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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개의 고원 (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1980)
들뢰즈/가타리(G. Deleuze et F. Guattari), 김재인역, 새물결, 2001(1980). 1000쪽.
제1장 입문: 리좀 11-55 Introduction: Rhizome 9-37
[1976년 미뉘 출판사에서 나왔고, 여기에 1980년 수정되어 실렸다.]
§01.0. Introduction: Rhizome 9-37
- Racine, radicelle et rhizome. - Problèmes des livres. - L'Un et le Multiple. - Arbre et rhizome. - Les directions géographiques, Orient, Occident, Amérique. - Les méfaits de l'arbre. - Qu'est-ce qu'un plateau.
[도판 그림(9쪽): Sylvano Bussoti, Cinq pieces pour piano pour David Tudor, avec l'aimable autorisation de G. Ricordi, Milano. - 실바노 부소티(Sylvano Bussoti, 1931-) 이탈리아 음악가로 존 케이지(John Cage)의 영향을 받아 12음기법을 작곡하였다.]
§01.1 뿌리, 잔뿌리, 리좀 11 Racine, radicelle et rhizome. 9
11우리는 둘이서 안티 외디푸스(1972)를 썼다. 우리들 각자는 여럿이었기 때문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셈이다. 우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있은 것에서부터 가장 먼 곳에 있는 것까지 손에 닿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이용했다. .. 더 이상 ‘나’라고 말하지 않는 지점에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고 말하든 않든 더 이상 아무 상관이 없는 지점에 이르기 위해서.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이 아니다.(9, 11) [주체는 부분으로 경계를 가질 때 주체이다. ‘나’ 즉 자아는 자기와 더불어 있는 다양체로서 우리 일뿐이다. (42TLI) / 둘 만이 아니라 “나”도 여럿으로 되어 있으며, 35억년을 거슬러서부터 생각하면 다양체란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그 다양체의 욕망(사랑, philo)가 삶의 근원적 충동이며, 이로써 생의 도약이 여전히 내재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50LMJ)]
11-1책에는 대상도 주체도 없다. 책은 갖가지 형식을 부여받는 질료와 매우 다양한 날짜와 속도들로 이루어져 있다. (9, 11)
하지만 책에는 탈주선, 탈영토화 운동, 지각 변동(=탈지층화) 운동들도 있다. 이 선들을 좇는 흐름이 갖는 서로 다른 속도들 때문에, 책은 상대적으로 느려지고 엉켜 붙거나 아니면 반대로 가속되거나 단절된다. 이 모든 것들, 즉 선들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이 하나의 배치물(agencement)을 구성한다. 책은 그러한 배치물이며, 그렇기에 특정한 누군가의 것이 될 수 없다. 책은 하나의 다양체(multiplicité)이다. (10, 12) [말라르메의 이지투르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42SMG)]
책의 기관 없는 몸체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다. 고려되고 있는 선들의 본성에 따라, 선들의 농도나 고유 밀도에 따라, 선들을 선별해내는 “고른판”에 선들이 수렴할 가능성에 따라 여러 기관 없는 몸체들이 있다. (10, 13)
이처럼 책이 그 자체로 작은 기계라면, 이 문학 기계는 전쟁 기계, 사랑 기계, 혁명 기계 등과 그리고 이 모든 기계들을 낳는 추상적인 기계와 어떤 측정 가능한 관계를 맺고 있는가? ... ...클라이스트(Kleist, 1777-1811)(34살))와 미친 전쟁 기계, 카프카(Kafka, 1883-1924))와 전대미문의 관료주의 기계 …(10, 14)
우리가 말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니라 다양체들, 선들(lignes)[방사선], 지층들과 절편성들, 도주선들과 강도성들, 기계적 배치물들과 그것들의 다른 유형들, 기관없는 몸체들과오그것들의 구조 및 선별, 고른판, 각 경우에서 측정 단위들이다. 지층측정기들(les stratomètres), 파괴측정기들(les déléomètres), 밀도로 된 CsO 단위들, 수렴의 CsO 단위들은 글을 양화할 뿐만 아니라 글을 언제나 어떤 다른 것의 척도(mesure)로 정의한다. (11, 14) [다양체는 세고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잰다.]
§01.2 책들의 문제들 14 Problèmes des livres. 11
14-2책의 첫째 유형은 뿌리-책(le livre-racine)이다. 나무는 이미 세계의 이미지이다. 또는 뿌리는 세계-나무의 이미지이다. 그것은 유기적이고 의미를 만들며 주체의 산물인(이런 것들이 책의 지층들이다), 아름다운 내부성으로서의 고전적인 책이다. (11, 14)
이 사유 체계[이항 논리 체계]는 결코 다양체를 이해한 적이 없었다. 정신의 방법을 따라 둘에 도달하려면 강력한 근본적 통일성을 가정해야 한다. (11, 15) [진위, 선악, 미추를 나누는 체계는 다양체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 정24면체에서 이분법은 있을 수 없다. (42TLI)] / [철학사에서 칸트는 이원론의 회의로 형이상학의 불가능성을 말하고, 헤겔은 변증법을 통해 절대자로서 통일성(단위)를 구축한 셈이다. (50LNA)]
이항 논리(la logique binaire)와 일대일 대응 관계는 여전히 정신분석(슈레버에 대한 프로이트의 해석에서 나타나는 망상의 나무), 언어학, 구조주의, 나아가 정보이론까지도 지배하고 있다.(11-12, 16)
16어린뿌리 체계(le système-radicelle) 또는 수염뿌리 체계(racine fasciculée)는 책의 둘째 모습인데, 우리 현대인은 곧잘 그것을 내세운다. 이번에 본뿌리는 퇴화하거나 그 끄트머리가 망가진다. 본뿌리 위에 직접적인 다양체 및 무성하게 발육하는 곁뿌리라는 다양체가 접목된다. (12, 16)
아무리 파편적인 작품이라도 “전집(l’Oevre totale)”이나 “걸작(le Grand Opus, 총서)”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12, 16-17)
다양체를 구조 안에서 파악하는 자들은 언제나 다양체의 증대를 조합의 법칙으로 환원시켜 상쇄시키고 만다. 여기서 통일성을 유산시키는 자들은 정말이지 천사를 만드는 자들(doctores angelici) 이다.
바꿔 말하면 수염뿌리의 체계는 이원론, 주체와 객체의 상보성, 자연적 실재와 정신적 실재의 상보성과 진정으로 결별하지 않는다. 즉 통일성은 객체 안에서 끊임없이 방해받고 훼방 당하지만 새로운 유형의 통일성이 또다시 주체 안에서 승리를 거두고 만다. 세계는 중심축을 잃어버렸다. 주체는 더 이상 이분법을 행할 수조차 없다. (12, 17)
뿌리-코스모스(cosmos-racine) 대신 곁뿌리-카오스모스(chaosmos-racine)라는 이미지로. 파편화된 만큼 더 더욱 총체적인 책이라는 이상야릇한 신비화. 세계의 이미지로서의 책이라, 이 얼마나 무미건조한 생각인가. 사실상 “다양체 만세(Vive le multiple, 다수 만세, [곱셈만세])”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12-13, 17-18)
하지만 언제나 상위 차원을 덧붙임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가장 단순하게, 냉정하게,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차원들의 층위에서, 언제나 n-1에서(하나가 다양의 일부가 되려면 언제나 이렇게 빼기를 해야 한다). 다양체를 만들어내야 한다면 유일(l'unique)을 빼고서 n-1에서 써라. 그런 체계를 리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땅밑 줄기(la tige souterraine)의 다른 말인 리좀은 뿌리나 수염뿌리와 완전히 다르다. 구근들(les bulbes)이나 덩이줄기들(les tubercules)는 리좀이다. 뿌리나 수염뿌리는 갖고 있는 식물들도 아주 다른 각도에서 보면 리좀처럼 보일 수 있다. 즉 식물학이 특성상 완전히 리좀형태(rhizomorphique)로 되어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심지어 동물조차도 떼거리(meute) 형태로 보면 리좀이다. 쥐들은 리좀이다. (13, 18) [군집식물들은 리좀형태이며, 감자와 고구마는 리좀형태이며, 굴을 뚫고 모여 사는 쥐들은 리좀형태이라 할 수 있다. / 들뢰즈는 마그마도 광물로서 리좀이라 한다. (50LNA)]
원리 1과 원리 2. 연결접속의 원리와 다질성의 원리 : 리좀의 어떤 지점이건 다른 어떤 지점과도 연결접속(connecté) 될 수 있고 또 연결접속되어야만 한다. ... ... 실제로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은 기계적 배치물 속에서 곧바로 기능한다. ... ... 촘스키(Chamsky)의 문법의 핵심, 모든 문장들을 지배하는 정언적 상징 S는 통사론적 표지이기 이전에 먼저 권력의 표지이다.(13-14, 19) [우리는 이 말에 동의한다. ‘날씨가 좋다(Il fait beau)’에서 일(Il)은 절대권력으로서 신이다. 그러나 다양체에서는 우연(hasard)이다. 예측 없는 일기예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측은 절대표지가 아니고 습관(경향)의 모습이다.]
우리는 그러한 언어학적 모델을 너무 추상적이라고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충분히 추상적이지 않다고, 언어를 언표의 의미론적, 화행론적 내용과 연결접속 시키고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과 연결 접속시키고 사회적 장의 모든 미시정치와 연결 접속시키는 추상적인 기계에 이르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14, 19)
그 자체로 존재하는 랑그란 없다. 언어의 보편성도 없다. 다만 방언, 사투리, 속어, 전문어들끼리의 경합이 있을 뿐이다. 등질적인 언어 공동체가 없듯이 이상적 발화자-청취자도 없다. 바인라이히(Weinreich)의 공식을 따르면 언어(la langue)란 “본질적으로 다질적인 실재성(réalité)”이다. 모국어란 없다. ... ... 나무에는 항상 계보적인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민중[인민]의 방법이 아니다. (14, 20) [언어학은 논리학과 문법학과 달리, 음성기호의 체계로서 실재성이다. 문법이 기표에 논리가 상징에 가깝다면 말이다. (50LNA)]
§01.3 일자와 다자. 20 L'Un et le Multiple. 14
20원리 3. 다양체의 원리 : 다양(다자 le multiple)은 사실상 실사로서 다양체로서 다뤄져야 한다. (14, 20)
다양체는 주체도 객체도 없다. ... ... 리좀이나 다양체로서의 꼭두각시 줄은 예술가나 공연자의 의지, 하나라고 가정된 의지가 아니라 신경 섬유의 다양체에 연결접속되어 있다. ... ... 물론 망상조직이라는 다양체는 텍스트 안으로 망상조직을 투영하는 배우라는 인물 속에 있다는 반대의견이 있을 수 있다. ... ... 리좀에는 구조, 나무, 뿌리와 달리 지정된 점이나 위치가 없다. 선들만이 있을 뿐이다.(14-15, 21) [베르그송에서 기억의 존재방식과 생성 현실화 방식에 닮았다. (42TLI)] [신경섬유의 다양체: 시냅스 이론(50LNA)]
글랜 굴드(Glenn Gould, 1932-1982)가 연주에 가속을 붙일 때 그는 단지 달인의 솜씨를 발휘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음악상의 점들을 선들로 변형시키고 악곡 전체를 증식시키는 것이다. (15, 21) [루소의 멜로디] [굴드(Glenn Herbert Gould 1932-1982) 카나다 피아니스트]
우리에게 측정 단위들은 없다. [단위자체는 임의성이다. 그러나 절대기준 1이 있는 곳에는 규정적이다] 다만 측정의 다양체들 또는 측정의 변이체들만 있을 뿐이다. 통일성(=단위)이라는 개념이 나타나는 것은 하나의 다양체 안에서 기표가 권력을 장악하거나 아니면 그에 상응하는 주체화 과정이 생겨날 때뿐이다. (15, 22)
다양체들은 바깥(le dehors)에 의해, 즉 추상적인 선, 탈주선(ligne de fuite) 또는 탈영토화의 선에 의해 정의되며, 다양체들은 이 선에 따라 다른 다양체들과 연결접속하면서 본성상의 변화를 겪는다. 고른판(le plan de consistance, 격자판, grille)은 모든 다양체들의 바깥이다. 탈주선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첫째, 다양체가 실제로 채우고 있는 유한한 차원들의 수가 실재한다. 둘째, 다양체가 이 선에 따라 변형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보완적인 차원도 존재 불가능하다. 셋째, 이 차원들이 어떤 차원이건 간에 이 모든 다양체들은 단일한 고른판 또는 외부성의 판 위에서 판판하게 만들 수 있고 또 만들어야 한다.(15-16, 22-23)
원리 4. 탈기표작용적인 단절의 원리 : 이것은 구조들을 분리시키는 절단, 하나의 구조를 가로지르며(traverser) 너무 많은 의미를 만들어내는 절단에 대항한다. (16, 24)
탈영토화의 여러 운동과 재영토화의 여러 과정은 끊임없이 가지를 뻗고 또 서로를 받아들이고 있다. ... ... 한편 말벌은 서양란의 생식 장치의 한 부분이 됨으로써 탈영토화되기도 하지만, 서양란에 꽃가루(le pollen)를 옮김으로써 서양란을 재영토화한다. 말벌과 서양란은 서로 이질적인 한에서 리좀을 형성한다. (17, 25)
레미 쇼뱅(Rémy Chauvin, 1913-2009)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 “서로 아무런 관계도 없는 두 존재의 비평행적 진화” (17, 25) [동지들 사이에 인격성의 완성은 비평행적 진화일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청년애도 마찬가지이다. (50LNA)]
자콥(François Jacob, 1920-2013)이 말하듯이, 바이러스나 다른 절차를 통해 유전 물질이 이동하는 것과 서로 다른 종에서 유래한 세포들이 융합한 결과는 “고대와 중세에는 소중한 것이었던 반인륜적 연애”와 유사하다. 분화된 선들을 횡단시키면 계통수들이 뒤섞인다. .. 우리는 유전병이나 가문의 병보다는 다형적이고 리좀적인 독감(les grippes) 때문에 진화하거나 죽는다. 리좀은 하나의 반(反) 계보(une antigenealogie)이다.(18, 26-27) [씨받이를 의미하는 것일까?(40NKJ) - 가부장적 계보가 아니라 알리앙스(연대)로 사회진화가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42TLI)]
27책과 세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얘기를 할 수 있다. 뿌리 깊은 믿음과 반대로 책은 세계의 이미지가 아니다. 책은 세계와 더불어 리좀이 된다. 책과 세계의 비평형적 진화가 있다. 책은 세계의 탈영토화를 확실하게 해주지만 세계는 책을 재영토화하며, (그게 가능하다면, 그리고 그럴 능력이 있다면) 다시 책은 스스로 세계 안에서 탈영토화 된다. (18, 27) [책은 이미지가 아니다. 상징적(논리적)으로는 비트겐슈타인의 그림이론으로 보이지만, 책들은 과거의 기억으로서 현재의 우리 속에 녹아있는 실재성이다. 끊임없이 솟아나고 분산한다는 의미에서 탈영토화의 작업을 수행하고 그리고 또 누군가는 분야별로 수렴으로 재영토화할 것이다. (50LNA)]
글을 써라, 리좀을 형성하라, 탈영토화를 통해 너의 영토를 넓혀라, 탈주선이 하나의 추상적인 기계가 되어 고른판 전체를 덮을 때까지 늘려라. “우선 너의 오랜 친구인 식물에게 가서 빗물이 파놓은 물질을 주의 깊게 관찰하라 ... 나중에 이 마지막 식물들이 자기 씨를 퍼트릴 것이기에 너는 이 식물들 각각에서 시작하여 물질을 따라가며 너의 영토를 넓힐 수 있을 것이다” (19, 28)
29원리 5와 원리 6. 지도제작(製圖 cartographie))과 전사(轉寫 décalcomanie)의 원리: 리좀은 어떠한 구조적 모델이나 발생적 모델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리좀은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 같은 관념을 알지 못한다. (19, 29) [여기서 심층구조라는 관념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리좀이 땅밑이라고 해서 내부적 실재가 아니라 현실적 실재이라는 의미일 것이다.(40NKJ)- 심층의 흐름과 다른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42TLI)]
우리는 발생축이나 심층구조에 대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무한히 복제(=재생산)될 수 있는 본뜨기(calque)의 원리들이라고. 모든 나무의 논리는 본뜨기의 논리이자 복제(=재생산)의 논리이다. (20, 29)
30리좀은 그[사본, 복제본]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사본(le calque)이 아니라 지도(la carte)이다. 지도를 만들지, 사본을 만들지 말라. 서양란은 말벌의 사본을 재생산하지 않는다. .. 지도는 자기 폐쇄적인 무의식을 복제하지 않는다. .. 지도는 그 자체로 리좀에 속한다. 지도는 열려있다. 지도는 모든 차원들 안에서 연결 접속될 수 있다.(20, 30)
언제나 많은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아마도 리좀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일 것이다. .. 지도는 다양한 입구를 갖고 있는 반면, 사본은 항상 “동일한 것으로” 회귀한다. 지도가 언어수행(performance)의 문제인 반면, 사본은 항상 이른바 “언어능력(competence)”을 참조한다. 정신분석과 분열분석을 비교해 보라. 정신분석은 각각의 욕망과 언표를 발생축이나 덧코드화하는 구조에 맞춰 재단해내고, 축 위의 각 단계들과 구조 속의 구성인자들을 무한히 단조로운 사본으로 만든다. 분열분석은 복사된 숙명이라는 관념을 완전히 거부한다. (20, 30) [여기서 분열분석이란 자식들이 아버지와 같을 수도 없고, 또한 형제간에도 성질은 다르다.]
멜라니 클라인의 오류
31하지만 우리는 지금 지도와 사본을 좋은 쪽과 나쁜 족으로 대립시키면서 단순한 이원론을 복원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복사될 수 있다는 것은 지도의 고유한 특징이 아닐까? 뿌리를 교차시키고 때로는 뿌리와 뒤섞인다는 것은 리좀의 고유한 특징이 아닐까? ... 언제나 사본을 지도로 바꿔 놓아야한다. 그리고 이 조작은 앞에 열거한 조작과 전혀 대칭을 이루지 않는다. (21 31-32). ..
모델을 창조하고 끌어다 쓰는 것은 언제나 모방하는 자(l’imitant)이다. 사본은 이미 지도를 이미지로 번역해버렸다. 사본은 이미 리좀을 뿌리나 곁뿌리로 변형시켜버렸다. 사본은 자신의 의미생성의 축들과 주체화의 축들을 따라 다양체들을 조직하고 안정화하고 중성화했다. 사본은 리좀을 낳았고 구조화했다. 또한 사본은 자신이 다른 어떤 것을 복제하고 있다고 믿지만 실상은 자기 자신을 복제하고 있을 뿐이다. 사본이 그토록 위험한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다.(21, 32)
프로이트(Freud 1856-1939)의 꼬마 한스
멜라니 클라인(Melanie Klein 1882-1960)의 꼬마 리처드
욕망이 움직이고 생산하는 것은 언제나 리좀을 통해서니까. 욕망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면 반드시 내적인 추락들이 생겨, 욕망을 좌절시키고 죽음으로 몰고 간다. 하지만 리좀은 외부적이고 생산적인 발아를 통해 욕망에게 작동한다. (22, 33)
§01.4. 나무와 리좀 33 Arbre et rhizome. 22
33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거꾸로이긴 하지만 대칭적이지 않은 다른 조작을 시도해 보는일, 즉 사본을 지도에 다시 연결시키려고 시도해보는 일이 그토록 중요하다... 우리는 아이가 동물이 됨으로써만 달아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꼬마 한스에게 말(馬)-되기는 진정한 정치적 선택이었다). (22, 33)
지도나 리좀이 본질적으로 다양한 입구들을 갖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충분히 조심한다면 우리는 심지어는 사본들의 길이나 뿌리-나무들의 길을 통해서도 거기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마니교적인 이원론을 비판할 것이다). ... .. 사본-지도들이나 뿌리-리좀들 같은 서로 아주 다른 배치물들이 있게 된다. 리좀 안에는 나무 구조나 뿌리 구조가 있다. 하지만 역으로 나무의 가지나 뿌리의 갈래가 리좀으로 발아할 수도 있다. (23, 34)
우리는 나무라면 진절머리(fatigués)가 난다. 우리는 더 이상 나무들, 뿌리들, 곁뿌리들을 믿지 말아야한다. (24, 35)
35사유는 결코 나무 형태가 아니며, 뇌는 결코 뿌리내리거나 가지 뻗고 있는 물질이 아니다. 부당하게도 수상돌기라 불리는 뉴런들을 연속적인 조직 내에서 서로 연결접속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25, 35-36)
많은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나무가 심겨 있지만 뇌 자체는 나무라기보다는 풀이다. “축삭과 수상돌기는 나무딸기 둘레의 메꽃처럼 서로 감겨 있으며, 각각의 가시에는 시냅스(une synapse)가 달려 있다. (25, 36)[여기서 로즈의 시냅스(1975)는 단추(bouton)의 설명인 것 같고, 시냅스 사이가 떨어져 있다는 것은 최근이론인데 말이다. (42TLI)]
37나무나 뿌리, 그것은 우월한 통일성, 즉 중심이나 절편의 통일성에서 출발해 끊임없이 <여럿>의 흉내를 내는 사유라는 슬픈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25 37)
“한 사회에서 임의의 두 사람이 꼭 한 명[만]의 공통된 친구를 갖고 있다면, 다른 모든 사람의 친구인 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저 유명한 우정의 정리(定理)가 생긴다. (26, 38-39)... 이점과 관련해 저자들은 이를 독재의 정리라고 부른다. 이것이야말로 뿌리-나무의 원리이며, 또는 수염뿌리 형태의 해답, 결과이며, <권력>의 구조라는 것이다.(26 39) [우정의 정리에서 공통된 친구는 종교의 교주 또는 몸주일 것이다. 그래서 유일신앙의 메시아가 하나로 현실적으로 존재하면 그것은 권력구조이다.]
39두 작가[로장스틸(Rosenstiehl, 1933-)과 프티토(Petitot, 1944-)]는 이 중심화된 체계에 중심 없는 체계, 유한한 자동장치들이 그물망을 대립시킨다.(26, 39) ,
꼭 장군이 필요한가? 유한한 수의 상태들과 그에 상응하는 속도의 신호들을 포함하는 중심 없는 다양체에서는 전쟁 리좀이나 게릴라 논리의 관점에서 “장군(Général)”을 갖지 않는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중앙의 명렬(=질서)의 사본이나 복사물은 없는 것이다. 저자들은 심지어 기계적 배치물이나 기계 사회인 그러한 다양체는 중심화하고 통일화하는 모든 자동장치를 “반사회적인 침입자”로 거부한다는 것까지도 증명한다. (26-27, 39-40) [리좀-촛불은 권력-요강을 깨드릴 것이다. (50LNA)]
따라서 n은 언제나 n-1이다. 중심과 중심없음의 대립은 중심있는 사물과 중심없는 사물의 대립이 아니라 각각의 사물에 적용되는 계산 양식 간의 대립이라고 로장스틸과 프티토는 강조한다. 나무는 리좀에 상응할 수 있으며, 또는 역으로 갑자기 리좀으로 발아할 수 있다. 하나의 동일한 사물이 두 개의 계산 양식이나 두 개의 조절 유형을 인정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참이지만, ...(27, 40) [중심 없음(사발통문처럼)의 결사체들이 중요하다. /오일러는 수학에서 한 문제를 50가지로 풀수 있다고 한다. (50MKA)]
정신분석은 무의식을 나무구조에, 위계적 그래프에, 요약해서 설명하는 기억에 남근과 남근-나무 같은 중심기관에 복속시킨다. (27, 40) [정신분석이든 주지주의든 아버지 신앙자들이다. 인명진이 새누리에 들어간 이유이기도 하다. 이들이 자본의 지배하에 있지 권력의 지배하에 있지 않기 때문에, 곧 자본주도로 집결할 것이다. 나일강의 홍수처럼 촛불의 흐름이 미끈한 물처럼 휩쓸것인지 그 매끄러운 평지를 재영토화 재코드와는 다음의 일이다. 휩쓸지 못하면, 코드의 재코드화 묻혀서(국가보안법), 87년 30년인데 옹기를 깨지 못한다면 인민은 다음 세대까지를 또다시 노력하며 기다리며 신음할 것이다. (50MKA)]
그와는 반대로 분열분석은 무의식을 중심 없는 체계로, 다시 말해 유한한 자동장치들의 기계적 그물망(리좀)으로 여기며, 따라서 완전히 다른 무의식 상태에 도달한다. .. .. 문제는 무의식을 생산하는 일이며, 그와 더불어 새로운 언표, 다른 욕망을 생산하는 일이다. 리좀은 이러한 무의식의 생산 그 자체이다. (27, 41)
§01.5. 지리학적 방향들: 동양, 서양, 미국 41 - Les directions géographiques, Orient, Occident, Amérique. 27
41참 이상한 일이다. 나무가 왜 그토록 서양의 현실과 모든 사유를 지배해 왔는가? 식물학에서 생물학, 해부학 그리고 인식 형이상학, 신학, 존재론, 모든 철학... 에 이르기까지. 뿌리-기초(le fondement-racine), 바닥(Grund), 뿌리(roots) 및 토대(foundations). 서양은 숲과 벌채의 특권적 관계를 맺고 있다. (29, 41) [§12.7. 서양, 동양, 국가 738(Orient, Occident et Etat 477): [1]개간(défrichement)[서양]이 아니라 숲의 벌채(déboisement)[동양], 이 때문에 목재를 획득하는 것이 상당히 어려웠다. [2]검불과 들판의 경작이 아니라 “논과 밭” 유형의 경작[밀농사와 논농사]. [3]목축은 대부분 정주민의 관리[조정]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에 정주민이 동물노동과 육식영양으로부터 결여되어 있다. [4]도시와 농촌 간의 교통량이 적었기 때문에 상업도 훨씬 덜 유연할 수밖에 없었다. (477-478, 739)]
오드리쿠르(Haudricourt, 1911-1996)는 서양에서 친숙한 초월성의 도덕이나 철학이 동양의 내재성의 도덕이나 철학과 대립하는 이유까지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씨를 뿌리고 낫으로 베는 신(神)과 꽂아 놓고 땅을 파는 신 사이에 대립이 있는 것이다(파동 대 꽂아 놓기). (28, 42)
헨리 밀러(Henri Miller).. .. “중국은 인간이란 양배추 밭의 잡초이다(...) 잡초는 인간의 노력을 헛되게 하는 복수의 여신이다. .. ... 풀은 유일한 출구이다... 백합은 아름답고, 양배추는 먹을거리이고 양귀비는 미치게 만든다. 그러나 잡초는 무성하게 자란다.(...) 이것이 교훈이다.” (28-29, 42-43)
43미국에도 별도의 자리를 마련해주어야만 할 것이다. 물론 미국에 나무의 의한 지배나 뿌리에 대한 추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점은 문학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들은 민족 정체성, 심지어는 유럽의 선조와 계보를 탐색하고 있다(케루악은 자신의 선조를 찾아 다시 길을 떠난다). 허지만 과거와 현재의 중요한 모든 것은 여전히 미국적인 리좀에 의해 진행되고 있다. 비트족, 언더그라룬드, 지하의 것들, 밴드와 갱들, 바깥과 직접연결접속되어 있는 측면의 잇단 돌출들. (29, 43)
나무 형태의 추구와 구 세계로의 회귀가 일어나는 곳은 동부이다. .. .. 미국은 자신의 동양을 서부에 갖다 놓았던 것이다. (29, 43)
44두 종류 또는 세 종류(또는 그 이상)의 관료주의가 있는 게 아닐까? 서양 관료주의[관료1]의 특징은 이런 것이다. 토지와 토지대장으로부터 기원, 뿌리와 밭, 나무와 나무의 경계역할, ... (30, 44)
동양에도 그와 같은 것이 있는가? 물론이다... 하지만 .. 그것은 수로(canaux)의 관료주의[관료2]이다. ... 또한 부처(Bouddha)의 나무는 그 자체가 리좀이 된다. 모택동의 강물 대 루이의 나무. (44-45) [중국을 운하로 보는 것은 프랑스에도 해당될까봐. 그런데 인도의 불교를 리좀-나무로 보는 것은 선불교의 걸승양태를 말하는 것 같다. 걸승의 암자(토굴)은 리좀의 한 고원이 아니겠는가? (50MKA)]
여기서도 미국은 중개자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미국은 내적으로는 (인디언, 나나가 농부들을) 근절하고 절멸시킴으로써 또 동시에 외적으로는 계속해서 돌발적인 이민을 받아들임으로써 작동하기 때문이다. 자본의 흐름은 여기서 거대한 수로와 권력을 양화하고[관료3], ... (30, 45) [나로서는 영국이 브랙시트에 미국이 트럼프 선출에는 철학적 배경이 같다. 마치 독일 나찌를 선택한 것이 신칸트주의의 인식론이 그 바탕이었듯이, 20세기말 내내 미국은 신칸트주의의 인식 또는 의미론에 젖어 있었다. 특히 미국의 자본 권력은 자국민에게 속 좁은 이성(신칸트주의)을 부추겨 폐쇄적 이기심을 앞세우게 했다. 이렇게 국가가 전쟁기계를 과포화하고 있어서 어디엔가 전쟁을 걸 태세이다. (50NKA)]
보편적 자본주의나 자본주의 그 자체란 없다. 자본주의는 모든 종류의 구성체들의 교차점에 있으며 언제나 본성상 새-자본주의(néo-capitalisme)이며, 그 자본주의는 최악으로[설상가상으로] 자기의 동양적 얼굴(sa face d’orient), 자기의 서양적인 얼굴, 이 둘에 대해 자신의 개조(remaniement)을 발명한다. (30, 45) [들뢰즈는 자본주의가 18세기 공장제 가내공업을 거쳐 공장제에서 형성된 것이라기보다 인간이 코드와 영토를 만들면서 생겨난 것으로 본다고 어디선가 썼다.]
중요한 점은, 뿌리-나무[서양]와 수로-리좀[동양]이 대립되는 두 모델이 아니라는 점이다. 전자는 자신의 고유한 도주를 이뤄내면서도 초월적 모델(modèle transcendant)로서 그리고 초월적 사본으로서 작동한다. 반면 후자는 자신의 고유한 위계를 구성하고 독재적 수로(un canal despotique, 전제적)를 생겨나게 하면서도 그러한 모델을 전복시키고 지도를 스케치하는 내재적 과정으로서 작동한다. (46) [초월 모델에는 서양의 이데아(관념) 또는 종교적 지배의 의미이며, 전제적 수로는 중국의 황제제에 해당할 것이다. // 병신년 말과 정유년 초에, 전자의 박근혜가 후자의 이명박을 만든 것은 미국 철학의 언어 분석과 과학철학이 만든 것이며, 이른 배타적 지지로 받아들인 자들이 교육부에서 국정교과서를 만들고, 검찰조직을 통해 전방위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이들은 보도연맹처럼 만들려는 헛된 우화이야기(신화)를 환상적으로 그렸는지도 모른다. (50MKA)]
우리가 어떤 이원론을 원용한다면, 그것은 다른 이원론을 거부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우리가 모델들의 이원론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모든 모델을 거부하는 과정에 도달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우리가 결코 만들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거쳐가게 되는 저 이원론들을 해체하는 두뇌라는 교정자가 매번 필요하다. 모든 이원론을 통과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추구하던 “다원론(PLURALISME)=일원론(LE MONISME)이라는 마법적인 공식에 도달해야 한다.(31, 46) [자아라는 단위는 하나이지만 그 자체가 다양체(le multiplicté)이다. 나찌를 선택했고 이 망령을 불러오는 자들은 다자의 공존을 이상(관념)으로 받드는 다원론(le pluralisme)의 추월적 상층에서 일원론(le monisme)을 은근 슬쩍 밀어 넣는 아버지 신앙자들이다. / 박근혜를 버리듯하면서 다자의 공존을 주장할 때 이상한 목사들이 둘이나 박근혜에게 기도하더니 다자의 당은 인명진을 불러와 배제와 탈락을 말하는 듯하다가 판은 그대로 다자의 공존으로 갔다. 이제 이들의 전열이 정비되어 전위대와 첨병들(김대중 주필)이 설칠 것이다. (50MKA)]
§01.6. 나무의 패해들 46 Les méfaits de l'arbre. 31
46리좀의 주요한 특성들을 요약해보자. 나무나 나무뿌리와 달리 리좀은 자신의 어떤 지점에서든 다른 지점과 연결접속한다(connecter). 리좀은 아주 상이한 기호 체제들 심지어는 비-기호들의 상태들을 작동시킨다. 리좀은 ‘하나(l’Un)’로도 ‘여럿(le multiple)’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 리좀은 둘이 되는 <하나>도 아니며 심지어는 곧바로 셋, 넷, 다섯 등이 되는 <하나>도 아니다. .. <하나>가 더해지는 여럿(n+1)도 아니다.(31, 46-47) .
리좀은 단위들(d’unités)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차원들(de dimentions) 또는 차라리 움직이는 방향들(de directions)로 이루어져 있다. 리좀은 시작도 끝도 갖지 않고 언제나 중간(un milieu)을 가지며, 중간을 통해 자라고 넘쳐난다. .. 그 다양체들로부터 언제나 <하나>가 빠진다(n-1). 그러한 다양체는 자신의 차원들을 바꿀 때마다 본성이 변하고 변신한다. 리좀은 선들(de lignes)로 만 이루어져 잇다. 반대로 구조는 점들과 위치들의 집합, 그리고 이 점들 사이의 이항관계들과 이 위치들 사이의 일대일 대응 관계들의 집합에 의해 정의된다. (31-32, 47)
나무와는 달리 리좀은 복제 대상이 아니다. 즉 그것은 이미지-나무로서의 외적 복제의 대상도 아니고, 나무-구조로서 내적 복제 대상도 아니다. 리좀은 일종의 반계보(antigénéalogie) 이다. 그것은 짧은 기억 또는 반 기억이다. (32, 47)
리좀 안에서 중요한 것은 성(性)과의 관계이며, 또한 동물, 식물, 세계, 정치, 책, 자연물 및 인공물과의 관계, 즉 나무 형태의 관계와는 완전히 다른 모든 관계이다. 말하자면 모든 종류의 “생성(=되기 devenir)”이 중요한 것이다.(48)
§01.7. 고원이란 무엇인가 Qu'est-ce qu'un plateau.
48고원은 중간에(au milieu) 있지 시작이나 끝에 있지 않다. 리좀은 고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레고리 베이트슨(Gregory Bateson 1904-1980)은 다음과 같은 아주 특별한 것을 가리키기 위해 “고원”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자기 자신 위에 진동하고, 정점이나 외부 목적을 향하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을 전개하는, 강렬함들이 연속되는 지역. (32, 48)
표면적인 땅밑줄기를 통해 서로 연결접속되어 리좀을 형성하고 확장해 가는 모든 다양체를 우리는 “고원”이라 부른다. 우리는 이 책을 일종의 리좀으로 기록했다. 우리는 이 책을 고원들로 구성했다. (33, 49)
우리는 환각을 경험했으며, 작은 개미떼 대열 같은 선들이 한 고원을 단념하고는 다른 고원을 얻기 위해서 나아가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수렴 원들(des cercles de convergence) 을 만들었다.(33, 49)
리좀학 = 분열 분석 = 지층 분석 = 화행론(Pragmatique) = 미시 정치. 이 단어들은 개념들로 이루어져 있고, 개념들은 선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말하자면 수들의 체계들로 이루어져 있다. (33 50) a ,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들이 있는 것처럼 욕망이라는 기계적 배치물들(des agencements machiniques)이 있을 뿐이다. 의미생성(signifiance)도 없고 주체화(subjectivation)도 없다. (33, 50)
요컨대 우리가 보기에 바깥의 이름으로 글이 씌어진 일은 결코 없다. 바깥(le dehors)은 이미지도 기표작용도 주체성도 갖고 있지 않다. 바깥을 가진 배치물로서의 책, 세계의 이미지로서의 책과 대립되는 책, 더 이상 주축뿌리 형태나 수염뿌리 형태의 이분법이 아닌 하나의 리좀 책. 뿌리를 내리지도 말고 뿌리를 심지도 말라(34, 50)
51사람들은 역사를 쓴다. 하지만 사람들은 언제나 정주민의 관점에서, 국가라는 단일 장치의 이름으로, 아니면 적어도 있을 법한 국가 장치의 이름으로 역사를 썼다. 심지어 유목민에 대해 말할 때 조차도 그런 식이었다. 여기에는 역사의 반대물인 유목론이 빠져 있다. (34, 51)
마르셀 슈봅(Marcel Schwob, 1867-1905) 소년 십자군에 관한 이야기(34, 51),
안드르제예브스키(Jersy Andrzejewskie)의 책 낙원의 문 (34, 51)
아르망 파라시(Armand Farrachi, 1949-)의 책 와해(Dislocation, 1974) (35, 52)
문화적 책은 강조하자면 사본(un calque)이다. 그것은 이미 자기 자신의 사본이며, 같은 저자가 쓴 이전 책의 사본이며 아무리 차이가 날지라도 다른 책들의 사본이며.. 반면에 반문화적 책은 너무 무거운 문화라도 자신을 가로질러 가게 할 수 있다. .. 기억이 아니라 망각, 발전을 향한 진보가 아니라 저개발, 정주성이 아니라 유목, 사본이 아니라 지도로 능동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즉 리좀학 = 대중 분석(pop’ analyse)이며, 인민(le peuple)이 그런 책을 읽는 대신 따로 할 일이 있더라도, 마찬가지로 대학 문화 블록 또는 유사과학 블록이 여전히 너무 괴롭고 무겁게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수학을 보라 수학은 하나의 과학이 아니라 굉장한 은어이며 유목민적인 것이다.(35, 53) [자본주의 반대로써 제1권은 분열분석이고 제2권은 대중 분석이다. / 수학은 하나의 체계가 아니다. 그래서 수학은 항상 복수로 쓴다. 수학 자체가 리좀으로 군데군데 개별 학문의 덩어리를 만들어가면서 이어간다고 해야 할 것이다. (50MKA)]
역사가 유목을 이해한 적은 없으며 책이 바깥을 이해한 적도 없다. 오랜 역사가 흘러가는 동안 국가는 책의 모델이었고 사유[사고]의 모델이었다. 로고스, 철학자-왕, 이데아의 초월성, 개념의 내부성, 정신들의 공화국, 이성의 법정, 사유의 공무원, 입법자이자 주체인 인간. 세계 질서의 내부화된 이미지로서의 국가, 인간을 뿌리내리게 했다는 국가의 오만 방자함. 그러나 전쟁 기계와 바깥의 관계는 또 다른 “모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배치물(un agencement)이다. 이 배치물은 사유 자체를 유목이 되게 하고, 책을 움직이는 기계들을 위한 부품이, 즉 리좀을 위한 한 줄기(la tige)가 되게 한다(괴테에 대항하는 클라이스트와 카프카). (36, 53)
n에서, n-1에서 [글을] 쓴다, 슬로건을 걸고서 글을 쓴다: 뿌리를 만들지 말고, 리좀을 만드세요, 절대로 심지 말고, 씨 뿌리지 말고, 꺾어 꽂으세요! 하나[일자]도 여럿[다자]도 되지 말고 다양체가 되세요. (36, 53-54)
올바른 관념들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관념을(고다르 Godard). 짧은 관념들을 가져라! 사진이나 그림이 아니라 지도를 만들어라. 분홍 팬더(Panthère rose)가 되라, 그리고 당신들의 사랑이 여전히 말벌과 서양란, 고양이(le chat)와 비비(le babouin)만 같아라! (36, 54)
54리좀은 시작하지도 않고 끝나지도 않는다. 리좀은 언제나 중간(milieu)에 있으며 사물들 사이에 잇고 사이-존재(inter-être, 낀-존재)이고 간주곡(intermezzo)이다. 나무는 혈통관계(filiation, 부자관계)이지만 리좀은 결연관계(alliance)이며 오직 결연관계일 뿐이다. 나무는 ... 이다(être)라는 동사를 부과하지만, 리좀은 “그리고 ... 그리고 ... 그리고”라는 접속사를 조직(tissu, 섬유연결)으로 삼는다. (36, 54) [혈통관계(filiation)와 결혼관계(alliance, 난초와 말벌처럼), 이 개념은 분열분석(앙띠외디푸스)의 주제였다. (50MKA) ]
어디로 가는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어디를 향해 가려 하는가? 이런 물음은 정말 쓸데없는 물음이다. (36, 55) [목적에 대해 종말에 대해 말하지 말라, 리좀을 만드는 목표가 삶이며 열망이다. (50MKA)]
하지만 클라이스트(Bernd Heinrich Wilhelm von Kleist, 1777-1811), 렌쯔(Jacob Michael Reinhold Lenz 1751-1792), 뷔히너(Georg Büchner 1813-1837)는 여행하고 움직이는 방버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중간에서 떠나고 중간을 통과하고 들어가고 나오되 시작하고 끝내지 않는 것이다. 나아가 미국문학은, 그리고 이미 영국문학은 이 리좀적 방향(sens)을 명백히 드러냈으며, 사물들 사이를 움직이고, 그리고의 논리를 세우고, 존재론을 뒤집고, 기초를 부숴 버리고, 시작과 끝을 무화시키는 법을 알고 있었다. (36-37, 55) [그리고의 논리, 즉 전복의 철학은 플라토니즘에 대한 전복이다. 플라톤주의는 최고의 동일자가 성립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며, 모순율을 먹고 산다. 그게 지배자였다. (42TLI)]
((42TLI) 옮김 9:11, 50LMC), (13:9, 50MKA)
첫댓글 VegeBartlebian@DialecticalMat 트위터 가입일: 2011년 11월
특정조건에서, 바이러스는 생식세포에 연결, 자신을 복잡한 종의 세포 유전자로 전달한다. 바이러스는 다른 종의 세포로 이동할 수도 있지만, 반드시 첫 숙주의 "유전자 정보"를 가져온다. 우리가 바이러스로 리좀을 만들거나, 바이러스가 우리에게 다른 동물들과 함께 리좀을 만들게 한다--천의고원
참조 김재인 번역 26쪽 참조 — <천개의 고원: 01 리좀> (53N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