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元珍 墓誌銘}
이碑는 北魏延昌 三年(북위연창 삼년 514년)에 묻힌 元珍의 功德(공덕)을 기린 비인데 洛陽(낙양)에서 출토되어 처음에는 무진의 董氏(동씨)소유였으나 지금은 소재가 不分明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돌의 크기는 가로 66.6㎝, 세로 71.4㎝이며 25행을 썼는데 각 행마다. 27자씩 썼다.
이 碑는 元珍이 平文皇帝(평문황제)의 六世孫이며, 무장으로서 많은 전공을 세웠고 조정의 여러 중책을 맡았으며, 임금을 보필하는데 많은 모범을 보였음을 기록 하였다.
公은 孝文帝 太和(효문제 태화 477~499년)부터 宣武帝(선무제)의 말기인 延昌三年(514년)까지 관직에서 활약한 인물로서 국가의 위엄을 빛내고 문무를 겸한 공의 업적을 칭송 하였는데 그가 47세의 젊은 나이로 죽은 것을 황제도 애통해 하였다고 기록했다.
*.<元珍 墓誌銘>全文
魏故尙書左僕射. 驃騎大將軍. 冀州刺史, 元公墓誌銘. 公諱珍 字金雀 河南洛陽人也 平文皇帝六世孫 高涼王之玄孫 征南將軍·肆州刺史·襄陽公之孫
輔國將軍·幽州刺史·松玆公之子也 並虯申豹變 烈氣陵宵 世号猛將之門 公誕光先桀 擢德超倫 少以忠偔僞稱 長以風雅著仁 六藝備脩 尤良射御 身長九足三寸 容止充德
質不妄譽 太和中選人武騎侍郞 轉直閤將軍 高祖南巡 未屆衡嶺 密爾南陽 不恭其職
公單馬肆焉 戎城雷駭 除冠軍將軍 景明元年 今上卽位 轉武衛將軍 時楊土中動
許叛僞齊 公屯兵淮浦 與東伯支相拒 伯支敗績 壽春獲存 公有力焉
胙土晉陽男 遷平東將軍 正始中 轉衛尉卿·領左衛將軍 禁閱雲儀 嚴震左右
維城之寄 寔顯文武 仍加散騎常侍·光祿勳 明璫曜鬢 九棘臨顔 標德之華
京師以爲美言 俄遷侍中 綺綜王言 經綸袞闕 出則倍駕 入參侍席 聲盖一時
道彰遠邇 永平中 除車騎將軍·領軍將軍 始荷腹心之任 受六師之重
掩虎旅於神扉 啓禦侮而肅警 是以四襟解紐 時用安枕 延昌二年 遷尙書左僕射
維轄萬邦 亮采百揆 照德塞違 正色無避 利涉著於道初 庶績光於所起
宜奉九錫於太階 諧百味於滋鼎 永齡不遂 春秋卌七
以延昌三年歲次甲午五月戊申朔卄二日己巳 寢疾不豫 薨于篤恭里第
上屢遣問疾 聞公旣終 動衷移日 朝省悲惋 行人痛泣
追贈侍中使持絶․驃騎大將軍․冀州刺史 諡曰□公.以其年十一月丙午朔四日己酉
窆于河南東垣之長陵 刊玆泉石 式照德音 其辭曰 苕苕聖冑 綿綿不已 乃王乃侯
世載其美 爰顯及公 奇峯特起 瑱柯重煥 鴻基再正 湛彼天工 唯良是與
猗矣哲人 秉文經武 繾綣帝謨 椆樛國旅 曰腹心 唯予與汝 威旌漢洱
效彰荊楚 周有良翰 方叔山甫 桓桓武公 亦紹厥緖 如何不淑 早離伊阻
玉芷彫春 金桂朽夏 徙倚促日 徘徊永夜 崧嶺軒驥 沙庭頓駕 鏤石記形 無識神化.
<元珍墓誌銘>全文 解釋(해석)
魏故尙書左僕射. 驃騎大將軍. 冀州刺史, 元公墓誌銘.
(위고상서좌복사 표기대장군 기주자사 원공묘지명.)
魏故尙書左僕射. 驃騎大將軍. 冀州刺史, 元公墓誌銘.
(위고상서좌복사 표기대장군기주자사 원공묘지명이라.
公諱珍 字金雀 河南洛陽人也
(공휘진 자금작 하남락양인야)
공의 諱(휘)는 珍(진)이요, 字(자)는 金雀(금작)이고, 하남 낙양사람이다.
平文皇帝六世孫 高涼王之玄孫
(평문황제육세손 고량왕지현손)
평문황제의 육대손이고, 고량왕의 증손의아들이다.
征南將軍·肆州刺史·襄陽公之孫
(정남장군·사주자사·양양공지손)
征南將軍 肆州刺史
(정남장군 사주자사)
인 양양공의 손자이며,
輔國將軍·幽州刺史·松玆公之子也
(보국장군·유주자사·송자공지자야)
보국장군, 유주지사인 송자공의 아들이다.
並虯申豹變 烈氣陵宵 世号猛將之門
(병규신표변 렬기릉소 세호맹장지문)
용이 기지개 펴고 범이 변한 듯 한 지혜를 가지었고, 열기가 하늘을 넘어설 듯하여, 세상에는 용맹스런 장군의 가문이라 불렀다.
公誕光先桀 擢德超倫 少以忠偔僞稱
(공탄광선걸 탁덕초륜 소이충악위칭)
공이 탄생할 때는 머리에 뛰어나게 빛이 빛났다. 덕이 높고 사람의 도리를 잘 지켰다. 젊어서 충성스런 말을 많이 한다고 불려 졌고,
長以風雅著仁 六藝備脩 尤良射御
(장이풍아저인 육예비수 우량사어)
자라서는 풍아함으로써 仁(인)을 드러내었다. 육예(藝·樂·射·御·書·數)를 두루 갖추었고, 활쏘기와 말 타기가 더욱 뛰어 났다.
身長九足三寸 容止充德 質不妄譽
(신장구족삼촌 용지충덕 질불망예)
몸은 九足三寸(구척 삼촌)으로 자랐고, 용모는 덕으로 가득 찼으며, 자질은 명예를 망령되어 하지 않았다.
太和中選人武騎侍郞 轉直閤將軍
(태화중선인무기시랑 전직합장군)
태화년간(북위 효문제 477-499년)에 무기시랑으로 뽑히어갔다가 직합장군으로 옮겨갔다.
高祖南巡 未屆衡嶺 密爾南陽 不恭其職
(고조남순 미계형령 밀이남양 불공기직)
고조가 남으로 순행하자 형산에 이르지 못했는데, 남양에 비밀리 그 직을 공손히 받들지 않으니,
公單馬肆焉 戎城雷駭 除冠軍將軍
(공단마사언융성뢰해 제관군장군)
홀로 말하고 이르러니, 큰 성안이 모두 놀랐다. 冠軍將軍에 제수되었고,
景明元年 今上卽位 轉武衛將軍
(경명원년 금상즉위 전무위장군)
경명원년에 황제가 즉위하자, 武衛將軍(무위장군)으로 옮겨갔다.
時楊土中動 許叛僞齊 公屯兵淮浦
(시양토중동 허반위제 공둔병회포)
이때에 양광의 중사가 움직였고, 위제가 반란을 일으키는데, 공은 淮浦(회포)에서
與東伯支相拒 伯支敗績 壽春獲存
(여동백지상거 백지패적 수춘획존)
병사를 주둔시키고, 동백지와 더불어 서로 막다가, 백지가 싸움에 져서,
公有力焉 胙土晉陽男 遷平東將軍
(공유력언조토진양남천평동장군)
壽春(수춘)이 얻어지고 보존되었는데, 공의 힘이다.
晉(진) 양남(陽男)에 봉해져서 땅을 받았고, 평동장군으로 옮겨졌다.
正始中 轉衛尉卿·領左衛將軍
(정시중전위위경령좌위장군)
정시년간(북위 선무제의 통치기간 504-508년 시기)에 위위경 령우위장군으로 옮겼다.
禁閱雲儀 嚴震左右 維城之寄 寔顯文武
(금열운의 엄진좌우 유성지기 식현문무)
대궐에서 운의를 검열하였는데 좌우에서 위엄을 떨쳤다. 이에 성을 맡길 만 하였다. 실로 문무가 드높았다.
仍加散騎常侍·光祿勳 明璫曜鬢
(잉가산기상시·광록훈 명당요빈)
계속하여 산기상시 광록훈을 더하니, 밝은 구슬이 귓가에서 빛나고,
九棘臨顔 標德之華 京師以爲美言
(구극임안 표덕지화경 사이위미언)
구극(대궐안)에서 임금님의 용안을 뵈었다. 덕을 세운 영화로서 도읍에서 아름다운 일이라 얘기하였다.
俄遷侍中 綺綜王言 經綸袞闕 出則倍駕
(아천시중 기종왕언 경륜곤궐 출즉배가)
갑자기 시중으로 옮겼는데, 왕의 말을 아름답게 모으고, 임금님과 대궐을 잘 보필하고 경영하였다. 나갈 때는 곧 임금님의 수레를 모시고,
入參侍席 聲盖一時 道彰遠邇 永平中
(입참시석 성개일시 도창원이 영평중)
들어오면 시중의 자리에 참석 하였다. 명성이 한 때를 덮었으며 도의가 멀리 가까이에 펼쳐졌다. 영평년간(북위 선무제 508-512년)에
除車騎將軍·領軍將軍 始荷腹心之任
(제거기장군령군장군시하복심지임)
차기장군 령군장군을 제수 받았는데 비로소 복심(깊은 마음으로)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受六師之重 掩虎旅於神扉 啓禦侮而肅警
(수육사지중 엄호려어신비 계어모이숙경)
육사(군의 전체 기강)의 중책을 받아서 드나드는 이들을 엄밀히 막고 수문을 지키어 문을 열고 막는 것을 엄숙히 경계하였다.
是以四襟解紐 時用安枕
(시이사금해뉴 시용안침)
이로써, 사방을 막으니 허리띠를 풀었고, 때에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延昌二年 遷尙書左僕射
(연창이년 천상서좌복사)
연창이년(513년)에 상서좌복야로 옮기었는데,
維轄萬邦 亮采百揆 照德塞違
(유할만방 량채백규 조덕색위)
온 나라를 관할하였는데, 백규를 밝게 하여 막히고 어긋난 것에 덕을 밝게 비치어,
正色無避 利涉著於道初 庶績光於所起
(정색무피 리섭저어도초 서적광어소기)
밝은 빛은 피하지 않았고, 이익의 섭취는 도의 근본에서 나타내었고, 여러 업적들은 일으키는 바에서 빛이 났다.
宜奉九錫於太階 諧百味於滋鼎
(의봉구석어태계 해백미어자정)
대궐의 계단에서 구석을 받음이 마땅하고, 자양의 솥에서 백미를 맛봄이 맞다고 하는데,
永齡不遂 春秋卌七
(영령불수 춘추십칠)
오랜세월이 따르지 못하니 나이 사십 칠세인
以延昌三年歲次甲午五月戊申朔卄二日己巳
(이연창삼년세차갑오오월무신삭입이일기사)
연창삼년 갑오 오월 이십이일 기사시에
寢疾不豫. 薨于篤恭里第
(침질불예 흥우독공리제)
병들어 편안하지 못했다. 독공리의 자택에서 돌아가시었다.
上屢遣問疾 聞公旣終 動衷移日
(상루견문질 문공기종 동충이일)
상제(上帝)는 여러 번 사람을 보내서 문병을 했다. 공께서 이미 세상을 떠나셨다는 말을 듣고 충정(衷情)을 움직이니 햇볕도 움직였으며,
朝省悲惋 行人痛泣
(조성비완 행인통읍)
조정이 모두 비통(悲痛)해 하고 행인들도 애통하여 눈물을 흘렸다.
追贈侍中使持絶․驃騎大將軍․冀州刺史
(추증시중시지절․표기대장군․기주자사)
이에 시중사지절 ․ 표기대장군 ․ 기주자사(侍中使持絶 ․ 驃騎大將軍 ․ 冀州刺史)를 추증(追贈)하고
諡曰公□以其年十一月丙午朔四日己酉
(시왈□공 이기년십일월병오삭사일기유)
시호(諡號)를 □공(□公)이라 했다. 그해 11월 병오삭(丙午朔) 4일 기유(己酉)에
窆于河南東垣之長陵 刊玆泉石 式照德音
(폄우하남동원지장릉간 자천석 식조덕음)
하남동원(河南東垣)의 장릉(長陵)에 장사 지내고 이 천석(泉石)에 새겨서 덕음(德音)을 본받아 비치노라.
其辭曰 苕苕聖冑 綿綿不已 乃王乃侯
(기사왈 초초성주 면면불이 내왕내후)
그 명(銘)에 말하기를, 높은 성왕(聖王)의 장손으로 면면히 끊이지 않았네. 왕과 제후로
世載其美 爰顯及公 奇峯特起 瑱柯重煥,
(세재기미 원현급공 기봉특기 전가중환)
대대로 그 아름다운 일을 실어서 이에 공(公)에 이르러서 기이한 봉우리가와 뛰어남이 우뚝 들어 났네. 옥가지 가지가 무겁게 빛나고 거듭 빛나니,
鴻基再正 湛彼天工 唯良是與
(홍기재정 담피천공 유량시여)
큰 터전이 다시 바로 잡혔네. 맑은 저 하늘에 조화의 공(工)이 오직 이 양재(良才)를 주었네. 아름답도다.
猗矣哲人 秉文經武 繾綣帝謨
(의의철인 병문경무 견권제모)
철인(哲人)이여. 문(文)도 잡고 무(武)도 겪었네. 제왕(帝王)의 경륜(經綸)을 곡진히 생각했으며
椆樛國旅 曰腹心 唯予與汝 威旌漢洱
(주규국려 상왈복심 유여여여 위정한이)
나라의 군사(軍事)에도 빈틈이 없었네. 제(帝)는 말하기를 심복이니 오직 나와 너뿐이라고 했네. 한이(漢洱)에서 위풍의 깃발을 날리고
效彰荊楚 周有良翰 方叔山甫 桓桓武公
(효창형초주유량한 방숙산보 환환무공)
형초(荊楚)에서 공적(功績)이 들어났네. 주(周)나라에 어진 한림(翰林: 官職名)이 있었으니 방숙소백(方叔召伯)과 중산보(仲山甫) 였고 빛나는 무공(武功)도 또한 끝을 이었다.
亦紹厥緖 如何不淑 早離伊阻
(역소궐서 여하불숙 조리이조)
어찌하여 불행히도 일직 이 세상을 떠났는가?
玉芷彫春 金桂朽夏 徙倚促日 徘徊永夜
(옥지조춘 금계후하 사의촉일배회영야)
옥지(玉芷: 神靈한 芝草)가 봄에 마르고 금계(金桂)가 여름에 썩었도다. 서성거리면서 날을 보내고 긴 밤을 배회(徘徊)하네.
崧嶺軒驥 沙庭頓駕 鏤石記形 無識神化
(숭령현기 사정돈가 루석기형 무식신화.)
송산(崧山)의 훤칠한 준마가 모래 땅에 수레를 버렸네. 돌에 새겨 사실을 기록하나 그 신화(神化)함을 알 수는 없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