥을 마친다.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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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했심더, 제가 사는 근교의 산줄기를 종주하려고 산행기를 기다렸는데 막상 보니 어떻게 갈까 걱정이 앞서는게 사실 이네요, 그래도 부딫혀 보면 방법이 있으리라 봅니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