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민속박물관, 남오성 묘 출토복식 정리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2002년 10월10일 충남 태안군 태안읍 삭선2리 소재 의령남씨(宜寧南氏) 공동묘역에서 태안군 환경센터매립시설 진입로 공사를 앞두고 가선대부(嘉善大夫)이자 삼도통제사(三道統制使. 종2품)를 역임한 남오성(南五星.1643-1712) 묘가 이장(移葬)을 위해 약 300년 만에 속살을 드러냈다.
그 결과 이 분묘는 조선시대 전형적인 양반 사대부가 묘제인 회곽묘(灰槨墓)임이 드러났다. 땅을 파 묘광(墓壙)을 만들고, 회(灰)로 덧널(槨)을 만든 다음 그 안에는 시신을 안치한 목관(木棺)을 넣었다.
조선왕조는 이미 개국과 더불어 왕을 필두로 사대부 묘는 이러한 회곽묘를 도입했다. 당장 조선왕조실록 태종 8년 7월9일자 기사에는 태상왕(太上王) 태조 이성계 능실을 회곽으로 만들자는 논의가 등장하고 있다.
이 기사에는 회곽묘를 쓰는 이유로 "석회는 모래를 얻으면 단단해지고 흙을 얻으면 들러 붙어 여러 해가 되면 굳어져 전석(塼石. 벽돌)이 되어 개미와 도적이 모두 가까이 하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도굴이라든가 곤충 등에 의해 시신이 손상됨을 막자는 취지에서 회곽묘를 고집했음을 엿볼 수 있다.
실제 요즘 발굴현장에서 이 같은 회곽묘는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사람 손만으로 회곽묘를 열 수는 없다. 굴착기를 동원해 깨뜨려야만 한다.
회곽묘가 지금의 우리에게 남기고 있는 가장 큰 유산은 워낙 밀폐성이 강해 매장 당시 모습 거의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고, 때에 따라서 시신조차 미라 상태로 그대로 드러내기도 한다는 점이다.
남오성 묘는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는 염습 풍속과 그 골자가 거의 다를 바 없는 상태로 각종 염습의가 출토됐다. 미라 상태인 남오성 시신에서 더욱 놀라운 점은 그 키가 190㎝에 달했다는 사실이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거 최희섭이 196cm라고 하니, 미라가 실제보다 줄어들었을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남오성의 살아 생전 모습은 최희섭을 떠올리면 될 듯하다.
이 남오성 시신은 출토 당시 눈동자와 치아, 수염, 손ㆍ발톱, 성기 등은 물론 피부가 살색 거의 그대로 보존돼 있었으나 후손들에 의해 곧바로 화장됐다. 그러나 남오성은 그의 시신을 장착했던 많은 복식유물을 남기고 다시 산화(散化)했다.
이들 복식유물은 칠을 한 목관과 칠성판(七星板) 등과 함께 곧바로 국립민속박물관에 일괄 기증됐다. 복식은 단령 3건ㆍ대창의 4건ㆍ중치막 8건ㆍ소창의 15건ㆍ저고리 1건ㆍ바지 3건ㆍ허리띠 2건ㆍ관내 배접용 직물 1건ㆍ염포 1건ㆍ지요 1건ㆍ천금 1건ㆍ이불 2건ㆍ베개 1건ㆍ낭(주머니) 1건ㆍ악수 1건ㆍ멱목 1건ㆍ망건 1건ㆍ사모 1건ㆍ신발 1건의 모두 50건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 출토복식에 대해 박물관은 2003년 8월 이후 지난해 10월까지 보존처리를 실시했다. 박물관에 최근 펴낸 유물보존총서Ⅰ `남오성 묘 출토복식'은 이들 유물에 대한 보존처리 과정과 유물의 조사 연구성과를 총괄 정리하고 있다.
이번 조사성과 중 복식 직물에 대한 심연옥 교수의 글이 주목된다. 이에 의하면 남오성 묘 출토복식은 대마포 1점을 제외하는 모두 견직물을 사용하고 있으며 면직물과 모직물, 저마포는 한 점도 확인되지 않았다.
또 복식에서는 모두 34종류에 달하는 문양이 확인됐다. 구름 무늬를 형상화한 것이 있는가 하면 연꽃무늬, 석류꽃 무늬, 포도다람쥐 무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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