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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구한 역사와 문화의 나라 중국
4. 허난성(河南城) 천하의 중심 중원(中原)
<1> 중국 어머니의 강 - 황하(黃河)
허난성(河南省)은 중국의 양대강(兩大江/黃河, 揚子) 중의 하나인 황하(黃河)와 인접하고 있으며 그 남쪽에 있다하여 하남(河南)이라 이름이 붙여졌다. 면적은 16만 7천㎢로 우리나라 남북한 넓이보다 조금 작고, 인구는 9천 7백만으로 우리나라 남한인구의 두 배 가량인 거대한 성(省)이다. 명실 공히 중국의 심장부라 하여 중원(中原)이라 불렸으며 중화(中華)의 발상지로 꼽힌다. 춘추전국시대, 중원(中原)을 장악하면 천하(天下)를 얻는다고 했다던가? 허난성은 성도(省都)인 장저우(鄭州)를 중심으로 5.000년 고도(古都)인 낙양(洛陽)과 드라마 ‘포청천’으로 유명한 개봉부(開封府)가 있다. 또 등봉현(登封縣)의 숭산 소림사, 중국 최초의 절이라는 백마사(白馬寺), 중국 3대 석굴 중 최고라는 용문석굴, 황하 유람구 등 수많은 고대 유적지와 관광지가 있다. 뿐만 아니라 중국문명의 발상지로 갑골문자가 발견된 은허(殷墟)가 있고, 근래에는 이곳에서 북경원인보다 더 오래된 인류 유골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중국은 오악(五嶽)이라 하여 다섯 개의 산을 꼽는데 동쪽(東)은 태산(泰山), 서쪽(西)는 화산(華山), 남쪽(南)은 형산(荊山), 북쪽(北)은 항산(項山)이며 중악(中嶽)은 이곳 하남성의 숭산(嵩山)을 꼽는다. 또 죽어서 간다는 천하 명당 장지(葬地)인 북망산(北邙山)도 이곳에 있다. 또, 장가계(張家界), 원가계(袁家界)와 비견된다는 운대산(雲臺山) 자연풍경구(自然風景區)도 멀지 않다. 이곳은 조선족이 거의 없이 대부분이 한족이며 극소수의 회족이 이슬람 전통을 지키면서 살고 있다.
버스 차창으로는 붉은 진흙의 계곡이 도처에 보이는데 진흙 절벽마다 벌집처럼 구멍이 뚫려 있다. 석기시대 원시인들이 살던 흔적(穴居)으로 지금은 주거용 보다는 곡식 창고 등으로 간혹 사용되고 나머지는 버려진 채로 비어 있다고 한다. 수천 년의 역사와 애환을 간직한 실크로드의 출발점이 이곳 낙양이며, 아름다운 채색 토기인 당삼채(唐三彩)가 발전한 곳으로 거리에는 당삼채 전문 가게가 많이 눈에 띈다.
<2> 황하 유람구(黃河 遊覽區)
강가에서 바라보면 황하(黃河)는 강인지, 호수인지, 흐름도 보이지 않고 시뻘건 흙탕물이 펼쳐져 있고, 곳곳에 모래언덕들이 이어져 있는데 희뿌연 흙먼지로 강 건너편은 보이지도 않는다.
중국인들이 어머니의 강이라고 사랑한다는 황하는 숱한 역사를 엮어내며 흘렀고, 또 상류의 흙을 실어 날라 비옥한 삼각주를 형성하여 문명을 꽃피운 중국의 젖줄이라고 하는데 겨울의 황하는 그런 역사적 의미보다는 쓸쓸하고 처량하다는 느낌 밖에 들지 않는다.
황제(皇帝)와 염제(炎帝) 상 / 황하 강변의 승마체험
희뿌연 안개 속에 강변 유람선 타는 곳으로 가는데 뒤쪽에 우뚝 솟은 돌산을 깎아서 조성한 거대한 조각상이 보이는데 중국 신화의 아버지인 황제(皇帝)와 염제(炎帝)의 두상(頭像)이라고 한다. 높이가 106m로 미국 자유의 여신상보다 몇 미터나 더 높다는 자랑이다. 사진을 몇 장 찍고는 서둘러 황하를 둘러보는 수륙양용인 호버크래프트(Hover Craft) 유람선에 올랐다.
열 댓 명이 정원인 유람선은 배 밑바닥의 고무 튜브에 바람을 불어 넣더니 뒤쪽의 바람개비를 세차게 돌리며 육지에서 미끄러져 강물로 뛰어든다. 모래 언덕과 강물을 번갈아 넘나들면서 쌀쌀한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데 아득히 보이는 산언덕과 강안(江岸)은 초한지(楚漢志)의 무대로 초(楚)의 항우(項羽)와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전투를 벌이던 장소라고 한다.
얼마쯤 더 달리다 모래언덕에 올라 배를 멈추기에 내렸는데 십여 명의 말꾼들이 중국 돈 10위엔(1.200원 정도)에 말을 타라며 손짓 발짓을 한다. 이 황량한 강 가운데 모래언덕에 움집을 짓고 살면서 관광객에 말을 태워주는 것을 직업으로 살고 있다니 측은한 생각이 들어 도와주는 셈 치고 말에 올랐다. 털썩거리며 10여분 말에서 흔들리다 내려서 움집을 드려다 보았는데 모래 구덩이에 비닐로 지붕이랍시고 엉성하게 덮은 모양이 썰렁하기 이를 데 없고 이런 추운 날씨에 그 곳에서 산다는 것이 신기하고 불쌍한 생각이 든다.
<3> 판관 포청천 - 개봉부(開封府)
중국 드라마 ‘포청천’으로 널리 알려진 개봉부(開封府)는 당시의 관아 건물이 잘 복원되어 있었다.
송(宋)나라 개봉부 판관(判官)이었던 포청천(이름은 포증: 包拯, 包大人)은 명 판결로 유명하며, 예지력을 나타내는 이마의 초승달, 신의와 결단력을 나타내는 검은 얼굴로 묘사된다. 개봉부의 다른 판관들은 3~4개월도 임기를 채우지 못하였다는데 포청천은 1년 3개월 재임으로 가장 오랫동안 판관으로 있었다.
포청천이 사형을 집행하는 도구로 사용했다는 작두가 진열되어 있는데 일반서민용인 ‘개작두’, 귀족용 ‘범작두’, 왕족용 ‘용작두’가 전시되어 있다. 특히 왕족은 사형을 집행한 후 보고하도록 하여 사전의 압력을 차단하였다고 한다. 역대 판관들의 이름이 새겨진 석판에는 포청천의 이름이 있던 곳이 움푹 파여서 읽을 수 없었는데 포청천을 흠모하는 중국 사람들이 하도 쓰다듬어서 닳았다고 하는데 사실인지 중국 사람들의 과장인지...
<4> 청명상하원(淸明上河園)
개봉부 관아건물 / 청명상하원(淸明上河園) 공연
개봉부 관아 관광이 끝난 후 ‘청명상하원(淸明上河園)’을 둘러보았는데 북송시대(北宋時代) 개봉(開封)의 거리모습을 재현해 놓은 일종의 민속촌이다. 이 거리는 송대(宋代)의 저명화가였던 장봉단(張捧端)이 사실적으로 묘사한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의 그림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이라고 하는데 넓이가 12만평 정도이며 당시의 거리와 높은 누각은 물론 넓은 강에는 배까지 다니고, 당시의 복색을 갖춘 사람들이 살면서 공연도 하고 가게도 운영하고 있다.
첫 번째로 부호의 딸 결혼식을 재현하는 것을 관람하였는데 악기 연주가 신기하였고, 다음은 송나라 여성들의 마상(馬上) 기예와 마상격구(馬上擊毬)를 관람하였다. 화려한 옷차림과 다양한 말 다루는 솜씨, 긴 막대기로 공을 쳐서 골대에 넣는 옛날 경기 모습이 신기하였다.
다음은 닭싸움 경기를 보았는데 관광객들이 돈을 걸고 자기가 지정한 닭이 이기면 약 세 배의 상금을 주는 도박경기였다. 거리에서는 도끼 던져서 과녁 맞추기, 머리를 대고 물구나무를 서서 반동으로 계단 오르기, 기다란 채찍을 휘둘러 입에 물고 있는 상대편의 담뱃불 끄기 등을 구경하였고 이름 석 자를 써주면 즉흥으로 시를 지어 간단한 그림을 곁들여 주는 사람도 있었는데 글씨솜씨와 글의 내용이 대단해 보인다.
다음은 중국 최초의 절이라는 백마사를 가는 도중 철탑(鐵塔)을 돌아보았다.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전탑(塼塔-구운 벽돌)인데 오랜 세월에 색깔이 변하여 철(鐵)과 비슷하다하여 철탑이라 부른단다. 13층의 좁고 높은 탑으로 좌우로 세 바퀴씩 소원을 빌며 돌면 이루어진다고 하여 열심히 돌았다.
<5> 고대 왕국들의 도읍지 - 뤄양(洛陽)
관림(關林/관우의 사당) / 천자가육 박물관(天子駕六博物館)
중국의 가장 오래된 절이라는 백마사(白馬寺)를 둘러보았다. 경전을 싣고 온 말의 노고를 생각하여 ‘백마사(白馬寺)’라 하였다는 이 절은 정문 앞에 백마 두 마리의 조각상이 있는데 실물보다 작고 통통한 모습이 볼품은 별로 없었다. 다음은 관운장의 묘를 모신 사당이 있는 관림(關林)을 관광하였는데 중국 사람들은 관운장을 매우 높이 모시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묘의 등급을 묘(墓)-총(塚)-능(陵)-림(林)의 순으로 구분하는데 황제의 묘인 능(陵)보다 관운장의 묘를 임(林)으로 더 높이 받들고 있는데 임(林)은 무장(武將)의 으뜸으로 관운장의 관림(關林)을, 글(문/文)로 공자님을 모시는 공림(孔林) 두 개뿐이라고 한다.
관림(關林)에 제를 올릴 때면 수많은 인파로 넓은광장이 메워진다고 하고 제물로는 소 한 마리, 돼지 한 마리, 양 한 마리 등 엄청난 제물이 차려져 참배객들이 나누어 먹는다고 한다. 전시되어 있는 사진을 보면 서양인은 물론 전 세계에서 참배객이 오는데 한국 사람까지 향을 올리는 사진이 있었다. 3일 소연(小宴)에 5일 대연(大宴)을 마다하고 오관(五關)에 참 육장(斬六將)하며 유비를 찾아 불원천리(不遠千里) 떠나는 관운장의 삼국지의 장면들이 중국인들의 정서에 큰 감동을 주는 듯싶다. 사당에는 관우의 친아들(親子)인 관흥(關興), 의자(義子)인 관평(關平)과 그의 부인도 함께 모셔져 있었는데 관우를 군신(軍神)으로 모시는 데는 수긍이 가지만 중국 사람들은 재물신(財物神)으로 모신다고 하니 신기하다.
◆ 천자가육 박물관(天子駕六 博物館)
낙양 시내 가운데에 지하에는 발굴된 모습 그대로 재현해 놓은 ‘천자가육 박물관(天子駕六 博物館)’을 보았는데 왕족 무덤의 부장품을 발굴모습 그대로 전시하여 보여주고 있었다. 원래는 훨씬 규모가 큰데 일부만 보여주고 있다지만 그 규모가 엄청나게 크다.
맨 앞쪽에 천자(황제)가 탔던 수레와 말 여섯 마리를, 그 다음 줄부터는 말 두 마리가 끄는 마차와 말... 식으로 기다란 행렬인데 산 사람과 동물들을 그대로 죽여서 함께 묻었는데 화석화 되어 뼈와 해골이 줄을 맞추어 있다. 박물관 입구는 말 여섯 마리가 마차를 이끄는 모습을 멋지게 동상으로 제작해 놓았는데 그 밑이 무덤(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입구다.
<6> 중국 최대의 석굴 - 룽먼석굴(龍門石窟)
용문 최대석굴 봉선사(奉先寺) / 봉선사 대불(大佛)
용문석굴(龍門石窟)은 돈황(敦煌)의 막고굴(莫高窟), 산시성(山西省)의 운강석굴(雲岡石窟)과 함께 중국의 3대 석굴로 꼽는데 이 용문석굴이 그 중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한다. 용문석굴은 북위(北魏/AD 500년 경) 시대부터 조성되기 시작했다고 하며, 작은 강을 사이에 두고 당대(唐代)의 대시인 백거이(白居易, 호는 樂天, 香山居士)의 사당이 있는 향산(香山)과 마주하고 있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용문석굴은 현재 크고 작은 1만 3천 개 정도의 석굴이 있는데 2.800여 개의 비문, 50여 개의 불탑, 10만 개 정도의 조각상이 남아있다고 한다.
약 1km정도 길이의 석회석 절벽에 개미집처럼 조성된 석굴은 내부는 물론이려니와 벽면까지 빼곡히 부처상이 조각되어 있다. 봉선사의 거대한 불상에서부터 손톱만한 불상까지 다양한 크기의 부처가 온전한 환조로, 혹은 부조로 모셔져 있는데 온화하면서도 우아한 모습이 특징이라고 한다. 중국 사람들은 돌부처의 머리나 신체의 일부분을 집에 모시면 좋다고 하여 훼손을 부채질하였다고 하는데 떨어져 나간 부분이 많았다. 용문석굴이 처음 조성되기 시작한 북위(北魏)시대인데 당대(唐代)에 와서 측천무후(則天武后) 때에 많이 조성되었고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봉선사의 3존위 불상도 측천무후 때 조성되었다고 한다. 이 봉선사에 모셔진 불상 가운데 가장 큰 부처인 봉선사 대불은 측천무후 자신의 모습과 부처의 모습을 섞어 조각하게 하였다고 전한다.
낙양이 고향인 백거이(白居易/樂天)는 용문석굴을 사랑하여 생전에 많은 수리비용을 내 놓았고 사후(死後)에도 용문석굴을 바라볼 수 있는 강 건너편의 향산(香山)에 묘실을 마련하였다.
저녁 식사는 호텔식 대신 낙양의 전통 요리인 수석(水席)요리를 맛보았다. 1인당 우리 돈 1만원씩인 수석요리는 총 24가지의 요리가 ‘물 흐르듯이 나온다, 또는 탕요리가 많다’하여 수석(水席)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8가지의 찬 음식이 서빙 된 후 따뜻한 요리 16가지가 서빙 된다. 맛은 별로였다는 느낌이다.
<7> 무림(武林)의 본산(本山) - 숭산 사오린쓰(嵩山 少林寺)
중국 무림의 총 본산인 소림사는 낙양에서 1시간 30분가량 떨어진 등봉현(登封縣)에 있는 숭산의 소실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중국의 오악(五嶽) 중 중악(中嶽)인 숭산은 태실 36, 소실 36,총 72개의 봉우리를 가진 산으로 묘사되고 있다.
1.500여 년 전 북위(北魏) 때 창건되었다고 하는 소림사는 인도의 승려 달마대사에 의하여 이름을 날리게 되고 또한 달마는 중국 무술의 창시자로도 숭상되고 있다. 등봉현에 들어서자마자 수많은 무술학교들이 도로 옆을 따라 늘어서 있었는데 소림사 주변에만 50여 개의 무술학교가 있다고 한다.
인도에서 구법(求法)을 위하여 중국으로 온 보리달마(菩提達磨)는 제일먼저 광저우에 도착하여 혜가(慧可) 스님에게 구법하게 되는데 수백 번의 간청에도 거절당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는 이곳 숭산으로 와서 소실봉 중턱의 바위동굴에서 9년 동안 면벽정진(面壁精進) 수도하여 크게 깨달음을 얻고 선종(禪宗)의 창시자가 된다.
이야기로는 달마가 9년 동안 마주보고 앉았던 동굴 벽면에 달마의 그림자가 새겨졌다고 한다. 후일 혜가스님이 오히려 달마를 찾아와 구법을 하게 되는데 마침 겨울이라 흰 눈이 내리는데 달마가 ‘하늘에서 붉은 눈이 내리지 않는 한 안 된다.’며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혜가스님은 칼을 들어 자신의 왼 팔을 내리쳐 자르고 그 피를 뿌려 눈을 붉게 물들게 하였다고 한다. 깜짝 놀란 달마가 달려 내려가 옷을 벗어 왼쪽 어깨를 감쌌는데 온통 피로 붉게 물들었고.... 그때부터 소림사 스님들은 붉은 장삼을 왼쪽 어깨에 걸치고, 합장을 할 때도 두 손으로 하지 않고 오른손바닥 하나만 세우는 전통이 생겼다고 한다.
소림무술은 소림사에 있는 승려들의 체력이 너무 약한 것을 보고 달마선사가 다섯 가지 동물의 움직임에 창안하여 권법을 만들어 훈련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소림사가 크게 일어나기는 당 태종의 아들이 위기에 빠졌을 때 열 세 명의 소림사 승려들이 구해내어 당 태종으로부터 크게 상급을 받아 번창 하였다고 하는데 가장 번창 하였을 때는 승려만 3만 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제일먼저 실내 공연장에 들어가 소림사 고수들의 무술 시범을 관람하였다. 약 30여 분 계속된 공연에서는 18가지 무기를 이용한 무술(十八班武藝), 격파술, 7~8세 가량의 동자공(童子功)이 보여주는 서커스에 가까운 유연한 몸놀림 등이 돋보였다.
소림무술 시범 / 탑림(塔林)
그 중에서도 가장 놀라웠던 것은 바늘을 던져 유리판을 뚫는 무술이었는데 눈을 의심할 정도다.
무술 고수인 스님이 바늘을 던져 유리판을 뚫고나가 반대편의 풍선을 터뜨리는 무술인데 뚫린 유리판 구멍을 들고 관람석을 한 바퀴 돌며 직접 확인시켜 준다. 설마 스님들이 사기를 치는 것은 아니겠지?
또 경내에 있는 아름드리 은행나무에는 스님들이 일지(一指), 이지(二指) 관수(貫手/손가락 훈련)를 훈련하여 껍질에 수백 개의 3~4cm깊이의 지공(指孔)이 뚫린 것도 볼 수 있다.
그리고 1.000년 이상 되었다는, 일반 가마솥의 서너 배 크기의 가마솥이 있는데 채(菜/나물)를 볶을 때 썼다고 하며 무술연마를 위하여 공중에 가로지른 나무에 거꾸로 매달려 볶았다고 한다.
그 옆에는 엄청나게 큰 맷돌이 있었는데 돌리는 손잡이가 없고 세 사람이 손가락 두개를 넣어 돌리도록 구멍이 나 있었는데 그 크기로 봐서는 소나 말로 끌어야만 돌릴 수 있을 듯하였다.
소림사 경내 / 오백나한을 모신 입설정(立雪亭)
절의 가장 안쪽 별채인 입설정(立雪亭)에 모셔져 있는 부처님 뒤의 벽에는 아주 오래된 오백나한도(五百羅漢圖)가 있는데 이상한 신통력을 보여 60년 마다 얼굴 모습과 방향이 바뀐다고 한다. 소승불교(小乘佛敎)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부처님의 제자를 아라한(阿羅漢), 또는 나한(羅漢)이라 하니 오백나한은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 직접 가르친 오백 명의 수제자들인 셈이다. 그림의 신통력 여부를 확인하려면 사진을 찍어 60년 후에 다시 와서 비교하여 보아야 하는데 내 가 120살까지 살 수 있으려나...
수많은 관광객이 경내를 돌아다니고 있고 또 무슨 촬영 팀인지 스님 여남은 명을 데리고 절 뜨락에서 뛰어 오르고 발차기하는 모습 등을 비디오로 찍고 있어서 우리가 생각하는 조용한 사찰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현재의 주지스님은 33대 째인데 미국에서 공부한 분으로 경영의 고수(무술이 아닌)로 엄청난 부를 창출한다고 하고 주식상장(株式上場) 운운의 소문도 있다고 하니 씁쓸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소림사의 뒤쪽으로 10여 분 올라가면 탑립(塔林)이 있다. 그야말로 탑의 숲으로, 소림사의 주지스님을 비롯한 고승들의 사리탑인데 240여 개나 된다고 한다. 스님의 지위에 따라 탑의 높이와 장식이 모두 조금씩 달랐는데 32대 주지스님의 사리탑이 가장 잘 꾸며져 있다. 재미있는 것은 탑을 돌아가면서 사방 벽면에 스님이 평생에 사용하였던 물건들을 부조로 새겨 놓았는데 거기에는 비행기, 컴퓨터, 비디오카메라, 탱크, 승용차 등 현대문명의 이기(利器)들이 총 망라되어 있어서 실소를 금할 수 없다.
5. 윈난성(雲南省) 봄의 도시(春城) 쿤밍(昆明)
운남성(雲南省)은 중국 남서부 산악지대로 중원(中原)에서 보면 그야말로 ‘아득한 구름의 남쪽’ 이다. 면적은 약 39만㎢ 이니 우리나라 남한 면적의 4배이고, 인구는 약 4,500만 명이라고 하며 성도(省都)는 꾼밍(昆明)으로, 연중 기후가 온화하여 ‘봄의 도시(春城)’ 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성(省)의 북서부는 티베트(Tibet) 자치구, 북부는 쓰촨성(四川省), 북동부는 구이저우성(貴州省), 동부는 광시좡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와 접한다. 서쪽으로 미얀마, 남쪽으로 라오스, 남동쪽으로는 베트남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중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한족(漢族:67%) 외에 이족(彛族:11%), 바이족(白族: 3.6%), 하니족(合尼族:3.4%), 좡족(壯族:2.7%), 다이족(傣萌:2.7%), 먀오족(苗族:2.5%), 회족(回族:1.5%) 등 그 외에 많은 소수민족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춘추전국시대(3세기), 촉(蜀)의 제갈량이 이 지역의 맹주였던 맹획(孟獲/彛族)을 7번 사로잡았다 7번 풀어준 칠종칠금(七縱七擒)은 너무나 유명한 고사(故事)이다.
운남성의 관광지로 이름난 곳은 중전고성(中甸古城/샹그릴라),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유산인 여강고성(麗江古城/동양의 베니스), 차마고도(茶馬古道)의 출발점 호도협(虎跳峽), 세계 최대의 카르스트지형인 석림(石林), 옛 따리국(大理國)의 수도였던 따리시(大理市) 등을 꼽을 수 있다.
<1> 신비의 구향동굴(九鄕洞窟)
2011년 절친한 대학후배 세 명과 이 지역을 관광했는데 일정을 잘못 잡아 골고루 보고 오지는 못했지만 아주 즐거운 여행이었다. 제일 먼저 구향동굴을 소개한다.
종유석의 숲 / 신의 밭(神田-God's Field) / 동굴 입구
쿤밍에서 90km 거리의 구향(九鄕)동굴은 계곡과 폭포 천태만상의 석순들과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중국 최대의 종유석 동굴이며 1989년에 발견되어 1992년부터 일반에게 공개되었다고 한다.
이 지역을 구향풍경구(九鄕風景區)로 지정했는데 총면적이 200㎢에 달하며 66개의 종유동굴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구향동굴은 길이가 3km가 넘고 옥주동(玉柱洞), 백옥동(白玉洞) 등 크고 작은 방이 1000개 이상 있으며, 30m 높이의 자웅폭포(雌雄瀑布), 계단식 논처럼 생긴 신들의 밭 신전(神田), 영혼의 골짜기 혼협(魂峽), 웅사대청(雄獅大廳), 신녀궁(神女宮), 이가채(彛家寨), 지하도림석(地下倒林石), 취협(翠峽), 여유(旅遊) 등 9개 지역으로 나뉜다고 한다. 동굴 안에는 그림벽화나 사냥을 하고 살았던 옛 사람들의 자취가 남아 있다.
<2> 운남(雲南) 영상가무단(映像歌舞團)
저녁에는 중국이 자랑하는 운남 영상가무단(雲南映像歌舞團)의 공연을 보았는데 중국의 공연을 볼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예상했던 것 훨씬 이상의 감동을 준다. 우선 웅대한 스케일과 연출력, 영상미도 뛰어나지만 수많은 중국 소수민족들의 독특한 문화(전통무용)를 감상할 수 있어 즐거움과 놀라움이 배가(倍加) 되곤 한다.
운남 영상가무단의 공연
<3> 쿤밍(昆明)의 풍광과 석림(石林)
쿤밍(昆明)은 서쪽으로 병풍같이 둘러싼 커다란 돌산이 둘러서 있는데 서산(西山)으로 불린다.
그 바위 절벽 중턱으로 둘레길이 있는데 석굴을 파고, 좁은 통행로를 만들었는데 그 깎아지른 절벽에 용문(龍門)이라는 석굴통로가 있다. 해발 2500m의 서산은 웅대한 삼림으로 절도 많지만 서산 관광의 백미(白眉)는 역시 용문(龍門)이다.
깎아지른 절벽 중턱을 뚫어 입구인 삼청각(三淸閣)으로부터 정상인 달천각(達天閣)까지 길을 냈는데 자연석 돌계단이 1.333개나 되고 이 길을 내느라 70명의 석공들이 13년 동안이나 작업을 했다고 한다. 서산 정상에서 보면 꾼밍(昆明)시가 한 눈에 조망된다.
곤명 서산(西山)의 용문(龍門)
쿤밍 시내에는 청나라의 장군이었던 오삼계(吳三桂)가 애첩(愛妾)을 위하여 지었다는 금전(金殿)이 있다.
이 동전(銅殿)은 원래 도교(道敎)사원인 태화궁(太和宮) 안에 있던 25톤의 구리로 지어진 동전(銅殿)이었는데 오삼계가 크고 화려하게 증축하였다고 한다. 이 동전은 햇빛을 받으면 금처럼 빛이 나서 금전(金殿)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꾼밍(昆明) 시내에는 아름답고 자그마한 취호(翠湖)공원이 있고 그 호수 한쪽에 청나라 때 지은 대관루(大觀樓)가 있다. 대관루는 3층의 누각인데 날렵한 처마의 곡선이 아름다운 비취색 빛깔의 취호(翠湖) 호수공원과 어울려 그림처럼 아름다운데 시민들과 관광객들의 쉼터다. 공원을 거니노라면 이 내륙 깊숙한 곳의 작은 호수에 빨간 부리의 갈매기들이 떼를 지어 사람 무서운 줄도 모르고 먹이를 달라고 쫓아다니는 것이 신기하다.
원통산(圓通山) 자락에 자리 잡은 원통사(圓通寺)는 당나라 때인 8세기에 처음 세워진 불교사찰인데 대승(大乘), 소승(小乘), 티베트 불교가 공존하는 절이라고 한다. 또한 절의 외관은 태국불교의 영향을 받아 태국(泰國) 식으로 지어졌다니 신기한 절이다.
취호(翠湖)공원의 갈매기 / 곤명시민의 휴식처 대관루/ 원통사(圓通寺)
◆ 돌의 숲 - 석림(石林)
소수민족과 함께 춤을 1,2 / 이족(彛族)의 고향 석림(石林)
이족(彛族)의 고향이라 일컬어지는 석림(石林)은 세계 최대의 카르스트(Karst) 지형으로 그야말로 돌의 숲이다.
5~30m의 회색 바위들이 만들어 낸 빽빽한 돌의 숲은 관광객에게 개방 된 곳이 전체의 1/5 정도라고 하는데 종일 걸어도 바위정글을 벗어나기 어려우니 그 넓이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지역이겠다.
2억 7천 만 년 전 바다 속이었던 땅이 지각변동으로 솟아올라 오랜 세월 석회암이 비바람에 씻겨 현재와 같은 기묘한 풍경을 이루게 됐다고 한다.
중국 사람들은 흥이 많은 사람들인 것 같다. 가는 곳마다 떼거지로 모여서 춤을 추거나 태극권인지 뭔지 운동들을 한다. 특히 소수민족들이 많이 사는 곳에서는 각 소수민족 고유의 악기들을 연주하며 관광객들을 맞기도 한다. 나도 같은 피가 흐르나보다. 흥을 참지 못하고 같이 뛰어들어 흉내를 내야 직성이 풀린다. ㅎ
6. 쓰촨성(四川省) 고대 촉한(蜀漢) 땅 쓰촨(四川)의 풍광(風光)
<1> 낙산대불(洛山大佛)과 동방불도(東方佛都)
중국대륙 남서부 내륙(內陸)에 깊숙이 위치한 쓰촨성(四川省)은 크게 촨시고원(川西高原)과 쓰촨분지(四川盆地)로 나누어지는데 성(省) 면적이 우리나라 남한면적의 5배나 된다. 서쪽으로는 칭하이성(靑海省)과 티베트(藏族)자치구, 북쪽은 간쑤성(甘肅省)과 산시성(山西省), 남쪽과 동쪽은 윈난성(雲南省), 구이저우성(貴州省)과 인접하여 있는 내륙이다. 성도(省都)는 청두(成都)이고 충칭(重慶)직할시를 포함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경상남도에 부산광역시가 있는 경우와 같다.
쓰촨성(四川省)은 중국의 황허(黃河)강 유역인 중원(中原)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독특한 쓰촨문명(四川文明)을 이루었으며, AD 3세기, 유비(劉備)가 세웠던 촉한(蜀漢)의 근거지였던 곳으로 당시에는 익주(益州)라고 불렸다. 쓰촨성에는 관광명소로 이름난 곳이 많은데 여기서는 청두(成都) 인근의 러샨시(樂山市)에 있는 러샨따포(樂山大佛)과 동방불도(東方佛都)를 소개하고자 한다.
쓰촨(四川)은 장강(揚子江), 민강(岷江), 퉈강(沱江), 자릉강(嘉陵江)의 네 개의 강이 성(省) 내로 흐른다하여 붙은 이름인데 러샨시(樂山市) 앞에는 다시 장강(揚子江)의 지류인 민강(岷江), 칭의강(靑衣江), 대도하(大渡河)가 합류하고 그곳에 깎아지른 붉은 사암절벽이 있는 능운산(凌雲山)이 우뚝 서 있다.
낙산대불 입구/거대한 글귀(阿彌陀佛)/도솔궁(兜率宮)
이 능운산(凌雲山)은 전체가 세계문화유산, 세계유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크게 낙산시 쪽의 강안(江岸) 절벽에 조성된 낙산대불(樂山大佛), 반대쪽에 조성된 동방불도(東方佛都), 산 정상부근에 조성된 시인 소동파(蘇東坡)를 기념하여 조성된 동파루(東坡樓)가 있는 공원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산 전체가 수많은 조각들과 사찰(寺刹)들로 가득 들어차 있다고 보면 된다.
불자(佛子)들에게는 성지(聖地)인 셈으로 나는 두 번 다녀왔는데 항상 관광객들과 참배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고 특히 대불(大佛)을 보러가는 줄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어 한 없이 기다려야 한다.
<2> 러샨따포(樂山大佛)
낙산대불은 절벽 아래 세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이 여름철 장마 때 항상 수해가 많았던 곳으로 이곳의 참상을 본 해통선사(海通禪師)께서 수해(水害)를 막아보려 대불(大佛)을 조성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대불은 의자에 앉은 형상의 좌상(坐像)이다.
낙산대불 이모저모
좌상의 크기는 전체 높이 71m, 머리길이 14.7m, 머리넓이 10m, 어깨넓이 28m, 귀 길이 6.72m, 코 길이 5.33m, 발 하나의 넓이가 5.5m, 길이가 11m.... 발 위에만 100명이 설 수 있고 귓구멍 속에 성인 두 사람이 들어가 앉을 수 있다는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이다. 중국에서 제일 크고, 물론 세계에서 가장 큰 석불(石佛)이라는데 조성하는데 90년이 걸렸다하고 조성 시기는 8세기, 당(唐)나라 때라고 한다.
대불은 절벽을 통째로 파들어 가며 불상을 조성하였는데 위쪽에서 불상의 측면을 보며 지그재그 식으로 내려오는 잔도(棧道)가 아슬아슬하고, 근처 바위벽은 온통 동굴(洞窟)과 불상조각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 신비로움을 더한다. 부근에는 대불사(大佛寺), 오룡사(烏龍寺), 능운사(凌雲寺) 등 사찰이 볼만하며 산꼭대기에는 해통선사의 골분(骨粉)을 모셨다는 영보탑(靈寶塔)이 우뚝 솟아있어 멀리서도 보이는데 13층, 35m높이의 전탑(塼塔)으로 매우 아름답다.
해통선사 / 영운사 입구 / 영운사(凌云寺) 향(香) 공양
<3> 동방불도(東方佛都)
동방불도(東方佛都)는 ‘동쪽에 있는 부처님 마을’ 이라는 의미겠는데 1994년에 새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붉은 사암(砂巖)지대로 굴을 파거나 조각을 하기 용이한 까닭인지 거대한 석굴에는 부처님을 비롯한 수많은 보살(菩薩), 나한(羅漢) 들이 모셔져 있어 흡사 불교 박물관을 보는 느낌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으로는 연심산(連心山) 입구의 수많은 계단을 오르면 거대한 부처님 좌상이 전각(殿閣) 안에 모셔져 있는데 중국 4대 석불의 하나인 산시성(山西省) 윈강대불(雲岡大佛)을 그대로 본떠 조성하였다고 한다. 많은 계단을 오르려면 진땀깨나 흘린다. 근처의 넓은 동굴 안에는 각종 조각들이 들어차 있는데 특히 벽면에 아로새겨진 천수관음(千手觀音) 마애불(磨崖佛)은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자아낸다. 이 천수관음 외에도 수많은 조각품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데 조성된 지 오래지 않은 까닭으로 상태도 아주 깨끗하다.
모든 조각들이 무척 아름답고 신비롭기는 하지만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지 않으니 어쩐지 조작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중국 정부의 의도된 관광 상품 냄새가 물씬 풍기기는 하지만 어쩌면 불자(佛子)들이 꿈꾸는 불국정토(佛國淨土)가 이런 곳이 아닐까?
동굴 밖 산허리에는 너무 커서 전체모습이 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17m 와불상(臥佛像)도 있고 그리 크지는 않지만 붉은 사암으로 색깔이 너무나 아름다운 부처님 열반상(涅槃像)도 있는데 열반상 뒤로 늘어서있는 제자들은 부처님의 열반을 지켜보고 있는 듯....
동방불도(東方佛都)의 석불 좌상과 아름다운 부처 열반상(涅槃像)
연심산 대불(連心山 大佛 / 이 뒤 쪽이 東方佛都)과 부근의 다른 대불
<4> 시선(詩仙) 소동파(蘇東坡) - 동파루(東坡樓)
동파루는 능운산(凌雲山) 꼭대기에 있는데 상당히 넓은 면적이 아름다운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고 누각(樓閣)에 앉으면 눈 아래로 민강(岷江), 청의강(靑衣江), 대도하(大渡河)의 합류지점이 한 눈에 들어오는 명승지이다. 이른바 촉(蜀) 중 명루(名樓)로 꼽던 동파루(東坡樓)이다.
동파루/ 현판(懸板)/ 시선(詩仙) 소동파(蘇東坡)
시와 글씨에 능했던 소동파는 이곳 출신으로 본명은 소식(蘇軾), 자(字)는 자첨(子瞻), 호(號)가 동파(東坡)이다. 그의 시재(詩才)가 잘 나타나 있는 것이 저 유명한 적벽부(赤壁賦)라고 한다. 이 동파루에서 보면 산 아래를 빙 둘러 낙산대불(樂山大佛), 동방불도(東方佛都) 및 수많은 절들이 들어서 있는 형국이다.
옛 사람들은 ‘천하 산수의 으뜸은 촉 땅이요, 촉 땅의 으뜸은 가주(嘉州/낙산)요, 가주의 명승은 능운사로다.(天下山水之觀在蜀, 蜀之勝曰嘉州 州之勝曰凌雲寺)’ 라는 말로 이 지역의 아름다운 경관을 칭송했다고 한다.
입장료는 낙산대불과 동방불도 관람을 포함해서 160元(29.000원 정도)으로 상당히 비싼 편인데 우리는 경로할인(60세 이상)을 받아 일인당 90元(16.000원 정도)을 냈다. 청두시내에서 러샨시까지 버스비 46위안(元)이고 낙산에서 아미산까지는 매우 가깝다.
휴식/ 아름다운 불상(佛像)/ 영보탑(靈寶塔)
<5> 사면십방 보현보살 좌상(四面十方 普賢菩薩 坐像)
삼보일배 / 타르초 / 금정(金頂)과 보살상
이곳 쓰촨성은 혼자 배낭여행으로 이미 다녀갔지만 인근 명승지를 제대로 보고가지 못했었는데 쓰촨성(四川省) 인근의 명승지를 둘러볼 목적으로 친구 두 명과 배낭하나 달랑 메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시 7박 8일간의 자유여행을 떠났다. 우선 항공편으로 난징(南京)으로 날아간 다음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유비(劉備)가 세운 촉한(蜀漢)의 수도(首都) 청두(成都)까지 침대(軟臥)열차를 탔는데 장장 25시간이 걸린다.
쓰촨성(四川省)은 중국 서부내륙 깊숙이 위치한 분지(盆地)인데 쓰촨(四川)이라는 지명은 성내(省內)로 장강(揚子江), 칭이강(靑衣江) 등 네 개의 강이 흐른다 해서 붙은 이름이라는데 면적은 약 49만 ㎢로 우리나라 남한 면적의 약 5배, 인구는 약 9천만으로 중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성(省) 중의 하나이고 대부분 지역은 아열대(亞熱帶)기후를 보인다고 한다. 쓰촨성에는 특히 빼어난 자연경관이 많아 주자이거우(九寨溝), 어메이산(峨眉山), 팬더곰 서식지 등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世界文化遺産)이 5곳이나 되고 세계지질공원(世界地質公園) 1곳 등 국가지정 지역까지 포함하면 이름난 곳이 엄청나게 많으며 중국정부에서 중국우수여행지(中國優秀旅行地)로 지정한 곳이 10군데나 된다고 한다.
한편, 2008년 진도(震度) 8의 쓰촨 대지진으로 사망자 6만 9천 명, 부상자와 행방불명자를 포함하면 46만 여 명의 인명피해를 냈던 곳, 그 여파인지 땅이 갑자기 함몰(陷沒)되는 대규모 싱크홀(Sink hall)이 많이 나타나 재앙(災殃)이 그치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서쪽으로 티베트, 윈난성(雲南省)과 잇닿아있어 소수민족이 많이 살고 있는데 이족(彛族), 장족(藏族/티베트족) 등으로 한족(漢族)과 다른 복색이나 생활 풍습 등이 많이 눈에 띈다. 또 중국 4대 요리 중 하나인 ‘사천요리’는 매운 맛이 강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 대표적인 음식이 ‘훠궈(火鍋)’로 중국식 샤브샤브인데 상당히 매웠지만 먹을 만 했다.
청두(成都) 인근에는 볼거리들이 제법 많은데 여기에서는 어메이샨(娥眉山) 관광만을 간추려 써 보기로 한다.
◆ 불교 보현(普賢)성지 어메이샨(峨眉山)
아미(峨眉)산은 중국 4대 불교성지 중 하나로 꼽히는데 연중 수많은 관광객과 불교신자들이 다녀가는 곳으로 특히 한국 불자(佛子)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고 한다.
중국 4대 불교성지(佛敎聖地)는 쓰촨성(四川省) 아미산(峨眉山)의 보현(普賢)성지, 산시성(山西省) 오대산(五臺山)의 문수(文殊)성지, 저장성(浙江省) 보타산(普陀山)의 관음(觀音)성지, 안후이성(安徽省) 구화산(九華山)의 지장(地藏)성지를 꼽는다고 하는데 그중 하나이다.
안내도(뇌동평(雷洞坪) 정차장부터 정상까지의 모습) / 등산로 입구(뇌동평)
청두 시내에서 어메이샨 관광마을(峨眉山市)까지는 버스로 약 3시간 걸리며 차비는 50위안(9.000원)이다. 어메이샨은 러샨시(乐山市)에서 가까운데 우리는 아침에 러산에 도착하여 러샨따포(낙산대불/乐山大佛)를 먼저 관광하고 저녁에 어메이샨 밑 관광마을로 가서 잤다.
어메이 호텔(娥麓酒店)에서 1박 후 아침 일찍 호텔 앞 보국사(報國寺) 버스정류장으로 나갔는데 정상부근 뇌동평(雷洞坪) 정차장까지 왕복 차비가 90위안(16.200원)이다. 거기서 다시 케이블카를 타야 한단다.
<보국사 → 뇌동평 정차장 → 케블카(索道) → 화장사(금정/정상)>
가까운 줄 알았는데 차비가 90위안으로 2시간이나 올라가며 시시각각으로 주변 풍경이 달라진다. 깊은 계곡과 가파른 절벽, 열대 밀림지역을 연상시키는 울창한 숲은 4월인데도 갖가지 꽃들과 폭포, 짙은 녹색으로 어우러진 모습이 이미 한여름 풍경이다. 그러나 차츰 고도가 높아질수록 풍광이 달라지고 기온도 서늘해지며 짙은 구름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다. 중간쯤 매표소에 내려 입장권을 사는데 1인당 150위안(27.000원)이지만 우리 셋은 60세 이상이라 80위안(14.400원)으로 할인을 받았다.
뇌동평 버스정류장에 내려 케이블카 티켓을 사는데 왕복권을 사면 120위안(21.600원)이지만 오르는 표만 사면 65위안(11.700원)이다. 입장료도, 케이블카도 터무니없이 비싸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내려올 때는 걸어내려 오기로 하고 65위안을 내고 오르는 표만 샀다. 10여 분 가파르게 올라가는 케이블카에서 바라보면 고산(高山)임을 실감하게 고사목들이 많이 보이고 산 아래쪽과는 판이하게 골짜기마다 흰 눈이 쌓여 있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니 대나무를 잘라서 만든 지팡이를 파는 가게가 늘어서 있고 향을 파는 가게들도 많다.
중국인들은 너도 나도 대나무를 뚝 잘라 조잡하게 만든 지팡이를 두 개씩 사고 향도 산다. 중국 향은 작은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우리나라 홍두깨만 한 것도 있다. 몇 몇 중국인들은 그 홍두깨만한 향을 서너 개 비스듬히 등에 짊어지고 산을 오른다. 거기서부터 30여 분 쯤 더 올라야 하는데 가마꾼들은 노인들을 붙잡고 타라고 조른다. 짙은 구름이 시시각각으로 몰려왔다가 사라지는 축축하고 가파른 길을 더듬거리며 오르는데 빙판길을 조심하라는 문구가 곳곳에 보인다. 조금 오르다보니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깊은 계곡이 보이는데 보호철책이 있고 원숭이를 조심하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10 여 마리의 개정도 크기의 원숭이들이 절벽 사이로, 철책 위로 뛰어다니는데 사람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음식을 달라고 다가와서 손을 내민다. 그런가하면 느닷없이 달려들어 들고 가는 물병이나 음식을 낚아채기도 해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른다.
원숭이 출몰지역 / 계곡의 안개 속에 핀 이름 모를 꽃
정상 부근에 다다르면 수많은 계단이 있는데 계단 양 옆으로는 수레를 짊어진 흰 코끼리들을 쭉 세워 놓아 신비롭다. 윤회(輪回)의 수레바퀴를 상징하는 듯... 계단이 끝나면 산꼭대기에 광장이 나타나고 그 한 가운데에 엄청난 크기의 보살좌상이 세워져 있어 보는 사람들을 압도한다. 머리가 3층이고 사면에 모두 10개의 얼굴이 있다. 이른바 사면십방보현보살(四面十方普賢菩薩)이다. 좌상(坐像)의 기단(基壇)은 네 마리의 코끼리가 받치고 있고 그 위에 다시 연꽃 좌대(座臺)를 얹어 그 위에 모셨다.
660톤의 구리로 만들고 금박을 입혀 황금빛으로 빛나는데 그 높이만도 48m나 된다고 한다. 보살상 좌대 밑 코끼리 아래쪽은 다시 방을 만들어 보살들을 모시고 있다. 보살상 뒤 쪽은 화장사(華藏寺)라는 사찰명이 보이고 대웅전도 있는데 뒤쪽 더 높은 곳에 금정(金頂)이 있다. 사람들은 화장사라는 사찰명을 부르지 않고 모두 금정(金頂)이라 하는데 그 이유가 아리송하다. 이 모든 건물들은 모두 금박을 입혀 황금빛으로 빛나서 경이로운데 금박을 입히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금이 소요되었을까??
금정(金頂) 뒤쪽은 천애(天涯)의 낭떠러지인데 시시각각으로 밀려왔다 사라지는 짙은 안개(雲霧)로 그 모습을 제대로 가늠할 수도 없다. 이곳은 해발 3.000m가 넘는 곳으로 기온도 싸늘하고 오슬오슬 한기가 도는데 짙은 운무(雲霧)에 둘러싸여 온통 축축한 느낌이다. 금정 뒤쪽 낭떠러지의 철책을 따라 내려가다 보니 언덕 가득 오색의 타르초(Tharchog)가 휘날린다. 이 타르초는 티베트 불교(라마교)의 풍습인데 조금 묘한 느낌으로, 정통 인도불교와 티베트 불교가 공존하는 느낌이다. 머무르는 내내 구름이 스쳐지나가 매우 신비로웠다.
<6> 어메이샨(峨眉山) 4대 경관
사방십면보현보살상/ 화장사(華藏寺)와 금정
이 어메이샨(峨眉山)의 4대 경관(景觀)으로 일출(日出), 불광(佛光), 운해(雲海), 승등(勝登)을 꼽는다. 산 모양도 글자 그대로 언뜻 아가씨의 ‘눈썹을 닮은 봉우리(아미/峨眉)’을 닮았다는 느낌이다.
일출(日出)은 글자 그대로 정상에서 보는 일출, 불광(佛光)은 오후 2시~4시 경 정상에서 생기는 무지개의 일종인데 부처님의 후광(佛光)과 비슷, 운해(雲海)는 정상부근은 항상 구름과 안개로 뒤섞여 구름의 바다를 이루고, 승등(勝登)은 밤이면 인(燐)이 든 광석이 많아 도깨비불처럼 사방에서 반짝이는 현상이라고 한다.
불교에서 보현(普賢)보살은 문수(文殊)보살과 함께 석가여래(釋迦如來) 부처님을 좌우에서 보좌하는 협시보살(脇侍菩薩)인데 보현(普賢)보살은 특히 중생의 생명을 길게 하는 연명보살(延命菩薩)로 추앙받으며 흔히 흰 코끼리를 타고 합장하는 형상으로 표현된다고 한다.
이 아미산에는 26개의 불교 사찰이 있고 또 많은 도교(道敎)사원도 있어 불교와 도교의 성지로 꼽힌다고 하며 유네스코에서 이 아미산 전체를 세계문화유산(世界文化遺産)으로 지정했다.
금정(金頂) 건물 금정 현판(다른 쪽 처마 밑 - 순금 48kg)
아미산 정상, 사면십방 보현보살좌상, 금정 등 관광을 마치고 내려오는데 많은 불자들이 삼보 일 배(三步一拜)를 올리며 가파른 비탈길과 계단을 오른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절대 순종과 간절한 염원의 표현인 삼보 일 배(三步一拜)는 티베트불교의 오체투지(五體投地)와 같은 의미이겠다. 세계의 종교지도자 중 가장 존경받는 이가 티베트불교(라마교)의 수장(首長)인 달라이라마라고 한다. 타 종교에 비하여 가장 세속에 물들지 않은, 신에 대한 절대 순종 때문일 것이다. 이런 성지를 방문 할 때마다 몽매하고 유한한 인간의 미천한 삶을 묵상(黙想)하게 된다.
내려올 때 케이블카 사용료 55원(9천 9백 원)을 아낄 겸 걸어 내려왔는데 길이 가파르고 시간도 많이 걸렸지만 중간에 음료수와 간식도 사먹으며 즐겁게 내려왔다.
식당가에서 황소개구리 요리, 잉어찜, 골뱅이 튀김을 시켰는데 맛이 신기하고도 우리 입맛에 맞는다. 살아있는.... 황소개구리(엄청 크다), 꿩, 토끼, 자라, 잉어, 메기, 붕어..... 를 손가락으로 짚으면 저울에 달아 요리해 준다. 관광지인 탓인가 제법 비싼 편이다. 빠이주(白酒) 한 잔에.... 사실 내게는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ㅎㅎ
황소개구리는 그냥 가격만 물어 보려는데 무게를 달려고 저울에 올려놓으니 자꾸 기어 나오는 통에 식당 주인 여편네가 뒷다리를 잡고 땅바닥에 사정없이 내팽개쳐서 기절을 시키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먹을 수밖에 없었다. 산 밑 마을에는 공연극장, 온천 리조트 시설, 공원 등도 있어서 잘 정돈된 느낌이었다.
<7> 삼국지의 얼이 깃든 무후사(武候祠)
무후사 입구 / 입구의 현판(武侯祠)
쓰촨성(四川省) 청두(成都)는 춘추전국시대 유비가 세운 촉한(蜀漢)의 수도로 삼국지의 무대였으며 익주(益州)라 불렸던 곳이다. 청두(成都)에 있는 무후사(武候祠)는 유비의 군사(軍師)이며 대 전략가였던 제갈량(諸葛亮)의 혼백을 모시는 사당(祠堂)으로 세웠다. 그러나 도원결의(桃園結義)로 초야(草野)에서 일어나 천신만고 촉한제국(蜀漢帝國)의 기틀을 세우고 제위(帝位)에 오른 유비(劉備)를 비롯하여, 관우(關羽), 장비(張飛) 등 촉한의 모든 장군과 제후들을 함께 모시고 있기도 하다.
무후사(武候祠)라는 이름은 제갈량의 시호(諡號)인 충무후(忠武候)에서 비롯되는데 경내에는 유비(劉備/漢昭烈皇帝)의 시신(屍身)을 모셔와 안치한 혜릉(惠陵)도 있다. 경내에는 유비, 관우, 장비가 피로써 형제결연을 맺은 도원결의(桃園結義) 장소도 꾸며 놓았는데 복숭아꽃이 한창으로, 유비의 고향인 허베이(河北)성 탁현(涿縣) 누상촌(樓桑村)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우리 세 사람은 이 도원(桃園)에서 옛 삼국지 주인공들을 흉내 내어 손을 모아잡고 우정이 변치 않기를 도원결의(?) 흉내를 냈더니 중국인들이 웃는다.
도원 / 유비(劉備) 석상(石像) / 도원결의(桃園結義)
삼국지에 보면 조조(曹操)가 한 왕조의 헌제(獻帝)를 폐하고 스스로 위(魏)나라의 황제를 칭하자 제갈량의 권유로 유비도 촉한(蜀漢)의 황제로 즉위하지만 유비가 한(漢) 왕실의 정통성을 이은 후손이므로 황제로 존칭하지 않고 선주(先主)로 불렀다.
유비는 자(字)가 현덕(玄德), 사후 시호(諡號)가 소열제(昭烈帝)이며, 아들 유선(劉禪)이 제위(帝位)를 이어받아 후주(後主)라 불렀는데 후주 유선(劉禪)은 군사(軍師) 제갈량(諸葛亮)이 죽자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즉위 40년 만에 조조에게 나라를 바친다.
제갈공명(諸葛亮)을 모신 사당 유비, 관우, 장비를 모신 삼의묘(三義廟)
삼국지(三國志)를 읽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만큼 파란만장한 사건들과 수많은 영웅들의 충의(忠義), 술수(術數), 모략(謀略), 신출귀몰한 전략과 영웅담, 그리고 전편을 통하여 흐르는 심금을 울리는 인간미 등이 우리를 매료시킨다.
그러나 이 불세출 영웅들의 허무한 죽음과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세운 제국이 2대(二代)를 채우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 것이 것에 대한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던 기억이 새롭다.
유비(劉備/漢昭烈皇帝)의 묘 혜릉(惠陵) / 잡목만 무성한 혜릉(惠陵)
유비는 한 날 한 시에 죽기로 도원에서 결의한 두 아우(關羽/張飛)들이 먼저 죽자 제갈량의 만류에도 무릅쓰고 전쟁을 강행하다 쓰촨성 양쯔강안(揚子江岸) 펑제현(奉節縣)의 백제성(白帝城/永安)에서 제갈량에게 아들(劉禪/後主)을 부탁하며 63세로 숨을 거둔다.
무후사 한 쪽 제법 큼직하게 세워진 유비의 무덤 ‘한소열황제지릉(漢昭烈皇帝之陵/惠陵)’은 무성한 잡목들만 멋대로 자라고 있어 인생의 무상함을 말하고 있다.
제갈량(諸葛亮)의 자(字)는 공명(孔明), 별호는 와룡(臥龍) 혹은 복룡(伏龍)이라고 하는데 삼국지(三國志)에서는 귀신도 부리고 천지조화(天地造化)도 마음대로 바꾸며 앞일을 예측하는 등 신(神)의 경지를 넘나드는 뛰어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일찌기 수경(水鏡)선생 사마휘(司馬徽)는 유비에게 복룡(伏龍/제갈량)과 봉추(鳳雛/방통) 두 사람 중 한 사람만 얻으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했는데 유비는 두 사람 모두 얻어 대업을 이루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방통(龐統)은 제갈량(諸葛亮) 보다는 기량이 조금 부족했던 듯싶다.
천하 명문장 제갈량의 전출사표(前出師表)
천하 명문장으로 꼽히는 제갈량의 출사표(出師表)는 선주(유비/劉備)가 죽은 후 후주(유선/劉禪)에게 올린 북벌(北伐)의 당위성을 호소하는 글로 첫 번째 출정 때 올린 전출사표(前出師表)와 두 번째 출정 때 올린 후출사표(後出師表)의 두 가지가 있다. 전출사표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충신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고 하는 명문장(名文章)이다. 제갈량은 위(魏)나라 조조(曹操)와 8년 간, 5차에 걸친 전쟁을 치르는데 마지막 전투인 오장원(五丈原) 전투 중 진중(陣中)에서 눈을 감으니 향년(享年) 54세였다고 한다.
제갈량 사당의 현판에는 ‘이름이 온 세상에 드리우다.’는 의미의 명수우주(名垂宇宙) 가, 사당 안의 유비(劉備) 소상(塑像) 위에는 ‘신과 성인의 경지에 이르다.’ 라는 의미로 ‘신성동진(神聖同臻)’ 이라 현판이 붙어 있다. 이곳의 입장료가 50위안인데 우리는 세 사람 모두 60세 이상이라 무료입장이다.
<8> 도교(道敎)의 성지(聖地) 칭양궁(靑羊宮)
도교사당 칭양궁(靑羊宮) 사당 내부
청두(成都) 시내의 칭양궁(靑羊宮)은 노자(老子)를 기리는 도교 사당으로 당대(唐代)인 AD666년에 창건되었고 훼손이 심한 것을 청나라 때 다시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도교(道教)는 원래 고대 중국에서 발생한 종교로 신선사상(神仙思想)을 근본으로 하여 음양(陰陽), 오행(五行), 복서(卜筮), 무축(巫祝), 도참(圖讖/참위<讖緯>) 등을 더하고, 거기에 노자(老子)의 도가(道家) 철학과 불교의 영향을 받아 성립되었다고 한다.
벽면마다 들어찬 각종 신선과 도사들의 조상(彫像)들
도교는 도(道)의 세 가지 모습인 옥청(玉清/元始天尊:玉皇上帝), 상청(上清/靈寶天尊:太上道君), 태청(太清/道德天尊:太上老君)의 삼청(三清)을 최고신으로 하는 다신교이며 경전(經典)은 도장(道藏)이다. 도교의 신자는 우화등선(羽化登仙/날개가 나와 하늘을 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무리라는 뜻에서 우류(羽流)라 했다.
넓고 웅장한 건물들이 들어 찬 경내에는 모시는 신들이 하나같이 신선이랄까, 도사(道士)라고 할까 기묘한 모습들이 많고 벽화에는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그림이 많아 신비롭다.
어디를 가나 같은 모습이지만 이곳에도 홍두깨만한 향을 두 손에 모아들고 수없이 흔들어 대며 기도를 하는 중국인 무리들이 많아 경내는 향의 연기로 자욱하다. 상투를 올리고 도사의 복장을 한 무리가 소리 없이 발걸음을 옮기며 순시한다.
칭양궁의 심벌 푸른 양(靑羊) / 도교사원의 외부 모습
청양궁의 심벌인 ‘푸른 양(靑羊)’은 청대(淸代)에 만들어진 동양(銅羊)이라는데 12가지의 띠를 나타내는 동물들이 하나의 몸에 조형되어 있는 기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전하는 이야기로 태상노군(太上老君:노자<老子>)를 신격화하여 붙인 이름)이 타던 것으로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병에 걸린 사람이 이 청양(靑羊)을 한 번 만지면 그 병이 곧 치료된다고 한다. 나는 푸른 양(靑羊)의 눈을 만졌으니 죽을 때까지 눈병 걱정은 없겠다. ㅎ 입장료는 20위안인데 경로우대로 무료입장 했었던 같다. 이곳에서 무후사(武侯祠)까지는 멀지 않다.
<9> 대 시인의 발자취 두보초당(杜甫草堂)
청두(成都) 시내에 있는 대 시인 두보의 초당(草堂)은 무후사(武侯祠)와 칭양궁(靑羊宮)에서 멀지 않아 하루에 모두 둘러볼 수 있다.
무후사 입장권을 구입한 사람은 무후사에서 두보초당까지 무료 셔틀버스를 탈 수 있다는데 우리는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 걸어갔는데 꽤 먼 거리로 제법 시간이 걸린다.
두보초당의 사립문 / 두보(杜甫) 초당(草堂) 일각
이곳은 당(唐)나라의 시성(詩聖)으로 추앙받는 두보(杜甫)가 AD 759년,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피해 잠시 성도에 있을 때 기거하던 곳으로 4년 여 머무르는 동안 주옥같은 240여 편의 시를 쏟아냈다.
공원으로 잘 가꾸어져 있는 두보초당은 너무 넓어 길을 찾기도 힘들 정도며, 두보가 시를 짓고 읊은 작은 초가집(草堂)이며, 거대한 정자각 등 큰 건물도 꽤 있고 두보 조각상(彫刻像) 및 시(詩)가 새겨진 비석도 많이 세워져 있다. 이백(李白)과 더불어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 꼽히는 두보는 자(字)가 자미(自美)이며, 스스로 ‘두릉(杜陵)의 포의(布衣)’ 또는 ‘소릉(少陵)의 야로(野老)’라 자칭했다고 한다.
돌에 새겨진 두보의 시 / 두보 동상(銅像) / 초당공원 일각
초당 옆 공원의 조조 삼부자상(三曹) / 공원에서 태극권 수련하는 중국인들
이 때 씌어 진 두보의 향기로운 시 한 편을 감상하자.
춘야희우(春夜喜雨/어느 봄 밤, 반가운 비)-두보(杜甫)
好雨知時節(호우지시절) :좋은 비는 시절을 알고 내리나니
當春乃發生(당춘내발생) :봄이면 초목이 싹트고 자라네.
隨風潛入夜(수풍잠입야) :봄비는 바람 따라 몰래 밤에 들어
潤物細無聲(윤물세무성) :가늘게 소리도 없이 만물을 적시네.
野徑雲俱黑(야경운구흑) :들길과 하늘의 구름 모두 어두운데
江船火獨明(강선화독명) :강가의 배에서는 불빛 홀로 반짝이네.
曉看紅濕處(효간홍습처) :이른 아침 붉게 젖은 땅을 보니
花重錦官城(화중금관성) :금관성에는 꽃이 활짝 피었으리.
☆ 금관성(錦官城) - 청두(成都)의 옛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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