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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步 第7詩集
겨울,하늘소의 춤
머리말
하늘을 나는 말을 천마(天馬)라고 하던가?
하늘소― 하늘을 달리는 소면 천우(天牛)가 아닌가. 참 눈부시게
화려한 이름이다. 썩은 나무 등걸에 붙어 사는 한 마리 보잘것
없는 작은 집게 벌레에게 누가 그처럼 황홀한 이름을 매달았는가?
아니 옛날에는 천상(天上)의 초원을 누비며 달리던 용맹스런 천우
(天牛)들이었는데 마녀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지상(地上)으로
추락해 내렸는지도 모른다.
하늘소를 생각하면서 나는 때때로 꿈을 꾼다.
잃어버린 날개―그 은빛 날개를 파닥이면서 하늘을 치솟아 날아
오르는 꿈을. . . .이 겨울 벌판에서.
1993. 3. 임보
선암시(仙巖詩) / 임보
四月 조계산(曹溪山)
선암사에 갔더니
진달래 꽃불 속에
스님들 다 타 죽고
처마 끝엔 바람 염불
개울에선 물 염불
승선교(昇仙橋)다리 밑을
도는 피라미.
동백(冬柏) / 임보
오월 이른 아침 백화암(白華庵) 골짝
피는 동백 지는 동백 바람 든 동백
떼 동백이 엉켜 흐드러져 있는데
고 중에도 유독 고운 왕동백 한 놈
백년 묵은 큰 가지에 매달려 있데
가던 걸음 멈추고 들여다보니
얼굴 붉히며 돌아서 가는데
꽃이 아니라 사미니(沙彌尼)네 그려.
* 백화암 : 해남 대홍사 밑에 있는 암자
* 사미니 : 불도를 닦는 스무 살 이하의 어린 여승
선운사(禪雲寺) 동백 / 임보
이른봄 봄바람에 바람이 들어
선운사 동백밭에 동백 보러 갔더니
동백도 스님도 다 문 걸어 닫고
감나무 벗은 가지 외진 절 마당
동박새만 떼로 몰려 지저귀는데
빈 하늘에 온종일 열린 대웅전
나무부처 몇 놈만 떨고 앉았네.
영산홍(映山紅) / 임보
동학사(東鶴寺) 아랫절
길상암(吉祥菴) 뜰엔
흐드러진 영산홍
온 산천 태우는데
고놈보다 더 고운
사미니(沙彌尼) 한 년
절문 뒤에 숨어서
웃고 섰다가
달려나온 돌부처에
귀 잽혀 가네.
석불(石佛) / 임보
운학동(雲鶴洞) 깊은 골짝 빈 마을엔
붉게 익은 감들만 흐드러졌는데
천만(千萬) 개미떼들 그 밑에 모여
태평성대(太平聖代) 누리며 북적이는데
코 귀가 반쯤 잘린 얽배기 석불
불따귀 머리통에 홍시 맞고도
입이 찢어지도록 웃고만 있네.
바위 / 임보
속리산 골짝에 들어갔더니
천년 묵은 소나무 깊은 숲속에
큰 바위 한놈 웅크리고 있데
아무도 보는 이 없는 그 산 속에서
천만 년 숨어서 그렇게 있데
샘김새를 보니 거북도 같고
독수리 등짝 같기도 한 그놈을
끌어다 세상에 내놓으려 해도
아무런 방도가 없데
꼼짝달싹도 하지 않데.
소쇄원(瀟灑園) / 임보
대수풀 어우러진 푸른 그늘 속
옛 선비 숨어살던 소쇄원 터
대봉대(待鳳臺),광풍각(光風閣)에 흐르는 석계(石溪)
봉황을 기다리던 주인은 없고
무너진 담장 아래 바람만 가득
석류꽃만 핏빛으로 피었습니다
멧새들만 목이 타게 지저귑니다.
* 소쇄원
전남 담양군 남면 지석 마을에 있는 조선조 양산보(梁山甫)의
별당 정원. 대봉대, 광풍각 등은 정원 안에 있는 누각들.
다산(茶山) 초당 / 임보 전라도 강진 귤동(橘洞) 마을 뒷산에는 몇 백 년 전부터 셋이서 등을 맞대고 곧기를 겨루고 있었는데 그 중 두 분 ― 삼나무와 왕대님들은 여지껏 건장한 팔뚝과 장딴지를 걷어붙이고 그렇게 겨루기를 끝내지 않고 있는데 한 분은 언제 자리를 떠 어디로 갔는지 그가 앉았던 빈 자리엔 목민심서(牧民心書) 몇 권만이 나무들의 짙은 그늘 아래 묻혀 있을 뿐이다.
삼탄역장(三灘驛長) / 임보 산이 산들을 업고 겹겹이 누운 깊은 산골 삼탄역 빈 대합실 다람쥐 한 놈 기웃거리고 있다 역 앞은 푸른 계곡 여울 소리만이 가득할 뿐 가끔 석탄을 실은 화물열차가 거대한 공룡의 유령처럼 산허리를 뚫고 지나갈 뿐 이 산골에 내리는 사람은 없어 역장은 늘 역사에 없다 열대여섯 되는 동자놈 하나 여울에 그물을 던져 제 팔목만한 치리를 끌어올리기에 그가 어디 있는가고 물었더니 감자밭에 없으면 고사리를 꺾으러 산에 갔으리라 한다 여울엔 푸른 오동꽃이 떨어져 별처럼 반짝이고 있다. * 치리 : 잉어과의 민물고기
소나기 / 임보
버텅골 범바위에 비 몰아오면
용소골 용소에는 용이 두 마리
구름 타고 오르느라 으르렁대고
달래강 너덜겅 외발 도깨비
휘파람 횃불 들고 장대 춤추다
청과부 모시 적삼 젖은 젖가슴
천둥 번개 빗속에 쓰러진 갈대
보릿고개 / 임보
미친 개는 혀를 드리우고
검은 들판을 종일 헤매고
문둥이는 담이 무너진 마을을 돌며
빈 깡통만 두드리는
눈 아픈 3월
손이 튼 아이들은
일찍 풀린 양지밭에 주저앉아
대꼬챙이로 띠뿌리를 뽑아 씹고
볼이 부은 에미는
물오른 소나무 껍질을 벗기며
가마솥에 맹물만 가득 끓이고 있네.
고추장에 꽁보리밥 / 임보
보리밥 집을 찾아가 보리밥을 먹네
된장찌개에 고추장 열무김치에 상추절이
비벼서 삼키는 맛 열 번 죽어도 모를 맛이네
한참 삼키다 보면 초가집 토담 너머
도리깨 꼭지도 보이고 타작 마당도 보이고
앞소리 뒷소리 어기야 데기야
멕이며 받는 소리 구성지게도 들려 오네
그늘 밑에 멍석 펴고 둘러앉던 밥상머리
할아버지 이밥 그릇 침 삼키며 흘겨보다
내 보리밥 뜨다 보면 속 깊숙이 새알처럼
어머님이 감춰 담은 하얀 쌀밥 둬 숟갈
식구들 부끄러워 몰래몰래 파먹던 땐
그렇게 깔끄러워 안 씹히던 꽁보리밥이
오늘은 어인 일로 이리도 정겨운가
가신 님 잃은 고향이 서려 돋는 때문인가.
달밤 / 임보
목화밭 청무우 시린 다복솔
옥양목 달에 젖은 부신 저고리
시오리 가리마길 잠든 산마을
시루봉 머리 위에 걸린 달무리.
죄의 노래 / 임보
옛 사람 흔한 말들
다 그렇거니 여겼더니
어머님이 누구신가
가신 뒤사 이제 뵈네
청맹과니 이 눈 뽑아
백주대로에 걸 일이로세
죄인이 무엇인가
입엣말로만 생각더니
가신 뒤 생각하니
내 했던 일 다 죄로세
그 죄를 벌할 길 없으니
어이 장차 뵈올꼬.
* 옛사람 흔한 말들 : '어버이 살아신 제 섬기길란 다 하여라'
등잔 / 임보
등잔은 내 가족들이 살던 따스한 동굴이다.
그 속엔 동백 기름의 젊은 어머니
지금도 물레를 잣아 무명실을 뽑아 내고,
구부정히 앉아 놋쇠 그릇을 닦고 있는 할머니
나를 보고 빙긋이 웃고 있다.
할아버지 긴 장죽에선 아직도 담배 타는 매운 냄새……
그리고 저건 뭔가?
동짓달 늦은 밤
고모가 내온 동치미 사발인가 보다.
등잔은 내 유년의 꿈들이 가득 담긴 작은 항아리다.
복대동시(福臺洞詩) 1 / 임보
산다는 것이 무엇이길래
우리 식구는 딸 둘 아들 둘 여섯인데
큰 놈은 양구(楊口) 일선에 군인 나가 있고
둘째년, 막내놈은
학교다 아르바이트다 왔다갔다 떠돌아다니고
큰 딸년은 회사 나가 야근까지 하고
훈장 노릇 하느라 애비 또한
천리 타향 청주(淸州) 복대동에 떠나와 있고
우이동 집엔 온종일 에미 혼자
요한복음만 뒤적이고 있네
산다는 것이 무엇이길래
사랑하는 혈족들 서로 떨어져
낯선 땅 외진 곳에서들 그리 헤매나.
복대동시(福臺洞詩) 2 / 임보
철새들은 철을 따라
자리를 바꾸는데
나는 주마다 천리를 날아다닌
바쁜 주새
火
水
木
金은
청주 복대동 자취방에서
학교 왔다갔다 그렇게 빈둥대다가
금요일 오후 4교시 끝나면
차 달려 서울로 날아오네
土, 日, 月은
우이동 내 새끼들 우굴대는 둥지에서
엎치락뒤치락 그러다가
월요일 오후면
아내가 싸 준 김치통 쌀통 메고
다시 청주로 미끄러져 가네
서울서 청주까지는 2시간 반
청주서 서울까지는 2시간
왜 그렇게 시간이 다르냐고
아내가 물으면
청주 길엔 재가 더 많다고
말 둘러대네.
복대동시(福臺洞詩) 4 / 임보
복대동 1733번지
날라리벌집 같은 다세대 주택 아래층엔
다섯 가구가 세들어 사는데
1호방엔 낚시 바늘처럼 등이 굽은 80 노파가
종일 화투패로 신수나 떠보며 혼자 살고 있는데
2호방엔 아가씨가 사는 모양인데
이사온 지 몇 개월에 아직 얼굴도 모르는 것은
우리들의 출퇴근 시간이 서로 다르기 때문인데
3호방엔 젊은 남녀가 살고 있는데
남자는 새벽 일찍 트럭을 몰고 나가고
여자도 이른 아침부터 공장으로 떠나서
이들도 아직 제대로 본 적이 없는데
4호방은 그랜저 세단이 하나 사는데
차만 문밖에서 늘 지키고 있고
사람들은 통 볼 수가 없는데
빨랫줄에 빨간 빨래들이 펄럭인 걸 보면
젊은 여자도 아마 함께 끼여 사는가 본데
5호방엔 50 넘은 사내가 혼자 살고 있는데
홀애비 같기도 하고 유부남 같기도 한
목석같이 멋없는 놈이 자주 방도 비우고 지내는데
무엇하는 놈인지 통 할 수가 없다고
옆집의 여반장은 날 놓고 수군대는 모양인데
내가 터놓고 지내는 사람은 오직 1호방 노파
청소차가 올 때마다 내 방 쓰레기 날라다 주고
된장국 끓이면 놋대접에 퍼 오기도 하는데
그 노파에게 가끔 애기 손님이 찾아오는데
아파트에 사는 손자라고 하는데
2호방에도 더러 손님이 오는 모양인데
자정이 넘어 찾아온 손님들인데
다음날 아침이면 문간 밖에
빈 술병들이 그리도 많이 쌓인 걸 보면
고 여자도 아마 꽤 술꾼인가 본데
3호방엔 자주 단체 손님들이 밀려와
왁자지껄 고스톱을 치는데
밤을 새우며 법석을 떠는 바람에
잠들을 설치기도 하는데
4호방엔 손님도 없는데
1호방 노파가 쑥덕인 걸 보면
우렁각시가 사는 것도 같고
배뱅이 삼촌이 사는 것도 같은데
위층의 집주인은 아직 이사올 기미도 없는데
셋방살이 객들만 모여 서로 눈치보며 살아가는데
복대동시(福臺洞詩) 5 / 임보
술은
청주(淸州)의 백학(白鶴) 소주인데
안주는
아내가 보낸
서울 우이동산(牛耳洞産)
백학(白鶴)에
우이동(牛耳洞) 안주 씹다 보면
어느덧 자정
팔봉산(八峰山)이
달빛에 눌려
거꾸러져 있다.
복대동시(福臺洞詩) 7 / 임보
-열쇠타령
내게도 열쇠가 꾸러미로 있다
포도마냥 주렁주렁 매달린 열쇠
신주보다 소중히 달고 다닌다
싸구려 로얄 차 열쇠에서부터
대문, 현관, 방, 장 열쇠에다
사무실 방문, 캐비닛, 서랍 열쇠
대문 열고 현관 열고 방 열어 봐야
단양(丹陽) 수석 둬 점에 옥천(沃川) 매화 한 놈
값나갈 물건들은 아무것도 없지만
캐비닛, 서랍 속 다 훑어봐도
원고지에 볼펜 자루 청심환 하나
도둑 와서 탐낼 건 하나도 없지만
나도 남들처럼 채웠다 열었다
무엇이나 가진 듯이 짤랑거리며
이 몸뚱이 몇 군데 얽어 놓고 다닌다.
복대동시(福臺洞詩) 9 / 임보
-맥문동(麥門冬)
맥문동(麥門冬)
보리, 문, 겨울
겨울 문 보리?
추운 겨울 사립문 밖 푸른 보리밭?
아니
겨울은 보리가 거쳐간 문?
보리와 겨울이 나란히 지나간 문?
보리와 겨울 사이에 있는 문?
지난 5월 스승의 날
어느 놈이 놓고 간 작은 화분에
꽂혀 있는 푯말 -<麥門冬>
별로 예쁠 것도 없는
푸르기만 한 곧은 잎들이
가늘게 벋어 있다
내 방에 살아 있는 놈이란
그놈과 나 단둘뿐
문을 열면
외롭게 혼자서 놀고 있던 그놈이
난(蘭)의 흉내를 내며 나를 반긴다
누가 붙여 주었을까
그 이름
알쏭달쏭
麥門冬.
복대동시(福臺洞詩) 10 / 임보
-설렁탕집에서
청주(淸州) 우암동(牛岩洞)에 가면
사람들이 벌떼처럼 모여든
맛이 괜찮은 싸구려 설렁탕 집이 있는데
어느 날 문산(文山)과 함께 해장하러 갔다가
배가 곯도록 기다려야만 했다
집은 좁고 손님들은 많아서
어떤 자는 20분 기다리다 얻어먹고
어떤 자는 30분 기다리다 얻어먹고
어떤 자는 40분 기다리다 얻어먹고
그런데 어떤 자는 5분만 기다리고도
얻어먹고 가기도 했다
아우성을 친 놈
부엌엘 들랑거린 놈
종업원에게 아양을 떤 놈
제각기 실력들을 발휘하면서
어서들 얻어먹으려 야단들이었다
무량태수처럼 가만히 앉아서
갖다 주기만 기다리던 우리들은
무려 60분이 더 지나고
점심 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쯤에야
겨우 얻어먹고 돌아왔다
돈 주고 밥 한 그릇 얻는데도 저렇거늘
하물며 세상 사람들이
벼슬자리 돈자리 놓고는 어찌들 하겠는가
불문가지(不問可知)라고
밥 한 그릇도 못 찾아 먹는 우리들이
출세 못한 것도 당연하다고
서로 보고 웃으며 이만 쑤시고 나왔다.
복대동시(福臺洞詩) 12 / 임보
-껌벅껌벅
아내 얘기가
어느 여인들 모임에 갔는데
저 세상 가서 다시 시집간다면
그때도 이 세상 제 남편 도로 꿰찰
그런 미친년 있느냐고 나서 보라 하길래
꼭 한 사람 손을 들었는데
그게 바로 저였다고
자랑처럼 말한다
평생
그럴싸한 반지 하나 사 줄 만큼
돈을 벌어 본 적도 없는 남편
그 흔해빠진 과장 부장 자리 하나도
못 앉아 본 멍청한 남편
그렇다고 자상하고 인정 많아서
겉이나마 화끈하게 사랑 쏟을 줄도 모르는
목석 같은 남편
내가 나를 돌아봐도
취할 것이 바이 없는데
아내는 무슨 일로 손을 들었을까
오호 그렇거니
이 세상 우리 살림
뜻대로 되는 일 하나도 없어
얼마나 가슴 막혔으면
저 세상 가서 다시 한번 버텨보겠다는
아마도 그런 매운 생각이었나 보다.
진새벽인데도 껌벅껌벅
눈이 닫히지 않는다.
꽃에게 / 임보
꽃이여
눈부신 너의 혓바닥에
마른 이 입술을 파묻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 꽃이여
타오르는 네 심장의 불꽃으로
부질없는 이 머리통
다 뭉개 버리고도 싶다
더더욱 그럴 수만 있다면
꽃이여
이 세상을 꿰어차고
온몸으로 풍덩
너의 깊숙한 자궁 속에 빠져
익사하고 싶다.
인도의 여행자 사두
건달노래 / 임보
화창한 봄날 골방에서
화투장 노는 건달패나
무더운 삼복 염천에
무논 매는 농군네나
야삼경 밤늦도록
사기치는 뚜쟁이나
꼭두새벽 일찍부터
목탁 치는 중놈이나
건달이나
뚜쟁이나
충신이나
열녀거나
개똥벌레 개똥밭에
배추벌레 배추밭에
쉬파리는 시궁창에
송충이는 솔밭에
천성 따라 사는 세상
오십보 백보인데
저기 가는 저 선비야
네가 읽은 만권 서책에
네 온 내력 쓰였더냐
저기 가는 저 주정뱅이
비틀대는 저 주정뱅아
네가 마신 만잔 말술에
네 갈 길이 보이더냐
에라 만수 쾌신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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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진들이 정말 모두 그럴싸 합니다,,,,선생님 시는 현장학습 같기도 해서 여행하다 들어온 기분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