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율 갖춘 선지식…역사와 함께 한 민족 지도자
식민시대, 근대화 과정
온몸으로 맞으며 대승보살도 실천
석전스님으로부터 경전 연찬
당대 고승 찾아 목숨 걸고 정진
견성에 머물지 않고 종단 사회
국가 위해 늘 발 벗고 나서
청담스님은 선교율을 두루 갖춘 선지식으로 평생을 종단과 사회, 국가를 위해 실천하고 인류의 밝은 미래에 대해 고민했다. 사진은 ‘나의 인생관’에 대해 설법하는 청담스님 모습. |
지난 100여 년 간 우리 사회는 격동의 세월을 보냈다. 식민지, 근대화, 전쟁, 현대화의 과정을 숨 가쁘게 지나왔다. 이 고난의 역사를 비켜서지 않고 함께 걸은 한국의 고승은 누가 있을까? 수행자로서 행(行)이 구족(具足)하고, 사상이 확실히 정립되어 있으며 당대 사회의 현실, 민중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한 민족지도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고승(高僧)이 있었을까? 견성(見性)한 고승은 많지만 민족의 명운을 함께 한 수행자는 찾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3ㆍ1 운동을 주도하고 불교 근대화, 민중의 삶을 개선하고자 했던 백용성스님과 만해스님이 떠오른다. 그러면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는 누가 그 반열에 들 수 있을까? 우리는 청담(靑潭)스님이 그 모든 자격을 갖춘 고승이라고 감히 자부한다.
수행자로서 청담스님은 한 치의 흐트러짐이나 부족함이 없다. 사실상 일본 식민지와 다름없던 1902년 태어난 청담스님은 20세 되던 청년기에 처음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25세에 출가해서 53세에 종단 정화에 투신하기까지 청장년 시절을 간화선 수행자로서 철저하게 공부하고 정진했다. 청담스님이 얼마나 투철하게 공부를 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전해 온다.
스님이 금강산 마하연에서 공부하던 30대 초반 이야기이다. 당시 스님은 입승을 맡고 있었는데 조실이 설석우스님이었고 성철스님 지월스님이 함께 공부 중이었다. 후일 종회의장을 역임하게 되는 벽안스님이 뒤늦게 출가해 처음으로 안거를 났다. 한 겨울을 나기 위해 식량과 땔감 준비를 다 마쳐 모두 흡족해하는데 청담스님만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청담스님은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대중들에게 말한다. “이번 철에 모두 목숨을 떼 걸어놓고 정진할 텐데, 용맹정진하다 죽는 사람 안 나오라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비(茶毘)할 나무가 없습니다.” 공부하다 죽겠다는 각오를 내비치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 때 처음 안거에 동참한 벽안스님은 청담스님의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란다. 가장 가까운 피붙이의 죽음으로 무상에 젖어 발심 출가했는데 수좌들은 아예 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목숨도 버릴 태세인 것을 보고 진정한 출가자의 마음을 배웠다는 벽안스님은 후일 제자들에게 이 일화를 들려주며 공부인의 마음가짐을 바로 잡아주었다고 한다. 고승의 가장 기본 조건인, 공부하는 수좌의 자세를 청담스님은 가장 철저하게 지켰음을 이 하나의 일화에서 볼 수 있다.
스님은 선(禪)뿐만 아니라 교(敎)에서도 철저했다. 당대 최고의 강백이며 현대 한국문학의 스승으로 추앙받는 석전 박한영스님으로부터 경을 배워 대교 과정까지 마친다. 당시 개운사에 개설된 강원에는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 신석정, 조지훈 등 최고의 지식인들이 수학했으니 청담스님의 사상적 깊이와 지식의 폭을 가늠할 수 있다. 10시간씩 불교사상 강연을 멈추지 않을 정도로 박식하고, 학생 지식인 등 누구와 만나서도 당신의 견해를 펼쳐 교화시키는 힘이 당시 공부에서 나왔다. 36세 때인 1937년 운허스님의 부탁으로 춘원과 자하문 밖 소림사에서 수 일간 불교사상에 대해 격론을 벌여 춘원을 불교에 귀의케 하거나, 62세에 시인 조지훈과 동아일보 지상을 통해 불교정화 논쟁을 벌인 것 등은 청담스님의 불교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선교(禪敎)에 두루 회통한 선지식은 청담스님 외에도 수없이 찾을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이름난 고승들은 충실한 교학 바탕 위에 실참(實參)을 겸해 선교율 삼학을 모두 갖춘 선지식이었다.
청담스님의 위대성은 여기에서 나아가 시대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에게 닥친 숙제를 마다하지 않은 보살행을 펼친 데서 찾을 수 있다. 수행자가 아라한이냐 대승의 보살이냐는 정체성 논쟁은 대승불교권에서는 끊이지 않는 주제다. 둘은 사실 별개가 아니지만 아직 한국불교에서는 지혜와 자비를 구분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하지만 청담스님은 당신이 배우고 체득한 불교와 불교수행자의 자세를 행동으로 그대로 보여주었다. 세간을 떠난 수행자로서 청담스님은 당대의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데 망설이지 않았다.
스님의 청ㆍ장년기 시절 조국은 일제 식민지였다. 한국불교계는 일본 불교화 되었고, 극소수의 참선 수좌들은 제대로 공부할 도량 한 곳 없이 굶주림과 대처승들의 멸시에 시달려야했다. 청정수행 가풍과 정법(正法)을 고수하는 대가로 혹독한 시련을 감수했다. 만주로 가서 수월선사를 친견할 정도로 도(道)를 갈망하던 스님은 전국 강원을 순방하며 학인들을 만나 식민지 조선의 불교가 처한 현실을 설파하고 해결책을 찾는다. 조선불교학인대회를 개최해 조선불교학인연맹을 결성하고 금강산 마하연에서 정진 중에도 선학원에서 조선불교선종 수좌대회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참석한다. 그러면서도 또 다시 만공스님 회상에서 정진해 견성을 인가 받는다. 공부 따로 실천 따로가 아니라 청담스님에게 그 둘은 늘 하나였다.
식민지 조선에서 가장 시급한 일은 민족전통의 청정한 불교를 유지하는 일이었다. 개인의 공부 못지않게 불교 전통을 지켜내는 공공의 업은 매우 중요한 과제다. 그렇기 때문에 수덕사의 만공스님을 비롯한 당대 고승들이 선학원을 건립하고 대처를 반대하는 건의를 했던 것이다. 청담스님은 당신의 공부 중에도 늘 현실을 떠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해방 후 한국불교 사정이 일제강점기와 전혀 달라지지 않자 환갑에 이른 청담스님은 청장년 시절과 다름없이 청정종단을 세우는데 앞선다. 그리고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마침내 조계종을 세우고 기틀을 다진다.
청담스님의 정화는 종단 개조에서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조계종을 건립한 이후 정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종단을 건립하는데 앞섰던 스님은 이후 스님들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여 1964년 동국대에 현대 학문을 가르치는 종비생 제도를 두고, 1967년에는 해인사를 총림으로 지정한다. 1970년에는 승려전문교육기관인 중앙교육원을 세워 종단 중진들에게 불교와 현대 학문을 가르친다.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등 청년 학생들의 조직과 군승파견, <불교성전> 발간, <대한불교신문(현 불교신문> 창간 등 한국불교가 수행해야 할 거의 전 분야에 걸쳐 손을 대고 실행에 옮긴다. 스님은 출가 후 평생을 수행자로서 실천해야할 과제를 한시도 빠트리지 않고 실행에 옮겼다. 이같은 청담스님의 모습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비구니 원로 광우스님은 청담스님에 대해 “시대에 맞는 불교를 바로 잡으려는 역할을 했다”며 “입니입수(入泥入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진흙탕에도 들어가고 더러운 물속에도 들어간다는 의미)하였던 원력의 화신이었다”고 평했다.
스님의 큰 뜻은 종단과 한국불교에 그치지 않고 사회정화 인류 평화로까지 이어졌다. 당시 한국사회는 전쟁의 참화로 폐허가 되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초근목피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최빈국이었다. 문화나 사상적으로도 일제 식민지와 전쟁을 겪으면서 물질을 숭상하고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며, 북의 도발로 인해 언제 다시 전쟁이 재발할지 모르는 아수라장과 다름없었다. 종교지도자인 스님은 물질의 성장이 아니라 도덕성 회복과 사상 개조를 통해서 국가가 바로 설 수 있으며 젊은이들만이 이 과제를 실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종교를 떠나 스님은 청년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강연했으며 불교 청년들을 조직했다. 국민교육헌장 자문위원으로 참여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조국을 걱정하고 청년에게 희망을 걸었던 청담스님의 삶은 국민신뢰를 회복하고 사회와 함께 하고자 노력하는 오늘날 종단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에 불교신문은 6개월여에 걸쳐 청담스님의 삶과 사상을 조명하는 기획시리즈를 편성했다.
■ 어록으로 본 스님의 진면목
“일체 중생구제 만이 일이라면 일이다”
청년시절 식민지 조선불교의 안타까움에 대한 분노에서 시작한 스님은 차츰 수행을 통해 당신의 변화로 이어지고 이어서 종단과 한국사회, 사람의 문제로 이어진다.
이제 막 불교에 입문해서 개운사에서 경전을 연찬할 때 청년시절 학인대회를 주도한 심정이 잘 나타는 글이다. “내 나이 27세이던가 나는 근세조선 오백년 동안 천대받던 불교를 정화 중흥 시키자는 정통 불법수호의 기치를 들고 전국학인대회를 열고 전국 40여개나 되는 강원을 찾아 행각의 길에 올랐다. 그토록 많은 삼보정재가 일인독재의 착취와 억압 앞에 이름도 자취도 흔적도 없이 사라질 때 삼천년 정법과 불조의 혜명마저 깡그리 파괴될 때 나의 의분은 용솟음 쳐 방관할 수가 없어 난 많은 학인들을 거느리고 정법수호를 부르짖었다.” (청담스님의 회고록, 매일경제신문, 1969)
이렇게 학인들을 조직하고 실천에 나섰던 스님은 참선수행을 통해 견성한 후 새롭게 변모한다. “이 때 까지 육체를 ‘나’라고 하여 자기 본위로만 살다가 이제 견성을 하고 보니 정말로 자기라는 것은 누가 해롭게 할 수도 없고, 보태서 이롭게 해줄 수 도 없는 존재이므로 사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니고 그저 항상 불변하는 존재이니 정말 자기를 위해서 할 일이 하나도 없다. 이제까지 몸뚱이 때문에 천사만려를 일으키고 온갖 번뇌 망상을 다 일으켜서 극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죄업을 저지른 것은 육체가 나인 줄 알고 저질렀던 것인데, 그것도 이제는 필요 없게 됐다. 오직 일체 중생을 구제하는 것만이 일이라면 일이다.”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 청담대종사전서)
해방후 근대화 과정에서는 경제적으로 부강해지면서 고루 잘살며 도덕과 양심을 갖춘 사람이 사는 세상을 갈망한다. 그것이 스님의 호국불교관이다.
“공통된 이념과 과거의 보편적인 도덕률의 발견과 실현이라는 공동목표에 의하여 지배되는 조국이란 운명공동체로 결합될 때에 비로소 참된 나가 실현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의 국가관이다.”(위의 글)
[불교신문3101호/2015년4월28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