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시대의 요구
교회의 위기
기독교는 2천년 동안 세계사의 중심에서 인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또한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는 암울했던 민족사에 한줄기 빛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민족과 아픔을 함께 하면서 희망을 주었고, 해방 이후 교회는 인구 5/1 이상이 기독교인인 되어 민족 종교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21세기 들어서 특히 개신교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습니다. 20세기 말 1200만에 이르던 한국 개신교 인구는 2005년 조사에서는 860만으로 줄어들었고, 현재는 600만 정도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한국 내 최대 교단 중 하나인 예장 통합의 보고에 따르면 주일학교 중고등부가 없는 교회가 50%나 되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초기 기독교가 한국에 전파된 때는 교회 문화가 사회보다 월등히 앞섰지만, 지금은 오히려 세상 문화가 훨씬 앞서기에 아이들이 교회에 오는 흥미를 잃어버린 것이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서 2013년 실시한 사회신뢰도 조사에서 개신교를 신뢰한다는 응답은 20%에도 못 미치고,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45%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가톨릭, 불교, 개신교 중 가장 낮은 신뢰도였습니다. 게다가 종교가 없는 사람들 가운데 개신교를 신뢰한다는 응답은 9%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교인과 교회가 자기중심적이고 상업적이라고 보며, 믿음과 삶의 이중성으로 기독교인들의 언행을 싫어하고, 목회자의 비윤리적인 삶에서 교회가 지녀야할 귀중한 가치들을 상실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가 2014년 ‘미국의 종교적 지형 변화’ 결과를 발표했는데, 미국 역사 이래 처음으로 개신교 인구가 50%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미국의 종교가 기독교라는 공식이 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동 기관의 ‘세계종교의 미래’ 보고서에서, 2050년에 세계 기독교인 중 유럽과 미국의 비중은 낮아지고 아프리카는 38%까지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세계 기독교인 10명 중 4명이 아프리카인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세계 종교 지형이 바뀌어 인구로 본다면, 기독교는 문명의 중심인 서구의 종교에서 인류 사회에서 가장 낙후된 아프리카의 종교가 되는 샘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특별히 젊은 세대로 갈수록 탈기독교 현상은 두드러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유교를 낡은 사상으로 인식하듯이, 서구의 젊은이들이 기독교를 보는 눈도 동일합니다. 서구 사회에서는 오히려 불교와 동양사상, 요가, 명상, 기 수련, 마인드 콘트롤 등 뉴 에이지적 흐름으로 관심이 옮겨가고 있습니다.
서구 사회를 지배해 온 기독교는 십자군 전쟁, 이단 처형, 종파 전쟁 등, 박해 받았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피를 흘리게 했고, 물질문명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와 자연재해, 새로운 질병, 인간성 상실 등의 문제를 발생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0세기 후반부터 반종교, 반문화, 반전, 반핵 운동 등 다양한 형태로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현상들이 생겨났습니다.
시대의 요구
교회는 지금 세상으로부터 중요한 질문을 받고 있습니다.
21세기를 맞는 인류가 직면한 문제와 관심에 교회는 어떤 대답을 줄 수 있습니까?
인공지능이 사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영역의 일까지도 대신하게 되는 시대에, 사람이 무엇이며 사람의 존재 가치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과학이 종교의 고유한 영역으로 생각했던 부분까지 설명하고 답을 주는 시대에,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종교의 충돌, 문화의 충돌, 양극화된 계층 간의 충돌 등 수많은 갈등들이 지구를 덮고 있을 때,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이런 시대의 물음 앞에서 교회가 내부의 문제들로 씨름하고 있고, 교파 간의 갈등과 이단 시비로 고대에 하던 교리논쟁을 되풀이하며 서로를 정죄하고 있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가 위기를 맞고 있음에도 교회의 하락을 멈추게 하지 못하고 스스로 정화할 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전 세계적으로 역사상 유래가 없는 왕래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단일민족임을 내세우던 한국도 더 이상 단일민족이라 할 수 없게 되었고, 청교도들이 세운 국가인 미국도 더 이상 그들만의 국가가 아니며 모든 종교가 섞여 사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종교가 자기만의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 편협하고 배타적인 태도를 가진다면, 평화를 갈망하는 인류에게 답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분쟁을 부추기는 집단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시대의 종교는 세계 평화를 가장 위협하는 집단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남은 자들
물은 흘러가다가 부딪히면 돌아가고 막히면 땅 속으로 스며듭니다. 많은 과정을 지나 맑은 물이 되어 어디선가 샘이 되어 다시 솟아나곤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천년 전 제자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복음과 교회의 생명력, 그리고 이방인까지라도 하나 되게 하고 만유를 포함하는 교회의 정신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박해 속에서도 살아남았고, 변질과 혼합의 과정 속에서도 생명의 물줄기는 어떤 가난한 사람을 심령을 통해 보존되고 흘러내린 것입니다.
큰 강물은 그대로 마실 수 없지만 골짜기에서 솟아나는 샘물은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뿐 언제라도 마실 수 있는 생수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귀중한 것은 감춰져 있고 때론 보아도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천국은 밭에 묻힌 보화와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길은 좁은 길이기에(마7:13),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합 왕 시대에 이세벨을 앞세워 온 나라가 우상을 섬기며 음행하였을 때, 엘리야는 외롭게 하나님의 편에 서 있었습니다. 혼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 싸워 그들을 다 죽였지만, 세상은 바뀐 것이 없고 이세벨은 더욱 살기등등하였습니다. 엘리야는 혼자 도망하여 하나님께 죽기를 간청했지만, 하나님은 “내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고 입 맞추지 않은 자 칠천을 남겼다.”고 말씀하였습니다(눅12:32).
바울은 이것을 인용하면서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하였습니다(롬11:5). 하나님의 시야 안에서는 언제라도 은혜로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꼭 사람이 많고 능력이 있고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그런 것에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고 기대하지 않았던 곳, 은혜가 아니면 안 되는 사람들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시고 생명의 물줄기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
예수께서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소금이라면, 세상에서 부패치 않게 하는 역할을 하며 이 땅을 살 맛 나는 곳을 만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빛이라면, 저들 때문에 세상은 희망이 있고 저들이 있어서 세상은 기쁨의 곳이 되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자면 첫째로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처럼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일입니다(계2:4). ‘처음 사랑’은 으뜸인 것, 가장 귀중한 것이란 의미입니다. 교회는 가장 귀중한 것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열매를 주어 먹게 하겠다.”고 말씀했습니다. 가장 으뜸인 것, 가장 귀중한 것은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생명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떡”이며 “나를 먹으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을 먹게 하는 독특한 사역을 펼치셨습니다(요6:22-59).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에게 양식이 되어 그의 생명과 본성을 공급받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짐으로써 땅 위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 감추었던 생명나무였습니다.
둘째, 교회가 교회만의 가치를 지키는 일입니다. 교회의 가치는 크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바벨탑을 묘사하는 수식어는 ‘크다’는 것입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라고 말씀했습니다. 크다는 것은 세상적인 가치를 대표하는 말입니다. 교회가 큰 건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 세상에서 정치나 사회적인 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힘을 가지려 하기 때문에, 세상의 원리가 들어와 섞이고 마는 것입니다. 돈이 필요해지고 경영 마인드가 동원되고 직위나 학위로써 권위를 가지려 하다 보니, 세상과 혼합되어 부패하는 결과를 가져 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교회의 가치는 순결함과 아름다움에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을 묘사할 때 ‘크다’는 수식어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라고 묘사했습니다(계21:11). 작은 보석 하나가 돌 한 트럭보다 귀한 것입니다. 보석의 가치는 순도에 있듯이 교회의 가치는 얼마나 그리스도의 순도 높은 생명인가에 달려 있습니다. 작아도 순도 높고 아름다운 것이 보석이듯이 교회도 그러합니다.
셋째, 예수님의 소원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항상 “지금 여기에 임한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을 심을 땅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것은 농부가 씨를 뿌릴 밭을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명은 땅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사람을 회복하는 일이고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지금 여기서 맛보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모습니다. 그러나 이 땅 위에서 하나님 통치가 실현되는 주님의 갈망을 포기했을 때, 종말론적 심판과 내세의 천국을 지향하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이 땅을 여전히 사탄의 지배아래 두게 되는 것입니다. 현실이 없고 내세지향적인 메시지들로 채워지게 되니, 세상이 요구하는 도덕적 수준도 충족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 시대의 물음들 앞에서 답을 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땅을 회복하는 사명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방법은 언제나 바깥을 고쳐서 속까지 고치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근원적인 문제를 고쳐서 그 변화가 필연적으로 밖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한 목적과 계획을 실현하는 데, 그것이 이 땅 위에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계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