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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결론 - 하나임을 지킴
2010년
(딛3:9-15)
09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
11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12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 그 때에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내가 거기서 과동하기로 작정하였노라
13 교법사 세나와 및 아볼로를 급히 먼저 보내어 저희로 궁핍함이 없게 하고
14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에 힘 쓰기를 배우게 하라
15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오늘 디도서 마지막이다.
디모데 전후서와 디도서를 총 합한 마지막 결론이다.
하나임을 지키자는 말이다.
1. “어리석은 논쟁과 족보 이야기와 율법에 관한 말다툼을 피하라.”
09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어리석은 논쟁과 족보 이야기와 율법에 관한 말다툼을 피하라는 것이다.
하나임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 어리석은 논쟁
그때 당시에도 교회 안에 족보이야기, 율법이야기, 자기 의견을 고집하는 문제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런 것들로 인해 분쟁이 일어나고 분파가 생겨서 이런 것을 경계하기 위해 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풍문이나 소문이나 진위가 분명치 않은 이야기, 지어낸 이야기가 돌아다니면서
여러 가지 문제들을 일으켰던 것 같다.
논쟁은 무익하다. 논쟁을 하려하는 사람은 척도가 서로 다른 것이다. 그래서 이익이 없을 수밖에 없다. 자[尺]가 똑같아야하는데 잣대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사건을 놓고도 재면 다르다. 지금은 도량형 법이 있어서 미터법이나 그램 법을 국가적으로 제정해 놓았고 국제적으로도 그런 기준이 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전부 미터법으로 개정해 놓았는데 영국이나 유럽은 온스나 피트와 같은 것을 많이 쓰지만 우리는 잘 이해를 못한다.
그런데 그것은 다 규정이 있다.
1온스는 몇 그램이라는 규정이 있기 때문에 통일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논쟁은 각기 다른 척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논쟁을 하면 소득이 없고 영원한 평행선을 갖는다.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재보면 척도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르다. 길이를 잴 때는 자[尺]를 써야 되고 무게를 잴 때는 저울을 써야 하는데 같은 길이를 재면서도 자[尺]가 틀리면 맞을 수 없고 더군다나 길이를 재는데 저울을 쓴다든지 무게를 다는데 자[尺]를 쓴다면 더욱 더 안 맞는다. 그래서 아무리 해도 논쟁은 끝이 없게 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논쟁을 통해서 결론에 이른다는 것은 같은 자[尺]를 가지고 잴 때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자[尺]는 같은데 측량하는 장소가 다를 경우에는 맞추다 보면 결론이 날 수가 있다. 세상일은 세상일대로 토론하면
결론이 날 수가 있다. 그런데 세상일과 교회 일을 토론하면
서로 틀리기 때문에 맞을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일부 기독교 안에서는 세상 자[尺]와 교회 자[尺]를 같은 자[尺]로 생각하려고 한다. 그러나 자[尺]가 틀리다.
가는 목표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창세기 3장에서 시작되어서 가는 인류의 역사를 계시한 것이 창세기 11장까지이고 그 마지막은 바벨론이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가는 길은 창세기 3장부터 11장까지 이미 성경에 계시 되어 있고 이것을 지금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 가면 다시 바벨론이 나온다. 바벨론이 무너지고 새 예루살렘이 등장하는 것이 성경의 역사관이다. 이런 자[尺]를 가지고 우리는 성경을 보아야 성경이 제대로 보이는데 이 잣대를 빼놓고 다른 자[尺]로 보면 다 틀린다. 그러면 논쟁이 될 수밖에 없고 논쟁을 해도 아무 소득이 없는 결론을 보게 된다. 지금 우리들 안에서 족보이야기, 율법에 관한 이야기는 없는데
세상 문제 때문에 일어나는 논쟁들이 있다.
이번에도 사랑방에서 뜨거운 논쟁들이 왔다갔다 하였다. 오랫동안 인터넷을
통해 우리교회를 들여다보고 있는 어떤 분이 있다. 아주 옛날이야기를 알고
있는 것을 보니 상당히 오랫동안 보고 있는 것이다. 일면으로는 그 사람의
말대로 호감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한 가지 불만스러운 것이 있는 모양이다.
대구 교회는 자기들끼리는 좋다하는데 사회적 관심이 없어보여서 그것을
더했으면 좋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이야기를 한 것 같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웃의 약함이나 불행에 대해서
연민의 정을 가져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예를 들어 이웃에서 굶고 있는데 옆집에서
교회 다닌다면서 자기는 새 예루살렘에 갈 것이고 천국에 갈 것이기 때문에
그들과 상관없다며 불고기 파티를 하고 있다면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쉽게 말하면 인정에 관한 문제이다.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넘어진 사람을 보면 일으켜 세워주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고 또 그런 마음이
생긴다. 넘어진 사람을 보고 잘 넘어졌다고 하며 가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넘어진 사람을 보면 일으켜주려고 한다. 또 굶는 사람을 보고 자기 혼자 먹으면 마음이 괴롭기 때문에 나눠먹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인지상정의 문제이지 종교의 문제라고 할 수 없다.
종교에서 이런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사람이면 당연하게 그렇게 해야지 예수를 믿으니까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면 당연히 굶는 사람 보면 나누어 먹으며 이웃과 함께 지내야하는 것이지, 예수를 믿는다고 다르고 불교를 믿는다고 다르겠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될 일이다.
이런 문제로 만일 우리 교회 안에서 오해하여 ‘나는 새 예루살렘에 갈 사람이므로 너희가 굶어도 관계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큰 잘못이다. 그것은 양심이 없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정과 양심이 없기 때문에 기본적 바탕이 안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천국을 가겠는가. 아무리 우리가 율법으로 말미암아서 의롭게 되지 않는다하더라도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바탕이 있어야 되지 사람으로서의 바탕 자체가 없으면 율법이고 복음이고 다 소용없다. 개에게 아무리 복음을 전해보아야 소용없고, 개에게 아무리 율법을 가르쳐도 소용없다. 사람이기 때문에 율법도 가르치고 복음도 전하는 것 아니겠는가. 사람의 기본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우리가 그것을 외면하면 안 될 일이다. 그리고 내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는데 나 몰라라 하고 살 수 없는 일이다. 어떤 형태로든지 서로가 돕고 살아야하고, 믿지 않는 사람이 같이 산다하더라도 도울 일은 도와야 될 것 아니냐는 것이다. 설사 나와 종교가 다르다 하더라도, 아니면 무종교라 하더라도, 불신자라 하더라도 사람으로서 대할 것은 사람으로서 대해야 한다.
우리가 새로운 동네로 이사 갔더니 그곳에는 할머니들만 살고 있었다. 산 속에 자기들만 살아서 그런지 우리가 가니 굉장히 배타적이었다. 꼭 못 올 사람들 온 것처럼 생각하고 자기들을 해하러온 사람처럼 생각하여서 대항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으니 말도 잘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의 삶이 보여지고 관계가 좋아지니 지금은 할머니들과 아주 친하다. 내가 인사도 잘하고 집사람이 먹을 것이 있으면 가져다주고 하니 친해졌지만 처음에는 경계가 아주 심했다.
우리가 이웃과 살면서 원수처럼 살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기왕이면 같이 좋게 살면 좋은 것이고 그렇게 하려면 서로 나누고 이해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 사람이 예수를 믿거나 안 믿거나 그것은 상관없다. 그것과 관계된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인간적인 문제이다. 이것을 우리는 구별해야 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니까 이웃을 돌봐야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렇다고 예수 안 믿으면 이웃을 무시하겠느냐는 것이다. 예수를 안 믿어도 불쌍한 사람이 있으면 도와야 하는 것이 당연하고 예수를 믿어도 그것은 당연한 일이니까 이것은 예수를 믿고 안 믿는 이전의 문제인 것이다. 그것을 굳이 종교가 내세운다면 그것도 이상하다. 그렇다면 인간도 아닌 사람들을 데려다 놓았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계속하면 꼭 돼지들만 모여 있는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알고 보면 당연한 일인 것이다.
우리가 만일 이런 일에 있어서 비난을 받는다면 그것은 정말 잘못된 일이다. 대구 교회 사람들은 옆에서 굶어도 불고기 파티만 하더라고 한다면 잘못된 일이다. 그것은 교회 이전의 문제다. 물론 교회 와서 고쳐질 수도 있지만 교회 오기 전에 그것은 최소한도 고쳐져야 한다.
그러나 어느 나라, 어느 민족, 어느 시대를 가더라도 이런 문제만이라면 이론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무엇이 있는가? 바로 우리 옆에 있는 이웃을 상대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먼 이웃, 내가 모르는 사람이지만 사회에 대한 관심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정치적인 이데올로기가 된다. 가난한 자와 부(富)한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문제가 된다. 그러면 정치적인 문제가 된다. 우리는 그런 문제를 취급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내 이웃의 굶주림을 취급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로 취급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는 그것을 왜 반대하는가? 교회가 정치에 관여하게 되면 정치도 교회에 관여한다. 내가 좋은 의미든지 나쁜 의미든지 정치에 관여하게 되면 정치도 좋은 의미든지 나쁜 의미든지 나에게 관여하게 된다. 그러면 불행한 사건이 생기게 된다. 그것이 중세 사건이고 우리가 교회사에서 보았던 여러 가지 사건들이 그런 것이다.
개인이 사회에 참여하는 것, 자기가 처하여 있는 직장, 사회에서 자기의 책임을 다하고 소임을 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기독교인이라면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런데 가령 교회라는 한 단체가 사회의 어떤 문제를 취급한다면 사회 문제는 정부도 취급하는 문제다. 교회만 취급하는 문제라면 괜찮다. 그러나 정부도 취급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좋을 때는 둘이 합해지겠지만 나쁠 때는 갈라진다. 의견이 똑같다고만 볼 수 없다.
교회는 어떤 면에서는 좋은 일도 많이 하였다. 기독교가 좋은 일을 많이 하였지만 반대로 나쁜 일도 많이 하였다. 그것이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정치적인 세력을 갖게 된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정부가 하는 일을 우리가 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대로 세력을 갖게 되고 세력을 갖게 되면 우리는 또 다른 힘을 갖게 된다. 다른 힘을 가졌을 때 그 힘이 강력해지면 무서운 힘이 될 수 있다. 종교적인 힘처럼 무서운 힘이 없다. 그러므로 교인으로서 사회에 참여하는 것은 환영하지만 교회가 사회에 참여하는 것은 나는 반대이다. 교회와 사회가 가는 길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이 사회 속에 속하여 있지 않는가? 교회도 물론 속하여 있다.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속하여있지만 가는 길은 서로 다르다.
교회의 길과 사회의 길과는 길이 서로 다르다. 우리는 어떤 다른 사회를 목표로 하고 있고 이런 사회 속에 우리는 새로운 사회를 제시하고 싶어서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사회를 개선시킨다든가 그 사회와 더불어 무엇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지금 이 사회 속에 제시하고 싶은 것이다. 우리 책의 표어가 “최종적 사회의 이상을 제시하는 대구교회”이다. 그 말은 우리가 세상 속에 들어가서 세상을 개선한다든가 개혁한다든가 파괴한다든가 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대로의 한 사회가 구성되어서 그 사회가 아름다우면 그 아름다운 사회를 세상 앞에 내놓는 것이다. 이 교회가 만일 아름답다면 세상은 이 아름다운 교회를 보고 개선될 수도 있고 또 들어올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것은 구별 가운데 구별된 속에서 영향을 주는 것이다. 섞어지면 카톨릭처럼 되는 것이다. 중세에 국교가 되어서 엄청난 횡포가 일어났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박해할 때 죽인 사람의 숫자보다 카톨릭이 이교도를 학살한 숫자가 기간적으로 보나 양적으로 보나 훨씬 더 많다고 한다. 종교가 만일 세력을 갖게 되면 그런 결과를 가져온다. 종교는 세상적 세력을 가지면 안 된다. 세상적 세력을 갖지 않으려면 세상과 같이 일하면 안 되고 같은 일을 하면 안 된다. 세상이 못하는 다른 일을 해야지 세상도 하는 일을 내가 하겠다고 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지금 사회복지 문제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는데 어느 국가든지 국가가 발전하고자 하는 목표는 사회복지에 있다. 국민이 다 잘 살게 하자는 것이다. 공산주의도 인민이 다 잘살게 하자는데 있다. 심지어 마지막 이상은 무정부 상태에 두었다. 통치마저도 없는 사회를 꿈꾸었던 것이다. 어느 사회든, 어느 정부든 인간의 행복과 복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유럽 역사를 보면 초창기에는 교회들이 고아원이나 양로원도 하였지만 지금은 정부가 그것을 다 한다. 정부가 다 하기 때문에 교회는 할 필요가 전혀 없다. 교회의 영역에서 벗어나 버렸다. 그것은 원래 교회의 영역이 아니었는데 그것을 했기 때문에 지금은 교회들이 할일이 없어서 교회가 텅텅 비어있다. 그것은 정부가 훨씬 잘한다. 아무리 교회가 가난한 자를 구제한다하더라도 정부가 하는 것과 비교가 안 된다.
지금 우리나라도 복지제도가 굉장히 발달되어 있다. 우리 수준에서는 굉장한 것이다. 독거노인이 있으면 일주일에 두 세 번씩 사람들이 가서 보살펴 준다. 그것뿐 아니라 많은 분야에서 복지제도가 발달되어 있다. 물론 선진국에 비하면 아직 모자라지만 우리도 GNP가 3萬불, 4萬불이 올라가면 당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다. 교회가 그 일을 하다가 어느 날인가 그렇게 되면 교회는 당연히 할 일이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것이 만일 교회의 본분이라면 그때는 교회의 본분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과 교회의 일은 구별되어 있다. 같은 일이 아니다. 나쁜 일이 아니라 서로의 소임이 다른 것이다. 정부의 할 일이 있고 교회가 할 일이 있는 것이지 정부의 일과 교회의 일이 같을 수 없다. 이것은 구별되어야 한다.
오랜 역사를 통해 국교 안에서 피비린내 나는 많은 싸움을 하였는데 마지막 얻어진 결론은 소위 정교분리 정책이라는 것이다. 미국이 독립될 당시 헌법에 정교 분리를 선언해 놓았다. 미국은 전부가 다 유럽에서 온 사람들이 아닌가? 미국에 있던 사람들이 아니고 유럽에서 흘러 들어온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유럽의 오랜 역사를 다 경험했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 역사를 다시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정교 분리정책을 선언했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그 원칙에 따라 정교분리 정책을 쓰고 있다.
교회가 정치에 대해서 뭘 해놓고 정부가 교회에 대해서 뭘 좀 하려고 하면 벌 떼같이 일어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교회가 정부를 간섭했으니까 당연하게 정부도 교회를 간섭하는 것이다. 내가 간섭을 안 받으려면 나도 간섭을 하지 않아야 한다. 나는 간섭할 수 있고 너는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균등하지 못하다.
옛날 박정희 시절에 이런 말이 있었다. 어떤 골통 기독교인이 기도를 많이 하고 어떻게 청와대에 들어가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어떻게 청와대에다가 우상을 들여 놓을 수가 있는가?”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당시 육영수 여사가 절에 다니니까 불상을 들여다 놓았다는 말이 있었다. 그러자 박정희 대통령이 웃으면서 하는 말이 “당신들이나 싸우지 마시오.” 그랬다고 한다. 우스운 일이 많이 있었다.
그것은 성경에서 선지자들이 왕들을 책망했다는 말을 들어서 통치자들을 책망하려고 대드는 것이다. 나라가 하나님 나라이면 그렇게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세워진 것 자체가 하나님의 왕국으로 세워진 것이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왕에 대해서 조언도 하고 책망도 할 수 있는 그런 권리가 있는 것이다. 임금도 당연하게 그것을 듣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방세계는 그게 아니다. 이방세계는 하나님의 왕국이 아니다. 남의 집에 가서 왜 내가 감 놓아라, 배 놓아라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정치도 종교를 간섭할 게 아니겠는가. 종교에 정치가 관여하기 시작하는 것도 무서운 일이다. 피차 이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까 이런 많은 경험을 통해서 정교 분리의 원칙이라는 것이 나오게 되었다.
정치는 정치고, 종교는 종교다. 정부는 종교가 민, 형사상의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때는 절대로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 미국의 헌법이다. 그렇다면 종교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자신의 생명과 재산에 관계되지 않는다면, 종교의 교리나 핵심에 관여되지 않는다면 정부에 대해서 관여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내 생각이다. 나도 간섭받기 싫으니까 그렇다.
이런 문제를 가지고 보면 척도가 서로 다르다. 척도가 다르면 아무리 서로 논쟁을 해도 소용이 없다. 교회의 길과 세상의 길은 다르다. 그렇다면 원수가 되는 것인가? 그렇다는 말이 아니고, 서로 배격해야 된다는 말이 아니라, 길이 서로 다르다는 말이다. 핸드폰을 만드는 공장과 자동차를 만드는 공장이 다르다. 같을 수가 없다. 자동차 만드는 공장에서 핸드폰 만드는 공장에 가서 ‘너희들 왜 그렇게 지지부진한 것을 만드느냐?’ 이렇게 할 수가 없다. 핸드폰 공장 사람이 자동차 공장에 가서 ‘왜 그렇게 덩치가 큰 것을 만드는가? 이렇게 조그만 것을 만들어도 얼마든지 돈을 벌 수 있는데...’ 이렇게 비난할 수 없는 일이다. 각자 길이 다르다. 그러니까 각자의 길에서 자기 길을 충실히 가면 그것이 오히려 사회에 기여하는 일이 된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길을 분명히 가면 그것이 이 사회에 기여하는 길이 된다. 교회가 사회에 들어가야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로서 길을 가면, 교회로서 길을 가서 우리가 연합되고 하나 되고 사랑하게 되는 이것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면, 이것이 사회에 좋은 영향을 주게 된다. 그렇게 해야 싸움이 없는 것이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싸울 수밖에 없다. 종교적인 어떤 입장을 가지고 세상을 본다면 세상이 안 맞을 것이다. 기독교적인 이상을 가지고 정부를 본다면 당연히 안 맞을 것이다. 반대로 정치적 입장에서 종교를 본다면 맞겠는가? 그것도 역시 안 맞을 것이다. 이것은 서로 맞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까 각자의 길을 각자가 충실히 가는 것이다. 정부는 정부로서 충실한 길을 가고, 교회는 교회로서 길을 가야 된다. 이것 둘을 섞어 버리면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 이렇게 섞어 놓은 것이 카톨릭이다. 카톨릭은 이것을 참 잘 요리하고 있다. 기술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아주 잘 요리하고 있다. 각 분야에 모든 조건들을 다 가지고 있다. 카톨릭이라는 범세계적 교회 안에 모든 분야를 다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언제든지 필요한 카드를 내 놓는 것이다. 데모하는 데 가면 데모에 필요한 카드가 있다. 정부와 협조하는 데 가면 정부를 협조하는 카드가 있다. 다 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그렇게 해도 전혀 문제가 안 된다. 왜냐하면 협조도 하고 반대도 하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신교는 그렇게 안 된다. 그런 조직도 안 되고 그런 기구도 없다. 그럴만한 정치적인 기술이 없다. 없기 때문에 나갔다 하면 부딪치고 싸우는 것이다. 그러면 주객이 전도되어서 사탄과 싸워야 될 것을 정부와 싸우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야 한다. 교회는 교회의 길을 가는 것이다. 교회의 길은 딱 정해졌다. 새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 정해져 있다. 예수님에게 물었다. “네 나라가 어디에 있느냐?” 하니까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해 있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그것이 천당인가? 그렇지도 않다. 그렇다면 그것이 천당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볼 때 천당 모집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천당 모집인으로 오랫동안 생각하다 보니까 너무 현실적이지 않다. 그래서 사회개혁자나 사회혁명가로 보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래서 예수를 혁명가로 보는 사람도 있다. 물론 사람마다 보는 것이 다르니까 자기 나름대로 보는 것은 자유다. 성경의 계시에 따르면 예수는 사회 개혁을 위해서 온 사람도 아니고, 천당 모집인이 되려고 온 것도 아니다. 자신의 나라가 있다. 자신의 나라 때문에 왔다.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왔다. 이것을 자신의 입으로는 ‘인자의 나라’라고 말했다. 우리가 복음서를 보면 ‘인자의 나라가 올 때’,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 ‘인자가 다시 올 때’, 이 말들은 모두 왕국을 말한다. 그런데 이것을 사도 요한은 계시록에서 ‘어린 양의 왕국’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세계가 같은 것이 아니고 다른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을 개혁하려고 나서면 우리의 본분을 떠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카톨릭처럼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카톨릭보다 좋은 게 없다. 개신교로서는 안 된다. 정말 안 된다. 비교도 안 되고 서툴고 우습다. 카톨릭은 그런 것을 너무 잘 한다. 그래서 그런 데 관심이 있으면 카톨릭을 가는 게 좋다. 종교를 통해서 사회 개혁을 해 보려면 카톨릭이 제일 좋다. 신부들은 신분이 보장되어 있다. 어떤 경우도 신부를 손댈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쉽게 말하면 바티칸의 직원이다. 한 나라의 대사들이다. 그냥 개인이 아니다. 그래서 정부가 손을 댈 수가 없다. 박정희 시절에도 신부들은 손대지 못했다. 전두환 시절에도 신부들은 손대지 못했다. 그래서 광주사태가 났을 때 카메라를 가지고 찍었다. 다른 사람들이 찍었으면 가만히 놓아두겠는가? 그렇게 권세가 있다. 세력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라의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신부를 누가 죽였다고 생각해 보라. 그러면 전 세계가 다 일어난다. 그래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김정일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 세력이라는 것이 어마 어마하다. 보통 세력이 아니다. 그래서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개신교가 말해도 되는가? 안 된다. 사회 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그런 종교가 필요하다.
우리는 그런 능력도 없고, 그런 주제도 못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주제를 파악해서 우리 안에서라도 아름답게 되면 이 아름다운 사회를 제시함으로써 아름답지 못한 것이 아름다워질 수 있지 않겠는가? 이것이 내 생각이다. 아름다운 사회를 제시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세상에서 어떤 위대한 일을 하고, 필요한 일을 하고 못하는 데 우리의 목표가 있지 않다. 세상에서 안 되는 일이 있다. 아무리 해도 안 되고, 돈이 아무리 많아도 안 되고, 정치를 아무리 잘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 교회밖에는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그것이 우리가 맡은 일이다.
연합된 하나를 우리가 보여준다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고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이것이 어쩌면 세상을, 사회를 도와주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도와줄 수 있는 일이 되는 것이다. 비록 작은 부품일지라도 그 부품 하나가 없으면 안 되는 그런 것이 될 수 있다. 우리가 핸드폰을 사용하고 있다. 핸드폰 회사는 많은 돈을 번다. 그런데 그 안에 핵심 부품이 있는 데 그것은 우리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핸드폰을 살 때마다 로열티를 줘야 한다. 지극히 작은 부품하나 때문이다. 어쩌면 교회가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생명이라는 것은 크고 위대한 것이 아니다. 꼭 없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꼭 없으면 안 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정부가 열심히 하고 있는 데 왜 내가 또 하는가? 지금 정부는 훨씬 더 잘한다. 교회가 크리스마스 때 나와서 불우이웃돕기를 한다든지 하고 뭘 하는 것을 보면 어설프고 어색하고 심지어 추해 보인다. 좋게 보이지 않는다. 행사를 한다고 완장을 차고 나오고 하는데 ‘저렇게 해서 되겠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창피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차라리 세금을 많이 내서 정부더러 하라는 것이 나을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도 불우 이웃 돕기를 하고 있다. 내가 가창에 온 후로 연말이면 불우이웃돕기를 면 단위로 한다. 그런데 교회는 교회 단위로 자기들이 한다.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동사무소에 갖다 주었다. ‘이거 불우이웃돕기에 필요하면 쓰십시오.’ 그렇게 하니까 그 사람들이 너무 좋아한다. 우리가 한다고 나서면 좋아하지 않는다. ‘저거 전도하려고 하는 일이지’ 이렇게 생각하지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할 것인데 갖다가 당신들이 해 주시오.’ 어차피 이것은 당신들이 할 일이 아닌가. 우리가 도와주려면 그렇게 도와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니까 직원들이 아주 좋아한다. 이것이 사회 참여가 아닌가? 우리가 돈이 있어서 대구교회 이름으로 어디다 자선사업을 하는 것이 아니고 돈을 정부에 내서 정부보고 하라고 하면 된다. 정부가 하고 있는 일이고, 잘하는 일이니까 우리가 도와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정부가 하고 있는 데 또 교회가 할 필요가 뭐 있는가?
정부가 못하는 것을 우리가 해야 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정부가 못한다. 연합하는 것은 정부가 할 수 없다. 세상에 어떤 것도 그것은 할 수가 없다. 우리가 쓸 데 없는 일을 잘못 생각하면 사회 문제와 교회문제를 헷갈려 하는 경우가 많다.
한열 형제가 답 글을 썼다. ‘자기는 천안함 사태에 대해서 목사님과 의견이 전혀 다르지만 그래도 나는 전혀 문제가 없다.’ 그러니까 천안함 사태에 대한 문제는 서로 다를 수 있다. 그것은 나와 한열형제와의 기본적인 관계가 아니다. 자기는 해군에 근무해 본 사람으로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해군에 근무해 본 적이 없으니까... 우리는 세상일에 대해서 이견이 있을 수 있다. 다를 수 있다. 그래도 그것이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니까 그것으로 인해서 이러니저러니 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문제에 대해서 똑 같은 생각을 하기는 어렵다. 같은 생각을 하면 좋겠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은 안 된다. 내가 생각해도 불가사의 한 일이다. 밤 새워 이야기 해 보았다. 그러나 안 되었다. 그게 세대차이인지 아니면 교육의 차이인지는 모르겠다. 아무리 말해도 안 되었다. 북침을 주장하는 사람에게 아무리 남침을 이야기해도 안 되었다. 그것도 남과 한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에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이야기해도 안 되었다. 그래서 그것은 놀라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사람의 정신을 이렇게 개조해 놓았는가? 하고 생각했다. 총알을 맞고 온 사람이 말을 해도 안 듣는 것이다. 앞으로 100년이 지나면 그것이 오히려 정설이 되어 버릴 것이다. 놀라웠다.
나는 6.25의 복판에 있지는 못했다. 나이가 어릴 때니까 변두리에서 조금 보았다. 그렇지만 전체의 분위기 속에는 있었다. 그래서 내 앞에서 총살시키는 것도 보고 인민재판을 하는 것도 보았다. 비참한 것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도 벌써 의견이 다르다. 다른 의견을 도저히 좁힐 수가 없었다. 어떻게 교육을 받았는지 도저히 좁힐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 의식화 교육이라는 것이 얼마나 신기한 교육인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두 가지 감탄한 일이 있는데 또 하나는 다단계 판매다. 그 강의를 한 번 듣고 온 사람은 완전히 빠져버리게 된다. 그래서 나는 허무함을 느끼게 된다. 내가 30년을 이렇게 해도 안 되는데 어떻게 한두 시간을 가서 듣고 와서 완전히 뿅 가서 아파트를 팔고 한다. 마치 밭에 묻힌 보화를 사러 가는 사람같이 그렇게 간다. 아무리 말려도 안 듣는다. 그래서 야 정말 신기한다. 저런 능력을 배워서 복음 전하는데 썼으면 하는 생각도 하고 한 방에 날릴 수 있는 그런 말씀이 없을까 하는 이런 생각을 여러 번 하게 된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데 어찌해서 저것을 저렇게 쉽게 되는가. 어떻게 저렇게 까지 되었는가 하는 것을 한 번 직접 가서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든다. 그러니까 가는 길이 다르면 도저히 안 된다. 그래서 “척도가 다른 논쟁은 하지말자.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자.”는 것이다.
이것은 좋다 나쁘다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의 갈 길이 있고 교회는 교회의 갈 길이 있다. 그리고 개인은 개인의 갈 길이 있고 사회는 사회의 갈 길이 있고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個人倫理와 社會倫理가 똑 같을 수 없다.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많은 갈등을 가지고 있다.
개인윤리에서는 道德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소수이고 아는 사람일 때는 개인윤리가 필요하다. 그런데 다수이고 사회 나라 국제 이렇게 되면 개인윤리라는 것이 전혀 통하지 않게 되고 이해관계만 남아 있게 된다. 시골 동네 같은데 가면 나쁜 사람이 별로 없고 너무나 오랫동안 같이 산 사람이기 때문에 나쁜 짓을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서울역에 도착하면 잘못하면 코베어간다는 식으로 무장하게 된다. 그러니까 눈을 크게 뜨고 다니게 된다. 눈을 감을 수 없게 된다. 눈을 감으면 코베어진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거기서부터 긴장하기 시작해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하게 된다. 시골에서는 그렇게 선량하던 사람이 서울가면 그렇게 달라진다. 그러니까 사회가 커갈수록 개인윤리는 소멸되어 가고 작아지고 사회윤리만 남게 된다. 사회윤리는 결국 이해관계다.
國際關係에서 우리나라가 어떤 힘을 가지면 지지를 많이 받을 수 있고 힘이 없으면 지지를 받지 못한다. 조선말기를 보면 그때 우리나라는 아무 힘이 없었다. 그러니까 국제무대에 나가봐야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오직하면 한반도를 놓고 미국과 일본이 둘이 갈라먹기를 했던 것이다. 미국이 생각할 때 한반도는 별로 필요치 않았다. 지금도 사실은 별로 필요한 나라가 아니다. 미국에게는 사실 필리핀이 더 필요한 나라다. 왜냐하면 태평양함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은 필리핀을 갖기로 하고 일본은 한국을 갖기로 했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 의사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던 것이다. 일본이 한국을 합병시켰을 때 미국은 전혀 간섭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기 나라의 이해관계에 관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미국본토를 공격하리라는 생각은 전혀 못했었다. 일본은 일본대로 팽창주의적인 정책을 하고 있었지만 설마 미국까지 건드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필리핀은 미국이 점령하고 태평양함대의 기지를 만들었다.
조선은 태평양함대의 기지로도 적합하지 못하고 미국에게는 별로 쓸모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미국이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런데 러시아는 조선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부동항을 확보하는 것이 그들의 숙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은 북한을 먹었던 것이다. 중국은 원래 우리의 형님국가니까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일본에게 져버렸다. 그래서 민비는 러시아에 붙게 되었다. 그래서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하게 되었는데 러시아가 전쟁에서 졌다. 그래서 결국에는 일본에 먹혔던 것이다. 국제관계에서 힘없는 놈은 이렇게 돼 버리는 것이다. 아무 힘이 없었다. 말만 주권이 있는 나라였던 것이다. 사실 고종황제는 힘이 있어서 황제가 된 것이 아니었고 일본사람들이 조선을 청국으로부터 분리시키려고 황제를 만들어놨던 것이다. 이런 비참한 역사, 눈물겨운 역사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
왜 그런가? 나라가 작았고 너무나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것은 국제사회의 관행이다. 예를 들어서 지금도 한국이 경제도 없고 힘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다. 도덕적으로 위기에 처한 우리나라를 도와줄 나라는 아무도 없다.
길이 다르니까 길이 다른 줄 알고 살자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에 고민하지 말자는 것이다. 특별히 우리 젊은이들이 그런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있다고 한다. 내가 가끔가다가 시국 얘기를 하면 자기들과 생각이 다르니까 어려운 모양이다. 우리 목사님 저런 얘기를 안했으면 좋겠는데 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형제들이 많이 있다. 그럼 나는 시국 때문에 이런 문제를 이야기 하는 것인가? 시국 때문에 이런 문제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누가 그 말을 하는가? 말을 한 사람이 누군가? 하는 이것이 중요하다.
이번에 김준곤 목사님에 대해서 극렬하게 비판을 했다. 그것을 정치적으로 생각하면 그렇다. 자기들이 싫어하는 박정희 정권하에서 조찬기도회를 만들고 뭐를 만들고 했던 사람이었고 전군신자운동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것을 전두환 대통령까지 갔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것을 정치적으로 보면 김준곤 목사님은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한 그런 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김준곤 목사님을 그렇게 보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복음을 전할까? 어떻게 하면 예수를 전할까?’만 생각하는 분이었다. 나는 그분에게서 그것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그분을 존경한다. 자기 아버지와 아내가 인민군에게 학살을 당했다. 자기도 학살장으로 끌려가다가 용케 빠져나와서 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원한을 원한으로 갚지 않고 그것을 예수가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민족은 예수를 줘야만 되지 원한을 갚는다고 되지 않는다는 것이라는 이 철학이 딱 박혀있는 분이었다. 그러니까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지 복음을 전하자,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지 예수를 전하자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부를 이용하든지 군대를 이용하든지 하여간에 예수를 전하는 것이다. 예수를 전하려고 하니까 박정희도 필요하고 전두환도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전해야 한다는 이 입장에서 본다면 김준곤 목사님은 너무너무 훌륭한 분이다. 그런데 정치적으로 보면 변할 수 있다. 그러니까 김준곤 목사님이 정치가였는가? 그분은 정치가가 아니고 그분은 예수에 미친 사람이었다. 예수를 전하기 위해서 무슨 방법이라도 써야했던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같은 말을 해도 누가하는가에 따라서 의도하는 바가 다르다. 내가 시국 얘기를 한다면 내가 정치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정치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시국 얘기를 한다면 시국 얘기를 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우리 교회의 문제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를 정치가로 보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정치가도 못되지만 하기도 싫은 사람이다.
우리 화평이에게 절대로 정치는 하지 말라고 유언을 하려고 했다. 왜냐하면 내가 조그마한 정치를 해봤지만 정치를 해보니까 처음 생각하고 마지막 생각이 달라져 버린다. 처음에는 정의를 위해서 의를 위해서 시작했는데 마지막에 가보니까 정의는 어디로 간 데가 없고 어떻게 하든지 이기는 것만 남게 되었다. 이기려고 하니까 惡이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절대로 정치는 하지마라고 자손만대에 유언을 하고 싶다. 우리 후손에서는 절대로 정치가가 나오면 안 된다. 정치가 나오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거짓말 안 할 수도 없고 남과 싸우지 않을 수도 없고 교활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되지 않고는 정치가 안 된다.
내일 총회에 투표를 하게 되는데, 오늘 저녁에 한 표라도 더 모아야 된다. 그래서 지난번에 왔던 張목사님이 한 표라도 더 모으기 위해서 어느 전도사를 찾아 갔다가 돌아와서 다시 집으로 가는 길에 교통사고가 나서 발이 부러졌다. 그래서 4개월 동안을 누워있었다. 그분이 그런 분이었다. 가서 설득하다가 하다가 안 돼서 오게 되었다. 늦은 밤 11시쯤에 왔는데 힘이 쫙 빠져서 왔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패기만만한 사람이었고 자기가 누구를 만나서 한 번도 이렇게 득해서 실패해 본적이 없었단다. 기가 완전히 죽어서 와서 내려가다가 그래서 사고가 났을 것이다. 독립문 내려가는 건널목이고 통행금지 직전이라서 위험한 곳이었다. 차가 들이받아서 발이 부러졌는데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급하게 달리던 차에 치여서 발만 다치고 다른 곳은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그분을 잊지 못한다. 지금도 다리를 만져보면 뼈가 뭉친 부위가 만져진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겨우 한 표 이겼다. 겨우 한 표 이겼는데 그래도 안 되더라. 왜냐하면 돈을 가지고 있는 기존의 기득권 세력이 있어서 그 세력이 나는 못하겠다고 하니까 다 와 하고 일어나버렸다. 나는 이제 교단 못하겠다는 말은 이제 나는 돈을 못 대주겠다는 말이었다. 우리는 조그만 교단이라서 그분이 돈을 안내면 교단을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웅성웅성 하기 시작하고 총회장이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간신히 투표를 해서 한 표를 이겼는데, 약속하기는 투표로 결정하자고 했는데 투표로 결정이 안 되었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아! 힘이구나. 힘.’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힘이 없이는 정의고 뭐고 안 되는구나. 정의가 되려면 그것도 힘이 있어야 되는구나.’하는 것을 그때 알았다. 30대 초반에 일찍 알았으니 참으로 다행인 것이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만일 직장에 가거든 힘을 무시하지 말라고 한다. 내 위에 사람은 힘이다. 계장은 힘이다. 과장도 힘이고 국장도 힘이고 전부 힘이다. 힘을 무시한 사람은 그곳에 있을 수 없다. 힘을 잘 알고 경배할 데 경배하고 복종할 데 복종하고 이래야 직장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힘 앞에 잘난 척하다가는 어디 갈지 모른다. 나는 그런 문제 때문에 얘기를 한 것이다. 혹시 우리 교회 젊은이들 가운데 나는 그런 얘기를 안 하고 싶지만 혹시 얘기하더라도 정치가로 보지 말고 내가 사랑하는 형제들이니까 그 말을 하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면 왜 그 소리를 하겠는가. 하면 틀림없이 싸울 텐데 왜 그 소리를 하겠나.
이번에 그분도 들어보니 우리 교회에 관심이 많다. 관심도 많고 좋아하는 바도 있기에 얘기를 한 것이다. 앞으로도 얘기를 계속 해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분이 아는 예수와 다른 예수를 주고 싶다. 그분의 순수한 마음 정열적인 마음 그것은 참으로 좋다. 좋은데 내가 아는 예수와 그분이 아는 예수가 다르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아는 예수를 전해보고 싶은 것이다. 어제 밤에도 글을 쓰다가 왔다.
2.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거절하라
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
두 번째로 넘어가자. 異端에 속한 사람들을 한두 번 훈계 한 후에 멀리하라는 말이 있다. 이 말 때문에 기독교는 걸핏하면 이단, 이단배격 이런 것들이 나온다. 그런데 이단이라는 말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라는 뜻이다.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경계하라, 거절하라고 한다. 왜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거절하라고 하는가 하면 그것은 하나임을 지키라는 것이다. 하나임을 지키려면 분열을 조장하는 사람,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서 무엇을 해도 좋고 무슨 말을 해도 좋은데 분열을 일으키는 것은 안 된다. 분열을 일으키면 그것은 교회가 파괴되는 것이다.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이 여기서 말하는 이단이다.
1/2. 하나됨을 힘써 지킴(엡4:3-6)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하나 됨을 힘써 지켜라. 에베소서 4장에 보면 성령의 하나 됨을 힘써 지키라 그러니까 교회의 하나 됨을 지키라는 말이다.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엡4:1) 평화의 매는 띠로 그 영의 하나 됨을 지키라(엡4:3) 한 소망 안에서 부름을 받았다.(엡4:4) 주님도 한분이요 믿음도 한분이시다. 침례도 하나다.(엡4:5) 하나님도 한분이시오,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신 하나님도 한분이시다. (엡4:6) 믿음에서도 하나다. 하나님 아들을 아는 지식에서도 하나다. 충분히 성장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자 이렇게 말하고 있다.
⑴ 부르심의 하나
이것을 하나씩 보면 부르심에서 하나다.
① 창조안에서 하나 (산혼- 생명나무 열매, 하나님 동산을 지킴)
첫째로 창조도 다른 말로 하면 알고 보면 부르심이다. 창조 안에서 모든 인류는 하나다. 다 흙으로 지어서 생기를 불어넣어가지고 산 혼이 되었지 이 세상에 밀가루로 반죽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 흙으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산 혼이라는 것이 모든 인류가 다 산 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다 똑같은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동산을 지키라 했다. 사람이 만들어진 이유는 하나님의 동산을 지키기 위해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다. 바드시 원칙을 꼭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나는 산 혼이고 나는 하나님의 동산을 지키라고 지어진 사람이구나. 이것만 확실하면 갈라질 필요가 없다. 이 하나님의 동산이 지금은 무엇인가? 지금은 교회다. 장차는 왕국이고 더 장차는 새예루살렘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 창조된 것이다.
② 부르심에서 하나(땅과 씨 - 아브라함, 교회와 그리스도 - 온 인류(믿는 이들))
부르심에서 하나다. 아브라함을 부를 때 땅과 씨를 약속하고 불렀다. 네가 이 땅에 오라. 내가 네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 했다. 그리고 내가 네가 후사를 주겠다. 그러니까 땅과 씨를 약속했다. 그래서 불렀다. 아브라함은 이 부름을 받고 가나안 땅으로 온 사람이다. 이 부름에서 우리 모두는 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교회 이것이 씨와 땅이나 마찬가지다. 씨는 그리스도고 교회는 땅이다. 이것은 지금은 믿는 이들이지만, 장차는 온 인류가 될 사람들인데 이렇게 하나님이 부르셨다는데 서 우리는 하나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가 아니다. 동물적으로는 하나이지만 실제적으로는 기준이 없으니까 하나가 아니고 아니라고 해도 할 수 없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그 근본 원리에 따라서 우리를 불렀다. 그랬으니까 우리는 하나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와 교회 이것밖에는 없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⑵ 그 영의 하나 ( 죽음-부활-영광의 영(예수 그리스도의 영))
그 영의 하나 됨을 지키라. 그 영은 무슨 영인가? 죽고 부활하고 영광을 받으신 그 영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그 영이라고 한다. 죽고 부활해서 영광 받으신 그 영. 그러니까 우리가 영광, 영광 할 때는 죽고 부활해서 영광 받으신 그 영이다. 우리의 소망 우리의 목표 우리의 생명은 무엇이냐면 그것은 죽고 부활해서 영광 받은 생명이다. 이 생명이외에 다른 생명은 영광스러운 생명이 없다. 그래서 우리 생명이 될 수가 없다. 세상에서 잘나가는 일도 있고 좋은 일도 있고 많은 일들이 있겠지만 아무리 우리가 봐도 죽고 부활해서 하나님에게 영광 받은 그 영광 받은 영보다 더 귀한 영은 없다. 이 영이 귀하게 보여야 우리는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이영이 귀하게 보여야. 다른 것이 귀하게 보이면 안 된다. 예수의 영외에 다른 것. 예수 그리스도의 영외에 다른 것이 귀하게 보이면 그를 따를 수가 없다.
⑶ 소망의 하나
소망의 하나. 소망에서도 우리는 하나다.
① 그리스도의 신장의 분량
그리스도의 신장의 분량에 이른다고 했는데 그리스도의 신장만큼, 키만큼 자란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키만큼 그 분량만큼 자란다. 이말 인데 교회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신장의 분량에 이르는 것이다. 우리가 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를 완성할 수 없기 때문에 연합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신장의 분량에 이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 혼자서 이 분량에 이른다면 나 혼자서 가면 되는데 나 혼자 갈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 혼자 서는 그 신장의 분량에 이를 수가 없다. 싫던지 좋던지 肢體가 있어야 되는 것이다. 싫어도 있어야 되고 좋아도 있어야 되고 지체는 있어야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장의 분랑에 이른다. 이것을 오랫동안 어떤 사람들은 개인적인 것으로만 생각을 했다. 내가 어떻게 믿음을 잘 가지고 정말로 영적인 생활을 해서 그리스도처럼 예수처럼 되어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을 했다. 예수처럼 예수처럼 하는 말이 그런 말이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도 그렇게 될 사람은 없다. 불가능하다. 그 불가능한 것이 오늘 교회를 만든 것이다. 가능했으면 교회가 필요가 없다. 각자 예수처럼 되면 되는 것이니까 교회가 필요 없다. 그런데 각자 예수처럼 될 수가 없기 때문에 오늘 교회가 필요하다. 우리는 그것을 꼭 알아야 된다. 아! 내가 그리스도의 신장의 분량에 이르려면 나 혼자로는 불가능한 것이구나. 나도 초창기에는 이런 생각을 못했다. 내가 아름다운 사람을 봤기 때문에 나도 그 아름다운 사람이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차차 가다보니 내 한계가 생기고 아! 이래서 교회라는 것이 필요한 거구나 . 여럿이라는 것이 왜 있어야 되는 것이냐 지체라는 것이 왜 있는 것이냐 하는 이유를 뒤에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교회가 왜 있어야 되는가. 그것은 나 혼자서 그분의 신장의 분량에 이를 수가 없기 때문에 교회가 필요하다. 우리가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가 된다.
② 어린양이 통치하는 새예루살렘
어린양이 통치하는 새예루살렘. 이 어린양이 통치하는 새예루살렘은 바로 그리스도의 신장의 분량의 충만한 데에 이른 것이다. 신장의 분량의 충만한데 이른 것인데 그것을 보니까 보석이 열 두 가지더라 금도 있고 문도 있고 진주도 있고 여러 가지더라 이것이 알고 보면 지체들이다. 새예루살렘을 금덩어리로만 만들었다고 했으면 다를 텐데 여러 가지 색깔의 보석으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의 교회 우리교회 우리 교회 가운데 어떤 사람은 빨간 보석, 어떤 사람은 파란 보석, 어떤 사람은 진주 이렇게 있을 것이다. 이것이 결국은 새예루살렘이 된다. 그러니까 내가 혼자 새예루살렘이 될 수가 없다. 내가 사회 안에서 하나가 되고 완전해지려고 하면 쉽다. 내 개인으로 완전해 지려면 불가능하다.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교회로만 완성되려면 나는 지체로만 있으면 된다. 한지체로만 온전하면 된다. 손가락은 손가락으로만 온전하면 된다. 다른 것 까지 다 할 필요가 없다. 손가락이 발가락 역할까지 다 할 필요는 없다. 그러니까 내가 손가락 하나라도 내 위치를 잘 지켜서 이것이 충실하게 되면 그것이 내가 몸 안에서 자라는 것이고 몸을 자라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알면 아주 쉽다. 그런데 나 혼자 머리도 되고 발도 되고 모든 것이 다 되려고 하면 불가능하다.
그것은 원시상태의 생물이 그렇다. 눈도 코도 입도 없이 한 덩어리로 생겨서 살기는 오래 잘사는데 이것이 제대로 된 것이 아니다. 해삼 같은 원시 생물을 보면 어디가 눈인지 어디가 귀인지 모른다. 그냥 꾸물꾸물하게 생겼을 뿐이다. 그러니까 다르다. 생선을 먹어보면 바다 속에 사는 놈인데 짜지 않다. 그래서 생선은 간을 반드시 해야 맛이 있다. 요즘 사람은 생선을 간을 안 하고 먹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맛이 없다. 꼭 간이 들어가야 된다. 바다에서 나온 놈인데 몸뚱이는 싱겁다. 냉장고가 있어서 생선을 그냥 집어넣는다. 그냥 집어넣었다가 구워먹으면 아주 고약한 비린내가 엄청 난다. 소금에 간을 해서 냉장고에 넣으면 맛이 생긴다. 빨리 먹을 것은 얼간하고 오래 있다가 먹을 것은 더 간을 하고 이렇게 하는 것이 옛날에는 다 있었다. 생선은 꼭 간을 해야 된다. 그래야 맛이 있다. 그런데 해삼을 보면 짜다. 짜. 그러니까 바닷물이 몸에 그냥 들어와 있다. 몸속에서 짠 것을 분리를 못했다는 것이다. 해삼을 먹어보면 짜다. 다른 생선은 먹으려면 싱거워서 간장을 찍어야 되는데 이것은 짜서 물에 담가서 우려내야 된다. 이것이 원시생물이다. 물인지 몸인지 모르고 사는 것이다. 잘못하면 우리 인생도 그럴 수가 있다. 세상 속에 잘 못살면 세상인지 사람인지 모르게 된다. 몸뚱이 자체가 짭짤하게 짜게 돼 버린다. 그런데 고등생물에 가면 갈수록 짠물에 살아도 몸은 싱겁다. 우리도 짠물에 살아도 몸은 싱거운 고기가 되어야 된다. 새예루살렘은 이런 사람들로 이루어지게 된다.
⑷ 믿음의 하나
① 예수의 구속자(구주) 되심
믿음에서 하나. 무슨 믿음에서 하나인가? 예수가 구속자라는 믿음에서 하나다. 예수는 누구냐? 뭐 하러 왔냐? 나하고 어떤 관계가 있느냐? 나의 구속자다. 나를 사람으로 되돌려 놓은 사람이다. 참사람으로 되돌린 사람이다.
예수가 병자를 고치러 온 사람이다.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다. 이런 것도 물론 되긴 된다. 사람이 살다가 보면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 하고 하는 것이다. 내가 하루에 화장실을 세 번간다고 해서 나는 화장실을 세 번 가기로 하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없다. 또 내가 보신탕을 좋아한다고 해서 나는 보신탕을 먹으려고 태어난 사람입니라고 할 수 없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가시다가 행로에 피곤하셔서 앉아서 물 길러 온 사람하고 얘기를 했다고 해서 예수님은 행로에 피곤한 사람하고 얘기하러 온 사람이라고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이런 것은 지엽적인 것들이다. 그런 것은 가다보면 생기는 그런 것들이다.
근본적인 것은 예수는 나를 구속하려고 왔다는 것이다. 그는 나를 사람의 위치로 되돌리려고 온 사람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믿음에서 하나여야 한다.
예수를 잘 못 오해하면 이번 사건처럼 이렇게 된다. 예수가 사회를 개혁하려고 오지 않았냐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너희끼리만 좋다고 하냐는 이런 비판이 나온 것이다. 예수는 사회개혁자가 아니고 나를 구속한 자다.
예수 이전에 사회개혁을 위해서 운동을 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망해서 로마의 식민지로 있었기 때문에 독립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일어나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고 실패도 하고 했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나올 때도 백성들이 많이 몰려든 이유는 그런 것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예수가 왔을 때도 사람들이 몰려든 이유는 똑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그런 사람이 못되었다. 안 되었는지 못되었는지 모르지만 하여간 아니었다. 그래서 다 버리고 갔던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아무도 따라간 사람이 없었다. 여자들 몇 명만 따라갔는데 그것도 인정상 따라간 것이었다. 그러니까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는 그를 선생님이라고 따르던 제자들까지도 다 달아나버렸다. 왜 그런가? 자기들이 생각했던 사회개혁이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백성들이 예수를 보고 뭐라고 했는가? 명절에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는데 빌라도가 ‘누구를 놓아주랴? 예수를 놓아주랴?’고 하니까 백성들이 ‘아니요. 우리에게 바라바를 놓아주세요.’했던 것이다. 바라바는 누구였는가? 그는 민란을 일으켰던 사람이라고 되어있다. 민란을 일으킨 사람이라는 것은 사회혁명가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들이 필요했던 것은 예수 자신이 아니고 사회혁명가였다. 그래서 예수는 버려졌던 것이다.
우리는 예수에 대한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예수는 누구인가? 예수는 나의 구속자다. 그는 나를 구속하려고 온 사람이다. 이것이 아니면 우리는 빗나가 버리는 것이 된다. 다른 길로 가는 것이 된다. 아니어도 좋은 것이 아니고 이것이 아니면 전혀 다른 길이 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어쩌면 예수님이 하신 일이 세례 요한만도 못한 사람이 된다. 세례요한은 적어도 불의를 지적하고 목이 잘려서 죽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역사에 길이 남을 존재이지만 예수는 그런 일을 한 적이 없어서 역사에서 기억될 만한 일을 한 일이 없다. 우리가 왜 예수를 따르는가? 그가 나의 구속자이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다. 이 믿음에서 우리가 하나다. 여기서 하나가 안 되면 안 된다. 천안함 사건에서는 둘이 되도 되는데 예수가 구속자라는 데서는 둘이 되면 절대로 안 된다. 절대로 이런 것은 안 된다.
② 그 영의 생명되심에서 하나임(생명주는 영)
그 영의 생명되심에서 하나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45절에서는 “첫사람 아담은 산혼이 되었다함과 같이 마지막 사람 아담은 생명주는 영이 되었나니”했다. 그 영이 우리의 생명이라는 말이다. 죽음부활을 거쳐서 영광을 받으신 그 영이 우리 생명이 되었다는 말이다. 우리 생명은 오직 죽음부활을 거쳐서 영광을 받으신 그 영이라는 말이다. 그 영에서 우리는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으려면 그 영에서 하나이어야 한다. 우리가 다른 데서 하나가 되어봤자 안 된다. 그런 것은 어떤 환경이 오면 다 갈라져 버린다. 그런데 바로 이 자리에서 죽음 부활 영광 이 영에서 하나가 된 사람, 우리 모두 이 영을 바라보고 이 영 안에서 이 영으로 우리는 만족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길과는 길이 다르다. 세상은 죽음부활이 없다. 세상은 그냥 죽음멸망이다. 죽으면 끝이다. 세상에는 없고 죽음 부활 영광은 예수 안에만 있다. 그런데 우리는 죽음 부활 영광을 영광으로 알고 산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려면 우리가 생각을 잘 해야 된다. 예수에게 다른 것을 기대했다가는 “예수가 왜 그래. 세상이 이런데 왜 모르고 있는가? 왜 내 고통을 몰라주는가? 하나님이 왜 이래.”하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를 따르는가? 왜 그가 우리의 생명이 되는가? 죽음 부활 그래서 영광이 되는 그 생명이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이어야 한다. 그 믿음에서 우리는 하나여야 한다.
③그리스도-교회의 주가 되심(머리)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스도는 교회의 주가 되셨다. 이 말은 “머리가 되셨다. 시작하는 자가 되셨다. 통치자가 되셨다.”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주가 되었다. 머리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교회의 머리는 오직 그리스도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지체의 각 부분이다. 그리스도 외에는 주가 없다.
④그리스도 - 다시 오심
그리고 그리스도는 다시 오신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한 믿음을 가져야 된다. 어떻게 다시 오시는가? 영광으로 다시 오신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을 때는 모든 사람이 버리고 갔지만 그는 영광으로 다시 오신다는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그의 왕국은 이 땅 위에서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지금 보면 될 것 같지도 않은데 좀 허황하고 어리석은 것 같다. 그런데 사도들은 이것을 믿었다. 그의 다시 오심을 믿고 자기들의 인생을 바쳤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어느 날 갑자기 내려 올 것이라고 믿은 것이 아니다. 지금은 그렇게 올 것이라고 생각해서 많은 해프닝이 있었다. 구름타고 오신다고 해서 높은 데로 오신다고 해서 산 위로 오신다고 해서 어떤 사람들은 산 위에 집을 짓고 했었다. 문경세제에 가니까 어떤 사람들은 산 중턱에 마을이 하나 있었다. 안식교 사람들이 지어놓은 동네인데 옛날에는 사람이 많이 살았는데 지금은 사람이 거의 없게 되었다. 왜 그런데 살았는가 하면 예수님이 오실 때는 산으로 오신다고 해서 그랬다. 참 딱한 일이다. 그렇게 다시 오신다고 해서 그 사람들은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다시 오시는 예수로 인해서 하나가 된 것이 아니고 영광으로 다시 오시는 거기에서 하나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지금도 산 위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 지금도 땅 굴 속에서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다. 가까운 경주에도 있다. 거기서는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는 영광으로 오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다. 우리 교회에 오신 분들은 그리스도는 구름타고 산으로 이런 식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영광으로 다시 오신다는 것이다.
그 영광은 그분의 나라와 함께하는 것이다. 나라가 없는 영광은 없다. 혼자 왔는데 빛이 막 빛나는 이런 영광이 아니고 나라가 영광이다. 예수님이 어느 날 빛이 확 비치는 후광을 가지고 있는 그런 분으로 올 것이라고 옛날에는 사람들이 생각했다. 그래서 꿈에라도 그런 것을 보면 좋아서 날뛰고 했었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게 오시는 분이 아니고 영광으로 오시는데 그 영광이 등불 비치듯이 비치는 영광이 아니고 그분의 나라다. 그분의 나라가 그분의 영광이다.
오바마의 영광의 미국이 그의 영광이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말 한마디 하면 권세가 엄청나게 있다. 지금도 하려고만 하면 한 방에 조질 수가 있다. 그 만한 권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미국의 국력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대통령도 이번에 외국을 순방하면서 협정을 하고 했다. 보니까 우리나라의 위상이 굉장히 커졌다. 끝에 앉아 있는지 가운데 앉아 있는지 앉아있는 자리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태극기가 한 가운데 있었다. 이것은 그만큼 우리나라의 위상이 커졌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명박 대통령의 영광은 대한민국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도 마찬가지로 그분의 나라이다. ‘그 영광으로 다시 오신다’ 여기에서 우리는 믿음이 하나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속자 되시면서 우리는 하나고 그가 우리의 영광의 생명이 되시면서 하나고 교회의 주가 되시면서 우리가 하나고 그리고 다시 오신다는 믿음에서 우리가 하나라는 말이다.
⑸ 하나님 아들을 앎에서 하나
하나님 아들을 앎에서 또 하나다. 하나님 아들을 어떻게 아는가? ‘예수는 하나님 아들이니까 神이다’ 이렇게 알아서 하나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는 하나님 아들이라는 데서 우리는 하나라는 것이다.
① 마귀를 물리치신 하나님 아들을 보았음
첫째 마귀를 물리치신 분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하나다. 어떻게 마귀를 물리쳤는가? ‘쉿~’해서 물리쳤는가? 그런 것이 아니고 인생으로서 마귀를 물리쳤다는 것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하는 것으로 이기셨다. 거기에서 우리는 하나다.
그러니까 혹시라도 우리교회에서 ‘예수님께서 권능이 있다. 마귀도 물리칠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마귀를 물리쳐주옵소서~~’하고 기도해 봤자 소용이 없다. 그렇게 기도하려면 다른데 가서 기도해야한다. 그런 예수가 있는데 가서 해야 한다. 우리 교회에 있는 예수는 그런 예수가 아니고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사람으로 인생으로 마귀를 물리치는 분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믿고 있다. 이 믿음에서 우리가 하나이다. 중요한 말이다. 우리교회의 특징 중에 하나가 이것이다. ‘예수는 사람으로서, 인간으로서 마귀를 물리쳤다.’는 이것이 우리의 특색이다.
②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아들을 보았음(셋세마네에서)
두 번째는 절대적으로 순종함으로써 아들이었다. 이론적으로는 원래부터, 선재적으로 예수는 아들이다. 그런데 선재적으로 아들이었다는 것은 무엇으로 믿을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예수는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순종하는데서 아들로 인정되셨다.
그런데 이렇다고 해서 원래는 아들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됐다라고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그게 아니고 원래 그랬는지 안 그랬는지 우리는 잘 모르지만 확실하게 증거되신 것은 절대적으로 순종하신데서 그의 아들이심이 나타났다. 이것이 절정에 이른 것이 겟세마네 동산이었다. “아버지여 할 수 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옵소서 그러나 내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하는 이것이 아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들을 신비롭게 생각할 것이 아니다.
그런데 신학자들은 예수는 원래 신성이 있어서 이렇게 생각한다. 삼위일체론이나 이런 걸 이야기 하면 예수의 선재성, 신성을 말한다. 그런데 참 어렵다. 우리가 예수를 태어날 때부터 알려고 하면 쉽지만 태어나기 이전부터 알려면 너무너무 어려운 일이다. 이건 철학적인 문제고 신학적인 문제다.
그렇지만 그가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을 우리가 확실하게 증거할 수 있는 자리가 있는데 그것은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아들로 인정되셨다.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하나님 아들로 인정되셨다. 우리는 거기서 하나다.
③ 아들이시라도 피조물의 위치에 계심을 보았음(십자가에서)
아들이시라도 被造物의 위치에 계셨다. “예수가 하나님 아들이면 피조물이 아니고 神이다. 신의 아들이니까 예수도 신이다. 하나님 아들이니까 하나님이다.”하는 이런 논리가 나온다. 개의 아들은 개고 소의 아들은 소다. 마찬가지로 신의 아들은 신이다. 이런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는 피조물의 위치에 있더라는 말이다. 이것은 하나님 아들이 되는 것은 신이라야 하나님 아들이 되고 신이 아니면 하나님 아들이 될 수 없는 것인가? 그런 것이 아니고 예수는 피조물인데도 하나님 아들이더라는 것이다.
옛날 고대사회에서는 위대한 사람을 보고 신의 아들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측히 중국에서는 皇帝를 天子라 불렀다. 이것은 하늘의 아들이라는 말이다. 이런 사상도 있었지만 오늘 우리는 그런 것이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 십자가에 못 박으면 그냥 죽는. 그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다.. 황제도 아니고 신의 아들이라고 할 만한 어떤 것이 없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았던 신의 아들이라고 하는 모든 개념이 무너지고 예수는 십자가에서 ‘저건 신의 아들이 아니야, 거건 피조물이야’ 그렇게 보였다. 그것이 하나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 믿음에서 우리가 하나다.
중국의 천자를 보고 신의 아들이라 여겼던 개념도 있고, 신의 아들은 태어나면서 신으로서 우리에게 왔다고 여겼던 개념도 있었다. 이와는 달리 ‘아들이라도 피조물의 위치에 있다.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아들이더라.’ — 이것이 우리가 다른 점이고 이 믿음 안에서 우리는 하나다. 참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아들은 곧 참 사람이다. 논리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피조물이지만 하나님 아들이다. 피조물도 하나님 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 복음이다.
2/2. 한 하나님 안에 있음으로 하나임 (하나님도 한분, 아버지도 한 분, 주님도 한 분)
한 하나님 안에 있으므로 우리가 하나다. 하나님도 한 분이고, 아버지도 한 분이시고, 주님도 한 분이시다.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말은 창조자가 한 분이라는 뜻이고, 아버지가 한 분이라는 말은 우리의 근원도 한 분이라는 말이고, 주님도 하나라는 말은 우리의 통치자가 한 분이라는 말이다. 한 하나님 안에 우리가 있다는 것이 우리가 하나임을 증명한다. 우리는 바로 이런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이다.
3. 몸 안에서 몸으로 성장함
몸 안에서 몸 안으로 성장하기에 우리는 하나다. 서로 지체가 된다.(롬12:5.엡4:25) 손가락과 손가락은 서로 지체가 된다.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다.(고전12:20) 지체를 통하여 우리가 마디마디 자라난다.(엡4:6) 사람 안에서 건축이 된다.(엡4:16) 범사에 머리이신 그 분 안으로 자라난다.(엡4:15) 이 말들은 전부 우리가 몸을 통해서 비유하는, 교회를 의미한다. 이 몸을 우리가 보았기에 이 몸을 통해서 성장하는 사람들이 된다.
나와 가끔씩 전화로 연락을 하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개인적인 신비한 체험, 영적인 체험 또는 영적인 성장과 같은 것들을 구한다. ‘영원의 폭포수’등 그런 내용을 다룬 책들도 있다. 이런 책들은 전부 개인의 영적생활을 말한다. 이런 것을 찾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우리 교회를 좋아해서 가끔 연락을 한다. 지난번에 한번 강하게 ‘지체가 아니면 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 이후로 연락이 없다. 연락이 없다면 거기서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연락을 해야 한다. 혹시라도 전도를 했는데 상대방에 연락을 끊는다면, 거기서 그만둬서는 안된다. 내가 연락을 하고, 끝까지 구원해야한다. 전도하다가 그만두면 안하는 것만 못하다.
4. 믿음 안에서 문안하고 은혜 안에서 함께함
15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믿음 안에서 문안하고, 믿음 안에서 함께하라.’ 글의 마지막에 항상 이런 말이 등장한다. 이와 같은 믿음 안에서 문안하라. 우리는 서로 간단히 ‘잘 지내냐’라고 물어도 이것이 같은 믿음 안에서 하는 말이다. ‘잘 되어가냐’ ‘잘 되어갑니다’ 등등 다 같은 믿음 안에서 한 말이다. 은혜 안에서 함께한다. 우리의 지체가 어떻게 되더라도 은혜가 있어야 이것이 하나가 된다. 지체가 따로 있는 것 같지만 생명체로 연합되어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흐르는 모든 것은 은혜로 말미암아서 흘러간다. 사람 생각으로 잘 안 될 것 같은데 은혜가 우리를 고르게 한다. 이것을 과학적으로 일부러 하려고 하면 안 된다. 꼬치꼬치 따져서 하려고 해도 안 된다. 은혜가 있으면 그것이 싸악 둥그렇게 해결이 된다.
서양요리하는 것처럼 요리를 다 만들어 놓고 마지막에 소스를 싸악 그 위에 부어놓으면 싸악 배여서 들어간다. 짜장면 만들 때 보면 국수를 삶아놓고 그 위에다가 짜장 소스를 쫘악 부어버리면 쫙 들어가서 짜장면이 된다. 이렇게 은혜가 고르게 하는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젓가락으로 차악 비벼서 먹는다. 은혜가 고르게 하기 위해서다.(웃음)
억지로 다하려고 하지 말고 아직 좀 안 된 것은 가만 놔둬야 된다. 그러면 은혜가 그것을 고르게 한다. 상처가 난 것을 기어코 다 파내서 완전히 치료하려고 하면 상처만 더 커진다. 적당히 고름을 짰으면 가만히 놔둬야 생명이 고르게 싸악 덮어져 나간다. 고름도 적당히 짜야지 너무 짜버리면 안 된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사람들이 술을 많이 먹어서인지 肝膿瘍같은 것이 많았다. 요즘은 그런 수술이 없겠지만 옛날에는 병원이 없으니까 돌팔이들이 수술하는 것을 많이 봤는데 고름이 푸욱 나온다. 그때 한꺼번에 다 짜버리면 안된다고 한다. 그래서 고름을 짜고 나서 그 빈 곳에 가아제(gauze)를 가득 채워 넣고 조금씩 제거해야지 한꺼번에 쫙 짜내면 피가 계속 나오니까 안 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런 것도 지혜롭게 해야 한다. 적당하게 짜놓고 놔두면 생명이 그 조직을 살려내는 것이다. 사람이 다 할 수가 없다. ‘성령이 하신다.’는 말이 그런 말이다.
⑴ 다시 오심 안에서 문안하고
“다시 오심안에서 우리가 문안하고”
문안할 때 어떻게 문안하느냐? 어떤 사람들은 형편이 좀 어려운 사람들도 있고, 괴로운 사람들도 있다. 문안하려고 하려는데 문안할 수 있는 말이 없는 사람들도 있다. 너무나 말이 안 나와서 문안할래야 할 수가 없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다시 오심안에서 문안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래도 주님은 다시 오신다. 지금 네가 죽어도 주님은 다시 오신다. 지금 너는 죽지만 주님은 다시 오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난번 유진자매가 죽었을 때도 할 말이 없었다. 처음에는 이것도 좀 해보고 저것도 좀 해보라고 했지만 결국 안 되어서 죽게 되었는데 ‘죽으면 천당에 가라’ 이 말도 못하겠고, 뭔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더라. 가서 할 말도 없고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를 모르는 그런 경우에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못 가는 경우도 있다.
옛날에 그런 경우도 한번 있었다. 이재승형제의 아버님이 큰딸이 돌아가실 때 나보고 같이 가자고 하시는데 내가 가서 할 말이 없는데 꼭 가자고 하셨다. 가는 도중 내내 고민을 했다. ‘내가 가서 神癒의 은사가 있어서 좀 낫게 한다든지 뭔가를 해야 하는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내가 가서 뭘 하겠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른이 가자고 하시는데 내가 안 갈 수도 없고 그래서 할 수 없이 순천에 가게 되었다. 가서 결국은 할 말이 없어서 ‘내가 이렇게 이렇게 살아왔노라’고 내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 그 분이 그 말씀을 듣고 다음날 아침에 나오는데 급히 朴원장이 달려와서 자기 아내(재승형제 큰 누님)가 쓴 쪽지 한 장을 들고 와서 전해주는데 ‘내가 죽어도 이제 여한이 없습니다!’ 그 말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정말 할 말이 없어서 어떻게 말을 했는데 누가 그렇게 역사해줬는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분이 다시 오신다’는 믿음 안에서, 소망 안에서 우리가 문안하자는 것이다. 나를 인도하신 주님! 그 분이 우리의 소망이다. 지금 이 사람이 죽고 있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 내가 알 수 없지만 내 인생을 보면 나를 분명히 인도하신 분이 있다. 내 인생을 인도하신 분을 내가 이야기했다. 그런데 어떻게 누가 했는지 싸악 뭐가 들어가서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는 말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 소망이 곧 그 사람의 소망이 되는 것이다.
⑵ 은혜의 덮으심 안에서 함께 함
“은혜의 덮으심 안에서 함께 한다” 이것은 항상 감사하는 것을 말한다. ‘은혜가 덮어줄 것이다. 은혜가 싸줄 것이다. 밀가루 반죽만해서 말 것이 아니고 그 위에다 짜장소스를 쫙 부어줄 것이다’ 이런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우리가 문안할 수가 있고 우리가 함께 할 수가 있다. 정말 해결 안 되는 것도 많은데 ‘누군가가 거기다가 무엇을 부어줄 것이다’는 그 믿음이 있어야 우리가 함께 살 수가 있다. ‘은혜가 고르게 할 것이다. 은혜가 이것을 덮어줄 것이다. 나는 못해도 은혜가 덮어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함께 살 수가 있다.
한 소망! 한 감사! 이것을 마지막에 이야기하고 있다. 바울이 성경을 기록할 때 마지막에는 언제든지 거의 비슷한 말을 한다. “은혜안에서 함께 할지어다,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것이 다 있을지라도 그 위에 은혜가 덮어져야한다는 말이다. 모든 것이 다 있어도 은혜가 없으면 안 된다. 자장면을 아무리 잘 뽑아 놨을지라도 위에다가 소스를 쫘악 붓지 않으면 짜장면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절실히 필요하다. 그래서 내가 나만 생각하고 ‘안되겠는데....’ 이렇게 포기할 수가 없다. ‘나는 안되겠는데....’라고 했지만 내 최선을 다하면 은혜로 덮어주는 분이 있으니까 우리가 그 믿음을 가지고 함께 하라는 말이다.
우리 안에는 지금도 불가능한 것이 많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도 불가능한 것이 많다. 요번에도 그 분과 서로 이야기를 하면서 ‘아, 이렇게 길이 서로 멀구나!’하고 느꼈다. 그렇지만 그 분도 ‘이런 모순이 있지만 나는 대구교회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렇지만 나한테는 그것이 가능합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두 가지 의견이 전혀 다른데 어떻게 감사하고 사랑할 수가 있나? 우리가 질문하기를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우리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라고 질문한다면 ‘자기한테는 그것이 가능합니다’라고 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우리를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말이 아닌가! 대구교회에 대한 몇 가지 불만이 대구교회를 좋아하는 것을 상쇄하거나 없애버리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그것이 결국은 희망이다. 어떤 사람 같으면 그것이 그냥 완전히 와장창 다 깨져버려서 ‘이제 그만이다’ 그렇게 할텐데 그것이 아니고 ‘그렇지만 나는 여러분에게 아직 관심이 있고, 그렇지만 나는 여러분을 사랑합니다’라고 한다. 우리가 그런 분을 만나는 것도 그렇게 쉽지 않다.
우리도 만일 의견이 다르다 하더라도 ‘아, 의견이 다르니까 너는 그만이구나!’ 이렇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 그렇지만 그 분의 은혜 안에서 우리가 다시 또 만날 수가 있다.
의견과 생각이 다르지만 그러나 또 하나될 자리가 있다.
하나님이 그 자리를 우리에게 마련해주시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만날 수가 있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어떻게 축복된 세계 안으로 인도하셔서
당신의 품으심 안에, 은혜 베푸심 안에, 은혜의 덮개 아래 우리를 감춰주시는지!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것,
또 우리가 다 행할 수 없는 것,
우리가 모르는 모든 것을 주님께서 다 합당하게 처리해주시고
그것을 원만하게 만들어서 축복으로 우리에게 되돌려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실수가 있을지라도,
우리가 잘못이 있을지라도,
주님께서 마지막 은혜를 베푸셔서 늘 고르게 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당신 안에 있는 이 한 소망을 가지고
우리가 형제들과 교통하게 되기를 원하고
이 한 소망을 세상 앞에 보여서
세상에 없는 것을 우리가 증거하도록 그것을 제시하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