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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학의 산실(産室)을 찾아서 4
김철교(시인, 배재대교수)
8. 일곱째 날 오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의 활동무대
어제 오후 늦게 브론테 일가와 헤어져 약2시간정도 버스로 달려 다음 목적지인 호수지방(Lake District)에 도착하였다. 호수지방에서 가장 좋은 호텔이라고 하는 맥도널드 호텔(Macdonald Old England Hotel)에 여장을 풀었다. 윈더미어(Windermere) 호숫가 보네스(Bowness)에 있는 호텔로 호수에는 요트와 백조들을 비롯한 많은 새들이 한가로이 놀고 있는 참으로 아름다운 휴양지다. 호수지방은 윈더미어에서 그래스미어(Grasmere)를 거쳐 케츠윅(Keswick)까지 약35Km에 이르는영국 최대의 국립공원이다.
초저녁에 호숫가를 거닐고 있었는데 백조들이 관광객이 던져주는 먹이를 따라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것을 보고는 백조에 대한 이미지를 완전히 구겼다. 겉으로는 군자인듯 하면서도 적은 돈에 맛을 들여 여기저기 기웃대는 문인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아침 일찍 우리 팀들이 배를 타고 유람하는 동안 나는 워즈워스가 살던 라이달 마운트(Rydal Mount)에 들렸다. 라이달 마운트는 보네스에서 택시로 약 20분정도(16파운드) 걸리는 거리에 있는데, 1813년부터 1850년 80세로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생활한 집으로 현재도 그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다.
라이달 마운트에 도착하니 9시였다. 9:30분에 개관한다고 하여 주변을 산보하고 있던 중, 마을에 사는 할머니의 친절한 소개로 조금 떨어진 교회(Parish Church of St. Mary, Rydal)에 들려 워드워즈가 예배를 보았다는 좌석에 앉아 알찬 시인이 될 것을 다짐하였다. 9:30분이 되어서 워즈워스 집이 오픈되어 5파운드의 입장료를 내고 집안과 정원을 살펴보았다.
2층 서재에는 밖이 넓고 환하게 보이는 창이 두 개 있는데, 밖의 자연풍광이 쏟아져 들어 왔다. 저 넓고 아름다운 자연들의 정령이 떠돌다 서재로 밀려들어 와서는 워즈워스의 시심을 부채질했나 보다. 집들은 우리나라에 비하면 협소했으나 영국의 옛집들이 대부분 좁은 것을 생각하면, 말년을 보내기에는 충분한 집이었다. 정원으로 나와 강의 지류가 멀리 보이는 둔덕에 서서 시인들의 방문을 환영하는 새들의 노래 소리와 꽃들의 미소를 보면서 참으로 워즈워스의 시를 위해 안성맞춤인 장소임을 알 수 있었다.
10시에 예약한 택시가 문 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일행이 기다리는 앰블사이드(Ambleside) 선착장까지는 10분 거리다. 윈더미어 호수의 북단에 있는 앰블사이드는 문학과 예술 소재의 보물창고라고 워즈워스가 극찬한 곳으로, 그는 1812년 이곳 우편국에서 일한 적이 있다.
우리가 유년시절을 어느 시대에 어디서 어떻게 보냈는가 하는 것이 시풍과 인생의 태도를 결정지어 주는 것임을 이번 시인들의 발자취를 따르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워즈워스의 아름다운 시편들은 호수지방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면서 아울러 읽으면 읽을수록 깊고 깊은 맛이 있어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주고 있다. 단순히 낭만주의라는 단어가 담고 있는 그 이상의 것, 어쩌면 신의 세계까지 넘보는 그런 향기가 가득한 시편들이 많다.
위대한 예술가들 중에는 감성시대와 이성시대의 경계에서 작품 활동을 한 사람이 많다고 한다. 어느 한쪽 극단으로 치닫는 작품보다는 머리와 가슴을 모두 아우르는 작품의 무게가 그 만큼 무겁다는 뜻이겠다. 아무리 화려한 과거 문단경력으로 무장하고 있다지만, 유년의 자연과 추억 속에서 허우적대는 회고조도, 어지간한 지식으로는 해독하기 어려운 머리를 쥐나게 하는 작품들도, 긴 생명력을 갖기에는 역부족일 듯싶다. 시가 어느 한편으로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는 끝없이 배워야겠다. 배운다는 것이 단지 지식의 창고를 채우겠다는 뜻이 아니라, 체득한 많은 지식을 성찰의 창고에 오래 그리고 깊이 묵혀 시 쓰기의 기반으로 삼아야겠다는 뜻이다.
아침에 유람선을 탓던 일행과 합류하여 워즈워스가 살던 도브 코티지(Dove Cottage)와 박물관, 그리고 워즈워스가 묻혀있는 세인트 오스왈드 교회(St. Oswald's Church)에 들렀다. 묘지가 있는 작은 교회 주위에는 수선화 정원이 아름답게 가꿔져 있다. 지금은 여름이어서 나무와 풀이 우거져 있으나 4월말 쯤 오면 수선화가 주위에 가득 피어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도브 코티지와 함께 있는 워즈워스박물관(The Wordsworth Museum & Art Gallery)에서는 테니슨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특별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특히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1850년에는 테니슨의 ‘인 메모리엄(In Memoriam)'과 워즈워스의 ’서곡(The Prelude)'이 출판되었으며, 또한 워즈워스가 80세로 죽으면서 테니슨이 계관시인을 물려받은 해이다. 테니슨이 41세의 나이로 셀우드(Emily Sellwood)와 결혼한 해이기도 하다. 이 전시회에서는 두 시인들의 대작 원고 원본과 초상화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워즈워스는 1770년 호수지역 코커마우스(Cockermouth)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시절을 이 호수지방에서 보냈다. 8세 때 어머니를, 13세 때 아버지를 잃고 백부의 보살핌으로 1787년 케임브리지대학(St. John's College)에 입학하여 1791년 학교를 마치자 프랑스로 건너가, 때마침 절정기에 이른 프랑스혁명의 이상(理想)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오를레앙에 머무는 동안 발롱(Annette Vallon)이라는 여성과 사랑에 깊이 빠져 딸을 낳기도 했다.
워즈워스는 1797년 올폭스덴(Alfoxton)으로 이사하여 가까운 곳에 살고 있던 콜리지와 친교를 맺으면서 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1798년 이 두 시인은 공동으로 '서정시집(Lyrical Ballads)‘을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콜리지는 초자연의 세계를, 워즈워스는 일상의 비근한 사건을 각각 다루면서 낭만주의의 꽃을 피운 시집이 되었다. 이 시집의 서문에서 ‘가난한 시골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감정에서 우러나온 것만이 진실된 것이며, 그들이 사용하는 소박하고 친근한 언어야말로 시에 알맞은 언어’라고 하여 18세기식 기교적 시어(詩語)를 버리겠다는 영국 최초의 낭만주의 문학 선언이 실려 있다. 곧 이어 독일로 건너가 겨울을 보내면서 워즈워스는 자전적 장편시인 ‘서곡(The Prelude)'(초판 1805, 개정판 1850)을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1799년 독일에서 귀국한 뒤 누이 도로시(Dorothy)와 함께 1808년까지 도브 코티지에 살면서, 1802년에 누이의 친구 허친슨(Mary Hutchinson)과 정식 결혼도 하였다. 도브 코티지에서 ‘서곡(The Prelude)’을 완성하였으며, '수선화(The Daffodils)', '무지개(A rainbow)' 등 유명한 시를 남겼다. 도브 코티지는 원래 펍(pub)이었던 건물이어서 집은 참으로 좁고 낮고 어두웠다. 어려웠던 시절을 보낸 흔적이 역력하다. 관리인 아주머니가 한국에서 온 시인이라고 하니 함께 사진도 찍고 아주 친절하게 잘 안내해 주었다. 벽에는 호수지역시인들(Lake Poets)라고 불리우는 낭만주의 거장들인 워즈워스,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 사우디(Robert Southey)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다. 셋은 자주 만났고 워즈워스는 사우디의 뒤를 이어 계관 시인이 되었다.
<워즈워스 부부 초상화>
9. 일곱째날 오후: ‘다빈치코드’의 로잘린 성당(Rosslyn Chapel)
점심식사 후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를 향해 버스는 달렸다. ‘다빈치코드(The Da Vinci Code)’로 문제가 된 로잘린 성당이 문을 닫기 전에 도착하기를 바랐으나 도착시간이 15분정도 늦은 5시 45분에 도착하여 실내에는 입장하지 못하였다. 최근 영국민이 가장 많이 찾는 곳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우리가 도착하니 마침 한무리의 일본 관광객이 관람을 마치고 나오고 있었다.
‘다빈치 코드’는 2003년 3월 미국에서 처음 출간된 소설로 미국을 비롯한 세계 십여개 나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미국 교사 출신의 댄 브라운(Dan Brown: 1964- )이 쓴 미스테리 추리소설이다. 루브르미술관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에서 기호학자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 ‘최후의 만찬’과 ‘모나리자’ 등에 숨겨진 암호를 풀면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가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여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두고 ‘시온 수도회’와 ‘오푸스 데이(Opus Dei)’가 벌이는 사투를 추적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은 영화로 제작되어 2006년 5월에 미국과 한국에서 개봉되었으나 가톨릭과 기독교인들로부터 교회의 역사를 왜곡하였다는 비판을 받았다.
역사적 예수에 관한 기록이 가장 많은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결혼했다는 어떤 암시도 없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헌신적인 제자라 해서 결혼을 했다고 유추하는 것은 비약이 심하다. 보통 사람들에게도 아무리 길고 오랜 남녀간의 사랑이라 하더라도 결혼이나 육체적 관계를 동반하는 에로스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의 악마를 쫓아내 준 예수님에게 감사하는 믿음으로 그림자처럼 동행하였다.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도 그 곁에 있었던 사람들 중의 하나이며, 무덤에 묻힐 때도 지켜보았고, 부활절 아침 시신에 바를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찾아갔던 세 여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예수님은 부활한 뒤 그녀에게 처음으로 모습을 나타내었으며, 부활 소식을 사도들에게 알리기 위해 보내졌다. 성경에 의하면 막달라 마리아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예수 부활의 목격자인 제자로서의 중요한 위치에 있었고 외경에서도 그녀가 중요한 제자였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로잘린 성당 입구> <울창한 나무숲 사이의 로잘린 성당>
10. 여덟째날: 월터 스콧과 존 낙스의 에딘버러
에딘버러의 과거와 현재는 모두 로얄마일(Royal Mile)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 로얄마일은 에딘버러 성(Edinburgh Castle)에서 홀리루드하우스 궁전(Palace Holyroodhouse)까지 약 1.6km에 이르는 큰길이다. 오늘 하루를 로얄마일 거리를 중심으로 보냈다. 중심지는 웨벌리역(Waverly Station)이며 가까이에 에딘버러에서 가장 좋은 호텔인 발모럴(The Balmoral), 코난도일 생가터에 있는 셜록 홈즈 동상, 월터 스콧 기념탑, 작가박물관 등이 있다. 셸리의 허니문 장소(George St. 60)도 가까이에 있다.
작가박물관은 로열 마일의 골목 안에 있는 작은 박물관으로 1622년에 세워진 석조건물이다. 스코틀랜드의 3명의 대표작가 번즈(Robert Burns), 스콧(Sir Walter Scott) 그리고 ‘지킬박사와 하이드’로 이름난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의 책, 원고, 그림 등이 전시되고 있다.
로얄마일의 출발점으로 볼 수 있는 에딘버러 성은 높은 바위산위에 세워진 천연요새로 오랜 스코틀랜드 왕가의 거처로 사용되었으며, 지금은 주로 전쟁기념관 등 군인과 관련된 행사들이 많이 거행되고 있다. 성 곳곳에서는 잉글랜드와의 긴 전쟁의 흔적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몬즈 메그’라는 거대한 대포를 비롯한 옛날 무기와 군사자료들이 많이 보관되어 있다. 오후 1시에는 지금도 대포가 울린다. 12세기에 건축된 에딘버러 성안에 있는 성마가렛(St. Magaret) 성당은 에딘버러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여러 차례 폭격에도 살아남아 9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지금도 군인들의 결혼식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궁전 2층의 크라운 룸에는 각종 화려한 왕관을 비롯한 스코틀랜드 왕가의 보물과 함께 1996년 돌아온 운명석(Stone of Destiny)이 소장되어 있다. 이 돌은 성경에 나오는 야곱이 베고 잔 돌베개라는 전설이 있으며, 스코틀랜드 왕 대관식의 왕좌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원래 스콘성에 있었지만, 1296년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가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가지고 간 뒤, 스코틀랜드의 왕가에서는 운명석이 없는 채로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6세가 영국 국왕 제임스 1세가 된 후부터는 현 엘리자베스 여왕에 이르기 까지 역대의 국왕은 런던에 있는 이 돌 위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1846년에 완공되었다는 약60m의 스콧 기념탑(Scott Monument)은 에딘버러뿐만 아니라 전 스코틀랜드인의 자부심의 상징이다. 1771년 에딘버러에서 태어나 수많은 명작을 남기 스코틀랜드의 대표 작가 월터 스콧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웨벌리역에서 도보 2분 거리에 세워져 있다.
월터 스콧은 1805년 ‘최후의 음유시인의 노래(The Lay of the Last Minstrel)’, 1808년 ‘마미온(Marmion)’, 1810년 ‘호수의 여인(The Lady of the Lake)’의 3대 서사시로 시인의 명성을 얻었다. 계관시인으로 내정되었으나 거부하였으며, 소설로 전향한 그는 1814년 익명으로 출판한 ‘웨이벌리(Waverley)’도 성공적이었다.
스티븐슨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출생으로 1867년에 토목기사인 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하여 에든버러대학 공과에 입학하였으나, 어릴 때부터의 허약한 체질과 문학을 애호하는 성향 때문에 법과로 전과하여, 1875년 변호사가 되었다. 그 후, 폐결핵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유럽 각지로 요양을 위한 여행을 계속하였는데, 그것이 그가 많은 수필과 기행문을 쓰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1883년 대표작인 ‘보물섬( Treasure Island)’, 1886년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The Strange Case of Dr.Jekyll and Mr. Hyde)’등을 계속 발표하였다. 1888년에 고국을 떠나 남태평양의 사모아섬에 머물러 한때 건강도 회복하였으나 결국 뇌일혈로 사망하였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에 등장하는 학식이 높고, 자비심이 많은 지킬박사는 인간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선악의 모순된 2중성을 약품으로 분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상에서 약품을 만들어 복용한 결과, 악성을 지닌 추악한 하이드로 변신하였다. 그리고 점차 악이 선을 이겨, 약을 먹지 않아도 하이드로 변신하여, 지킬박사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 마침내 하이드는 살인을 하고 경찰에게 쫓겨, 체포되려는 순간 자살하여 모든 것을 유서로 고백한다는 내용이다. 오늘날 이중인격이라 하면 이 작품의 제명을 연상할 정도로, 이 작품은 현대인의 성격분열을 암시하고 있다.
존 녹스 하우스 뮤지엄(John Knox House Museum)은 로열 마일에서 가장 오래된 집으로 스코틀랜드의 종교계를 카톨릭에서 프로테스탄트로 바꾼 종교개혁의 지도자 존 녹스(John Knox, 1514-72)가 1561년부터 10년이상 살았던 집이다. 세인트 자일즈 대성당(St. Giles Cathedral)은 1120년에 창건된 에딘버러 최고의 교회로 종교개혁자 족 녹스도 이 교회의 사제가 되어 에딘버러에 프로테스탄트를 보급하는데 힘썼다. 존 녹스는 퓨리터니즘 창시자의 한 사람이며 장로주의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세인트앤드루스대학 졸업 후 가톨릭 성직자가 되었다. 그의 ‘저항권 신수론(抵抗權神授論)’은 개혁파 교회의 이론적 푯대가 되었다.
성당 부근 거리에서 열심히 전도하는 할아버지를 만났다. 불신자에게 기독교 교리를 설명하는 사영리(四靈理)를 여러 나라 말로 인쇄하여, 지나가는 행인의 나랏말에 해당하는 소책자를 나눠주고 있었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한국어로 된 책자를 주면서, 자기 딸이 동작구에서 영어선생을 했었다고 반가워했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서는 스코틀랜드의 전통복장을 입고 백파이프를 부는 사람이 관광객들과 사진을 찍고 있었다. 백파이프(bag-pipe)는 가죽으로 만든 공기주머니와 몇 개의 리드가 달린 관으로 된 악기이며, 입으로 공기주머니에 공기를 불어넣어 그것을 밀어냄으로써 주머니에 달린 관을 울리게 해 소리를 낸다. 스코틀랜드에서는 현재도 군악용 악기로서 유명하다.
로얄마일의 끝자락이라 할 수 있는 홀리루드하우스 궁전(Palace Holyroodhouse)은 12세기에 홀리루드 수도원의 예배당으로 지어진 후 16세기 제임스 5세의 왕비를 위해 왕궁으로 개축되었다. 에딘버러 성이 군사요새로 강화되어 거주지로 이용하기 어려워짐에 따라 이곳이 왕궁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1544년 전쟁으로 전소되어 1671년에 재건되었으며, 영국 황실의 스코틀랜드 왕궁이 되어 엘리자베스 여왕이 에딘버러에 오면 여기에 머문다.
오후에는 셸리의 숨결이 있는 St. George Street 60번지를 찾아갔다. 지금은 상가가 되어버렸고 단지, 1811년 해리엇(Harriet)과 셸리가 허니문을 보냈다는 명패만 붙어 있다. 에딘버러 대학 근처 St. George Street 23번지는 가난한 코난 도일 부자가 한 때 살았던 장소로 그 당시 아파트가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셜록 홈즈’를 만들어낸 코난 도일은 에딘버러 출신으로 1869년 웨벌리 역 북동쪽 피카딜리 플레이스 11번지(Picardy Place)에서 태어났다.
저녁은 스코틀랜드 경제의 중심지인 글래스고(Glasgow)로 이동하여 중국식으로 먹었는데 입맛에 맞지 않았다. 대신에 스코틀랜드 전통음식인 ‘하기스’를 사먹었다. 소위 양고기 순대라 할 것이다. 튀긴 하기스는 약간 짜기는 했어도 맛이 좋았다. 해외여행에서 좋은 점은 현지의 전통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영연방은 섹스산업이 허용되어 글래스고에도 저녁 늦게 거리를 돌아다니면 남성들을 유혹하는 매혹적인 여성들이 적지 않고 한다. 빡빡한 일정에 너무 피곤하여 문안인사는 다음 기회로 미루어 두었다.
<월터 스콧 기념탑> <에딘버러 성에서 시가지를 바라보며.
멀리 스콧기념탑이 보인다>
<성 자일즈 성당의 <에딘버러 거리에서 기독교를
존 녹스 동상옆에서> 전도하시는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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