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사갈-교회생활(창49:14-15)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서 섬기리로다.(창49:14-15)
잇사갈은 교회 생활을 상징하는 축복을 받았다.
유다는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스불론은 해변에 거함으로서 복음 전파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잇사갈은 복음 전파로 인해서 얻어진 결과인 교회 생활을 상징한다.
나귀 새끼를 포도나무에 맨다고 했는데
이것은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에게 매임으로서
참된 승리의 안식을 누리고 있는 그림이다.
참된 안식은 일도 안하고 가만히 앉아서 쉬는 것만을 말하지 않고
스불론을 통해 넓은 해변에 정박한 배를 띄워서 복음을 선포하고 전하는 것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를 의미하고
꿇어앉았다는 말은 나귀가 짐을 싣고 수고로이 여행을
하는 자리에서 돌아와서 쉬는 자세로 만족과 안식이라는 뜻이다.
복음이 전파되어 교회가 이루어졌으니까 거기는 안식과 만족이 있다.
유다는 사자 새끼였다. 이것은 싸우는 그리스도를 의미했다.
그리고 숫사자는 승리하신 그리스도, 암사자는 번식하는 그리스도로
상징되었는데 스불론을 통해 생육 번성 충만에 이르게 되었고
잇사갈은 건장한 나귀니까 교회 생활 안에서 아주 당당하게,
힘있게 교회 생활을 누리고 있는 이런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다.
계시록에 일곱 교회 사이에 그리스도가 왕래하신다 이런 말이 나온다.
흰 옷을 입고 발에 끌리는 옷을 입은 분이 등대 사이를 왕래하시더라,
등대는 바로 일곱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었으니까 교회들 사이에
왕래하신다는 것은 교회를 돌보고 계신다는 뜻이다.
어깨를 내려서 짐을 매고 압제 아래서 섬긴다 했는데
어깨를 내려 짐을 맨다는 말은 짐을 지기 싫으면 어깨를
더 높이 올릴 것이다. 더 높이 올려서 짐 싣기 어렵게 만든다는 뜻이고
어깨를 내린다는 것은 짐을 지게 해 달라고 구부린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내게 짐을 지어주십시오 그런 뜻이다.
교회 생활은 낙헌 제물이라 하겠다.
요즈음 구속의 복음으로 승리한 복음 선포의 사실은
힘든 전쟁 후 기쁨과 즐거움과 나눔의 잔치를 누리는 것과 같다
하나님 나라는 구속의 복음으로 그리스도가 승리한 후에 이루어지는
사람 존재의 승리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자신이면서 우리들의 잔치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절기가 있다.
유월절이라든지 장막절이라든지 추수절이라든지
이런 절기가 있는데 이런 절기들은 모두 축제를 의미한다.
교회 곧 하나님의 장막은 축제의 곳이다.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왜냐하면 승리가 왔으니까 즐거워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승리가 있기 때문에 축제를 하는 것이니까 즐거운 것이다.
우리는 구속의 복음 안에서 인격이신 그리스도가 승리했다,
인류사에서 처음으로 사람이 사탄을 이긴 자리가 새 피조물의 위치다,
그리고 천사보다 높은 사람 후사의 지위를 확보했다 하는 승리의 축제다
요즘 인간승리라고 많이 하는데 세상에서의 승리는
자기 직업이나 소유 명예 등등 이런 것에 성공했다는 뜻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는 구속의 복음으로 만유를 포함한 우주적인 승리다.
사탄에게 패배해서,
속아서 선악과를 먹고 동산을 쫓겨났던 인간 가운데서 한 대표자가,
새로운 대표자가 완전히 그 원수를 정복하고 이 땅 위에 새로운
나라가 건설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얼마나 즐거운 것이겠는가?
교회는 초상집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승리의 보고를 통해서 이루어진 교회로 잔치 집이다.
잔치 집은 조용한 곳이 아니라 즐거운 곳이니까 시끄럽다.
노래 부를 사람은 노래 부르고 춤 출 사람은 춤추는 이것이 잔치 집이다.
신명기 33장 18절에 스불론이여 너는 나아감을 기뻐하라 했고
잇사갈이여 너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라 했다.
나아감을 기뻐하라는 말은 복음 전파를 말하고 장막(교회)에 있음에
즐거워하라는 말은 교회생활을 잔칫 집으로 누리라는 말이다.
신약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장막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이니까
임마누엘로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과 함께 있더라,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그렇게 되어 있다.
한 장막에 거한다는 것은 둘이 하나 되었다는 뜻이다.
요한계시록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과 함께 있더라
그렇게 표현한다.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되었음을 의미한다.
교회 생활은 둘이 하나되는 생활이다.
둘이 하나 되면 사람은 행복하다.
사람과 사람이 마음과 마음이 완전히 통할 때,
서로 하나될 때 그때 사람은 행복한 것이다.
주님이 승리하신 하고 좋아하지만 그 분만 그리 되면 무엇하겠는가?
동시에 이분 안에서 나자신으로 내 승리를 축하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각자 자기의 축제가 되기도 하고 자신들이 하나된 우리들의 잔치로
우주적 잔치가 되니까 이것이야말로 사탄이 있을 자리가 없는 것이다
사탄의 머리는 여자의 후손으로 상해지는데 이 사람이
여자의 후손으로 예수요 그리스도지만, 이 안에서 구속의 복음을
자신의 운명으로 아는 사람들이 곧 작은 예수들로 우리 자신이다.
예수님은 어째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된다 했는가?
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는가? 그가 십못내 죽음으로 구속의
승리자로 왔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수 있다.
교회는 사탄을 이기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아무리 별 것을 다 해서 교회 모습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교회라고 할 수는 없다.
에베소 교회가 맨 처음 회복될 때 어떻게 회복되느냐 하면
이기는 자에게는 하나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를 줘서 먹게 했다.
교회는 생명 나무로부터 시작이 된다.
라오디게아 교회로 가는 에베소 교회는 생명 나무로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맨 마지막 일곱 번째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는
나는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는다 그렇게 되어 있다.
이것은 한 식구가 된다는 뜻이다.
교회 생활은 이 우주 안에서
가장 신비하고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비밀이다.
사탄은 십못내 예수님과의 전쟁에서 완전히 졌다.
완전히 패배했는데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왜 그런가 하면 세상은 아직도 자기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싸움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와 사탄과의 씨앗의 싸움이 아니라
이미 십못내 구속 복음 안에서 결정이 되었지만 밭의 싸움이 것이다.
생명나무이신 구속의 씨의 밭이냐 속이는 자의 선악과의 밭이냐의 싸움이다
두 씨앗의 싸움은 흙이 어느 씨앗의 밭이 되는냐의 싸움이다
십못내의 예수 안에서 회복된 구속의 자리가 나의 운명으로 시인되면
생명나무이신 그리스도의 에덴동산의 밭이 되지만
선악과의 가라지 밭이 되면 땅을 패괴케하는 저주의 황무지 밭이 된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언제 그가 묶여서 불 못에 들어가는가?
그것은 왕국이 끝난 다음이다. 천년 왕국 동안에 사탄은 묶여서
무저갱으로 들어간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인봉 되었다고 한다.
천년 왕국은 승리하는 나라를 말한다. 왕들의 나라라는 뜻이다.
오늘 날 사탄이 왜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가 하면
교회가 완전하게 승리하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 사탄을 멸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할 수 있지만
소용이 없다. 오직 십못내 구속의 최종적 복음을 선포함에서 주어다
이것은 우리 몫이다. 곧 우리들로 선포가 되어지는 교회의 몫이다.
예수님은 이미 멸하여 줬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머리를 상하게
해 줬으니까 우리는 구속 복음인 예수 안에서 선포하는 우리의 일이다.
양의 우리들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다,
이 그림을 상상해 보자. 양의 우리들이 쫙 있는데
그 사이에 우뚝 솟은 나귀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양 우리를 보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양 무리들이 놀고 먹고 잔치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하늘에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고
땅 위에서는 교회들 사이에 계신다. 요한 계시록 일장이
바로 그것을 말씀한다. 일곱 등대 사이를 왕래하신다.
머리는 정금과 같고 옷은 흰옷을 입었고
발에 끌리는 옷을 입었고 발은 빛나는 주석과 같고
불꽃같은 눈을 가지고 일곱 등대 사이를 왕래하시더라.
교회를 돌보고 계시고 교회 안에 있는 승리를 누리고 있는 모습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하늘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고 땅에도 계신다는 말이다.
처음 세 그룹은 르우벤 시므온 레위는 인간의 본성을 상징한다.
두 번째 그룹은 유다와 스불론과 잇사갈이었다.
인간은 분명히 처음 그룹처럼 그런 것이 인간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결국 어디로 왔는가? 유다와 스불론과 잇사갈에게로 왔다는 뜻이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르우벤이었고 시므온이었고 레위였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유다고 스불론이고 잇사갈이다.
레아의 여섯 아들들, 처음에 넷을 낳고 빌하를 통해서 단과 납달리
실바를 통해서 갓과 아셀의 아들 둘을 낳았다.
친 소생이 여섯이고 여종의 소생 둘을 합해서 여덟 명이 레아의 소생이다.
이 여섯 명의 그룹은 우리가 아담 안에 있다가
그리스도 안으로 오는 것을 상징으로 보여주고 있다.
최종적인 열매는 바로 교회다.
결국 우리는 아담 안에서 실패한 사람들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를 얻게 되는데 최종적으로는 교회 생활 안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