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서 간 사람들<4>
불꽃같은 일생을 산 윤심덕(尹心悳)
사(死)의 찬미(讚美)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적막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이 노래는 윤심덕(尹心悳/ 1897∼1926)을 사랑했던 김우진(金祐鎭)이 루마니아의 작곡가 이바노비치(Josif vanovici/1845~1902)의 ‘다뉴브강의 잔물결 (The Danube Waves)’에 가사를 붙인 곡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였다고 한다. 다음은 1926년 8월, 동아일보에 실렸던 기사내용이다.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이 4일 오전 4시 경, 대마도 옆을 지날 즈음에 양장(洋裝)을 한 여자와 중년신사가 서로 껴안고 갑판에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는데... 남자는 김우진(金祐鎭)이요, 여자는 윤심덕(尹心悳)으로 연락선에서 조선사람이 정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더라. 아깝게도 우리나라 소프라노 제1호의 성악가는 이렇게 사라졌다.”
윤심덕 / 김우진 / 1920년대의 관부(關釜)연락선 덕수환(德壽丸)
윤심덕은 평양 남산재 교회 권사부부의 1남 3녀 중 둘째딸로 태어났는데 경성여고 사범과를 나와 강원도 원주의 보통학교 음악선생으로 재직했다. 그녀의 남매들은 모두 음악에 소질을 보여 남동생인 윤기성은 오늘날 애창되는 독일가곡 ‘들장미’의 가사를 번역했고 여동생인 윤성덕은 미국에 유학한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떨쳤다.
윤심덕은 아름다운 미성(美聲)으로 음악적 소질이 특출했던 듯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 의해 발탁되어 일본 우에노(上野) 음악학교에 한국 최초의 여성 관비유학생(官費留學生)이 된다. 동료교사였던 박정식은 윤심덕을 사모하여 자신의 구애를 받아주지 않는 그녀를 따라 함께 일본 유학길에 오르지만 윤심덕은 와세다(早稻田)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던 동갑내기 유학생 김우진(金祐鎭)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동거를 시작한다.
김우진은 목포 대지주였던 백만장자 김성규의 장남으로 이미 결혼한 유부남이었고 자녀까지 있었는데 귀국 후 극작가(劇作家)로 활동도 하였지만 아버지의 강권에 못 이겨 상성합명회사 사장으로 취임한 사람이다. 서울에 극장을 세우고 신극(新劇)운동에 앞장설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윤심덕과의 동반자살로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 윤심덕은 처음, 우진이 유부남인 줄 모르고 사랑에 빠졌지만 기혼사실을 알고 난 후에도 우진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못한다. 결국 두 사람은 한국에서 우진을 찾아온 부인을 보고 윤심덕은 집을 뛰쳐나오게 된다.
한편 심덕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데 절망하던 동료교사 박정식은 정신이상으로 병원에 입원하고, 그곳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윤심덕과 김우진은 다시 만나게 되지만 우진의 착한 아내를 본 심덕은 헤어지기로 마음을 먹고 사라지는데 우진은 절망에 빠져 집을 나와 공사장(工事場)을 전전한다. 심덕은 우진이 공사장에서 떨어져 병원에 입원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입원한 병원을 찾는데 우진을 간호하던 심덕은 그의 아내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결국 이탈리아 유학을 결심한다.
1926년, 일본 오사카(大阪) 닛토(日東) 레코드사에서 윤심덕에게 레코드 취입을 제안하는데 원래의 계약은 26곡을 녹음하는 것이었지만 심덕이 한 곡을 더 녹음하자고 우겼고 그것이 바로 김우진이 가사를 붙인 ‘사의 찬미’로, 동생 윤성덕이 피아노로 반주했다고 한다.
일본에 머무르고 있던 우진은 윤심덕이 레코드 취입을 마치고 이탈리아 유학을 위해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배에 뒤따라 오른다. 시모노세키(下關)에서 부산(釜山)으로 가는 관부연락선 덕수환(德壽丸)에서 재회한 두 사람은 이룰 수 없는 사랑에 안타까워하며 현해탄에 함께 몸을 던져 그 불꽃같은 일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이들의 사랑(불륜?)과 극적(劇的)인 자살이 알려지면서 ‘사의 찬미’는 국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되었고 닛도(日東) 레코드사는 요새 말로하면 엄청난 홍보효과로 대박을 터뜨렸다고 한다.
당시로 보면 너무나 쇼킹한 사건이고 로맨스였던 때문일까 이들의 죽음이 쇼라는.... 그래서 실제로는 죽지 않고 갑판원이 숨겼다가 중국인으로 위장하여 로마로 가서 악기점을 경영하며 살고 있다는 루머가 장안에 상당히 구체적인 정보까지 곁들여 퍼졌다는데... ‘사람만 사라졌을 뿐이지 아무도 뛰어내리는 것을 보지 못했고, 유서도 하나 없었다....’
총독부에서 로마에 직접 조사를 의뢰한 결과 김우진과 윤심덕이라는 이름을 가진 조선인이 살지 않으며, 동양인이 경영하는 악기점도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발표했지만 사람들은 ‘중국인으로 위장했으면 그런 이름이 없을 수 밖에....’
사실여부는 아직까지 밝혀진 것이 전혀 없지만 한 낱 루머였을 확률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