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3년(단종 1) 10월에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이 일으킨 반란.
이징옥은 뛰어난 무장으로 관직 생활의 반 이상을 경원첨절제사·경원절제사·영북진절제사·판경흥도호부사·함길도 도절제사 등 함경도에서 보내면서 4군과 6진의 개척에 공을 남겼다.
1453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란을 일으켜 김종서(金宗瑞)·황보 인(皇甫仁) 등을 죽이고, 이어 이징옥을 김종서의 일당으로 몰아 파면하고 은밀히 그 후임으로 박호문(朴好問)을 보냈다.
이징옥은 중앙에서 일어난 정변의 소식을 듣고 분개해 박호문을 죽이고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나가 종성에서 스스로 ‘대금황제(大金皇帝)’라 칭하였다. 그리고 도읍을 오국성(五國城)에 정하고 격문을 돌려 여진족에게 후원을 요청하였다.
이징옥은 일찍이 여진족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여진족 사회에서의 명성을 의식하고, 일이 여의치 못할 때는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을 배경으로 저항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종성부사(種城府使 ) 정종(鄭種)·호군 이행검(李行儉) 등에게 살해되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난은 조선왕조에 대한 최초의 대규모 반란이란 점과 중앙정부로부터 지역 주민에 대한 차별을 가져와 민심을 자극해 후일 이시애(李施愛)난의 선구가 된 점, 황제를 칭하고 여진과의 연합을 도모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사건이었다.
조선 후기의 명재상 채제공(蔡濟恭)은 ≪번암집(樊巖集)≫에서 이징옥은 세조의 불법성을 명나라에 직소해 단종의 복위를 꾀하기 위한 것이지, ≪단종실록≫에 전하는 것처럼 대금황제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반역이 아니라 충신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단종실록≫이 왜곡이 많은 것을 생각하면 후세의 논평이기는 하지만 경청할 만한 내용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