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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겨울의 기후 탓으로 약간은 쌀쌀한 공기가 몸에 닿는 이른 새벽, 뿌연 연무(煙霧)가 짙게 깔린 서초구청 구민회관 앞에서 회원들을 태운 답사버스가 서서히 경부고속도로를 진입하여 굉음소리와 함께 남도여정의 첫발을 내디딘다. 한참을 달리던 버스 안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지지 않는다. 눈만 감았다하면 금방 코를 고는 단골회원 말고도 새벽잠을 설친 탓인지 대부분의 회원들이 꾸벅꾸벅 자연에 순응하는 모습이다. 할 수 없이 안내방송은 접기로 하였다.
한참을 달리던 답사버스는 어느덧 천안 톨게이트로 진입하여 간이대기실에서 기다리던 이 지역 회원들을 탑승시키고 다시 경부고속도로로 들어서 얼마쯤 달리다가 천안-논산간 고속도로에서 속력을 가중시킨다. 가을걷이를 끝낸 논밭의 풍경이 시원스럽게 펼쳐지고, 그 너머로 병풍을 두른 산자락은 낙엽을 모두 떨군 나무숲으로 속살을 훤히 들어내는데, 그것은 풍수 학인들에게는 본격적인 답사 철을 예고하고 있기도 한다.
호남고속도로를 달리던 답사버스가 회원들의 생리현상을 해결하기 위하여 여산 휴게소에서 잠시 멈춰 선다. 호남지역을 답사할 때면 매번 이곳을 단골 장소로 이용하게 되는데, 그것은 휴게소 도로 건너편으로 병풍을 두른 안산과 조산이 다정하게 응기(應氣)를 하는 연유이다. 보면 볼수록 살기 한 점 없이 순둥이처럼 두루뭉실한 산자락들은 흐트러짐 없이 중후하고 인자한 모습으로 다가서는데, 오는 주인을 영접한다는 음래양수(陰來陽受)처럼 팔을 크게 벌려 여정에 지친 객들을 향해서 생기를 불어넣는다.
답사버스는 어느 듯 정읍을 지나 장성 땅으로 접어들고, 좌측 차창 가로 우람한 자태의 입암산(笠岩山)이 나타난다. 나는 얼른 마이크를 잡고 회원들을 향해 설명한다. “입암산 정상부의 우람한 바위는 어미거북에 해당되고, 능선자락을 올라가는 듯한 형상의 조그마한 바위는 어미거북을 향해서 새끼 거북이가 열심히 기어오르는 듯한 형상입니다.”
이 산 아래의 입암면 대흥리는 일정 때 600만 신도를 거느린 차경석(車京石) 교주가 이끌던 보천교(普天敎)가 일찌감치 터를 잡았었다. 이곳에 터를 정한 연유는 순전히 풍수적인 길지로 낙점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은 이 산을 두르는 주변의 모든 산세가 웅장하면서 옹골차게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입암면(정읍시)의 국사봉(國師峯)은 목체(木體)의 형상이고, 내장산은 화체(火體), 입암산은 토체(土體), 고창(高敞)의 방장산(方丈山)은 금체(金體), 입암면의 비룡산(飛龍山)은 수체(水體)의 문곡성(文曲星)을 이루는데, 입암산을 중앙에 두고 상생(相生) 순환(順換)하는 연유이다.
즉, 국사봉과 내장산은 목생화(木生火)로 연결되고, 내장산(화성)은 중앙의 입암산을 생해 주며, 입암산(토성)은 방장산을 토생금(土生金) 상생한다. 또한 금체(金體)인 방장산도 수체(水體)인 비룡산을 생(生)해주니 육중한 다섯 산이 원을 그리며 원류(源流)된다.
답사버스는 광주톨게이트에서 광산 IC로 빠져나와 첫 사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주유소 옆 공터에 멈춰 선다. 대구, 부산, 울산에서 출발한 회원들과 합류를 하기 위함이다. 몇 십 분이 지나서야 낯익은 얼굴들이 하나 둘 속속 도착하면서 반갑게 회합을 한다.
광주 시내를 통해서 나주로 진입하는 도로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오늘도 전혀 체증이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여정의 상당시간을 답사버스에서 허비하다보니 짜증스럽기만 하다. 도대체 이곳 선량들께서는 언제까지 이러한 교통체증을 방치하고, 바라만 보고 있을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답사버스가 나주시내로 진입하여 나주의 진산(鎭山)인 금성산(錦城山)의 배(背)에 자리잡은 동신대학교 교정으로 진입한다. 세종조 때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알려진 김해김씨(金海金氏) 김수연(金壽延)의 음택을 답사하기 위함이다.
이곳 나주는 저항과 항쟁의 땅에 서린 역사를 간직한 생명의 도시로 금성산의 정기가 영산강 가에다 광활하고 비옥한 나주평야를 일구었다. 이곳은 금성산과 서울의 북악산, 한강과 영산강 등 그 지형과 지세가 서울과 똑같아 예로부터‘소경(小京)' 즉, 작은 서울이라 불렀는데, 나주 도심의 중앙을 관통하는 영산강이 지역을 강남. 북으로 갈라 놓아 지금의 서울과도 흡사하다. 그리고 전라도(全羅道)라는 명칭도 나주(羅州)와 전주(全州)에서 비롯되어 나주란 이미지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나주목(羅州牧)의 영산강 북부지역을 이루는 지형 체계는 이렇다. 호남정맥(湖南正脈)이 서남쪽으로 뻗어와 정읍의 까치봉(713m)에서 서쪽으로 진행하여, 새재 봉분기점에서 본맥(本脈)을 달리하여 서남쪽 맥(소위 영산기맥)을 출맥(出脈)시킨다.
이 맥은 계속 서쪽으로 진행하여 삼성산(540m)과 입암산(655m)을 일으키고, 장성갈재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방장산(744m)을 솟구친 다음 다시 고창고개로 내려서 서남쪽으로 진행하다가, 구황산(499m)을 일으킨다. 여기서 진행하여 고산(526.7m)과 고성산(546.7m)을 세운 뒤, 깃재로 내려와 다시 월랑산(458.4)과 태창산(593.3m)을 세우고는 서남쪽으로 진행하는 맥과 동남쪽으로 진행하는 맥을 가르게 되는데, 동남쪽 지맥(소위 태청지맥)이 계속 진행하여 삼봉산(150.3m)과 태산(200m), 월악산(164.7m), 사랑산(184.1m)을 일으키고, 여기서 남쪽으로 진행하여 망산(270.8m)과 옥산(336.3m)을 일으킨다. 그리고 우측으로 한 가닥을 내려보내 신걸산(370.5m)을 솟구치고, 본맥(本脈)이 남으로 진행하다가 나주의 진산(鎭山)인 금성산(451.6m)을 일으켰다.
동신대학교 안의 김수연의 음택은 지금은 주객(主客)이 전도(顚倒)되어 굴러온 돌의 눈치를 보는 더부살이 신세로 전락되어, 세월의 흐름을 원망하는 듯 하다. 주룡으로 들어오는 입수룡(入首龍)은 단맥(斷脈)되어 저층의 야외음악당이 되었고, 터를 영접하는 안산마저 학교건물이 앞을 막고있어 더 이상의 원상복구는 불가능한 입지로 전락해버렸다. 그러다 보니 영혼이 불편한 지경에까지 온 것이다. 지금이라도 후손들은 더 이상 조상의 음택을 방치할 것이 아니라 어떤 후속조치 등이 따라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벌 명당으로 유명한 반남박씨 시조묘(始祖墓)를 답사하기 위하여 이동중인 버스가 반남 들판을 가로지른다.
반남 땅에 들어서자 우리를 반기는 것은 성숙한 여인네의 봉긋한 젖가슴 같기도 하고, 어머니의 따사로운 품속 같기도 한 대형 고분들이 도로변 곳곳에서 우리를 반긴다.
자미산(紫微山: 98.3m)자락에 등을 댄 고분군들은 자미산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분포되었는데, 중요한 유물이 출토된 곳은 대형 전용 옹관을 사용한 고분군들로 봉분(封墳) 정상 부에 옹관(시신을 넣기 위해 제작된 전용옹관)을 묻고, 호(壺, 유물을 담는 주둥이가 넓은 작은 단지), 장신구 등을 함께 묻은 것이다.
특히 반남면 신촌리의 9호 봉분에서는 칠성판 위에다 삼베로 싼 시신을 올려놓고, 머리부분에는 금동관, 팔지, 귀고리, 목걸이를 올려놓았으며, 허리에는 봉황무늬가 있는 칼과 무기가, 발치에서는 금동신발이 발굴되었다. 이곳 반남은 ‘고분의 땅’ 으로 불릴 정도로 경주나 공주, 부여 등 다른 지역보다 봉분의 크기가 엄청나다. 더욱이 근래에 출토된 크기 3m, 무게 0. 5t의 거대한 옹관들은 3~6세기에 걸쳐 나주지역을 지배했던 고대세력들이 오랜 시기를 걸쳐오면서 강력한 정치위상과 고도의 문화수준을 누린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곳 반남박씨의 시조인 호장공(戶長公) 박응주(朴應珠)가 잠든 묘소는 반남면 소재지를 지척에 두고 자미산의 연맥(連脈)이 뻗어나간 나지막한 자락에 터를 정했는데, 앞쪽은 훤히 트이고, 뒤로는 산자락에 등을 댄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장법(葬法)을 보인다. 묘소는 모두 두 기가 조성되었는데, 아래쪽이 호장의 묘고, 위쪽이 그의 손자(孫子)가 되는 진사공 박윤무(朴允茂)의 묘다.
묘소를 이곳으로 정하기까지는 ‘벌명당’ 이란 전설이 전하고 있다.
호장(戶長)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아들 박의는 이웃마을에 살던 박씨 성을 가진 지관을 모셔다가 명당을 잡아달라고 부탁한다. 박지관은 고개 너머 자미산(자미산성이 있는 산)의 산 능선을 따라 이곳 저곳을 둘러보더니 덕흥리 동쪽에다 터를 정해준다. 풍수지리라면 박의도 조금은 알고있었는데 자신이 보기에는 박지관이 잡아준 자리보다는 차라리 그 밑이 더 좋을 듯 싶었다. 그러나 워낙 유명한 박지관이라 우선표시를 해놓고 속으로는 아무래도 의심스러워 박지관의 뒤를 밟는다. 집에 도착한 박지관이 부인의 마중을 받으며 방으로 들어가자 박의는 재빠르게 마루 밑으로 기어 들어가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는다.
부인이“호장어른 묘 자리는 괜찮은 데로 잡아 드렸나요?”라고 묻자 박지관이“기가 막힌 자리가 있었는데 그 자리를 가르쳐 줬다가는 아무래도 천기를 누설한 죄로 내가 화(禍)를 입을 것 같아 그 자리를 살짝 피해 좀 위쪽에 있는 자리를 잡아주었지. 그 자리도 무던합디다”라고 대답을 한다. 이를 들은 박의는 이튿날 박지관이 말한 천하의 명당에 무덤을 쓰기로 작정하고 구덩이를 파기 시작한다. 이를 도와주려고 고개를 넘어온 박지관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만다. 그가 박의에게 “왜 내가 잡아주는 자리를 피했냐”고 묻자, 이 자리가 더 좋을 듯 싶어 이곳을 택했다는 것이다. 박지관은“이것은 모두가 운명일세. 사실 자네가 파는 이 자리가 명당인데, 내가 화를 당할 것 같아 입을 다물었는데 자네가 알아냈으니 자내 가문의 복일세”라고 말을 하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런데 박의가 다시 구덩이를 파니 구덩이에서 새만큼이나 큰 벌이 나오더니 막 고개를 넘어가던 박지관의 뒤통수를 쏘아 죽였다고 한다.
그 후 고려 때의 아전이던 박응주의 후손들 중 현손 박상충이 예조정랑에 이르렀고, 이어 벼슬길을 이어가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명문거족이 되었다. 이를 두고 후손들은 명당의 발복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때부터 박지관이 벌에 쏘여 죽은 고개를‘벌고개’라 부르고, 박응주의 음택(陰宅)을‘벌명당’이라 불렀는데, 박씨 문중에서는 벌 고개 가장자리에다 이를 기려‘봉현(蜂峴)’이라 새기고, 시조 제사를 지낼 때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위해 죽음을 당한 지관의 제사를 함께 지내주고 있다고 한다.
아무튼 이곳에 묘를 정하고 난 다음부터 반남박씨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기 시작하여,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걸쳐오는 동안 반남의 토호(土豪)로써 큰 세도를 누리기 시작하였으며,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왕후(王后) 2명과 빈(嬪) 1명이 나왔고, 정승 7명과 판서 25명, 대제학 2명, 공신 5명 등 수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어 반남박씨문중에서는 성지(聖地)로 여기고 있다.
이곳 묘역을 일군 자미산의 용맥은 나주 쪽에서 들어오는 지맥이 아닌 호남정맥의 본맥(本脈)인 광주 무등산(無等山: 1178m)이 태조산(太祖山)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곳 지맥을 나주의 금성산(錦城山)과 연맥되는 것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영산강을 사이에 두고 그 맥을 달리한다. 그것은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하기 때문에 물줄기를 보고 산줄기를 파악해야 한다.
무등산을 출발한 연맥이 화순에 있는 만연산(668m), 건지산(473m), 별산(690m)을 일으키고, 남서진(南西進)으로 나가다가 태악산(530m)과 성재봉(519m)을 솟구친다. 이 맥이 계속 남하(南下)하여 두봉산(631m)과 계당산(580m)을 일으키고, 다시 서진(西進)으로 나가 수캐봉(496m)과 국사봉(499m)을 솟구친다. 활성산(498m)에서 본맥은 영암의 월출산을 솟구치고, 지맥(枝脈)하나가 북진(北進)으로 진행하다가 백룡산(421m)과 호산(154m)을 일으킨 다음 마지막 힘을 모아서 이 묘의 주산(主山)인 자미산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호장공의 묘소는 묘좌유향(卯坐酉向)을 놓아 동리가 형성된 앞쪽의 나지막한 구릉지대를 안산으로 삼는다.
혈장의 전후, 좌우를 빼곡하게 두른 국세(局勢)는 한 폭의 그림처럼 정답고 유순한 모습으로 명당을 빙 두르고 있는데, 앞쪽의 내명당(內明堂)이 평탄원만(平坦圓滿)하고 중화(中和)를 이룬다. 또한 앞쪽의 농가건물 사이로 청룡과 백호가 길게 뻗어나가 둥그렇게 관쇄(關鎖)를 이루려는 모습인데, 그것은 혈장에 응기된 기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보국(保局)처럼 보인다.
혈(穴)을 과당(過堂)하는 물은 봉분 좌측자락에서 발원되어 묘역으로 진입하는 길을 따라 우측으로 흘러나가는 내파(內破)로, 신술방(辛戌方)으로 파구(破口)되면서 팔십팔향법(八十八向法)의 목국(木局)의 자왕향(自旺向)이다. 자손(子孫)이 흥왕(興旺)하고, 남녀(男女)모두 총명 수려하다는 합당한 향법(向法)이다.
이기(理氣)에서 말하는 물(水)이란 강물이나 시냇물, 진응수(眞應水)처럼 눈에 보이는 물만을 칭하는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더라도 땅의 모양과 지질을 변화시켜 지중(地中)에 혈(穴)을 맺도록 유도하는 물과 바람 천기(天氣)도 그 범주에 들어간다.
물도 발원 위치나 용도, 쓰임 등에 따라 여러 종류가 있는데, 먼저 태조산(太祖山)에서부터 용맥을 감싸고 진행하는 수기(水氣)를 품은 용맥수(龍脈水), 좌우 용호(龍虎)자락에서 나오는 내당수(內堂水)인 골육수(骨肉水)와 자손수(子孫水)가 있고, 외용호(外龍虎)사이에서 발원하는 외당수(外堂水)도 있다. 그리고, 혈장의 관념수(觀念水)인 하수수(鰕鬚水)와 해안수(蟹眼水), 원진수(元辰水)가 있으며, 천수(天水)의 하나인 상수(相水)도 있다. 그 외에도 안산너머 조산에서 명당으로 유입되는 조래수(朝來水)가 있는가 하며, 외산(外山)이나 외처(外處)에서 발원되는 객수(客水) 등도 있어 그만큼 양기(陽氣)의 응용이 광범위하고,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논한다는 것은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이곳 용호(龍虎)는 백호(白虎)보다 청룡(靑龍)의 기세가 더 강하게 생동하는데, 그것은 가문(家門)을 보존하고, 오랫동안 손(孫)을 이어가려는 어떤 힘을 표출하는 상징으로 와 닿는다. 또한 명당너머에서 촌락들과 어우러지는 나지막한 조산은 터의 안정감을 배가시키는데, 그것은 손들의 성품이 어떤 권력 추구보다는 인화(人和)를 모토로 한 인치(人治)에 더 치중하지 않았나 판단된다. 그리고 좌측 묘역 아래로, 산세가 극히 왕성할 때만 용맥에서 솟구친다는 진응수(眞應水)가 지금도 맑은 물을 솟구치고 있어 더더욱 길지에 부합되는 혈장으로 각인된다.
그러나 의아하다면 내룡(來龍)이 펑퍼짐한 양룡(陽龍)으로 급락하는 내맥인데도 큰 발음(發蔭)이 있었다는 것은 연구과제로 삼아야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