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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蘭과 日本의 對 인도네시아
植民統治期間 中 公用語政策에 관한 硏究
金榮秀
(한국외국어대학교)
目次 I. 序言 II. 對 인도네시아 植民統治 期間에 和蘭의 公用語政策 III. 日本에 의한 인도네시아 植民地化 過程 IV. 日本의 對 인도네시아 公用語政策 V. 和蘭 및 日本 植民統治가 인도네시아어에 미친 影響 VI. 結語 <참고문헌> |
I. 序言
1. 硏究의 目的
본 論文에서는 和蘭과 일본의 對 인도네시아 식민통치시기에 있어 식민지화 과정과 公用語政策에 대하여 考察하고자 한다.
2. 硏究의 方法
16세기 말엽부터 1942년 3월 日本에게 식민통치 權限을 넘겨준 和蘭 식민정부가 인도네시아에서 實施한 公用語, 敎育政策 및 인도네시아 植民地化 과정 중에 나타난 言語를 中心으로 한 日本의 宣撫宣傳 政策, 公用語政策 고찰을 통하여 화란어 및 일본어가 인도네시아語에 미친 影響을 살펴보기로 한다.
II. 對 인도네시아 植民統治 期間에 和蘭의 公用語政策
1. 화란의 식민통치
大陸의 이슬람 文化圈 국가와는 사뭇 다르게 群島國家의 취약성으로 인해 전 군도에 걸쳐서 中央集權化된 막강한 統治力을 행사했던 古代王國을 가져 보지 못한 채 인도네시아는 西歐 列强의 식민통치 시대를 맞게 된다.
15세기 초엽부터 서구 열강들은 앞을 다투어 經濟 수탈과 宗敎 전파의 美名下에 그들의 해외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고, 정향, 후추 등 각종의 값진 香料와 커피, 차, 담배, 사탕수수 등 양질의 열대작물 寶庫인 인도네시아는 당연하게 그들의 主된 정복 대상이 되었다.
“마레 리베룸(Mare Liberum" 즉, ”바다는 어느 누구든지 航海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곳이다“라는 신념으로 화란의 코르넬리스 더 하우트만(Cornelis de Hutman)이 이끄는 249명의 探險隊가 승선한 4척의 선단이 인도네시아를 향하여 출항한 것은 1595년 4월의 일이었다. 일 년여의 항해 후, 1596년 6월 인도네시아 西部 자와(Jawa)의 후추 주요 수출항인 반텐(Banten)항에 위 화란 탐험대는 도착하게 되며, 이는 對 인도네시아 화란 식민통치 시대 開幕을 예고하게 된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이미 향료 採取 및 그 商權을 놓고 포르투갈과 스페인 간의 角逐場이 되고 있었다. 그들은 種族 中心으로 亂立되어 있는 인도네시아의 이슬람 信奉의 小王國을 懷柔하면서 혹은 强壓的인 방법을 동원하여 당시 西歐 市場에서 그 重量이 같은 무게의 金과 교환될 수 있는 각종의 향료를 수탈하고 있었다. 1494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토르데실라스(Tordesilas)市에서 경도 170度를 중심으로 하여 베르데(Verde) 곶을 기준, 인도네시아 서편은 스페인, 동편은 포르투갈이 관할, 장악하여 향료문제에 관한한 양측의 物理的 衝突을 피할 수 있는 制度的 장치인 雙務協定을 체결하였다.
이에 대항하는 인도네시아 소왕국들의 抵抗 중 特記할 만한 것은 1575년 터르나테(Ternate) 왕국의 저항, 1533년 드막(Demak) 왕국의 항쟁, 그리고 1529년부터 1675년에 걸쳐 일어난 아체(Aceh)인들의 대항을 들 수 있으나 우월한 무기 체계를 갖춘 스페인, 포르투갈인들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화란은 1605년 향료의 보고인 인도네시아 말루쿠(Maluku) 섬의 암본(Ambon) 지역을 포르투갈로부터 획득한 후 막강한 海軍力을 바탕으로 향료 무역의 기득권을 갖고 있는 포르투갈, 스페인 등을 인도네시아 영외로 서서히 축출하기 시작한다. 화란은 인도네시아에 있는 自國의 4개 향료 무역회사의 과당 경쟁과 서구 지역으로 향료의 과잉 공급을 억제하기 위하여 1602년 3월 이들 4개의 무역회사를 合倂하여 東印度會社를 設立하게 된다.
화란 議會는 동인도회사에 통치권에 準하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하게 된다. 그 권한 중에는 현지에서 兵力을 뽑아 화란에 대한 ‘충성의 맹세’를 행하고 전쟁을 수행하며 要塞를 건설하고 아시아 전역에서 국가 간의 조약을 화란정부를 대신해서 체결할 수 있는 것 등이 있었다. 또한 동인도회사가 효율적인 업무를 수행하고 그들의 지위를 확고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화란정부는 1610년 인도네시아에 總督職을 두게 된다.
인도네시아 향료 채취, 무역권 쟁취를 위한 서구 열강들의 각축에서 화란의 승리는 동인도회사 설립을 통한 화란 國內의 결속과 강력한 총독 제도를 바탕으로 한 인도네시아 현지에서의 일사 분란한 强權統治의 결과였다.
결국 1596년 6월 코르넬리스 더 하우트만 탐험대가 인도네시아에 도착한 이래 1942년 3월 8일 인도네시아 주둔 화란군 사령관 터르 포르텐(Ter-Poorten)이 일본군 이마무라(今村)에게 무조건 항복 후 본국으로 철수할 때까지 화란의 인도네시아 식민통치가 계속 되었으며 인도네시아인들은 피식민지의 足鎖를 차고 强制栽培制度 등 가혹한 壓政에 시달리게 된다.
2. 화란 식민통치 정부의 공용어 정책
식민지에서는 自國의 언어와 문화로부터 차단된 새 宗主國의 언어와 문화를 강제로 배우며 노예의식을 주입 당한다. 또한 植民地 大衆의 자녀들은 교육 받을 기회로부터 제외된다. 학교는 소수 특권층의 專有物이 된다. 식민지의 정치, 경제가 지배 민족의 언어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지배 민족의 언어를 習得하는 것은 立身出世를 위해 필수적인 것이었다. 즉 종주국의 언어를 사용하는 특권적 知識層은 민족에 대해 異邦人이 되었으며 이러한 언어정책을 통해 피지배 민족을 분열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이는 單一民族이란 언어의 單一性을 前提로 할 때 피 식민지인들의 單一言語 사용 여부가 민족의식 통일화 및 합일화에 관건적 요인이 된다는 視點에서 이해될 수가 있다. 따라서 서구 열강들은 그들의 피 식민지인들의 민족의식, 국민의식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하여 종주국의 국어를 강제 주입, 전파시켜 피식민지 언어 말살을 통한 언어의 정복과 지배를 우선적으로 고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서구 열강과는 다르게 경제적인 문제에 최우선의 관심을 둔 화란 식민통치정부는 인도네시아인들에게 교육을 통한 公用語(和蘭語) 보급에 대해서는 放任的, 不干涉政策를 堅持했으며 심지어는 愚民政策과 間接統治를 실시하여 극도로 公用語로서의 和蘭語 擴散을 제한하였다.
동인도회사가 설립된 후 그 세력이 인도네시아 전역으로 파급되는 시기에 화란인들은 그들의 목적은 交易이지 支配가 아닌 까닭에 인도네시아인들과의 직접적인 接觸은 되도록 피하였다. 인도네시아에 있는 화란회사 고용원의 대부분이 본국인이었으며 이들 대부분이 화란에 근거를 두고 있어 인도네시아에서는 경제적 문제에만 관심을 가졌었기 때문에 인도네시아인들에게 교육을 통한 화란어 보급에는 放任的, 不干涉 정책을 堅持했다. 영국은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現地 要員을 확보하기 위하여 교육기관 설립을 통한 영어 보급에 힘쓴 반면 화란은 식민지 통치에 필요한 要員 양성을 위하여 인도네시아인들을 교육시킨 것이 아니고 이미 인도네시아에 파견된 서구인들의 자녀 교육에 관심을 두었을 뿐이다.
인도네시아에 대한 화란의 식민통치 방법은 間接統治라는 특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간접통치는 화란 식민통치 정부의 官吏가 직접 행정 一線에 나선 것이 아니고 인도네시아인인 初級官吏 또는 각 촌장들로 하여금 화란의 對民政策을 직접 傳達, 施行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통치방식은 外見上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된 인도네시아에 있어서 언어, 生活方式, 관습을 같이하는 原住民들인 초급관리, 촌장들에 의해 실행됐기 때문에 대다수 인도네시아인들은 별 저항 없이 화란의 통치 방식에 익숙해져 갔다. 이러한 통치방법으로 화란인들은 인도네시아인들과 직접 마찰 없이 그들의 경제적 이익을 인도네네시아로부터 획득할 수가 있었다.
간접통치 과정에 있어서 공용어 문제는 飜譯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정책을 위한 公的인 文書는 화란어로 작성되었으나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직접 전달되지는 않았다. 인도네시아인 초급관리나 촌장들에게 그들이 구사할 수 있는 인도네시아의 種族語로 관련 화란어 문서는 번역되어 전달, 지시되었다. 따라서 화란어의 보급은 인도네시아인 각 계층에 확산되지 못하였고 다만 소수의 인도네시아 특권층 또는 정치, 경제적으로 필요를 느끼는 制限된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뿐이다. 이러한 간접통치 정책은 화란 식민통치정부로 하여금 화란어를 인도네시아인들에게 보급 시킬 當爲를 느끼게 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화란 관리들이 인도네시아의 관련 종족어를 습득하는 것이 經費와 時間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반면에 식민통치 정부에 고용된 화란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도네시아 초급관리들도 그들의 宗主國語인 화란어를 활용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 하나의 특권 意識을 갖게 된다. 그들은 화란어가 公用語로 一般化될 때에는 상대적으로 그 특권의식 및 기득권이 弱化될 것이라는 우려 속에 이들 역시 自國民인 인도네시아인들에게 화란어 보급을 원치 않게 된다.
19세기로 접어들면서 서구 사회는 自由主義가 대두되기 시작하였고 인도네시아로 그 영향이 파급되기 시작하였다. 그 영향에 따라 간접통치 방식 즉 화란 관리가 필요한 인도네시아 종족어를 익혀 행정 하던 것을 극히 일부 親 화란 인도네시아 원주민에게 화란어를 습득할 수 있도록 화란어 폐쇄정책에서 소극적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한다. 1864년부터는 화란인 학교의 定員이 未達될 경우 인도네시아인들의 자녀들의 입학을 허용한다는 결정이 나오게 된다. 그리고 1901년 화란의 빌헬미나(Wilhelmina) 女王은 인도네시아이들의 복지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윤리정책(Politik Etika)을 발표하게 된다.
화란의 윤리정책이 발표되던 1901년, 인도네시아에 설립되어 있던 학교는 제1급 학교 54個校와 제 2급 학교가 약 400個校가 전부였다. 그나마 대부분이 자와(Jawa)에 집중적으로 위치하였으며 그 이외의 지역에는 公敎育 施設은 거의 존재하지 않은 상태였다. 공용어인 화란어는 인도네시아인인 자녀를 위한 학교에서는 敎科科目으로 채택되지 않은 반면 인도네시아 토착 地方語의 읽기, 쓰기 또는 간단한 算數 정도를 가르치는데 지나지 않아 中途 퇴학자가 증가하게 되었으며 학교의 발전 과정도 부진하였다. 1907년이 되어서야 제 1급 학교에 화란어가 正式 교과과목으로 채택 되었다. 그러나 교육 용어는 화란어로 변경되었으나 학생들 家庭에서는 관련 종족어가 사용되었기 때문에 效果的인 화란어 학습에는 많은 어려움이 뒤 따랐다.
이러한 화란 식민통치정부의 교육(공용어 보급 포함)에 있어서도, 불간섭정책은 인도네시아를 文盲化 상태로 몰아넣고 말았으며 인도네시아인들을 변화되는 당시의 세계정세 흐름 밖의 死角地帶에 위치하게 했다. 1930년대의 화란 식민통치정부의 공식 統計에 의하면 인도네시아 총 인구 6천 35만 여명 가운데 7% 정도만이 文字 解讀者였으며 그나마 여자들은 그 중 1/6에 지나지 않는 사실이 발견되고 있다. 한편 화란어를 읽고, 쓸 줄 아는 인구는 中國人을 포함하여 총 인구의 0.04%이며 그 중 여자는 1/4를 넘지 않는다고 했다. 이러한 통계는 당시 인도네시아인들의 교육 수준이 얼마나 낮았는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예이며 화란 식민통치정부의 언어, 교육에 대한 정책의 폐쇄적이고 방임적인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교육과 공용어의 폐쇄와 억제를 통한 愚民化 정책으로 경제적, 정치적인 實益을 인도네시아로부터 極大化 하려는 화란 식민통치자들의 高度의 行政術의 결과이며, 인도네시아인들과 西歐文化, 文明 사이에 文盲이라는 장벽을 쌓아 놓음으로서 그들의 對 인도네시아 식민통치를 원활히, 효율적으로 하려는 意圖가 內在된 정책의 목적인 것이다.
III. 日本에 의한 인도네시아 植民地化 過程
1. 식민지화 이전의 선무선전 정책
약 350여 년간 화란이 對 인도네시아 식민 착취는 인도네시아인들의 물질적 생활을 극도로 피폐 시켰으며 대다수의 인도네시아인들은 세습되는 貧困의 악순환 속에서 20세기를 맞게 된다.
1869년 地中海와 印度洋을 잇는 수에즈(Suez) 運河 개통은 더 많은 서구인들이 인도네시아에 流入되는 결과를 가져 왔으며 그와 함께 당시 서구의 政治哲學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自由主義가 자연스럽게 인도네시아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903년에서 1904년에 걸쳐 일어난 露日戰爭에서 軍國日本의 勝利는 白人不敗의 고정 관념을 갖고 있던 당시 서구 열강의 피식민지하의 黃色 아시아 민족에게는 커다란 認識의 변화를 가져 온 하나의 契機가 되었다.
“黃色人들의 짧은 支配후 행복한 시대가 온다”라는 12세기 중엽 인도네시아 꺼디리(Kediri)王國의 조요보요(Joyoboyo) 豫定設을 心情的으로 신봉하고 있었던 인도네시아인들에게는 그 세력이 날로 확장하는 군국일본은 하나의 경이로운 對象이 되었다.
“大東亞 共營圈”을 내 세운 日本은 1941년 “太平洋戰爭” 開戰과 함께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侵攻을 시작한다. 日本은 인도네시아를 植民地化하기 이전인 1932년부터 인도네시아에 대한 言語를 중심으로 하는 선무선전 정책을 획책하고 있었다. 많은 密偵을 중국인으로 위장시켜 인도네시아 全域으로 밀파, 활동 시켰다. 그들은 약, 옷감 등을 팔면서 일본군이 곧 인도네시아에 進駐하게 됨을 流布시키면서 인도네시아에서 白人(和蘭人)을 몰아 내자는 말로 주민들을 현혹시켰다.
또한 日本은 멀라유(Melayu)語로 발간되는 신문을 인도네시아에 설립하여 그들의 宣傳廣告를 專擔하게 했으며 많은 인도네시아의 言論人, 學生 등 지식인층을 日本으로 留學시켜 그들에게 日本의 優越性과 “大東亞 共營圈”의 當爲性을 알리는데 주력하였다. 단파방송인 “라디오 동경”은 이미 인도네시아 國歌(Indonesia Raya)와 “大東亞 共營圈” 의 슬로건을 連日 對 인도네시아로 송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大東亞 共營圈”에 대한 선전은 인도네시아 민중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과 일본은 ‘아시아 새 질서’를 위하여 위대한 투쟁을 벌이는 동료라는 확신을 심어 주는데 先導的 역할을 하였다.
한편 인도네시아인들의 精神世界를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는 이슬람교를 회유, 이용하기 위하여 日本은 1935년 고베(神戶)에 또 1938년 도쿄(東京)에 回敎寺院(mesjid)을 짓는다. 이러한 日本의 이슬람에 대한 유화적인 태도는 일본군이 인도네시아에 進駐할 당시 많은 인도네시아인들이 저항 없이 오히려 환영을 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슬람교의 보호육성을 약속한 日本 선전의 힘도 그 일익을 담당했던 것이다.
한편 1940년대 이래로 日本은 값싼 工産品으로 中下層 庶民들의 購買力을 등에 업고 인도네시아 시장을 공략하기 시작한다. 당시 인도네시아 전역의 商權을 쥐고 있던 화교들과의 불가피한 충돌과 시장 獨占化에 따른 기존 상권의 破産이 뒤따랐으나 저렴한 가격에 비해 품질이 우수한 제품 판매를 통하여 日本의 優越性을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심는데 성공한다.
日本은 유화적인 선무 선전 정책을 통하여 인도네시아 이슬람세력과 지식층의 영향력을 巧妙히 그들의 세력권 안에 吸入하면서 경제적인 상품의 物量 攻勢로 일반 대중의 購買力을 통한 日本의 우월성을 심게 된다. 이로써 수세기에 걸친 和蘭 식민통치로 피폐되어 있는 인도네시아인들의 精神世界와 物質世界를 軍國日本은 장악하게 된다.
2. 植民地化 過程
1942년 3월 8일 公式的으로 和蘭의 降伏을 받아 내기 전 1942년 1월 10일 칼리만탄(Kalimantan)의 타라칸(Tarakan)에 進駐한 이래로 1942년 3월 17일 西部 수마트라(Sumatera) 전 지역을 장악할 때까지 軍國日本의 군대는 인도네시아 각 방면으로 侵攻하기 시작한다. 저항이 全無한 상황에서 日本은 和蘭軍으로부터 인도네시아의 통치권을 이양 받게 되며 “太平洋戰爭”에서 日本이 패망할 때까지 인도네시아인들은 다시 피식민지인의 족쇄를 차게 된다.
日本은 인도네시아를 3等分하여 陸軍과 海軍의 관할 하에 식민통치를 시작한다. 자와(Jawa, 마두라(Madura) 섬 포함) 지역은 자카르타(Jakarta)에 中心을 두고 있는 육군이 관장하고 수마트라지역은 북낏띵기(Bukittinggi)에 중심을 두고 있는 육군이 관장하게 된다. 또한 칼리만탄, 술라웨시(Sulawesi), 누사뜽가라(Nusa Tenggara), 말루쿠(Maluku), 이리안(Irian) 지역은 마카사르(Makasar)에 중심을 두고 해군이 관할하게 된다.
인도네시아 진주 초기, 日本은 인도네시아인들의 獨立에 대하여 肯定的인 태도를 보였으며, 같은 아시아 민족으로서 兄弟愛를 강조하였다. 모든 정치범은 석방되었으며 인도네시아 국기(Sang Merah Putih) 게양 및 인도네시아 국가 연주도 묵인했으며 結社의 자유도 허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임적인 日本의 통치 행태는 오래지 않아 强權統治로 표변하기 시작하였다. 모든 정치 집회 금지를 발표한 후 1942년 3월 20일 결사의 자유 및 외국 라디오 聽取 금지까지 실시하게 된다.
반면에 인도네시아 민중에 강력한 지지 기반을 갖고 있는 이슬람 敎團의 회유책으로서 日本은 1942년 7월 13일 인도네시아 이슬람 協議會(Majelis Islam Indonesia)의 활동 재개를 허용했으며 이 협의회는 1943년 10월 24일 MASYUMI(Majelis Suro Muslimin Indone냠)로 개칭, 활동을 계속하게 된다. 또한 이슬람학교는 그대로 존속시켜 수업이 이루어질 수 있게 허용하였다.
1942년 4월부터 日本은 “3A運動”을 일본인 宣傳 전문가 쉬미즈(淸水), 인도네시아인 샴수딘(Syamsudin)과 수카르죠 위르요프라노토(Sukarjo Wiryopranoto)가 이끄는 “大아시아 靑年團”(Pemuda Asia Raya) 조직을 통하여 全 자와(Jawa) 지역에서 실시하게 된다. “3A運動”은 日本이 ‘아시아의 指導者’, ‘아시아의 保護者’, 그리고 ‘아시아의 빛’이라는 슬로건 아래 日本의 전쟁을 위하여 인도네시아인들을 징집하며, 아시아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보호하면서 자와(Jawa)의 모든 사회조직, 문화, 종교를 변화시킨다는 목적 하에 추진하게 된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에 진주 후 오래지 않아 표변한 日本의 태도에 대하여 염증과 공포를 느끼기 시작한 인도네시아인들의 非協助, 無關心속에서 ‘3A運動’은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日本의 식민통치에 대하여 인도네시아인들은 크게 두 개의 집단으로 나뉘어지게 된다. 즉, 日本에 協助하면서 인도네시아 獨立運動을 추진한다는 집단과 철저하게 非妥協, 不服從으로 일관한다는 집단으로 구분되게 된다. 수카르노(Sukarno)와 핫타(Hatta)가 주도하여 1942년 3월 창설된 PUTRA(Pusat Tenaga Rakyat)는 日本統治에 협조하면서 인도네시아 독립의 길을 모색하게 되며 아미르 샤리푸딘(Amir Srarifudin)과 수탄 샤흐리르(Sutan Shahrir)가 이끄는 집단은 制度圈 밖에서 비타협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太平洋戰爭”의 終盤에 접어들면서 점차 敗色이 짙어지자 日本은 인도네시아로부터 각종 軍需物資뿐만 아니라 식량 등 주민들의 기본적인 생활물자까지도 수탈, 과다한 占領通貨(軍票)를 발행하여 심각한 인플레이션(inflation)을 야기 시켰다.
또한 日本은 각종 군사 및 보조 병력을 양성하여 최후의 一戰에 대비, 수많은 인도네시아 주민들을 여러 군사 시설 공사에 강제로 동원, 막대한 희생을 치르게 한다. 1943년 10월 日本은 PETA(Pembela Tanah Air)를 결성, 인도네시아인들을 準 군사단체로 조직화 하였으며 14세에서 25세까지 청년층으로 ‘靑年團’과 25세 이상 장년층을 중심으로 ‘警防團’을 결성, 전쟁 수행의 한 방편으로 삼았다. 또한 1943년 4월에는 ‘兵士補助員’ 제도가 실시되어, 日本의 육군과 해군에 편입되었다.
IV. 日本의 對 인도네시아 公用語 政策
1. 和蘭語 말살 정책
軍國日本은 인도네시아를 장악한 후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분야에 깊숙이 내재되어 있는 서구의 영향, 특히 수세기에 걸친 화란 식민통치의 잔재를 제거하는데 주력하게 되며 和蘭語 역시 그 예외는 아니었다. 그 조치로서 인도네시아인들 사이에서 和蘭語와 당시 적대국인 미국, 영국의 영어 사용을 금지시켰고, 인도네시아어와 日本語의 사용을 독려하였다.
日本軍政 당국은 일본의 달력을 공적 목적으로 수입, 인도네시아에 배포하였고 유럽인들의 동상이 그 자리에서 끌어 내려지고 거리의 명칭도 새롭게 바뀌게 되었다. 많은 和蘭語 교사들이 체포, 구금 되었으며 和蘭에 協助했던 인도네시아인 교사들도 그 자리에서 逐出되었다. 이는 잠정적이었지만 인도네시아에서 교육의 부재가 초래되는 결과를 가져 왔다.
和蘭 및 西歐人의 자녀와 인도네시아인 자녀들을 선별하여 받아 드렸던 사립학교를 포함한 二重技能의 학교제도는 폐지되었다. 日本은 초등교육 기관을 國民學校로 개칭하고 교육 연한을 6년제로 정하는 한편 중, 고등학교의 학제도 각각 3년씩 정하였다. 학교수업을 위한 언어로서 日本은 인도네시아어와 일본어를 지정했고 학생들은 낯 설은 일본어에 매달리게 되며 화란어와 영어는 철저히 배척되었다. 이러한 화란어, 영어의 배척은 관련 서적의 유통 금지까지 확산되었다. 이는 日本이 인도네시아인에 대하여 서적을 통한 필요한 고등 군사훈련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일본어라는 새로운 언어 습득에 대한 인도네시아인들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도 교육 분야에 있어 日本化 정책은 일본어를 중심으로 진척되었으며 이는 일본어 학습이 촉진되는 결과를 가져 왔다. 반면에 화란어 및 영어는 通用語(Lingua franca)로서의 기능은 짧은 시간 내에 사라졌다. 또한 초등학교 때부터 일본의 동화, 신화, 예절 등을 일본어로 교육시켰으며 학교에선 그것에 대한 학생들의 이해도를 측정하는 경연, 시험이 실시되었다. 이는 인도네시아인들 심성에 내재되어 있는 화란 및 서구의 흔적을 제거하면서 인도네시아인들에 대한 일본화의 첫 걸음이라는 목적 하에 추진되었다. 그 예로서 학교 및 마을의 擴聲器를 통하여 실시하는 집단체조 및 神社遙拜를 통하여 軍國日本의 획일적인 통치방법은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전달되었으며 수세기에 걸친 화란의 식민통치의 잔영은 철저하게 인도네시아 사회로부터 지워지기를 강요하였다. 화란어를 사용하는 인도네시아인은 같은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배척당하게 되었으며 어떤 과도기 및 전환기를 거치지 않고 화란어는 인도네시아인 기억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그 자리를 일본어가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화란어는 인도네시아에 있어서 外來 借用語 音韻表記에 있어 큰 영향을 남겼으며 몇몇의 語彙를 인도네시아의 한 부분으로 남기게 되었다.
2. 인도네시아어의 대체
인도네시아인을 앞세운 日本의 反 西歐 캠페인은 모든 인도네시아 민중으로 하여금 反
화란 감정을 더욱 굳게 하여 대중 속에 인도네시아 의식을 전파하는데 공헌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당시 인도네시아이들에게 낯 설은 일본어를 대신하여 日本의 선전을 위한 언어 수단으로 인도네시아어가 사용되어 국어로서의 위치가 향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관공서의 공용어로는 화란어 대신 인도네시아어를 사용하였고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인도네시아어의 사용 권장은 국어로서의 인도네시아어 보급에 큰 도움을 주게 된다.
모든 인도네시아 공무원, 회사원들에게 인도네시아어 및 일본어 사용을 의무화하였으며 이러한 인도네시아 보급 운동은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생경한 일본어 습득 과정의 시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인도네시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한편 그 때까지 사용되었던 멀라유 아랍(Melayu Arab) 문자를 사용한 인도네시아어는 日本에 의해 日本文字(カタカナひちがな)로 표기 강요되었으나 높은 文盲率의 벽으로 인하여 이 강요는 학교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인도네시아인의 인력 동원 및 효과적인 식민통치를 위하여 日本 軍政當局은 인도네시아어 사용을 권장하였으며 그것은 인도네시아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民族感情을 하나로 결집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인도네시아어는 동포애를 상호 느낄 수 있는 하나의 구심점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는 각기 상이한 종족어로 격리되었던 인도네시아인들의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물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반면에 일본군정 당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어의 보급은 인도네시아 학생, 공무원, 일부 계층의 지식인들 사이에 보급되었을 뿐, 전체 인도네시아인들에게는 확산되지 못하였다. 그 이유로서는 첫째, 당시 인도네시아인들의 높은 문맹율을 들 수 있으며 둘째, 인도네시아의 지리적 특성을 들 수 있다. 즉 많은 군도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 전역에 효과적인 일본어 보급은 오랜 시간을 필요하게 하였으며 상대적으로 일본의 통치 기간은 단기간이었다. 셋째, 인도네시아이들은 그들의 다양한 종족어를 통일 시켜 표기할 수 있는 고유 公用文字가 없었으며, 넷째, 문법 체계 등 상이한 일본어의 습득에 많은 어려움이 따랐기 때문이다. 다섯째, 화란보다 상대적으로 짧았던 인도네시아에 대한 통치 기간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를 전쟁 수행에 필요한 원료 공급지로 여긴 日本의 통치 방식 채택이 더 큰 요인으로 볼 수 있다. 즉, 인력의 징용, 물자의 징발을 우선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종주국어 보급운동 등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문화 식민지정책을 실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도 日本이 유숩 자림(Yoesoef Zarim) 인솔 하에 세운 BOMPA(Badan Oentoek Membantoe Pertahanan Asia)는 전체 인도네시아어의 어휘를 정리, 행정어 및 공용어 체계를 세웠고 이는 인도네시아아가 국어로서의 위치 확보와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과정에 눈에 보이지 않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日本에 의한 인도네시아 점령 기간 동안의 공용어는 인도네시아어와 일본어가 혼재되어 사용된 시기였으며 인도네시아어가 국어로서 자리를 잡는 도약기라고 말할 수 있다.
V. 和蘭 및 日本 植民統治가 인도네시아어에 미친 影響
다른 서구 열강들이 그들의 식민지에서 피식민지 국어를 말살시키면서 식민지 종주국어를 강요했던 사실과는 다르게 350여 년 간의 對 인도네시아 식민 통치에 있어 간접 통치 방법과 폐쇄적인 화란어 보급 정책을 포함한 원주민들의 교육에 대한 방임적이고 불간섭 태도는 인도네시아인들의 높은 문맹화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양한 종족어를 포함, 인도네시아어를 보존, 지속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는 측면도 있음을 말할 수 있다.
이는 부퀘(Bousqet)가 “화란인은 그들의 언어가 식민지 원주민에게 일반화되기를 원하지 않았다”라고 내린 정의는 크게 과장된 것이 아니며 인도네시아 통치기간 동안에 화란 식민정부가 견지한 화란어 정책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인들에게는 화란어는 분명 母國語가 아니고 식민 종주국어이긴 했지만 식민지 체제 내에서 立身揚名을 위해서는 필요 불가결한 언어였다. 따라서 화란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도네시아인의 증가는 자연히 인도네시아어 어휘에 화란어가 借用되는 현상이 보이기 시작했으며 그 借用된 화란어는 점차 인도네시아어화되기 시작했다.
인도네시아어사전에 수록된 외래 차용어 어휘 중 화란어가 직접 차용된 것은 약 60여개가 발견되고 있으며 특히 인도네시아어에 있어 외래 차용어 표기 방법 중, 音節의 변화는 화란어의 音韻表記 방법을 따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圖表1) 和蘭語가 直接 借用된 語彙
순서 화란어 인도네시아어 뜻
1. agenda agenda 記錄書
2. adjudan ajudan 측근 (참모)
3. acconutant akuntan 會計士
4. album album 앨범
5. akte akte 公文書
6. apple apel 사과
7. apothe다 apotek 藥局
8. apotheker apoteker 藥師
9. asbak asbak 재떨이
10. bankroet bankrut 破産
11. belanco belanko 餘白
12. benzine bensin 揮發油
13. bioscoop biskop 劇場
14. bon bon 領收證
15. brochure brosur 小冊子
16. busi busi 플러그 (자동차 부품)
17. dekan dekan 大學學長
18. dialoog dialog 對話
19. document dokumen 文書
20. docent dosen 敎授
21. dosis dosis 藥處方
22. cursus kursus 講義
23. chauffeur sopir 運轉士
24. economie ekonomi 經濟
25. gang gang 골목
26. gordijn gorden 커텐
27. granaat granat 수류탄
28. halte halte 停留場
29. hengsel engsel 경첩
30. horloge arloji 時計
31. hotel hotel 호텔
32. individu individu 個人
33. kathedraal katederal 聖堂
34. kaartje karcis 票
35. keizer kaisar 皇帝
36. kool kol 양배추
37. koffer kopor 가방
38. koers kurs 率
39. kwitantie kwitansi 領收證
40. loket loket 賣票所
41. mandaat mandat 勅令
42. merk merek 商標
43. nul nol 零
44. notaris notaris 公證人
45. netto netto 正量
46. onderdeel onderdil 部品
47. pakket paket 小包
48. parkeer parkir 駐車
49. postwissel poswesel 郵便換
50. rekening rekening 計座
51. oom oom 아저씨
52. schroef sekrup 나사 돌리개
53. spandoek spanduk 懸垂幕
54. spontaan spontan 自發的
55. tas tas 가방
56. tante tante 아주머니
57. thee teh 茶
58. tomaat tomat 토마토
59. toestel tustel 寫眞機
한편 日本 식민통치정부는 그들의 행정력과 교육을 통하여 일본어의 보급에 힘을 기우렸으나 결국 당시 인도네시아인들의 높은 문맹율과 무관심으로 효과적인 결실을 얻지 못하였다. 이는 화란보다는 상대적으로 짧은 식민통치 기간과 문화적인 침탈 보다는 인도네시아를 전쟁 수행에 따라 물자보급 기지로 간주한데 원인이 있다. 따라서 현재 인도네시아아에 대한 일본어의 영향은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다. 다만 日本 통치 시 인도네시아인들에게 일본어를 통한 군사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된 것과 인력 징용에 따른 어휘 즉, 로무샤(romusya, 勤勞者), 겐베다이(genpedai, 憲兵隊) 등과 같은 군사용어 몇 개 정도와 본자이(bonzai, 盆栽), 사쿠라(sakura, 벚꽃) 등이 전후 세대들에게 의해 구사될 뿐이다.
VL. 結語
350여 년간에 걸친 식민통치와 3년 반의 日本의 통치 기간을 거친 인도네시아에 있어서 공용어로서의 화란어와 일본어는 그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하였다. 그 이유로서는 복잡한 種族 構成, 그 종족만큼이나 많은 種族語 또한 군도국가라는 지리적 특성인 외견상의 조건이 크게 작용하였지만 무엇보다도 화란 식민통치정부의 愚民政策의 결과인 화란어 폐쇄정책으로 인한 화란어 확산 억제가 주원인으로 들 수 있다. 또한 간접 통치방식 채택으로 화란어의 제한이 철저하게 이루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화란 식민통치정부의 교육을 포함한 화란어 보급에 대하여 방임적 태도는 결국 인도네시아인들의 높은 문맹율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문맹화는 화란어가 공용어로서 인도네시아 사회에 자리 잡는데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양한 종족어를 포함한 인도네시아어는 宗主國語인 화란어의 영항권 밖에서 보존, 지속될 수 있었다.
화란보다 상대적으로 짧은 통치 기간으로 인도네시아에 진주한 日本은 인도네시아인들의 높은 문맹율과 일본어에 대한 원주민들의 냉담한 반응과 무관심으로 인하여 하나의 공용어로서의 위치를 확보하지 못한 채 “太平洋戰爭”에서 敗戰과 함께 인도네시아에서 철수하게 된다. 그러나 日本의 통치기간 동안 인도네시아어의 보급 운동은 인도네시아어가 國語로서의 위치를 확보하는데 影響을 남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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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 : 言語와 言語學 제 17집 (1991년 12월) (한국외국어대학교 언어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