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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언(序言) - B. 유일한 복음의 사역자(2)
2017년 3월 5일 이현래 목사님 주일 말씀
[갈1:1~10]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5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그는 복음이다. 구원된 인생의 원본으로서 복음 자체다. 이 복음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심을 받음으로 새로 창조된 새 생명이다. 이 생명은 아담의 생명이 그러했듯이 만민에게 공유되기 위하여 과정을 거쳤다. 흙으로 빚어 생기를 불어넣음으로써 산 혼이 된 것은 누구나 동일하게 공유한다. 이와 같이 십자가의 과정을 거친 것은 누구나 공유한다. 그러므로 아담은 옛 사람의 주가 되었고 예수는 새 생명의 주가 되셨다.
그러면 어떻게 이 사람, 구원의 원본으로서 이 사람, 새 생명과 하나가 되는가?
지난 시간에 유일하신 복음의 사역자! 바울에 대해서 이야기하다가 너무 길어서 중간에 그만했었는데 오늘 계속해서 말씀하겠다.
성경을 보면 창세기 1장부터 11장 중반까지는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어떻게 결과가 맺어졌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것은 역사라기보다는 계시다. 여기에서는 역사적 사실이 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어떤 선지자들에게 모르는 것인데 계시가 와서 당시에 그쪽 사람들에게 구전으로 내려오던 신화가 있는데 그 이야기를 가지고 계시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계시의 중요성은 실재에 있다. 어떤 역사적 사실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것이 실재하는 것인가 아닌가, 허황하게 꾸민 것인가 아니면 지금도 있을 수 있는 실재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를 보면 이야기는 신화인데 바로 우리들 속에 있는 이야기다. 옛날에 지나고 말아버린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도 인류사 속에 그대로 있는 그 사실을 시사적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게 알고 들어야 한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가인과 아벨로 시작한다. 이것은 제사로 시작해서 살인으로 가는 역사다. 시간을 지나서 네피림들이 나오게 된다. 강자들이 나왔다는 말이다. 그들이 땅을 폐괴하게 했다고 한다. 원시시대에는 법이 없고 나라가 없는 그런 시대였으니까 사람들이 왕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두목들이 되어서 설치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네피림의 시대라고 한다. 지금도 그렇다. 나라에 법이 없다면 힘센 사람이 왕 노릇할 것이다. 그래서 뒤로 가면 영주가 되고 성주가 되는 것으로 발전한다. 뒤로 가면 그것이 왕이 되고 무너지고 대통령이 되고 하는 식으로 진행한다.
그래서 아담의 역사는 선악과를 먹고 가인과 아벨을 지나서 네피림을 지나고 그 다음에 바벨론으로 간다. 여기까지다. 짧게 기록되었지만 이것이 인류사에 그때나 지금이나 꼭 같이 존재하는 그런 실재를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힘이 생기면 어떻게 하는가? 힘이 생기면 모여서 당을 짓고 뭘 만들고 해서 나라를 만들고 해서 서로 힘겨루기를 한다. 이것은 지금도 똑 같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다.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든지 똑같다.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고 미국만 그런 것이 아니고 어느 나라고간에 인간이 사는 데는 다~~ 똑같다. 왜냐하면 인간이 같기 때문이다. 모양은 달라도 내용은 다 똑같다.
아담~바벨의 역사에서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불러냈다. 그때부터 부름받은 역사다. 이것은 구체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역사다. 그리고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의 역사다. 하나님은 이 속에서 한 백성을 선택해서 그 백성을 모델로 해서 우리가 못자리처럼 만들어서 거기서 하나님 나라를 시작해서 온 세상에 퍼지게 하자는 것이 하나님의 두 번째 계획이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음에 12형제 12지파 이것이 이스라엘이 된다. 이것은 단순하게 보면 이스라엘의 역사이고 실재적으로 보면 인류의 역사이고 그렇다. 이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에는 너무나 안 되어서 율법을 줘서 가르쳤는데 그래도 또 안 되어서 새 언약을 준 것이다. 그러니까 새 언약은 마지막 언약이다. 도저히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는 인간을 가르쳐도 안 되고 두드려도 안 되고 하니까 생명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이 새 언약이다.
이것을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요3:3)고 표현했다. 그런데 거듭나는 것이 어떤 것인지가 애매해서 니고데모도 묻고 제자들도 물었다. 그런데 그 대답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 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3:14~15)였다. 그러니까 독사에 물려서 죽게 된 사람들이 그렇게 비유할 수 있다. 뱀에 물려 죽게 된 것이니까 아담과 하와가 물렸던 그 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뱀에 물려서 독이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독이 선악과였던 것이다. 그것이 들어와서 죽게 된 사람이 십자가에 매달린 놋뱀을 보고 살아났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의미있는 은유라고 할 수 있다. 뱀의 독! 이것이 전신에 퍼지면 죽는다. 뱀의 독, 이것이 선악과다.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창3:1)했는데 간교하다는 말이 거짓말쟁이, 속이는 자라는 뜻인데 우리말로 하면 아주 영악스럽다는 의미다. 머리가 비상하게 좋아서 영악스럽다는 그런 뜻이다. 그 독이 있다.
“네가 선악을 아는 열매를 먹으면 네 눈이 밝아서 하나님같이 될 것이다.”는 그 독이 사람을 침범해서 그래서 사람을 죽게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 육신의 생명이 살고 죽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뱀의 독이 들어와서 죽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육신이 죽는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죽는다는 말이다. 이 독을 몰아내야 빼내야 살게 되는데 이 독을 빼내는 방법이 뭔가? 장대에 매달린 놋뱀을 쳐다보라는 것이다. “독이 없는 뱀을 쳐다봐라. 물지 않는 뱀을 쳐다봐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쳐다보고 살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해서 이야기를 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 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3:14~15) 그리고 나서 이이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하심이라.”(요3:16)하는 말씀이 나와 있다. 그러니까 사는 길은 그분을 쳐다보고 믿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냥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보고 믿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예수를 그냥 믿는 사람들이 많다. 보통은 그냥 예수를 믿는다. 이 믿음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간판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다 예수를 믿는데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급할 때 부르짖고 기도하는 것밖에 안 된다. 왜 그런가? 십자가에 죽은 그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쳐다보면 산다고 했는데 그것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다. 그러니까 효과가 없는 것이다. 당연히 없다. 우리가 옛날에 다 예수를 믿었는데 달라진 것이 없다. 물론 교회를 안 가던 사람이 교회를 가고 술 먹던 사람이 술을 안 먹고 담배 피우던 사람이 담배를 안 피우게 되는 이런 일들은 있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의 근본을 바꿔 놓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 사람의 생활이 바꿔진 것이니까 그렇다. 이런 것은 어느 종교를 가든지 다~ 있다. 다른 종교에 들어가도 거기에 따른 계율 같은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지키면 사람이 달라지게 된다. 나쁜 짓하던 사람이 선한 행동을 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이런 많은 변화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궁극적인 변화가 아니다. 그래서 믿는다는 말에 한계가 있다.
요한복음을 보면 처음에는 ‘믿어라’는 말이 나온다. “이를 믿는 자는~~”이렇게 나온다. 그런데 6장에 가면 ‘먹는다.’는 말이 나온다. 믿는다는 말이 먹는다는 말로 바꿔진다. 왜냐하면 믿는다는 말은 상대적이다. 내가 갓바위 부처를 믿는다, 비슬산 부처를 믿는다는 것은 그 어떤 대상을 믿는다는 말이 되어버린다. 마찬가지로 예수라는 분을 믿는다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요6:54)고 하게 되었다.
믿는다는 말과 먹는다는 말은 어떻게 다른가? 믿는다는 말은 나는 믿고 저는 믿음의 대상이 되지만 먹는다고 하면 내 속에 들어와 버린다는 말이다. 먹었으니까 ‘내 속에 들어왔다. 내 생명이 되었다.’는 이런 뜻이다.
그런데 예수를 어떻게 먹느냐가 문제다.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의아해 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기에 자기 살을 준다는 것이냐?’고 했고 제자들은 ‘야~ 이거 감당하기에 좀 곤란하다.’는 얘기를 했다. 왜 그런가? 먹을 방법이 없으니까. 먹으면 속에 들어온다는 것은 맞는데 어떻게 예수를 먹을 것인가에 대한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까지 갔다. 그래도 안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에 “숨을 크게 내쉬면서 가로되 성령을 받으라.”(요20:22) 고 했다. 이것을 어떤 사람들이 말할 때 영을 마신다고 한다. 마시면 속에 들어간다. 우리가 공기를 마시면 폐 속에 들어가서 피 속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공기는 우리 몸에 활력이 되기 때문에 산소가 없으면 못산다. 아무리 잘 타는 불도 산소가 없으면 금방 꺼져버린다. 불이 타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산소가 타는 것이다. 마시라고 했으니까 마시면 살겠네 해서 어떤 사람들은 성령을 들이마신다고 해서 성령 호흡운동을 하고 있다. 여러분도 한 번 해보시기 바란다. “주여~”하고 한 번 들여 마셔보기 바란다. 들어오는가! 이것도 쉬울 것 같은데 어렵다. 마시기만 하면 쉬운데 어떻게 마실 것인가가 문제다.
바울은 우리 모두가 십자가에 죽은 이 사람 안에 포함되었고, 그가 죽었기 때문에 유언과 같이 효력이 발생한다고 했다(히9:17참). 제자들은 그를 알고 그와 함께 행하려고 열심히 따라다녔으나 그가 뛰어내리지 못하고 죽은 것을 보고 그를 버려두고 다 고기 잡으러 갔던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우리가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말을 내놨다. 믿어라 먹어라 마셔라 했는데 이것이 어쩐지 다 완성이 안 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차원이 아니고 ‘아~ 내가 예수와 함께 죽었구나.’하는 차원으로 나오게 되었다. 아마도 바울이 어떤 과정을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계시의 발전과정 중에서 이런 과정을 지나게 되었다. ‘믿는다 → 먹는다 → 마신다’에서 이런 것이 잘되는 사람은 잘 되겠지만 역시 나도 안 되는 사람이다. 여러분도 아마 안 돼서 왔지 싶다. 된다고 하시는 분들은 여기에 안 오지 싶다. 괜히 교회 많은데 여기에 오겠나 싶다. 알고 보면 안 되는 분이니까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이다.
나도 이 말씀에서 큰 빛이 왔다. ‘아~ 내가 예수와 함께 죽었구나.’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여러분에 하는 말은 ‘죽어라. 아담은 죽어야 된다. 그러니까 죽어야 된다.’, 이렇게 한 말이 아니고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죽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많다. 죽으려고 애쓴다고 죽어지겠는가. 자살도 아니고 어떻게 죽는가. 죽어지지 않는다. 물론 어느 정도는 된다. ‘참는 것이 죽은 거다.’ 이런 것은 될 수 있다. 그러나 참는 것과 죽는 것은 다르다. 참는 것은 참다가 보면 언젠가는 폭발한다. 용수철은 누르면 누를수록 세게 폭발한다. 참았던 사람이 한번 폭발하면 무섭게 폭발한다. 폭발 안하면 병 된다. 그러니까 이것은 막을 수가 없다. 용수철처럼 생긴 것을 어떻게 막고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가 다 십자가에 죽었다. 그리고 그 안에, 그분의 죽음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가 죽었기 때문에 우리도 죽었다. 그리고 그가 죽었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확실하게 효과가 있는 것이다.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그가 죽기 전에는 효력을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그렇게 말한다.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은 후에 그 효력을 발생하는 것이다. 내가 내 재산을 누구에게 준다고 유언장을 썼더라도 내가 살아 있는 한은 효력이 없다. 내가 죽어야, 죽은 다음에야 효력이 있다. 그 말을 인용해서 유언은 죽어야 효력이 있다. 이렇게 말을 했는데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에 효력이 있다는 뜻이다. 확실하게 죽었기 때문에, 가짜로 죽은 것이 아니고 확실하게 주었기 때문이다.
돌아와서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가려고 얼마나 열심히 따라 다녔는가. 자기들이 버려봤자 별것이 없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습니다.’ 이렇게 말한다. ○○○씨가 모든 것을 버리고 라고 말을 했으면 삼성 덩어리를 버린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라고 했을 때는 조그마한 배 하나 버린 것이지만 그래도 자기에게는 모든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린 것이다.
우리 형제들도 그런 형제들이 있다. 자기 모든 것을 버리고 좇아 온 형제들이 있다. 까 보면 사실 보따리가 별것이 없다. 그래도 자기는 그것이 자기의 모든 것이다. 그러니까 열심히 따랐다.
그런데 그가 뛰어내리지 못하고 죽은 것을 보고 그만 다 버리고 가버렸다. 그러면 그들이 결국은 무엇을 보고 따랐는가 하면 십자가에 못 박아 놓아도 죽지 않을 사람을 보고 따라온 것이다. ‘야 이 사람은 그럴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능히 로마 제국을 물리치고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회복할 것이다.’하는 이런 확신을 가지고 따라왔던 것이다. 그런데 그만 죽어버렸다. 그러니까 ‘다시 고기 잡으러 가자.’ 하고 갔다. 고기 잡으러 가자.
군중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은 모두 메시아를 기대하고 따라다니다가 뿔뿔이 흩어졌고 원망과 비난과 저주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제자들을 포함하고 죽었을 뿐 아니라 만민을 포함하고 죽은 것이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그리고 뛰어내리지 못하고 죽을 때 제자들도 함께 못 박혔고 함께 죽었으며, 우리 모두도 함께 못 박혔고 함께 죽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군중들은 말할 것도 없다. 오천 명이 디베라 광야에 모여서 점심을 먹었다고 하는데 오천 명 뿐이었겠는가. 예수 소문을 듣고 따라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모두 다 메시아를 기대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로 기대를 했는데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뿔뿔이 흩어졌을 뿐만 아니라 가서 불평과 원망과 저주를 퍼붓게 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소망이 컸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 사람들은 그것이 자기 민족의 사활을 거는 중대한 문제였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사기를 쳤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일제하에 있었을 때 어떤 사람이 독립을 시켜주겠다는 말을 했는데, 그래서 백성들이 그를 막 따랐는데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한 것이라면, 그때 우리 민족이 3천 명이었으니까 돌멩이 삼천 개가 날아올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이다. 이스라엘은 분노를 했다. 이런 속에서 아무도 그를 따르는 사람이 없이 혼자 십자가에 죽었다. 누구도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여자들 몇 사람이 연민이라든지 불쌍해서 그 어머니와 몇 사람이 십자가 밑에서 울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보고 제자들을 포함하고 죽은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혼자 죽은 줄 알았는데 포함하고 죽은 것이다. 제자들뿐만 아니라 만민을 포함하고 죽은 것이다. 이렇게 해석을 하고 있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뛰어내리지 고 죽을 때, 제자들도 함께 못 박혔고 함께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도 함께 못 박히고 함께 죽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운명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수와 우리의 차이는 위치와 능력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그의 운명과 우리의 운명은 하나다.
그러나 바울은 유독이 예수를 본 일이 없는 사람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현장을 본 일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을 했다. 그러니까 이것은 무슨 다른 것을 봤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어떤 역사를 가지고 이렇게 말하겠는가. 인간의 운명은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하면 인간의 운명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한국 사람이고 너는 미국사람이다 이런 것이 아니고 나는 장관이고 너는 면장이다 이런 문제가 아니고 인간은 그런 것을 다 제하고 운명만 내놓고 보면 하나라는 것이다. 계급장을 다 떼놓고 보면 똑같은 인간이듯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계급장을 다 떼고 나면 걸쳐 놓았던 모든 것을 다 떼고 나면 운명은 하나밖에 없다. 두 사람이나 열 사람이나 100사람이나 똑같다는 것이다.
우리가 개구리를 볼 때 어느 개구리나 다 똑같다고 본다. 그 중에도 나은 놈도 있고 못한 놈도 있겠지만 우리가 볼 때는 다 똑같은 개구리로 본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사람은 다 똑같은 것이다. 왜? 운명이 같으니까 그렇다.
우리와 예수의 차이가 무엇인가? 그것은 위치와 능력이다. 그분의 위치와 그분의 능력이 나하고 다른 것이다. 회사에 가도 그렇다. 사장하고 나하고 뭐가 다른가? 그분의 위치와 능력이 다르다. 사장하고 나는 위치와 능력이 다르다. 사람은 같은 사람인데 이게 다른 것이다. 그래서 한 사람은 명령을 하고 한 사람은 지켜야 하고 그렇다. 안 지키면 파면 당할 수 있다. 위치가 그렇다. 예수님과 우리는 무엇이 차이가 있는가? 위치와 능력이 차이가 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의 예수, 더구나 우리를 대신해서 오신 예수, 우리를 위해서 오신 예수, 인간으로서의 그 예수는 운명이 우리와 하나라는 것이다. 한 운명으로서의 예수가 우리를 구원하러 왔다. 저 하늘나라의 천사가 온 것이 아니고 우리가 피가 빨간데 파란 피를 가지고 우리를 구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우리가 빨간 피기 때문에 빨간 피를 가지고 왔다. 그러니까 한 운명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한 운명 안에서 그 사람이 죽으면 그 운명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직위가 해제되었다면 그 사람의 직위만 해제된 것이다. 나하고 그 사람하고 차이는 직위니까 직위만 해제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그 직위만 해제된 것이 아니고 나하고 같은 운명으로 죽었다. 여러분과 나하고 똑 같은 운명으로 죽은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운명 안에서 다 죽은 사람이다.
예수는 마지막 아담이고 둘째 사람이다. 우리는 마지막 아담 안에서 함께 죽었고 둘째 사람 안에서 함께 사는 것이다(고전15:45~49참).
성경은 예수를 마지막 아담이라고 한다. “첫 사람 아담은 산 혼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사람 아담은 생명주는 영이 되었나니” 고린도전서 45장 15절에 보면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면 마지막 아담이다. 마지막 아담. 왜 마지막 아담이라는 말을 썼냐면 첫 사람 아담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네가 이것을 먹으면 정령 죽으리라.”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그 이후로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데가 없다. 아담은 그냥 800년을 살았다. 그러니까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육신이 살다가 죽는다는 이것은 인정하지만 자기가 죽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운명이 완전하게 심판을 받아가지고 죽은 일이 없기 때문에 창세기 2장에서만 네가 이것을 먹으면 죽으리라고 했지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냥 사형을 집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살아있는 것이다. 살아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도 그랬고 나도 그랬다. ‘어 내가 왜 죽어. 나는 살아있는데.’그런데 그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으로 살아있었는가?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미 선고가 되어서 끊어졌는데 나는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생명으로 산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그 생명으로 산 것이 아니고 다른 생명으로 살고 있다.
그러니까 사람을 만나보라. 자기 자신도 생각을 해보면 내 속에서 선악을 아는 것을 빼 버린다. 또 저 사람 속에서 선악을 아는 것을 빼버린다면 뭐가 남겠는가. 알고 보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선악에 대한 싸움이 벌어지면 아주 말릴 수가 도저히 없다. 그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청년부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내가 도저히 싸울 대상이 아닌 분과 싸웠다. 싸울 대상이 아닌 선생하고 은사하고 아버지 같은 분하고 또 그전까지 내가 제일로 존경하던 분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개인적으로 혜택도 많이 주신 그런 분이다. 그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싸움을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참 이상한 일이다. 어떻게 그런 싸움이 가능하냐? 그때는 당당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뭣 때문에 그러냐 하면 선악을 아는 지식 때문에 그렇다. 옳으냐 그르냐에 붙잡혀 버리니까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린다. 그 동안 나에게 베풀어 주었던 사랑과 은혜와 감사 이런 것들은 다 날아가 버리고 없고 그것만 남는다. 그래서 이 결투를 4년 동안 하는 바람에 내가 속해 있던 교단이 들썩들썩하게 두 쪽으로 나눠져서 싸웠다. 나는 결국에 밀려 났는데 그분도 밀려나고 말았다. 나중에 밀려 난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 못 있고 미국으로 갔다. 미국에서 돌아가셨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C.C.C.에 있었으니까 몰랐는데 10년이 지나고 좀 안정이 되어서 물어보니까 그랬다고 하더라. 그분도 비참하게 되었다. 나는 비참하게 나왔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다시 산 사람이 되었고 그때 만일 하나님께서 나를 붙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완전히 낙동강 오리알이었다. 갈 데도 올 데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피 터지는 싸움을 했다. 둘이 다 망할 싸움을 한 것이다. 그것이 어찌 가능한가? 나도 올 때도 갈 데도 없는 사람이 무슨 용기로 그런 싸움을 하겠는가. 당장에 그냥 끝날 판인데 이것이 정말 무서운 것이다. 부모 자식도 없고 은사도 없고 사랑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있었다. 무엇에? 선악을 아는 지식에 살아있었다. 그러니까 똑똑한 것이다. 선악을 아는 지식에 살아있으면 사람이 똑똑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죽어 있으면 멍청한 것이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바보 되기는 싫다. 죽으면 죽었지 바보 되기는 싫다. 그런데 사실은 행복하기는 바보들이 제일 행복하다. 바보 되기는 싫다. 조금 아이큐가 모자라는 아이들은 늘 행복하다.
아담은 죽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죽었고 선악을 아는 지식에 대해서만 살아있는 사람이다.
예수는 마지막 아담이고 둘째 사람이다. 우리는 마지막 아담 안에서 함께 죽었고 둘째 사람 안에서 함께 사는 것이다(고전15:45~49참).
예수는 마지막 아담이고 둘째 사람이라는 말은 예수님이 죽을 때는 마지막 아담으로 죽는다. 선악과를 먹은 인류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죽는다. 그래서 이것을 마지막 아담이라고 한다. 그런데 둘째 사람은 무엇인가? 그 사람은 새로 난 사람이다. 우리는 어디서 죽었는가 하면 마지막 아담 안에서 죽었다. 마지막 아담 예수와 함께 죽었단 말이다. 선악과를 먹은 예수와 함께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는 선악과가 살아 있다. 분명히 죽었는데도 살아 있는 것이다. 죽은 것은 왜 죽었는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말은 하나님이 버렸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은 사람이라면 예수라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했지만 인정하지 않았다는 그 말이다. 사랑하는 아들이 죽는 데 어떻게 하나님이 가만히 있겠는가?
그런데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 아니고 선악과를 먹은 인류의 대표자다. 마지막 아담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거기서 우리가 그 안에 포함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거기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고 마지막 아담인 예수 안에 우리가 포함된다. 그래서 우리가 죽은 것이다. 우리의 선악과는 하나님께 이미 인정받지 못한다 이 말이다. 우리가 선악으로 똑똑한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다. 내가 설사 하나님과 똑 같이 생겼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따르려면 내 안에 있는 선악과는 아무리 있어도 죽은 것이다. 그것부터 알아야 한다. 이것을 가지고서는 예수를 따를 수 없다. 이것을 가지고서는 불가능한 이야기다. 참 옳기는 옳은 데도 이것은 안 된다. 이상한 일이다. 옳기는 옳은 데도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안 된다. 연합이 안 된다. 다른 사람과 화목이 안 된다.
우리는 둘째 사람 안에서 함께 사는 것이다. 사는 것은 둘째 사람 안에서 함께 산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생각하면 더 쉽다. 우리가 마지막 사람 아담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교회가 안 된다. 교회에 갔지만 교회가 아니다. 언제 깨질지 모른다. 흩어지면 그냥 깨진다. 선악과가 나와 버리면 깨진다. 아무리 해도 안 된다. 그런데 우리가 어디서 연합이 되는가? 둘째 사람 안에서 연합이 된다. 그렇지 않은가? 여러분, 둘째 사람 안에서 연합이 되지 않은가? 그래서 둘째 사람 안에 있지 않으면 연합이 안 된다. 절대로 될 수가 없다.
들으니까 순에서 갈등도하고 하다가 도리어 연합이 되고 연합되고 한다고 한다. 왜 그런가 하면 갈등하는 것은 선악과 때문에 갈등을 한다. 그런데 연합을 하는 것은 둘째 사람 때문에 연합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 온 사람들은 전부 둘째 사람을 보고 왔다. 비록 찌꺼기가 남아서 선악과 때문에 티각태각 하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면 둘째 사람이 있단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연합이 된다. 이 둘째 사람이 없으면 연합이 안 된다.
그러니까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사람 아담은 예수로 청산이 되었다. 첫 사람 아담은 선고를 받고 마지막 사람 아담은 집행을 당했다. 그래서 끝이 났다. 이제 새로운 것은 둘째 사람이다. 이 둘째 사람 안에서 우리는 함께 산다. 그래서 우리가 담대하게 ‘우리는 마지막 아담 안에서 죽었다.’ 왜냐하면 둘째 사람이 있으니까 그렇다. 이것이 없을 때는 그 말을 못한다. 내가 어떻게 내 자신이 죽은 것을 이야기 할 수 있는가? 내게 새로운 사람이 있으니까 이야기 하는 것이다. 골 백 번 죽었다고 해도 상관이 없다. 새로 산 사람이 있으니까.
그러므로 우리도 함께 죽었으며,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함께 죽은 것이다.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삶을 얻을 것이다. 로마서를 읽으면 그 말이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된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이상하지 않은가? 한 사람 안에서 죄인이 되기도 하고 의인이 되기도 한다. 아담은 죽었다. 가인과 아벨을 낳았던 아담이 죽었다. 네피림을 낳았던 아담이 죽었고, 바벨론을 건설했던 아담이 죽었다는 이야기다. 거기다 소망을 두면 교회가 될 수 없다. 바벨론에 소망을 두면 교회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선악과를 먹은 결과가 바벨론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찬란하고 영화스럽다. 그런 세계를 보고 박수치면 우리는 예수를 보고 무시할 수밖에 없다. 바벨론을 보고 박수를 치면 새 예루살렘을 보고 비난할 것이고 멸시하게 될 것이다. 정반대의 세계니까.
아담은 죽었다. 마지막 아담 예수와 함께 죽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고, 십자가에서도 뛰어내릴 수 있는 신과 같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 선악과를 먹었지만 예수께서 뛰어내리지 못함으로 끝이 났다. 전부 끝이 난 것이다.
예수와 함께 우리는 죽었다. 이것은 비참한 일이 아니다. 당연히 죽을 것이 죽은 것이다. ‘아이고 이거 죽는다. 비참하잖아...’ 이게 아니고, 이것은 영광스러운 죽음이다. 죽을 것은 빨리 죽어야 한다. 헌 집은 빨리 뜯고 새로 지어야 한다. 아깝지만 뜯고 새로 지어야 한다. 새로 지을 수만 있다면 뜯고 새로 짓는다. 안 그런가? 새로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안 뜯으려고 하는 것이다. 새로 지을 수만 있다면 누구든지 뜯고 새로 지을 것이다. 문제는 둘째 사람 안에 우리의 새로운 삶이 있단 말이다. 새로운 삶이 있으니까 뜯어도 상관이 없다. 새로 집을 지을 것이니까.
내가 서울에 갔을 때 살던 동네가 달동네 비슷했다. 전부 판자촌이었다. 서대문 형무소 뒤로 전부 판자촌이었다. 4.19 이후 전부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은 개미 떼처럼 올라와서 거기다 판자 집을 지었다. 그 경계선에 우리 교회가 있었다. 그러니까 정말 지저분했다. 비가 오면 하수도가 따로 없이 그냥 그대로 다 내려오고 물지게로 물을 져다 먹고 그렇게 살았다. 우리도 물을 사다 먹고 살았는데 그것을 그때 김현욱 시장이 나와서 ‘싹 정리하고 새로 지어주마.’ 했다. 이것을 정리하고 아파트를 지어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 내놓았다. 새로 아파트를 지어준다고 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최초로 아파트 공사가 시작되었다. 8평짜리 아파트, 방 2개에 부엌 하나. 딱 그것뿐이었다. 화장실은 아파트인데도 공동변소를 썼다. 가 봤더니 한쪽에 공동변소가 있었다. 여러분은 그런 것을 못 봤을 것이다. 출입구는 따로 없고 부엌이다. 그리고 조그만 방이 두 개 있다. 그런데 그것도 그때는 좋아했다. 판자 집에 살다가 그래도 아파트에 산다. 고지 아파트에 말이다. 그래서 좋다고 했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러니까 새로 지어만 준다면 말이다. 그 전에는 새로 지어준다는 계획이 없이 무조건 판자촌을 철거만 하려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 뒷동네에서 봤는데 술을 약간 먹은 사람들이 몽둥이를 들고 여나므 명씩 몰려다닌다. 다니면서 벽을 다 때려 부셔버린다. 블록으로 쌓아서 위에 슬레이트를 이은 집이었는데 구청에서 그런 사람들을 사면 와서 그것을 부수고 다닌다. 이것을 낮에 다니면서 부셔 버리면 밤에 불을 켜 놓고 그것을 다시 짓는다. 새벽이 돌아오기까지 지붕만 이어 놓으면 뜯어내지는 못한다. 그래서 밤에는 짓고 낮에는 부수고 그랬다. 대책이 없으니까.
그러다가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김현욱 시장이 카드를 내 놓았던 것이다. ‘아파트를 지어주마.’ 하고 약속을 했다. 딱지를 하나씩 주고 집을 짓기 시작했다. 딱지를 주니까 이사를 나가더란 말이다. 이 딱지가 약속이 아닌가? 이것이 그 사람들에게는 새 언약이었다. 지금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성남시는 원래 시가 아니고 그냥 산언덕이고 벌판이었다. 딱지를 준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가면 땅을 25평씩을 줬다. 거기로 이사를 간 사람도 있고 기다렸다가 이것을 받은 사람도 있고 그랬다. 그래서 그게 성남시가 되었다. 그러니까 이것이 새 언약이었다.
둘째 사람 안에서 우리가 산다. 둘째 사람 안에서 사는 누구를 보았는가? 바울을 봤다. 베드로를 봤다. 그 사람들이 다 이 둘째 사람 안에서 산 사람들이다. 둘째 사람 안에서 살다 보니까 그런 말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성경을 쓰게 된 것이다. 둘째 사람 안에서 말이다. 아담 안에서는 이렇게 쓸 수가 없다. 둘째 사람 안에서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쓴 것이다.
사람 하나가 바뀌는 데 이렇게 바뀐다. 우리나라 문제도 복잡하지만 사람만 바뀌어 보라. 아주 간단하다. 그런데 사람이 안 바뀌기 때문에 무슨 대책을 세워 놓아도 도로 마찬가지다. 시간 가면 또 나오고, 시간이 가면 또 나오고 계속 그렇다. 인간이 바꿔지면 된다.
사람이 뛰어내려 죽지 않고 산다면 이것이 ‘네가 하나님같이 된다’는 바로 그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 끝이 났다.
신과 같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 선악과를 먹었지만 예수께서 뛰어 내리지 못하니까 끝이 났다. 전부 끝이 났다. 끝났다는 말은 “하나님 같이 될 수 없다.” 이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 같이 될 수 없다. 별 수를 써 봐야 안 된다.” 이렇게 되었다는 말이다. 사람이 뛰어 내렸는데도 죽지 않고 산다면, 십자가에 못 박아 놓았는데도 죽지 않고 산다면, 그렇다면 이게 바로 무엇이겠는가? ‘네가 하나님 같이 된다.’ 이 말이 아니겠는가? 사탄이 와서 “네가 이것을 먹으면 정녕 눈이 밝아져서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 같이 된다.” 이 말에서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말의 내용이 무엇인가? ‘십자가에 못을 박아 놓는다고 하더라도 뛰어 내려서 안 죽고 산다.’ 이 말이다. 그러니 안 먹겠는가? 그렇게 된다는 데 안 먹겠는가?
암을 고친다고 해서 복어 알을 먹고 죽은 사람도 있다. 복어알을 먹으면 암이 없어진다고 해서 시골에서 그것을 먹고 죽은 사람이 있었다. 초창기에 시골에서 있었다. 요즘에는 그런 사람이 없을 것이다. 옛날에 보험도 없고 그럴 때 그렇게 했던 사람도 있었다. 복어알이 독하다. 그러니까 이놈이 들어가면 암을 죽인다는 것이다. ‘어차피 죽을 바에 한 번 먹고 죽자.’ 이런 것이나 마찬가지다. 약이 없으니까 그랬다. 그런데 ‘네가 이것을 먹으면 산다.’ 그랬으면 무엇을 못 먹겠는가? 해방 직후에 약이 없을 때인데 어떻게 해서 얻어맞고 해서 골병이 든 사람이 많았다. 이 골병 든 것이 무엇을 먹으면 낫는가 하면 좀 지저분한 이야기라 코를 막고 들어라. 시골에 가면 똥통이 있다. 똥통에다 병을 넣어 놓는 데 솔잎으로 병을 막아서 넣어 놓으면 그 안으로 맑은 물이 들어간다. 그 물을 마시면 골병이 낫는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을 먹었다.
사람이 산다고 하면 못할 짓이 없다. 나도 산다고 해서 못할 일이 없었다. 한 번 해 봤는데 정말 못할 일이 있었다. 누가 장어피를 먹으라고 잘라 주었다. 뱀 피다, 뱀 피. 그런데 얼마나 장어 피가 비린내가 나는지... 나는 보통이면 다 먹는 사람이다. 어지간하면 다 먹는 사람인데 이것은 도저히 안 넘어간다. 얼마나 비린내가 나는 지. 생선의 비린내는 피에 있다. 무지하게 비렸다. 또 한 번 토룡이라고 지렁이 가루라고 한 때 그것이 유행했던 때가 있었다. 보기에 괜찮아서 티스푼으로 하나를 먹었더니 이것도 정말 안 넘어갔다. 넘어만 가면 산다니까 먹었을 것이다.
사람을 십자가에 매달아 놓아도 안 죽고 산다면 무엇을 못하겠는가? 죽지 않고 산다는 말이 그런 뜻이다.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말이 꼭 왕이 된다는 것이 아니고 ‘내가 원하는 소원이 다 이루어진다.’ 이런 뜻이다. 하나님 같이 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게 보였다는 것이다. 아주 문학적인 표현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이 다 끝났다. 이제는 다 끝났다. 그것도 다 거짓말이다.
예수께서 최후에 공관 복음서에는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했고, 요한은 “다 이루었다.” 했다. 끝이 난 것은 한편으로는 이루어진 것이다.
예수께서 최후에 공관복음서에서 마태, 마가, 누가 복음서를 공관 복음서라고 한다. 여기서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운명하셨다고 되어 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 운명하셨다. “All finish.” 모두 끝났다. 요한은 뭐라고 했는가 하면 “다 이루었다.”고 했는데 그 말은 All finish와 똑 같다. 모든 것이 다 끝났다. 이것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다 이루어졌다, 라는 말이 되게 된다. 부정적으로 해석하면 모든 것이 끝났다는 말이 된다. 일이 끝났다는 이 말은 일은 끝나고 일은 완성됐다는 말이다. All Finished.
5병2어로 5천명을 먹이던 사람도 뛰어내려 하나님 같이 될 수 없다면 사단의 거짓말은 폭로되었고, 아담은 끝이 난 것이다.
5병2어로 5천명을 먹이던 그 사람도 뛰어내리지 못한다면, 이 사람도 별 수 없다면 사탄은 거짓말이다. 사탄이 한 말은 완전하게 거짓말이다. 간교하다는 말은 속인자라는 뜻이다. 아담은 끝이 난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 같이 될 수 없다.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될 수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이 사람이 아니다. 그것이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는다는 말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아가는 것이 사람이 돼가는 것이다.
어린아이 때는 뭐든지 다 되는 줄 안다. 왜? 자기만 이렇게 해주니까 다 되는 줄 안다. 차차 커가면서 어린이집에 가서 배우고 유치원에 가서 배우고 초등학교에 가서 배운다.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을 배운다. 우리 집에서는 내가 왕인 줄 알았더니 여기 오니까 안 되네, 우리 집에서는 되는데 왜 안 되지, 이러면서 인생을 배워가는 것이다.
아담은 선고를 받고도(창2:17, 3:19참) 온갖 모양으로 자기를 가리고 집행을 피하려고 숨었으나(창3:7~10참) 예수께서 집행을 받으심으로(마20:22, 눅22:42참) 완전하게 끝이 난 것이다(요19:30참).
아담은 선고를 받고도 온갖 모양으로 자기를 가렸다. 산 채 했다. 우리가 보면 저 사람은 똑똑한 사람이다, 훌륭한 사람이다, 이런 것이 많다. 이런 것으로 다 자기를 가리고 모양을 포장시켜서 집행을 당하지 않으려고 한다. 선고는 받았지만 집행은 받지 않으려고 한다. 피하려고 숨은 것이다. 한 말로 그렇게 말한다. 나무 뒤에 숨었다. 한 마디 말인데 이 속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모양으로 가린 인간의 모양이 그 속에 들어있다. 나무 뒤에 숨었다. 아담에 네가 어디 있느냐?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집행을 받았다. 예수께서는 그것을 피하지 않고 받았기 때문에 완전하게 끝나버리고 만 것이다.
아담은 피했지만 예수는 피하지 않고 받았다. 이것을 해석할 때, 예수님이 자원해서 십자가를 졌느냐, 아니면 타의에 의해서 십자가를 졌느냐고 질문을 한다. 신학(神學)이 모두 뭐라고 가르쳤는가? 예수께서 자원해서 받았다고 했기 때문에 내가 예수께서 어쩔 수 없이 죽었다고 하니까 틀리지 않느냐는 의문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둘 다 똑같은 의미다. 현실적으로 본다면 어쩔 수 없이 죽은 것이다. 그런데 아담과 예수를 비교하면 아담은 피한 사람이고, 예수는 받아들인 사람이다. 그런 의미다.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예수님은 받아들였다. 또 물론 진즉부터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다른 길로 가버렸으면 안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이니까 그렇다. 받아들인 것이다. 왜 그런가? 끝내려고 오신 것이니까 그렇다. 그래서 완전히 다 끝났다. 아담은 선고를 받고도 온갖 모양으로 피하고 나무 뒤에 숨어서 이 핑계 저 핑계를 했는데 예수께서는 핑계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래서 다 끝났다.
그러나 우리는 다 아담 안에서 선고를 받고도 숨어있던 사람들이다. 우리는 산 체했었다. ‘내가 왜 죽어? 멀쩡한데!’이렇게 생각했다는 말이다. 도저히 내가 죽었다는 그 말이 안 믿겨진다. “네가 이것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창2:17)했는데 아담은 안 죽었다. 나도 안 죽었다. 그러니까 이 말이 안 믿겨지는 것이다. 지금 기독교인들 가운데,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 이것이 확실하게 시인된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 성경에 쓰여 있긴 쓰여 있지만 ‘내가 죽었네!’이렇게 보여 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집행을 안 당했기 때문에 사형집행을 안 당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예수를 보니까 확실하게 집행이 된 것이다. 나는 이래서 살 이유가 있다. 나는 이래서 살아있는 이유가 있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예수를 보니까 살아있는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살아있는 이유가 없다. 살아있다는 것은 선악을 아는 지식만 살아있다는 것이다. 지식만 살아있지 생명은 전혀 없다. 하나님과의 생명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예수도 믿고 있고, 믿음도 갖고 있고, 교회도 다니고 있고 그러면 산 것 아닌가?’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예수를 보지 않으면 내가 죽은 줄 모른다. 알 수가 도저히 없다. 육신의 목숨은 끊어 진줄 아는데 내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줄은 모른다. 기도하면 될 것 같고 열심히 하면 될 것 같은데 그것이 아니다. 죽은 것이다. 죽었다. 십자가를 보면 우리가 확실히 죽었다. 나보다 훨씬 선한 분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핑계보다도 더 완전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죽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죽은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변명할 수 없으니까 죽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안에 포함 돼 있는 것이다. 예수가 집행 받은 그 안에 나도 어쩔 수 없이 포함 돼 있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같은 모양)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6:5).” 하였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며,” 여기서 “본받아”라는 이 말은 같은 모양이 되면 이라는 말이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죽었으면 그와 연합한 자가 되고 라는 것이다. 연합한자 거기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우리가 그분의 죽으심과 동일한, 그분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이 되었으면 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될 것이다(롬6:5).”하였다. “그가 부활한 것과 같이 우리도 부활할 것이다.” 라는 것이다.
아담은 옛사람의 대표자로서 선악과를 먹고 사형선고를 받았고, 예수는 또 옛사람의 대표자로서 사형집행을 받으신 후에 하나님이 살리심으로 새 생명의 주가 되어 우리를 새사람으로 살리시려고 둘째 사람으로서 우리의 대표자가 되신 것이다.
아담은 옛사람의 대표자로서 선악과를 먹고 사형선고를 받고도 안 죽은 체 했던 사람이다. 예수는 또 옛사람의 대표자로서 사행집행을 받으시고 죽었다. 그래서 옛 사람 아담하고 마지막 사람 아담하고 둘이 합해서 끝난 것이다. 한 사람은 선고를 받은 사람이고 한 사람은 집행을 받은 사람이다. 두 사람이 아니고 한 사람이다.
하나님이 살리심으로 새 생명의 주가 되어 우리를 새사람으로 살리시려고 둘째 사람으로서 우리의 대표자가 되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둘째 사람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첫 번째 사람 아담 안에서는 우리는 변명하다가 결국 죽은 사람이다. 어쩔 수 없이 예수의 죽음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없이 죽은 자로 발견이 됐다. 더 이상 내가 살았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둘째 사람이 우리의 대표자로 왔다. ‘왜 저렇게 죽으면 끝나는 것인데 저 얘기만 자꾸 하나!’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죽으면 끝나고 다를 것이 온다. 마지막 아담이 와야 둘째 사람이 올 것 아니겠는가.
이제 우리가 아담 안에서 죽었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와 함께 사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6:8참)”
이제 우리가 아담 안에서 죽었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또 그와 함께 사 줄을 믿노니! 이것은 바울이 한 말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사 줄을 믿노니!”(롬6:8) 바울이 이렇게 말 한다. 이렇게 바울의 독특한 해석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다. 우리는 그 전까지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들으면 완전하게 소화가 안 된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해 보려고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의 이 말 속에서 우리는 그냥 그 안에 포함 돼 있다.
십자가를 자세히 보라 그것이 누구인지! 그 사람은 2천년 전의 예수가 아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다. 바울도 그것을 본 것 아니겠는가. 자기는 예수 십자가를 본일 이 없는 사람이다. 만난 일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렇게 말 한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사 줄을 믿노니!”(롬6:8) 이렇게 말한 것이다.
바울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을 받은 분의 부름을 받고 유일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복음 사역자가 되었다
바울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을 받은 그 분의 부름을 받고 사도가 되었다. 이것을 알았으니까 이것을 깨달았으니까 “뭐 면허증이 있느냐 없느냐 예루살렘에서 보냈느냐 안 보냈느냐?”는 이런 말이 얼마나 우습게 들렸겠는가. 자기가 스스로 왔다면 그 예루살렘의 종교적인 엄청난 세력이 있을 것인데 그 세력을 어떻게 견뎌내겠는가. 그런데 바울은 자기 온 곳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렇게 당당했다. 내가 예루살렘에 가서 큰 사람들을 만나 봤는데 나보다 더 다르게 아는 사람이 없더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참 교만한 말 같다. 그런데 교만한 말이 아니고 영적인 실재 안에서는 다 똑같다는 것이다. 베드로도 만나보고, 야고보도 만나보고 예루살렘의 장로들을 만나서 교제해봤는데 나보다 더 달리 아는 것이 없더라. 그래서 교재의 악수를 했다고 한다. 양쪽에서 서로가 “아. 우리가 다 같은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해서 악수를 하고 거기서 바울은 이방인에게 가기로 서로 협약을 했다고 한다.
우리는 지금 누구 안에가 더 쉬운가? 바울 안이 더 쉽다. 더 밖으로 나온 것이니까. 유대인으로서의 베드로나 야고보나 이런 사람들은 우리와 그만큼 거리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얼른 소화되기 어렵다. 그런데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 그래서 우리가 소화하기 쉬운 것이다.
인도사람 라즈니쉬는 인도사상을 가지고 기독교를 해석한 사람이다. 인도사람들은 알아듣기 쉬울지 모르겠는데 다른 곳으로 빗나가서 그렇지. 우리는 바울을 통해서 해석한 예수 그리스도가 더 접하기 쉽다.
나도 참 안 되는 사람인 모양이다. 내가 잘된 사람 같았으면 베드로 말만 듣고도 하루에 3천 명이 회개했다는데 그리 될 것인데 이게 안 되는 사람이다. 알고 보면 믿음이 없고 잘 안 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고 밀리다 밀리다가 바울까지 와서 겨우 지금 이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전에도 물론 좋기는 좋았는데 항상 찝찝했다. 어떻게 한쪽에서 무엇인가 확 터지지 않고 그런 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럴지라도 다른 면에서는 좋으니까 그것이 묻혀갔었다. 그런데 만일 내가 바울을 못 만났더라면 그 항상 미진한 그 문제가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더 여지가 없는 것 같다. 딴 생각이 나면 십자가를 보면 된다. 거기에 내가 있으니까 구리 뱀을 쳐다보면 된다. 우리가 만일 의문이 생긴다면 그 장대에 매달아놓은 구리 뱀을 보면 된다. 그것이 남이 아니고 나다. 여러분 자신이다. 남이 아니다.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다. 그러면 이것이 허무주의냐? 그렇지 않다. 그분이 다시 살아났다. 그분이 다시 살려준다는 말이다. 그 실재를 살아 보면 내가 거기서 발견된 나를 가지고 세상을 살게 되면 세상에 거칠 것이 없어진다. 걸린 사람도 없어지고 걸릴 사람도 없어지고 아주 자유로워진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 진리는 실재이다. “실재를 알지니 실재가 너희를 자유케 할 것이다.” 우리 자신이 이 실재를 알게 되면 우리가 자유가 된다. 이 자유가 내 마음대로 하는 자유가 아니라 실재에 대한 자유이다.
사람은 허망한 것에 많이 쌓여 있다. 시골에 가면 도깨비 잘 나온다고 하는 데가 있다. 시골에 가면 상여 같은 것을 놔두는 자리가 따로 있다. 동네 바깥 어디 으슥한데 놔두었다. 밤에 거기를 갈려면 오싹오싹하다. 왜냐하면 송장 메고 다니던 것이니까 꼭 귀신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거기를 혼자 지나가려고 하면 좀 무섭다. 실재를 알지니 실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나무 조각이라고 생각하면 간단하다. 나무 조각이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주 간단하다. 그 생각을 굳게 가지고 가도 가다보면 오싹오싹한다. 사람의 생각이라는 것이 그렇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는 이 말은 실재를 알면 자유해진다는 말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되면 자유해진다. 그렇게 보면 ‘내가 어디에 매여 있었구나. 내가 포로생활을 했구나.’를 알게 된다. 뭔가에 빠져나오지 못하고 뭔가 매여 있는 내 자신이 발견된다. 그런데 매여질 것이 없어지니까 내가 자유해진다.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자유해지고, 내가 나를 생각해도 자유해진다. 대인관계가 어려운 사람은 이것만 알면 어렵지 않다. 사람을 알게 되니까.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면 다른 사람도 다 마찬가지다. 거리낄 것이 전혀 없어진다. 이것이 진짜로 평화이고 평안이다.
절에 가서 이 정도 닦으려고 하면 오래 닦아야 된다. 내가 쉽게 말로 해서 그렇지 이 정도 알려면 사실 몇 십 년을 해야 할지 모른다. 그 사람도 자유, 자유하자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지식으로 다 벗겨내고 생각 안에 있는 것을 모두 벗겨 내고 자유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다. 우리 생각이 얼마나 복잡한지 쉽지 않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그것을 연구하여 사람의 의식을 수십 가지로 구분해놓았다. 생각하고 생각하여 정말로 깊이깊이 연구해 놓았다. 이 껍데기를 다 벗겨야 된다. 어느 세월에 다 벗기고 살겠는가. 살 시간도 없는데 그것 벗기고 있다가 끝날 것이다. 한 방에 해결되는 것이다. 예수 한 사람만 보면 한 방에 해결된다. 쭈그리고 앉아서 벗기로 있을 필요가 없다. 아주 간단하다.
하나님 아들 같은 사람도 뛰어내리지 못한다. 간단하다. 나야 당연하다.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 인생이구나. 하나님이 다시 살려주어야 되겠구나. 내가 하지 못하니까 하나님이 해주어야 되는구나. 단순하다. 그런데 정말 내가 못하니까 하나님이 해준다. 꼭 필요한 것은 해주시는 것 같다.
내가 살아보니까 꼭 필요한 것은 다 해주셨다. 내가 원했던 것을 해준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지 않았던 것을 해주셨는데, 내가 원하는 것보다 항상 더 좋은 것이었다. 내가 원했던 대로 됐으면 참 좋을 것 같지만 내가 원했던 대로 하나도 된 것이 없다. 그런데 원하지 않았던 것이 됐는데, 그것이 지금 감사가 된다. 내가 원했던 일이 돼서 감사한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된 일 때문에 감사하고 있다. 이상하다. 자기 원하는 대로 된 사람치고 감사하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것이 이상하다. 객관적으로 볼 때는 저 사람은 참 잘 나간다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고 나처럼 밤에 바깥에 나와서 감사의 찬송을 부르고 있는 사람은 없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은 하나도 안 됐다. 그리고 그분이 원하는 대로 이끌어 갔는데 그것이 왜 감사가 되는지 모르겠다. 억울하다고 분하다고 해야 할 텐데, 하나님 어찌하여 나는 내 마음대로 한 번도 못하고 사느냐고 해야 될 것 같은데, 반대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희한한 세계를 살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해도 희한한 세계를 살고 있는 것 같다.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찌어다 아멘(갈1:4~5).”
나는 그분이 하신 일이 내 인생을 완전하게 구원했다고 생각한다. 그분이 하신 일이 나로 하여금 완전하게 감사만 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그분이 하신 일이 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어놓았다. 부족한 것이 없게 만들어놓았다. 내가 지금 육신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는 것이 아니다. 육신적으로 나는 산소가 필요한 사람이다. 이 문제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나는 산소가 필요한 사람이다. 여러분은 돈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물론 산소도 돈을 주고 사야 되지만 산소가 필요하다. 얼마나 필요한가. 내 필요한 것은 안 된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 확 터져서 새로 갈아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그것이 안 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다 하신다. 하나님이 필요한 일은 다 하신다. 하나님이 필요한 일을 나를 통해서 하시니까 감사가 된다. 희한한 세상이다. 전혀 다른 세상이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 마음대로 못한다는 것을 앎과 동시에 내가 원하지 않았던 것을 나한테 해준다. 바꾸어준다. 바꾸어주는데 그것이 감사가 된다. 그것이 찬양이 된다. 시편에 있는 모든 찬양들이 그래서 찬양이 나온 것 같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축복하셔서 여러분의 생각대로 되지 않은 것을 오히려 감사하는 그런 감사가 넘치기를 바란다. 우리 교회에서 날마다 그런 감사가 넘쳐야 세상이 와서 바꿔질 것이다. 우리가 세상과 같은 감사를 해봤자 세상이 와서 감동 받을 일이 없다. 세상 사람이 원망하고 있는 것을 내가 감사해야 세상이 뒤집어 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쓰시는 것 같다. 여러분들을 그렇게 쓰시려고 불러놓은 것 같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흙으로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 넣어서 사람이 되게 하신 하나님. 영원토록 우리를 늘 새로 빚으셔서 또 새롭게 하시고 또 새롭게 하셔서 언제나 새 것이 오도록 이끌어 주시고 축복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나는 언제나 내 소원이 성취되기를 기다리지만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당신의 소원을 성취하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이루시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기를 원하고 더 되기를 원하고 우리 교회 모두가 언제든지 세상과 다른 감사와 찬송을 드리도록 하기를 원하고 이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붙잡으신 대로 주님이 쓰시는 대로 우리에게 영광이 나타나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