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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광명최승왕경 제2권
3. 분별삼신품(分別三身品)
그때 허공장(虛空藏)보살마하살이 대중 가운데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는 합장하고 공경하며 부처님 발에 정례하고, 훌륭하고 미묘한 금과 보배로 된 꽃과 보배 당기[幢]ㆍ번기[幡]ㆍ일산[蓋]을 공양 올리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은 모든 부처님의 매우 깊고 비밀한 법을 어떻게 닦아 행하여야 합니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 잘 사유하고 기억하라. 내가 그대를 위해 분별하여 해설해 주겠노라.
[모든 여래의 세 가지 몸]
선남자야, 모든 여래에게는 세 가지 몸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화신(化身)이고,
둘째는 응신(應身)이며,
셋째는 법신(法身)이니라.
이러한 세 가지 몸이 구족하여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받아 지닌다.
만일 이것을 똑똑히 안다면 생사의 윤회에서 재빨리 벗어나리라.
어떻게 하는 것이 보살이 화신을 똑똑히 아는 것인가?
선남자야, 여래는 옛날 수행하는 단계에 있을 때 온갖 중생을 위하여 가지가지 법을 닦았다.
이렇게 닦아 익혀서 수행이 원만해졌을 때 닦아 익힌 힘으로 인해 큰 자재를 얻었고,
자재의 힘으로 인해 중생의 마음과 중생의 행과 중생의 경계를 그대로 모두 다 알아 분별할 수 있었으며,
때를 기다리지도 않고 때를 놓치지도 않고 곳에 맞게, 또 때에 맞게, 행에 맞게, 설하는 법에 맞게 여러 가지 몸을 나타내었으니,
이것을 화신(化身)이라 한다.
선남자야, 어떤 것이 보살이 응신을 똑똑히 아는 것인가?
이른바 모든 여래께서는 보살들이 모든 것을 통달하도록 진제(眞諦)를 말씀하신다.
그들로 하여금 생사와 열반이 한 맛[一味]인 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신견(身見)을 가진 중생의 두려움과 기쁨을 없애기 위하여,
가없는 불법을 위한 그 바탕을 짓기 위하여,
실상(實相) 그대로 여여(如如)와 여여의 지혜[如如智]에 상응하려는 근본 원력(願力) 때문에 이 몸을 나타내게 되는데,
32상(相)과 80종호(種好)를 갖추고 등 뒤에는 둥근 광명을 갖춘다.
이것을 응신(應身)이라고 한다.
선남자야,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이 법신을 똑똑히 아는 것인가?
모든 번뇌 등의 장애를 없애 버리고 모든 착한 법을 갖추고는 오직 여여와 여여의 지혜만을 가지는데,
이것을 법신(法身)이라 한다.
앞의 두 가지 몸은 이름을 붙여 있다[有]고 하는 것이라면,
이 세 번째 몸은 참으로 진실하게 있다는 것이고 앞의 두 몸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왜냐 하면, 법의 여여를 여의고 분별 없는 지혜[無分別智]를 떠나서는 어떤 부처님에게도 별다른 법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은 지혜를 갖추고 온갖 번뇌를 죄다 끊어 청정한 부처님의 지위[佛地]를 얻은 것이다.
이런 까닭에 법의 여여와 여여의 지혜는 모든 부처님의 법을 포섭하느니라.
또 선남자야, 모든 부처님께서는 나와 남을 이롭게 하여 마지막 경지에 이르시니,
나를 유익하게 하는 것은 법의 여여요,
남을 유익하게 하는 것은 여여의 지혜이다.
나와 남을 유익하게 하는 일에 있어 자재를 얻어 가지가지 가없는 활용[用]을 성취한 까닭에, 온갖 부처님의 법을 분별하는 데 있어 한량없고 가없는 가지가지 차별이 있느니라.
선남자야, 마치 망령된 생각에 의지하여 가지가지 번뇌를 말하고 가지가지 업용(業用)을 말하고 가지가지 과보를 말하는 것과 같으니라.
이렇게 법의 여여에 의지하고 여여의 지혜에 의지하여 가지가지 부처님의 법을 말하고, 가지가지 연각의 법을 말하고, 가지가지 성문의 법을 말한다.
법의 여여에 의지하고 여여의 지혜에 의지하여 온갖 부처님의 법을 자재하게 성취한다.
이것을 제일가는 생각할 수 없는 일[不可思議]이라 하느니라.
마치 허공에 그림을 그려서 장식거리를 만든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법의 여여에 의지하고, 여여의 지혜에 의지하여, 부처님의 법을 성취한다는 것도 또한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니라.
선남자야, 법의 여여와 여여의 지혜, 이 두 가지가 구별이 없어서 자재함을 얻고 사업(事業)을 성취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선남자야, 마치 부처님께서 열반에 들어서 원(願)이 자재하므로 가지가지 사업을 다 성취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법의 여여와 여여의 지혜에 자재하게 사업을 이루는 것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다시 보살마하살은 심식(心識)의 작용이 없는 정[無心定]에 들었다가도 이전의 원력에 의하여 선정(禪定)에서 일어나 모든 사업을 짓는다. 이러한 두 법은 분별이 없이 자재하게 일을 이루느니라.
선남자야, 마치 해와 달이 분별이 없고, 또한 물과 거울이 분별이 없고, 광명이 또한 분별이 없어서 세 가지가 화합하여 그림자가 생기는 것과 같으니라.
이와 마찬가지로 법의 여여와 여여의 지혜도 분별이 없이 원력의 자재를 쓰는 까닭에 중생들이 응화신(應化身)을 나타낸다고 느끼는 것은, 해와 달의 그림자가 화합하여 나타나는 것과 같으니라.
또 선남자야, 마치 한량없고 가없는 물과 거울이 빛에 의지하는 까닭에 공(空)한 그림자를 나타내어 가지가지 다른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니, 공이란 것은 곧 무상(無相)이다.
선남자야, 이와 마찬가지로 교화를 받은 모든 제자들은 바로 법신의 그림자다. 원력으로 말미암아 두 가지 몸에서 가지가지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지, 법신의 본 땅[法身地]에서는 아무런 달라진 모습이 없느니라.
선남자야, 이 두 몸에 의지하여 모든 부처님께서 유여열반(有餘涅槃)을 말씀하시고,
이 법신에 의지하여 무여열반(無餘涅槃)을 말씀하시느니라.
왜냐 하면, 온갖 이 밖의 나머지 법은 끝이 다하여 없어지는 까닭에, 이 세 몸에 의지하여 여러 부처님들께서는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두 가지 몸을 위한 까닭에 열반에 주저앉지 않고, 법신을 여의고는 따로 부처가 없느니라. 어째서 두 몸은 열반에 머물지 않는가?
두 몸은 붙인 이름이고, 실답지 아니한 것이다.
생각 생각에 나고 멸하며 정착하여 머무르지[定住] 않는 까닭이며,
자주자주 나타나서 정해져 있지 않은 까닭이다.
법신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두 몸은 열반에 머무르지 않고,
법신은 둘이 아니기 때문에 열반에 머무르지 않는다.
따라서 세 몸에 의지하여 무주처열반을 말씀하신 것이다.
[모든 범부의 세 가지 모습]
선남자야, 모든 범부에게는 세 가지 모습[三相]이 있는 까닭에, 얽매임[縛]이 있고 장애[障]가 있어서 세 가지 몸에서 멀리 떨어져 세 가지 몸에 이르지 못하느니라.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두루 집착하여 억측하는 모습[遍計所執相]이요,
둘째는 다른 것을 의지하여 일어나는 모습[依他起相]이요,
셋째는 성취하는 모습[成就相]이다.
이와 같이 이 모든 모습[相]을 능히 벗을 수 없는 까닭에, 멸해 없애지 못하는 까닭에, 깨끗하게 하지 못하는 까닭에, 세 가지 몸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런 세 가지 모습을 능히 벗어버리고, 멸해 없애 버리고, 깨끗하게 하는 까닭에 세 가지 몸을 갖추셨느니라.
[모든 범부의 세 가지 마음]
선남자야, 모든 범부인 사람은 능히 이 세 가지 마음을 덜어 없애지 못했으므로 세 몸에서 멀리 떨어져 이르지 못하나니,
무엇이 셋인가?
첫째는 감관에 의하여 생기는 마음이요,
둘째는 번뇌를 일으키는 마음이며,
셋째는 근본 마음이다.
모든 소견을 바로잡는 도[伏道]에 의하여 감관에 의해 생기는 마음이 다하고,
번뇌를 끊는 도[法斷道]에 의하여 번뇌를 일으키는 마음이 다하며,
가장 훌륭한 도[最勝道]에 의하여 근본 마음이 다하느니라.
감관에 의하여 생기는 마음이 멸해 없어지면 화신(化身)을 나타낼 수 있고,
번뇌를 일으키는 마음이 멸해 없어지면 응신을 나타낼 수 있으며,
근본 마음이 멸해 없어지면 법신에 이르게 되느니라.
그러므로 여러 여래들께서는 세 가지 몸을 갖추시는 것이다.
선남자야, 모든 부처님께서는,
첫째 몸에서 모든 부처님과 일[事]을 같이하고,
둘째 몸에서 모든 부처님과 뜻을 같이하고,
셋째 몸에서 모든 부처님과 몸[體]을 같이 하시느니라.
선남자야, 부처님의 첫째 몸은 중생의 뜻이 여러 가지인 까닭에 그에 따라 가지가지 모습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많다[多]고 말한다.
부처님의 둘째 몸은 제자(弟子)가 한 뜻이므로 한 모습[一相]만 나타낸다. 그러므로 하나라고 말한다.
부처님의 셋째 몸은 온갖 모습을 초월하여 상(相)에 집착하는 경계가 아니므로 하나도 아니요 둘도 아니[不一不二]라고 말하느니라.
선남자야, 이 첫째 몸은 응신에 의지하여 나타나게 되고,
둘째 몸은 법신에 의지하여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이 법신이야말로 진실하게 있는[眞實有] 것이며 의지하는 곳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몸은 어떤 의미에서는 영원하다[常]고 말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무상하다[無常]고 말한다.
화신은 언제나 법륜을 굴리면서 곳곳에서 인연을 따라 나타나면서 방편에 의해 계속되고 끊어지지 않으므로 영원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근본이 아니기 때문에 큰 활용[大用]을 갖추었으되 전부는 나타나지 않으므로 무상하다고 말한다.
응신은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계속하여 끊어짐이 없었고, 모든 부처님의 불공(不共)의 법을 잘 거두어 갖기 때문에 중생이 다함이 없고 용(用)도 다함이 없다. 그러므로 영원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근원이 아니므로 용을 갖추었으되 전부는 나타나지 않으므로 무상하다고 말한다.
법신은 행법(行法)도 아니요, 다른 모습이 없고, 근본인 까닭에 마치 허공과 같다.
그러므로 영원하다고 말한다.
선남자야, 분별 없는 지혜를 여의고 더 훌륭한 지혜[勝智]가 없으며, 법의 여여를 여의고 더 훌륭한 경계[勝境界]는 없다.
이 법의 여여와 지혜의 여여, 이 두 가지는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다.
이런 까닭에 법신은 지혜가 청정하고 적멸[滅]이 청정한 까닭에, 두 가지가 청정하다.
이러므로 법신은 청정함을 갖추었느니라.
또 선남자야, 세 가지 몸을 분별하는 데 네 가지 다름이 있다. 화신으로서 응신이 아닌 것, 응신으로서 화신이 아닌 것, 화신이며 또한 응신인 것, 화신도 아니고 응신도 아닌 것이다.
무엇이 화신으로서 응신이 아닌 것인가?
말하자면, 모든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도 원력의 자재로써 인연을 따라 중생을 유익하게 하나니 이 이름이 화신이다.
무엇이 응신으로서 화신이 아닌 것인가?
이것은 10지(地) 이전의 몸이다.
무엇이 화신이며 또한 응신인가?
말하자면 유여열반에 머물러 있는 몸이다.
무엇이 화신도 아니요 응신도 아닌 것인가?
말하자면 그것은 법신이니라.
선남자야, 이 법신은 두 가지가 없는 것으로 인하여 나타나는데,
두 가지가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법신에는 상(相)과 상처(相處) 둘이 다 없는 것이다.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며,
하나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며,
수(數)도 아니요 수 아닌[非數] 것도 아니며,
밝음도 아니요 어두움도 아니다.
이와 같이 여여의 지혜는 상과 상처를 보지 않으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보지도 않으며,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다고 보지도 않으며,
수도 아니고 수가 아닌 것도 아니라고 보지도 않으며,
밝음도 아니요 어두움도 아니라고 보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꼭 알아두어라. 경계가 청정하고, 지혜가 청정하여 분별할 수가 없으며 중간도 없다는 것이다.
멸도(滅道)의 근본인 까닭에 이 법신에서는 여래의 여러 가지 사업을 나타내느니라.
선남자야, 이 몸의 인연ㆍ경계ㆍ처소ㆍ과보와 의지처는 본래 생각하기 어려운 까닭에,
만일 이 뜻을 알아 통달하면 이 몸은 곧 대승이며, 이것이 여래의 성품이며, 이것이 여래장(如來藏)이다.
이 몸에 의지하여 초심수행지(初心修行地)의 마음을 발하여 불퇴지(不退地)의 마음을 나타낼 수 있고,
또 일생보처(一生補處)의 마음을 나타내고,
금강의 마음과 여래 마음을 모두 나타내어,
한량없고 가없는 여래의 묘한 법을 모조리 나타내느니라.
이 법신에 의지하여 가히 생각할 수도 없는 마하삼매(摩訶三昧)를 얻고, 이 법신에 의지하여 온갖 큰 지혜를 나타낼 수 있다.
그러므로 두 몸은 삼매에 의지하고 지혜에 의지하여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법신은 자체에 의지하여 영원하다[常]고 말하고 나[我]라 말하며,
큰 삼매에 의지하여 즐거움[樂]이라 말하고,
큰 지혜에 의지하여 청정하다[淸淨]고 말한다.
그래서 여래께서는 늘 계시면서 자재하고 안락하고 청정한 것이다.
큰 삼매에 의지하여 선정수능엄(禪定首楞嚴) 등 온갖 선정과, 대법념(大法念) 등의 온갖 염처(念處)와 대자ㆍ대비ㆍ온갖 다라니ㆍ온갖 신통ㆍ온갖 자재ㆍ온갖 법을 평등하게 포섭하는 이러한 부처님의 법을 모조리 나타내느니라.
이 큰 지혜에 의지하여 10력(力)ㆍ4무소외(四無所畏)ㆍ4무애변(四無礙辯)ㆍ18불공법(不共法) 등 온갖 희유하고 생각할 수 없는 법을 모조리 나타내느니라.
마치 여의보주(如意寶珠)에 의지하여 한량없고 가없는 가지가지 진귀한 보배가 모조리 나타날 수 있는 것과 같으니라.
이와 같이 큰 삼매의 보배에 의지하고 큰 지혜의 보배에 의지하여, 가지가지 한량없고 가없는 모든 부처님의 묘한 법을 능히 낼 수 있느니라.
선남자야, 이와 같이 법신의 삼매와 지혜는 온갖 상(相)을 초월하여 상에 집착하지 않으므로 분별할 수 없느니라.
상(常)도 아니요 단(斷)도 아니니 이것을 중도(中道)라고 한다.
비록 분별이 있다고 해도 본체[體]에는 분별이 없고,
비록 세 가지라는 숫자[數]는 있으나 세 가지 본체는 없다.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으며,
마치 꿈이나 허깨비와 같아 붙잡힐 것도 없고 또 붙잡을 수도 없다.
법의 본체는 여여하니 이것이 해탈하는 곳이며,
죽음의 경계를 벗어나고 삶과 죽음의 어둠을 초월하는 것이다.
온갖 중생은 능히 닦아 행하지 못하며 능히 이르지도 못하는 곳이요,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만이 머무시는 곳이니라.
선남자야, 마치 어떤 사람이 금을 얻고자 소원하여 곳곳으로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금광(金鑛)을 찾았다고 하자.
그는 이 금광을 찾은 뒤에 곧 부수어서 가장 좋은 것을 용광로[爐] 속에 넣고 녹여 단련하여 깨끗한 순금을 얻어서는, 마음대로 주물러 여러 가지 고리와 팔찌, 가지가지 몸을 꾸미는 노리개를 만들었다.
이럴 때, 비록 여러 가지로 사용하지만 금의 성질은 달라지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또 선남자야,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훌륭한 해탈을 구하여 세상의 착한 일을 닦아 행하고 부처님과 그 제자들을 뵙게 되었다고 하자.
가까이 한 뒤에 그들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선(善)이며 어떤 것이 선하지 않은 것이며,
어떤 것이 바르게 닦아 청정행(淸淨行)을 얻는 것입니까?’
모든 부처님 여래와 제자 대중은 저의 질문을 받을 때,
‘이 선남자 선여인이 청정함을 구하고자 하고 바른 법을 듣고자 하는 구나’라고 생각하고는,
곧 그를 위해 설법하여 그를 깨우쳐준다.
[10지와 여래지]
그러면 그들은 설법을 듣고 나서 바른 생각으로 지니고,
마음을 발하여 닦고 행하여 정진의 힘을 얻어 게으름의 장애[障]를 제거하고 온갖 죄를 없애버리며,
모든 배움의 처소에서 존중하지 않는[不尊重] 생각을 여의고,
들뜨거나 후회하는[掉悔] 마음을 쉬어서 초지(初地)에 들어간다.
초지(初地)의 마음에 의지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데 장애[障]가 되는 것을 없애버리고 2지(地)에 들어간다.
이 지(地)에서는 번뇌의 핍박을 받지 않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을 없애버리고 3지에 들어간다.
이 지에서는 마음을 부드럽고 깨끗이 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을 없애버리고 4지에 들어간다.
이 지에서는 훌륭한 방편에 장애가 되는 것을 없애버리고 5지에 들어간다.
이 지에서는 진속(眞俗)을 보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을 없애버리고 6지에 들어간다.
이 지에서는 행상(行相)을 보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을 없애버리고 7지에 들어간다.
이 지에서는 멸상(滅相)을 보지 않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을 없애버리고 8지에 들어간다.
이 지에서는 생상(生相)을 보지 않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을 없애버리고 9지에 들어간다.
이 지에서는 여섯 가지 신통[六通]에 장애가 되는 것을 없애버리고 10지에 들어간다.
이 지에서는 소지장(所知障)을 없애버리고 근본심(根本心)을 떨어버리고는 여래지(如來地)에 들어간다.
[세 가지 깨끗한 것]
여래지는 세 가지가 깨끗한 것을 말미암아 극히 청정한 것이라고도 한다.
무엇이 셋인가?
첫째는 번뇌가 깨끗해지고,
둘째는 괴로움이 깨끗해지며,
셋째는 모습이 깨끗하다.
마치 진금(眞金)을 녹이고 단련하면 녹여 두드린 다음에는 티끌과 때가 다시는 없는 것과 같다.
금의 성질이 본래 청정함을 나타내기 위한 까닭에 금의 본체를 청정하다고 하며, 금이 없어졌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마치 흙탕물이 맑게 가라앉아 깨끗해져서 다시는 더러운 찌꺼기가 없는 것과 같으니,
물의 성질이 본래 깨끗한 것을 나타내기 위한 까닭에 물이 없어졌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법신도 번뇌를 여의고 괴로움[苦]과 그 발생[集]을 없애버리면 다시는 아무런 습기[習]도 없게 되는데, 부처 성품이 본래 청정했던 것을 나타내기 위한 까닭에 본체[體]가 없어졌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마치 허공이 연기ㆍ구름ㆍ티끌ㆍ안개에 가렸다가 가렸던 것을 걷어치우면 이 공계(空界)가 깨끗해지는데, 이때 허공이 없어졌다고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법신에 온갖 괴로움이 다 없어졌으므로 깨끗하다고 말하는 것이요, 본체가 없어졌다고는 말하지 않느니라.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자다가 꿈속에서 큰 강물에 그의 몸이 떠내려가다가 손을 옮기고 발을 움직여 물결을 가로질러 헤엄쳐서 저쪽 언덕에 이르렀다하자, 그것은 그의 몸과 마음이 게으르지 않은 탓이었다.
꿈에서 깨어나면 물도, 이쪽과 저쪽 언덕도 따로 있는 것을 볼 수 없지만 마음까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나고 죽는다는 망령된 생각이 꺼져 없어지면 이 청정함을 깨닫게 되는데, 그렇다고 깨달음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와 같이 법계의 온갖 망령된 생각이 다시는 나지 않는 까닭에 청정하다고 말하는 것이요, 모든 부처님께서 그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또 선남자야, 이 법신은 혹장(惑障)이 깨끗하여 응신을 능히 나타내고, 업장(業障)이 깨끗하여 화신을 능히 나타내며, 지장(智障)이 깨끗하여 법신을 능히 나타내느니라.
마치 허공을 의지하여 번개가 생기고, 번개를 의지하여 빛이 나는 것과 같으니라.
이와 마찬가지로 법신에 의지하여 응신을 나타내고,
응신에 의지하여 화신을 나타내고,
성품이 깨끗함에 의지하여 법신을 나타내며,
지혜가 깨끗하여 응신을 나타내고,
삼매가 깨끗하여 화신을 나타내나니,
이 세 가지 깨끗함은 이 법의 여여며, 다르지 않는 여여며, 한 맛의 여여며, 해탈의 여여며, 구경(究竟)의 여여다.
이런 까닭에 모든 부처님의 본체는 다를 바가 없느니라.
선남자야, 만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부처님께서는 나의 큰 스승이다’라고 말하고 이렇게 결정적으로 믿는다면,
이 사람은 곧 마땅히 깊이 마음으로 부처님의 몸은 다름이 없다고 똑똑히 알리라.
선남자야, 이 뜻으로써 모든 경계에서 부정한 생각을 다 끊어버리고, 곧 저 법에 두 가지 모습[相]이 없고, 또한 분별이 없이 성스럽게 닦아 행하는 바라고 알리라.
여여(如如) 그것에 두 가지 모습이 없고 바로 닦아 행하는 까닭으로, 이와 같이 온갖 장애를 모조리 멸해 없앨 것이다.
여여한 온갖 장애가 없어지면 그에 따라 법의 여여와 여여의 지혜가 가장 깨끗해지고, 여여한 법계의 바른 지혜가 깨끗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온갖 자재를 구족하고, 거두어 가짐을 다 성취하고, 온갖 장애를 멸해 없애버린다.
모든 장애가 깨끗함을 얻으므로 이것을 진여(眞如)의 정지(正智), 진실한 모습[眞實相]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보는 것, 이것을 성견(聖見)이라고 한다.
이것을 곧 진실하게 부처를 보는 것이라고 한다.
왜냐 하면 실답게 법의 진여를 볼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께서는 널리 온갖 부처님을 능히 보느니라.
왜냐 하면 성문과 연각은 벌써 삼계를 벗어나서 진실한 경계를 구하고 있지만 능히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성인들도 알아보지 못하니 온갖 범부들은 모두 의혹을 내고, 전도된 분별을 일으켜 제도되지 못하는 것이다.
마치 토끼가 바다에 떠 있다면 반드시 그 바다를 건너가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라.
그것은 힘이 적고 약한 까닭이니라.
범부도 또한 그러하여 법의 여여에 통달할 수 없느니라.
모든 부처님께서는 분별하는 마음이 없고 온갖 법에서 큰 자재를 얻고, 깨끗하고 깊은 지혜를 갖춘 까닭에 자기의 경계를 남과 같이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모두 부처님께서는 한량없고 가없는 아승기겁 동안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어렵게 행하시고 괴롭게 행하시어 바야흐로 가장 훌륭하여 비할 데 없고 생각할 수 없고 말의 경지를 초월하고 묘하게 고요하고 모든 두려움을 벗어난 그런 몸을 얻으신 것이다.
선남자야, 이렇게 법의 진여를 알아보는 이에겐 태어남‧늙음‧죽음이 없으며 목숨이 한이 없으며, 잠이 없고 또한 굶주림과 목마름이 없어 마음이 언제나 선정에 들어 흩어지거나 움직이는 일이 없느니라.
만일 여래에게 다투어 논의하는 마음을 일으킨다면 그는 곧 부처님을 능히 뵙지 못하리라.
모든 부처님의 말씀은 모두 이익이 되며,
그 말씀을 듣는 이는 해탈하지 않는 이가 없으며,
모든 나쁜 새나 짐승과 나쁜 사람과 나쁜 귀신과 만나지 않게 되며,
법을 들은 까닭에 과보가 다함이 없느니라.
그러나 모든 부처님께서는 무기(無記)의 일이 없다.
온갖 경계에 알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며,
생사와 열반에 다른 생각이 없다.
부처님께서 기(記)하신 것은 결정 아닌 것이 없느니라.
모든 부처님께서는 4위의(威儀) 가운데 지혜로써 모든 법을 거두어 가지지 않음이 없고,
자비로써 거두어 가지지 않음이 없고,
모든 중생을 이롭고 안락하게 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선남자야,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이 『금광명경』을 듣고 믿고 풀이하면 지옥ㆍ아귀ㆍ방생(傍生:畜生)ㆍ아소라의 길에 떨어지지 않고, 언제든지 인간이나 천상에 태어나되 하천한 데 태어나지 않고, 늘 모든 부처님께 친근함을 얻어서 바른 법을 듣고 받으며, 언제나 모든 부처님의 깨끗한 나라에 태어날 것이니라.
왜냐 하면 매우 깊은 이 법을 얻어들었기 때문이다.
이 선남자 선여인은 부처님께 벌써 알려졌고 수기(授記)되었으므로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나지 않으리라.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매우 깊고 미묘한 법을 한 번이라도 귓가를 스쳐 듣는다면 그는 부처님을 비방치 않고, 바른 법을 헐지 않고, 성중(聖衆)들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리라.
온갖 중생들 중 아직 선근을 심지 못한 이로 하여금 선근을 심게 하고, 이미 선근을 심은 이에게는 더욱 자라고 성숙하게 하는 까닭에, 온갖 세계에 있는 중생을 모두 권하여 6바라밀다를 닦게 하리라.”
그때 허공보살과 범왕ㆍ제석ㆍ4천왕ㆍ모든 하늘 대중들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는 합장하고 공경하여 부처님 발에 예를 올리고 부처님께 아뢰었다.
[경전의 네 가지 이익]
“세존이시여, 어디든 이러한 금광명왕의 미묘한 경전을 강설하는 곳이라면 그 나라에는 네 가지 이익이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 넷인가?
첫째, 국왕의 군사가 굳세고 강성해서 모든 원수나 대적할 이가 없고,
질병이 떠나가고, 목숨이 길어지며,
길하고 안락하여 바른 법이 드날릴 것입니다.
둘째는 왕후[中室]와 후비, 왕자, 모든 신하가 화합하고 즐거워하여 다투는 일이 없고,
아첨을 여의어서 임금에게 사랑을 받을 것입니다.
셋째는 사문 바라문과 여러 백성들이 바른 법을 닦아 행하여,
병이 없고 즐거우며, 잘못해 죽는 사람이 없고,
모든 복밭에서 모두 다 닦을 것입니다.
넷째, 일년 내내 4대(大)의 몸이 고르고 알맞으며,
언제나 모든 하늘의 신들에게 더욱 수호를 받으며,
자비 평등하여 상하고 해칠 마음이 없으며,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3보에게 귀의하여 공경하게 하고 깨달음의 행을 닦아 익히기를 원하게 됩니다.
이것이 네 가지 이익 되는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도 늘 이 경전을 널리 펴기 위하여 이 경을 지니는 사람이 사는 데 가서 따라 다니며 이익을 짓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선남자야, 그와 같이 하고 그와 같이 하여라.
너희들은 반드시 부지런한 마음으로 이 경을 유포해야 한다.
곧 바른 법으로 하여금 오래도록 이 세상에 머무르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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