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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4강)
4. 한나의 기도-낮은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
“한나가 기도하여 이르되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 보시느니라.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풍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아니하도다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그가 그의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에서 우레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내리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 엘가나는 라마의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그 아이는 제사장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삼상2:1~11).”
1. 주의 구원을 기뻐함
한나의 기도(삼상2:1-11)는 주님의 구원을 기뻐하는 시로 구성되어 있다.
가. 뿔을 높여주심(낮은 자리에서)
‘여호와는 내 뿔을 높여주시는 분이다. 내 입을 크게 열어주시는 분이다.’라고 찬양하고 있다. ‘뿔을 높여준다.’는 말은 ‘낮은 자를 높여준다.’는 뜻이다. 짐승들은 뿔이 힘의 상징이다. 그래서 높여준다는 그런 뜻이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찬양을 받으려고 하시는가? 왜 우리를 낮은 자리에서 높은 자리로 올려주려고 하시는가? 하나님은 흙으로 자신의 형상을 빚으시고 우리를 인생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찬양받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판자조각으로 방주를 지어서 그 세대에서 노아와 여덟 식구를 구원하신 하나님, 갈대아 우르에서 갈 바를 알지 못하던 아브라함을 불러내서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삼으신 하나님, 야곱을 끈질기게 다루시고 변화시켜서 이스라엘 되게 하신 하나님, 80살에 모세를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게 하신 하나님, 다윗으로 이스라엘 왕을 삼으신 하나님, 이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다. 이것은 모두 낮은 자를 높여서 하나님께서 그 뿔을 높여주신 일들이다.
인생이 높아질 곳, 사람이 존귀해질 곳은 하나님 앞과 하나님 나라에서 뿐이다. 하나님이 없으면 사람은 다른 동물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또 다른 동물들에 비해서 더 행복한 것도 아니다. 더 잘난 것도 아니고 더 편리한 것도 아니다. 더 오래 사는 것도 아니고 힘이 더 센 것도 아니다. 사람이 가장 존귀하고 가장 높아지는 이유는 하나님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 형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우리가 가장 존귀한 것이다. 우리가 문화와 문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장 존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사자나 코끼리처럼 힘이 세다든지 갈매기처럼 편리하게 생겼다면 문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약하기 때문에 문명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다른 동물에게 자랑할 일이 절대로 못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신의 형상으로 삼으실 때만 우리는 높은 가치를 가지게 된다. 만물들에게 우리는 당당하게 ‘너희는 힘도 세고 오래살기도 하고 편리하기도 하지만, 너희는 하나님을 나타낼 수가 없지 않느냐. 우리는 약하고 힘이 없지만 하나님을 나타낼 수 있지 않느냐!’ 이것을 자랑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없으면 존귀해질 수가 절대로 없다.
하나님이 없으면 우리 설 자리가 없다. 하나님 나라가 있어야만 우리가 존귀해지게 된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존재라 하더라도 그것을 표현해줄 나라가 없다면 존귀한 자가 될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신 분이었지만 자기 나라가 없었기 때문에 멸시를 받았고 십자가에 죽게 되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더라(요1:11).”는 것이다.
그가 이제 교회 안에서 영접을 받고 영광을 받는 것은 그의 나라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고, 그 나라를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그 나라가 있어야 주님 자신이 영광을 받으실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땅 위에서 천대받고 멸시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에 이 땅 위에서 꼭 영광을 받아야할 분이다. 하늘에서는 이미 창세전부터 영광스럽게 되었기 때문에 다시 영광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나라 때문에 영광을 받으신다면 우리도 역시 하나님 나라가 있어야 우리의 삶이 영광스러워지게 된다. 하나님이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 우리를 사용하실 때, 그리고 우리가 그의 단체적인 표현이 되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 때, 그때 우리는 높은 자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참된 구원이다. 죄인이 죄를 용서받은 것도 구원이지만 그러나 죄인이 단지 죄를 용서받았다고 해서 영광스러워지는 것은 아니다.
한나는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함이니이다.” 하고 기도하였다. 한나는 아기를 못 낳는다는 이유로 멸시를 받던 여자였는데 아기를 낳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사건은 ‘아기를 낳느냐, 못 낳느냐’ 하는 문제였지만 그의 찬양은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구약의 모든 것은 이런 원칙으로 오늘 우리에게 축복이 된다. 적을 물리쳤다고 할 때, 그들은 현실적으로 대적과 싸워서 이겼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그러나 단지 그런 역사적인 사건만이라면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은 편들고 이방인은 편들지 않는가? 하나님은 불공평하다.’ 이런 문제가 생긴다. 그런데 사건은 그 사건이지만 성경이 계시하는 것은 거기서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는 것이다.
한나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 아기 못 낳다가 낳은 사람은 수없이 많다. 그렇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는 것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한나는 결국 아기를 못 낳다가 아기를 낳은 것으로 해서 주님의 구원을 기뻐하고 찬양을 드리게 되었다.
이것이 신약 안에서는 ‘우리의 뿔을 높여주신 하나님, 인생을 높여주신 하나님’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한나처럼 나도 아기를 못 낳다가 낳으면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전쟁에서 이겼으니까 여호와를 찬송한다거나 축구경기에서 이겼다고 무릎을 꿇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는 이런 유치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구약에 있는 모든 사건과 계시들은 신약을 향하여 있다. 그러므로 신약 안에서 ‘무엇이 참 구원인가?’ 하는 것을 알 때 만민이 다 이 안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구약의 구원은 이스라엘 밖에 참여 할 수 없지만 신약의 구원은 온 인류가 참여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낮은 자를 높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흙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빚은 것, 판자 조각으로 방주를 지은 것, 아브라함을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게 하신 것, 80살에 모세를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게 하신 것, 이것이 낮은 자를 높여주신 일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다. 가난한 자는 밥이 없어서 가난하다는 차원이 아니고,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가난한 것을 말하고 있다.
나. 입을 크게 열어주심(원수 앞에)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하나님 앞에서와 원수 앞에서 입을 크게 열어주신다는 것이다. 주님이 낮은 자를 높여주시고, 약한 자를 강하게 해주시니까 주의 영광을 자랑하는 입을 열어주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낮은 자를 높여주시고, 인생을 존귀하게 하시고, 흙을 가지고 사람을 빚으시는 분이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주님의 영광을 자랑하는 일이다.
전에 우리는 이런저런 이유로 입이 닫혀있던 사람들이었다. 세상을 보면 항상 나보다 나은 사람만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평 없는 인간이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주의 영광을 자랑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언제 우리는 참으로 입이 열릴 수 있는가? 낮은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는 어떤 환경에 있든지 전혀 관계없이 주의 구원을 찬양할 수가 있다.
한나가 아기를 낳지 못하다가 아기를 낳았으니까 찬양을 했다면 우리는 더 다른 차원에서 흙으로 인생을 만드신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는 것이다. 자기 존재를 발견한 사람은 영원히 찬양할 수 있게 된다. ‘나는 흙이었는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졌구나! 나는 하나의 판자조각이었는데 방주가 되었구나! 나는 야곱이었는데 이스라엘이 되었구나!’ 이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의 환경과는 전혀 상관없이 찬양하게 된다. 자기의 뿔을 높이신 분을 알기 때문에 그분을 찬양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을 찬양하고 인생을 감사하는 일이다. ‘인생은 복되다. 나는 참 행복하다. 감사하다.’ 하는 것은 내 뿔을 높여주신 분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과 사람을 자랑하는 것,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과 내 인생을 복되다고 하는 것은 하나이다.
내 소유로 인해 복된 사람이 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한 인격 때문에 복된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땅에 오시고 사람 속에 와서 인생의 과정을 거치면서 인격이 되셨다. 그러므로 이 인격이신 그리스도는 과정을 거친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단지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아니고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이다. 이것이 바로 인격이다. 그러므로 이 인격이야말로 이 우주 안에서 가장 존귀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과해서 존귀해진 인격이기 때문에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것은 없다.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우리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17:4).” 그랬더니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마17:5).” 하였다. 그 말을 듣고 그는 심히 두려워했다. 모세와 엘리야는 제쳐놓고 예수가 가장 존귀하다는 뜻이니까 이것은 돌에 맞아 죽는 것에 해당된다. 유대인으로서는 두려운 말이다.
나사렛 예수, 목수의 아들, 그 한 사람이 우주 안에서 가장 존귀한 인격이라는 것, 이것보다 더 놀라운 일은 없다. 그리스도는 인생의 과정을 거치신 하나님이다. 바로 이 인격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 구원을 기뻐한다.”고 말한다.
인생 자체가 어디서 왔는지, 내가 지금 누군지, 내가 지금 무엇인지를 안다면 영원히 주님을 찬양할 것이고, 이런저런 이유로 불평불만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우리 자신이 너무 존귀해지니까 그렇다.
내가 아무리 많은 소유를 가졌더라도 내 자신이 존귀해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찬양할 수가 없다. 특별히 이스라엘이 우리를 대신해서 경험한 대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소유에 대한 은혜와 외적인 축복을 받았다. 그런데 그들은 그 시간만 지나가면 또 불평하였다. 그것은 존재가 영광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않는 것 같은데 영원히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그 존재 자체가 영광스럽기 때문이다. 흙으로 사람을 빚으신 이 사실을 깨달으면 우리 존재가 얼마나 존귀한지 알게 된다.
한나의 기도나 구약전체를 보면 원수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원수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과정을 거친 한 인격을 무시하는 자들이다. 구약 안에서는 블레셋이나 아말렉 같은 현실적인 적들이다. 그런데 그 원수들을 통해 계시된 것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적들이 있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인격을 무시하는 것이 사탄의 일이다. 이것을 발견할 때 비로소 성경을 발견하는 것이다.
사탄은 인격을 무시하기 위해 소유를 가지고 도전했던 것이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이며 가로되 내게 절하라. 성전 꼭대기에 세워놓고 뛰어내려봐라.’ 이렇게 도전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전혀 소유로 대항하지 아니하고 인격으로만 대답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주 하나님께만 경배하라. 주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오직 자기 자신의 인격의 어떠함만을 내놓았다. 그러니까 이것은 소유 대 인격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천사는 원래 하나님이 부리는 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능력과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포클레인을 만든 것은 손으로 흙을 파는 것보다 훨씬 많이 파기 위해서다. 천사도 하나님이 일하시기에 편리하도록 만들어놓은 것이니까 많은 능력과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인격이 없다. 그래서 사람을 시기하는 것이다. ‘나는 사람보다 월등한데 왜 나보다 사람이 더 존귀한가?’ 이에 대한 도전이 천사의 도전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도전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소유를 가지고 있는 천사를 소유를 가지고 이겨보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고, 이것이 바로 종교일 수도 있다. 절대로 우리는 능력과 기능에 있어서 천사를 이길 수가 없다. 사람은 오직 인격 밖에는 자랑할 게 없다. 만일 천사 앞에서 우리의 능력이나 기능이나 기술을 자랑한다면 결국 부끄러움을 당하고 만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앞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를 내놓는 것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천사에게서는 능력과 기술을 필요로 하시고, 사람에게서는 당신 자신을 표현할 인격을 필요로 하신다. 그래서 사람을 자기표현이 되게 하셨다. 자신의 몸으로 우리를 입으신다는 것이다. 천사는 하나님의 소유, 어떤 기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몸이다. 이것이 연합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은 분리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은 천사와 다르다.
다. 하나님은 주(主)이심
‘주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다. 이런 구절은 구약에서 수없이 나온다. 그들에게는 어째서 주밖에 없다고 했는가? 여호와는 아말렉이나 블레셋, 바로를 이기시는 분이기 때문에 어떤 현실적인 이유로 그러했을 것이다.
신약 안에 와서는 그와는 다른 차원으로 주밖에 다른 이가 없다고 인식했다. 나를 지으신 분, 내 존재를 존재 되게 하신 분, 나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용하신 분, 당신의 표현으로 사용하시는 분, 그렇기 때문에 주님밖에 누가 나를 더 존귀하게 하시는 이가 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시다.” 하였다. 반석은 우리 인생의 기반이고 우리 인격의 기반이다. 우리 인격은 하나님 자신에게 기초하기 때문이다. 우리를 높이시고 지지하시는 분, 우리로 당신을 표현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영광스러워질수록 그분은 우리에게 더 존귀한 기반이 되는 것이다.
아마 그 당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존귀한 그리스도가 되신다면 하나님이 큰 손해를 보는 줄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인격을 높이는 것은 하나님을 격하시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인생이 존귀해질수록 그렇게 하신 하나님이 존귀한 분이 아니겠는가. 그가 우리의 반석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사람들이 잘 모르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오늘날 많은 종교적인 사람들, 또는 극단적인 보수주의자들은 ‘오직 하나님만 높여야 되는데, 어떻게 사람을 존귀하다고 하느냐?’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존귀하다고 하면 상대적으로 하나님이 비천해진다는 것이다. 손해가 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존귀해지면 내 몸도 존귀해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 몸이 존귀해지면 내 마음도 존귀해질 것이다. 나와 내 마음은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이 현실 안에서 그들의 반석이 되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게는 근본 안에서 내 인격의 기반이 되시는 분, 즉 나를 존귀하게 하시는 분이 있어서 내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표현한다 하더라도 하나님 자신이 내 안에서 존귀하게 된 만큼 그 존귀한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등이 밝으면 밝을수록 전기가 좋다는 것과 같다.
라. 하나님은 주권자(주권자)이심
한나의 기도의 초점은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다.’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낮은 자를 높이신다. 교만한 자를 저울로 달아보신다. 용사의 활은 꺾어진다.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띤다. 주리던 자는 배부르게 되고 잉태치 못한 자는 일곱 아들을 낳지만 아들을 가진 자는 쇠해진다.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시는 분이다. 음부에 내리기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 분이다.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는 분이다. 낮추기도 하시도 높이기도 하시는 분이다. 땅의 기둥은 여호와의 것이다. 세계를 그 기둥위에 세웠다.’라고 기도하였다.
‘자기의 왕에게 힘을 주시고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뿔을 높여주시는 분이다.’ 하는 것은 하나님은 주권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앞에서 아무 것도 자랑할 수 없고,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기 때문에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하신다. 주기도 하고 가져가시기도 하신다.’라고 하였다.
이 시 가운데 중요한 것은 ‘낮은 자를 높이신다.’는 것이다. 그는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낮은 자를 높이신다. 세상에서는 유능한 자나 놀라운 자를 찾고 있는데, 왜 하나님은 낮은 자를 높이시는가? 이것을 알면 하나님 나라에서는 누가 필요한가를 알 수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경륜에 관계된 문제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과 사람이 합해서 하나의 왕국을 갖는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라는 말은 ‘나는 너의 절대적인 주권자가 되고’라는 말이다. 절대적인 주권을 받아들일 자는 낮은 자밖에 없다. 그래서 천사 대신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다. 농사짓는 사람은 씨를 뿌려서 소출을 얻으려는 경륜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씨가 잘 발아될 수 있는 완전히 썩은 흙을 찾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경륜의 목표가 당신의 나라이기 때문에 낮은 자, 가난한 자, 비어있는 자, 배고픈 자를 찾는다. 그래야만 당신의 경륜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어떤 가능성이 있을 때는 하나님께 100% 순종할 수 없고 하나님을 받아드리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나를 전적으로 낮은 자리에서 쓰시는 분을 발견할 때, 나는 나 자신에게로부터 해방되게 된다. 더 이상의 다른 짐을 지고 갈 필요가 없고, 더 이상의 다른 것을 준비해서 갈 필요가 없기 때문에 해방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한나의 기도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뿔을 높여주신 하나님, 입을 크게 열어주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 때문이다.
아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