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낭월 (朗月)스님의 관음기도 영험담 (낭월스님글)
가끔은 방문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운(運)도 불리하고 여건도 좋지 않으면
종종 등장하는 것이 기도를 하라고 권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를 하면 과연 “효력”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반문을 받는 것도
당연한 코스(?)라고 해야 하겠다.
그래서 오늘은 여기에 대한 낭월의 경험담을 들려 드림으로써
나름대로의 소견을 밝히도록 할 참이다.
.물론 실화일 뿐이며 단 한 글자도 조작은 되지 않았다는 점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1.
발단 낭월의 나이 20세였다.
신체검사를 받아야 하는 해였다고만 말씀을 드린다.
그 해의 간지는 丁巳년이었고, 1977년이었기도 하다.
그러니까 실제 나이로는 21살이었다고 해야 하겠다.
어느 봄날 아침에 자고 났는데, 천지가 온통 붉은 피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사물은 가까이는 보이고 멀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3~4일이 지나면서 점차로 그 붉은 기운은 짙어지더니
마침내는 아무 것도 식별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공부는 고사하고 자신의 밥그릇을 찾아 먹기도 곤란한 지경이 되었다.
대구에 있는 동산병원이라고 하는 종합병원을 찾았다.
하루 종일 검사를 한 다음에 내린 결론은 ‘失明’이었다.
시력을 쓸 수가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 것이다.
그리고는 끝이다.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으니 공부는 끝났고
자신의 생계를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 전개하였던 것이다.
언제나 그렇지만 자신이 건강할 적에는
부모형제가 필요 없다고 큰소리 뻥뻥 치면서 잘도 돌아다니지만,
막상 병이 들면 아무 곳에서도 오라고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갈 곳이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부모가 계시는 집으로 가서 민간약을 사용하기도 하면서 몇 달을 보냈다.
병명은 ‘초자체혼탁’이라고 했다.
그리고 현대의 의술로는 치료를 할 방법이 없다고 하는 답이 명확하게 나왔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마음에 대해서 어떠실지 모르겠지만
당시의 입장에서는 절망이라고 밖에 드릴 말씀이 없었다.
2.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기도 동기 막판에 몰리면 지푸라기를 잡아야 한다.
그리고 낭월에게 주어진 것은 기도를 하는 것밖에 달리 답이 없었다.
그대로 머물러 있기보다는 기도라도 해야 뭔가 숨통이 트일 것으로 생각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더듬거리면서 찾아간 곳은 동해의 양양 낙산사였다.
이 지경이 되어서야 기도를 해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는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막판에서나마 마지막 기도를 한번 해보고 세상을 하직하고 몸을 바꿔서
다시 공부를 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많이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비록 경치는 보이지 않았지만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낙산사에 도착을 했다.
시간은 저녁 11시경이었다.
원주 스님을 찾았더니 밤중에 중이 돌아다닌다고 푸념을 하셨다.
이해는 되지만 낭월의 상황은 그 상황이 아니었다.
그냥 죄송하기만 했다.
3.
첫 번째의 힌트 ‘감이 좋았다’ 새벽에 꿈을 꿨다.
꿈에도 낭월이 낙산사로 기도를 하러 왔다.
계단을 올라가는데
절 안에서 늙은 여스님이 동자를 데리고 바삐 어디론가 출장을 가시느라고 나오고 있었다.
합장을 했다.
그래도 꿈에는 사물이 바로 보여서 다행이었다.
그 비구니 스님이 흘낏 보시더니 걸음을 멈추고 하시는 말씀.
“기도하러 왔구만? 하고 있어! 난 좀 급히 다녀올 데가 있네~!”
“예, 다녀오십시오.”
그 뿐이다.
비구니 스님이 사라진 곳을 멀거니 바라다보다가 꿈을 깼다.
그리고 그 감은 매우 좋았다.
몇 달 동안의 암흑에서 빛을 발견할 가망성을 얻었다고 해야 하겠다.
아마도 그 비구니 스님은
관세음보살의 화신(化身)이었을 것이라고 저 좋을 대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침을 먹고는 주지스님을 찾아서 기도를 해도 좋다는 승낙을 받게 될 줄은
이미 꿈을 깨고 나서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100일간의 기도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4.
하루 16시간의 정진 막판에서 할 일은 기도밖에 없다는 것을 그때 절실히 느끼고 또 깨달았다.
잠자는 시간 6시간과 공양시간 3시간을 빼고는 모두 기도에 매달렸다.
그야말로 자나깨나 ‘관세음보살’이었다.
그렇게 집중이 잘 될 수가 없었다고 해야 하겠다.
잡념이 없어진다는 것은 큰 일을 당하면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잡념이 많다는 말은 아직 발등에 불이 떨어지지 않은 것이라고 해도 좋겠다.
망상은 한가로움의 푸념인 것이다.
참으로 절박한 막다른 길에서는
오로지 일념만이 존재할 뿐이었다고 해도 아마 실감이 드실 것이다.
그 해는 낙산사의 해수관음보살을 점안한 해인 것으로도 기억이 된다.
낭월의 기도는 낙엽도 다 지고 난 늦가을에 시작되었다.
5.
스님들의 조언”무리하지 말아라”
당시에 함께 살았던 대중 스님들이 6명인가 되었는데
하나같이 낭월의 기도를 염려하고 있었다고 한다.
기도를 시작한지가 며칠이나 되었을까 싶은 날에
책임자 되시는 분이 조용히 불러서 말씀하셨다.
”스님.고생이 많소.
근데 지금 스님의 기도하는 것을 보면서 대중 스님들이 불안해 하고 있구랴.
왜냐면 기도하다가 쓰러지겠다는 염려로 인해서요.
그러니 매일 8시간만 법당에서 하고
나머지는 스스로 조용하게 한다면
대중도 편안하고 본인은 자신의 기도가 법당에서만 해야 하는 것은 아닌 줄은 알 것이므로
그 방법을 택해 보도록 하시오.”
그 말을 듣고 보니 또한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불안해서야 되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따르기로 했다.
그렇거나 말거나 목탁을 두드리면서 하는 기도 시간만 줄었다는 것이지
여전히 목숨을 달고 관세음보살에 매달렸다.
물론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그래도 새벽에 눈을 뜨면 어떤 변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심리로 불빛을 바라다 봤고,
여전히 같은 상태에서 실망감을 갖게 되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6.
잊지 못할 기억을 갖는 꿈 약 두 달 정도가 지났을 것이다.
그렇게 아무런 변화도 없는 상태에서 기도는 순일하게 진행이 되었다.
기도를 마치고는 생을 마감하겠다는 생각(적어도 당시에는 그랬다)으로 인해서 담담하게
그러나 최선을 다해서 다음 생의 준비를 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해 나가던 상황이었다.
그 어느 날 밤에 꿈을 한 자리 얻었다.
지금도 그 장면은 잊을 수가 없다.
『낭월이 동해안 유람을 하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그 지역의 사령관 댁을 발견하고는 방문을 하였다.
들렸으니 인사를 하고 가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인해서이다.
그 집은 돌로 만들어진 계단을 한참 올라가서 있었다.
계곡이 가팔랐다.
그 길이 끝나는 곳에 초가집이 있었고, 문안을 드리고 절을 세 번했다.
물론 속인에게 절을 세 번 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지만, 당시는 그렇게 했다.
그러자 그 분이 하는 말씀.
“자, 저쪽 밝은 데로 가시지.” 해서 창가로 자리를 옮겼는데
그 해맑고 따스한 햇살이 쏘여들었다.
그 장면은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말했다.
“그래 혹 나에게 부탁을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하지.”
“예 실은 전입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 어디 보세나.”
“여기 있습니다.” 하고 내민 것은 예전에 동산병원에서 받은 진단서였다.
그는 진단서는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질문만 했다.
“거기에 이러이러한 항목이 있나?”
“아뇨, 없습니다.”
“그럼 저러저러한 항목은 있나?”
“그러한 항목도 없는데요.”
“그럼 염려할 것 없네.내가 해결해 줌세.”
“예, 고맙습니다.”』
이것이 꿈의 전부였다.
그리고 잠에서 깨여나니 새벽 1시 반이었다.
잠이 올 리가 없었다.
이제 눈을 고쳐주겠다는 암시가 아니고 뭐겠느냔 말이다.
그대로 가사장삼을 걸치고 법당으로 가서는 목이 터져라 하고 관세음보살을 불러댔다.
그리고 아침 공양을 하는데
대중들이 낭월의 눈치를 보면서 분위기가 술렁술렁함을 느꼈다.
어느 스님이 말했다.
“기도를 하시다가 오늘 새벽에는 다른 것을 하시는 것 같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이 말은 혹시 기도하다가 돌아버린 것은 아닌가 싶어서
의사를 타진해 보는 것으로 바로 알아들었다.
그래서 말씀 드렸다.
“아, 대중 스님들께 미안합니다.
기도가 잘 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다행입니다.”
이렇게 해서 대중은 함께 기뻐해 줬다.
7.
한 겹씩 벗겨지는 혈의 장막
그렇게도 세상을 붉은 천지로 만들었던 짙은 색이 그 후로 조금씩조금씩 옅어져갔다.
그 환희심을 벗님도 이해할 수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보름 정도가 지나자
저 멀리 안개 속으로 느꼈던 사물들이 어느 정도 식별을 할 수가 있는 정도가 되었다.
비로소 옆에 앉은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새벽에 눈을 뜨면 매일 쳐다보던 전등의 유리 윤곽선이 시야에 또렷하게 들어왔다.
그 무렵의 마음은 그야말로 날아갈 것만 같았다.
정말 열심히 살아야 하겠다는 다짐으로 범벅이 되어 있던 시절이기도 했다.
8.
묵언(默言) 기도100일 기도의 회향을 3주일 남겨놓고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묵언을 하기로 했다.
묵언은 수행의 한 방법으로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대중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대중은 당연히 허락을 했고,
그래서 이제는 아무와도 말을 나눌 필요가 없이
오로지 기도에만 전념을 했다.
약 90일 정도가 경과하자 이번에는 신문지의 글이 시야에 들어왔다.
기도는 더욱 흥겹게 진행이 되었다.
밖에서 산책을 하는데 관광객들이 자꾸 질문을 하는 것이 귀찮아서
‘묵언’이라고 쓴 패를 가슴 앞에 달았다.
그러나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그 아래에다가 ‘말못함’이라는 추가문구를 넣었다.
비로소 효과가 있었다.
“에구…
쯧쯧…
벙어리 스님이네….”
“나이도 젊은데 우짜다가…..”
“얼굴도 참하구만…..
안되었다…..
쯧쯧….
9.
회향 드디어 백일 기도를 마쳤다.
전날 내린 눈이 대지를 하얗게 바꿨고,
그 빛은 반사가 되어서 법당을 환하게 비췄다.
그러나 낭월이 보기에는 법당의 관세음보살님이 방광을 하시는 것으로만 보였다.
참으로 원만한 성취가 된 셈이다.
10.
후기
그로부터 3년인가 지나서 다시 낙산사를 찾았다.
그 절의 스님이 관광객을 상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3년 전에 눈먼 스님도 여기에서 기도를 해서 눈이 밝아졌어요.”
그 말을 들으면서 혼자서만 미소를 지었다는 것을 그 스님은 모를 것이다.
11.
기도 권유 이러한 기도의 경험을 갖고 있는 낭월이다.
기도를 하면 소원을 이룰 수가 있다는 것은 이렇게 경험으로 확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이 통일이 되어서 소원이 이뤄지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반드시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는 관세음보살이 되겠다.
그리고 그 외의 모든 절대자들도 절대로 없다고 고집을 부릴 수가 없는 것도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이고,
寅木대운의 丁巳년의 흉함도 戊午년의 고통도
기도를 통해서 말끔히 정돈을 했다는 것도
노력은 기적을 만든다는 확신을 갖게 한다.
그래서 낭월이 방문자에게 기도를 하시라는 권유는
그냥 단순히 말이 궁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 글을 읽으시는 불자님들은 아실 것이다.
물론 운이 흉할 적에 권유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12.
그 때의 간절함은 어디로 가고…..
기도를 할 적에는 눈만 보이면 쓸데없는 것은 절대로 보지 않고
오로지 경전만 보도록 할 것이며,
열심히 공부해서 많은 중생들에게 빛이 되도록 하겠다는 서약을 백천번도 더 했는데,
지금 하고 있는 짓거리를 관세음보살 님이 보신다면
아무래도 한숨을 쉬시지나 않을까 싶다.
그래도 단 한가지 약속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저 어디엔가 ‘그 분’은 반드시 계시고,
언제라도 온몸으로 부른다면 답을 들을 수가 있을 것이라는 마음이다.
그리고 이렇게 더불어 고민을 나누면서도
그러한 절박함을 경험했기에 어쩌면 더욱 절실하게 이해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역경이 반드시 나쁘다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고,
인생의 성장 과정에서
어쩌면 한번 정도는 절대로 필요한 것이라고 해도 되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여하튼 일생 눈으로 인해서 겪는 고통이 많은 것은
아무래도 전생에 살생을 많이 했던 모양이다.
계룡감로에서 낭월 두손 모음
※ 낭월 스님은 현재 계룡산(鷄龍山)의 남쪽 감로사에 주석하고 계십니다.
첫댓글 다음카페
아미타불과 함께 하는 마음의 고향 무주선원 에서
펌하여 정리 하였습니다.
일단은 너무 좋습니다.
4자 명호를 더욱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고은 글 감사합니다
나모아미타불 나모아미타불 나모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