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술민란]
*1862년(철종 13) 전국적으로 일어난 농민봉기. 조선 후기에 들어와 경제생활의 급격한 변화로 농민의 계층이 분화하고 양반의 몰락으로 신분체제가 붕괴됨으로써 전통사회의 기본질서가 무너져 민심은 정부로부터 멀어져 갔다. 더욱이 19세기 이후 계속된 외척의 세도정치로 관리들이 부패하여 삼정이 문란해짐에 따라 농촌과 국가재정은 극도로 피폐하여 더 이상 지탱하기가 힘들자 농민들은 관을 상대로 봉기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62년 2월 4일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에서 시작된 농민봉기는 그해 말까지 경상도·충청도·전라도·황해도·함경도와 경기도 광주로 번지면서 전후 37차에 걸쳐 일어났다. 이에 조정은 민란의 근본대책으로 국왕의 특명에 따라 삼정이정청을 설치하고 《삼정이정절목》 41개조를 제정하여 반포, 시행했으나 이 업무가 비변사로 넘어간 뒤 새 정책을 정지시키고 옛 삼정제도를 복구함에 따라 농민봉기의 근본원인을 제거하지 못했다
[장흥민란]
*1862년(철종 13) 5월 13일 전라도 장흥에서 일어난 농민봉기. 조선 말기 삼정의 문란과 지배층의 가혹한 착취로 농민의 조세 부담이 과중해지자 농민들의 불평이 증대되면서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농민봉기의 하나이다. 전 군수 고제환과 향유 정방현·임재성 등이 주도한 농민군이 관아를 습격, 방화하였다. 조정은 전라도관찰사 정헌교에게 사태를 수습하게 하여 고제환을 귀양보내고 정방현·임재성을 곤장으로 다스려 난을 진압하였다
[삼남민란]
*조선 말 1862년(철종 13) 삼남지방에서 일어난 농민봉기사건. 농업을 위주로 한 자연경제를 재정적 기초로 삼던 조선은 국고수입을 전적으로 농민에게 의존했다. 그런데 국가의 재정적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농민의 부담은 과중해졌다. 또한 조선 말 삼정의 문란과 지배층의 과중한 착취, 세도정치의 불합리성, 문호개방 이후 급속히 증가한 국가지출 등은 농민에게 2중 3중의 부담을 갖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세의 징수관인 아전의 행패 또한 극심하였다. 마침내 1862년 2월 진주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원인은 ① 양곡의 횡령 ② 취잉(환곡의 이자를 많이 받음) ③ 배호백징(호별로 강제징수하는 세금) ④ 공갈 ⑤ 인징(불법으로 전세를 받는 것) 등이었다. 이에 전교리 이명윤(李命允)이 주축이 되어 향리의 농민을 동원·훈련시켜 어느 정도의 조직적 민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뒤늦게 조정에서는 2월 29일 박규수를 안핵사로 파견하여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농민의 분노와 항쟁을 자극해서 민란은 진주에서 삼남전역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3월에는 전라북도 익산에 민란이 일어나고 4월에는 개령·함평, 5월에는 회덕·공주·은진·연산·청주·여산·부안·금구·장흥·순천·단성·함양·성주·상주·거창·울산·군위·인동 등 삼남전역에 걸쳐 민란이 일어났다. 정부에서는 박규수를 비롯하여 각지에 안핵사·선무사·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사태를 수습하는 데 힘썼다. 민란주모자는 극형에 처하고 탐관오리를 징계하는 한편, 삼정의 근본적인 개혁책을 강구하였다. 한편 박규수 등 안핵사는 민란의 원인이 국가재정의 낭비와 민생의 궁핍에 있음을 지적하고 삼남지방에서의 환곡제도의 폐지를 상소하였다. 조정은 5월 26일 삼정의 개혁을 위한 이정청을 설치하여 삼정이정절목을 공포하였다. 그 내용은 군정과 전정에 있어서는 민원이 없도록 개혁했으며, 환정에 대해서는 23개조의 수습방법을 들어 시정했다. 이렇게 해서 민란이 잠시 수습되었으나, 그 해 여름 한발과 수해가 들자 민심이 다시 동요되어 9월에는 제주도, 10월에는 함흥, 11월에는 광주, 12월에는 창원·남해·황주 등 각지에서 대규모의 민란이 일어났으며, 이듬해 여름에는 서울 한복판에서 금위영의 군졸까지 소요를 일으켜 민란은 기세를 더하였다. 철종이 죽고 고종이 왕위에 올라 대원군이 집권, 서정을 쇄신하고 남인·북인 등을 등용하여 인재를 널리 구하게 되니 자연히 민란도 가라앉게 되었다. 삼남민란은 결국 조선봉건사회의 한 붕괴과정이기도 했다.
[홍경래의 난]
*이 민란은 당시 조선의 봉건적 사회상이 주요 원인이었다. 조선시대 주요 산업인 농업은 17∼18세기에 들어 이앙법·이모작 등 농업기술의 향상과 토지겸병으로 광작운동이 일어나 경영형 부농층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경영형 부농층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대다수 농민들의 농업 규모는 더욱 영세화되면서 영세빈농·전호 등으로 전락하였다. 토지에서 이탈한 농민들은 유리민화되어 일부는 임금노동자가 되고, 일부는 도시빈민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상공업에서는 상품경제의 발달로 수공업자가 전업화하고, 사상인의 활동이 활발해졌으며, 대외무역이 활기를 띠고 있었다. 신분체제에서는 하층민의 신분상승으로 인한 양반 수의 증가, 잔반의 존재, 하층민 감소 등 새로운 변화가 일어났다. 정치적으로는 치열하던 당쟁이 끝나고 노론에 의한 안동김씨 척족의 일당전제가 성립됨으로써 재정의 근간을 이루는 삼정 문란은 농민층 분해를 더욱 촉진시켰고, 특권상인과 지방 사상인간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은진민란]
*1862년(철종 13) 충청도 은진에서 일어난 농민운동. 조선 후기 전정·군정·환곡의 3정의 문란이 농민의 부담을 가중시켰으며, 삼남지방에서 일어난 민란의 영향으로 수천 명의 농민이 초군이라 자칭하며 봉기하였다. 조정에서는 사건수습에 소극적인 은진현감 김재현을 파면시키고, 토벌에 나서 주동자 윤희규를 체포하여 효수형에 처하였다
[공주민란]
*1862년(철종 13) 5월 16일 충청도 공주에서 일어난 농민봉기. 삼남지방의 농민들이 민자성 등의 선동으로 삼정의 폐해를 항의하며 시위를 벌였다. 조정에서는 난의 수습을 위해 충청도관찰사 유장환을 급히 파견하였다. 난이 수습되자 주동자로 지목된 민자성·유태로·유상보와 서정호·진유완·이형하 등은 효수되었고, 판관 조병문과 영장 이종식은 난을 사전에 제지하지 못한 책임으로 파직되었다. 또한 공주가 서울에서 가까운 충청감영의 소재지일 뿐 아니라, 서울과 영남 등 다른 도의 사람들이 가담한 사실로 미루어보아 반드시 배후에 조종자가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색출하도록 지시했다.
[상주민란]
*1862년(철종 13) 5월 경상도 상주에서 일어난 농민봉기. 그해 삼남지방 민란의 영향으로 일어났다. 상주에서는 결가를 과다하게 징수하려 한 데 따르는 문제, 관에서 포탈한 환곡 4만여 섬과 그 이자에 대한 문제, 군포를 매호 당 6냥 8전씩 매기려 한 일, 통영 경비를 충당하려고 마련한 삼랑미 수납에 따른 문제, 권세가의 사사로운 농민수탈 등이 원인이 되어 발생하였다. 상주민들은 이러한 문제와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서 1861년 향회를 열었으나 무산되었다. 따라서 62년 3월 시위를 하였고, 4월 27일에는 선무사 이참현 앞에서 협상을 시도하고 민회를 열었다. 이러한 노력으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5월 13∼15일, 26일에 상주의 농민들은 상주의 부호와 서리의 집과 속오청·세초청 등 관청을 불태우고 수탈 장부인 군안과 환곡대장, 살옥문안을 끌어내어 불질렀다. 조정에서는 경상도관찰사 이돈영에게 난의 수습을 명하여 정나구를 수창죄로 효수하고, 김일복 등 4명을 귀양 보냈다.
[진주민란]
*1) 1200년(신종 3) 경상남도 진주(晉州)에서 공사(公私) 노비들이 일으킨 폭동. 이 민란은 처음에 진주의 공사노비들이 주리(州吏)들의 횡포에 항거, 주리의 집 50여 호를 불태움으로써 발발하였는데, 이 소요는 곧 주리들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주리의 한 사람인 정방의(鄭方義)가 역모 혐의로 투옥되자 그의 아우 창대(昌大)는 무력으로 형을 구하고 불량배들을 모아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평소 원한을 가진 사람 6400여 명을 죽였다. 그리하여 노비들의 폭동에 정방의·창대 등 주리의 일부가 가세하는 반란으로 전환, 이 난은 확대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소부감(小府監) 조통(趙通), 중랑장(中郞將) 이당적(李唐績)을 보내어 진압하게 하였으나 이들을 당해내지 못하였다. 또 평소 정방의와 원한이 있던 진주 백성 20여명이 합주(陜州;지금의 陜川)의 반란세력을 끌어들여 정방의를 공격하였으나 도리어 크게 패배하였다. 그러다가 그 이듬해가 되어서야 진주사람들의 봉기로 정방의는 죽고 그 아우 창대는 도망하여 난이 평정되었다.
2) 1862년(철종 13) 2월 18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일어난 민란. 전국 30여 지역에서 농민들이 봉기한 <임술민란>의 기폭제가 된 농민폭동으로, 직접적 동기는 경상도우병사 백낙신의 가혹한 탄압과 착취에 있었다. 주동자는 유계춘·김수만·이귀재 등으로, 이들은 스스로를 초군이라 부르면서 머리에 흰 수건을 두르고 손에는 몽둥이나 농기구를 쥐고 유계춘이 지었다는 노래를 부르며 진주성으로 몰려갔다. 수만 명에 이르는 이들 농민봉기군은 백낙신의 죄를 추궁하는 한편 부정관리로 손꼽히던 권준범·김희순을 불태워 죽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2월 29일 부호군 박규수를 진주안핵사로 임명하여 수습하게 하였는데, 그는 약 3개월에 걸쳐 이 난을 평정하였다. 이 민란은 비슷한 처지에 놓인 다른 지방의 농민들을 자극하여, 같은 해에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전국 30여 개 지역에 걸쳐 발생한 민란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