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고향은 어디냐
최 화 웅
아내와 함께 박경리 3주기 추모제가 열리는 통영으로 향했다. 관광버스 편으로 거가대교를 타고 거제를 거쳐 두 시간 남짓 걸려 통영에 닿았다. 우리네 자연이 어느 계절인들 아름답지 않을 때가 있으랴 만은 통영의 풍광과 절경은 언제 만나도 옛사랑의 감동처럼 사무친다. 아내와 함께 한 통영나들이는 2006년 통영국제음악제에 이어 5년 만의 일이다. 통영의 눈부신 바다는 보는 이의 몸까지 쪽빛으로 물들이며 잠든 감성을 불러일으켰다.
통영, 충무라는 땅이름은 삼도수군통제영과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 연유한다. 1995년 충무시가 통영군과 통합된 이후 충무라는 지명은 사라지고 옛 지명 통영을 되찾은 것이다. 충무라는 이름은 김밥과 다리 이름과 우리의 기억으로만 남았다. 자유당 시절에는 부산보다 먼저 유행이 휩쓸었던 통영에서는 형편이 나은 집 아이들은 일제 구렛빠 교복을 입었고 다른 곳에선 잘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일제밀수품이 넘쳐났다. 점심으로 남망산 공원에 둘러앉아 충무김밥을 먹었다. 그 옛날 남해를 통해 침범하는 왜적을 살폈다는 남망산에서 내려다보는 통영의 작은 항구 강구안 포구에는 고깃배들이 마치 거친 바다의 삶을 서로 위로하며 사랑을 속삭이듯 가지런히 어깨를 맞댄 채 해풍에 몸을 떨고 있었다. 거침없이 쏟아지는 5월의 햇살을 받아 윤슬 번지는 찬란한 바다와 해안 따라 펼쳐진 아름다운 선창은 한 폭 수채화 같았다. 강구안 포구는 밤이면 물 위에 불그림자가 흘러 고흐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을 보는 듯 환상적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통영의 맑고 고운 자연풍광이 바로 문학과 음악을 낳고 그림으로 표현된 미학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 통영은 예향에 손색이 없는 곳이다. 점심이 끝나고 남망산 조각공원을 둘러본 일행은 통영시민문화회관 소극장에서 열리는 박경리 선생 3주기 추모 문학세미나에 참석했다. 행사를 주최한 통영문인협회 박동원 회장과 정영자 부산문인협회장의 인사에 이어 통영출신 부산대학교 국문과 김정자 명예교수가 ‘박경리의 생애, 그리고 통영’이라는 제목의 주제를 발표했다.
김 교수는 제1부, ‘또 다시 추모하며’의 마지막 부분에서 “3년...또다시 5월...시간이 갈수록 그리움은 더해지는 것인지, 오늘은 어쩌면 그 봄 그렇게 떠나셨던 그날 보다 더 아프고 보고 싶은 시간인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라고 애타는 심정을 토로했고 제2부, ‘삶의 편린들’에서는 ‘생의 발자취’와 ‘가족사’, ‘스승 그리고 문학’과 ‘아, 통영’을 통해 그의 생애를 되짚었다. 제3부, ‘토지문학관’과 제4부, ‘생명의 노래’에 이어 제5부, ‘귀향’에서는 1926년 음력 10월 28일 통영에서 태어나 2004년 11월 4일 고향을 떠난 지 49년 만에 당시 예술이 몸에 밴 진의장 시장의 끈질긴 권유로 귀향하여 이곳 통영시민회관 대강당에서 시민들과 더불어 ‘추억’을 열창했었다고 되새겼다. “그날 통영시민회관의 대강당에는 시민들로 꽉 들어찼다. 박경리 선생이 무대 위로 올라오실 때 통영예총 음악협회 회원이신 김홍종 선생의 트럼펫 연주와 함께 추억」(부제;고향생각)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합창으로 울려 퍼졌다. 대강당에 모인 모든 사람들과 박경리 선생이 함께 이 노래를 불렀다.”고 회상하면서 그때 함께 있었던 세미나 진행을 맡은 김부기 통영문협 사무국장에게 그 노래를 다시 불러보자고 청했다. 즉석에서 김부기 국장은 김윤좌 선생의 반주로 일본에서는 ‘추억’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고향 생각’으로 불려온 스페인 민요 ‘Flee as a Bird’를 노래했다.
사랑하는 나의 고향을 한 번 떠나 온 후에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내 맘 속에 사무쳐
자나 깨나 너의 생각 잊어버릴 수가 없고나
나 언제나 사랑하는 내 고향에 다시 갈까
아~ 내 고향 그리워라.
가을밤에 날아 오는 저 기러기 떼들아
내 고향에 계신 부모님 다 평안 하시드냐
괴론 때나 즐거운 때나 내 고향 생각뿐이라
나 언제나 사랑하는 내 고향에 다시 갈까
이~내 고향 그리워라.
미국에서는 이 곡을 흑인들의 장례식 때 흔히 장송곡으로 쓴다고 한다. 어쩌면 고인의 관을 들고 느릿느릿 걸어 갈 때 뒤따르는 브라스 밴드가 연주하면 망자의 영혼이 육신을 벗어나 새처럼 자유롭게 하늘 높이 날아올랐으리라. 이어 앙콜로 현제명의 고향생각이 이어졌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 나는 한참을 소리 없이 울었다. 노래가 끝나자 김 교수는 2008년 5월 5일 한산도와 한려수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통영시 산양읍 신전리에 묻힌 박경리를 회상하며 “토지와 인생과 혈육과 세상과 함께 고통하고 행복했던 파란만장의 삶을 떠났다.”는 말로 강의를 끝맺었다. 박경리는 60년대 후반 대하소설 ‘토지’를 집필하기에 앞서 천주교인이 되기 위해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그의 세례명은 데레사였고 고명딸 김영주는 소화데레사다. 그는 세례를 받은 이후 오랫동안 냉담신자로 지내오다 “병석에서 마지막 병자성사를 받으면서 많이도 울더라”는 말을 전해 전해 듣고 깊은 연민의 정을 느꼈다.
세미나가 끝나고 길 잃을 일 없는 아담한 통영 시내를 두루 돌아다녔다. 중앙시장 옆길로 통영의 달동네, 동피랑을 오르는 길에는 벽화전 ‘동피랑 부르스’를 알리는 철지난 현수막만 펄럭일 뿐 인적이 드물었다. 동피랑에 올라 통영항을 내려다보면서 통영만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었다. 시장 통을 지나다 들은 “어서 올라가라, 동피랑 몬당에 서먼 통영항 갱치가 참 조테이.”라는 좌판의 할머니 말씀이 새삼스러웠다. 저녁이 되어 한려수도 최고의 장관이라는 낙조를 보기 위해 달아공원으로 달려갔으나 해는 이미 바다 속으로 숨은 뒤였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달아공원의 낙조 대신 강구안 포구의 선창에 흐르는 통영항의 그림 같은 야경을 보면서 김정자 교수가 온몸으로 열창하는 ‘정태춘의 북한강에서’를 듣는 것으로 아쉬움을 씻어 내렸다.
이튿날 미륵산 자락에 조성된 박경리 선생 기념공원에 자리 잡고 있는 묘소에서 열린 3주기 추모제에 들렀다. 추모제에 참석한 박경리 선생의 딸 김영주 토지문화관장을 비롯한 부산과 통영 문인 등 300여 명은 하나같이 공원길에 전시된 선생의 유고시들 사이에 ‘일 잘하는 사내’가 깃발로 휘날리는 길섶에서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다시 태어나면
무엇이 되고 싶은가
젊은 눈망울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다시 태어나면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
내 대답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울었다고 전해 들었다
왜 울었을까
홀로 살다 홀로 남은
팔십 노구의 외로운 처지
그것이 안쓰러워 울었을까
저마다 맺힌 한이 있어 울었을까
아니야 아니야 그렇지 않을 거야
누구나 본질을 향한 회귀본능
누구나 순리에 대한 그리움
그것 때문에 울었을 거야
스스로에게 아니 살아남은 우리에게 남긴 유고시 ‘일 잘하는 사내’를 읽고 그 뜻을 되새기며 뜨거운 5월의 뙤약볕 아래 마련된 추도식장으로 올랐다. 추도식을 마친 일행은 통영의 또 다른 역사배경인 미륵산 용화사를 거쳐 이순신공원에서 한산도를 바라보며 한려해상국립공원의 비경을 노래하는 현장 음악회(?)를 갖기도 했다. 통영을 떠나는 내 등 뒤에서 누군가 나에게 “당신의 고향이 어디냐?”라고 묻는 것 같았다.
첫댓글 통영 참 좋은 곳이지요..저도 예전에 한 6개월 통영에서 살았는데, 미륵사며 새벽시장이며 지금은 추억으로 남습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통영에 놀러 많이 갔었지요 통영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 주셔서 많이 배웠습니다 제 고향은 경주시 안강읍 하곡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